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7. 14:35ㆍ美學 이야기
역사산책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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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두의 역사산책 -
신라 김알지신화 그린 조선시대 <금궤도(金櫃圖)>에 대한 해석
- 병자호란 때 후금(淸)이 신라의 후예임을 표현한 자주정신의 산물 -
과거 사람들의 상상력이 동원된 작품 해석은 독특한 시각을 가지는 분석력이 있어야 한다. 특히 이미지 해석에는 많은 역사적 배경을 종합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판단이 뒤따른다.
조선시대는 신라왕실에 대한 의미 부여를 많이 했던 증거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특히 신라시조 중에 조선시대 17세기 인조 때인 1636년에 조속(趙涑,1595-1668)이 김알지 신화를 그린 <금궤도(金櫃圖)>를 이번에 경주 '신라문화제'(10.08~10.10) 개최에 맞춰 10월 5일부터 17일까지 일반에 공개된다고 하여 관심을 끌고 있다.
그동안 조속(趙涑)의 <금궤도(金櫃圖)>에 관한 해석들에는 왜 그 시기 '1636년'에 어명에 의하여 신라시조 신화가 그려졌는지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해석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나는 이 글에서 신라 김씨왕조의 후예가 건국한 후금(後金) 즉 청나라 건국(1636년)과 병자호란(1636-7년)과 관련된 국제적인 긴박한 상황에서 그려졌다는 것을 처음으로 주장하고자 한다.
(서울=연합뉴스) 조선 인조시대 사대부 화가인 조속(趙涑)이 그린 금궤도(金櫃圖).
신라김씨(경주김씨) 시조 김알지가 계림에서 금궤짝을 통해 탄강하는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
1636년. 105.5×56cm, 비단에 채색. 2010.10.4 << 문화부 기사참조,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
우리 민족의 전통 회화 해석에서 역사학자들이 예술 품 해석을 회피해온 면이 있었다면 주로 미술사학자들의 견해로 전통 회화들이 해석되어 옴으로써 그 역사적 배경 설명이 미약한 면이 없지 않았다. 따라서 조속(趙涑)의 <금궤도(金櫃圖)>가 그려진 역사적 배경에 대한 필자의 새로운 주장에서 17세기 조선과 청나라와의 전쟁인 병자호란 때에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국가 정신을 강조하려는 중요한 작품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 - 1637년)은 후금의 홍타이지(皇太極)가 침략해 와 12월 부터 이듬해 1월까지 단 2개월간의 전쟁으로 막을 내린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의 친명배금 외교 정책에 보복하는 차원에서 홍타이지는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하고 압박을 계속해 오고 있었다.
광해군을 이어 인조 때인 1636년은 홍타이지가 병자호란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조선 조정은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조선 청나라 관계 설정에 그 정신적인 관계 설정에 혼동을 가지고 있었던 시기이다.조선은 신라가 청나라 즉 후금의 전신인 금나라를 세운 종주국임을 드러내고자 했던 의미가 임금의 명으로 제작한 <금궤도(金櫃圖)>였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먼저 이 글의 전체적 맥락을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몇가지 기본 전제 의문을 제기해 둔다. <계림고사도(鷄林故事圖)>라고도 불리는 <금궤도(金櫃圖)>는 그 칭호에는 왜 '金'이 강조되어 있을까? 병자호란 전후의 혼란한 시기에 <금궤도(金櫃圖)>는 왜 임금의 명으로 제작된 이른바 어제(御製) 작품이었을까? 그 제작 연도가 1656년(효종 7년)이라는 설이 있지만, <금궤도(金櫃圖)>는 그 어제(御製) 설명에서 왜 그 제작년도가 청나라 건국년도인 1636년이 강조되어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을 전제하면서 필자는 1636년 인조임금의 명으로 제작된 <금궤도(金櫃圖)>는 조선과 청나라와의 관계에 대한 외교정책에 그 어떤 '국가 이데올로기'를 강조한 배경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병자호란을 당하면서 조선의 인조가 침략해 온 후금이 신라 김씨왕조의 후예가 세운 금나라의 후신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조선의 정통성이 신라 고려를 잇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기기 위한 정신적 배경을 조선 자체 내부에서 강조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형제지맹'에서 굴욕적인 '군신관계'를 강요한 청나라에 대하여 조선의 자주적인 정신을 바탕한 외교적 수단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금궤도(金櫃圖)>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조선과 청나라는 모두 김알지의 후예라는 것을 아울러 강조한 것이다.그런 동시에 신라김씨 왕조의 경순왕에게 신라의 정통성을 고려가 이어받고 그 뒤를 이은 조선이 청나라에 대한 종주국임을 드러낸 것이다.
*신라의 김씨 시조신화의 김알지 초상 상상도.
조선시대는 신라 왕조의 전통을 강조해온 면이 있었다. 특히 조선왕조가 신라에 이어진 고려 왕조를 이어받은 의미를 강조한 것은 특히 17세기 정묘호란 병자호란 즈음에서 특히 강조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병자호란을 겪는 과정에서 나온 <금궤도>는 같은 17세기의 산물인 <박씨전>과 함께 신라 정통성의 계승의 의미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형제지국'을 강조하던 후금이 정묘호란 뒤 국명을 개칭하여 청(淸)나라로 재 건국한(1636년) 뒤 조선에 '군신관계'를 강요하여 압박한 시기에 더욱 조선 조정과 민간 사회는 신라 정통 계승의 의미를 강조한 면이 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인조의 어명으로 그려진 <금궤도>와 더불어 민중에는 <박씨전>, <흥부전>이 유행한 것은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과 갈등을 신라의 박혁거세 신화와 연계시켜 일어난 것이다.
<박씨전>은 작자미상이지만, 그 출현 연도가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17세기 또는 18세기초 사이의 현종과 숙종 재위 즈음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씨전>은 판본에 따라 <朴氏夫人傳>이라 표현한 것도 있듯이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것은 <朴氏夫人傳>의 주인공이 청나라에 대하여 복수를 벌이는 것이 신라 시조신화에 나오는 박혁거세 어머니인 선도성모(仙桃聖母)를 떠올리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씨전>에서 특이하게 여성인 박씨부인의 대활약이 병자호란에 대한 복수 영웅 소설로 나타난 것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라 시조신화의 배경이 되는 선도성모에 대한 신앙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통하여 이어져 온 배경을 바탕하고 있었다.
선도성모는 서술성모(西述聖母) 또는 동신성모로도 표현되었다. 선도성모 설화는 <삼국유사> 권5 감통(感通) 제7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隋喜佛事)'에 나오며, <삼국사기>에서 동신성모(東神聖母)로 표현되어 동쪽의 신 즉 태양의 여신임을 그 이름에서 볼 수 있다.
신라이래 선도성모에 대한 제사 전통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관통하여 이어져 왔다. 송나라 조정에서도 우신관(佑神館)이라는 신사(神祠)에 동신성모(東神聖母)를 모셨으며 송나라 사신 왕양王襄이 조정에서 성모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문에 "어진 인물이 비로소 나라를 세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지리산 노고단에 신라 때부터 선도성모를 모시는 남악사(南岳祀)가 있었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그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 천왕봉에 올라 먼저 성모사당에 주과(酒果)를 차려놓고 술잔을 올리며 성모상 앞에서 제를 지냈다. 신라의 선도성모 숭배가 조선 조정에서 막지 않은 것은 신라멸망 후 만주 일대의 여러 외세를 대항하는 그 정신적 배경을 신라에서 이어받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아야 한다.
병자호란 후 박씨부인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청나라에 복수하는 내용의 <박씨전>이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기의 조선 조정과 민간에서 신라 시조신화의 선도성모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의식한 배경이 넓고 두텁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씨전>은 <흥부전>과 같은 박씨 이야기이면서도 신라의 선도성모의 신이한 힘을 일으켜 적을 막아내는 신선도를 도입하고 있다. 그래서 화랑과 같은 영웅적인 박씨부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박씨전>의 줄거리는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박씨전>과 신라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필자의 앞선 글 <역사산책> 병자호란 후 <흥부전> <박씨전> 유행의 新羅的 배경 (四)에서 다루었다.
<박씨전> <흥부전>이 박씨를 주인공으로 하는 민간의 스토리로서 청나라에 복수하거나 '놀부'로 풍자한데 비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또 다른 면에서 신라 왕실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것이 <처용탈춤>이다.
신라 왕실의 무속적 탈춤이었던 <처용무>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악학궤범>에 그림으로까지 수록되어 왕실에서 공연되었던 것은 신라의 처용춤은 신라 헌강왕 이래 신라왕실의 고래토템과 관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서 필자는 <코리안 신대륙발견> 이슈 가운데 이미 논했다.
처용무가 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왕실 공연으로 이어져 온 것은 고래에 연계되어 있었던 무속적인 대왕문화가 처용탈춤에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과 같은 사악한 외침을 물리치려 할 경우 처용무는 궁중에서 특별히 추어졌을 것이다. <처용탈춤>이 신라 - 고려 - 조선으로 내리 왕실에서 시연되었던 것은 단지 유흥이나 단순한 '역병' 퇴치의 의미가 아닌 국가적으로 외세에 대한 무속적 '국굿'의 의미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병자호란 시기에 나온 <금궤도>는 이러한 전체적인 조선시대의 신라 정신 계승의 면에서 읽어야 한다.
신라 김알지 신화를 그리면서 신라 멸망 때의 경순왕이 고려에 양위한 내용을 강조한 것이 <금궤도(金櫃圖)>이다. 그 어제(御製)에는 그래서 신라 김씨 왕조와 금나라 건국 그리고 금나라의 후신인 후금(淸)과의 관계를 암시하면서 조선은 신라 - 고려를 이은 정통성이 있는 종주국임을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해석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속(趙涑)의 <금궤도(金櫃圖)>가 그려진 연도에 주목한다. 인조 14년 때인 1636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청(淸, 1636년 ~ 1912년)의 건국년도와 병자호란을 일으킨 해로서 주목되는 연도이다. 그림의 '어제(御製)' 글을 쓴 김익희와 관련하여 1636년 이후에 <금궤도(金櫃圖)>가 그려졌다 하더라도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에 조선이 북벌론을 강화시키던 효종 때 이 그림이 그려지면서 청나라 건국 연도와 병자호란이 일어난 해가 표기되도록 1636년이 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그림을 그린 조숙(趙涑)의 본관은 풍양(豊壤)이고 자는 희온(希溫)·경온(景溫), 호는 창강(滄江)·창추(滄醜)·취추(醉醜)·취옹(醉翁)·취병(醉病) 등 다양했다. 이조판서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627년 덕산현감에 임명된 이후 장령·진선(進善)을 역임하고 상의원정(尙衣院正)의 직위에 올랐다. 그는 청렴하고 지조가 높았던 인물로 인조반정의 공신의 반열에 들었으나 스스로 사양했을 정도였다.
그는 문인화가로서 특히 시서화 삼절(詩書畵三絶)로 이름을 날렸으며 특히 매(梅)·죽(竹)·산수화와 더불어 까치나 물새(水禽) 등의 수묵화조(水墨花鳥)에 정통했다. <금궤도 金櫃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외에 조숙의 작품에는 <호촌연의도 湖村煙疑圖> 등이 있다.임금의 명을 받아 신라 김씨 시조신화를 그리게 되었을 정도로 조숙(趙涑)은 당대 대표적인 화가였다.
<금궤도(金櫃圖)>가 그려진 역사적 배경은 한 순간이 아닌 그 시대의 후금과 관련된 누적된 국제상황이 존재하고 있었다. 사실 청(淸)이라고 국명을 개칭하기 전 후금(後金)이 건국된 것은 1616년이었다. 그때는 조선이 후금을 '오랑캐'로 외면해 오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에서 인조의 삼전도 항복 굴욕이 있었던때가 1637년 2월 2일이었으니 <금궤도(金櫃圖)>가 제작된 1636년은 병자호란으로 인조의 조선이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위태로운 시기였던 것이다.
국제관계가 위태로운 시기에 신라 시조 신화를 왕명으로 그리게 한 <금궤도(金櫃圖)>는 그래서 보통 산수화나 신이한 그림 정도로만 치부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정묘호란 후 조선과 “형제지맹”을 맺은 후금은 조선에 대하여 식량지원 및 명나라 정벌을 위한 병선 제공 요구등 압박을 강하게 해 왔다. 1632년(인조 10년) 청 조정은 조선에게 ‘군신지의’를 요구했다. 이때 조선 안에는 척화론과 함께 주화론으로 양립되어 있었다. '오랑캐 나라'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위치 설정에 혼돈을 겪던 시기에 <금궤도(金櫃圖)>가 그려지는 시대적인 배경이었다.
