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 자계서원/행전

2018. 12. 7. 04:16여행 이야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3호 자계서원 전경>


  

   자계서원(紫溪書院)

             -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

 

                                        

                             행전 박영환

                                                                                         

 


   경북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 자계서원을 방문했다. 이곳은 청도의 큰 어른을 모신 곳이기도  하지만 또 고향집과 가까운 곳에 있어 자주 들리던 곳이다. 특히 선생의 산소는 우리 고향 마을  바로  뒷산에 있는터라 흡사 우리 선대 어른처럼 느끼며 자랐기에 관심이 많았다. 

  자계서원은 올 해만 해도 두 번이나 방문했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11월에 한 번 갔고  한 달 뒤 12월에도 들렀다. 그런데 그 한 달이란 것이 길다면 길지만 어떻게 보면 짧은 시간인데 서원 내 선생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의 모습은 완전히 딴판으로 변해 있었다. 11월달만 해도 은행잎과 열매들이 풍성하게 달려 있었지만 12월에 갔을 때는 그 많던 잎과 열매를 하나도 지니지 못하고 다 내려놓고 있었다. 빼앗겼는지, 스스로 내려놓았는지... 자연의 이치에 숙연해질 뿐이었다.

  빼앗기고 스스로 내려놓는 것- 이는 탁영 선생에게도 통하는 말이다. 불의에 항거하다 목숨을 빼앗긴 것이기도 하지만 항거를 하면 이미 죽을 줄을 알고 있었으니 어쩌면 그 한 목숨을 스스로 내려놓은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용한 것은 은행나무는 한 달 사이에도 이렇게 변화가 많은데 선생은 순절한 지가 500년이 지났는데도 그 빛이 전혀 바래지 않고 오히려 세월이 갈수록 더더욱 빛이 나는 것이다.



 



다음은 자계서원 보존회가 청도 향교지(2018)에 소개한 내용이다.  


자계서원(紫溪書院)


◯ 관리문중 김해김씨 삼현파(三賢派)

 

◯ 소 재 지 청도군 이서면 자계서원길 17-7 (서원리 85-13)

 

◯ 건물구조 및 배치 서원의 배치는 3칸의 솟을대문인 유직문(惟直門), 정면 3측면 2칸의 누각인 영귀루(詠歸樓), 정면 5칸 측면 2칸의 고상형(高牀形)집이며 겹치마의 팔작지붕에 활주가 있는 강당인 보인당(輔仁堂2, 대청3, 중당협실형)을 동일 축선 상에 두고보인당의 전면좌우에는 각각 3칸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배치하였다.

보인당 우측에 정면 3측면 1칸반의 맞배지붕 사당인 존덕사(尊德祠)와 우측에 전사청(典祀廳두어 별도의 영역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데 3칸 규모의 내삼문에 유현문(幽賢門)을 현액하여 사당에 출입하게 하였다.

  보인당 대청 벽에 자계서원기’, ‘자계서원강당중수기’, ‘자계서원중건기’, ‘자계서원중수기’ 등의 현판이 있다영귀루에는 중건상량문과 자계서원영귀루중창문이 있다.

뜰에는 탁영이 손수 식수한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으며, ‘탁영선생신도비’, ‘절효선생정려비와 비각(碑閣)’, ‘자계서원원정비’, ‘탁영선생순절500주년추모비’ ‘자계서원사적비’,‘탁영선생문학비’, ‘탁영선생유품문화재지정안내비’ 등이 있다.


◯ 배향인물 서원내 존덕사에는 탁영(濯纓김일손(金馹孫)을 주벽으로 절효(節孝김극일(金克一),삼족당(三足堂김대유(金大有)를 배향하고 있다.

 

1) 탁영 김일손(1464~1498)

  자()는 계운(季雲)이고()는 탁영(濯纓)이며시호(諡號)는 문민(文愍)이다()는 이조참판 남계(南溪()이고조부는 절효(節孝김극일(金克一)이며점필재(佔畢齋김종직(金宗直)의 고제(高弟)이다.

