[김천령의 한국 정원 이야기26] 우암 송시열의 남간정사

2018. 11. 25. 00:59여행 이야기

  


오마이뉴스

엄청난 존재감에 비해 소박한 정원

김종길 입력 2018.11.24. 19:09


[김천령의 한국 정원 이야기26] 우암 송시열의 남간정사

[오마이뉴스 김종길 기자]

▲ 남간정사 조선 숙종 때의 거유 우암 송시열이 만년에 거처하며 강학하던 곳이다.
ⓒ 김종길
 
   회덕(懷德), 덕을 품은 땅. 고려 태조 때부터 그렇게 불리었다니 천 년의 역사를 가진 셈이다. 조선 시대에는 은진 송씨의 터전이었다. 송씨들이 모여 산다고 해서 송촌동(宋村洞)이라는 지명이 있다. 은진 송씨 하면 그 유명한 은진미륵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바로 지금의 논산시 은진면이 은진 송씨의 본관이다. 
 
   회덕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동춘당 송준길(1606~1672)과 우암 송시열(1607~1689)을 들 수 있다. 흔히 이 두 사람을 양송(兩宋)이라 하는데, 송준길의 제자 제월당 송규렴(1630~1709)을 더해서 삼송(三宋)이라고도 한다. 송준길과 송시열은 동문수학했던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송준길의 동춘당, 송시열의 남간정사, 송규렴의 옥류각은 그들이 머물렀던 공간을 대표한다. 그중 오늘날 세인들에게 가장 관심을 받는 곳이 남간정사일 것이다.
 
   남간정사는 야트막한 산기슭에 있다. 조선 숙종 때의 거유 우암 송시열이 만년에 거처하며 강학하던 곳이다. 첫인상이 정원이라고 하기엔 무슨 기념 공원처럼 생경하지만, 계곡을 건너 일각문을 들어서면 격조 있는 정원이 펼쳐진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분명 아름답기는 한데 왠지 제 위치가 아닌 듯한 건물과 연못 풍경이 언뜻언뜻 낯설게만 여겨진다.
  
▲ 남간정사 지금의 남간정사는 연못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다.
ⓒ 김종길
 
   지금의 남간정사는 연못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다. 예전에도 그랬을까. 문득 남간정사의 원래 모습이 궁금하다. 우선 송시열이 어떤 인물인지, 그가 어떻게 남간정사를 조영했는지 그 원리를 알 필요가 있다. 또한, 송시열 사후에 남간정사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살펴보면 그 원형과 내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인물, 송시열

   송시열만큼 우리 역사에서 주목받은 인물이 있을까.

<조선왕조실록> 3,000번 이상이나 나올 정도로 가장 많이 이름을 올렸던 인물, 네 분의 임금이 56년간 167번을 불렀으나 이에 응한 것이 37번이었던 인물, 정승을 세 번이나 했으나 그 직을 수행한 건 불과 47일에 불과했던 인물, 동국 18현의 한 사람으로 '동방의 주자'로 칭송되는가 하면 '당쟁의 화신'으로 비난받았던 인물, 후학들에 의해 주자(朱子)에 버금가는 성인군자의 반열인 '송자(宋子)'라는 존칭을 받았던 인물….
 
   송시열의 문집 또한 왕명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대전(大全)'이라 불린 <송자대전>이었다. 그는 조선 시대 최대 격변기였던 17세기 이후 학계와 정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대학자이며 정치가이다. 범인들이 넘볼 수 없는 위상과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인물이 바로 송시열이다.
  
▲ 남간정사 남간정사의 후원 풍경
ⓒ 김종길
 
  송시열 1607년(선조 40)에 충북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났다. 화양동 등 여러 곳을 옮겨 다녔으나 그가 주로 살았던 곳은 회덕이었다. 송시열은 1654년(효종 5) 대전의 소제동에 고택과 기국정을 지어 55세인 1661년까지 생활했다. 비래촌과 흥능촌에 비래암과 능인암이라는 서당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만년(1683)에 능인암 아래에 서당을 지었는데, 그것이 남간정사이다.
 
   송시열은 기호학파(율곡학파)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이이(1536~1584)의 학문적 종지가 김장생(1548~1631)으로 이어지는 율곡학파 학설을 전승하고 발달시켜 권상하(1641~1721), 한원진(1682~1751)으로 이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서인의 종주(宗主)였던 율곡 이이의 학문이 김장생에게 계승됐고, 송시열에 이르러 집대성될 수 있었다. 이것이 훗날 두 차례에 걸친 서인과 남인의 예송 논쟁을 유발하게 된다.
 