후금의 홍타이지는 내몽골을 정복한 뒤에 1636년 음력 2월 사신을 보내 칭 황제 하기를 조선정부에도 요청했다. 그러나 인조는 청나라 사신을 접견도 하지 않고 그 국서를 받지도 않았다. 조선 조정은 척화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2개월 후인 1636년 4월에 나라 이름을 후금에서 청(淸)이라 개칭하고 청 태종으로서 황제 즉위식을 가졌다. 그런 1636년은 곧 이어 12월에 청나라 홍타이지(청태종)에게 병자호란의 난을 당한 조선에게는 치욕적인 해가 된 해였다.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인조의 명으로 신라의 <금궤도(金櫃圖)>를 그리게 했던 것은 그 당시의 시대적 대응의 방법의 일환으로 그려졌다고 필자는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후금의 전신인 금나라가 신라 김씨의 후예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화의적인 의미로 신라김씨 조상의 그림을 그린 것이다.
1636년 12월 2일 청 태종은 심양을 출발하여 직접 12만 8천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넌 것이 12월 9일이었다. 곧이어 청나라 선발 병력은 10여일만에 한양을 위협했다.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주화론자인 이조판서 최명길을 청군 진영에 보내 시간을 끌면서 왕자들과 비빈종실 귀족들은 강화도로 피난을 보내고 인조는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다. 12월 16일 남한산성은 이내 청나라 군사들에 의하여 포위를 당했다. 다음 달인 1637년 1월 청태종이 직접 현장에 도착했다.
남한산성이 포위된 채 45일간 화전(和戰) 양론이 갑론을박하는 상황을 겪다가 음력 1월 30일 성문을 열고 인조는 삼전도(三田渡 : 송파)에 세워진 수항단(受降壇)에서 청 태종(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항례(降禮)를 하고 청 태종의 ‘군신지의’ 관계의 수모를 받아들이게 된다.
따라서 <금궤도> 그림이 1636년도에 인조의 어명으로 그리도록 한 것이라는 사실에서 조선 조정내부적으로는 조선이 신라의 정통성을 이어받았음을 강조하고, 외부적으로는 병자호란의 ‘주화론’의 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려 청나라 사신에게 보여주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만일에 1636년이 아닌 1656년에 그 그림이 완성되었다는 설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청나라에 대한 주화적인 방법의 일환으로 그려졌을 것이라는 필자의 이론은 그대로 성립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그 방증들이 있다. 오랑캐에 조공을 해야 했던 조선 조정에서는 그 후 북벌론이 고개를 들게 되었다. 이때 신라와 관련된 문학적인 작품이 있었으니 그것이 <박씨전>이다. 신라 김씨 시조신화가 <금궤도> 그림으로 그려졌다면,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박씨부인'으로 강조한 <박씨전>은 박씨를 영웅으로 하는 청나라에 대한 보복을 그린 상상을 동원한 작품이다.
박혁거세 어머니기 '박씨'라고 할 때 후대의 부계 계승으로 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화랑세기> 등 박창화의 여러 번역 문헌들에 나타나는 신라 초기의 모계혈통은 박혁거세 어머니를 '박씨부인'으로 충분히 묘사할 수 있는 배경이 있는 것이다. 선도성모에 대한 옛 칭호들에는 '노고', '노마', '산신할미' 등으로 표현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국에 수많이 산재되어 있는 '할미산성'의 '할미'는 신라시대의 영향이 고려 조선을 이어오면서 선도성모에 대한 그 민간 신앙을 이어오게 한 '신라 정통 계승'을 강조하여 외세에 대항하겠다는 역사적 의미가 강조되어 왔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할미산성'이라는 산성들은 신라의 '박씨부인'이자 산신할미 선도성모 숭배영향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판소리 문학 가운데 <흥부전>이 유행한 것 또한 흥부전의 스토리가 신라의 박씨를 배경한 내용으로 필자는 앞선 글에서 해석했다. 흥부전 자체가 <박흥부전>이라고도 칭해졌듯이 흥부의 성은 박씨였다. 여기에서 ‘형제지의’ 관계를 맺은 조선과 청나라와의 관계가 조선은 흥부이고 청나라는 놀부로서 형(청나라)의 놀부심뽀를 상징적으로 비꼬면서 풍자한 내용이 <흥부전>으로 필자는 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신라 김씨시조 탄강신화를 그린 <금궤도>가 이 시기 즉 병자호란 발발 전후인1636년에 인조가 명하여 ‘어제’로 그려진 배경에는 단일 작품에 국한하여 즉흥적으로 추측하는 이론이 아닌 여러 다른 시대적 배경과 방증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북벌론으로 <박흥부전>과 <박씨전>이 나타나던 시기인 1656년에 청나라 왕실이 신라김씨에서 비롯된 금나라의 후신임을 의식하도록 의도적으로 <금궤도>가 그려졌을 수가 있는 것이다. 1656년은 왕자 때에 심양으로 인질로 잡혀갔던 적이 있던 효종(孝宗, 재위 1649-1659)이 북벌론을 강화하던 때이다. 따라서 신라 김씨시조 신화인 김알지 신화를 그린 것은 청나라에 대하여 조선의 우월한 정신적 '종주국'의 우위감을 스스로 다짐하는 의미로 효종이 명하여 '어제'를 추가해 넣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금궤도>는 인조가 먼저 그러한 자주정신으로 1636년 청나라 건국 연도와 병자호란 발발 연도에 맞추어 <금궤도>를 그리려고 했다가 효종이 그것을 받들어 북벌론의 정신적 의미를 다지기 위하여 최종 완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흰 닭이 울고 나무에 걸린 금궤짝에서 나온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 김알지 탄생신화에 대한 그림인 <금궤도 金櫃圖>는 그래서 외세의 침략으로 전란을 겪으면서 특별히 왕명으로 지어졌다는 의미에서 대단히 가치있는 17세기 조선의 자주정신의 상징으로 필자는 해석한다.
<금궤도 金櫃圖> 그림 위쪽에 인조의 어제(御製)의 내용을 담고 있다. 작품을 그린 조속이 감찰기관인 사헌부의 장령(掌令, 종4품)을 지낸 국가 정신이 투철한 인물이었다. 그는 시·서·화에 능하였으나 자신의 작품에는 낙관이나 제목도 잘 넣지 않은데 비하여 <금궤도 金櫃圖>에는 그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어제로 만들어진 특별한 의미가 있는 그림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몽고병란때에 강화도로 피신한 고려조정에서는 팔만대장경 판각 조성을 통하여 오랑캐의 침략에 대하여 고려의 정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주정신을 강화했다.그와 같은 맥락에서 병자호란을 겪는 과정에서 인조는 청나라 즉 후금의 본국인 신라 김씨의 신화를 그림으로 그리게 한 것은 '병자호란의 팔만대장경'과 같은 의미의 자주적 상징성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나라가 위태로운 시기에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여 고려에 투항하여 그 역사가 이어져 왔다는 것을 강조한 <금궤도 金櫃圖> 어제 설명 내용은 분명 조선은 신라에 이어져 왔음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 주목되는 것이다. 그 전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御製
此新羅敬順, 王金傅始祖, 金櫃中得之, 仍姓金氏者. 金櫃揭于樹上, 其下白鷄鳴. 故見而取來, 金櫃中有男子. 繼昔氏爲新羅君也. 其孫敬順王入高麗. 嘉其來順謚敬順. 歲乙亥翌年春. 命圖見三國史
吏曺判書 臣
金益熙 奉 敎書
掌令 臣 趙 涑 奉
敎繕繪”
신라 경순왕 금부시조(김씨는 조선시대 이전에는 금씨로 읽혔다)는 금궤 안에서 나왔다. 따라서 성을 김씨라고 했다. 금궤는 나무 위에 걸려져 있었고 그 아래에 흰 닭이 울어 그 금궤를 열어보니 그 안에 남자 아이가 있었다. 그가 석씨(석탈해)를 이어 신라의 임금이 되었다. 그 후손인 경순왕이 고려에 순순히 양위하였다. 을해년 다음해(1636년) 봄에 임금(인조)이 삼국의 역사를 읽고 명하여 이 그림을 그리게 했다.
이조판서 김익희가 쓰고
조속이 그리다.
여기에서 김알지를 강조하는 그림인데도 신라김씨 경순왕이 신라를 고려에 순순히 바치게 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신라 김씨왕조를 고려가 그 계통을 이어 왔음을 강조한 것이며 고려는 조선에 이어져 왔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김씨 후예인 함보가 금(金)나라를 세웠고 그 금나라의 후신인 후금 즉 청나라 황실 조상들이 세운 금나라의 본국은 신라라는 사실을 이 그림에서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이 그림이 김알지 신화를 강조하면서도 '신라와 고려의 순조로운 계승'을 강조해 놓고 있는 것이다.
<금궤도>의 어제(御製)에는 을해년 다음해인 1636년으로 그 제작 연도를 알리고 있으나, 그 글을 쓴 이조판서 김익희의 직함으로 보아서 20년 후인 1656년으로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을 그린 조속은 1656년에는 눈병으로 그림을 그릴 수가 없는 상태가 된지 4년이 경과한 시점이다. 따라서 <금궤도>는 1636년에 인조의 어명으로 그림을 그리도록 하여 조속이 그림을 완성하고 그 어제(御製)에 대한 글은 1656년 북벌론을 강화하던 효종 때에 써넣었을 수가 있다고 사료된다.
여기에서 필자는 <금궤도(金櫃圖)>의 그림 내용들이 의미하는 그 몇가지 중요한 숨은 의미들을 살펴 보고자 한다. 위의 그림은 <금궤도(金櫃圖)> 그림의 부분으로서 금궤 궤짝이 나무에 걸려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17세기 조선시대에 그려진 이 그림에서 표현된 금 궤짝은 위쪽이 평평하다는데서 신라시대 금궤 모양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조선시대 풍수의식이 가미된 궤짝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미 김(金)씨라는 글자인 '金'자의 상형 모양이 궤짝의 모양을 상형화시킨 것으로 해석한 바 있다. 상자의 위쪽이 둥글게 한 것이 고대 상자들의 모양으로 그 모습이 金자를 닮아 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특히 금을 담았거나 금은 보석과 관계 있는 상자들은 두껑 부분을 길게 둥근 지붕으로 만들었다. 그러한 모양을 옆에서 보면 '金'자 모양이 된다.
*고대 보물 궤짝에 대한 일반적인 그림 이미지
옆에서 보면 '金'자를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직지사 금동육각사리함. 국보 208호
'金'자를 닮아 있다.
금궤나 사리함 등 귀한 궤짝은 그 두껑 부분이 金자처럼 솟아올라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위쪽에 아무것이나 올려두지 못하게 하면서 위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신라시대에 금관 등 금이 대대적으로 사용된 것은 김알지 후손인 김씨왕조의 첫왕인 신라 13대 미추왕(味鄒王) 때부터였다. 김알지 후손으로서 김씨로서는 첫 왕이 미추왕이었다. 그의 7대조 김씨왕조 시조인 김알지의 금궤(金櫃)는 금으로 장식되었거나 그 안에 김알지 아기와 금이 함께 담겨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궤도>에는 김알지 신화에 근거하여 나무 밑에서 우는 흰 닭(天鷄)을 그려넣은 것을 살펴보자. 흰 닭인 이유는 '희다'는 말이 '해'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신라인들의 태양숭배사상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도 남아 있는 태안반도나 지리산의 선도성모상은 흰 색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가 태양의 여신으로 흰색이 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 계림의 닭과 태양숭배 영향을 받은 아마테라스 태양의 여신을 숭배해온 일본 천황가 제사에도 흰 닭이 나온다. 이세신궁 제사에서 흰닭은 '신계(神鷄)'로 불린다. 일본 천황가의 제사에서 '가께꼬'를 세번 외치면서 '아지메'를 부르는 의식을 행하고 있는 것은 계림 신라의 천계(天鷄) 신화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금궤도> 부분. 천계.
*일본 천황가의 조상을 모시고 있는 이세신궁의 '신계'
신라 시조신화에서 박혁거세 신화와 김알지 신화는 서로 그 시대의 신화적인 요소에서 상호 연계되어 있었다. 그것은 박과 닭이 신화적으로는 같은 의미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가지 신화와 닭 즉 천계(天鷄) 신화가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신라 시조신화에는 특히 박혁거세와 김알지 신화 모두 바가지 귀족을 의미하는 호공(瓠公)에 이어져 있다는 것도 박씨왕조와 김씨왕조의 신화들이 같은 맥락으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가지 별을 의미하는 포과성(匏瓜星)은 새벽닭 즉 천계(天鷄)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필자의 앞선 글 <흥부전 朴씨의 신라 기원론(一)>에서 논한대로 사마천의 <史記>에 한유예(漢劉睿)의 <荊州占>을 인용한 바가지와 별 그리고 닭에 대한 기록에서 볼 수 있다.
