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신라 김알지신화 그린 조선시대 <금궤도(金櫃圖)>에 대한 해석 外

2018. 12. 7. 14:35美學 이야기




<역사산책> 신라 김알지신화 그린 조선시대 <금궤도(金櫃圖)>에 대한 해석 | 역사산책
오두 2010.10.06 02:51



- 오두의 역사산책 - 
 

신라 김알지신화 그린 조선시대 <금궤도(金櫃圖)>에 대한 해석

- 병자호란 때 후금(淸)이 신라의 후예임을 표현한 자주정신의 산물 -  

 

 

   과거 사람들의 상상력이 동원된 작품 해석은 독특한 시각을 가지는 분석력이 있어야 한다. 특히 이미지 해석에는 많은 역사적 배경을 종합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판단이 뒤따른다.

 

   조선시대는 신라왕실에 대한 의미 부여를 많이 했던 증거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특히 신라시조 중에 조선시대 17세기 인조 때인 1636년에 조속(趙涑,1595-1668) 김알지 신화를 그린 <금궤도(金櫃圖)>를 이번에 경주 '신라문화제'(10.08~10.10) 개최에 맞춰 10월 5일부터 17일까지 일반에 공개된다고 하여 관심을 끌고 있다.  

 

   그동안 조속(趙涑)의 <금궤도(金櫃圖)>에 관한 해석들에는 왜 그 시기 '1636년'에 어명에 의하여 신라시조 신화가 그려졌는지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해석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나는 이 글에서 신라 김씨왕조의 후예가 건국한 후금(後金) 즉 청나라 건국(1636년)과 병자호란(1636-7년)과 관련된 국제적인 긴박한 상황에서 그려졌다는 것을 처음으로 주장하고자 한다.

 

 

(서울=연합뉴스) 조선 인조시대 사대부 화가인 조속(趙涑)이 그린 금궤도(金櫃圖). 

신라김씨(경주김씨) 시조 김알지가 계림에서 금궤짝을 통해 탄강하는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 

1636년. 105.5×56cm, 비단에 채색. 2010.10.4 << 문화부 기사참조,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

 

    우리 민족의 전통 회화 해석에서 역사학자들이 예술 품 해석을 회피해온 면이 있었다면 주로 미술사학자들의 견해로 전통 회화들이 해석되어 옴으로써 그 역사적 배경 설명이 미약한 면이 없지 않았다. 따라서 조속(趙涑)의 <금궤도(金櫃圖)>가 그려진 역사적 배경에 대한 필자의 새로운 주장에서 17세기 조선과 청나라와의 전쟁인 병자호란 때에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국가 정신을 강조하려는 중요한 작품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 - 1637년)은 후금의 홍타이지(皇太極)가 침략해 와 12월 부터 이듬해 1월까지 단 2개월간의 전쟁으로 막을 내린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의 친명배금 외교 정책에 보복하는 차원에서 홍타이지는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하고 압박을 계속해 오고 있었다.

 

   광해군을 이어 인조 때인 1636년은 홍타이지가 병자호란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조선 조정은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조선 청나라 관계 설정에 그 정신적인 관계 설정에 혼동을 가지고 있었던 시기이다.조선은 신라가 청나라 즉 후금의 전신인 금나라를 세운 종주국임을 드러내고자 했던 의미가 임금의 명으로 제작한 <금궤도(金櫃圖)>였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먼저 이 글의 전체적 맥락을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몇가지 기본 전제 의문을 제기해 둔다. <계림고사도(鷄林故事圖)>라고도 불리는 <금궤도(金櫃圖)>는 그 칭호에는 왜 '金'이 강조되어 있을까? 병자호란 전후의 혼란한 시기에 <금궤도(金櫃圖)>는 왜 임금의 명으로 제작된 이른바 어제(御製) 작품이었을까? 그 제작 연도가 1656년(효종 7년)이라는 설이 있지만, <금궤도(金櫃圖)>는 그 어제(御製) 설명에서 왜 그 제작년도가 청나라 건국년도인 1636년이 강조되어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을 전제하면서 필자는 1636년 인조임금의 명으로 제작된 <금궤도(金櫃圖)>는 조선과 청나라와의 관계에 대한 외교정책에 그 어떤 '국가 이데올로기'를 강조한 배경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병자호란을 당하면서 조선의 인조가 침략해 온 후금이 신라 김씨왕조의 후예가 세운 금나라의 후신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조선의 정통성이 신라 고려를 잇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기기 위한 정신적 배경을 조선 자체 내부에서 강조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형제지맹'에서 굴욕적인 '군신관계'를 강요한 청나라에 대하여 조선의 자주적인 정신을 바탕한 외교적 수단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금궤도(金櫃圖)>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조선과 청나라는 모두 김알지의 후예라는 것을 아울러 강조한 것이다.그런 동시에 신라김씨 왕조의 경순왕에게 신라의 정통성을 고려가 이어받고 그 뒤를 이은 조선이 청나라에 대한 종주국임을 드러낸 것이다.

 

 

*신라의 김씨 시조신화의 김알지 초상 상상도.   

 

조선시대는 신라 왕조의 전통을 강조해온 면이 있었다. 특히 조선왕조가 신라에 이어진 고려 왕조를 이어받은 의미를 강조한 것은 특히 17세기 정묘호란 병자호란 즈음에서 특히 강조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병자호란을 겪는 과정에서 나온 <금궤도>는 같은 17세기의 산물인 <박씨전>과 함께 신라 정통성의 계승의 의미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형제지국'을 강조하던 후금이 정묘호란 뒤 국명을 개칭하여 청(淸)나라로 재 건국한(1636년) 뒤 조선에 '군신관계'를 강요하여 압박한 시기에 더욱 조선 조정과 민간 사회는 신라 정통 계승의 의미를 강조한 면이 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인조의 어명으로 그려진 <금궤도>와 더불어 민중에는 <박씨전>, <흥부전>이 유행한 것은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과 갈등을 신라의 박혁거세 신화와 연계시켜 일어난 것이다.

 

<박씨전>은 작자미상이지만, 그 출현 연도가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17세기 또는 18세기초 사이의 현종과 숙종 재위 즈음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씨전>은 판본에 따라 <朴氏夫人傳>이라 표현한 것도 있듯이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것은 <朴氏夫人傳>의 주인공이 청나라에 대하여 복수를 벌이는 것이 신라 시조신화에 나오는 박혁거세 어머니인 선도성모(仙桃聖母)를 떠올리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씨전>에서 특이하게 여성인 박씨부인의 대활약이 병자호란에 대한 복수 영웅 소설로 나타난 것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라 시조신화의 배경이 되는 선도성모에 대한 신앙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통하여 이어져 온 배경을 바탕하고 있었다.

 

선도성모는 서술성모(西述聖母) 또는 동신성모로도 표현되었다. 선도성모 설화는 <삼국유사> 권5 감통(感通)  제7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隋喜佛事)'에 나오며,  <삼국사기>에서 동신성모(東神聖母)로 표현되어 동쪽의 신 즉 태양의 여신임을 그 이름에서 볼 수 있다.

 

신라이래 선도성모에 대한 제사 전통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관통하여 이어져 왔다. 송나라 조정에서도 우신관(佑神館)이라는 신사(神祠)에 동신성모(東神聖母)를 모셨으며 송나라 사신 왕양王襄이 조정에서 성모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문에 "어진 인물이 비로소 나라를 세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지리산 노고단에 신라 때부터 선도성모를 모시는 남악사(南岳祀)가 있었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그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 천왕봉에 올라 먼저 성모사당에 주과(酒果)를 차려놓고 술잔을 올리며 성모상 앞에서 제를 지냈다. 신라의 선도성모 숭배가 조선 조정에서 막지 않은 것은 신라멸망 후 만주 일대의 여러 외세를 대항하는 그 정신적 배경을 신라에서 이어받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아야 한다.

 

병자호란 후 박씨부인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청나라에 복수하는 내용의 <박씨전>이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기의 조선 조정과 민간에서 신라 시조신화의 선도성모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의식한 배경이 넓고 두텁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씨전>은 <흥부전>과 같은 박씨 이야기이면서도 신라의 선도성모의 신이한 힘을 일으켜 적을 막아내는 신선도를 도입하고 있다. 그래서 화랑과 같은 영웅적인 박씨부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박씨전>의 줄거리는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박씨전>과 신라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필자의 앞선 글 <역사산책> 병자호란 후 <흥부전> <박씨전> 유행의 新羅的 배경 (四)에서 다루었다.

 

<박씨전> <흥부전>이 박씨를 주인공으로 하는 민간의 스토리로서 청나라에 복수하거나 '놀부'로 풍자한데 비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또 다른 면에서 신라 왕실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것이 <처용탈춤>이다.  

 

신라 왕실의 무속적 탈춤이었던 <처용무>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악학궤범>에 그림으로까지 수록되어 왕실에서 공연되었던 것은 신라의 처용춤은 신라 헌강왕 이래 신라왕실의 고래토템과 관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서 필자는 <코리안 신대륙발견> 이슈 가운데 이미 논했다.

 

처용무가 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왕실 공연으로 이어져 온 것은 고래에 연계되어 있었던 무속적인 대왕문화가 처용탈춤에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과 같은 사악한 외침을 물리치려 할 경우 처용무는 궁중에서 특별히 추어졌을 것이다. <처용탈춤>이 신라 - 고려 - 조선으로 내리 왕실에서 시연되었던 것은 단지 유흥이나 단순한 '역병' 퇴치의 의미가 아닌 국가적으로 외세에 대한 무속적 '국굿'의 의미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병자호란 시기에 나온 <금궤도>는 이러한 전체적인 조선시대의 신라 정신 계승의 면에서 읽어야 한다.  

 

신라 김알지 신화를 그리면서 신라 멸망 때의 경순왕이 고려에 양위한 내용을 강조한 것이 <금궤도(金櫃圖)>이다. 그 어제(御製)에는 그래서 신라 김씨 왕조와 금나라 건국 그리고 금나라의 후신인 후금(淸)과의 관계를 암시하면서 조선은 신라 - 고려를 이은 정통성이 있는 종주국임을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해석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속(趙涑)의 <금궤도(金櫃圖)>가 그려진 연도에 주목한다. 인조 14년 때인 1636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청(淸, 1636년 ~ 1912년)의 건국년도와 병자호란을 일으킨 해로서 주목되는 연도이다. 그림의 '어제(御製)' 글을 쓴 김익희와 관련하여 1636년 이후에 <금궤도(金櫃圖)>가 그려졌다 하더라도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에 조선이 북벌론을 강화시키던 효종 때 이 그림이 그려지면서 청나라 건국 연도와 병자호란이 일어난 해가 표기되도록 1636년이 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그림을 그린 조숙(趙涑)본관은 풍양(豊壤)이고 자는 희온(希溫경온(景溫), 호는 창강(滄江창추(滄醜취추(醉醜취옹(醉翁취병(醉病) 등 다양했다. 이조판서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627 덕산현감 임명된 이후 장령·진선(進善) 역임하고 상의원정(尙衣院正)의 직위에 올랐다그는 청렴하고 지조가 높았던 인물로 인조반정의 공신의 반열에 들었으나 스스로 사양했을 정도였다.

 

그는 문인화가로서 특히 시서화 삼절(詩書畵三絶)로 이름을 날렸으며 특히 매((산수화와 더불어 까치나 물새(水禽) 등의 수묵화조(水墨花鳥)에 정통했다. <금궤도 金櫃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외에 조숙의 작품에는 <호촌연의도 湖村煙疑圖> 등이 있다.임금의 명을 받아 신라 김씨 시조신화를 그리게 되었을 정도로 조숙(趙涑)은 당대 대표적인 화가였다.

 

<금궤도(金櫃圖)>가 그려진 역사적 배경은 한 순간이 아닌 그 시대의 후금과 관련된 누적된 국제상황이 존재하고 있었다. 사실 청(淸)이라고 국명을 개칭하기 전 후금(後金)이 건국된 것은 1616년이었다. 그때는 조선이 후금을 '오랑캐'로 외면해 오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에서 인조의 삼전도 항복 굴욕이 있었던때가 1637년 2월 2일이었으니 <금궤도(金櫃圖)>가 제작된 1636년은 병자호란으로 인조의 조선이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위태로운 시기였던 것이다.

 

국제관계가 위태로운 시기에 신라 시조 신화를 왕명으로 그리게 한 <금궤도(金櫃圖)>는 그래서 보통 산수화나 신이한 그림 정도로만 치부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정묘호란 후 조선과 형제지맹을 맺은 후금은 조선에 대하여 식량지원 및 명나라 정벌을 위한 병선 제공 요구등 압박을 강하게 해 왔다. 1632(인조 10) 청 조정은 조선에게 ‘군신지의를 요구했다. 이때 조선 안에는 척화론과 함께 주화론으로 양립되어 있었다. '오랑캐 나라'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위치 설정에 혼돈을 겪던 시기에 <금궤도(金櫃圖)>가 그려지는 시대적인 배경이었다.

 

후금의 홍타이지는 내몽골을 정복한 뒤에 1636년 음력 2월 사신을 보내 칭 황제 하기를 조선정부에도 요청했다. 그러나 인조는 청나라 사신을 접견도 하지 않고 그 국서를 받지도 않았다. 조선 조정은 척화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2개월 후인 1636년 4월에 나라 이름을 후금에서 ()이라 개칭하고 청 태종으로서 황제 즉위식을 가졌다. 그런 1636년은 곧 이어 12월에 청나라 홍타이지(청태종)에게 병자호란의 난을 당한 조선에게는 치욕적인 해가 된 해였다.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인조의 명으로 신라의 <금궤도(金櫃圖)> 그리게 했던 것은 당시의 시대적 대응의 방법의 일환으로 그려졌다고 필자는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후금의 전신인 금나라가 신라 김씨의 후예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화의적인 의미로 신라김씨 조상의 그림을 그린 것이다.

 

1636 12 2 태종은 심양을 출발하여 직접 12 8천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넌 것이 12 9일이었다. 곧이어 청나라 선발 병력은 10여일만에 한양을 위협했다.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주화론자인 이조판서 최명길을 청군 진영에 보내 시간을 끌면서 왕자들과 비빈종실 귀족들은 강화도로 피난을 보내고 인조는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다. 12 16 남한산성은 이내 청나라 군사들에 의하여 포위를 당했다. 다음 달인 1637 1 청태종이 직접 현장에 도착했다.

 

남한산성이 포위된 채 45일간 화전(和戰) 양론이 갑론을박하는 상황을 겪다가 음력 1 30일 성문을 열고 인조는 삼전도(三田渡 : 송파)에 세워진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 항례(降禮)를 하고 청 태종의 군신지의관계의 수모를 받아들이게 된다.

 

따라서 <금궤도> 그림이 1636년도에 인조의 어명으로 그리도록 한 것이라는 사실에서 조선 조정내부적으로는 조선이 신라의 정통성을 이어받았음을 강조하고, 외부적으로는 병자호란의 주화론의 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려 청나라 사신에게 보여주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만일에 1636년이 아닌 1656년에 그 그림이 완성되었다는 설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청나라에 대한 주화적인 방법의 일환으로 그려졌을 것이라는 필자의 이론은 그대로 성립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그 방증들이 있다오랑캐에 조공을 해야 했던 조선 조정에서는 그 후 북벌론이 고개를 들게 되었다. 이때 신라와 관련된 문학적인 작품이 있었으니 그것이 <박씨전>이다. 신라 김씨 시조신화가 <금궤도> 그림으로 그려졌다면,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박씨부인'으로 강조한 <박씨전>은 박씨를 영웅으로 하는 청나라에 대한 보복을 그린 상상을 동원한 작품이다.

 

박혁거세 어머니기 '박씨'라고 할 때 후대의 부계 계승으로 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화랑세기> 등 박창화의 여러 번역 문헌들에 나타나는 신라 초기의 모계혈통은 박혁거세 어머니를 '박씨부인'으로 충분히 묘사할 수 있는 배경이 있는 것이다. 선도성모에 대한 옛 칭호들에는 '노고', '노마', '산신할미' 등으로 표현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국에 수많이 산재되어 있는 '할미산성'의 '할미'는 신라시대의 영향이 고려 조선을 이어오면서 선도성모에 대한 그 민간 신앙을 이어오게 한 '신라 정통 계승'을 강조하여 외세에 대항하겠다는 역사적 의미가 강조되어 왔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할미산성'이라는 산성들은 신라의 '박씨부인'이자 산신할미 선도성모 숭배영향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판소리 문학 가운데 <흥부전>이 유행한 것 또한 흥부전의 스토리가 신라의 박씨를 배경한 내용으로 필자는 앞선 글에서 해석했다. 흥부전 자체가 <박흥부전>이라고도 칭해졌듯이 흥부의 성은 박씨였다. 여기에서 형제지의관계를 맺은 조선과 청나라와의 관계가 조선은 흥부이고 청나라는 놀부로서 형(청나라)의 놀부심뽀를 상징적으로 비꼬면서 풍자한 내용이 <흥부전>으로 필자는 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신라 김씨시조 탄강신화를 그린 <금궤도>가 이 시기 즉 병자호란 발발 전후인1636년에 인조가 명하여 어제로 그려진 배경에는 단일 작품에 국한하여 즉흥적으로 추측하는 이론이 아닌 여러 다른 시대적 배경과 방증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북벌론으로 <박흥부전> <박씨전>이 나타나던 시기인 1656년에 청나라 왕실이 신라김씨에서 비롯된 금나라의 후신임을 의식하도록 의도적으로 <금궤도>가 그려졌을 수가 있는 것이다. 1656년은 왕자 때에 심양으로 인질로 잡혀갔던 적이 있던 효종(孝宗, 재위 1649-1659) 북벌론을 강화하던 때이다. 따라서 신라 김씨시조 신화인 김알지 신화를 그린 것은 청나라에 대하여 조선의 우월한 정신적 '종주국'의 우위감을 스스로 다짐하는 의미로 효종이 명하여 '어제'를 추가해 넣었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금궤도> 인조가 먼저 그러한 자주정신으로 1636년 청나라 건국 연도와 병자호란 발발 연도에 맞추어 <금궤도> 그리려고 했다가 효종이 그것을 받들어 북벌론의 정신적 의미를 다지기 위하여 최종 완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흰 닭이 울고 나무에 걸린 금궤짝에서 나온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 김알지 탄생신화에 대한 그림인 <금궤도 金櫃圖>는 그래서 외세의 침략으로 전란을 겪으면서 특별히 왕명으로 지어졌다는 의미에서 대단히 가치있는 17세기 조선의 자주정신의 상징으로 필자는 해석한다.   

 

<금궤도 金櫃圖> 그림 위쪽에 인조의 어제(御製)의 내용을 담고 있다. 작품을 그린 조속이 감찰기관인 사헌부의 장령(掌令, 4) 지낸 국가 정신이 투철한 인물이었다. 그는 ··화에 능하였으나 자신의 작품에는 낙관이나 제목도 잘 넣지 않은데 비하여 <금궤도 金櫃圖>에는 그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어제로 만들어진 특별한 의미가 있는 그림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몽고병란때에 강화도로 피신한 고려조정에서는 팔만대장경 판각 조성을 통하여 오랑캐의 침략에 대하여 고려의 정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주정신을 강화했다.그와 같은 맥락에서 병자호란을 겪는 과정에서 인조는 청나라 즉 후금의 본국인 신라 김씨의 신화를 그림으로 그리게 한 것은 '병자호란의 팔만대장경'과 같은 의미의 자주적 상징성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나라가 위태로운 시기에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여 고려에 투항하여 그 역사가 이어져 왔다는 것을 강조한 <금궤도 金櫃圖> 어제 설명 내용은 분명 조선은 신라에 이어져 왔음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 주목되는 것이다. 그 전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御製  

 

此新羅敬順, 王金傅始祖, 金櫃中得之, 仍姓金氏者. 金櫃揭于樹上, 其下白鷄鳴. 故見而取來, 金櫃中有男子. 繼昔氏爲新羅君也. 其孫敬順王入高麗. 嘉其來順謚敬順. 歲乙亥翌年春. 命圖見三國史

 

吏曺判書 臣

金益熙 奉 敎

掌令 臣 趙 涑 奉

敎繕繪”

 

신라 경순왕 금부시조(김씨는 조선시대 이전에는 금씨로 읽혔다)는 금궤 안에서 나왔다. 따라서 성을 김씨라고 했다. 금궤는 나무 위에 걸려져 있었고 그 아래에 흰 닭이 울어 그 금궤를 열어보니 그 안에 남자 아이가 있었다. 그가 석씨(석탈해)를 이어 신라의 임금이 되었다. 그 후손인 경순왕이 고려에 순순히 양위하였다. 을해년 다음해(1636년) 봄에 임금(인조)이 삼국의 역사를 읽고 명하여 이 그림을 그리게 했다. 

 

이조판서 김익희가 쓰고

조속이 그리다.  

 

여기에서 김알지를 강조하는 그림인데도 신라김씨 경순왕이 신라를 고려에 순순히 바치게 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신라 김씨왕조를 고려가 그 계통을 이어 왔음을 강조한 것이며 고려는 조선에 이어져 왔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김씨 후예인 함보가 금(金)나라를 세웠고 그 금나라의 후신인 후금 즉 청나라 황실 조상들이 세운 금나라의 본국은 신라라는 사실을 이 그림에서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이 그림이 김알지 신화를 강조하면서도 '신라와 고려의 순조로운 계승'을 강조해 놓고 있는 것이다.

 

<금궤도>의 어제(御製)에는 을해년 다음해인 1636년으로 그 제작 연도를 알리고 있으나, 그 글을 쓴 이조판서 김익희의 직함으로 보아서 20년 후인 1656년으로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을 그린 조속은 1656년에는 눈병으로 그림을 그릴 수가 없는 상태가 된지 4년이 경과한 시점이다. 따라서 <금궤도>는 1636년에 인조의 어명으로 그림을 그리도록 하여 조속이 그림을 완성하고 그 어제(御製)에 대한 글은 1656년 북벌론을 강화하던 효종 때에 써넣었을 수가 있다고 사료된다. 

 

 

여기에서 필자는 <금궤도(金櫃圖)>의 그림 내용들이 의미하는 그 몇가지 중요한 숨은 의미들을 살펴 보고자 한다. 위의 그림은 <금궤도(金櫃圖)> 그림의 부분으로서 금궤 궤짝이 나무에 걸려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17세기 조선시대에 그려진 이 그림에서 표현된 금 궤짝은 위쪽이 평평하다는데서 신라시대 금궤 모양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조선시대 풍수의식이 가미된 궤짝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미 김(金)씨라는 글자인 '金'자의 상형 모양이 궤짝의 모양을 상형화시킨 것으로 해석한 바 있다. 상자의 위쪽이 둥글게 한 것이 고대 상자들의 모양으로 그 모습이 金자를 닮아 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특히 금을 담았거나 금은 보석과 관계 있는 상자들은 두껑 부분을 길게 둥근 지붕으로 만들었다. 그러한 모양을 옆에서 보면 '金'자 모양이 된다.