  17세까지는 조부에게 <소학>, <통감강목>, 사서 등을 배웠으며뒤에 김종직(金宗直문하에서 한훤당(寒暄堂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정여창(鄭汝昌)과 도의교우(道義交友)하였다.

  23세 때 문과(文科)와 전시(殿試등에 각각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하였고 청환직(淸宦織)을 두루 거쳐 충청도사이조정랑을 역임하였으며, 27세 때 명나라 질정관(質正官)으로, 28세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두 번이나 다녀오면서 중국의 명사 정유(程愈), 주전(周銓등과 교결(交結)하고정유(程愈)로부터 소학집설(小學集說)을 구득(求得입국하여 학문발전에 많이 기여하였다그는 주로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훈구파학자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비판했고춘추관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는 세조찬위의 부당성을 풍자한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었다가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연산군 4)때 35세로 참형을 당했다생지(生地)인 소미동(이서면 서원리)의 운계천(雲溪川)이 자계천(紫溪川)으로 변한 것도 충절을 상징하는 표현이며,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이 되고 신원복작(伸寃復爵)과 1661(현종2辛丑)에 자계서원을 사액(賜額)하고순조(純祖때 이조판서와 대제학 등을 추증(追贈)하였으며시문민공(諡文愍公)을 하사(下賜)하였다.

저서로는 탁영집(濯纓集)이 있으며유품은 1490(성종21)경에 직접 제작한 6현금(6弦琴)이며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거문고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957호로 지정된 탁영금(濯纓琴)” 일명 문비금(門扉琴)이 현재 대구국립박물관에 기탁 보관하고 있고호당(湖當)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던 1492년 성종으로부터 하사받은 매화벼루는 청도박물관 개관 시에 기탁 보관하고 있으며또 선생 교지선생 시호교지정부인 교지자계서원 둔전답경자개량등록(屯田沓庚子改良謄錄), 자계서원의 사액시 치제(致祭홀기(笏記)는 유형문화재 제27호이며, ‘탁영선생문집목판’, ‘탁영집목판등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보관 되어 있다.

 

2)절효 김극일(1382-1456)

  자()는 용협(用協)이고()는 모암(慕庵)이다의흥 현감 김서(金湑)의 아들이며탁영 김일손의 조부이다.

  야은 길재(吉再)의 문인으로 세종조에 사헌부 지평(持平)을 지냈고향리에서 후학들의 훈도에 힘썼다증직(贈職)은 사헌부 집의(執義)이다.

타고난 효자로 부모님에 대한 효행이 지극했다이 일이 임금에게도 알려져 정문(旌門)하였는데 향리유림과 제자들이 그 효행을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자 사시호(私諡號)를 절효(節孝)라 했고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에 등재되었다저서로는 절효선생실기(節孝先生實記)가 있다

 

3)삼족당 김대유(1479-1552)

  자()는 천우(天祐)이며()는 삼족당(三足堂)이다직제학 동창공 김준손(金駿孫)의 아들이고,탁영 김일손의 장질(長姪)이다.

  정암(靜庵조광조(趙光祖)의 문인(門人)으로 1507(중종 2) 정시(庭試)에 장원 급제한 이후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정언(正言), 칠원현감 등을 지냈다기묘사화(己卯史禍이후 관직을 사임하고 향리에 돌아와 은거하며 자호(自號)를 계산(溪山)이 족()하고풍월(風月)이 족()하고음아(吟哦)가 족()하다에서 삼족(三足)을 취해서 삼족당(三足堂)이라 하고, 1519(중종 14) 삼족대(三足臺)를 건립하여 후진을 교육했다.

  남명(南冥조식과 도의심교(道義深交)를 하였으며증직(贈職)은 홍문관(弘文館응교(應敎)이다현량과(賢良科천목(薦目)에서 기우(器宇)가 뛰어나고 견식(見識)이 명민(明敏)하다.”는 평가를 받았다저서로는 탁영연보(濯纓年譜)삼족당 유고(三足堂 遺稿)가 있다.