"포과(匏瓜)는 일명 천계(天鷄)라고 하며, 하고동(河鼓洞)에 있다. 포과성(匏瓜星)이 밝으면 그 해에 대풍이 든다. (匏瓜, 一名天鷄, 在河鼓洞, 匏瓜星明, 歲則大熟也)"
<史記, 天官書> 匏瓜條 <索隱>
<금궤도> 그림에 천계(天鷄)가 그려진 것은 신라의 박혁거세 시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한 셈이다. 박은 그 색갈이 희게 표현된다는 것도 흰 닭과 같은 태양숭배신앙의 '해'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초가지붕 위의 흰 박은 나중에 달덩이로 표현되었지만 본래는 해의 의미로 존재했다. 박혁거세가 박과 같은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박이 어머니로서 여성적이면서도 태양의 여신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태양의 여신을 모시는 귀족들이 신라의 박 석 김 시조 신화에 모두 나오는 호공(瓠公)들이었다.
<금궤도> 그림에서 김알지 신화의 흰 닭(天鷄)은 박혁거세 신화의 흰 박(匏瓜)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 시조신화들에 등장하는 호공(瓠公)은 '표주박 귀공자'로서 그 박(匏瓜)은 닭(天鷄)에 이어져 있었다는 것은 닭이 울면 해(박)가 뜨기 때문이다. 때문에 신라 시조신화들은 닭과 박을 함께 '태양숭배' 요소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해'를 의미하는 '흰 닭'과 '흰 박'이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17세기 조선시대에 그려진 <금궤도>에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것은 왕을 모시는 상징으로 대발부채를 그려넣은 것이 눈에 띈다. 대발부채는 고래 꼬리지느러미를 닮아 있다. 필자는 이미 <코리안 신대륙발견> 시리즈 글에서 대발부채로 대표되는 선녀의 신선부채의 이미지는 고래토템 숭배를 바탕했던 고래 꼬리지느러미 이미지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밝혔다. 대발부채를 상하로 부치는 것은 대왕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다.
대왕고래는 고래들을 잡아먹는 우두머리 고래인 범고래(orca) 또는 최고 큰 고래인 대왕고래(blue whale)를 의미한다. 제왕들의 옆에서 선녀들 또는 시종드는 사람이 들고 있는 대발부채 모양은 고래 꼬리 지느러미를 닮아 있다. 이미 필자는 '신선'의 기원이 바다의 고래에서 유래했다는 것과 고래 꼬리지느러미가 상하로 움직이는 것처럼 대발부채를 상하로 부치는 것으로 본 것읻. 이러한 특이한 모습은 고래숭배 의식에서 비롯한 것임을 앞선 글에서 밝혔다.
고래를 신으로 신앙하던 불교 이전의 토탬숭배시대에 바다의 고래는 바다의 신선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한 해신 숭배가 점차 내륙의 산신 신선으로 변이했다. 그러나 12지신상의 그림들에서 보듯이 신선의상의 날리는 띄 옷들의 표현은 그대로 바다의 해신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까지 옷고름으로 남아 있는 신선들의 의상에서 볼 수 있는 바람에 날리는듯한 고름 끈들의 표현은 고래가 좋아하는 미역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코리안 신대륙발견> 시리즈글에서 논했다. 미역밭에서 노니는 고래의 모습은 신선 의상을 입은 해신이며 바다의 신선의 원형이었던 것이다.
*미역 이미지의 여신 신선 의상
관련글: <코리안 신대륙발견> 고래 신선의 옷고름, '해대(海帶)' 미역 이야기
*12지신상의 신선의상인 띠옷에 미역 이미지가 있다.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 신라인들에게 고래숭배는 고래 이미지와 관련된 많은 흔적들을 남겼다. 문무대왕비문에 기록되어 있는대로 문무대왕이 고래나루에 장례가 되었다는 '분골경진(粉骨鯨津)'이라는 표현은 그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아메리카 인디안들이나 남태평양 고래잡이 전통 문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래는 지배자의 혈통에 이어진 조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신라 왕실의 토템인 고래에 대한 기록은 왕실의 내용으로 숨어 있는 왕실종교 형태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배경에서 신라의 고래토템 숭배는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고 상징적 또는 간접적으로 표현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임금의 얼굴을 직접 그리지 못하도록 한 것이라든지 그 이름도 일반인들은 사용하게 하지 못하는 피휘(避諱)의 전통은 왕실의 고래토템숭배에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대왕고래'와 신라의 수많은 임금들 뒤에 붙이는 '대왕'의 칭호는 '대왕'이라는 이름으로 고래를 상징하는 전통 무속에 남아져 왔다.
오늘날도 대왕고래, 대왕오징어, 대왕조개 등 바다 동물에서 큰 동물은 '대왕'을 붙인다는 것은 삼국시대의 대왕들 특히 신라 왕들에게 '대왕'을 붙이는 것은 고래토템숭배에서 비롯하는 해신숭배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육지동물의 경우는 '대왕소' 또는 '대왕곰'이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산속의 지붕을 '황소지붕'이나 '곰지붕'이라고 하지 않고 '고래등 같은 지붕'이라고 표현한 것과 같은 고래토템 숭배 문화의 영향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신라 문화에 남아 있는 고래토템 이미지는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첨성대 모양이 '숨구멍이 있는 신라인들의 고래토템폴'이었을 수도 있다는 필자의 새로운 주장은 아메리카 인디안들의 토템폴에서 고래찾기와 같은 해석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인디안들의 고래토템폴의 고래는 주로 머리를 아래로 하는 거꾸로 새겨져 있듯이 첨성대는 고래의 머리 부분이 땅을 향하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메리카 인디안들에게 첨성대를 보여주면 분명 고래가 거꾸로 서 있는 '고래토템'으로 읽힐 수가 있다.
그 외에도 신라 금관의 형상에서 출(出)자 모양은 고래 작살 이미지이며 금관 내부의 부속 이미지에도 고래 꼬리 지느러미를 형상화하고 있다든지, 백제의 칠지도는 작살 형상을 한 왕실의 대왕고래 숭배의 위엄을 가진 것으로 왜왕에게 하사된 것으로 새로운 해석을 한 상세한 내용들은 필자의 글 <코리안 신대륙발견: 신라 금관과 백제 칠지도는 고래토템 숭배의 집합체>에서 볼 수 있다.
고래에는 '범고래' 또는 '대왕고래'라는 칭호에서 보듯이 고래 중의 고래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왕중 왕'은 '대왕' 의미로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다. 지배자에 대한 '대왕' 이미지를 다른 작은 고래들이 호위하는 의미로 고래 꼬리지느러미 이미지를 한 대발부채가 동아시아 고대 제왕들의 주위에서 시종들이 부치는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대발부채를 고대 동아시아 문화에서 너무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사대주의 의식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모든 고대 문명들이 강하구 즉 바다문화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면에서 중국 문화에서 보여주는 많은 상징적인 문화들은 바다에서 가장 큰 '대왕동물'인 고래토템숭배의 영향을받은 것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선사시대 고래는 동아시아에서 코리안들이 가장 강력한 고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울산 반구대 고래 암각화에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일상생활 문화에서 언어에서 고래에 대한 가장 많은 흔적을 유지해 오고 있는 민족이 코리안들이다.
새끼를 낳은 어미 고래가 미역을 '먹는'(또는 미역밭에 청어알을 훑어먹는) 모습에서 우리 민족의 어머니들은 산후음식으로 미역국을 먹고 그 영향이 지금도 세계 유일의 문화로 남아 있다는 것도 그 한 예이다. 미역국이 어머니와 관련이 있다는 것만큼 고래토템 숭배는 새끼를 키우는 암고래에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대왕고래'는 사실 '여대왕고래'였던 것이다.
전통 신선의상의 표현과 대발부채의 표현은 모두 선녀가 든 표현으로 나타내는 수가 많다. 선녀의 헤어스타일도 대발부채처럼 고래 꼬리지느러미처럼 형상되는 수가 많은 것도 같은 맥락의 '고래신선' 또는 '대왕고래'의 모계적 토템숭배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선녀의 헤어스타일과 대발부채 형상은
고래토템 숭배의 결과로서 고래 꼬리지느러미 이미지였을 것이다.
바다 세력이 약해지고 대륙세력이 강해진 뒤에 해신 신선의 영향은 산신 신선화되어 가면서 모계신선은 부계신선으로 변이되어 았다. 그러나 우리는 신라의 선도성모와 관련하여 '할미산성'의 광범위한 산재에서 보듯이 고대 강 하구문명이 가지는 바다의 해신 즉 고래토템숭배의 영향은 남아 있다.
'대왕'이 여성에서 남성화되어 감으로 인하여 바다의 최대 동물토템인 고래숭배 신앙은 남성 지배자들의 이미지 형상 구조에 변천 도입되었으며 여신적인 선녀상은 남자 대왕 양쪽으로 대발부채를 들고 서 있는 보조자 이미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래 '선녀 부채' 또는 '대발부채'는 바다의 고래토템 숭배 영향에서 나온 '고래 꼬리지느러미'가 그 유래라고 필자는 생각하는 것이다.
<금궤도>에서 대발부채를 든 사람은 남성으로 표현된 것은 신라 초기가 아닌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보아야 한다.
*<금궤도> 부분. 대발부채 든 모습.
김알지 탄강신화에 대발부채를 들고 금궤를 왕이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다.
대발부채는 주로 왕의 양쪽에서 부치는 형국을 보여준다. 이렇게 양쪽에서 대발부채를 부치는 모양에 대하여 여기에서 좀더 색다른 해석을 덧붙이고자 한다.
기본적으로 대발부채는 양쪽에서 부치고 중앙에 대왕이 앉아 있는 '세 사람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오늘날도 볼 수 있는 멕시코 연안에서 볼 수 있는 '귀신고래 세 마리' 구조에서 비롯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는 동해안의 귀신고래가 오호츠크를 넘어 알라스카까지 올라갔으며, 그곳에서 멕시코의 바하 켈리포니아로도 오르내렸다. 오늘날도 아메리카 대륙 태평양 연안을 오르내리면서 짝짓기를 하는 귀신고래들은 주로 세마리가 움직이는 것이 관측된다.
이러한 특이한 바하 캘리포니아 연안의 '세 마리 귀신고래' 장면은 울산 MBC방송의 <한국 귀신고래> 프로그램에서도 보여주었지만, 자주 세 마리의 고래가 목격되는 것은 "한 마리의 암 고래를 두고 두 마리의 수컷 고래들이 경쟁을 하면서 싸우느라 뒤치락대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특히 암컷을 사이에 두고 수컷이 오르락 내리락 그 꼬리 지느러미를 물밖 공중으로 올렸다가 내리는 그 모습은 필자에게 '여대왕' 양쪽으로 수컷 고래 꼬리지느러미와 같은 '대발부채'를 상하로 부치는 모양으로 다가온다.
<화랑세기>를 번역한 박창화의 다른 번역 문헌들에서 보여주듯이 초기 신라의 왕실에는 왕후들이 왕보다 더욱 강력한 위치에 있었다. 그것은 경주의 황남대총 쌍고분 발굴에서 남분에서 발굴된 왕후의 금관이 북분에서 발굴된 왕의 금관보다 더욱 화려한 것에서도 증명이 된다. 대발부채를 든 본래의 이미지는 남성적 시종이며 '대왕'은 여성적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신라 초기의 왕후들이 왕들보다 상위적인 위치에 있었던 내용들은 필자의 앞선 글 <역사산책> 유황(幌宮)궁주의 숭배로 본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타나는 미실(美室)의 권력에서 볼 수 있다.
왕의 주위에서 선녀들 또는 신하가 대발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은 바람을 일으키거나 햇빛을 가리는 기능면보다 오히려 고래들이 주위를 호위한다는 의미를 가지며 그 가운데 왕은 일반 고래들의 시중을 받는 '대왕고래'라는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금궤도>에서 특별히 대발부채 시중을 받는 귀족 또는 '왕'의 머리 장식을 한 사람은 금궤 상자 안의 '대왕'을 모시는 고래 이미지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금궤도>에서 대발부채의 시중을 받고 있는 중국풍의 '임금머리' 장식을 한 남성의 모습은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 지배자를 상징하여 조선을 상징하는 금궤를 향하여 경외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는 장면으로 상징화되어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금궤도>는 칭황제를 강요하는 청나라 황제에 대하여 '누가 황제이고 누가 경외적인 자세를 가지고 '대왕'을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풍자적으로 시사하는 그림인 것이다.