 

 

*고대 보물 궤짝에 대한 일반적인 그림 이미지

옆에서 보면 '金'자를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직지사 금동육각사리함. 국보 208호

'金'자를 닮아 있다.

 

금궤나 사리함 등 귀한 궤짝은 그 두껑 부분이 金자처럼 솟아올라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위쪽에 아무것이나 올려두지 못하게 하면서 위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신라시대에 금관 등 금이 대대적으로 사용된 것은 김알지 후손인 김씨왕조의 첫왕인 신라 13대 미추왕(味鄒王) 때부터였다. 김알지 후손으로서 김씨로서는 첫 왕이 미추왕이었다. 그의 7대조 김씨왕조 시조인 김알지의 금궤(金櫃)는 금으로 장식되었거나 그 안에 김알지 아기와 금이 함께 담겨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궤도>에는 김알지 신화에 근거하여 나무 밑에서 우는 흰 닭(天鷄)을 그려넣은 것을 살펴보자. 흰 닭인 이유는 '희다'는 말이 '해'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신라인들의 태양숭배사상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도 남아 있는 태안반도나 지리산의 선도성모상은 흰 색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가 태양의 여신으로 흰색이 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 계림의 닭과 태양숭배 영향을 받은 아마테라스 태양의 여신을 숭배해온 일본 천황가 제사에도 흰 닭이 나온다. 이세신궁 제사에서 흰닭은 '신계(神鷄)'로 불린다. 일본 천황가의 제사에서 '가께꼬'를 세번 외치면서 '아지메'를 부르는 의식을 행하고 있는 것은 계림 신라의 천계(天鷄) 신화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금궤도> 부분. 천계.

 

P1010744.jpg

*일본 천황가의 조상을 모시고 있는 이세신궁의 '신계'

 

신라 시조신화에서 박혁거세 신화와 김알지 신화는 서로 그 시대의 신화적인 요소에서 상호 연계되어 있었다. 그것은 박과 닭이 신화적으로는 같은 의미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가지 신화와 닭 즉 천계(天鷄) 신화가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신라 시조신화에는 특히 박혁거세와 김알지 신화 모두 바가지 귀족을 의미하는 호공(瓠公)에 이어져 있다는 것도 박씨왕조와 김씨왕조의 신화들이 같은 맥락으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가지 별을 의미하는 포과성(匏瓜星)은 새벽닭 즉 천계(天鷄)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필자의 앞선 글 <흥부전 朴씨의 신라 기원론(一)>에서 논한대로 사마천의 <史記>에 한유예(漢劉睿) <荊州占>을 인용한 바가지와 별 그리고 닭에 대한 기록에서 볼 수 있다.

 

"포과(匏瓜)는 일명 천계(天鷄)라고 하며, 하고동(河鼓洞)에 있다. 포과성(匏瓜星)이 밝으면 그 해에 대풍이 든다. (匏瓜, 一名天鷄, 在河鼓洞, 匏瓜星明, 歲則大熟也)"

                                                                               <史記, 天官書> 匏瓜條 <索隱>

 

<금궤도> 그림에 천계(天鷄)가 그려진 것은 신라의 박혁거세 시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한 셈이다. 박은 그 색갈이 희게 표현된다는 것도 흰 닭과 같은 태양숭배신앙의 '해'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초가지붕 위의 흰 박은 나중에 달덩이로 표현되었지만 본래는 해의 의미로 존재했다. 박혁거세가 박과 같은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박이 어머니로서 여성적이면서도 태양의 여신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태양의 여신을 모시는 귀족들이 신라의 박 석 김 시조 신화에 모두 나오는 호공(瓠公)들이었다. 

 

<금궤도> 그림에서 김알지 신화의 흰 닭(天鷄)은 박혁거세 신화의 흰 박(匏瓜)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 시조신화들에 등장하는 호공(瓠公)은 '표주박 귀공자'로서 그 박(匏瓜)은 닭(天鷄)에 이어져 있었다는 것은 닭이 울면 해(박)가 뜨기 때문이다. 때문에 신라 시조신화들은 닭과 박을 함께 '태양숭배' 요소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해'를 의미하는 '흰 닭'과 '흰 박'이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17세기 조선시대에 그려진 <금궤도>에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것은 왕을 모시는 상징으로 대발부채를 그려넣은 것이 눈에 띈다. 대발부채는 고래 꼬리지느러미를 닮아 있다. 필자는 이미 <코리안 신대륙발견> 시리즈 글에서 대발부채로 대표되는 선녀의 신선부채의 이미지는 고래토템 숭배를 바탕했던 고래 꼬리지느러미 이미지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밝혔다. 대발부채를 상하로 부치는 것은 대왕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다.

 

대왕고래는 고래들을 잡아먹는 우두머리 고래인 범고래(orca) 또는 최고 큰 고래인 대왕고래(blue whale)를 의미한다. 제왕들의 옆에서 선녀들 또는 시종드는 사람이 들고 있는 대발부채 모양은 고래 꼬리 지느러미를 닮아 있다. 이미 필자는 '신선'의 기원이 바다의 고래에서 유래했다는 것과 고래 꼬리지느러미가 상하로 움직이는 것처럼 대발부채를 상하로 부치는 것으로 본 것읻. 이러한 특이한 모습은 고래숭배 의식에서 비롯한 것임을 앞선 글에서 밝혔다.

 

고래를 신으로 신앙하던 불교 이전의 토탬숭배시대에 바다의 고래는 바다의 신선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한 해신 숭배가 점차 내륙의 산신 신선으로 변이했다. 그러나 12지신상의 그림들에서 보듯이 신선의상의 날리는 띄 옷들의 표현은 그대로 바다의 해신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까지 옷고름으로 남아 있는 신선들의 의상에서 볼 수 있는 바람에 날리는듯한 고름 끈들의 표현은 고래가 좋아하는 미역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코리안 신대륙발견> 시리즈글에서 논했다. 미역밭에서 노니는 고래의 모습은 신선 의상을 입은 해신이며 바다의 신선의 원형이었던 것이다.

 

*미역 이미지의 여신 신선 의상

관련글: <코리안 신대륙발견> 고래 신선의 옷고름, '해대(海帶)' 미역 이야기

 

*12지신상의 신선의상인 띠옷에 미역 이미지가 있다.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 신라인들에게 고래숭배는 고래 이미지와 관련된 많은 흔적들을 남겼다. 문무대왕비문에 기록되어 있는대로 문무대왕이 고래나루에 장례가 되었다는 '분골경진(粉骨鯨津)'이라는 표현은 그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아메리카 인디안들이나 남태평양 고래잡이 전통 문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래는 지배자의 혈통에 이어진 조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신라 왕실의 토템인 고래에 대한 기록은 왕실의 내용으로 숨어 있는 왕실종교 형태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배경에서 신라의 고래토템 숭배는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고 상징적 또는 간접적으로 표현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임금의 얼굴을 직접 그리지 못하도록 한 것이라든지 그 이름도 일반인들은 사용하게 하지 못하는 피휘(避諱)의 전통은 왕실의 고래토템숭배에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대왕고래'와 신라의 수많은 임금들 뒤에 붙이는 '대왕'의 칭호는 '대왕'이라는 이름으로 고래를 상징하는 전통 무속에 남아져 왔다.

 

오늘날도 대왕고래, 대왕오징어, 대왕조개 등 바다 동물에서 큰 동물은 '대왕'을 붙인다는 것은 삼국시대의 대왕들 특히 신라 왕들에게 '대왕'을 붙이는 것은 고래토템숭배에서 비롯하는 해신숭배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육지동물의 경우는 '대왕소' 또는 '대왕곰'이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산속의 지붕을 '황소지붕'이나 '곰지붕'이라고 하지 않고 '고래등 같은 지붕'이라고 표현한 것과 같은 고래토템 숭배 문화의 영향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신라 문화에 남아 있는 고래토템 이미지는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첨성대 모양이 '숨구멍이 있는 신라인들의 고래토템폴'이었을 수도 있다는 필자의 새로운 주장은 아메리카 인디안들의 토템폴에서 고래찾기와 같은 해석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인디안들의 고래토템폴의 고래는 주로 머리를 아래로 하는 거꾸로 새겨져 있듯이 첨성대는 고래의 머리 부분이 땅을 향하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메리카 인디안들에게 첨성대를 보여주면 분명 고래가 거꾸로 서 있는 '고래토템'으로 읽힐 수가 있다.  

 

그 외에도 신라 금관의 형상에서 출(出)자 모양은 고래 작살 이미지이며 금관 내부의 부속 이미지에도 고래 꼬리 지느러미를 형상화하고 있다든지, 백제의 칠지도는 작살 형상을 한 왕실의 대왕고래 숭배의 위엄을 가진 것으로 왜왕에게 하사된 것으로 새로운 해석을 한 상세한 내용들은 필자의 글 <코리안 신대륙발견: 신라 금관과 백제 칠지도는 고래토템 숭배의 집합체>에서 볼 수 있다.  

 

고래에는 '범고래' 또는 '대왕고래'라는 칭호에서 보듯이 고래 중의 고래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왕중 왕'은 '대왕' 의미로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다. 지배자에 대한 '대왕' 이미지를 다른 작은 고래들이 호위하는 의미로 고래 꼬리지느러미 이미지를 한 대발부채가 동아시아 고대 제왕들의 주위에서 시종들이 부치는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대발부채를 고대 동아시아 문화에서 너무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사대주의 의식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모든 고대 문명들이 강하구 즉 바다문화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면에서 중국 문화에서 보여주는 많은 상징적인 문화들은 바다에서 가장 큰 '대왕동물'인 고래토템숭배의 영향을받은 것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선사시대 고래는 동아시아에서 코리안들이 가장 강력한 고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울산 반구대 고래 암각화에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일상생활 문화에서 언어에서 고래에 대한 가장 많은 흔적을 유지해 오고 있는 민족이 코리안들이다.

 

새끼를 낳은 어미 고래가 미역을 '먹는'(또는 미역밭에 청어알을 훑어먹는) 모습에서 우리 민족의 어머니들은 산후음식으로 미역국을 먹고 그 영향이 지금도 세계 유일의 문화로 남아 있다는 것도 그 한 예이다. 미역국이 어머니와 관련이 있다는 것만큼 고래토템 숭배는 새끼를 키우는 암고래에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대왕고래'는 사실 '여대왕고래'였던 것이다.  

 

전통 신선의상의 표현과 대발부채의 표현은 모두 선녀가 든 표현으로 나타내는 수가 많다. 선녀의 헤어스타일도 대발부채처럼 고래 꼬리지느러미처럼 형상되는 수가 많은 것도 같은 맥락의 '고래신선' 또는 '대왕고래'의 모계적 토템숭배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선녀의 헤어스타일과 대발부채 형상은

고래토템 숭배의 결과로서 고래 꼬리지느러미 이미지였을 것이다.

 

바다 세력이 약해지고 대륙세력이 강해진 뒤에 해신 신선의 영향은 산신 신선화되어 가면서 모계신선은 부계신선으로 변이되어 았다. 그러나 우리는 신라의 선도성모와 관련하여 '할미산성'의 광범위한 산재에서 보듯이 고대 강 하구문명이 가지는 바다의 해신 즉 고래토템숭배의 영향은 남아 있다.

 

'대왕'이 여성에서 남성화되어 감으로 인하여 바다의 최대 동물토템인 고래숭배 신앙은  남성 지배자들의 이미지 형상 구조에 변천 도입되었으며 여신적인 선녀상은 남자 대왕 양쪽으로 대발부채를 들고 서 있는 보조자 이미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래 '선녀 부채' 또는 '대발부채'는 바다의 고래토템 숭배 영향에서 나온 '고래 꼬리지느러미'가 그 유래라고 필자는 생각하는 것이다. 

 

<금궤도>에서 대발부채를 든 사람은 남성으로 표현된 것은 신라 초기가 아닌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보아야 한다.

 

*<금궤도> 부분. 대발부채 든 모습.

김알지 탄강신화에 대발부채를 들고 금궤를 왕이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다.

 

대발부채는 주로 왕의 양쪽에서 부치는 형국을 보여준다. 이렇게 양쪽에서 대발부채를 부치는 모양에 대하여 여기에서 좀더 색다른 해석을 덧붙이고자 한다.

 

기본적으로 대발부채는 양쪽에서 부치고 중앙에 대왕이 앉아 있는 '세 사람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오늘날도 볼 수 있는 멕시코 연안에서 볼 수 있는 '귀신고래 세 마리' 구조에서 비롯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는 동해안의 귀신고래가 오호츠크를 넘어 알라스카까지 올라갔으며, 그곳에서 멕시코의 바하 켈리포니아로도 오르내렸다. 오늘날도 아메리카 대륙 태평양 연안을 오르내리면서 짝짓기를 하는 귀신고래들은 주로 세마리가 움직이는 것이 관측된다.

 

이러한 특이한 바하 캘리포니아 연안의 '세 마리 귀신고래' 장면은 울산 MBC방송의 <한국 귀신고래> 프로그램에서도 보여주었지만, 자주 세 마리의 고래가 목격되는 것은 "한 마리의 암 고래를 두고 두 마리의 수컷 고래들이 경쟁을 하면서 싸우느라 뒤치락대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특히 암컷을 사이에 두고 수컷이 오르락 내리락 그 꼬리 지느러미를 물밖 공중으로 올렸다가 내리는 그 모습은 필자에게 '여대왕' 양쪽으로 수컷 고래 꼬리지느러미와 같은 '대발부채'를 상하로 부치는 모양으로 다가온다.

 

<화랑세기>를 번역한 박창화의 다른 번역 문헌들에서 보여주듯이 초기 신라의 왕실에는 왕후들이 왕보다 더욱 강력한 위치에 있었다. 그것은 경주의 황남대총 쌍고분 발굴에서 남분에서 발굴된 왕후의 금관이 북분에서 발굴된 왕의 금관보다 더욱 화려한 것에서도 증명이 된다. 대발부채를 든 본래의 이미지는 남성적 시종이며 '대왕'은 여성적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신라 초기의 왕후들이 왕들보다 상위적인 위치에 있었던 내용들은 필자의 앞선 글 <역사산책> 유황(幌宮)궁주의 숭배로 본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타나는 미실(美室)의 권력에서 볼 수 있다.

 

왕의 주위에서 선녀들 또는 신하가 대발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은 바람을 일으키거나 햇빛을 가리는 기능면보다 오히려 고래들이 주위를 호위한다는 의미를 가지며 그 가운데 왕은 일반 고래들의 시중을 받는 '대왕고래'라는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금궤도>에서 특별히 대발부채 시중을 받는 귀족 또는 '왕'의 머리 장식을 한 사람은 금궤 상자 안의 '대왕'을 모시는 고래 이미지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금궤도>에서 대발부채의 시중을 받고 있는 중국풍의 '임금머리' 장식을 한 남성의 모습은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 지배자를 상징하여 조선을 상징하는 금궤를 향하여 경외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는 장면으로 상징화되어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금궤도>는 칭황제를 강요하는 청나라 황제에 대하여 '누가 황제이고 누가 경외적인 자세를 가지고 '대왕'을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풍자적으로 시사하는 그림인 것이다.

 

한편 <금궤도>는 신라 전통을 강조하면서도 조선시대 문화를 바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림에서 금궤가 달려 있는 나무가 있는 곳은 음양풍수에서 명당의 위치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특히 그렇다.

 

그림에서 신라 김씨시조 김알지 신화의 배경이 되는 경주의 계림숲은 평지에 가까우나, <금궤도>에 그려진 산세는 주산을 배경으로 좌청룡 우백호를 배치한 사이에 금궤가 위치하고 있다. 더불어 명당수를 강조하고 있어 조선시대 풍수사상을 뒷받침해주고 있다고 보여진다.

 

<금궤도> 그림의 금궤가 걸린 나무와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그러나 <금궤도> 작품에 나타나는 풍수 명당의 산세는 경주의 황남동 계림세묘(鷄林世廟)의 풍경을 조선시대 풍수 명당개념을 적용시켰다고 볼 수 있다. 

 

*신라 김알지 신화를 그린 조선시대 금궤도(金櫃圖).

1636년 (을해년 다음해)라는 기록이 있다.

 

*김알지 탄강신화의 현장. 계림세묘(鷄林世廟 경주 황남동)

위쪽의 <금궤도> 그림에서는 조선시대 풍수명당 개념을 적용시켰다.

 

<금궤도>에서 금궤가 걸려 있는 나무의 모양은 위의 경주 황남동의 고목보다 조금 '어리게' 그려져 있다. 위의 경주 황남동 고목이 17세기 때에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나무의 모양이 <금궤도>에 그대로 그려진 것이었을까?

 

나무는 옛사람들의 생명순환의 숭배대상으로 되어 있었다. 느티나무 신앙에서 볼 수 있듯이 12지신상의 동물토템 지신이 있기 이전에 신라에는 나무 수신(樹神) 숭배에 대한 무속적 문화가 존재했다. 앞선 글에서 논했지만, <화랑세기>를 번역한 박창화의 다른 번역 문헌들에는 왕자가 태어나면 무당들을 불러 감나무 수신에게 굿을 한 것은 물론 버드나무 수신이 일어나면 나라가 흥하는 것으로 표현하거나, 왕자의 나무 수신에 문제가 생기면 왕자에게도 문제가 생겼다는 기록을 여러 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열두 동물지신이 있기 전에 여러 다양한 나무수신 숭배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금궤도>에서 그리고 신라 김알지 신화에서 금궤가 걸린 나무를 단순히 보아서는 안되는 수신 신앙이 있었다는 것을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도가사상에서는 태어나는 것은 죽음의 환생사상을 바탕하고 있다. 그 태어남은 어머니 대자연의 명당의 골짜기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금궤도>에서 김알지 아기가 들어 있는 금궤는 그런 면에서 나무로 짠 관의 환생적 재생 이미지를 가진다. 청나라에 굴복한 조선은 김알지의 '환생'처럼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기원이 명당에 그려진 <금궤도>에 표현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친명배금 정책으로 후금의 침략을 당한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정신적 갈등 속에서 조선 조정은 조선 - 청 관계를 청나라보다 조선이 본래 우위의 위치에 있었던 신라 - 금의 관계를 되돌아 보려 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청나라 건국연도와 관련하여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 조정에서 어명으로 그려진 <금궤도(金櫃圖)>는 신라 - 고려 - 조선을 이어 내려온 그 역사적 정통성이 청나라의 '본국'의 의미를 지닌다는 뜻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은 신라 경순왕에게서 순조롭게 양위를 받은 고려의 계승을 이어받은 것으로 청나라보다 더 '대왕국'이라는 의미가 <금궤도>의 어제(御製)에서 특히 강조한 것이다.(10/05/10 오두 김성규 odunamsan@hanmail.net )

 

 

 

 *신라 김씨 왕조와 금나라 청나라에 관한 관련글들:

 

<역사산책> 병자호란 후 <흥부전> <박씨전> 유행의 新羅的 배경 (四)

<역사산책> 유황(幌宮)궁주의 숭배로 본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타나는 미실(美室)의 권력

<역사산책> 마의태자의 신라부흥운동 뒤에는 경순왕이 있었다 (1)

<역사산책>연암 박지원의 '愛新覺羅'와 김부식의 '東神聖母' (一)

<신화이야기 173> 중국의 번시 박(朴)씨들은 신라에서 유래했을까?

 

 

*전통 회화 해석에 대한 필자의 관련글들:

 

 <역사단상> 추사(秋史) 세한도(歲寒圖)에 숨어 있는 일월오악도 (I)

 <동양학 강의 34> 17세기 겸재 정선의 쌍도정도는 두 개의 섬이 아닌 세 섬이다

 <문화산책>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는 누구인가

 


2010.10.06

blog.daum.net/odu1893/213   오두막 위에 서린 무..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 金氏 뿌리 탐사

해피빈(58.76) 2008-11-30 12:2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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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인구를 자랑하는 한국 김씨들의 성(姓)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세계 최초로 '金<U>'을 성씨로 사용한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와 한국의 김씨들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U>? 최초로 김씨의 연원을 찾는 이색 탐사 리포트.

김대성 전 한국일보 편집위원·한국문자학회 부회장 <HR noShade SIZE=1>

    근의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체 인구수는 대체로 274개 성씨에 4500만명 가량이다. 이중 김씨는 241개의 본관을 가지고 있고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가위 민족세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세력이라 할 것이다.

김씨는 대체로 신라, 가락(가야)의 두 집단이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고, 조선조 임진왜란 이후 귀화해 사성(賜姓)을 받은 김씨가 별도로 있다. 여기다 가락계 김씨의 외가인 허씨 집안 및 허씨가 당나라 때 당태종으로부터 사성을 받은 인천 이씨 등도 범(凡) 김씨 계열에 포함된다.

그런데 김씨 계열 중 신라와 가락의 양대 김씨는 족보상 그 선조가 난생설(卵生設)이나 천강설(天降說)의 주인공으로 묘사됨으로써, 그 전의 상황을 알 수 없게 돼 있다.

신라계인 경주 김씨들은 시조를 ‘김알지’라고 한다. 또 가락계인 김해 김씨들은 시조로 가락국의 창시자인 ‘김수로’를 꼽는다. 이들 모두가 알에서 태어난 것으로 돼 있다. 어느 민족이건 시조 탄생에 대해서는 신비스러운 전설로 미화시키는 전통이 있다.

그러나 김알지와 김수로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지금으로부터 불과 2000년 전의 일이다. 이때는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이미 화폐가 통용되고 있었고, 철기를 생산하고 있었으며, 갖가지 신무기가 개발되고 있던 때였다. 그때는 나름대로 문명의 첨단시대였다.

 

이런 개명(開明)한 시대에 김알지나 김수로가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필자 자신이 김해 김씨지만 김수로나 그 부인인 허왕후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를 보면서, 틀림없이 출자(出自)를 내놓고 밝히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해왔다. 그리고 그 내놓고 말하지 못할 사연을 밝혀낸다면, 김알지와 김수로가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출생의 비밀도 저절로 풀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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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궁금증의 주인공 '김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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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초 필자는 ‘한민족 정체성을 찾는 답사팀’을 만들어 보름 일정으로 중국을 탐사할 계획을 세웠다. 지난 20년간 궁금해 마지 않던 ‘김일제(金日?)의 묘’ 존재 여부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상 최초로 등장하는 김씨 성의 주인공 김일제, 그리고 막연하게 몇몇 전문가의 입으로만 전해오는 ‘김일제의 묘’의 실재 여부는 김씨 성의 기원을 추적하는 일에 관심 많은 필자에게는 매우 중대한 일이었다.

1978년 필자는 김알지, 김수로가 등장하기 150여년 전에 이미 김씨 성을 가진 김일제라는 인물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몇 년 전 작고한 재야사학자 문정창(文定昌)씨의 저서 ‘가야사’ (백문당, 1978)를 통해서였다. 우리의 역사 연구를 강도 높게 비평하며 충격적인 논문을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킨 문정창씨는 <U>이 책에서 김일제가 한국 김씨들의 직계 선조가 된다는 것을 여러 전거를 들어 밝히고 있었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학설이었다. </U>

<U></U>

그러다가 10년이 지난 89년 한국문자학회 회장 김재섭(金載燮·66)씨에게 중국의 금문(金文)을 배우면서 또 다른 사실을 알았다. <U>김일제의 묘가 한(漢)나라 7대왕 무제(武帝·141∼87 BC)가 묻혀 있는, 중국 섬서성 함양 부근의 무릉(茂陵)에 함께 배장(陪葬)돼 있다는 정보였다</U>.