 

◯ 연혁 본 서원은 탁영 김일손이 25세 때인 1488(성종 19)에 운계정사(雲溪精舍)를 건립하여 수학(修學)하던 곳인데 1518(중종 13)에 장보(章甫:儒生)가 운계정사를 자계사(紫溪祠)로 개칭하여 탁영을 배향해 오다, 1578(선조 11) 영남사림들이 사우(祠宇)를 중수하고 확장하여 자계서원이라 하고당시 본군 군수 황응규가 서원기문을 하였다그 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사우는 1611년에 군수로 부임한 검간(黔澗조정(趙靖)이 1612(광해군 4)에 복원하였다,

1615(광해군 7)에 절효(節孝김극일(金克一)과 삼족당(三足堂김대유(金大有)도 같이 봉안하여 병향(竝享)하게 되었다.

  1660(현종 1) 6월에 판서 송준길(宋浚吉)을 중심으로 예조에서 사액(賜額)을 청하는 회계(回啓)를 주상(主上)에게 올려 윤허(允許)를 받을 때 임금이 대답하기를 삼현(三賢)이 실행(實行)한 명분과 절의에 대하여 나는 존경하고 추앙(推仰)하는바 특별히 사액을 베푸노라하였다다음해인 1661년 (현종 2)에 자계서원이 사액되어 교지편액토지노비 등이 하사(下賜)되었다. 1854(철종 5)에 진사 모천(慕川김창윤(金昌潤탁영 12세종손)이 학문을 흠모하고 유덕을 기리고자 자계서원에서 유회(儒會)인 강계(講契)를 조직하여 유림의 화합과 후학양성에 공헌하였으며 지금도 음력 4월 3일에 본 서원 보인당에서 열리고 있다.

  1871(고종 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었다가 유림과 후손들이 협의하여 1924년에 탁영의 14세손인 모계(慕溪김용희(金容禧)의 사재로 완전복원 되었다. 1967년 17대 종손 김헌수(金憲洙)의 주관으로 신도비와 원정비를 건립하였고, 1975년도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83호로 지정되었다.

  2014년 영귀루가 자연 붕괴되어 2015년 복원 신축하였다.

  




 

서원 대청마루에서 바라본 전경(바로 앞의 누각과 멀리 남산이 보인다) - 구 영귀루

 

 

구 영귀루 전경



구 건물이 무너져 새로 지은 영귀루




누각에서 바라본 전경 - 청도의 진산 남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유직문

 

존덕사



향사를 올리고 있다 


탁영 선생은 자계 서원 이외에도 충남 목천의 도동서원, 경남 함양의 청계서원, 전북 장수의 사동서원, 광주의 임계서원, 청도의 차산서원 등 전국 각지의 서원에서 제향하고 있다. 



탁영선생 문학비

 

  푸른 물결 넘실넘실 노 소리 부드러워

 소매에 맑은 바람 가을인 양 서늘하다

 머리 돌려 다시 보니 참으로 아름다원

 흰구름 자취 없이 두류산 넘어가네

(선생이 20세이던 1489년 4월 29일에 섬진강에서 두류산을 읊은 시임)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2018년 11월 6일

  

 

 

비각

 

탁영선생 순절 500주년 추모비

 

 

 

 

문화재 지정 안내비

 


<탁영대>




자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원리 자계마을 전경



서원리


  탁영 김일손을 배향하는 자계 서원이 위치한 마을로서, 1350년 경 탁영의 증조부 김서(金湑)가 입청도하여 소미동(운계리 이전의 지명)에 정착했다. 탁영의 조부인 절효 김극일은 여기서 태어났고 효자로 정문을 세웠으며 무오사화로 피화된 탁영의 신원이 회복되면서 자계 서원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고 그 이후 서원이라는 동명으로 불리고 있다.

  마을 뒤편의 와룡(臥龍)등이 포근하게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대곡(大谷)등이 마을 서쪽의 바람막이를 하고 있다.