한편 <금궤도>는 신라 전통을 강조하면서도 조선시대 문화를 바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림에서 금궤가 달려 있는 나무가 있는 곳은 음양풍수에서 명당의 위치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특히 그렇다.
그림에서 신라 김씨시조 김알지 신화의 배경이 되는 경주의 계림숲은 평지에 가까우나, <금궤도>에 그려진 산세는 주산을 배경으로 좌청룡 우백호를 배치한 사이에 금궤가 위치하고 있다. 더불어 명당수를 강조하고 있어 조선시대 풍수사상을 뒷받침해주고 있다고 보여진다.
<금궤도> 그림의 금궤가 걸린 나무와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그러나 <금궤도> 작품에 나타나는 풍수 명당의 산세는 경주의 황남동 계림세묘(鷄林世廟)의 풍경을 조선시대 풍수 명당개념을 적용시켰다고 볼 수 있다.
*신라 김알지 신화를 그린 조선시대 금궤도(金櫃圖).
1636년 (을해년 다음해)라는 기록이 있다.
*김알지 탄강신화의 현장. 계림세묘(鷄林世廟 경주 황남동)
위쪽의 <금궤도> 그림에서는 조선시대 풍수명당 개념을 적용시켰다.
<금궤도>에서 금궤가 걸려 있는 나무의 모양은 위의 경주 황남동의 고목보다 조금 '어리게' 그려져 있다. 위의 경주 황남동 고목이 17세기 때에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나무의 모양이 <금궤도>에 그대로 그려진 것이었을까?
나무는 옛사람들의 생명순환의 숭배대상으로 되어 있었다. 느티나무 신앙에서 볼 수 있듯이 12지신상의 동물토템 지신이 있기 이전에 신라에는 나무 수신(樹神) 숭배에 대한 무속적 문화가 존재했다. 앞선 글에서 논했지만, <화랑세기>를 번역한 박창화의 다른 번역 문헌들에는 왕자가 태어나면 무당들을 불러 감나무 수신에게 굿을 한 것은 물론 버드나무 수신이 일어나면 나라가 흥하는 것으로 표현하거나, 왕자의 나무 수신에 문제가 생기면 왕자에게도 문제가 생겼다는 기록을 여러 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열두 동물지신이 있기 전에 여러 다양한 나무수신 숭배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금궤도>에서 그리고 신라 김알지 신화에서 금궤가 걸린 나무를 단순히 보아서는 안되는 수신 신앙이 있었다는 것을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도가사상에서는 태어나는 것은 죽음의 환생사상을 바탕하고 있다. 그 태어남은 어머니 대자연의 명당의 골짜기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금궤도>에서 김알지 아기가 들어 있는 금궤는 그런 면에서 나무로 짠 관의 환생적 재생 이미지를 가진다. 청나라에 굴복한 조선은 김알지의 '환생'처럼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기원이 명당에 그려진 <금궤도>에 표현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친명배금 정책으로 후금의 침략을 당한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정신적 갈등 속에서 조선 조정은 조선 - 청 관계를 청나라보다 조선이 본래 우위의 위치에 있었던 신라 - 금의 관계를 되돌아 보려 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청나라 건국연도와 관련하여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 조정에서 어명으로 그려진 <금궤도(金櫃圖)>는 신라 - 고려 - 조선을 이어 내려온 그 역사적 정통성이 청나라의 '본국'의 의미를 지닌다는 뜻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은 신라 경순왕에게서 순조롭게 양위를 받은 고려의 계승을 이어받은 것으로 청나라보다 더 '대왕국'이라는 의미가 <금궤도>의 어제(御製)에서 특히 강조한 것이다.(10/05/10 오두 김성규 odunamsan@hanmail.net )
*신라 김씨 왕조와 금나라 청나라에 관한 관련글들:
<역사산책> 병자호란 후 <흥부전> <박씨전> 유행의 新羅的 배경 (四)
<역사산책> 마의태자의 신라부흥운동 뒤에는 경순왕이 있었다 (1)
<역사산책>연암 박지원의 '愛新覺羅'와 김부식의 '東神聖母' (一)
<신화이야기 173> 중국의 번시 박(朴)씨들은 신라에서 유래했을까?
*전통 회화 해석에 대한 필자의 관련글들:
<역사단상> 추사(秋史) 세한도(歲寒圖)에 숨어 있는 일월오악도 (I)
<동양학 강의 34> 17세기 겸재 정선의 쌍도정도는 두 개의 섬이 아닌 세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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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닭 띠의 해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영 편치가 않네요. 닭들의 모진 수난 때문이지요. 조류 인플루엔자라는 몹쓸 바이러스에 수많은 닭이 차디찬 땅속에 묻혔습니다. 나란히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닭에게 정말 큰 빚을 진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참 오랜 세월 우리와 함께 살아왔는데 말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닭은 우리 인간에게 퍽 중요한 식량 공급원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닭은 대단히 신성하고 상서로운 존재였어요.
서쪽에서 올려다본 경복궁 근정전 계단. 앞쪽 월대 기둥머리 위에 닭 한 쌍이 앉아 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은 돌로 쌓은 두 단의 월대 위에 우뚝 서 있습니다. 대개 관람객들은 근정전 건물에만 눈길을 주게 마련인데, 실은 월대를 찬찬히 둘러보는 맛이 정말 각별하거든요. 위아래 월대 곳곳을 지키는 예쁜 돌조각들 때문이랍니다. 사신상과 십이지신상들이지요. 이 가운데 근정전 서쪽 계단의 아래쪽 월대 기둥 위에 닭 한 쌍이 다소곳이 앉아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임금이 앉았던 자리에서 보면 왼쪽이 수탉, 오른쪽이 암탉입니다.
닭이 울면 귀한 존재가 태어났다!
닭이 궁궐 계단을 지키고 있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닭은 십이지의 열 번째 동물이지요. 방향으로는 서쪽, 시간으로는 오후 5시에서 7시, 달로는 음력 8월을 지키는 방위의 신이자 시간의 신입니다. 닭이 신성한 동물로 여겨진 역사적 유래는 아주 깁니다.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배웠듯 일연의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나지요. 게다가 혁거세 왕의 왕후가 탄생한 과정은 더 흥미롭습니다.
“그날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英井) 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 여자아이의 얼굴과 용모는 매우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 부리와 같았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태어났으므로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는데 이것은 계룡이 상서로움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자, 숲 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국호를 고쳐 계림이라 했다고 한다.”
신라 김 씨의 시조로 여겨지는 김알지의 탄생설화에도 닭이 등장합니다.
“하늘에서 땅까지 자줏빛 구름이 드리워지고 구름 속으로 보이는 나뭇가지에 황금 상자가 걸려 있었다. 상자 안에서 빛이 나오고 있었고 나무 밑에는 흰 닭이 울고 있었다. (중략) 왕이 숲으로 가 상자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바로 일어났는데, 혁거세의 고사와 같았기 때문에 알지(閼智)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속 <조속필금궤도>, 비단에 채색, 105.5×56.0cm, 1635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숲 속에서 닭이 울어서 나라 이름을 고쳤다 했을 정도로 우리 옛 시조 설화에서 닭은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건국에 신성함을 부여하는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바로 이 김알지 설화를 그림으로 남긴 이가 있었지요. 조선 후기의 사대부 화가인 창강 조속(趙涑, 1595∼1668)이 그린 <금궤도>란 그림인데요. 보시는 것처럼 커다란 나무에 금궤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에서 흰 닭이 목을 빼 울고 있습니다.
(좌) 고구려 무용총 천장 그림 / (우) 경복궁 근정전 주작상
닭을 신성시하고 숭배했던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로 오면 구체적인 유물들이 등장하는데요. 고구려 고분 무용총 천장에는 긴 꼬리를 가진 닭이 그려져 있습니다. 닭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은 주작입니다. 닭의 모습을 본떠서 그려냈기 때문이겠지요. 아시다시피 주작은 남쪽을 지키는 동물입니다. 경복궁 근정전을 정면에서, 다시 말해 남쪽에서 바라보면 위쪽 월대 기둥머리에 닭의 모습을 한 돌조각이 놓여 있어요. 닭으로 여기기 쉽지만 주작입니다.
(좌) <계형토기>, 백제시대, 높이 19.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닭>, 통일신라시대, 전(傳) 민애왕릉 출토,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백제의 유물로는 닭 모양 토기가 남아 있어요. 생김새는 비교적 단순하지만 질그릇 특유의 소박한 멋이 참 아름답지요. 섣부른 감은 있지만 닭의 이미지가 생활 속 물건에 반영된 가장 오래된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른쪽에 있는 유물은 신라의 44대 왕인 민애왕의 것으로 전해지는 무덤에서 출토된 겁니다. 1980년대 발굴조사 당시 무덤 안에서 십이지상 가운데 쥐ㆍ돼지ㆍ소ㆍ닭 4개만 발견됐다고 해요. 높이 10cm로 아담한 이 조각들은 무덤의 바깥쪽을 보며 서 있었다고 합니다.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이었던 거지요.
<김유신묘 십이지 유상 탁본>, 통일신라, 가로 71×세로 159,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무덤까지 함께하는 동반자! 닭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김유신 장군의 묘에도 십이지신상 가운데 닭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요. 그 탁본 중 하나가 단국대 석주선 기념 박물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닭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고 두 손에는 각각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지요. 무덤을 지켜야 하니까요. 박물관 유물 해설에 따르면 김유신묘의 십이지상은 현존하는 십이지상 가운데 예술적인 면이나 규모 면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힌다고 해요.
조선시대 닭 그림의 대가 변상벽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로 넘어오면 이제 본격적으로 그림에 닭이 등장합니다. 조선의 닭 그림 하면 단 하나의 이름을 떠올릴 수밖에 없지요. 그 주인공은 바로 조선 후기의 화원화가 변상벽(卞相壁, ?~?)입니다. 두 차례나 영조의 초상화를 그렸을 정도로 그림 솜씨로는 당대 최고였던 변상벽을 더 유명하게 만든 건 바로 고양이와 닭 그림입니다. 얼마나 귀신같이 잘 그렸으면 변 고양이(卞古羊), 변 닭(卞鷄)이란 별명으로 불렸을까요.
변상벽, <모계영자도>, 비단에 수묵담채, 100.9×50.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전설적인 닭 그림이라고 불러도 좋은 변상벽의 작품은 대표적으로 두 점이 거론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 그림이 바로 위에 보시는 <모계영자도(母鷄領子圖)>에요. 어미닭의 부리를 자세히 보면 벌레를 물고 있지요. 귀엽고 앙증맞은 새끼 병아리들에게 먹이를 줄 참입니다. 어미와 새끼들이 다정하게 어울린 모습에서 살뜰한 모정(母情)과 따스한 가족애(家族愛)가 느껴져 마음이 다 푸근해지네요.
그래서 이 그림은 우리 옛 그림을 소개하는 여러 미술 책에 꽤 자주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작고한 미술사학자 오주석 선생의 글을 빼놓을 수 없어요. 그 감동이 어찌나 컸던지 각기 다른 자신의 책에 두 번씩이나 이 작품에 대한 깊고도 진한 애정을 토로했습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미술 강연에서 절대 빼놓지 않았던 그림으로 바로 이 <모계영자도>를 꼽으면서 이런 상찬의 말을 남겼지요.
“세상에 원, 외국 박물관에서도 여기저기서 닭 그림을 많이 보시겠지만 이렇게 정답고 살가운 그림은 다시없어요!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선한 작품을 그리고, 또 그것이 좋아서 벽에 걸어 두고 흐뭇해했던 우리 조상들의 삶이 얼마나 순박하고 착한 것이었는지 절로 느껴집니다.”
변상벽, <자웅장추>, 종이에 채색, 30.0×46.0cm, 간송미술관 소장
여기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닭 그림이 있습니다. 화면 오른쪽에 잘 생긴 수탉과 암탉 한 쌍이 있고, 왼쪽으로는 암탉 주위로 병아리들이 종종 모여 있군요. 닭 가족의 평화롭고 단란한 한때를 그렸습니다. 소재도, 구도도 평범하지요. 하지만 닭과 병아리를 묘사한 솜씨만큼은 정말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놀랍거든요. 아주 가는 붓으로 닭의 깃털을 한 올 한 올 그어냈을 화가의 집착에 가까운 육체노동이 빚은 경탄스러운 극사실의 세계가 여기에 있습니다. 백인산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초상화로 다져진 숙련된 기량이 닭을 그리면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으니, 가히 닭의 초상이라 할만하다.”라고 썼습니다. 절묘한 그림에 걸맞은 절묘한 표현입니다.