또 고(古)문자학을 공부하면서 김일제의 성(姓)인 김이 한무제로부터 사성(賜姓)을 받은, 즉 한무제가 특별히 내려준 성이었다는 것도<U> 그제서야 알았다. 말하자면 김일제가 세계 역사상 최초로 ‘김’을</U> 성씨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김일제가 과연 김씨의 시조가 될 수 있는 것인지, 그의 묘가 실제로 한무제가 묻혀 있는 무릉에 배장돼 있는지, 도무지 막연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같은 한자 문화권인 동양 3국에서 성의 글자가 같다고 해서, 먼저 살다 간 유명 인물에게 족보를 갖다붙여 그의 후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92년 중국과 국교가 트인 후부터 이제는 마음놓고 김일제의 묘를 확인해볼 수 있겠구나 하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지만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무릉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모아본 결과, 한나라 왕 무제를 도와 서역(西域)을 개척한 영웅 곽거병(?去病·140∼117 BC)의 묘는 있어도 김일제 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U>곽거병</U>이 누구인가. 그는 바로 <U>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休屠王)</U>을 죽이고 김일제와 그의 동생, 또 그의 어머니를 포로로 잡아온 장본인이었다. 김일제로서는 원수일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과 나란히 무릉에 배장돼 있을 것이라고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이번에 빈손으로 돌아올지언정 일단 무릉을 찾아 주위에 널려 있다는 많은 묘소를 이잡듯 찾아보기로 작심하고 중국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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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과거병, 초라한 김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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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西安)에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무릉을 찾은 것은 6월12일 오시(午時)였다. 섭씨 34도로 땡볕이 지독했다. 일제 마이크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따가운 햇살이 정수리를 쿡쿡 찔러 올 정도였다. 습기가 없는 건조한 기후인데도 열탕에 앉아 있는 듯 온몸에서 땀이 배어 올랐다. 땀이 나면 건조한 공기가 그대로 빨아 마셔버리니, 햇볕에 내놓고 있는 얼굴이며 목이며 팔의 피부가 따가웠다.

그런데 햇볕과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긴가 민가 하던 김일제의 묘는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더냐는 속담은 역시 들어맞았다. 한국에서 수집한 자료가 부실했을 뿐이지, 현장에는 김일제라는 인물에 대해 해설을 해놓은 책자와 묘지 안내 간판까지 걸려 있었다.

김일제가 한국 김씨의 시조든 아니든 간에 <U>2100년 전 김씨 성을 가진 인물의 묘는 현재의 지명으로 중국 섬서성(陝西省) 흥평현(興平縣) 남위향(南位鄕) 도상촌(道常村)에 있다.</U> 김일제의 묘는 한무제가 묻혀 있는 무릉의 들머리에서 동쪽으로 1km나 떨어진 곳이다. 또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 가족들을 포로로 잡은 곽거병의 묘에서 보면 동쪽으로 우뚝 서 있었다.

중국측 묘지안내 자료에 의하면 김일제에게 할당된 묘역은 1만8748m2. 묘의 높이는 12m, 분묘 동편의 길이는 41.2m, 서편이 41.9m, 남편이 35.5m, 북편이 36.3m로 1479평방m2에 이르렀다. 묘는 남쪽을 바라보고 누워 있었다. 아마 경주의 천마총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김일제의 묘는 무릉의 주인공인 <U>한무제의 묘나 한나라의 기반을 굳건히 한 곽거병, 위청(衛靑) 장군 등의 묘 규모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U> 곽거병의 묘역은 경내에 웅장한 담벼락을 두르고 있었고, 그 들머리에 무릉박물관을 만들어 화려한 연못과 높은 관망대까지 조성하는 등 그것만으로도 관광명소로 만들어두었다. 반면 김일제 묘는 사대부 집의 대문간 청지기가 사는 집 정도로 초라해 보였다.

김일제의 묘역은 주위가 담벼락 대신 밀밭과 과수원이 울을 치고 있었다. 입구에 해당하는 묘의 코앞에 배나무 과수원이, 옆구리며 머리 쪽에는 밀밭이 들어서 있었다. 말하자면 입구나 출구가 모두 봉쇄된 무덤이었다.

아무리 봐도 조금은 섭섭한 대접을 받는 묘였다. 빈정대는 식으로 표현을 하자면 그저 한무제의 미덕을 칭송하기 위한 액세서리에 불과한 묘라고나 할까.

김일제가 한족(漢族)이 아닌 흉노족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그랬을까? 무릉박물관에서 팔고 있는 무릉 관련 책자에는 김일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U>“흉노왕의 태자로 비록 잡혀와 노예가 됐지만 한무제에게 충성을 다한 공으로 ‘투후(?侯)’라는 천자(天子) 다음으로 높은 벼슬을 받을 수 있었고, 죽어서는 제왕이 누워 있는 능의 옆에 묻힐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U>

그러나 김일제의 묘는 현지에서 ‘미티(Miti)’라고 부를 뿐, 실제로는 그가 누구인지 왜 이런 묘를 만들어 두었는지 관심 밖이었다. 스포트라이트는 무릉과 곽거병의 묘이니, 그곳에만 관광객이 모일 것은 뻔하다.

묘하게도 중국의 역사에 굵은 선을 그어놓은 영웅 곽거병의 묘 앞에는 <U>곽거병의 전공을 새긴 ‘마답흉노석상(馬踏凶奴石像)’이라는 석조물이 조성돼 있다. 말 그대로 곽거병이 타던 천리마가 흉노족을 짓밟고 있는 형상이다</U>. 답사팀은 말에 짓밟힌 흉노족이 곽거병이 죽인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이 아닐까 생각했다. 적어도 답사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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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제 묘에 분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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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제의 후손들이 한 왕실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100여년 동안은 후손들의 참배가 거창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이후 지리멸렬해졌고, 2000여년이 지난 지금은 내놓고 이 묘를 찾을 후손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 이렇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김일제의 묘 꼭대기는 사람들이 많이 오르내린 듯 잔디가 벗겨져 사방으로 흙색의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뱀이 기어가는 듯 여러 갈래의 산책로 같은 길이 나 있었다. 묘에 오르지 못하도록 계획적으로 심었는지 알 수 없으나, 묏등 전체에는 무릎까지 오는 키 작은 가시나무가 고르게 덮여 있었다.

이곳에서 밀과 옥수수를 재배하고, 사과 과수원을 하고 있는 장지염(張志廉·50)씨는 할아버지대부터 3대째 농사를 짓고 있다고 했다.

장씨는 “작년 2월인지 3월인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만주 요령성에 있는 60∼70대의 할아버지 두 사람이 찾아와 자신들이 김씨라고 하면서 묘에 절을 하고 갔다”고 말했다. 그 외에 이 묘를 찾는 사람은 아직 본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김일제 묘에는 남쪽에 있어야 할 묘비가 보이지 않았다. 답사팀은 처음에는 묘비가 없는 줄 알았다. 그렇지만 적어도 무릉에 배장될 정도의 묘라면 묘비가 없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 사람이 나서서 묘비 수색 작업을 벌였다.

아니나 다를까. 묘의 남쪽 정면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무작정 과수원 속으로 20여m 들어갔더니 묘비가 있었다. 묘비는 어른 키만한 배나무 사이에 들어앉아 있어 눈여겨 찾지 않는 한 발견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배밭 주인인 50대 아주머니가 뛰어와 허락도 없이 들어갔으니 고발하겠다며 심하게 투덜대는 것을 달래느라 한참 고생했다.

답사팀 중 김씨 성을 가진 일행이 인사라도 올리고 가자고 제안했다. 이번 여행의 중요 목적이 김일제의 묘를 찾는 것이었으므로 모두가 찬성했다. 그러나 배나무 과수원 속에 있는 묘비 앞에는 차례를 지낼 손바닥만한 공간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묘의 동쪽 넓은 터에다 말리고 있는 밀짚을 약간 걷어내고 간단한 차례상을 차렸다.

한국에서 만든 순수한 우리 향을 피우고, 전남 승주에서 신광수(申珖秀)씨가 직접 만든 작설차를 올렸다. 제주는 답사팀 팀장인 김세환(金世煥·70)씨가 맡았다. 신라 김씨 계열의 의성 김씨(義城金氏)인 김세환씨는 답사를 나서기 전 김알지가 탄강했다는 경주 계림을 찾아서 중국의 김일제 묘를 찾으러 간다고 고유제를 올릴 만큼, 김씨의 뿌리를 찾는 작업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후배들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눈치였으나 그는 차례를 지내는 동안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답사팀 모두가 경건하게 차례를 올렸다. 과수원의 나무에 달려 귀가 따갑도록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축문으로 삼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그리고 묘소를 한 바퀴 돌며 좋은 날을 잡아 차례다운 차례를 올릴 것을 다짐했다. 답사팀은 물론 김일제가 김씨의 시조가 된다는 전제하에 이렇게 차례를 올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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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km의 사막, 河西走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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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과연 김일제는 역사에 어떻게 등장하고 있을까. 답사팀은 그 역사의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김일제라는 인물이 태어났던 기원전 2세기경 김일제를 둘러싼 내외 사정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김일제의 <U>아버지 ‘휴도’가 흉노의 왕으로 살고 있던 땅은 지금 서안 북쪽 땅인 무위(武危)의 언지산 (焉支山)과 돈황(敦煌)의 삼위산(三危山)이 있는 감숙성(甘肅省) 지역이다</U>. 휴도가<U> 이웃나라 왕인 곤사왕 (昆邪王)의 꾐에 빠져 죽고 일제와 동생 윤(倫), 그의 어머니 알지(閼氏)가 한나라 곽거병에게 포로로 잡힌 곳이 바로 삼위산이다</U>.

동쪽 아래에 있는 한(漢)나라 측에서 보지면 이 지대는 오초령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신강에 이르기까지 길이가 1000km에 이르며, 그 폭은 40∼100km나 되는 광활한 땅이다. 중국 사람들은 이 지역을 계곡으로 보았던지, 황하의 서쪽을 달리고 있는 긴 복도라는 뜻으로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고 부른다.

비록 복도라고 부르지만 결코 좁지 않은 광활한 지대다. 좌우가 험악한 산맥과 사막인 탓에 이 기나긴 지대말고는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이 없다. 따라서 이 지대를 거치지 않고서는 서역으로 갈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사막지대로 이어지는 이 땅은 황량하기 짝이 없지만, 해발 4000∼5000m인 기련산맥(길이 800km)에는 3000여개의 빙하가 2000km2의 거대한 얼음 호수를 형성하고 있어 멋진 대비를 이룬다. 여기서 녹아 흘러내린 물이 곳곳에 강과 호수를 이루고 넓은 오아시스를 형성한다.

이 오아시스 지대에 넓은 초원이 펼쳐져 목축이 번성하고, 비옥한 땅이 개간돼 농업이 발달해 감숙성의 곡창지대로 군림할 수 있었다. 이곳은 또한 <U>동서무역의 관문으로</U> <U>이곳을 지배하는 민족이라야 중원 땅을 부리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U>. 그래서 일찍부터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진(秦)나라는 감숙성 천수(天水) 땅에서 나라를 일으킨 뒤 섬서성 북서쪽에 있는 이곳 하서주랑을 차지함으로써 천하통일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진시황제가 죽고 나자 <U>간신들은 시황의 태자 부소(扶蘇)를 살해하고, 동생 호해(胡亥)를 내세워 천하를 주무르다 한고조인 유방에게 나라를 뺏긴다. </U>

<U></U>

이때 훗날 재탈환을 꾀하고자 <U>서북쪽으로 망명해간 세력이 태자인 부소의 계열, 즉 휴도왕 계열이라는 것이 한국문자학회 김재섭씨의 시각이다</U>. 어쨌든<U> 휴도왕 세력은 이곳에 근거지를 두고 계속 한나라를</U> 넘보았다.

한편 한나라를 세운 한 왕실은 이 하서주랑을 손에 넣지 않고는 하루도 편한 날을 보낼 수 없었다.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땅이었다. 대대로 중원을 통치한 이들은 이곳에 사는 종족을 <U>야만시해 흉노족이라고 낮춰 불렀다.</U>

<U>흉노의 생활과 풍속은 한족과는 판이했다</U>. 초원과 물을 찾아 이동해 다니면서 털로 짠 파오(천막)생활을 했기 때문에 생활은 늘 전투 태세였고, 무엇보다 <U>말을 가까이했기에 기동력이 뛰어났다</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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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와 곽거병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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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에서는 7대 임금으로 16살난 무제가 즉위한다(기원전 140년). 무제는 즉위와 함께 흉노정벌을 왕조의 제1과제로 삼았다. 한제국의 세계쟁패를 위해서 흉노를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이다.

흉노정벌에 노심초사하던 무제는 이웃 월지국이 흉노에 짓밟혀 하서에서도 서쪽고원으로 옮겨 복수할 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신하인 장건(張騫)을 파견해 <U>월지와 동맹하여 흉노를 협공하고자 했다</U>. 그러나 장건 일행은 되레 흉노에게 붙잡혀 10년 동안이나 유배당했다가 겨우 탈출에 성공한다. 그는 귀국하지 않고 월지왕을 찾아가 월지와 동맹을 맺고자 했으나 편안히 안주하고 있던 월지를 움직일 수 없어 13년 만에 귀국한다.

그러나 장건은 매우 유용한 정보를 갖고 온다. <U>대원이라는 나라에는</U>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천마(天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무제는 흉노보다 뛰어난 기동력을 갖추기 위해 <U>대원정벌에 나서서 수많은 천마를 얻게 된다. 천마를 얻고 나서부터 무제의 정벌이 순조로워진다. </U>

드디어 무제 휘하의 위청(衛靑) 장군이 흉노정벌에 나선다. 기원전 121년 봄, 곽거병이 1만명의 정예군단을 편성해 위청 장군과 합류하면서 하서지방 정벌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U>한무제의 부인인 위황후 언니의 아들로 태어난 이가 곽거병이다. 그는</U> <U>이모부인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U>. 18세의 어린 나이에 시중이 되었으며, 위왕후의 형제인 외삼촌 위청 장군을 따라 <U>흉노정벌에 나서 혁혁한 무공을 세우게 된다</U>.

곽거병은 먼저 광대한 <U>초원지역인 언지산(焉支山)을 공격한 후,</U> 이어 기련산 너머로 달아난 흉노를 쳐부수어 4만명 이상의 흉노를 포로로 사로잡는 대전과를 올렸다.

당시 광활한 <U>하서지방 중에서도 노른자위 땅을 다스린 통치자는 곤사왕(昆邪王)과 휴도왕(</U>休屠王)이었다. <U>한나라의 정벌군에 계속 밀리던 곤사왕은 흉노의 천자(天子)인 선우의</U> 질책이 두려워 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을 설득해 투항키로 한다. 그러나 휴도왕은 투항을 거부하고 전쟁준비를 한다. 그러자 곤사왕은 휴도왕을 꾀어내 죽여버리고 4만명의 무리와 함께 곽거병에게 항복하고 만다. 곽거병은 항복한 흉노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개선했는데 10만의 대군단이었다고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전한다.

이후 곽거병은 무제를 도와 서역개척에 지대한 공헌을 세웠다. 젊은 나이로 무려 여섯 차례나 출정, 번번이 대승을 거두었으나 24세 때 갑자기 요절해버렸다. 이에 무제는 비통해 마지 않았다고 하며, 그래서 위청 장군과 함께 곽거병의 묘도 자신의 능에 배장되도록 했던 것이다.

<U>김일제라는 인물은 한무제가 아니면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다. 김일제는 한나라의 역사서 ‘한서(漢書)’ ‘김일제전(金日?傳)’에 상세히 설명돼 있다. 물론 철저하게 한인(漢人) 본위로 기록했겠지만, 그</U> 속에서 우리가 놀랄 만한 역사의 사실들을 찾을 수 있다. 필자는 20여년 전 문정창씨의<U> ‘가야사’에서 처음 김일제를 만난 이후 ‘한서’의 ‘김일제전’을 찾아 살펴보았다</U>.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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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漢書)’의 김일제 전(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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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해 이르기를(贊曰), <U>김일제는 이적(夷狄)의 사람으로 그의 모국을 잃고 한의 궁중에 매인 노예였으나 임금을 독실하게 공경하고 타일러, 스스로 충성스러움과 믿음이 나타나 공적에 의해 상장(上將)이 되고 나라를 후사에 전해 자손은 대대로 충효로</U> 이름나고 7대 왕에 걸쳐 궁중을 돌본 일, 어찌 그리 성했는고. <U>본시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제천(祭天)한 까닭으로 김씨의 성을 주었다고 한다. </U>

<U></U>

―김일제의 자(字)는 옹숙(翁叔), 본래<U>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다.</U> 일제는 아버지가 항복하지 않고 죽었으므로 어머니 알지�閼氏�와 <U>동생 윤(倫)과 함께 한관에게 몰수돼 황문(黃門)에 옮겨져 말을 길렀다.</U> 이때가 나이 14세였다. 그 뒤 무제는 잔칫날에 말을 검열하였다. 거기엔 후궁의 여인들이 가득히 모여 있었다. 일제 등 수십인이 차례로 말을 끌고 어전 아래를 통과했는데 여인들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자가 많았다. 그런데 오직 일제는 궁녀들을 훔쳐보지 않았다.<U> 일제는 키가 8척2촌, 용모는 엄숙하고 끌고 있는 말 또한 살지고 훌륭했으므로 임금이 기이하게 생각하고 물어보니 사실대로 대답했다</U>. 임금은 기특히 여기고 즉일로 목욕시키고 의관을 주어 마감(馬監)으로 임명했다. 곧 시중부마도위 광록대부(侍中附馬都衛 光祿大夫)에 올랐다.

일제는 임금에게 가까워진 이래 전혀 과실이 없어 임금의 신임과 사랑을 받아 상을 받은 것이 <U>누천금이나 되었다</U>. 임금이 밖에 나갈 때는 함께 타고 갔으며 안에 있을 때는 좌우에서 모셨다. 주<U>위에서 “폐하가 망령이 들어 한 오랑캐의 애새끼를 얻어 도리어 귀하고 중하게 여긴다”고 수군거리니 임금은 그 소리를 듣고 더욱 후하게</U> 대하였다.

일제의 <U>어머니는 두 아들(일제와 윤)을 가르침에 매우 법도가 있어</U> 임금이 이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겼다. 병으로 죽자 어명으로 감천궁(甘泉宮)에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휴도왕 알지(休屠王閼氏)’라고 표제를 붙였다. 일제는 그 초상을 뵐 때마다 <U>예배하고 쳐다보고 눈물을 흘리고 난 뒤 걸음을 옮겼다.</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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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후 벼슬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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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임금은 좌우에서 모신 지 수십년에 이르렀다(이 사이에 <U>일제는 임금을 암살하려 하는 자를 잡아내 더욱 임금의</U> 신뢰를 받았음). <U>임금은 일제에게 궁녀를 주었으나 절대로 가까이 하지 않았다</U>. 임금이 그의 <U>딸을 후궁으로 삼고자 했으나 승낙하지 않았다</U>. 그의 독실과 근신이 이와 같아 임금은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임금이 앓아 눕게 됐다. 무제는 모하라(임금을 암살하려 한 자)를 토벌한 공으로 일제를 ‘<U>투후(?侯)’에 봉할 것을 유언으로</U> 남겼으나 일제는 무제에 이어 즉위한 임금(昭帝)이 어리므로 봉을 받지 않았다. 어린 임금을 보조한 지 1년 쯤 지나서 <U>일제는 앓아 눕게 되고 병이 깊어졌다.</U> 대장군 곽광이 임금께 진언하여 일제는 드러누워서 열후(列侯)의 인수(印綬)를 받았다. 하루가 지나서 죽었다(나이 50세로 추정). 장례에 필요한 물건을 주고 묘지를 주어 경차와 무장병을 딸려 장송하니 군대의 진을 펴고 무릉에 이르렀다. 시호를 경후(敬侯)라고 하였다.

―일제의 두 아들 상(賞)과 건(建)은 원래<U> 시중(侍中)이 되고 소제(昭帝)와 나이가 비슷해 함께 기거했다</U>. 상은 봉거도위(奉車都衛)로, 건은 부마도위(附馬都衛)가 되었다. 상이 투후를 계승하여 두 개의 인수(印綬)를 차게 돼 임금이 곽장군에게 이르기를 “김씨 형제가 모두 두 개의 인수를 달게 하면 안 됩니까” 하고 물으니 곽광이 대답하기를 “<U>상은 아버지의 벼슬을 이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했다</U>. 그때 나이 모두 8, 9세였다.

선제(宣帝)가 즉위한 뒤 <U>상은 태복(太僕)이</U> 됐다. 그런데 곽광 장군이 모반의 낌새를 보이자 상서하여 곽씨의 딸인 부인과 이혼을 했다. 임금도 이를 애처롭게 여겼으며 이로 인해 상은 연좌되지 않았다. 원제(元帝) 때 광록(光祿)의 훈(勳)을 받고 죽었으나 아들이 없어 그 나라는 없어졌다. 선제에 이어 제위에 오른 원제(元帝) 초에 일제의 <U>차남인 건(建)의 손자 당(當)을 투후로 봉하여 일제의 뒤를</U> 잇게 했다. 다시 당의 아들인 성(星)이 투후를 계승한다.

정리하자면 <U>일제는 한무제로부터 김이라는 성을 받고 가장 아끼는 신하가 된다. 무제를 암살하려는 자를 무제 앞에서 격투 끝에 체포한 공으로 한나라 제후국의 왕인 ‘투후’라는 벼슬까지 받는다</U>. 일제의 아들 상(賞)도 투후가 되나 일찍 죽고, 후에 5대손인 성(星)까지 투후 벼슬을 받아 제후국의 왕이 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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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김이 김일제의 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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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김일제 일가에 자주 등장하는 ‘<U>투후’라는 이름은 놀랍게도 신라 30대 왕인 문무왕 비문에서 다시 나타난다</U>. 지금 경주국립박물관에 남아 있는 <U>문무왕의 비석은 윗부분 전체가 없어져버렸고 비의 아래 둥치만 남아 있다</U>.

현재 탁본으로 남아 있는 비문의 글자는 원래 비문의 일부밖에 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문무왕의 계보가 완전치는 못하다 하더라도 뚜렷하게 남아 있어서, 신라 왕가의 가계도를 살펴보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점이다.

자취를 감추었던 <U>문무왕비가 다시 발견된 것은 1796년(정조 20년)에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서다.</U> 이는 당시 경주부윤을 지내던 홍양호(洪良浩·1724∼1802년)에게 보고됐고, 홍양호는 이를 탁본해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이 비문은 발견 당시에 이미 글자의 반수 이상이 심하게 마모돼 완전하게는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수 있다.