 


  디지털 청도문화대전(집필자: 박윤제)은 서원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형성 및 변천]

  본래 청도군 상북면의 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서원동이라 하여 이서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서원동에서 서원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김일손이 무오사화로 피화되자 마을 앞을 흐르는 물이 핏빛으로 물들어 3일간 역류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향토 사학회에서 조선 왕조 실록을 살펴보니 그 당시 3일간 집중 호우가 쏟아져서 자계의 물이 청도천으로 유입되지 못하고 마을로 역류하였던 것을 알 수 있었고, 최근에도 태풍 사라와 매미 때에도 청도천으로 유입되지 못한 자계의 물이 역류한 것을 보고는 전설이 허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자연 환경]

  앞으로는 넓은 청도천이 흐르고 있고, 뒤에는 삼성산의 한 줄기인 나지막한 산이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마을이다. 자양산(紫陽山에서 흘러온 자계는 마을 동남쪽에서 청도천을 만나고 충적토는 넓은 경작지를 이루고 있다. 예전에는 큰물이 질때마다 청도천 물을 이기지못한 자계[자양천]의 물이 마을로 치밀고 올라 마을이 잠기는 예가 허다하였다. 민속 축제인 소싸움장이 현재의 청도 상설 소싸움장으로 옮겨가기 전까지는 이 마을 앞 하천변에서 해마다 열렸다. 낮은 구릉처럼 생긴 산은 온통 과수원으로 일구어져 있다.

  

[현황]

  20126월 현재 면적은 1.89이며, 152가구에 358[남자 173, 여자 185]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은 화양읍 토평리, 서쪽은 이서면 각계리·구라리, 남쪽은 각남면 예리리·구곡리·화리·칠성리, 북쪽은 이서면 학산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미동(美洞)과 신기(新基) 등의 자연 마을이 있다.

  각남면 칠성리와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으로 잇는 국가 지원 지방도 30호선[이서로]이 서원리 서쪽지역을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이서 고등학교와 이서 중학교가 위치한다.

 

  청도천 쪽으로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된 자계 서원이 있어, 김일손과 김극일, 김대유를 모셔 놓고 봄과 가을로 향사하고 있으며, 김일손의 후손들의 집성촌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원천변은 청도 상설 소싸움장이 개설되기 전까지 민속 소싸움장으로 사용하였다.

 

자계 서원과 청도천은 자계 제월(紫溪霽月)이라고 하여 청도 팔경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 탁영 선생 묘소 아래 있는 영모재

 

 

탁영 선생묘소

 

선생의 밝고 곧은 마음을 말해주듯 아침 햇살이 탁영 산소를 향해 눈부시게 떠오르고 있다

 

 

눈에 덮인 탁영 선생 묘소(2012.12.28)



고향집 뒷산에 선생의 산소가 있다

할아버지는 산소에 가면 절을 올리라고 하셨다

어릴 때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는데

크면서 그 뜻을 알았다

 

선생께서 가신 길

쉽지 않는 길이었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선비의 길이라고 하지만

누구나 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왕위찬탈이 있었다

애초에 용서할 수 없는 불의였다

아무리 용상龍床이 탐나기로

인륜을 저버려 꽃다운 조카의 목숨을 앗는단 말인가

마침내 어린 단종을 몰아낸 세조의 찬탈을 천하에 알리고자

밀명密命을 남기듯 전해 준 스승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올렸다

 

무오년 피바람이 불었다

스승은 부관참시剖棺斬屍가 되고 당신은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하늘이 무심하지 않았다

압송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던 날

장대비가 쏟아지며

냇물이 통곡하며 삼일 간 붉은 물로 역류하였다.

하여자계라 하는데

지금도 그 냇물에는 겨레의 사표가 된 절의의 단심이

잇고 이어 끝없이 흐르고 있다

 

오늘 다시 산소를 찾아 옷깃을 여미고 절을 올린다

대쪽 같던 그 마음 말하듯 산소의 소나무도 더더욱 푸르다

고향마을에 탁영 선생이 계셔서 늘 든든하다.  

  

                     

    * 부족하지만  '탁영 선생'이란 제목으로 삼가 받들어 적어 제 시집 '청도에 살어리랏다'에 탑재했습니다. 

     



*참고 자료


-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디지털 청도문화대전

-청도군지(1991, 청도군청)

-도주지(1958, 김석봉 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도향교(2018 청도향교)

-청도에 살어리랏다(박영환, 2016)

-김해 김씨 후손 면담


출처 : 청도 문학 신문
글쓴이 : 행전 박영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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