백인산 선생의 책 <간송미술 36 회화>를 보면 조선 후기의 대학자 다산 정약용이 변상벽의 그림을 품평한 흥미로운 글이 소개돼 있습니다. 당시에 변상벽이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를 이보다 더 잘 알려주는 글은 없지 싶어요.
“변상벽이 변 고양이로 불리는 것은 고양이를 잘 그린다고 사방에 이름이 나서이다. 이젠 또 닭과 병아리를 그려내니, 마리 마리가 털이 살아 있는 것 같다. (중략) 형형색색 세밀하여 실물과 똑같고, 도도한 기상 또한 막을 수 없다. 듣자 하니 이 그림을 막 그렸을 때, 수탉이 잘못 알고 울어 댔다 한다. 그가 고양이를 그렸을 때도 쥐들이 겁을 먹었으리라. 기예의 지극함이 여기까지 이르니, 만지고 또 만져도 싫지가 않다. 되지 못한 화가들은 산수화를 그린다며 이리저리 휘두르니 거칠기만 할 뿐이다.”
예로부터 닭은 다섯 가지 덕을 지니고 있다 했지요. 머리에 벼슬을 이고 있는 것은 벼슬자리, 즉 입신출세를 상징한다 해서 문(文), 발에 달린 발톱은 무기로 쓰이니 무(武), 적 앞에서 물러섬이 없이 싸운다 하여 용(勇), 먹이가 생기면 서로 알려주고 먹여주는 것은 인(仁), 때를 놓치지 않고 정시에 꼬끼오 하며 정확하게 제 할 일을 한다 해서 신(信)입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닭을 사랑했고, 그림으로도 그렸던 겁니다.
정선, <등롱웅계>, 비단에 채색, 30.5×20.8cm,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의 위대한 화가들이 그린 닭
조선 최고의 화가들도 한두 점씩은 닭 그림을 남겼지요. 진경산수의 대가로 추앙받는 겸재 정선의 그림 가운데 <등롱웅계(燈籠雄鷄)>란 작품이 있습니다. ‘꽈리와 수탉’이란 뜻입니다. 겸재 하면 워낙에 산수화 걸작이 많다 보니 상대적으로 낯설게 보일 정도인데요. 이 그림에서 우리는 가장 기세등등하고 호전적인 장닭의 위용을 보게 됩니다. 자세를 한껏 낮춰 당장이라도 돌격 앞으로 할 것만 같은 자세에서 생생한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나요. 더욱이 흰 벼슬은 바로 토종닭의 징표이기도 하니, 참 장하고 자랑스러운 토종닭 그림입니다.
김득신, <야묘도추>, 종이에 담채, 22.4×27.0cm, 간송미술관 소장
너무나도 유명한 그림이니 따로 소개해 드리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린 이는 조선 후기의 화원화가인 긍재 김득신(金得臣, 1754~1822)입니다. 마치 움직이는 동영상의 정지 화면을 보듯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이며 동물들의 자세, 표정 하나하나에 사실감이 넘칩니다. 선배 김홍도와 후배 신윤복, 두 대가 사이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는 김득신이었다지만, 이 그림만큼은 화가의 유명세와 관계없이 걸작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눈길은 닭에게 가닿습니다. 새끼 병아리를 물고 달아나는 고양이를 따라가보려고 홰를 치는 어미닭의 자세에서 자식을 잃을지 모르는 어미의 절박함이 뚝뚝 묻어나지요. 어미닭 주위로 놀라서 혼비백산 달아나느라 여념이 없는 병아리들의 모습은 또 어떻고요. 병아리 절도 사건이란 심각한 내용을 다뤘지만,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절로 떠오르는 미소까지야 어쩌겠어요. 기분 좋은 해학이 깃든 그림입니다.
신윤복, <닭>, 비단에 채색, 23×23.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혜원 신윤복의 것으로 전하는 닭 그림도 한 점 있습니다. 두 마리 모두 발 뒤에 뾰족한 칼날을 달고 있지요. 싸움닭입니다. 자세를 보면 한 판 붙기 전에 치열한 탐색전을 벌이고 있는 모양새에요. 그런데 자세를 보아하니 승부의 추는 이미 기울어진 것 같기도 합니다. 닭의 다섯 가지 덕 가운데 무(武)와 용(勇)을 드러낸 이 그림의 오른쪽 위에 있는 글귀는 중국 당나라를 대표하는 문장가였던 한유의 글을 인용한 겁니다.
高行若矜豪 (고행약긍호) 고상한 행동은 거만하고 호방한 듯
側睨如伺殆 (측예여사태) 곁눈질로 허점을 살피네.
닭에게서 각별한 깨달음을 얻다
그런 닭이 어떤 선비에게는 삶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주기도 했습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은 자신의 문집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닭에 관한 글을 여럿 남겼는데요. 병아리(鷄雛)란 글을 보면 어쩜 그렇게 병아리의 생태를 면밀하게 관찰해 놓았는지요. 배고픔과 추위에 곧잘 죽는 병아리를 먹여 살리는 방법이라든가, 먹이 경쟁에서 밀려난 병아리를 돌보는 요령, 심지어 병아리 똥구멍이 막혔을 때 뚫어주는 방법까지 적어놓았으니 말입니다. 학문의 실질적 쓸모에 관심을 기울였던 실학자답습니다. 이 글의 마지막 단락을 함께 읽어볼까요.
“백성들이 여러 가지로 고통을 겪는 모습 또한 잘 살고 귀한 지위에 있는 자들은 깨닫지 못한다.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백성들이 온갖 고통을 겪고 또 배도 곯게 되니 어찌 떠돌아다니다가 도랑과 구렁에 엎어져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승업, <계도(鷄圖)>, 19세기 후반, 종이에 담채, 140×43.5cm, 개인 소장
그런가 하면 축계지편당(祝鷄知偏黨)이란 제목의 글도 있습니다. ‘닭을 키워보면 당파에 치우치는 걸 알 수 있다.’는 뜻인데요. 서로 먹이를 차지하기 위해 아웅다웅 싸우는 닭들의 생태에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출세를 탐하는 인간 사회의 추악한 이면을 본 겁니다. 요즘도 닭의 특정한 신체 부위를 들어 상대를 비꼬고 폄하하는 말이 심심찮게 쓰이지요. 닭으로서는 억울할 만도 하겠습니다. 심지어 그런 닭만도 못한 사람에 대한 비유까지 나오는 마당이니 말입니다.
“사람에겐 닭보다 못한 것도 있다. 닭들이 먹을 것을 다툴 때는 날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면서 싸우다가도 그 일만 끝나면 서로 다투던 일은 잊은 채 언제 그랬냐는 듯 사이좋게 지낸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폭포의 물이 용솟음치듯 노여운 모습을 가라앉히지 않는다. 그리하여 반드시 상대를 죽여 없애 버리고자 하면서 자신의 잘못은 결코 뉘우치지 않으니, 이야말로 차마 못할 일이다.”
번잡한 도시의 삶은 꼬끼오 우렁찬 닭 울음소리를 속절없이 앗아갔지요. 그래서 이제는 식탁 위 먹을거리로 제 한 몸 내준 닭이 우리에겐 더 친숙합니다. 뜻하지 않게 닭 값, 계란 값이 오르는 초유의 상황을 겪고 나니 아낌없이 주고 또 주는 닭의 존재가 새삼 고맙게 느껴집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새해가 밝았습니다. 닭의 해인 2017년에는 부디 여느 해보다 기쁘고 행복한 일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심전 안중식 <쌍계도>(1900년) 부분
※ 이 글은 아래 책과 글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김흥식 엮음, 정종우 해설 <조선동물기>(서해문집, 2014)
백인산 <간송미술 36 회화>(컬처그라퍼, 2014)
오주석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솔, 2003)
오주석 <그림 속에 노닐다>(솔, 2008)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민음사, 2008)
천진기 ‘여명과 축귀의 계명성’ <정유년 닭띠 학술 토론회 자료집>(국립민속박물관, 2016)
탁현규 <고화정담>(디자인하우스, 2015)
<간송문화 : 간송미술문화재단 설립 기념전>(간송미술문화재단, 2014)
<간송문화 90 화훼영모 – 자연을 품다>(간송미술문화재단, 2015)
출처: http://www.ssgblog.com/2145 [신세계그룹 공식 블로그]
현재 서양사람들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느끼는 장점을 머리속에 넣고 한국화를 보는 시대가 됐다. 그래서 미감, 음감을 서양식으로 세뇌받음.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서양은 옳고 우리는 그르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진짜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을 잊어버렸다.
우 리 그림의 기본개념은 선으로 사물을 표현하는 것이다. 서양의 칠로 질감을 나타내는 그림의 개념으로는 이해 할수없는 것이다. 선을 표현하자니 지,필,묵이 자연히 유행하였다. 유성은 선이 표현이 안되고, 따라서 물에 녹는 먹이 발달했다.
황하유역 포함 우리 한반도 일대는 사계가 아주 분명함. 농경문화 존재하게 된 이유. 우주자연의 섭리가 그리돼있다고 여김.
24절기 정확히 운행. 운동성있는 것을 표현 그것이 선이다. 움직이는 시점을 따라감. 반면 그리스는 자연에 재해를 극복해야함. 농사에 적합하지 않음. 그래서 신화가 발달하게 됨. 시점을 정지시킬 수 밖에 없다.
이념은 뿌리이고, 예술은 꽃이다. 시대마다 지방마다 지역마다 예술양식이 다르다. 그래서 뿌리가 바뀌면 꽃이 바뀔 수 밖에 없다. 문화는 그 시대를 주도하는 이념에 따라 내용과 방향이 결정된다. 중국의 북종화는 선묘 위주, 남종화는 습한 기후로 먹의 번짐효과를 살린 농담이 주로 발전.
예를 들면 신라시대, 석조예술을 보면 다른 것도 석조예술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했으리라 추측가능.
그 시대는 불상조각이 대표적인 예술 석굴암, 고려시대는 청자, 조선시대는 서화가 절정에 이르는 시기 그이유는 조선이 국시로 내 건 성리학 때문. 극점이 진경산수화, 풍속화이다.
남북조 시대는 불상이 극에 달함
당나라 시대는 서예가 극에 달함
송나라 시대는 그림발전이 극에 달함
뭐든지 한번 극에 달하면 계속되지는 않는다.
요즘세대는 과학정신...그래서 과학을 바탕으로 한 영화
고려 1392년에 망함 1천년동안 불교이념이 존재했음
화엄종 이념 이후 조계 선종이들어와 고려를 건국함. 상감청자, 팔만대장경을 탄생시킴
그 이념이 노쇄화 되면서 성리학을 받아들임.
항상 우리나라는 우리에게 맞는 것 딱하나를 선택한 후 다시 문닫고, 우리풍토에 맞게 발전시키고 완성시킴
그래서 심화 발전을 시켜 중국에는 없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게 됨.
김시 야우한와는 아직 중국의 화풍이다. 물소는 중국의 소. 중국이념이므로 중국의 이념을 가지고 저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아무도 이상하다 느끼지 않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100년 정도를 중국화풍으로 계속 됐음
강희안 "고사도교"
세종대왕은 주자성리학에 입각한 조선왕조 통치기준을 마련 하신 분이다. 집현전에 모아놓고 집중적 교육을 시킴.
모든 백성에게 제대로 이해시키기 위해 한글창제를 한 것임.
우 리는 북방중국과 기후 풍토가 비슷해서 남방화법으로 즐기지를 않았다. 고려시대까지 북방화법으로 그림, 불화들이 선묘로 그려진 것을 보면 알수 있다. 안평대군이 안견에게 시켜서 그린 "몽유도원도"가 대표적인 북종화. 안평대군은 세종의 세째아들 시문서화금기에 능했다. 안평대군 쌍삼절(시, 서, 화 뿐 만 아니라 금琴, 기棋, 문文에 능함) 시서화면 삼절이라 부름 모든 분야의 예술에 달통한 인물.