이 <U>비문에서 중요한 것은 문무왕의 출자(出自)가 보인다는 점이다</U>. 이에 대해서는 이미 유득공 (柳得恭·1749∼?)이 그의 저서 ‘고예당일기’에서 언급한다. “<U>신라의 김이 김일제의 김인가?” 그러나 유득공은 더 이상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U>

문무왕의 비문에는 <U>문무왕의 선대(先代)가 누구 누구라는 것이 명확하게 밝혀져 있다.</U> 그 선대를 표시하는 글자들은 ‘<U>화관지후(火官之后)’니 ‘투후’니 ‘성한왕(星漢王)’이니 해서 지금 사람들이 보면 무슨 암호처럼 잘 알 수 없는 말이다. 그럼에도</U> <U>문무왕 비문에 남아 있는 글자를 조립해 분석을 해보면 과거의 많은 금석문에서처럼 조상을 미화해서 신화로 꾸미는 가식이 없다는 점이 돋보인다</U>.

비문에 남아 있는 문무왕의 출자는 문무왕 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7단계로 구성돼 있다. 이 7단계 인맥 계보를 구체적 역사에 잇대어 설명해낼 수 있다면, 지금까지 이르지 못한 고조선이나 삼한 등이 이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도 풀릴지 모른다.


비문의 다른 내용은 접어두고, 가장 주목되는 7단계의 출자 부분은 이렇다.

<U>① 화관지후(火官之后): BC 2300년대----삼황오제의 순임금
</U>
② 진백(秦伯): BC 650년대-------------진시황제 20대 선조인 목공
③ 파경진씨(派鯨津氏): BC 200년대--------휴도왕
④ 투후(?侯): BC 100년대-------------김일제
⑤ 가주몽(駕朱蒙): BC 50년대
⑥ 성한왕(星漢王): AD 20년대--------------김성(성한왕)--->김알지
<U>⑦ 문무왕(文武王): AD 660년대
</U>

옆에 덧붙인 연도는 문자학회 김재섭씨가 주장하는 것이다. 문제는 ①의 ‘화관지후’가 사람의 이름인지 당시의 관직 이름인지 ②의 ‘진백(秦伯)’이나 ③의 ‘파경진(派鯨津)’이 무슨 뜻인지 모호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후대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 신라 문무왕 당시에는 이런 글자가 무슨 뜻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새겼을 것이다.

일단 결론부터 추단해 본다면 ①의 화관지후는 BC 2300년 경 관직 이름으로 현재로서는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의 <U>임금인 순(舜·재위 9년 BC 2320∼2312),</U> <U>②의 진백(秦伯)은 진시황제의 20대 선조인 진 목공(穆公),</U> ③의 <U>파경진씨(派鯨津氏)는 진나라가 망하면서 안전지대를 찾아 경진씨를 파견한 휴도왕,</U> ④의 투후는 김일제, ⑥의 성한왕은 김일제의 4대손인 김성(金星)으로 이 성한왕이 바로 김알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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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은 소호김천씨의 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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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역사서에도 <U>이를 뒷받침할 만한 기록이</U> 존재한다. 신<U>라 6촌장들이 진나라에서 망명해 온 사람, 즉 ‘진지망인(秦之亡人)’이라는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기록도 있고</U>, 점필제 김종직의 ‘이존록(훙尊錄)’이나 ‘<U>삼국사기 백제본기’ 끝머리에 붙여진 김부식의 논찬과 같이 “신라인이 소호김천씨의 후손이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U>. 말하자면 <U>한국 김씨의 선계가 소호씨 계열임을 말하는 것이다. </U>

묘하게도 중국이 신화시대로 간주하고 있는 삼황오제시대의 한 사람인<U> 소호김천(少?金天·재위 7년, BC 2474∼2468년)은</U> <U>진나라와 연관된다</U>. <U>진나라가 세워질 때 서방의 신을 모시고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는</U> 백제사(白帝祠)가 등장하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백제(白帝)는 소호김천을 가리키며 백제사는 소호김천을 위한 사당이었다.

또 진나라가 망하고<U> 진나라 왕족 계열인 휴도가</U> 서쪽 돈황으로 피난 가서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냈다고 하는<U> 금인제천(金人祭天)의 금인(金人)도 소호신(少?神)을 이르는 말이 될 것이다. </U>

<U></U>

이런 까닭으로 문무왕 비문에는 ‘<U>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다(?侯祭天之胤)’는 글이 등장하게 된다</U>. 또 한나라 무제가 <U>일제에게 성을 내리면서, ‘제천금인’한 휴도왕의 왕자니 성을 김(金)</U>으로 했다는 것과도 연결이 될 것이다.

게다가 다른 것은 제쳐놓더라도 <U>④의 투후와 ⑥의 성한왕이라는 이름은 한나라의 역사서인 ‘한서(漢書)’에 관직 명칭으로</U> 나온다. 실제로 ②의 진백과 ④의 투후 사이의 역사 기년을 추적해보면 진나라 멸망과 투후가 생긴 내력이 중원에서 일어난 일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족보와 관련해 가장 관심을 끄는<U> 사항은 ⑥의 성한왕이 과연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U>. <U>문무왕 기록은 이런 등식이 성립해야만 해독될 수 있다. </U>

<U></U>

다시 당시의 역사 상황으로 되돌아가보자. 한고조 유방(劉邦)이 세운 한왕조는 13대 200여년 만에 <U>왕망에게 나라를 뺏긴다. 그 후 15∼17년 만에 다시 나라를 찾게 되니</U>, 역사에서는 이를 후한(後漢)이라고 부르며 이전의 전한(前漢)과 구별한다.

<U>왕망(王莽·BC 45∼AD 23년)은 한왕실 10대 원제(元帝·BC 49∼33년)의 황후 왕씨(王氏) 가문 출신이다</U>. 11대 성제(成帝·BC 33∼7년)가 즉위하자 큰아버지 왕봉(王鳳)이 대사마대장영상서사 (大司馬大將領尙書事)가 되어 정치권을 장악했고 왕망 역시 38세(BC 8년)에 재상격인<U> 대사마(大司馬)가 되어 한왕실을 장악한다</U>.

그런데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자인 당(當)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의 남편으로 당에게는 이모부인 셈이다. 당은 일제의 후손으로 이 당시에 투후 벼슬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U>왕망은 투후 김씨 계열과는 외가 사이였던</U> 것이다.

왕망은 9살의 어린 평제(平帝)를 옹립, 13대 제위에 올리고 자기 딸을 황후로 삼는다. 4년 만인 기원후 5년 어린 평제를 독살하고 9대 황제였던 선제(宣帝)의 현손인 2살짜리 영(孀)을 제위에 올리고 섭정을 하다 서기 8년에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U>신제국(新帝國)’을 세웠다. </U>

왕망이 김일제 이후 <U>한왕실에 깊숙이 개입해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김씨 계열의 힘을 업고 있었다는 것은 ‘한서 왕망전’에 상세히 나와 있다.</U> 물론 왕망이 전권을 장악함으로써 <U>외가인 김씨 계열은 모조리 정치 실세가 됐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U>.

그러나 왕망은 전국에 흩어져 있던 <U>유씨들의 저항에 부딪혀 꿈을 펼치지 못하고 15년만에 망했다.</U> 이렇게 됐으니 신제국에서 요직을 맡고 있던 <U>김씨계는 필사의 탈출을 했을 것이다. </U>

<U></U>

오늘날 중국의 <U>요서와 요동, 한반도의 서북과 남쪽 김해 및 제주도, 바다를 건너 일본 규슈와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왕망때 만든 화폐 오수전(五銖錢)이 출토되는</U> 것은 <U>왕망과 정치일선에 같이 참여했던 세력이 목숨을 건지기 위해 대륙 밖으로 이동한 흔적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U>

<U></U>

따라서 문무왕 비문과 왕망의 시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보건대 신<U>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바로 성한왕, 즉 일제의 5대손인 성과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U>

한편 일각에서는 <U>김일제의 자손 중 또다른 김씨들이 가락으로 대거 이동해왔을</U> 것으로 추정한다. 그 핵심으로 꼽히는 사람이 김일제와 같이 포로로 잡혀온 동생 윤(倫)이다. 윤은 일찍 죽고 그의 아들 안상(安上)이 투후 벼슬과 동격인 도성후(都城侯)가 됨으로써 자손이 번창하게 된다. 그리고 윤의 4대손이자 안상의 3대손 탕(湯) 역시 왕망의 실패 이후 이 땅으로 망명해 오는데, 바로 그가 김수로라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U>투후 일제의 5대 자손이 신라 김씨계이고 윤의</U> 5대 자손이 가락김씨계가 된다는 것이다.

가락의 시조 김수로의 직계가 김일제의 동생 윤(倫)의 가계라면 <U>가락 김씨의 시조할머니 허왕후는 인도에서 온 공주라는 설도 설득력이 없어진다</U>. 허왕후의 인도 아유타 공주설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 양자강 상류 보주에서 양자강을 타고 내려와 김해로 왔다는 설 등 그야말로 설왕설래다.

문정창씨는 “허왕후의 유입과정과 그 상황 등에 비추어 김수로 일문은 <U>제국이 망한 후 발해연안 또는 산동반도 지방에서 항거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가 마침내 그 아성이 무너졌으므로 유랑하여 한반도에 온 것 같다”</U>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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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왕실에 등장하는 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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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허왕후의 출자 또한 뒤바뀔 공산이 많다. ‘<U>한서’의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면 단언은 할 수 없을지언정 허왕후가 한 왕실 출신이라는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U>

<U>한 왕실에서 김씨계와 허씨계 두 집안은 초창기부터 강하게 얽혀 있었다</U>. 허씨는 9<U>대 선제(宣帝)의 황후였다</U>. 김일제의 동생 윤(倫)의 아들 도성후(<U>都成侯) 안상(安上)과 황후 허씨의 아버지 평은후(平恩侯) 허광한(許廣漢)은 7대 무제(武帝·재위 141∼87 BC), 8대 소제(昭帝·재위 87∼74 BC) 이후 왕실의 외척으로서 당대를 주도한 곽씨 일파와 정권경쟁의 라이벌이었다</U>. 그래서 곽씨 일파의 허황후 살해음모를 들춰내 공을 세우게 된다.

10대 원제(元帝·재위 BC 49∼33), 11대 성제(成帝·재위 BC 33∼7), 12대 애제(哀帝·재위 BC 7∼1), 13대 평제(平帝·재위 BC 1∼AD 5)와 신제국 왕망의 멸망시기까지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는 <U>외척과 공신의 후손으로 황제의 부마인 허광한과 안상의 자손이 서로 혼인한 사이인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U>

허광한의 경우는 황후가 된 딸만 있었고 그의 두 동생도 각각 <U>박망후(博望侯) 요성후(樂成侯</U>)가 되었다.

 마지막 신제국에서 허광한을 이은 경(敬)과 박망후를 이은 병(竝), 또 병을 이은 보자(報子), 요성후를 이은 상(常) 등을 보면 <U>김수로가 되어 가는 도성후 탕(湯)의 왕후인 허씨의 출자가 어느 곳인지를 짐작하게 된다. </U>

잃어 버린 역사를 되찾는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문<U>정창씨나 김재섭씨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득을 해도 한번 각인된 역사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U>. 김일제가 김씨의 직계가 아니라고 해도 좋다. 일단 가설을 세우고 이를 증명하는 노력이라도 보여야 할 것이다.

학계에서 인정하든 말든 고문자학은 중국인 학자가 신화 전설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U>신농과 황제 소호김천 등 삼황오제시대가 실제의 시대라고 명쾌하게 증명하고 있다.</U> 지금 한국문자학회는 역사의 시작시대인 삼황오제시대가 또한 고조선시대임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논리적으로도 이를 증명해내고 있는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일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희망 찬 미래를 위해 정체성을 찾으려는 것일 뿐이다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 金氏 뿌리 탐사 - 역사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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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참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닭이야기
김 석
#김석기자




정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닭 띠의 해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영 편치가 않네요. 닭들의 모진 수난 때문이지요. 조류 인플루엔자라는 몹쓸 바이러스에 수많은 닭이 차디찬 땅속에 묻혔습니다. 나란히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닭에게 정말 큰 빚을 진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참 오랜 세월 우리와 함께 살아왔는데 말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닭은 우리 인간에게 퍽 중요한 식량 공급원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닭은 대단히 신성하고 상서로운 존재였어요.



서쪽에서 올려다본 경복궁 근정전 계단. 앞쪽 월대 기둥머리 위에 닭 한 쌍이 앉아 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은 돌로 쌓은 두 단의 월대 위에 우뚝 서 있습니다. 대개 관람객들은 근정전 건물에만 눈길을 주게 마련인데, 실은 월대를 찬찬히 둘러보는 맛이 정말 각별하거든요. 위아래 월대 곳곳을 지키는 예쁜 돌조각들 때문이랍니다. 사신상과 십이지신상들이지요. 이 가운데 근정전 서쪽 계단의 아래쪽 월대 기둥 위에 닭 한 쌍이 다소곳이 앉아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임금이 앉았던 자리에서 보면 왼쪽이 수탉, 오른쪽이 암탉입니다.





닭이 울면 귀한 존재가 태어났다!


닭이 궁궐 계단을 지키고 있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닭은 십이지의 열 번째 동물이지요. 방향으로는 서쪽, 시간으로는 오후 5시에서 7시, 달로는 음력 8월을 지키는 방위의 신이자 시간의 신입니다. 닭이 신성한 동물로 여겨진 역사적 유래는 아주 깁니다.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배웠듯 일연의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나지요. 게다가 혁거세 왕의 왕후가 탄생한 과정은 더 흥미롭습니다.


“그날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英井) 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 여자아이의 얼굴과 용모는 매우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 부리와 같았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태어났으므로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는데 이것은 계룡이 상서로움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자, 숲 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국호를 고쳐 계림이라 했다고 한다.”


신라 김 씨의 시조로 여겨지는 김알지의 탄생설화에도 닭이 등장합니다.


“하늘에서 땅까지 자줏빛 구름이 드리워지고 구름 속으로 보이는 나뭇가지에 황금 상자가 걸려 있었다. 상자 안에서 빛이 나오고 있었고 나무 밑에는 흰 닭이 울고 있었다. (중략) 왕이 숲으로 가 상자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바로 일어났는데, 혁거세의 고사와 같았기 때문에 알지(閼智)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속 <조속필금궤도>, 비단에 채색, 105.5×56.0cm, 1635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숲 속에서 닭이 울어서 나라 이름을 고쳤다 했을 정도로 우리 옛 시조 설화에서 닭은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건국에 신성함을 부여하는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바로 이 김알지 설화를 그림으로 남긴 이가 있었지요. 조선 후기의 사대부 화가인 창강 조속(趙涑, 1595∼1668)이 그린 <금궤도>란 그림인데요. 보시는 것처럼 커다란 나무에 금궤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에서 흰 닭이 목을 빼 울고 있습니다.



(좌) 고구려 무용총 천장 그림 / (우) 경복궁 근정전 주작상



닭을 신성시하고 숭배했던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로 오면 구체적인 유물들이 등장하는데요. 고구려 고분 무용총 천장에는 긴 꼬리를 가진 닭이 그려져 있습니다. 닭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은 주작입니다. 닭의 모습을 본떠서 그려냈기 때문이겠지요. 아시다시피 주작은 남쪽을 지키는 동물입니다. 경복궁 근정전을 정면에서, 다시 말해 남쪽에서 바라보면 위쪽 월대 기둥머리에 닭의 모습을 한 돌조각이 놓여 있어요. 닭으로 여기기 쉽지만 주작입니다.



(좌) <계형토기>, 백제시대, 높이 19.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닭>, 통일신라시대, 전(傳) 민애왕릉 출토,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백제의 유물로는 닭 모양 토기가 남아 있어요. 생김새는 비교적 단순하지만 질그릇 특유의 소박한 멋이 참 아름답지요. 섣부른 감은 있지만 닭의 이미지가 생활 속 물건에 반영된 가장 오래된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른쪽에 있는 유물은 신라의 44대 왕인 민애왕의 것으로 전해지는 무덤에서 출토된 겁니다. 1980년대 발굴조사 당시 무덤 안에서 십이지상 가운데 쥐ㆍ돼지ㆍ소ㆍ닭 4개만 발견됐다고 해요. 높이 10cm로 아담한 이 조각들은 무덤의 바깥쪽을 보며 서 있었다고 합니다.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이었던 거지요.



<김유신묘 십이지 유상 탁본>, 통일신라, 가로 71×세로 159,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무덤까지 함께하는 동반자! 닭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김유신 장군의 묘에도 십이지신상 가운데 닭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요. 그 탁본 중 하나가 단국대 석주선 기념 박물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닭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고 두 손에는 각각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지요. 무덤을 지켜야 하니까요. 박물관 유물 해설에 따르면 김유신묘의 십이지상은 현존하는 십이지상 가운데 예술적인 면이나 규모 면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힌다고 해요.



조선시대 닭 그림의 대가 변상벽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로 넘어오면 이제 본격적으로 그림에 닭이 등장합니다. 조선의 닭 그림 하면 단 하나의 이름을 떠올릴 수밖에 없지요. 그 주인공은 바로 조선 후기의 화원화가 변상벽(卞相壁, ?~?)입니다. 두 차례나 영조의 초상화를 그렸을 정도로 그림 솜씨로는 당대 최고였던 변상벽을 더 유명하게 만든 건 바로 고양이와 닭 그림입니다. 얼마나 귀신같이 잘 그렸으면 변 고양이(卞古羊), 변 닭(卞鷄)이란 별명으로 불렸을까요.



변상벽, <모계영자도>, 비단에 수묵담채, 100.9×50.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전설적인 닭 그림이라고 불러도 좋은 변상벽의 작품은 대표적으로 두 점이 거론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 그림이 바로 위에 보시는 <모계영자도(母鷄領子圖)>에요. 어미닭의 부리를 자세히 보면 벌레를 물고 있지요. 귀엽고 앙증맞은 새끼 병아리들에게 먹이를 줄 참입니다. 어미와 새끼들이 다정하게 어울린 모습에서 살뜰한 모정(母情)과 따스한 가족애(家族愛)가 느껴져 마음이 다 푸근해지네요.


그래서 이 그림은 우리 옛 그림을 소개하는 여러 미술 책에 꽤 자주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작고한 미술사학자 오주석 선생의 글을 빼놓을 수 없어요. 그 감동이 어찌나 컸던지 각기 다른 자신의 책에 두 번씩이나 이 작품에 대한 깊고도 진한 애정을 토로했습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미술 강연에서 절대 빼놓지 않았던 그림으로 바로 이 <모계영자도>를 꼽으면서 이런 상찬의 말을 남겼지요.


“세상에 원, 외국 박물관에서도 여기저기서 닭 그림을 많이 보시겠지만 이렇게 정답고 살가운 그림은 다시없어요!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선한 작품을 그리고, 또 그것이 좋아서 벽에 걸어 두고 흐뭇해했던 우리 조상들의 삶이 얼마나 순박하고 착한 것이었는지 절로 느껴집니다.”



변상벽, <자웅장추>, 종이에 채색, 30.0×46.0cm, 간송미술관 소장



여기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닭 그림이 있습니다. 화면 오른쪽에 잘 생긴 수탉과 암탉 한 쌍이 있고, 왼쪽으로는 암탉 주위로 병아리들이 종종 모여 있군요. 닭 가족의 평화롭고 단란한 한때를 그렸습니다. 소재도, 구도도 평범하지요. 하지만 닭과 병아리를 묘사한 솜씨만큼은 정말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놀랍거든요. 아주 가는 붓으로 닭의 깃털을 한 올 한 올 그어냈을 화가의 집착에 가까운 육체노동이 빚은 경탄스러운 극사실의 세계가 여기에 있습니다. 백인산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초상화로 다져진 숙련된 기량이 닭을 그리면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으니, 가히 닭의 초상이라 할만하다.”라고 썼습니다. 절묘한 그림에 걸맞은 절묘한 표현입니다.


백인산 선생의 책 <간송미술 36 회화>를 보면 조선 후기의 대학자 다산 정약용이 변상벽의 그림을 품평한 흥미로운 글이 소개돼 있습니다. 당시에 변상벽이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를 이보다 더 잘 알려주는 글은 없지 싶어요.


“변상벽이 변 고양이로 불리는 것은 고양이를 잘 그린다고 사방에 이름이 나서이다. 이젠 또 닭과 병아리를 그려내니, 마리 마리가 털이 살아 있는 것 같다. (중략) 형형색색 세밀하여 실물과 똑같고, 도도한 기상 또한 막을 수 없다. 듣자 하니 이 그림을 막 그렸을 때, 수탉이 잘못 알고 울어 댔다 한다. 그가 고양이를 그렸을 때도 쥐들이 겁을 먹었으리라. 기예의 지극함이 여기까지 이르니, 만지고 또 만져도 싫지가 않다. 되지 못한 화가들은 산수화를 그린다며 이리저리 휘두르니 거칠기만 할 뿐이다.”


예로부터 닭은 다섯 가지 덕을 지니고 있다 했지요. 머리에 벼슬을 이고 있는 것은 벼슬자리, 즉 입신출세를 상징한다 해서 문(文), 발에 달린 발톱은 무기로 쓰이니 무(武), 적 앞에서 물러섬이 없이 싸운다 하여 용(勇), 먹이가 생기면 서로 알려주고 먹여주는 것은 인(仁), 때를 놓치지 않고 정시에 꼬끼오 하며 정확하게 제 할 일을 한다 해서 신(信)입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닭을 사랑했고, 그림으로도 그렸던 겁니다.



정선, <등롱웅계>, 비단에 채색, 30.5×20.8cm,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의 위대한 화가들이 그린 닭


조선 최고의 화가들도 한두 점씩은 닭 그림을 남겼지요. 진경산수의 대가로 추앙받는 겸재 정선의 그림 가운데 <등롱웅계(燈籠雄鷄)>란 작품이 있습니다. ‘꽈리와 수탉’이란 뜻입니다. 겸재 하면 워낙에 산수화 걸작이 많다 보니 상대적으로 낯설게 보일 정도인데요. 이 그림에서 우리는 가장 기세등등하고 호전적인 장닭의 위용을 보게 됩니다. 자세를 한껏 낮춰 당장이라도 돌격 앞으로 할 것만 같은 자세에서 생생한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나요. 더욱이 흰 벼슬은 바로 토종닭의 징표이기도 하니, 참 장하고 자랑스러운 토종닭 그림입니다.



김득신, <야묘도추>, 종이에 담채, 22.4×27.0cm, 간송미술관 소장



너무나도 유명한 그림이니 따로 소개해 드리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린 이는 조선 후기의 화원화가인 긍재 김득신(金得臣, 1754~1822)입니다. 마치 움직이는 동영상의 정지 화면을 보듯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이며 동물들의 자세, 표정 하나하나에 사실감이 넘칩니다. 선배 김홍도와 후배 신윤복, 두 대가 사이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는 김득신이었다지만, 이 그림만큼은 화가의 유명세와 관계없이 걸작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눈길은 닭에게 가닿습니다. 새끼 병아리를 물고 달아나는 고양이를 따라가보려고 홰를 치는 어미닭의 자세에서 자식을 잃을지 모르는 어미의 절박함이 뚝뚝 묻어나지요. 어미닭 주위로 놀라서 혼비백산 달아나느라 여념이 없는 병아리들의 모습은 또 어떻고요. 병아리 절도 사건이란 심각한 내용을 다뤘지만,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절로 떠오르는 미소까지야 어쩌겠어요. 기분 좋은 해학이 깃든 그림입니다.