   "주자는 후세의 공자이고, 율곡은 후세의 주자이니,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송시열아버지 송갑조에게 이이가 편찬한 <격몽요결> 등을 배웠다. 아버지는 주자, 이이, 조광조, 김시습 등의 절의를 본받도록 가르쳤다. 그리하여 송시열은 평생 주자를 흠모하며 사표로 받들었다. 우암(尤庵)이라는 호도 주자가 태어난 복건성 우계현에서 따왔고, 남간정사라는 이름도 주자의 시 <운곡26영> 중에서 제2시 '남간(南澗)'이란 시의 뜻을 빌려 왔다.
 
▲ 남간정사 남간정사라는 이름은 주자의 시 <운곡26영> 중에서 제2시 ‘남간(南澗)’이란 시의 뜻을 빌려 왔다. 현재 남간정사 기둥에 걸린 주련의 시가 그것이다.
ⓒ 김종길
 
주자를 모델로 삼은 정원
   송시열은 주로 강이나 계곡 등 물가에 정자를 지었다. 화양구곡의 암서재가 그러하고 남간정사 또한 그렇다. 언제나 물이 곁에 있었다. 때론 바위에 자신의 심경이나 이상을 새겼으며, 주변에 숲을 조성하거나 나무를 심었다. 남간정사 주변에는 대숲과 왕버들을 심었다. 자연 속에 정자 등을 지어 공간을 창출했다.
 
남간정사가 있는 회덕은 입각과 낙향을 거듭한 송시열에게 한양과 멀지 않아 접근성이 좋았다. 게다가 어릴 적 추억이 서린 장소이니 친숙함도 있었을 것이고, 나지막한 구릉지이지만 세상과 절연되어 자연 속에 파묻혀 지낼 수 있는 수려한 산수 또한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송시열은 주자를 모델 삼아 산수가 수려한 곳에 은둔하여 수신과 강학하는 장소로 암서재남간정사를 지었다. 주자가 한때 관직에 나아가 자신의 뜻을 펼치기도 했지만 만년에 무이산에 들어가 무이정사를 지어 후학을 양성하면서 자연 속에 시를 짓고 살았듯이 송시열도 그러했다. 그럴 때마다 '계곡'이나 '물'은 그가 장소를 정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 남간정사 남간정사는 독특한 물의 기법을 보여주는데, 뒤쪽 샘에서 대청 밑으로 물이 흘러들어온다. 아쉽게도 지금은 샘물이 말라 물이 흐르는 풍경을 거의 볼 수 없다.
ⓒ 김종길
 
마루 밑으로 물이 흐르는 독특한 정원
   남간정사는 구릉지 시냇가 반석 위에 있다. 도시와 연결되면서도 한적한 자연의 공간이다. 연못가에는 두 건물이 있다. 기국정이 입구 쪽에 서향으로, 남간정사중앙에 남향으로, 사당 남간사가 그 위 언덕에 있다. 연못은 두 방향에서 물이 들어온다. 고봉산에서 흘러내린 개울물이 작은 폭포를 이루어 연못으로 떨어지면 널따란 바위가 물살을 더디게 한다. 동(動)이 정(靜)이 되는 순간이다.
 
   또 하나는 남간정사 뒤쪽 샘에서 대청 밑으로 흘러들어오는 물이다. 이 물로 인해 남간정사는 아주 독특한 물의 기법을 보여주는 정원이 되었다. 대청에서도 물소리를 들을 수 있어 자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변화를 주고, 왕버드나무를 심어 더욱 한가로운 운치를 자아낸다. 이 묵은 나무들 덕분에 남간정사는 자연과 하나가 된다. 연못에 비친 정사의 모습에 그 한갓진 풍경은 절정에 달한다.
  
▲ 남간정사 정사 앞으론 마당이 없고 곧장 연못으로 이어져 정사의 뒤쪽으로 출입해야 한다. 기국정과 연못 사이의 소로를 따라 작은 돌다리를 건너서 돌아간다.
ⓒ 김종길
 
  남간정사는 시각과 청각이 어우러진 조영 기법을 보여준다. 연못 주변의 자연석은 건축물과 잘 어울린다. 정사 앞으론 마당이 없고 곧장 연못으로 이어져 정사의 뒤쪽으로 출입해야 한다. 기국정과 연못 사이의 소로를 따라 작은 돌다리를 건너서 돌아가는 길이다.
 