주자학은 남중국사람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해졌다. 쿠빌라이칸의 외손자인 충선왕이 만권당을 설치해서 송설 조맹부의 서체를 고려에 전파함. 군사외교를 다 뺏긴 왕이었다. 이에 학문에 전념했다.남송과 금나라에서 많은 서적들을 모으고, 중국의 1급학자들에게 직접 우리 자제들을 가르치게 함. 남 송의 종실출신 황제의 족속. 고려때 원나라인 시절 남송의 대학자였던 조맹부라는 학자를 초빙해 고려의 뛰어난 인재를 기름 거기서 성리학이 들어옴. 조맹부는 원나라의 화가, 서예가로 정치, 경제, 시서화에 넒은 지식을 가졌으며, 특히 서화에 뛰어났음. 전무 후무한 일임. 중국의 1급학자가 우리 자제를 가르침 (당시 조맹부61세 충선왕 40세 익제 이재현 28세 행촌 이암 18세)
남 종화는 주자의 성리학을 담고 있는 그림이었고, 성리학은 불교+유교가 적절이 배합된 이념임. 주자의 성리학의 복잡한 설을 이해시키기 위해 시, 서, 화로 원리를 가르쳤고, 그래서 성리학을 하는 사람들은 시서화를 못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중 국문화권에선 원래 우주철학이 없었다. 내세 우주를 생각치 않았다. 농경에 적합한 지역은 현세가 극락이다..그래서 윤리철학만 발달...유가이념이 대표적 사람과 사람관계만을 설정해줬다. 한대까지 살다가, 이민족 침략이 시작되며 중국이 지옥이 되고 종교가 필요해짐. 불교 들어오고 전 중국이 불국토가 됨.
불교이념이 노쇠하고 난후 유+불 접목시켜 합친 성리학이 발생_이기이원론(만물의 존재가 이理와 기氣 두가지 요소로 이루어 졌다고 설명하는 성리학의 이론) 불교에서는 이미 우주생성원리를 설명했다. 그래서 주역의 음양원리에 불교의 우주관을 접목시켜 우주생성의 원리를 이와 기로 설명하려 시도.
理는 불변적인 요소로 만물의 근원이 된다. 존재를 가능케 하는 본질 혹은 원리를 일컫는 개념
氣는 가변적인 존재로 만물의 물질적 존재와 감정 등 인식이 가능한 모든 요소를 일컫는 개념
기 와 이가 만나면 기가 발동하면 이도 같이 발동한다. 이것은 이기호발설...이기호발설理氣互發設은 이는 인간의 마음을 뜻하는 사단四端을, 기는 감정을 뜻하는 칠정七情을 드러낸다는 이황의 사상. 조선을 건국한 성리학임. 북방화법이기는 하나 우리의 산천은 아님. 주자도 남중국 조맹부도 남송분...그래서, 자연히 남중국 그림이 전해지게 됨.
성리학을 누구나 받아 들일 수 있는 개념은 아니다. 그 얘기를 듣도록 해야 하는데 시문서화 예술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이해할 수 있게 했음. 예술은 제도지구다 복잡한 지도체계를 예술로 자연스레 알려줬다. 주자 성리학자는 시문서화는 기본교양으로 다 깔고 있다. 조맹부님을 통해서 자연스레 남종화가 시행되어짐. 집현전 학사 강희안님도 남방화로 인물을 그리고, 산천을 그렸다.
집현전 학사...글씨를 잘쓰면 글쓰는 붓으로 구상적인 표현을 하면 묵법이 가능함.
제2강 진경으로 가는 길
"서울화단":중국의 남종화, 북종화가 공유된 시대가 옴.
안견 몽유도원도, 화원화가 대표, 북방산수화.
강희안 남방산수화,사대부화가,고사관수도,고사도교도 고사는 큰 선비가 물을 바라본다든지, 다리를 건넌다던지의 의미.
수양대군(세조) 왕위찬탈위해 안평대군 역모로 몰아서 죽임. 안평대군 쌍삼절(시, 서, 화 뿐 만 아니라 금琴, 기棋, 문文에 능함) 시서화면 삼절이라 부름. 측근들 세종대왕때 이전으로 후퇴하는 현상.
단종복위때 대부분의 선비 죽고 없어짐.
성종이 선비를 다시 끌어 들일 때, 경상도 선산 고려말 절의 지키고 내려간 야은 길재(1353-1419)가 제자 양성.
그 영남선비를 모아서 다시 새출발 성리학에 입각한 이상정치를 펴보려고 함. 그러나 수양대군 기득공신세력이 강함.
연산군이 등극하면서 무오사화가 일어나 일망타진 됨.
연산군이 폐비윤씨의 소생으로 사사된 사실을 알고 그에 관련된 사람들을 무차별하게 죽임 그것이 갑자사화.
수양대군 때 기득공신세력이 전멸-조선이 건전하게 발전 할수 있었음.
중종이 바르게 나갈 수 있었음.
기묘사화-중종14년에 조광조 등의 신진사림이 축출됨.
선비들은 농부처럼 씨뿌려 제자기르는 습성이 있음..서울중심 기호지방에서 성장(조광조세력)
기득권층 강하게 반발-이때 당한 세력은 기묘명현이라 일컬음.
지지세력이 없어서 늘 개혁하려면 실패를 맛보게 됨. 그래서 고향으로 내려가 공부에 몰두를 하기 시작함.
그 대표적인 선비는 개성-화담 서경덕, 안동-퇴계 이황, 지리산 밑-남명 조식, 전라도 장성갈재 밑 하서 김인후
그중 이황이 이기이원론을 제대로 이해함.
율곡은 16세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심경이 복잡해서, 금강산으로 출가를 했던 듯.
1년동안 금강산 안의 일체장경을 다 읽었음..생불났다고 소문남.
주자는 불경을 부분적으로 읽었으나 율곡은 다 읽어서 불경에서 얘기하는 우주철학의 요체를 다 알게 됨.
이기일원론으로 심화함.
이런 학파들로 문화전반에 고유의 색이 드러나게 됨.
그림이전에 문학에서 먼저 고유색이 나타남 대표적인 것이 정철 사미인곡, 관동별곡, 성산별곡 율곡과 동갑.
(진경문학_조선성리학의 투철한 이념을 바탕으로 우리 산천의 모습을 실제로 보고 표현해 낸 문학)
한석봉 고유서체 창안.
진경문학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했음. 초창기에 계회도에서 시작, 중국화법으로 우리나라 산천의 느낌을 살릴수는 없다.
조 선성리학 이념에 투철해서 우리 고유의 화법으로 우리산천을 그리는 사람을 바라게 됨. 조속님이 첨 시도함. 인조반정(율곡제자 중심_장강 조속:풍양조씨)때 율곡제자 선동 퇴계제자 묵시적으로 동조해서 성공함. 율곡학통은 기본적으로 퇴계학통을 이음.
7년간 임진왜란으로 군사권 장악, 기득권 층 무능해짐. 혁신이념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군사, 경제권, 이념을 다 장악함.
그래서 인조반정을 성공함...
조선을 양분하려면 인조반정을 기점으로 함.
29 살에 인조반정에 참여한 사람이 장강 조속. 반정을 성공하고는 모든 것을 버리고 산수를 유람함. 성리학 통달 그래서 우리산천의 아름다움 표현 가능.여러가지를 실험. 그림"금궤"는 김알지탄생장면임. 우리 자존의식의 시작. 남방화법으로 그린그림 조속의 "호촌연웅"
우암 송시열 후기 조선왕조 터전을 마련한 분 그뒤를 이은 분 김창흡 선생
그 뒤를 이어 겸제 정선 북악산 밑 경복고등학교 자리에서 태어남. 율곡학파의 텃밭인 자리.
구봉 송익필, 우계 성혼이 이이의 절친.
겸재 정선은 1676년 숙종2년에 태어남. 1759년에 돌아가심.
어떤 문화든 250년 정도되면 절정에 이르게 됨
숙종때 부터 정조때까지가 진경의 절정기였다. 최완수 선생님은 이를 진경시대라 일컬음.
(진경시대_조선문화가 고유색을 한껏 드러내면서 번성하였던 조선 후기의 문화번영시대)
진경산수화풍 창안-절정-추상단계까지 완전히 마무리 짓게 됨.
사대부는 관직에 나가지 않으면, 그림,글씨를 하는 것임. 그러나 아무나 하는 건 아님.
14살때 주변 많은 분들이 사사가 됨. 장희빈 사건으로 스승집까지 전부 폐가가 됨.
과거에 길이 막힘. 외가가 부자였음.
무 수리 최씨의 소생 영조 갑술년에 태어남...정사가 일변이 됨. 이 때 겸재가 시험봤으나, 번번이 떨어졌던가 봄30대부터는 그림에만 전념. 겸재는 7서 사서삼경을 안보고 외우고 그림보다 주역을 더잘하고 사서삼경 중 주역이 가장 뛰어났다. 그것이 바탕이 되서 진경산수화가 나옴.
새로운 화풍을 창안하는 화가는 반드시 사대부 화가이다. 화원화가는 사대부 화가가 만든 것을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원리만이 창조가 가능하므로...
36세에 단발령망금강산 →72세 만년에 같은 장소에서 그린 그림을 보면 농후함이 묻어나는 차이를 느낄수 있음..
제3강 진경산수화와 풍속화
5살위 사천 이병연 진경 시의 대가, 겸재는 진경 산수화의 대가, 겸재의 스승 삼현 김창흡 진경 시문학의 대가
사천 이병연(1671-1751) 진경시의 최고봉으로 정선과 교류하면서 조선의 아름다운 경치를 시로 표현함.
송강정철 관동별곡으로 시작, 겸재가 금강산으로 그림여행을 떠날 때 이 책이 교과서가 됨.
관동별곡은 조선 선조 때의 시인 송강 정철의 가사로 해금강과 관동팔경 등의 아름다움을 읊은 노래.
서울-연평-철원-금화(금성)-단발령-내금강 장안사 입구(서울서 금강산 가는 첩경)
단 발령에 올라서 내금강 전체를 본 그림이 "단발령망금강산" 진경산수화의 기본 기초를 36세에 완성했구나를 알 수 있다. 단발령은 남방화 묵법으로 처리 내금강은 북방화 기법으로 백색화강암처리, 다시 수목으로 골골을 감쌈.-완전한 음양대비, 주역의 원리, 음양조화의 원리. 음은 토산, 양은 골산 암산으로 음이 양이 호위하는 원리를 그대로 적용
중국은 그동안 부단히 남북방화의 조화를 노력해왔지만 남방은 남방위주 북방은 북방위주의 그림이 돼버림.
겸재는 음양대비에서 화면구성에서 적용해서 완벽하게 남북방화면을 이상적으로 조화함. 중국사람들이 놀라자빠짐
셋이 같이 다니면서 사천과 삼현은 진경 시를 짓고, 겸재는 진경 산수화를 그리게 됨
해악전신첩_겸재가 36년 되던 해에 금강산을 유람하며 그린 그림과 함께 동행한 이병연과 김창흡의 시를 합쳐 놓은 시화첩.
전신첩은 초상화첩이라는 뜻...내면의 아름다움마저 표출함.
자 긍심을 가지고 우리산천이 가장아름답다는 마음으로 봐야만 그런 그림이 나온다. 자기 독자이념이 있을때는 모든게 긍정적시각이다. 그러나 식민통치 같은 때는 자기비하의 시각이 생긴다. 같은 곳을 바라보더라도 두시각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산이다.
해금강이라는 바다와 금강산이 이렇게 완벽히 조화된 곳은 세상어디에도 없다.
중국 당나라 이태백이 당나라의 여산의 아름다움이 천하제일이라 했고, 관동별곡에서 정철은 "니뎍션 이제 이셔 고텨 의논하게 되면, 녀산이 여긔도곤 낫단 말 못하려니"라고 했다.
당시 중국은 변발, 호복 강요해서 중국은 다 바꿨으나, 우리나라는 병자호란 후에도 우리습속을 지킴.
주자성리학을 뛰어난 조선성리학을 창출, 중화는 조선이 계승했다. 사대주의는 힘있는 자에게 빌붙어 아 첨하는거지. 망한 명나라 제사지내는 것은 사대주의가 아님.
김창흡이 형님인 김창집이 중국사신 행차때 겸재의 그림을 보여주기위해 그의 그림을 가져감.
영빈김씨와 영조와의 관계는...
경종이 나와서 희빈장씨 시절에 관직을 포기하고 그림길로 접어듬.
영조:조선 21대 왕으로 탕평책, 균역법 등 백성들을 위한 개혁적 정치를 펼침(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 탄생)
숙빈최씨:조선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
영빈김씨:조선숙종의 후궁으로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본가로 돌아가 살다가 1694년 인현왕후와 함께 복위함
숙 빈최씨가 영빈김씨에게 사적으로 영조를 양자로 줌. 그래서 김씨가 외가가 됨. 내적으로 내적으로 양자가 되서, 노론 김창집을 필두로 목숨을 내검. 숙빈이 영리해서 김씨네집 근처로 이사를 시킴. 백송있던자리가 창의궁인데 거기에서 영조가 출궁해서 살던 잠저. 김창집 일가는 경복고 바로 앞. 같은 동네임
겸재가 영조에게 그림을 가르쳤던 거 같음. 평생 겸재를 호로 불렀다. 호로 부른것은 스승으로 대우하는 뜻임. 국왕이 그림배웠다하면 지탄의 대상이 됐기 때문에 안배우고 잘 그렸다고 함. 겸재가 영조를 만나고 나서는 탄탄대로를 걷게 됨.