신윤복, <닭>, 비단에 채색, 23×23.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혜원 신윤복의 것으로 전하는 닭 그림도 한 점 있습니다. 두 마리 모두 발 뒤에 뾰족한 칼날을 달고 있지요. 싸움닭입니다. 자세를 보면 한 판 붙기 전에 치열한 탐색전을 벌이고 있는 모양새에요. 그런데 자세를 보아하니 승부의 추는 이미 기울어진 것 같기도 합니다. 닭의 다섯 가지 덕 가운데 무(武)와 용(勇)을 드러낸 이 그림의 오른쪽 위에 있는 글귀는 중국 당나라를 대표하는 문장가였던 한유의 글을 인용한 겁니다.


高行若矜豪 (고행약긍호) 고상한 행동은 거만하고 호방한 듯

側睨如伺殆 (측예여사태) 곁눈질로 허점을 살피네.



닭에게서 각별한 깨달음을 얻다


그런 닭이 어떤 선비에게는 삶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주기도 했습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은 자신의 문집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닭에 관한 글을 여럿 남겼는데요. 병아리(鷄雛)란 글을 보면 어쩜 그렇게 병아리의 생태를 면밀하게 관찰해 놓았는지요. 배고픔과 추위에 곧잘 죽는 병아리를 먹여 살리는 방법이라든가, 먹이 경쟁에서 밀려난 병아리를 돌보는 요령, 심지어 병아리 똥구멍이 막혔을 때 뚫어주는 방법까지 적어놓았으니 말입니다. 학문의 실질적 쓸모에 관심을 기울였던 실학자답습니다. 이 글의 마지막 단락을 함께 읽어볼까요.


“백성들이 여러 가지로 고통을 겪는 모습 또한 잘 살고 귀한 지위에 있는 자들은 깨닫지 못한다.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백성들이 온갖 고통을 겪고 또 배도 곯게 되니 어찌 떠돌아다니다가 도랑과 구렁에 엎어져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승업, <계도(鷄圖)>, 19세기 후반, 종이에 담채, 140×43.5cm, 개인 소장



그런가 하면 축계지편당(祝鷄知偏黨)이란 제목의 글도 있습니다. ‘닭을 키워보면 당파에 치우치는 걸 알 수 있다.’는 뜻인데요. 서로 먹이를 차지하기 위해 아웅다웅 싸우는 닭들의 생태에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출세를 탐하는 인간 사회의 추악한 이면을 본 겁니다. 요즘도 닭의 특정한 신체 부위를 들어 상대를 비꼬고 폄하하는 말이 심심찮게 쓰이지요. 닭으로서는 억울할 만도 하겠습니다. 심지어 그런 닭만도 못한 사람에 대한 비유까지 나오는 마당이니 말입니다.


“사람에겐 닭보다 못한 것도 있다. 닭들이 먹을 것을 다툴 때는 날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면서 싸우다가도 그 일만 끝나면 서로 다투던 일은 잊은 채 언제 그랬냐는 듯 사이좋게 지낸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폭포의 물이 용솟음치듯 노여운 모습을 가라앉히지 않는다. 그리하여 반드시 상대를 죽여 없애 버리고자 하면서 자신의 잘못은 결코 뉘우치지 않으니, 이야말로 차마 못할 일이다.”


번잡한 도시의 삶은 꼬끼오 우렁찬 닭 울음소리를 속절없이 앗아갔지요. 그래서 이제는 식탁 위 먹을거리로 제 한 몸 내준 닭이 우리에겐 더 친숙합니다. 뜻하지 않게 닭 값, 계란 값이 오르는 초유의 상황을 겪고 나니 아낌없이 주고 또 주는 닭의 존재가 새삼 고맙게 느껴집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새해가 밝았습니다. 닭의 해인 2017년에는 부디 여느 해보다 기쁘고 행복한 일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심전 안중식 <쌍계도>(1900년) 부분



※ 이 글은 아래 책과 글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김흥식 엮음, 정종우 해설 <조선동물기>(서해문집, 2014)

백인산 <간송미술 36 회화>(컬처그라퍼, 2014)

오주석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솔, 2003)

오주석 <그림 속에 노닐다>(솔, 2008)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민음사, 2008)

천진기 ‘여명과 축귀의 계명성’ <정유년 닭띠 학술 토론회 자료집>(국립민속박물관, 2016)

탁현규 <고화정담>(디자인하우스, 2015)

<간송문화 : 간송미술문화재단 설립 기념전>(간송미술문화재단, 2014)

<간송문화 90 화훼영모 – 자연을 품다>(간송미술문화재단, 2015)



출처: http://www.ssgblog.com/2145 [신세계그룹 공식 블로그]




수곡서원(秀谷書院)- 이의건(李義健)·조속(趙涑)·이후원(李厚源) 강남구 일원동 서원마을| 한국서원 총람
樂民(장달수)|조회 10|추천 0|2018.11.29. 22:41
수곡서원(秀谷書院)-미복설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서원마을
   이의건(李義健)·조속(趙涑)·이후원(李厚源)
   1685년(숙종 11)
   1695년(숙종 22)
   불향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서원마을에 있던 서원.
원래는 경기도 광주 땅에 속했다가 강남구 일원동으로 행정 구역이 바뀌었다.
1685(숙종 11)에 창건되었으며, 이의건(李義健조속(趙涑이후원(李厚源)의 위패를 모셨다. 1695년에 사액을 받았다. 1871(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 인근에
완남군 이후원의 묘소가 있다.

1) 이의건(李義健)
1533(중종 28)1621(광해군 1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의중(宜中), 호는 동은(峒隱). 세종의 다섯째아들인 광평대군 여(廣平大君璵)5대손으로, 아버지는 배천군수 수한(守漢)이며, 어머니는 경주최씨(慶州崔氏)이다.
1564(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뒤에 학행으로 돈녕부직장이 되었으나 친상으로 곧 사직하였으며, 1610(광해군 2) 이항복(李恒福)의 주청으로 공조좌랑이 되고, 이어 공조정랑에 올랐으나 사퇴하였다.
그는 당시의 명유들과 교유하며 시명을 떨쳤고, 후학의 양성에 전력하였다. 글씨에도 능하였다. 광주(廣州) 수곡서원(秀谷書院)과 영평(永平)의 옥병서원(玉屛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동은유고가 있다. 그의 글씨는 광평대군 여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
 
2) 조속 (趙涑)
1595(선조 28)~ 1668(현종 9).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희온(希溫), 호는 창강(滄江창추(滄醜취추(醉醜취옹(醉翁). 아버지는 병조참판 수륜(守倫)이다.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1627(인조 5) 덕산현감을 거쳐 장령·진선을 역임하고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이르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나 훈명(勳名)을 사양함으로써 청표탁행(淸標卓行)으로 후세에 추앙을 받기도 했다. ··화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우리나라 역대 명필들의 금석문을 수집하여 이 방면의 선구적 업적을 남겼다. 그림에서는 묵매·영모(翎毛산수에 능했는데 특히 금강산과 오대산을 비롯한 명승을 두루 다니며 사생했다고 전한다. 현존하는 유작들 중에는 공필풍(工筆風)금궤도 金櫃圖(국립중앙박물관)와 남종화풍이 깃들어 있는 호촌연의도 湖村煙疑圖(간송미술관) 등도 있지만 그보다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까치와 물새를 소재로 한 수묵화조화와 묵매 등에서 격조높은 개성을 발휘했다. 성글고 까칠한 붓질과 야취(野趣) 어린 분위기를 특징으로 하는 화조화풍은 아들인 지운(之耘)을 비롯하여 전충효(全忠孝이함(李涵) 등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으로 노수서작도 老樹棲鵲圖(국립중앙박물관매작도 梅鵲圖(간송미술관) 등이 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3) 이후원(李厚源)
1598(선조 31)~ 1660(현종 1).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심(士深), 호는 우재(迂齋) · 남항거사(南港居士). 아버지는 군수 욱()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23년 인조반정에 참가해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지고 태인현감이 되었으며,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출전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총융사(摠戎使)가 되었다. 1635년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지평을 지내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화론(主和論)을 극력 반대하고, 청과의 강화과정에서 세자를 인질로 보내서는 안 된다고 극간(極諫)하는 등 척사론(斥邪論)을 펼쳤다. 효종이 즉위한 후 북벌계획에 앞장섰으며, 1650(효종 1) 김자점이 효종의 북벌계획을 청에 밀고하자 그의 죄를 논해 부처(付處)하도록 했다. 1653년 도승지로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655년 예조판서로서 추쇄도감(推刷都監)의 제조(提調)가 되어 전국의 노비를 추쇄해 강화(江華)방비하게 했으며, 장악원(掌樂院)에 소장되어 있던 악학궤범 樂學軌範을 다시 간행해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하게 했다. 이듬해 이조판서로 있을 때는 청탁하는 사람이 집에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등 공정한 인사에 힘썼다. 1657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1659년 자의대비(慈儀大妃) 복제문제가 일어나자 송시열과 함께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광주(廣州) 수곡서원(秀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호계서원(虎溪書院)’관련 문헌 속 흔적을 찾아서...| ┗▷안양 자료실
조성현|조회 86|추천 0|2018.07.11. 14:00

<안양의 인물과 교육문화>

호계서원(虎溪書院)’관련 문헌 속 흔적을 찾아서...

독암조종경, 창강조속을 배향한 호계서원

            

                                                                  안양시문화해설사 조성현

들어가는 말

호계서원은 숙종7(1681) 또는 숙종42(병신, 1716)창건된 지역 교육기관으로 과천현 서쪽 15(또는 10)되는 호계리에 있다고 문헌 속에 전승되어 오고 있다.

안양 최초의 사립교육기관인 호계서원의 현위치는 효성 안양공장의 동쪽으로 서울의 외곽순환도로가 지나는 하부공간의 구,신진자동차학원(안양장례식장 인근)의 북쪽 나지막한 야산지역으로 추정되며 1990년 중반까지도 이곳에서 와편과 주춧돌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기억 속에서 점차 사라져 잊혀져가는 안양의 역사(교육사)를 바로 세우고 이를 후대에 물려주는 가치 있는 일은 우리의 몫이며 사명이다.

호계서원은 인재육성과 정신적 구심역할을 하였던 안양선비들의 최초 교육기관이다.

호계서원과 관련된 구술을 할 수 있는 세대가 하나둘씩 떠나가고 호계서원과 관련된 표지조차 찾을 수 없다. 또한 호계서원지의 흔적도 사라지고 관련 사료가 부족하여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 점 여간 아쉽다. 대다수의 안양시민은 호계서원에 대해 관심조차 없고, 알 필요성과 가치를 못 느끼고 있어 더욱 안타깝다.

인근 안산시는 잊혀져가는 인물인 일제강점기 최용신선생을 발굴하여 최용신기념관을 건립하여 그녀의 삶과 정신을 살펴보는 장을 마련하여 무한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선생은 꽃다운 나이 지병으로 돌아 가셨지만 농촌계몽운동가의 모델로서 육성한 안산시의 사례는 눈여겨 볼만하다.

또한 인접 과천시는 추사김정희 선생의 흔적을 살려 추사기념관을 설립하여 교육 및 문화관광자원으로 적극 육성하고 있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시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 지역과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상가, 계몽가, 교육가 등 역사적 인물 및 관련 유적지 등을 발굴하여 묻혀 사장되는 역사를 바로 세우고 향토자원으로 적극 육성할 필요가 있다.

호계서원에 배향된 조종경은 후대 선비들이 그의 정절과 충직을 숭앙하여 섬긴 인물이다. 특히 그는 말년에 자기가 거주했던 호계리, 호계촌사를 사랑하며 죽을 때 까지 아름다운 시어로 호계를 노래했던 지역을 사랑했던 선비이다.

조종경의 선비정신은 귀감이 되고 있으며 한편으로 철저한 수양과 도덕으로 무장한 조선유생들의 삶은 오늘날에도 존경받는 덕목과 가치로 평가받고 있다. 산업화에서 잊혀져가는 유교문화를 복원하여 유교의 가치와 덕목 등 장점을 살려서 지역에 계몽함은 가치 있는 일이고 우리사회가 더욱 아름답고 살기 좋은 나라로 가는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호계서원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본 논고에서는 제한적이지만 문헌검토 등을 통한 호계서원의 발자취를 찾아가서 안양교육발상지의 과거를 들여다보고 현 위치에서 짚어보고 미래 발전방안을 모색함에 있다.

단 부족한 실력 탓에 안양문화원발간 안양문화11(3, 호계서원파트)를 분석하여 요약수준으로 알기 쉽게 발췌 및 정리했다. 또한 독암선생이 남긴 유고집 속의 시어를 분석 및 가공하여 그 당시의 호계일원의 생활상과 시대상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조종경이 독암유고집에서 말하는 호계이외에 더 나아가 호계동의 지명유래를 포괄적으로 고찰하여 호계동을 실감 있게 그리고자 하였다.

부족하지만 본 논고가 자료공유를 통한 기억 속에서 멀리 잊혀져가는 지역교육의 발상지와 뿌리를 찾아가는 단초를 마련하고 더불어 호계서원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이 확산되는 전기가 되길 바란다. 모쪼록 본 논고가 호계서원이 훼철(毁撤)되어 지역에서 점차 잊혀져가는 역사를 재정립하고 미래발전방안을 고민하는 장()으로 연결되는 가교(브릿지)역할을 할 수 있길 기대해본다.

 

서원(書院)의 개요

서원은 학문연구와 선현의 제향을 올리기 위하여 사림이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조선초기의 교육제도는 지방의 향교, 중앙의 사부학당, 성균관으로 이어지는 관학이 중심이었다.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지방에 세운 사학(私學)이다. 최초의 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1543(중종38)에 세운 백운동서원으로 안향을 봉사(奉祀)대상으로 하고 있다. 현존하는 서원에는 도동서원(대구광역시소재, 보물 제350), 옥산서원(경북 경주시소재, 사적 제54), 소수서원(경북영주시소재, 사적 제55), 도산서원(경북 안동시소재, 사적 제170), 필암서원(전남 장성군소재, 사적 제242), 병산서원(경북 안동시소재 사적 제260)등이 있다.

 

호계서원(또는 창강서원)

계서원 창건 문헌기록:

여지도서(영조 1757년 이후), 서원지(1799), 과천현읍지(1899), 증보문헌비고(1908), 연려실기술(1912), 전고대방(1926), 경기도서원총람(2007)


 

서원은 학문의 연구와 선현의 제향을 올리기 위하여 설립한 교육기관으로 향사 및 지방교육을 담당해 왔다.

호계서원은 여지도서등 여러 문헌 속에 등장하는 데 기록에는 과천현 서쪽 15(또는 10) 되는 호계리에 있다고 적시하고 있다. 또한 숙종 42(병신, 1716)년 창건했으나 현판을 내려 받지 못했다.

김계명(金啓明) 등의 상소에 의해 숙종7(1681) 또는 숙종42(병신, 1716)창건된 호계서원의 제향인물은 조종경과 조속이다. 기록에 따라 창건연대가 숙종7(1681) 또는 숙종42(병신, 1716)이 등장하나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호계서원은 설립기준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298년 전(또는 333년 전)창설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호계서원(虎溪書院)은 과천현 유생의 상소로 (독암)조종경과 그의 증손자 (창강)조속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제향(祭享, 제사)을 올리기 위해 안양의 호계동에 창건되었으며, 창강서원(滄江書院)이라고도 한다. 창강은 조종경의 증손자 조속의 호이다(창강 조속의 증조부는 조종경이다).

옛 위치는 안양장례식장 부근(, 신진자동차학원) 동쪽 약 100미터(호계 2동 산 43번지)지점으로 추정된다. 안양시의 지표조사결과 당시 초석(礎石)과 와편(瓦片)이 수습된 적이 있으나 현재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 인재양성의 요람인 호계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고종7(1870) 봄의 어느 날 폐원되었다.

호계서원에 배향되었던 조종경과 조속의 후손들은 호계서원보다는 창강서원으로 부르는 것을 선호했다고 한다. 이는 정치적인 희생양이된 조종경 보다는 미술계에서 명성을 날리던 조속을 더 존경하며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김안로로부터 받은 조종경에대한 정치적 탄압과 조종경의 올곧은 성격을 중시하기 보다는 증손자 조속에 대한 평가가 치우쳤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창강은 호계서원(과천), 수곡서원(광주), 건암서원(서천), 백석사(白石祠, 김제) 등 여러 곳에 제향 된 점으로 볼 때 당시 덕망과 실력을 갖춘 유명 선비로 보인다.

 

조종경(독암, 趙宗敬,1495~1535)

조종경(연산군1~중종30)은 풍양인으로 아호가 독암(獨庵)이다. 조종경은 후대 선비들의 그의 정절과 충직을 숭앙하여 호계서원에 배향되는 영광을 누린다.

1530(중종25) 이임(李任) 등이 동궁(東宮, 세장궁)을 보위한다는 명목으로 사론(士論)을 일으켜 김안로(金安老)를 다시 중요하려하자 조종경은 반대하다가 중종26(1531) 심정(沈貞)의 일당이라는 죄목으로 파직 당했다.

그는 자기가 이미 일찍이 보유했던 대지가 호계동에 있었지만 관직을 따라 여기저기 각처로 이동하면서 그간 호계동에 터전을 잡지 못했다.

김안로일당의 탄핵으로 36세 관직에서 파직이후 41세 사망하기까지 약 5~6년간 호계일원에 머물며 촌사(村舍)를 짓고 은둔하였다.

일반적으로 촌사는 풍류나 자연을 즐기고자 조성한 공간을 말한다. 그는 집 뒤 작은 언덕에 정자를 짓고 집의 편액을 독암()’이라고 했다.

그는 호계촌사에서 술()과 시()로 시름을 달래며 세상일을 멀리하고 유유자적한 가운데 생을 마쳤다.

조종경은 김안로에 의해 정치적 희생양이 된 후 안양 호계촌에 묻혀 조용히 살면서 자신의 애틋한 마음과 심정을 담은 주옥같은 한시를 남겼으며, 그의 작품은 한시집인 독암유고(獨庵遺稿)저술을 통해 전해온다.

독암유고는 독암 조종경이 은둔하면서 생전에 써서 남긴 원고를 말한다. 독암유고는 선조20(1587) 아들 온양군수 조정추(趙廷樞)가 유고를 활자로 초간발간 이래 후대 후손들에 의해 3간된다.

조종경은 조선시대 전한(典翰) 등 관직을 두루 엮임 한 바 있고, 김안로의 탄핵으로 물러나 있었다. 김안로는 문정왕후(文定王后, 중종 제2 繼妃 尹氏)를 폐하려다 실각하여 1537(중종32) 진도로 유배된 이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조종경은 신원되어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과천현 호계서원에 제향된다.

 

조속(창강, 趙涑, 1595~1668)

조속(선조28~현종9)은 조선후기의 서화가이다.

조종경의 증손자 조속의 호()는 창강(滄江)이다. 저술로는 창강일기(滄江日記)가 있다. 병조참판에 추증된 수륜()의 셋째 아들이며 문인화가 지운(之耘)의 부친이고, 이조판서를 지낸 박태상(朴泰尙)의 장인이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 1627년 덕산현감에 임명된 이후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이른다. 효종때 효행으로 발탁되어 진선벼슬을 받았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으며 계해년 반정을 돕다가 반정일에 향리에 돌아갔다.

창강 조속(선조28~현종9)은 사후 숙종21(1695) 청백리에 녹권 되고 조선 인조때 장령과 이조참판(이참, 吏參)으로 추증된 인물이다.

그는 시서화의 삼절(三絶)로 명성을 날렸으며 특히 수묵화조(水墨花鳥)에 능했다. 그는 공필풍(工筆風)금궤도(金櫃圖,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남종화풍의 깃든 호촌연의도(湖村煙疑圖, 국립중앙박물관소장)’등을 남겼고, 대표작으로는 노수서작도(老樹棲鵲圖,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매작도(梅鵲圖, 간송미술관소장)’ 등이 남아있으며 역대 명필들의 서체에도 관심을 보여 금석문(金石文)수집 활동을 시작한 이방면의 선구자로 꼽힌다. 미술사학 미술사 회화사분야의 유명인사이다.

 

조한구(趙漢九, 1833~1965)

조선총독부 서이면장을 지낸 조한구(고종20~1965)는 독암 조종경의의 후손으로 창강 조속의 10대손이다. 조동순(趙東舜)의 셋째아들로 호계동(방죽말 27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행정가로 자는 장일(章日)이요 호는 금운(錦雲)이다.

191431일 조선총독부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西二面)의 초대 면장부임 이래 19271월 서이면(안양면의 전신) 발전을 위해 시가지확장, 안양의 교육시책을 위해 모범사구(私塾, 사설서당, 글방)을 설치, 농촌진흥을 위해 양잠·축산·임업을 적극 장려하였으며 보통농사를 보급하였다.

1932년 안양의 대지주였던 일본인 고뢰 정태랑으로부터 1만평의 토지를 기부받아 조선직물()를 현대농단지에 건설하는데 앞장을 서는 등 안양의 공업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안양이 삼성산과 관악산 등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점에 착안하여 1932년 삼성천변에 석수동수영장(,고바우식당앞)을 설치해 우리안양이 수도권의 대표적인 관광도시로 변모하는 데 공을 세웠다. 안양예술공원 구,고바우식당인근 옛날 삼성천 수영장초입에는 당시 일본어로 안양푸루~’라고 세운 표지석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안양유원지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여름철 피서지였으며 공식적인 안양유원지의 출발은 1932년 당시 일본인 안양역장 혼다 사고로(本田貞五郞)’가 철도수입 증대와 안양리 개발을 위해 조한구 서이면장과 야마다(山田) 시흥군수 등을 설득해 계곡을 막아 2조의 천연수영장을 개설하면서 안양풀이라고 명명한데서 비롯된다.

그는 군포초등학교와 안양초등학교 설립에도 힘써 지역교육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안양금융조합장에 재직하면서 안양경제발전에 초석을 다졌다.