정원의 원래 모습은 과연?
   근데 남간정사 풍경의 중심인 연못이 예전에도 있었을까? '남간(南澗)'에서 '간(澗)'은 '계곡의 시내 간'자로 계곡 물가에 지었다는 뜻이다. 우암도 어록에서 "누워서 창밖의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 정(靜) 가운데 동(動)이 들어 있는 뜻을 알 수 있다", "곡운(谷雲)이 팔분체로 써준 당액을 벽에다 걸어 두고, 한가로이 맑은 산골의 물소리를 들으며"라고 했다.
  
▲ 남간정사 송시열은 남간정사를 짓고 지금과 같은 연못을 조성한 것이 아니라 화양계곡에 암서재를 지은 것처럼 시냇가에 원림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 김종길
 
  이뿐만 아니라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냇물과 물소리 등을 언급한 옛 문헌은 많지만, 연못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우암의 제자인 권상하(1641∼1721)의 문집<한수재집>이나 우암의 8대손 송달수(1808∼1857)의 문집만 봐도 그렇다.
송달수 1850년대 남간정사 주변의 자연 경관을 상세하게 묘사했지만, 연못 이야기는 없었다. 이로 보아 연못은 그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즉, 송시열은 남간정사를 짓고 지금과 같은 연못을 조성한 것이 아니라 화양계곡에 암서재를 지은 것처럼 시냇가에 원림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보면 기국정과 남간정사 건물이 퍽이나 조화롭다. 양명한 땅의 기운과 하늘빛, 연못 풍경이 정사와 잘 어울린다. 그럼에도 공간이 다소 비좁게 느껴진다. 송시열이 "수석(水石) 사이에 작은 서재를 지었다"고 했으니 남간정사를 지었을 당시에는 지금처럼 4칸 규모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 기국정 기국정은 원래 1654년(효종 4)에 송시열이 지금의 대전시 소제동에 낙향하여 소제방죽 옆에 지은 별당이었다.
ⓒ 김종길
 
  송시열은 당시 유배에서 풀려나 화양동에 은거하던 시기였고, 자신이 평생 흠모했던 주자가 거처했던 무이산의 무이정사도 3칸 규모였으니 그보다 컸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남간정사가 소실되고 1776년(정조 20)에 다시 지어지면서 4칸으로 넓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18세기 중반 영조 때에 제작된 군현 지도 중 가장 완성도가 높다는 해동지도에도 남간정사를 2칸 규모의 '남간정'으로 그렸다.
 
   남간정사의 공간 구성에 가장 큰 변화를 준 건 기국정을 옮기고 남간사를 지은 것이다. 기국정은 원래 1654년(효종 4)에 송시열이 지금의 대전시 소제동에 낙향하여 소제방죽 옆에 지은 별당이었다. 송시열은 연못에 연꽃을 심고, 주변에 구기자와 국화를 심었는데, 이곳을 찾은 이들이 구기자와 국화가 무성하게 피어난다 하여 기국정(杞菊亭)이라 했다.
  
▲ 남간사 1936년에는 사당인 남간사가 지어졌는데, 현재는 공원 안에 새로 조성됐다.
ⓒ 김종길
 
   그 후 일제강점기 때 대전역이 들어서면서 도시 계획으로 연못을 메우게 되자 1927년에 지금의 남간정사 자리로 옮겨왔다. 1936년에는 사당인 남간사가 지어지고 그 후 도시화 과정에서 주변의 자연 경관이 점차 훼손됐다. 결정적으로 우암사적공원이 조성되어 남간정사는 그 원형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공원 안에 새로 조성된 남간사는 마치 궁궐 같다.
 
   남간정사는 송시열이 지었을 당시에는 검소했던 그의 성품에 맞게 작은 별업이었다. 그러던 것이 그의 계보를 이어받은 서인과 노론들이 집권하면서 규모가 커졌는가 하면 대원군 때 훼철되는 등 부침을 겪으면서 그 원형을 상실했다. 그럼에도 남간정사는 여전히 아름답다.
  
▲ 남간정사 그 원형을 짐작할 수 없지만 남간정사는 여전히 아름답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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