통치자가 문예를 다 잘해야 문예부흥이 가능하다.
겸 재 46세 신임사화 때 김창집죽고 경종이 등극할때 경상도 하양 현감으로 있어 그 화를 모면, 겸재는 영조가 신경을 써서 58세때 청하(현 경상도 영일면 청하군)현감을 시켜 보냄. 내연산이 있는 곳. 사천 이병헌은 삼척부사로 보냄. 사천 이병헌의 동생 이병성 간성군수로 보냄. 영일만에서 삼척을 거쳐 간성거쳐 금강산을 가면 "관동팔경"이 다 들어 있음. 우리나라에서 "해악"인 바다와 산의 경치가 제일좋은 곳은 관동팔경이다. 여기를 배타고 돌아다니며 마음놓고 시화로 사생을 해라 해서 보낸것(Good 인사발령)ㅎㅎ
겸재는 환갑을 못지내고 92세의 노모가 돌아가셔서 상경을 함 3년상을 치름. "강산"의 경치 좋은 곳은 단양팔경(사군산수).
진경산수로서 우리나라 아름다운 곳 사생 안 해 본 곳이 없다.
63세부터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 절정에 이름. 음양조화 음양대비를 그림.
"청풍계" 64세에 그린 그림. 청운초등학교부근 인왕산. 흰바위를 먹색으로 내리 그음. 남북방화를 먹칠로 조합.
65세 양천현령으로 발령 떠날때 사천 이병연때 사천이 시한수 지어보내면 겸재는 그림하나 그려서 보내기로 한 약속 지킴 (70노인끼리) 그때 그린 "광진"이라는 그림을 그림...(현재 위커힐 있는 광나루, 아차산 그때도 별장지대)
"압구정"이란 그림 현재 현대아파트 들어선 압구정 있던곳 260여년전 그림. 한강일대 아름다운 경치 서울경치 다그림
"장안연우" 서울 장안 북악산 기슭 지금 7궁근처에서 바라본 서울 남산, 관악산 보임. 도성안이 숲으로 쌓임. (미국은 인디언과 전쟁하던때) 한 문화가 노쇠할 기간이 자나고 있음.
"독서여가" 51세의 겸재의 자화상 51세이전 경복고등학교 자리에 살다가 51세부터 군인아파트 옥인동 20번지 근처로 이사.
책이 쌓여 있고 책보다가 잠시나와 화초감상함.. 미국인디언 사냥하던 때..ㅎㅎ
"척재제시" 당시 사대부 생활모습 행주에서 나는 웅어를 선물하니 그대로 시한수를 지어주고 받음. 65세 66세 사이의 그림
할 수 없고 망할나라는 따로 없다. 모든 것은 변화를 반복할 뿐.우리문화의 우수성를 느낄만하다.
"단발령망금강" 72세 말년때 지방관은 만5년이 만기. 화원은 관직만기를 못채우지만, 겸재는 사대부이므로 만기를 채우고 나옴
퇴가후 72세 되던해 32년전에 그렸던거 기억하고 36년만에 금강산 다시감. 당시에는 친구덕에 백면서생으로 갔지만, 양천현령 5품 지닌 대관으로 같은 소재로 다시 그린 그림. 같은 소재로 훨씬 세련된 그림을 그림.
그전에 표현한 그림에는 중국의상이 등장했지만, 겸재의 그림에는 갓 도포쓴 우리선비가 등장함.
10년후배 같은 듯을 가지고 같은 뜻을 가진 관아재 조영석 인물을 잘그렸는데, 우리의 의상을 그림. 사실은 겸재가 먼저 그렸음.
실재 풍속화의 시조도 겸재임.
"금강내산" 한송이 연꽃 같다. 음이 양을 포위했다. 음중양. 골골이 다시 수묵표현하여 거기서 다시 한 번 음양표현 강조. 진경산수화 최고의 경지가 옴.
76 세에 사천 이병헌에 돌아감. 윤 5월 29일 돌아가심. 인왕산기슭바라보며 사천댁(청와대 서쪽 별관 근처에 살았음)에 가서 "인왕제색"을 그림. 그 돌아가신 날 그림. 백색화강암을 먹으로 다 쳐냄. 백을 흑으로 둔갑시키는 둔갑해도 인왕산으로 보인다.
검은 데서 흰빛을 느낌.
이 때의 겸재는 중국의 고사를 소재로 그림으로 그려도 우리정서로 완벽하게 표현해 냄. "여산초당" 당나라 시인 백락천(백거이)이 여산에 은거하던 고사를 소재로 그림. 초당도 선비도 소나무도 산도 다 조선산...이것이 진정한 세계화. 자긍심을 가지고 우리것을 당당하게 표출하게 될때 세계는 우리안으로 들어오게 됨.
"정양사" 80전후에 그린그림 84세에 사망했는데 그때까지도 그림을 그림. 군더더기 제거하고 추상으로 그림. 세상물정을 다 터득하고 군더더기를 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추상이 가능함. 화풍을 출현시킨 세대, 절정에 오르는 세대, 추상화 시키는 세대. 미술양식방식의 자연스러운 방향인데, 겸재는 혼자 그 순서를 다함...
"추일한묘" 고양이의 눈동자의 움직임마저 정확하게 표출함. 이렇게 정밀한 정물, 생동감있는 사생을 본적이 없다. 한정없이 섬세하고 정확한 그림도 가능하다. 진경산수화풍은 추상단계까지 마무리 짓는 역할까지 하심.
초년에는 그림길에 들어갈 수 없는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말년에 만복이 터짐.. 영조보다 19살이 많음. 영조 환갑때 79세가 됨.
왕 이나 왕비가 60세를 넘기면 수경壽慶이라고 함. 벼슬했던 조관출신 70세 이상은 1품을 올려주고, 평민 80세 이상이 되면 1품 품계를 줌.영조는 환갑때 수경하지 않았다. 계모 인원대비가 망칠 69세가 되어서,70세가 되시면 그때 수경한다하고 겸재만 1품올려주고, 수경할때 1품 올리고 71세 때 또 1품올리고 해서, 겸재는 말년 81세에는 종2품 대신급에 올라감...영조의 배려 금관자 옥관자 붙임.
종2품때는 벼슬없는 조상 추존할 수 있음. 재상지위에 선대추존하고 부인과 80세에 해로하고 있었다. 대복으로 일생을 마무리 지음. 진경산수화풍으로 영원히 이름을 남기고 말년엔 대복이 터져 이런 재상지위까지 올라감. 84세 되던해 3월 24일 돌아가심. 산소는 우이동 근처에 해등천면 개승리에 있다고 하는데 현재는 못찾음.
제4강 조선 남종화 대對 풍속화
진경시대에 또 주류가 되는 화풍 풍속화와 조선남종화가 있다.
"촌가여행"_관아재 조영석
조영석(1686-1761) 조선후기의 화가로 산수화와 인물화에 뛰어 났으며 정선, 심사정과 함께 삼재三齋로 알려짐.
겸 재와 같은 동네 살고 10년후배. 겸재가 돌아가실때 애사를 씀. 풍속화는 도저히 못따라가겠고, 인물화는 내가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심.주로 조선 풍속화를 그리심. 조선풍속이 세계모든 풍속의 제일 으뜸이라 생각했다. 기준이 돼야 한다 생각함.
"기로행려도"_최북
모두 언덕이라 수평멜대로 책을 맬수없음. 그래서 지게가 발명. 중국은 평지가 많으니까. 겸재때와서 그림에 지게가 등장함.
사물을 보는 시각이 전혀 달라짐.
변발호복은 오랑캐 족속의 풍속이다 여김.
"고사은거"_현재 심사정 사대부집 출신.
기구한 집안내력을 가지고 있음. 그림으로 평생을 살지 않을 수 없었다.
증 조부 심지원 효종때 영의정, 종조부(할아버지의 형님) 심익현 효종부마. 명문에서 태어났지만, 이 분위기를 이어가려고 두분이 돌아가신 후 현조부 심익창이 성천부사하던 분이 부정을 저지름. 문과에 급제 못하면 당상관이상 못오름. 당상관 이상하려고 시험부정을 저지름.시험을 바꿔치기함. 그 당사자, 후손까지 관아에 출입을 못함. 집안 절단남. 10년간 귀양살이 하고 옴. 그래서 심사정은 과거 자격 박탈이 됐다. 그래고 아버지도 그림길로 나감. 할아버지가 발각한 사람 원망하고 만회하려고 영조가 세제시절 경종때, 세제를 시해하려고 하는 데 가담.
신임사화 1721년 경종이 왕세제(후의 영조)에게 대리 청정하게 한 것에 대해 노론이 소론을 탄핵하고 숙청한 사건. 김일경이라는 신임사화를 일으킨 장본인과 처남매부간이 돼 결탁을 해서 꾸몄다. 실패후 영조등극...역적가문이 됨. 발붙일 데가 없음
겸재 외조모와 8촌친척이 되는데 겸재에게 심사정에게 그림을 가르치라고 했다. 영조와 각별한 사이였던 겸재는 심사정이 역적이 되고 나서는 더이상 가르칠 수가 없게 됐다. 사회가 제외시킨 인물이 돼버림. 그래서 심사정은 시각을 긍정적으로 볼 수 없어서 중국의 화보에 몰입하게 됨. 명말기~청초 화보 정리된 것이 간행되어 우리나라에 전해져 옴.
명문화를 계승한다. 그래서 조선이 중화다. 그러나 결국 우리 독자를 진행시켰다...그것이 진경문화 그러니 나는 명을 계승한다.라고 하며 이 일에 평생을 바침 "장림운산"_심사정
명의 그림화풍을 본격적으로 계승한 것이 바로 이 현재 심사정을 통해서였다.
겸재는 조선 고유의 문화를 최고의 경지로 끌어 올렸고, 현재는 명의 문화를 서울에 유입, 소개하는 역할을 함.
명문화를 본격적으로 표방한다 해도 시대정신이 우리 고유문화를 표방하던 시기라 자연스레 우리문화가 드러남.
"만폭동"_심사정 / "만폭동"_정선
조선남종화:조선후기에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중국의 남종화풍으로 심사정에 의해 완성됨.
남 종화법이 겸재그림보다 훨씬 그리기 쉽다. 제자들에게 모든 그림을 입모를 해보게 하는데 겸재그림이 제일 안 됨. 겸재그림만 입모할수 있으면 그건 인가해도됨. 중국의 어떤 대가 그림도 쉽게 입모가 안돼는게 겸재 그림은 안 됨. 현재그림은 입모가 쉽게 가능함.
"해섬자희"_심사정
화원화가 사대부화가 현재그림을 많이 따라감. 겸재와 현재그림은 서울화단에 공존함. 문화의 다양성. 세계화의 조화에서 동떨어지기 쉬움을 위해 현재같은 사람도 꼭 필요함. 당시 화단에 상당히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
이 인상(1710-)이라는 사람은 신분, 당색, 정치색도 다른데 현재의 화풍을 따름. "송하수업"_이인상 이념이나 모든 걸 봐도 겸재스타일을 따라야 하는데 현재를 따름. 인물은 풍속화를 그림. 1710년대 쯤 출생하신 분들은 조선남종화풍과 풍속화풍을 겸해서 구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화상"_박암 강세황(1713~1791) 명문출신 아버지 할아버지 모두 외조판서, 이조판서, 이분 형님이 과거부정함 자신의 아버지가 외조판서 였을 때 시험감독 이였기 때문에 과거 포기. 초야에 묻혀 삼.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로 진경산수화를 발전시키고 풍속화, 인물화를 유행시켰음.
제자를 잘 만남. 단원 김홍도 어려서 이분께 배움. 21살 단원은 화원화가로 영조 수작도 그림 그릴때 영조에게 이름을 알리게 됨. 29살 영조 정조(세자때) 두분의 초상화 그림. 어진을 그리고 나면 그 공으로 벼슬을 받음. 사포서 별제(司圃署 別提: 종6품관)벼슬을 받게 .
평생그림그리다가 이름나있다가 정조가 알게 돼 음직으로 참봉벼슬을 나가기 시작해. 공교롭게도 제자 29살 환갑 강세황 같이 사포서 별제를 받게 됨. 영조52년에 83세때 강세황에게 기록과 늙은이만 보는 과거. 영조의 축수를 의미하는 바로 기록과를 함
정조 작심하고 강세황을 벼슬시키려고 함..장원급제. 6품직에 있던 사람도 3품이 됨. 그래서 부정이라도 저질러 과거 하려고 함.
강세황도 현재의 조선남종화풍을 많이 그림. 나중에 추사의 추사체가 청나라로 부터 청조 고증화풍을 이면 기반으로 하게 됨.