한편 193641일 시흥군 북면 노량진리, 흑석리, 상도리와 영등포읍(영등포리, 당산리, 양산리)가 서울시 확장책에 의거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서울시에 편입되자 당시 영등포에 있던 시흥군청사를 안양으로 이전시키기 위해 시흥군청사이전군민대회를 주도적으로 개최하여 광복이후 시흥군 청사가 안양(,뉴코리아호텔자리)으로 이전케 함으로서 안양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시흥군 청사가 오면서 경찰서 등 각종 행정기관이 입주하면서 안양1번가는 행정타운으로 입성하게 되었고, 안양1번가에 당시의 옛,서이면사무소가 복원되어 안양시 행정사의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조한구 초대면장이 부임했던 구,서이면사무소(경기도문화재자료 100)에는 당시 사용하던 행정소품 및 일제강점기관련 안양지역 항일운동사료, 안양지역 독립투사들의 유품, 당시 시대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 망라하여 전시·진열되어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광복직후 서이면을 우량면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하면서 황무지인 안양발전에 진력하였다. 광복 후 1948년에는 국민회 시흥군지부 감찰부장과 시흥군 보승회 조사부장을 거쳐 1949년에는 초대 안양읍장에 부임하여 격동기 안양건설을 견인하였다. 하지만 1930128일 조선총독부 공훈자명단에 올라가 있고 서이면이 조선총독부 산하기관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일제로부터 1933630일 한차례 더 훈장을 받아 친일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논란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의 묘지는 호계동 방죽말(일제강점기 방앗간자리 옆 큰 느티나무 부근)에 있었는 데 도시화 건설로 1977 충북 음성군으로 이장하였다.

그가 활동한 시기가 일제강점기인지라 친일파 논란이 다소 있지만 그는 행정가로서 안양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며 지역 발전을 견인한 지역의 선배이다.

 

문헌 속 호계동과 안양

문헌 속 등장하는 호계리

여지도서(與地圖書, 영조 1757이후)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5리되는 호계리에 있다.

서원지(書院誌, 1799)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0리에 있다.

과천현읍지(果川縣邑誌, 1899)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5리되는 호계리에 있다.

경기도서원총람(2007, 백남욱 등)

창건: 숙종7(1681)창건,

제향인물: 조종경, 조속

위치: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호계2171번지일대


 

안양시 호계동(虎溪洞)의 유래는 예전에는 방축(防築)(마을), 샛터(新基), 안말(內村)일대가 범(호랑이)가 많은 곳이라 하여 호계(또는 범계)라 칭한데서 유래한다. 이곳은 들판과 골짜기 야산이 있어 자연초목이 어우러져 맹수의 서식환경이 양호하여 냇가에 범(호랑이)가 많다하여 범계(또는 호계)라고 칭한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과천현 호계리라는 지명을 사용하였던 문헌 속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김안로일당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은퇴 후 말년을 과천현 호계리 호계촌사에 거주하면서 시어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하게 생을 마감한 조종경. 그가 남긴 독암유고의 옛시문 속에 호랑이가 등장한다. 안양과 관련된 지명에 호랑관련지명이 흔하지만 문헌 속에서 호랑이를 발견하고 안양에 호랑이가 실존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단서가 되어 반가웠다. 그는 36세 관직에서 파직이후 41세 사망하기까지 약 5~6년간 촌사(村舍)를 짓고 은둔하였다. 독암조종경(1495~1535)의 생몰연대를 감안한다면 지금으로부터 약 479~519 년전에는 지역에 호랑이가 흔했음을 알 수 있다. 조종경의 독암유고 34촌사즉사(村舍卽事)’편에는 이곳에는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가 많다(원어: 日出籬多虎跡)”는 시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호계촌사 주변은 예로부터 호랑이 출몰이 잦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금까지 계승되어 오고 있는 호계동라는 지명은 당시 조종경이 거주하던 지역에 호랑이가 많았고, 또한 그가 안양지역(호계동) 거주이전부터 과천현 호계리라는 지명이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여지도서(與地圖書, 영조1757년이후) 등 여러 문헌에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5리되는 호계리이 있다라고 기술한 문헌상 정황으로 보아 영조 1757년경에도 지역의 호랑이가 많은 지역특성을 감안한 호계라는 지명은 사용되었으며 또한 조종경은 자기가 세운 정자의 이름도 호계리의 이름을 차용하여 그의 사저를 호계촌사라고 부른 연유가 된 것 같다. 문헌 등 사료를 통해 볼 때 지금으로부터 약 479~519년 전인 조종경(연산군1~중종30)의 생몰당시 호계리라는 지명은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독암유고 옛시문 속에 반영된 당시 호계일원의 생활상

독암 조종경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지금의 안양시 호계동에서 세상을 뒤로하고 풍류를 즐기며 읇조린 한시를 통해 당시의 생활상을 들여다보며 시대상을 그려볼 수 있다. 독암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 호계가(원어, 虎溪邊)에 머물며 말년의 여생을 유유자적하며 은일(隱逸)적 삶을 누렸다.

그가 삶을 마감하기 전까지 머문 별장인 호계촌사 앞에는 하천이 있고 뒤에 야산이 있다. 부지에는 정자와 연못이 있었다.

한편 조종경의 증손자 조속이 저술한 과천호계농장잡기(果川虎溪農庄雜記)’를 통해 호계촌사의 편린(片鱗)을 살펴볼 수 있다.

집은 서면 호계리에 있고 과천 관문에서 15~16리 떨어져 있다. 동남은 청계산을 바라보며 앞으로는 큰길에 임하여 있다. 독암정은 집 뒤 작은 언덕위에 있는데 언덕위에 서쪽으로 안양평과 금천을 경계로 바라보며 서남으로 수리산, 장항, 명악암 등지를 바라본다.


 

독암 조종경이 남긴 옛 시문(독암유고) 속에 등장하는 시어 속에서 당시의 생활상 및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독암유고에서 남긴 한시 209편 중 약 40편이 호계일원에서 은거하며 읊조린 작품이다. 조종경은 호계촌사(虎溪村舍, 시냇물이 있는 산골짜기에 지은 별장)에 은둔하면서 떠오른 시상을 읊조리며 남긴 한시작품 속에서 당시의 시대상, 특히 그가 거주하던 과천현 호계리의 생활상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의 시풍은 서정적이며 낭만적인 경향이 보이며 자신의 마음을 담아 풍류적인 시어로 노래했다.

그의 옛 시문 속에 시어로 또는 제목으로 호계촌사(村舍)’, ‘호계(虎溪)’라는 자구가 흔히 등장(예시, 吾廬正住虎溪邊, 내 집은 바로 호계가에 거주하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와 연관된 연관단어(溪邊, 山亭 )들이 많이 등장하는 특징이 있으며 호계 및 연관단어가 실린 한시는 약 40편에 이른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그의 삶의 터전인 호계(지금의 안양시 호계동)’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호계촌사에서 세상을 뒤로하고 풍류를 즐기며 읇조린 한시 집 독암유고의 고찰을 통해 당시의 생활상을 짚어본다. 독암은 호계(, 안양시 호계동)’를 사랑했고 이러한 마음을 담은 아름다운 한시가 독암유고집을 통해 후대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독암유고집에 드러난 호계리 지역의 생활상을 살펴보다.

시어속에서 독암이 그려낸 당시 호계리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독암유고 74쪽 호계우음(虎溪偶吟, 호계촌사에서 우연히 읇조리며)

독암유고 57쪽 호계유려 중(虎溪幽廬, 호계촌사에서) 등에서 발췌

봄이 깊어 두견새소리 듣네.

뽕나무가지 좁은 길에 가지런하고

울타리 밖에 개 짓고

문밖 진흙 깊어 제비 홀로 나네.

곳곳의 농부 봄밭을 휘 젓네

마을마다 누에치는 아낙네 대바구니 들고

시냇가 사람들 한가하고 고기잡이배 연기 고요하내

지는 해 어부와 나무꾼 속속 돌아오네.

산촌에는 기이한 일 많도다.

추위에 떤 닭 새벽부터 우는 고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자취 많고

개울가 사슴 막지나가 자취 남았다.

 

예로부터 이 땅은 척박하고 가난한 곳

거친 교외 밥 짓는 집안 적도다.

참지 못하는 것은 시골백성 계속되는 쌀 구걸

돌밭이라 어느 곳에서 소 빌려 밭 갈꼬?

 

청계산은 동으로 겨우 몇리 떨어져 있다.

청계백악개산명(淸溪白岳皆山名)청계와 백악은 산 이름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창강서원은 210평 정도에 민가가가 6호가 있었으나 관가와 거리가 멀고 또한 산속이라 도둑의 출몰이 극심했다고 한다.


 

독암유고 29쪽 중 일부(‘卽事, 즉사, 문득일이 생각나서)

계변인적녹초과(溪邊印迹鹿初過), 개울가 사슴 막지나가 자취 남았고

잠녀촌촌수죽롱(蠶女村村收竹籠), 마을마다 누에치는 아낙네 대바구니 들고

농부처처편춘전(農夫處處遍春田), 곳곳의 농부 봄밭을 휘 젓네

독암유고 30~31쪽 중

문외이심연독비(門外泥深燕獨飛), 문밖 진흙 깊어 제비 홀로 나네.

독암유고 34촌사즉사(村舍卽事)’

토박민빈고소전(土薄民貧古所傳), 예로부터 이 땅은 척박하고 가난한 곳

일출이변다호적(日出籬多虎跡),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자취 많고

초황교외소인연(草荒郊外少人烟), 거친 교외 밥 짓는 집안 적도다

미인촌맹걸미련(忍村氓乞米連), 참지 못하는 것은 시골백성의 쌀 구걸

독암유고 34~35쪽 중(‘新居’, 신거, 새시골집)

석전하처차우경(石田何處借牛耕) 돌밭이라 어느 곳에서 소 빌려 밭 갈꼬?

독암유고 37, 정거삼수 중(靜居三首, 조용히 살며)

춘심청두견(春深聽杜鵑), 봄이 깊어 두견새소리 듣네.

상지제협로(桑枝齊夾路), 뽕나무가지 좁은 길에 가지런하고

견폐소리외(犬吠疎籬外), 울타리 밖에 개 짓고

독암유고 38쪽 제호계신거 중(題虎溪新居, 호계의 새집에서)

계변인산어연정(谿邊人散漁烟靜),

시냇가 사람들 한가하고 고기잡이배 연기 고요하내

독암유고 57쪽 호계유려 중(虎溪幽廬, 호계촌사에서)

청계산재동근수리(淸溪山在東僅數里)청계산은 동으로 겨우 몇 리 떨어졌다.

독암유고 57쪽 야중풍우우서(夜中風雨偶書, 비바람치는 한밤 중 우연히 쓰다)

한계하사강명신(寒鷄何事强鳴晨), 추위에 떤 닭 새벽부터 우는 고

독암유고 74쪽 호계우음(虎溪偶吟, 호계촌사에서 우연히 읇조리며)

청계백악개산명(淸溪白岳皆山名)청계와 백악은 산 이름이다.

독암유고 75山亭日暮(산정일모, 해 저무는 정자에서)

낙일어초속속환(落日漁樵續續還), 지는 해 어부와 나무꾼 속속 돌아오네.

독암유고 79쪽 산촌(山村)에서

산촌기사다(山村奇事多), 산촌에는 기이한 일이 많다

 

호랑이와 안양()

안양지역 관악산과 삼성산 및 호계동에는 호랑이가 있다.

삼성산이 감싸고 있는 안양과 시흥 등은 과거 호랑이의 출몰이 흔히 있던 것으로 보인다. 삼성산과 연결된 관악산의 남태령쪽에도 험준한 고개에 호랑이의 잦은 출몰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안양시 관양동 수촌마을 도당제는 산에 대한 신성함과 호랑이의 화를 두려워해 지낸 것으로 추측된다.

안양 및 안양권에는 호랑이()와 관련된 지명이 유독 많이 남아 있고 호환을 방지하고자 민간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도당제 제례의식이 아직까지 계승되는 정황으로 볼 때 안양지역은 과거 호랑이의 출몰이 잦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독암유고의 옛시문 속에 호계가 산촌이라고 언급하면서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자취 많다고 한 점으로 보아 안양지역에는 호랑이가 많았음을 문헌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호랑이(虎患)와 관련된 민속신앙 수촌마을 도당제

관양1동 수촌마을에서는 도당제(都堂祭)가 매년 추수 후 늦가을 관양동 현대아파트 뒤 관악산중턱 제당에서 열린다.

도당은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공간으로 인간과 신이 만나는 장소이다. 하얀 제례의복을 갖춰 입은 제관은 단앞에 자리를 깔고 산위 웃당(당집)과 제단석이 있는 아랫당 두 곳의 제단에서 제사를 지내고 난 후 마을 앞 당나무(성황나무, 신목)인 느티나무(수령 540, 보호수)에서 제사를 지내 모두 3당에서 마을제사를 지낸다. 도당제는 산에 대한 신성함과 호랑이의 화를 두려워해 지낸 것으로 추측된다. 도당제은 호환(虎患)을 방지하고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의식으로, 도당은 마을사람을 수호하고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관장하면서 마을의 대동단결을 돕는 존재로 여겨진다.

 

지명 속에서 호랑이 관련성을 보이는 지명

안양시 - 호계동(虎溪洞), 범계동(평촌),

호현(虎現)마을 및 범고개(박달2),

금천구(시흥동) - 호암산(湖巖山), 호압사(虎壓寺)

호암산성(虎巖山城, 사적 제343, 통일신라6~7세기, 문무왕 12년경추정)

 

문헌(독암유고) 속 등장하는 호랑이

조종경의 독암유고 34촌사즉사(村舍卽事)’편에는 이곳에는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 자취 많다는 시어가 등장(원어: 일출이변다호적:日出籬多虎跡)

 

문헌 속 등장하는 호계리지명

여지도서(與地圖書, 영조 1757이후)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5리되는 호계리에 있다.

서원지(書院誌, 1799)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0리에 있다.

과천현읍지(果川縣邑誌, 1899)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5리되는 호계리에 있다.

경기도서원총람(2007, 백남욱 등)

위치: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호계 2171번지일대

 

안양시 호계동의 지명유래(자료제공 안양시)

호계 1- 덕고개(德峴), 덕현마을

군포신사거리에서 과천방면 약 400미터지점 흥안주유소일원으로 예전에는 큰 고개가 있어 이 일대를 덕고개(德峴)라 불렀다. 오늘날 주변에 덕현초등학교가 있는데, 이는 덕고개(덕현)에서 따온 학교이름이다. 이 고개는 풍수로 보아 배형국(舟形局)이라 현,호계시장 북쪽 100미터지점에 방풍림을 조성하여 배의 풍파를 막았다고 하는 데, 지금도 이 지역 자연마을 지명을수풀아래라 부르는 연유가 되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2일 마을의 중앙에 있던 우물에서 정제(德峴井祭, 덕고개우물제, 마을제, 민속신앙)를 지내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대한그리스인회보에 다르면 허대진이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안양 최초의 기독교 전래지로 추정된다.

 

호계 2- 방축말(방죽마을, 房築洞)

안말과 새터말사이에 있다. 조선시대 과천군 하서면의 관가가 있었고 그후 1914~1917까지 시흥군서이면사무소가 있던 유서 깊은 고을이다. 조선시대 물 피해를 막기 위하여 둑(제방0을 쌓았는데, 그 주변이 취락이므로 방축말(제방이 있던 마을)이라 부른 연유가 되엇다. 효성안양공장외곽 도로(호계도서관방면)에 도로명으로 방죽로라고 있는데 이는 자연마을지명인 방축말(방축마을)에서 따온 것이다.

 

호계 3- 포도원

,군포 동쪽으로 의왕시 오전 동 성나자로 마을과 경계에 있다. 이곳은 1950년대에 이르러 경향포도협동조합이 처음으로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하자 주변일대가 포도단지로 변모되어 한때 안양포도산업을 선도하였으나 1970년대부터 도시화 바람이 불어 주택지로 변모했다.

 

호계서원관련 각계의 의견(결론)

최갑환(崔甲煥, 92)- 지역원로(안양원로회 회원)

안양시 호계동 방죽마을에 거주하면서 호계서원주변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최갑환원로는 호계서원터에 안양교육의 발상지로서 상징을 담은 표석(팻말)이라도 설치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당시에 널린 와편과 주춧돌은 지금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매우 안타깝다고 토로하면서, 호계서원터에 넓은 공간과 밤나무 5~6그루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정석 경기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방송대 국문학과 교수)

퇴색되는 도덕과 숭조사상(崇祖思想)을 가르치는 교육의 장으로 체계적 사료의 정리와 함께 안양유일의 서원인 호계서원을 옛터에 옛 모습대로 복원하여 올곧은 선비의 정신 및 유교사상을 계승 및 육성하는 장으로 키울 필요가 있다.

호계서원지에 담긴 일화를 구술할 수 있는 세대가 하나 둘씩 떠나감으로서 그 문화적, 역사적 발자취도 사라져가고 있어 안타깝다.

최소한 서원지를 알 수 있는 표지석(表石)과 안내판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표석과 안내판이라도 최소한 설치하여 향토문화자원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

사료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아 아쉬운 점 있으나 선비의 올곧은 정신을 바르게 계승하는 안양 유일의 서원지로서 그 정신만은 남아 있길 기원한다.

 

안양시문화해설사 조성현

현재 호계서원과 관련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점 아쉽고 유감이다. 독암 조종경은 호계와 관련된 글을 다수 남긴 분으로 그의 삶의 터전인 호계(지금의 호계동)’를 아끼고 사랑했던 분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경에 있던 서원이지만 체계적인 자료와 연구 성과가 부족해 아쉽다. 호계서원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다. 지역에 호계서원의 실존을 아는 시민은 거의 없다. 오히려 안동에 있는 한자동명의 호계서원(虎溪書院)’이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에 비해 안양의 호계서원은 초라한 수준이다, 호계서원에 대한 지역의 관심이 필요하다. 안양시청 홈피 등에 호계서원의 발자취를 게재하여 시민들과 더불어 함께 인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뼈아픈 역사이지만 독암의 후손인 행정가로서 안양발전을 견인하며 안양발전의 기틀을 다진 조한구서이면장을 안양의 역사 속 인물로 다뤄 시민들과 함께 공유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출처 : 안양문화(安養文化) 통권 제11201212월 안양문화원발행

 



제1강 조선 전기 회화의 특징

현재 서양사람들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느끼는 장점을 머리속에 넣고 한국화를 보는 시대가 됐다. 그래서 미감, 음감을 서양식으로 세뇌받음.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서양은 옳고 우리는 그르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진짜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을 잊어버렸다.

 

우 리 그림의 기본개념은 선으로 사물을 표현하는 것이다. 서양의 칠로 질감을 나타내는 그림의 개념으로는 이해 할수없는 것이다. 선을 표현하자니 지,필,묵이 자연히 유행하였다. 유성은 선이 표현이 안되고, 따라서 물에 녹는 먹이 발달했다.

 

황하유역 포함 우리 한반도 일대는 사계가 아주 분명함. 농경문화 존재하게 된 이유. 우주자연의 섭리가 그리돼있다고 여김.

24절기 정확히 운행. 운동성있는 것을 표현 그것이 선이다. 움직이는 시점을 따라감. 반면 그리스는 자연에 재해를 극복해야함. 농사에 적합하지 않음. 그래서 신화가 발달하게 됨. 시점을 정지시킬 수 밖에 없다.

 

이념은 뿌리이고, 예술은 꽃이다. 시대마다 지방마다 지역마다 예술양식이 다르다. 그래서 뿌리가 바뀌면 꽃이 바뀔 수 밖에 없다. 문화는 그 시대를 주도하는 이념에 따라 내용과 방향이 결정된다. 중국의 북종화는 선묘 위주, 남종화는 습한 기후로 먹의 번짐효과를 살린 농담이 주로 발전.

 

예를 들면 신라시대, 석조예술을 보면 다른 것도 석조예술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했으리라 추측가능.

그 시대는 불상조각이 대표적인 예술 석굴암, 고려시대는 청자, 조선시대는 서화가 절정에 이르는 시기 그이유는 조선이 국시로 내 건 성리학 때문. 극점이 진경산수화, 풍속화이다.

 

남북조 시대는 불상이 극에 달함

당나라 시대는 서예가 극에 달함

송나라 시대는 그림발전이 극에 달함

 

뭐든지 한번 극에 달하면 계속되지는 않는다.

요즘세대는 과학정신...그래서 과학을 바탕으로 한 영화

고려 1392년에 망함 1천년동안 불교이념이 존재했음

화엄종 이념 이후 조계 선종이들어와 고려를 건국함. 상감청자, 팔만대장경을 탄생시킴

그 이념이 노쇄화 되면서 성리학을 받아들임.

 

항상 우리나라는 우리에게 맞는 것 딱하나를 선택한 후 다시 문닫고, 우리풍토에 맞게 발전시키고 완성시킴

그래서 심화 발전을 시켜 중국에는 없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게 됨.

 

김시 야우한와는 아직 중국의 화풍이다. 물소는 중국의 소. 중국이념이므로 중국의 이념을 가지고 저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아무도 이상하다 느끼지 않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100년 정도를 중국화풍으로 계속 됐음

강희안 "고사도교"

 

세종대왕은 주자성리학에 입각한 조선왕조 통치기준을 마련 하신 분이다. 집현전에 모아놓고 집중적 교육을 시킴.

모든 백성에게 제대로 이해시키기 위해 한글창제를 한 것임.

 

우 리는 북방중국과 기후 풍토가 비슷해서 남방화법으로 즐기지를 않았다. 고려시대까지 북방화법으로 그림, 불화들이 선묘로 그려진 것을 보면 알수 있다. 안평대군이 안견에게 시켜서 그린 "몽유도원도"가 대표적인 북종화. 안평대군은 세종의 세째아들 시문서화금기에 능했다. 안평대군 쌍삼절(시, 서, 화 뿐 만 아니라 금琴, 기棋, 문文에 능함) 시서화면 삼절이라 부름 모든 분야의 예술에 달통한 인물.

 

주자학은 남중국사람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해졌다. 쿠빌라이칸의 외손자인 충선왕이 만권당을 설치해서 송설 조맹부의 서체를 고려에 전파함. 군사외교를 다 뺏긴 왕이었다. 이에 학문에 전념했다.남송과 금나라에서 많은 서적들을 모으고, 중국의 1급학자들에게 직접 우리 자제들을 가르치게 함. 남 송의 종실출신 황제의 족속. 고려때 원나라인 시절 남송의 대학자였던 조맹부라는 학자를 초빙해 고려의 뛰어난 인재를 기름 거기서 성리학이 들어옴. 조맹부는 원나라의 화가, 서예가로 정치, 경제, 시서화에 넒은 지식을 가졌으며, 특히 서화에 뛰어났음. 전무 후무한 일임. 중국의 1급학자가 우리 자제를 가르침 (당시 조맹부61세 충선왕 40세 익제 이재현 28세 행촌 이암 18세)

 

남 종화는 주자의 성리학을 담고 있는 그림이었고, 성리학은 불교+유교가 적절이 배합된 이념임. 주자의 성리학의 복잡한 설을 이해시키기 위해 시, 서, 화로 원리를 가르쳤고, 그래서 성리학을 하는 사람들은 시서화를 못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중 국문화권에선 원래 우주철학이 없었다. 내세 우주를 생각치 않았다. 농경에 적합한 지역은 현세가 극락이다..그래서 윤리철학만 발달...유가이념이 대표적 사람과 사람관계만을 설정해줬다. 한대까지 살다가, 이민족 침략이 시작되며 중국이 지옥이 되고 종교가 필요해짐. 불교 들어오고 전 중국이 불국토가 됨.

 

불교이념이 노쇠하고 난후 유+불 접목시켜 합친 성리학이 발생_이기이원론(만물의 존재가 이理와 기氣 두가지 요소로 이루어 졌다고 설명하는 성리학의 이론) 불교에서는 이미 우주생성원리를 설명했다. 그래서 주역의 음양원리에 불교의 우주관을 접목시켜 우주생성의 원리를 이와 기로 설명하려 시도.

 

理는 불변적인 요소로 만물의 근원이 된다. 존재를 가능케 하는 본질 혹은 원리를 일컫는 개념

氣는 가변적인 존재로 만물의 물질적 존재와 감정 등 인식이 가능한 모든 요소를 일컫는 개념

기 와 이가 만나면 기가 발동하면 이도 같이 발동한다. 이것은 이기호발설...이기호발설理氣互發設은 이는 인간의 마음을 뜻하는 사단四端을, 기는 감정을 뜻하는 칠정七情을 드러낸다는 이황의 사상. 조선을 건국한 성리학임. 북방화법이기는 하나 우리의 산천은 아님. 주자도 남중국 조맹부도 남송분...그래서, 자연히 남중국 그림이 전해지게 됨.

 

성리학을 누구나 받아 들일 수 있는 개념은 아니다. 그 얘기를 듣도록 해야 하는데 시문서화 예술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이해할 수 있게 했음. 예술은 제도지구다 복잡한 지도체계를 예술로 자연스레 알려줬다. 주자 성리학자는 시문서화는 기본교양으로 다 깔고 있다. 조맹부님을 통해서 자연스레 남종화가 시행되어짐. 집현전 학사 강희안님도 남방화로 인물을 그리고, 산천을 그렸다.

집현전 학사...글씨를 잘쓰면 글쓰는 붓으로 구상적인 표현을 하면 묵법이 가능함.



제2강 진경으로 가는 길

"서울화단":중국의 남종화, 북종화가 공유된 시대가 옴.

 

안견 몽유도원도, 화원화가 대표, 북방산수화.

강희안 남방산수화,사대부화가,고사관수도,고사도교도 고사는 큰 선비가 물을 바라본다든지, 다리를 건넌다던지의 의미.

 

수양대군(세조) 왕위찬탈위해 안평대군 역모로 몰아서 죽임. 안평대군 쌍삼절(시, 서, 화 뿐 만 아니라 금琴, 기棋, 문文에 능함) 시서화면 삼절이라 부름. 측근들 세종대왕때 이전으로 후퇴하는 현상.

 

단종복위때 대부분의 선비 죽고 없어짐.

 

성종이 선비를 다시 끌어 들일 때, 경상도 선산 고려말 절의 지키고 내려간 야은 길재(1353-1419)가 제자 양성.

그 영남선비를 모아서 다시 새출발 성리학에 입각한 이상정치를 펴보려고 함. 그러나 수양대군 기득공신세력이 강함.

 

연산군이 등극하면서 무오사화가 일어나 일망타진 됨.

연산군이 폐비윤씨의 소생으로 사사된 사실을 알고 그에 관련된 사람들을 무차별하게 죽임 그것이 갑자사화.

수양대군 때 기득공신세력이 전멸-조선이 건전하게 발전 할수 있었음.

 

중종이 바르게 나갈 수 있었음.

 

기묘사화-중종14년에 조광조 등의 신진사림이 축출됨.

선비들은 농부처럼 씨뿌려 제자기르는 습성이 있음..서울중심 기호지방에서 성장(조광조세력)

기득권층 강하게 반발-이때 당한 세력은 기묘명현이라 일컬음.

 

지지세력이 없어서 늘 개혁하려면 실패를 맛보게 됨. 그래서 고향으로 내려가 공부에 몰두를 하기 시작함.

그 대표적인 선비는 개성-화담 서경덕, 안동-퇴계 이황, 지리산 밑-남명 조식, 전라도 장성갈재 밑 하서 김인후

그중 이황이 이기이원론을 제대로 이해함.  

 

율곡은 16세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심경이 복잡해서, 금강산으로 출가를 했던 듯.

1년동안 금강산 안의 일체장경을 다 읽었음..생불났다고 소문남.

주자는 불경을 부분적으로 읽었으나 율곡은 다 읽어서 불경에서 얘기하는 우주철학의 요체를 다 알게 됨.

이기일원론으로 심화함.

 

이런 학파들로 문화전반에 고유의 색이 드러나게 됨.

 

그림이전에 문학에서 먼저 고유색이 나타남 대표적인 것이 정철 사미인곡, 관동별곡, 성산별곡 율곡과 동갑.

(진경문학_조선성리학의 투철한 이념을 바탕으로 우리 산천의 모습을 실제로 보고 표현해 낸 문학)

 

한석봉 고유서체 창안.

 

진경문학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했음. 초창기에 계회도에서 시작, 중국화법으로 우리나라 산천의 느낌을 살릴수는 없다.

조 선성리학 이념에 투철해서 우리 고유의 화법으로 우리산천을 그리는 사람을 바라게 됨. 조속님이 첨 시도함. 인조반정(율곡제자 중심_장강 조속:풍양조씨)때 율곡제자 선동 퇴계제자 묵시적으로 동조해서 성공함. 율곡학통은 기본적으로 퇴계학통을 이음.

7년간 임진왜란으로 군사권 장악, 기득권 층 무능해짐. 혁신이념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군사, 경제권, 이념을 다 장악함.

그래서 인조반정을 성공함...

 

조선을 양분하려면 인조반정을 기점으로 함.

 

29 살에 인조반정에 참여한 사람이 장강 조속. 반정을 성공하고는 모든 것을 버리고 산수를 유람함. 성리학 통달 그래서 우리산천의 아름다움 표현 가능.여러가지를 실험. 그림"금궤"는 김알지탄생장면임. 우리 자존의식의 시작. 남방화법으로 그린그림 조속의 "호촌연웅"

 

우암 송시열 후기 조선왕조 터전을 마련한 분 그뒤를 이은 분 김창흡 선생

 

그 뒤를 이어 겸제 정선 북악산 밑 경복고등학교 자리에서 태어남. 율곡학파의 텃밭인 자리.

구봉 송익필, 우계 성혼이 이이의 절친.

 

겸재 정선은 1676년 숙종2년에 태어남. 1759년에 돌아가심.

어떤 문화든 250년 정도되면 절정에 이르게 됨

숙종때 부터 정조때까지가 진경의 절정기였다. 최완수 선생님은 이를 진경시대라 일컬음.

(진경시대_조선문화가 고유색을 한껏 드러내면서 번성하였던 조선 후기의 문화번영시대)

진경산수화풍 창안-절정-추상단계까지 완전히 마무리 짓게 됨.

 

사대부는 관직에 나가지 않으면, 그림,글씨를 하는 것임. 그러나 아무나 하는 건 아님.

14살때 주변 많은 분들이 사사가 됨. 장희빈 사건으로 스승집까지 전부 폐가가 됨.

과거에 길이 막힘. 외가가 부자였음.

 

무 수리 최씨의 소생 영조 갑술년에 태어남...정사가 일변이 됨. 이 때 겸재가 시험봤으나, 번번이 떨어졌던가 봄30대부터는 그림에만 전념. 겸재는 7서 사서삼경을 안보고 외우고 그림보다 주역을 더잘하고 사서삼경 중 주역이 가장 뛰어났다. 그것이 바탕이 되서 진경산수화가 나옴.

 

새로운 화풍을 창안하는 화가는 반드시 사대부 화가이다. 화원화가는 사대부 화가가 만든 것을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원리만이 창조가 가능하므로...

 

36세에 단발령망금강산 →72세 만년에 같은 장소에서 그린 그림을 보면 농후함이 묻어나는 차이를 느낄수 있음..




제3강 진경산수화와 풍속화


5살위 사천 이병연 진경 시의 대가, 겸재는 진경 산수화의 대가, 겸재의 스승 삼현 김창흡 진경 시문학의 대가

사천 이병연(1671-1751) 진경시의 최고봉으로 정선과 교류하면서 조선의 아름다운 경치를 시로 표현함.

 

송강정철 관동별곡으로 시작, 겸재가 금강산으로 그림여행을 떠날 때 이 책이 교과서가 됨.

관동별곡은 조선 선조 때의 시인 송강 정철의 가사로 해금강과 관동팔경 등의 아름다움을 읊은 노래.

 

서울-연평-철원-금화(금성)-단발령-내금강 장안사 입구(서울서 금강산 가는 첩경)

 

단 발령에 올라서 내금강 전체를 본 그림이 "단발령망금강산" 진경산수화의 기본 기초를 36세에 완성했구나를 알 수 있다. 단발령은 남방화 묵법으로 처리 내금강은 북방화 기법으로 백색화강암처리, 다시 수목으로 골골을 감쌈.-완전한 음양대비, 주역의 원리, 음양조화의 원리. 음은 토산, 양은 골산 암산으로 음이 양이 호위하는 원리를 그대로 적용

 

중국은 그동안 부단히 남북방화의 조화를 노력해왔지만 남방은 남방위주 북방은 북방위주의 그림이 돼버림.

겸재는 음양대비에서 화면구성에서 적용해서 완벽하게 남북방화면을 이상적으로 조화함. 중국사람들이 놀라자빠짐

 

셋이 같이 다니면서 사천과 삼현은 진경 시를 짓고, 겸재는 진경 산수화를 그리게 됨

해악전신첩_겸재가 36년 되던 해에 금강산을 유람하며 그린 그림과 함께 동행한 이병연과 김창흡의 시를 합쳐 놓은 시화첩.

전신첩은 초상화첩이라는 뜻...내면의 아름다움마저 표출함.

 

자 긍심을 가지고 우리산천이 가장아름답다는 마음으로 봐야만 그런 그림이 나온다. 자기 독자이념이 있을때는 모든게 긍정적시각이다. 그러나 식민통치 같은 때는 자기비하의 시각이 생긴다. 같은 곳을 바라보더라도 두시각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산이다.

해금강이라는 바다와 금강산이 이렇게 완벽히 조화된 곳은 세상어디에도 없다.

 

중국 당나라 이태백이 당나라의 여산의 아름다움이 천하제일이라 했고, 관동별곡에서 정철은 "니뎍션 이제 이셔 고텨 의논하게 되면, 녀산이 여긔도곤 낫단 말 못하려니"라고 했다.

 

당시 중국은 변발, 호복 강요해서 중국은 다 바꿨으나, 우리나라는 병자호란 후에도 우리습속을 지킴.

주자성리학을 뛰어난 조선성리학을 창출, 중화는 조선이 계승했다. 사대주의는 힘있는 자에게 빌붙어 아 첨하는거지. 망한 명나라 제사지내는 것은 사대주의가 아님.

 

김창흡이 형님인 김창집이 중국사신 행차때 겸재의 그림을 보여주기위해 그의 그림을 가져감.

 

영빈김씨와 영조와의 관계는...

경종이 나와서 희빈장씨 시절에 관직을 포기하고 그림길로 접어듬.

 

영조:조선 21대 왕으로 탕평책, 균역법 등 백성들을 위한 개혁적 정치를 펼침(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 탄생)

숙빈최씨:조선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

영빈김씨:조선숙종의 후궁으로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본가로 돌아가 살다가 1694년 인현왕후와 함께 복위함

 

숙 빈최씨가 영빈김씨에게 사적으로 영조를 양자로 줌. 그래서 김씨가 외가가 됨. 내적으로 내적으로 양자가 되서, 노론 김창집을 필두로 목숨을 내검. 숙빈이 영리해서 김씨네집 근처로 이사를 시킴. 백송있던자리가 창의궁인데 거기에서 영조가 출궁해서 살던 잠저. 김창집 일가는 경복고 바로 앞. 같은 동네임

 

겸재가 영조에게 그림을 가르쳤던 거 같음. 평생 겸재를 호로 불렀다. 호로 부른것은 스승으로 대우하는 뜻임. 국왕이 그림배웠다하면 지탄의 대상이 됐기 때문에 안배우고 잘 그렸다고 함. 겸재가 영조를 만나고 나서는 탄탄대로를 걷게 됨.

통치자가 문예를 다 잘해야 문예부흥이 가능하다.

 

겸 재 46세 신임사화 때 김창집죽고 경종이 등극할때 경상도 하양 현감으로 있어 그 화를 모면, 겸재는 영조가 신경을 써서 58세때 청하(현 경상도 영일면 청하군)현감을 시켜 보냄. 내연산이 있는 곳. 사천 이병헌은 삼척부사로 보냄. 사천 이병헌의 동생 이병성 간성군수로 보냄. 영일만에서 삼척을 거쳐 간성거쳐 금강산을 가면 "관동팔경"이 다 들어 있음. 우리나라에서 "해악"인 바다와 산의 경치가 제일좋은 곳은 관동팔경이다. 여기를 배타고 돌아다니며 마음놓고 시화로 사생을 해라 해서 보낸것(Good 인사발령)ㅎㅎ

 

겸재는 환갑을 못지내고 92세의 노모가 돌아가셔서 상경을 함 3년상을 치름. "강산"의 경치 좋은 곳은 단양팔경(사군산수).

진경산수로서 우리나라 아름다운 곳 사생 안 해 본 곳이 없다.

 

63세부터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 절정에 이름. 음양조화 음양대비를 그림.

"청풍계" 64세에 그린 그림. 청운초등학교부근 인왕산. 흰바위를 먹색으로 내리 그음. 남북방화를 먹칠로 조합.

 

65세 양천현령으로 발령 떠날때 사천 이병연때 사천이 시한수 지어보내면 겸재는 그림하나 그려서 보내기로 한 약속 지킴 (70노인끼리) 그때 그린 "광진"이라는 그림을 그림...(현재 위커힐 있는 광나루, 아차산 그때도 별장지대)

 

"압구정"이란 그림 현재 현대아파트 들어선 압구정 있던곳 260여년전 그림. 한강일대 아름다운 경치 서울경치 다그림

 "장안연우" 서울 장안 북악산 기슭 지금 7궁근처에서 바라본 서울 남산, 관악산 보임. 도성안이 숲으로 쌓임. (미국은 인디언과 전쟁하던때) 한 문화가 노쇠할 기간이 자나고 있음.

 

"독서여가" 51세의 겸재의 자화상 51세이전 경복고등학교 자리에 살다가 51세부터 군인아파트 옥인동 20번지 근처로 이사.

책이 쌓여 있고 책보다가 잠시나와 화초감상함.. 미국인디언 사냥하던 때..ㅎㅎ

 

"척재제시" 당시 사대부 생활모습 행주에서 나는 웅어를 선물하니 그대로 시한수를 지어주고 받음. 65세 66세 사이의 그림

 

 할 수 없고 망할나라는 따로 없다. 모든 것은 변화를 반복할 뿐.우리문화의 우수성를 느낄만하다. 

 

"단발령망금강" 72세 말년때 지방관은 만5년이 만기. 화원은 관직만기를 못채우지만, 겸재는 사대부이므로 만기를 채우고 나옴

퇴가후 72세 되던해 32년전에 그렸던거 기억하고 36년만에 금강산 다시감. 당시에는 친구덕에 백면서생으로 갔지만, 양천현령 5품 지닌 대관으로 같은 소재로 다시 그린 그림. 같은 소재로 훨씬 세련된 그림을 그림.

 

그전에 표현한 그림에는 중국의상이 등장했지만, 겸재의 그림에는 갓 도포쓴 우리선비가 등장함.

 

10년후배 같은 듯을 가지고 같은 뜻을 가진 관아재 조영석 인물을 잘그렸는데, 우리의 의상을 그림. 사실은 겸재가 먼저 그렸음.

실재 풍속화의 시조도 겸재임.

 

"금강내산" 한송이 연꽃 같다. 음이 양을 포위했다. 음중양. 골골이 다시 수묵표현하여 거기서 다시 한 번 음양표현 강조. 진경산수화 최고의 경지가 옴. 

 

76 세에 사천 이병헌에 돌아감. 윤 5월 29일 돌아가심. 인왕산기슭바라보며 사천댁(청와대 서쪽 별관 근처에 살았음)에 가서 "인왕제색"을 그림. 그 돌아가신 날 그림. 백색화강암을 먹으로 다 쳐냄. 백을 흑으로 둔갑시키는 둔갑해도 인왕산으로 보인다.

검은 데서 흰빛을 느낌.

 

이 때의 겸재는 중국의 고사를 소재로 그림으로 그려도 우리정서로 완벽하게 표현해 냄. "여산초당" 당나라 시인 백락천(백거이)이 여산에 은거하던 고사를 소재로 그림. 초당도 선비도 소나무도 산도 다 조선산...이것이 진정한 세계화. 자긍심을 가지고 우리것을 당당하게 표출하게 될때 세계는 우리안으로 들어오게 됨. 

 

"정양사" 80전후에 그린그림 84세에 사망했는데 그때까지도 그림을 그림. 군더더기 제거하고 추상으로 그림. 세상물정을 다 터득하고 군더더기를 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추상이 가능함. 화풍을 출현시킨 세대, 절정에 오르는 세대, 추상화 시키는 세대. 미술양식방식의 자연스러운 방향인데, 겸재는 혼자 그 순서를 다함...

 

"추일한묘" 고양이의 눈동자의 움직임마저 정확하게 표출함. 이렇게 정밀한 정물, 생동감있는 사생을 본적이 없다. 한정없이 섬세하고 정확한 그림도 가능하다. 진경산수화풍은 추상단계까지 마무리 짓는 역할까지 하심.

 

초년에는 그림길에 들어갈 수 없는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말년에 만복이 터짐.. 영조보다 19살이 많음. 영조 환갑때 79세가 됨.

 왕 이나 왕비가 60세를 넘기면 수경壽慶이라고 함. 벼슬했던 조관출신 70세 이상은 1품을 올려주고, 평민 80세 이상이 되면 1품 품계를 줌.영조는 환갑때 수경하지 않았다. 계모 인원대비가 망칠 69세가 되어서,70세가 되시면 그때 수경한다하고 겸재만 1품올려주고, 수경할때 1품 올리고 71세 때 또 1품올리고 해서, 겸재는 말년 81세에는 종2품 대신급에 올라감...영조의 배려 금관자 옥관자 붙임.

 

종2품때는 벼슬없는 조상 추존할 수 있음. 재상지위에 선대추존하고 부인과 80세에 해로하고 있었다. 대복으로 일생을 마무리 지음. 진경산수화풍으로 영원히 이름을 남기고 말년엔 대복이 터져 이런 재상지위까지 올라감.  84세 되던해 3월 24일 돌아가심. 산소는 우이동 근처에 해등천면 개승리에 있다고 하는데 현재는 못찾음.



제4강 조선 남종화 대對 풍속화


진경시대에 또 주류가 되는 화풍 풍속화와 조선남종화가 있다.

 

"촌가여행"_관아재 조영석

조영석(1686-1761) 조선후기의 화가로 산수화와 인물화에 뛰어 났으며 정선, 심사정과 함께 삼재三齋로 알려짐.

 

겸 재와 같은 동네 살고 10년후배. 겸재가 돌아가실때 애사를 씀. 풍속화는 도저히 못따라가겠고, 인물화는 내가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심.주로 조선 풍속화를 그리심. 조선풍속이 세계모든 풍속의 제일 으뜸이라 생각했다. 기준이 돼야 한다 생각함.

 

"기로행려도"_최북

모두 언덕이라 수평멜대로 책을 맬수없음. 그래서 지게가 발명. 중국은 평지가 많으니까. 겸재때와서 그림에 지게가 등장함.

사물을 보는 시각이 전혀 달라짐.

 

변발호복은 오랑캐 족속의 풍속이다 여김.

 

"고사은거"_현재 심사정 사대부집 출신.

기구한 집안내력을 가지고 있음. 그림으로 평생을 살지 않을 수 없었다.

 

증 조부 심지원 효종때 영의정, 종조부(할아버지의 형님) 심익현 효종부마. 명문에서 태어났지만, 이 분위기를 이어가려고 두분이 돌아가신 후 현조부 심익창이 성천부사하던 분이 부정을 저지름. 문과에 급제 못하면 당상관이상 못오름. 당상관 이상하려고 시험부정을 저지름.시험을 바꿔치기함. 그 당사자, 후손까지 관아에 출입을 못함. 집안 절단남. 10년간 귀양살이 하고 옴. 그래서 심사정은 과거 자격 박탈이 됐다. 그래고 아버지도 그림길로 나감. 할아버지가 발각한 사람 원망하고 만회하려고 영조가 세제시절 경종때, 세제를 시해하려고 하는 데 가담.

 

신임사화 1721년 경종이 왕세제(후의 영조)에게 대리 청정하게 한 것에 대해 노론이 소론을 탄핵하고 숙청한 사건. 김일경이라는 신임사화를 일으킨 장본인과 처남매부간이 돼 결탁을 해서 꾸몄다. 실패후 영조등극...역적가문이 됨. 발붙일 데가 없음

 

겸재 외조모와 8촌친척이 되는데 겸재에게 심사정에게 그림을 가르치라고 했다. 영조와 각별한 사이였던 겸재는 심사정이 역적이 되고 나서는 더이상 가르칠 수가 없게 됐다. 사회가 제외시킨 인물이 돼버림. 그래서 심사정은 시각을 긍정적으로 볼 수 없어서 중국의 화보에 몰입하게 됨. 명말기~청초 화보 정리된 것이 간행되어 우리나라에 전해져 옴.

 

명문화를 계승한다. 그래서 조선이 중화다. 그러나 결국 우리 독자를 진행시켰다...그것이 진경문화 그러니 나는 명을 계승한다.라고 하며 이 일에 평생을 바침 "장림운산"_심사정

명의 그림화풍을 본격적으로 계승한 것이 바로 이 현재 심사정을 통해서였다.

 

겸재는 조선 고유의 문화를 최고의 경지로 끌어 올렸고, 현재는 명의 문화를 서울에 유입, 소개하는 역할을 함.

 

명문화를 본격적으로 표방한다 해도 시대정신이 우리 고유문화를 표방하던 시기라 자연스레 우리문화가 드러남.

"만폭동"_심사정 / "만폭동"_정선

조선남종화:조선후기에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중국의 남종화풍으로 심사정에 의해 완성됨.

 

남 종화법이 겸재그림보다 훨씬 그리기 쉽다. 제자들에게 모든 그림을 입모를 해보게 하는데 겸재그림이 제일 안 됨. 겸재그림만 입모할수 있으면 그건 인가해도됨. 중국의 어떤 대가 그림도 쉽게 입모가 안돼는게 겸재 그림은 안 됨. 현재그림은 입모가 쉽게 가능함.

 

"해섬자희"_심사정

화원화가 사대부화가 현재그림을 많이 따라감. 겸재와 현재그림은 서울화단에 공존함. 문화의 다양성. 세계화의 조화에서 동떨어지기 쉬움을 위해 현재같은 사람도 꼭 필요함. 당시 화단에 상당히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

 

이 인상(1710-)이라는 사람은 신분, 당색, 정치색도 다른데 현재의 화풍을 따름. "송하수업"_이인상 이념이나 모든 걸 봐도 겸재스타일을 따라야 하는데 현재를 따름. 인물은 풍속화를 그림. 1710년대 쯤 출생하신 분들은 조선남종화풍과 풍속화풍을 겸해서 구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화상"_박암 강세황(1713~1791) 명문출신 아버지 할아버지 모두 외조판서, 이조판서, 이분 형님이 과거부정함 자신의 아버지가 외조판서 였을 때 시험감독 이였기 때문에 과거 포기. 초야에 묻혀 삼.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로 진경산수화를 발전시키고 풍속화, 인물화를 유행시켰음.