청나라 문인화풍이 그대로 들어오게 되는데, 그런 화풍이 들어오게 하는 다리 역할을 함. 현재의 조선화풍은 추사체를 출현하게 하는 가교역할을 하게 됨.
변상벽(1730~)
호는 화재. 새나 짐승의 그림과 초상화를 잘 그려 국수國手라는 칭호를 받았다. 초상화들이 아주 사실적으로 최고로 발달함.
청나라를 통해 서양화 기법도 부분적으로 받아들여. 음영까지 해서 아주 정밀히 그리게 됨. 주로 화원이 그림. 특히 이사람은 초상화를 잘 그렸지만, 닭 고양이 잘그림.
"필계도"_변상벽
"묘작도"_변상벽 고양이를 하도 잘그려서 별명이 변고양이
이시기에 화원에게 까지 풍속화가 확산. 풍속화를 대성하게 되는 신윤복의 아버지 신한평도 화원이었다.
"자모육아"_신한평, 단원보다 10년 선배
이 그림을 보면 단원이 나중에 풍속화를 마무리 짓는 역할을 하는 게 우연이 아닌 것이다.
신 한평(1735-1809) 호는 일재. 신유녹의 아버지로 정조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인물화에 뛰어난 화원이었음. 김홍도와 비슷한 시기에 어진을 그려 많은 부분 합작을 함. 신윤복도 화원이나 기록이 거의 없고 신한평의 기록만이 1809년까지 있음.
조선시대는 "피혐避嫌"이라 그래서 부자가 함께 관직에 있지 못한다. 아버지가 50년동안 어진 그리니까, 신윤복은 늘 곁으로 돈 것 같음.
화원 도화서 벼슬은 한정적이다. 도화세 별제 밖에 없어서 무반직을 줌. 첨사, 만호 이런 식으로 줌. 공세우는게 첫째 어진 , 둘째가 지도다.
김정호 혼자 그린 지도 아니다. 부단히 진경시대 내내 이화원들을 각변방으로 보내서 9년에 걸쳐 그림. 그게 합쳐진것임.
신한평도 신지도에 만호 노릇을 했음. 이광수의 초상화를 신한평이 그림. 나중에 혜원도 첨사벼슬을 했다함. 그래서 변방에서 많이 그렸다함.
"사인휘호"_강희언(1738-1782) 이당시 풍속화가 일반화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남종화 풍속화 공존시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뒤에 단원이 출현하게 됨. 김홍도(1745-1806):호는 단원 조선시대 화가로 산수화와 풍속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함. 7살때 부터 강세황에게 배움. 29세때 정조를 처음만남.
정조(1752-1800):조선22대 왕으로 문화정치를 추진하고 규장각을 설립, 왕성한 문화사업을 펼침.
22살때 왕세손으로 대리청정.
20 대 같은 또래로 단원에 대한 애정이 강했다. 평생 측근으로 생각하고 늘 곁에 둠. 글만 쓰는 게 아니라 그림을 그려서 구체화시켜야 할때 즉각 보충.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정조가 처음 설치한 왕의 직속화원제로 도화서의 화가들 중 선발 운영했음.
신한평은 항상 낌. 단원은 거기도 넣지 않고 따로 측근으로 곁에 두었음. 자신이 화원화가임에도 불구하고 정조측근으로 1급사대부로 착각하고 살았음.
"기우부신"_김홍도 우리소, 지게가 등장.
"마상청앵"_김홍도 풍속화
"서당"_김홍도 풍속화첩 경직도, 농경생활의 서민을 그린 그림. 송나라때 풍속도를 우리식으로 바꿔 사생함.
단원은 풍속화가만은 아니다. 더 잘 그린 그림있다. 신선그림..초년에 많이 그림. 태평성대가 오래지속되면 사람의 유일한 소망은 장수. 사회에서 신선그림 많이 요구.
"과로도기"_김홍도 장과라는 당나라 신선 몇천살을 산지는 모르고 종이로 당나귀접어 다니다가 타고싶을때 불면 나귀가 되었다.
도경을 읽고 있다. 원래 머리가 굉장히 길고 괴상하나 우리나라 식으로 머리가 친근한 할아버지 모습니다. 나중에 굉장히 불교 광신도가 됨, 석화를 많이 그림...도화+석화=도석화
"절로도해"_김홍도
달마대사가 남쪽 양나라에서 북쪽 위나라 갈때 양자강 건너면서 갈대숲을 꺽고 지나갔다는 것을 꺽어 타고갔다고 확대해석. 도해라고 바다까지 건너는 걸로 확대가 됨. 원래 못생겼지만, 과감하게 예쁜 달마로 바꾸어 우리모습으로 그림.
"용주사 후불탱화"
용 주사 창건시 김홍도의 주관 아래 25명의 스님이 함께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불교의식화. 정조가 용주사를 지으면서 불상제작과 탱화의 총책임을 김홍도가 맡음. 거기서 단원이 종교적체험 후 발심해서 말년에 관세음 그림. "남해관음"_김홍도 돌아가시기 직전에 그린 것임.
김홍도는 풍속화 못지않게 산수화도 잘 그렸다. 정조대왕이 44세때 금강산 그림을 그려오라 시킴.
겸재는 주역의 원리대로 그렸지만, 단원은 보이는 대로그림. 김홍도(1745-1806):호는 단원 조선시대의 화가로 산수화와 풍속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함.
스승인 강세황과 금강산에서 만남. 금강산이 속해 있는 회양군수로 표암 강세황의 큰 아들이 군수로 나있음. 당시 그린 게해산첩. 저랍용으로 그려져서 바쳐짐. 수십장이나 됨. 사람들 그걸로 많이 입문을 함.
화 산 용주사 일체 조형예술 불상, 탱화등의 총감독을 시킴. (용주사 후불탱화:용주사 창건시 김홍도의 주관 아래 25명의 스님이 함께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불교의식화) 후불탱은 뒷면에 장식화로 그린 그림. 단원이 직접그림. 서양화법으로 그림. 물감은 전통적 물감으로 그림. 유화의 입체성이 드러남. 동서양의 기법을 조합시킨 최초의 불화. 종교적 체험을 크게 함. 중병을 앓고 난 후라서 더 그랬던 듯.
1790년에 순조가 태어남. 그때까지는 문예세자가 있었지만 죽고 아들이 없었다. 아들이 없어서 사도세자의 묘를 천장했다. 천장을 하고나서 용주사에 모시고 100일 기도 시작함. 100일 기도 마치는 날 순조가 태어남. 그날이 혜경궁홍씨...(영상상태 안좋아서 잘림) 종교적인 환심이 안날수 없음.
"남해관음":석화임_김홍도
어 진을 다시그리게 함. 46세 용주사 불사. 48세때 어진 그리게 하고. 그 공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을 제수해서 내려보냄. 48세 때 심한 가뭄이 들었음. 조령산에 절에 올라가 불상개금하고 불화를 그리고, 기우제를 지냈다...비가 왔다. 아들이 없어 아들을 기원을 했더니 아들까지 얻었다. 그래서 그 후 불심을 표현하려고 석화를 많이 그리게 됨.
단원 56세때(1800년) 정조가 갑자기 돌아가심. 끈떨어진 뒤웅박 신세...ㅎ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음. 1804년에 자비대령화원에 자원해서 들어감. 단원 62세로 운명을 함.
용주사에 부모은중경 밑그림, 삼강행실도 밑그림을 다그렸음. 지금도 보관돼 있음. 도석인물화를 잘했던 분이라 부를 수 있음.
진경시대 이념으로 교육받았었다. 그래서 진경풍속화가 되는 것임.
단원과 더불어 쌍벽을 이룬 인물 신윤복.
신 윤복(1755-1815경):호는 혜원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로 김홍도, 김득신과 더불어 조선 3대 풍속화가로 불림. 혜원에 대한 기록이 없고, 그림도 많이 남아 있지 않음. 간송에 30폭의 그림이 전부. 단원은 퇴폐적인 요소를 표출할 수가 없었다. 혜원은 30폭 전부가 다 퇴폐적인 상류층의 모습들. 기록이 없음으로해서 연구에 어려움이 따른다.
신한평의 아들. 1735년생 으로 50년동안을 도화서 화원이라 혜원은 겉돌았다. 노는 세계에서 기가막히게 놀았던 분.
"소년전홍"_신윤복
잡아서는 안되는 사람의 손목을 잡고 안놓고 있는 그림. 이런 그림으로 화원에서 쫒겨 났다는 속설도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여성적이고 세밀한 가는 선. 혜원과 단원의 기법은 큰 차이가 있다.
"단오풍정"_신윤복
일 제강점기 1920-30 후반부터 담뱃갑에 들어갈 정도로 유명. 일본사람 부전 상인 손에 들어감. 간송 전형필 선생이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되찾음.오세창선생과 기뻐하면서 민족적 쾌거라 평가하고 밤을 세워 같이 즐기심. 전형필(1906-1962):호는 간송 민족문화재를 수집하는데 힘써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고, 보화각(現간송미술관)을 세움. 조선시대복식을 이것을 보고 복원가능했다.
갑 오경장때 하향조정한 한복의 원형을 기억할 수 없었지만, 이 그림으로 추측함. 상민들의 의복이 두루막이다. 상류계층은 저고리가 짧았다.. 말이든 뭐든 타야하므로...여자 저고리 길이가 상당히 짧음 시대말적인 퇴폐적 양상이다. 해학넘치는 구도 감각.
"촌가여행"_조영석
그림을 보고 복식을 추측함.
"소년답청"_신윤복
여자들 말탐. 여염집아낙이 아니고 기생. 말끄는 사람은 말의 주인들임. 자기스스로 마부가 되고 마부에게 자기 갓벗어 주고 맡기고 기녀의 마부를 자처하여 놀러 다님.
"유곽쟁웅"_신윤복
기생은 사이에 두고 힘겨루기 하는 것. 갓은 깨지고, 남자는 싸움말리고 기생은 구경하고,
이런 그림들로 조선시대 상류사회를 재현할 수 있는 것
겸재는 중국의 남북방화를 음양대비의 원리로 한화면에 녹여낸다. 석굴암은 조각 모든 불교미술의 전체를 한 장소에 함축시켰다. 모든 불경 현교 밀교 법화경 등등 서로 거리낌 없이 한자리로 함축시키는 특징을 보인게 석굴암이다.
우 리 한반도는 지구상에서 유라시아 대륙의 반도 가장 큰바다와 가장큰 대륙의 접점이다. 모든 문화를 잘 수용함. 우리나라는 아무리 복잡한 문화라도 그 본질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하나로 융화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녹여서 하나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다. 금수강산이라 하여 작은 국토지만, 산,바다, 강, 평야 등등 없는 게 없다. 우리미술속에는 우리 미감속에는 빠진 것이 없다. 일견에서 보면 엉성해 보여도 모든 걸 다 갖추고 있다. 갖춘 땅떵어리 집터, 산소터, 도읍터 오밀조밀 만가지 지형이 다 갖춰져 있다. 우리는 자연의 섭리, 천연에 순응하게 된다는 것을 중국보다 일본보다 더 철저하다. 우리민족 성정은 천연으로 회귀하려는 천진성이 있다. 현란하게 꾸며진 인공미라도 본연의 천연미로 환원이 된다. 본질은 지키되 천연으로 환원된다.
남 북방화가 융합이 되서 독특한 우리의 회화기법으로 완결이 됐다. 산들이, 굳은 바위, 화강암으로 돼있다. 모든 걸 다 강한 화강암으로 보고 있다. 미감중에는 아주 굳셈이 있다. 사계가 가장 분명하다. 기후적인 특색이 민족성, 미감에 엄청나게 영향을 준다.
남중국은 무슨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경계가 없음을 좋아한다. 우리나라는 무엇을 표현할 때 경계가 분명하다. 술에 술탄듯 물에 물탄듯한 사람은 잘 없다. 불분명한 사람을 우리는 좋아하지 않는다.
재 질을 택하는데도 그대로 반영됨. 번지는 것을 화선지 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일제 이후이다. 일본으로 부터 들어온 새로운 양상. 추사글씨 겸재 단원의 그림은 번지는 게 없다. 번지지 않도록 다듬이질 해서 종이를 맨질맨질하게 해서 의도대로 선이 나오고 의도대로 번짐이 나타나도록 했다.
채색을 써도 청록계통의 색을 아주 경쾌하게 투명하게 쓴다. 중국이나 일본은 화려하고 현란하게 쓴다. 우리는 항상 섞은색...진달래 연한 진달래...(소년전홍 참조)
출처: http://light-inside.tistory.com/92 [밝]
2018.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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