 

제자를 잘 만남. 단원 김홍도 어려서 이분께 배움. 21살 단원은 화원화가로 영조 수작도 그림 그릴때 영조에게 이름을 알리게 됨. 29살 영조 정조(세자때) 두분의 초상화 그림. 어진을 그리고 나면 그 공으로 벼슬을 받음. 사포서 별제(司圃署 別提: 종6품관)벼슬을 받게 .

 

평생그림그리다가 이름나있다가 정조가 알게 돼 음직으로 참봉벼슬을 나가기 시작해. 공교롭게도 제자 29살 환갑 강세황 같이 사포서 별제를 받게 됨. 영조52년에 83세때 강세황에게 기록과 늙은이만 보는 과거. 영조의 축수를 의미하는 바로 기록과를 함

정조 작심하고 강세황을 벼슬시키려고 함..장원급제. 6품직에 있던 사람도 3품이 됨. 그래서 부정이라도 저질러 과거 하려고 함.

강세황도 현재의 조선남종화풍을 많이 그림. 나중에 추사의 추사체가 청나라로 부터 청조 고증화풍을 이면 기반으로 하게 됨.

청나라 문인화풍이 그대로 들어오게 되는데, 그런 화풍이 들어오게 하는 다리 역할을 함. 현재의 조선화풍은 추사체를 출현하게 하는 가교역할을 하게 됨.

 

변상벽(1730~)

호는 화재. 새나 짐승의 그림과 초상화를 잘 그려 국수國手라는 칭호를 받았다. 초상화들이 아주 사실적으로 최고로 발달함.

청나라를 통해 서양화 기법도 부분적으로 받아들여. 음영까지 해서 아주 정밀히 그리게 됨. 주로 화원이 그림. 특히 이사람은 초상화를 잘 그렸지만, 닭 고양이 잘그림.

 

"필계도"_변상벽

"묘작도"_변상벽 고양이를 하도 잘그려서 별명이 변고양이

 

이시기에 화원에게 까지 풍속화가 확산. 풍속화를 대성하게 되는 신윤복의 아버지 신한평도 화원이었다.

"자모육아"_신한평, 단원보다 10년 선배

이 그림을 보면 단원이 나중에 풍속화를 마무리 짓는 역할을 하는 게 우연이 아닌 것이다.

 

신 한평(1735-1809) 호는 일재. 신유녹의 아버지로 정조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인물화에 뛰어난 화원이었음. 김홍도와 비슷한 시기에 어진을 그려 많은 부분 합작을 함. 신윤복도 화원이나 기록이 거의 없고 신한평의 기록만이 1809년까지 있음.

조선시대는 "피혐避嫌"이라 그래서 부자가 함께 관직에 있지 못한다. 아버지가 50년동안 어진 그리니까, 신윤복은 늘 곁으로 돈 것 같음.

 

화원 도화서 벼슬은 한정적이다. 도화세 별제 밖에 없어서 무반직을 줌. 첨사, 만호 이런 식으로 줌. 공세우는게 첫째 어진 , 둘째가 지도다.

 

김정호 혼자 그린 지도 아니다. 부단히 진경시대 내내 이화원들을 각변방으로 보내서 9년에 걸쳐 그림. 그게 합쳐진것임.

신한평도 신지도에 만호 노릇을 했음. 이광수의 초상화를 신한평이 그림. 나중에 혜원도 첨사벼슬을 했다함. 그래서 변방에서 많이 그렸다함.

 

"사인휘호"_강희언(1738-1782) 이당시 풍속화가 일반화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남종화 풍속화 공존시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뒤에 단원이 출현하게 됨. 김홍도(1745-1806):호는 단원 조선시대 화가로 산수화와 풍속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함. 7살때 부터 강세황에게 배움. 29세때 정조를 처음만남.

정조(1752-1800):조선22대 왕으로 문화정치를 추진하고 규장각을 설립, 왕성한 문화사업을 펼침.

22살때 왕세손으로 대리청정.

 

20 대 같은 또래로 단원에 대한 애정이 강했다. 평생 측근으로 생각하고 늘 곁에 둠. 글만 쓰는 게 아니라 그림을 그려서 구체화시켜야 할때 즉각 보충.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정조가 처음 설치한 왕의 직속화원제로 도화서의 화가들 중 선발 운영했음.

신한평은 항상 낌. 단원은 거기도 넣지 않고 따로 측근으로 곁에 두었음. 자신이 화원화가임에도 불구하고 정조측근으로 1급사대부로 착각하고 살았음.

 

"기우부신"_김홍도 우리소, 지게가 등장.

 

"마상청앵"_김홍도 풍속화

 

"서당"_김홍도 풍속화첩  경직도, 농경생활의 서민을 그린 그림. 송나라때 풍속도를 우리식으로 바꿔 사생함.

 

단원은 풍속화가만은 아니다. 더 잘 그린 그림있다. 신선그림..초년에 많이 그림. 태평성대가 오래지속되면 사람의 유일한 소망은 장수. 사회에서 신선그림 많이 요구.

 

"과로도기"_김홍도 장과라는 당나라 신선 몇천살을 산지는 모르고 종이로 당나귀접어 다니다가 타고싶을때 불면 나귀가 되었다.

도경을 읽고 있다. 원래 머리가 굉장히 길고 괴상하나 우리나라 식으로 머리가 친근한 할아버지 모습니다. 나중에 굉장히 불교 광신도가 됨, 석화를 많이 그림...도화+석화=도석화

 

"절로도해"_김홍도

달마대사가 남쪽 양나라에서 북쪽 위나라 갈때 양자강 건너면서 갈대숲을 꺽고 지나갔다는 것을 꺽어 타고갔다고 확대해석. 도해라고 바다까지 건너는 걸로 확대가 됨. 원래 못생겼지만, 과감하게 예쁜 달마로 바꾸어 우리모습으로 그림.

 

"용주사 후불탱화"

용 주사 창건시 김홍도의 주관 아래 25명의 스님이 함께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불교의식화. 정조가 용주사를 지으면서 불상제작과 탱화의 총책임을 김홍도가 맡음. 거기서 단원이 종교적체험 후 발심해서 말년에 관세음 그림. "남해관음"_김홍도 돌아가시기 직전에 그린 것임.




제5강 풍속화의 완성 (完)


김홍도는 풍속화 못지않게 산수화도 잘 그렸다. 정조대왕이 44세때 금강산 그림을 그려오라 시킴.

 

겸재는 주역의 원리대로 그렸지만, 단원은 보이는 대로그림. 김홍도(1745-1806):호는 단원 조선시대의 화가로 산수화와 풍속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함.

 

스승인 강세황과 금강산에서 만남. 금강산이 속해 있는 회양군수로 표암 강세황의 큰 아들이 군수로 나있음. 당시 그린 게해산첩. 저랍용으로 그려져서 바쳐짐. 수십장이나 됨. 사람들 그걸로 많이 입문을 함.

 

화 산 용주사 일체 조형예술 불상, 탱화등의 총감독을 시킴. (용주사 후불탱화:용주사 창건시 김홍도의 주관 아래 25명의 스님이 함께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불교의식화) 후불탱은 뒷면에 장식화로 그린 그림. 단원이 직접그림. 서양화법으로 그림. 물감은 전통적 물감으로 그림. 유화의 입체성이 드러남. 동서양의 기법을 조합시킨 최초의 불화. 종교적 체험을 크게 함. 중병을 앓고 난 후라서 더 그랬던 듯.

 

1790년에 순조가 태어남. 그때까지는 문예세자가 있었지만 죽고 아들이 없었다. 아들이 없어서 사도세자의 묘를 천장했다. 천장을 하고나서 용주사에 모시고 100일 기도 시작함. 100일 기도 마치는 날 순조가 태어남. 그날이 혜경궁홍씨...(영상상태 안좋아서 잘림) 종교적인 환심이 안날수 없음.

 

"남해관음":석화임_김홍도

어 진을 다시그리게 함. 46세 용주사 불사. 48세때 어진 그리게 하고. 그 공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을 제수해서 내려보냄. 48세 때 심한 가뭄이 들었음. 조령산에 절에 올라가 불상개금하고 불화를 그리고, 기우제를 지냈다...비가 왔다. 아들이 없어 아들을 기원을 했더니 아들까지 얻었다. 그래서 그 후 불심을 표현하려고 석화를 많이 그리게 됨.

 

단원 56세때(1800년) 정조가 갑자기 돌아가심. 끈떨어진 뒤웅박 신세...ㅎ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음. 1804년에 자비대령화원에 자원해서 들어감. 단원 62세로 운명을 함.

 

용주사에 부모은중경 밑그림, 삼강행실도 밑그림을 다그렸음. 지금도 보관돼 있음. 도석인물화를 잘했던 분이라 부를 수 있음.

진경시대 이념으로 교육받았었다. 그래서 진경풍속화가 되는 것임.

 

단원과 더불어 쌍벽을 이룬 인물 신윤복.

신 윤복(1755-1815경):호는 혜원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로 김홍도, 김득신과 더불어 조선 3대 풍속화가로 불림. 혜원에 대한 기록이 없고, 그림도 많이 남아 있지 않음. 간송에 30폭의 그림이 전부. 단원은 퇴폐적인 요소를 표출할 수가 없었다. 혜원은 30폭 전부가 다 퇴폐적인 상류층의 모습들. 기록이 없음으로해서 연구에 어려움이 따른다.

 

신한평의 아들. 1735년생 으로 50년동안을 도화서 화원이라 혜원은 겉돌았다. 노는 세계에서 기가막히게 놀았던 분.

 

"소년전홍"_신윤복

잡아서는 안되는 사람의 손목을 잡고 안놓고 있는 그림. 이런 그림으로 화원에서 쫒겨 났다는 속설도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여성적이고 세밀한 가는 선. 혜원과 단원의 기법은 큰 차이가 있다.

 

"단오풍정"_신윤복

일 제강점기 1920-30 후반부터 담뱃갑에 들어갈 정도로 유명. 일본사람 부전 상인 손에 들어감. 간송 전형필 선생이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되찾음.오세창선생과 기뻐하면서 민족적 쾌거라 평가하고 밤을 세워 같이 즐기심. 전형필(1906-1962):호는 간송 민족문화재를 수집하는데 힘써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고, 보화각(現간송미술관)을 세움. 조선시대복식을 이것을 보고 복원가능했다.

 

갑 오경장때 하향조정한 한복의 원형을 기억할 수 없었지만, 이 그림으로 추측함. 상민들의 의복이 두루막이다. 상류계층은 저고리가 짧았다.. 말이든 뭐든 타야하므로...여자 저고리 길이가 상당히 짧음 시대말적인 퇴폐적 양상이다. 해학넘치는 구도 감각.

 

"촌가여행"_조영석

그림을 보고 복식을 추측함.

 

"소년답청"_신윤복

여자들 말탐. 여염집아낙이 아니고 기생. 말끄는 사람은 말의 주인들임. 자기스스로 마부가 되고 마부에게 자기 갓벗어 주고 맡기고 기녀의 마부를 자처하여 놀러 다님.

 

"유곽쟁웅"_신윤복

기생은 사이에 두고 힘겨루기 하는 것. 갓은 깨지고, 남자는 싸움말리고 기생은 구경하고,

 

이런 그림들로 조선시대 상류사회를 재현할 수 있는 것

 

겸재는 중국의 남북방화를 음양대비의 원리로 한화면에 녹여낸다. 석굴암은 조각 모든 불교미술의 전체를 한 장소에 함축시켰다. 모든 불경 현교 밀교 법화경 등등 서로 거리낌 없이 한자리로 함축시키는 특징을 보인게 석굴암이다.

 

우 리 한반도는 지구상에서 유라시아 대륙의 반도 가장 큰바다와 가장큰 대륙의 접점이다. 모든 문화를 잘 수용함. 우리나라는 아무리 복잡한 문화라도 그 본질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하나로 융화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녹여서 하나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다. 금수강산이라 하여 작은 국토지만, 산,바다, 강, 평야 등등 없는 게 없다. 우리미술속에는 우리 미감속에는 빠진 것이 없다. 일견에서 보면 엉성해 보여도 모든 걸 다 갖추고 있다. 갖춘 땅떵어리 집터, 산소터, 도읍터 오밀조밀 만가지 지형이 다 갖춰져 있다. 우리는 자연의 섭리, 천연에 순응하게 된다는 것을 중국보다 일본보다 더 철저하다. 우리민족 성정은 천연으로 회귀하려는 천진성이 있다. 현란하게 꾸며진 인공미라도 본연의 천연미로 환원이 된다. 본질은 지키되 천연으로 환원된다.

 

남 북방화가 융합이 되서 독특한 우리의 회화기법으로 완결이 됐다. 산들이, 굳은 바위, 화강암으로 돼있다. 모든 걸 다 강한 화강암으로 보고 있다. 미감중에는 아주 굳셈이 있다.  사계가 가장 분명하다. 기후적인 특색이 민족성, 미감에 엄청나게 영향을 준다.

 

남중국은 무슨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경계가 없음을 좋아한다. 우리나라는 무엇을 표현할 때 경계가 분명하다. 술에 술탄듯 물에 물탄듯한 사람은 잘 없다. 불분명한 사람을 우리는 좋아하지 않는다.

 

재 질을 택하는데도 그대로 반영됨. 번지는 것을 화선지 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일제 이후이다. 일본으로 부터 들어온 새로운 양상. 추사글씨 겸재 단원의 그림은 번지는 게 없다. 번지지 않도록 다듬이질 해서 종이를 맨질맨질하게 해서 의도대로 선이 나오고 의도대로 번짐이 나타나도록 했다.

 

채색을 써도 청록계통의 색을 아주 경쾌하게 투명하게 쓴다. 중국이나 일본은 화려하고 현란하게 쓴다. 우리는 항상 섞은색...진달래 연한 진달래...(소년전홍 참조)



출처: http://light-inside.tistory.com/92 [밝]




문무왕 비문의 비밀| 경주金氏 연합대종원
서울 한강|조회 84|추천 1|2018.12.02. 22:19

[제1회]
2부작 [문무왕릉비의 비밀]
제1편: 신라 김씨왕족은 흉노(匈奴)의 후손인가?


▣방송 : 2008. 11. 22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 고정훈 PD

새롭게 시작하는 ‘역사추적’
그 첫 번째 시간!

<문무왕릉 비문>에 새겨진 수수께끼 같은 암호들

신라의 시조인 성한왕은 누구인가?
투후는 누구인가?
과연 신라왕족은 흉노의 후손인가?

우리가 몰랐던 역사의 ‘진실’이 비문 속에 숨어있다.

 

▲문무왕릉비 원형의 복원

 문무대왕 능비 기단으로 추정되는 사천왕사지 귀부

 

경주박물관에 있는 사천왕사지 귀부 머리부분                    비석 하단부 (1961년 발견)

 

                                         비석 상단부 (2009. 9. 3 발견)

 


 

1. 15대조 성한왕(星漢王), 그리고 투후(?侯)의 의미?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의 태조는 박혁거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문무왕릉 비문에는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한왕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묘비 역시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베일에 싸인 인물 성한왕. 그리고 문무왕릉 비문에 등장하는 또 다른 글자 <투후>와 <15대조 성한왕>은 비문의 주인공 문무왕의 조상에 대한 계보인가?
▲문무왕릉비 조각에 새겨진 의문의 글자‘투후’



2. 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의 후손인가?

문무왕릉 비문에 기록된 ‘투후’. 한서에 의하면 투후는 한나라에 포로로 잡힌 흉노족의 태자 김일제이다. 그는 공교롭게도 문무왕과 같은 김씨였다. 그는 한나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포로가 되었고 한무제에 의해 투후로 임명되었던 실존 인물로 밝혀졌다.

 

 

▲김일제묘



3. 비문에 새겨진 수수께끼 같은 암호들.

문무왕릉 비문에는 <투후> <전7엽> <투후><전7엽><15대조 성한왕>등 암호 같은 표현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바로 문무왕의 15대조인 성한왕과 흉노왕의 태자였던 투후 김일제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암호들이다.
▲문무왕릉비문의 탁본
▲무위시 김일제 석상



4. 김알지는 정말 금궤에서 태어났을까?

계림의 금궤 짝에서 돌연 등장하는 신라 김씨 시조 김알지. 정말 신라 김씨는 흉노족일까? 초기 신라 무덤과 흉노족 무덤은 모두 적석 목곽분이라는 동일 양식이고 동일한 오르도스형 흉노 동복(솥)이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됐다.
▲적석목곽분
비문이 던지는 암호들. 그 화두에서 시작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따라 가는 역사적 ‘진실’의 추적! 미스터리 여행은 2편에서도 계속된다.



- 제2편 ‘왜 흉노의 후손이라고 밝혔나?

몰락한 흉노의 자손임을 내세운 신라 김씨 왕족. 북방의 오랑캐 족으로만 여겼던 ‘흉노족’의 후예들이 신라로 건너온 것일까? 대제국을 세웠던 흉노의 후예들, 그들은 왜 신라로 건너온 것일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들, 그 역사적 흔적들을 찾아 <문무왕릉 비문의 비밀 2편> <문무왕릉 비문의 비밀 2편>이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문무왕릉 비문의 비밀> 제2편은 29일(토) 밤 8시 10분에 방송됩니다!


[제2회]
2부작 [문무왕비문의 비밀]
제2편: 왜 흉노(匈奴)의 후예라고 밝혔나?


▣방송 : 2008. 11. 29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 김창범 PD

‘역사추적’그 두 번째 시간!
풀리지 않는 여러 의문들.

비문 속 주인공 투후 김일제와 성한왕은 어떤 관계인가?
투후 김일제의 나라 투국은 과연 존재했는가?
흉노족은 정말 한반도 남단으로 내려왔는가?
과연 수수께끼 같은 문무왕 비문의 비밀은 풀릴 것인가?

▲국립경주박물관의 문무왕릉비 하단석


신라 문무대왕비 상단부 찾았다. 2009. 9.3

경주 주택 수돗가서 200여년만에 표면 훼손됐지만 내용 판독은 가능

조선시대 때 발견됐다가 다시 사라졌던 신라 제30대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의 한 부분이 200여년 만에 다시 발견됐다.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은 지난 2일 경북 경주시 동부동의 한 주택 수돗가에서 그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신라 문무왕릉비의 윗부분을 확인했다고 3일 밝혔다.

 

상단부 비석

신라 제30대 문무대왕릉

  

 

 

경주 시민들이 문화재에 관심과 보존의식이 너무 없다는 것이다.

비의 조각은 장독대와 수돗가 옆에서 발견됐다.

수돗가 빨래돌로 사용했다는 것이 아닌가?

 

그 돌 표면에 쓰여진 글자가 한자라는 것은 까막눈이라도 알 것인데...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어찌하면 저렇게 무관심하고 무식한 일이 있겠는가 ?  한국인이라는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하루였다.

  

 국립경주박물관의 문무왕릉비 하단석

 이 비편들의 탁본이 청나라 금석학자 유희해(1793~1853)에게 전해져 그의

'해동금석원'에 비문이 실렸다.

 

문무왕릉비 판독문

 
이 비석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여성 수도검침원이다. 지난 1일 저녁 이 여성은 야학에서 김윤근 신라문화동인회 부회장의 수업을 듣고 있었다. 김 부회장이 "최근 포항 중성리에서 '신라 최고(最古) 비석'이 발견됐다"며 "여러분 주변에 중요한 비석이 널려 있을지 모르니 잘 살펴보라"고 했다. 순간, 번쩍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지난번 검침했던 집 수돗가에 박힌 돌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는 곧바로 김 부회장에게 알렸고 김씨의 제보를 받은 국립경주박물관이 현지조사를 했다. 박물관은 "비편(碑片)은 높이 66㎝, 너비 40㎝ 크기로, 앞면에만 200여자의 글자가 확인된다"고 밝혔다.

조선시대 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洪良浩·1724~1802)의 《이계집(耳溪集)》은 682년 경주 사천왕사에 세워졌던 문무왕릉비의 조각들을 1796년(정조 20년)에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비석의 탁본은 청나라 금석학자 유희해(劉喜海·1793~1853)에게 전해져 그가 쓴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비문 내용이 실렸다.

그러나 비석의 실물은 그 이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가 1961년 아랫부분이 경주시 동부동에서 발견돼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번에 발견된 것은 그 윗부분이다. 오영찬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이번에 비석 윗부분이 발견된 장소는 아랫부분이 있던 지점에서 불과 120m 떨어진 곳"이라며 "애초 사천왕사에 세워졌던 비석이 경주 관아로 옮겨졌다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문무왕릉비 윗부분은 표면이 훼손되고 가장자리 등 일부가 심하게 마모됐지만, 비문의 전체 내용을 읽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고 박물관측은 덧붙였다. 박물관은 "《해동금석원》에서 제대로 밝히지 못한 일부 글자도 실제 비석과 비교하면 추가로 판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현재 마당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비석의 뒷면에 새겨진 비문의 상태도 주목된다"고 말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이 비편을 안전하게 박물관으로 옮겨 보존처리를 진행할 계획이다

 

 

1. 투후 김일제와 성한왕은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성한왕은 누구인가?

문무왕릉 비문에는 ‘투후 제천지윤 전7엽’이라는 암호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여기서 ‘투후제천지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의 자손이라는 뜻. 그리고 ‘7엽’은 일곱 개의 잎사귀, 즉 7대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 김일제’의 자손이 7대를 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15대조 성한왕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투후 김일제의 자손이 7대를 전하여 신라의 성한왕으로 이어졌다는 말일까? 그리고 과연 성한왕은 누구인가?
▲대능원



2. 흉노족 문화와 신라 문화의 유사성.

신라의 문화와 풍습은 북방기마민족 흉노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게 닮았다. <일본서기>에는 신라를 ‘금은의 나라’로 표현되어 있다. 황금 숭배는 유목 민족의 특징이다. 또 신라 김씨 무덤과 흉노족 무덤양식은 적석목곽분으로 동일하다. 흉노의 근거지에서 발견된 ‘동복(청동 솥)’ 역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하다.
▲기마인물형 토기
▲동복



3. 투후 김일제의 나라 투국은 존재했는가?

중국에서 김(金)씨는 흉노계를 상징하는 성씨와 같다. 중국의 김씨는 대부분 투후 김일제를 시조로 모시는 흉노족. 산동성 하택시 성무현 옥화묘촌 입구에는 이곳이 김일제의 투국이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었다. 투국성 유적지에는 김일제를 기리던 투후사가 있었다고 한다. 또 이곳 주민들은 투국성을 김성(金成), 금성이라고 한다. 조림사업이 시작되면서 숲으로 바뀐 이 일대 지하에 투후국의 흉노족이 ‘금성’이라 부르던 성이 있었다. 김일제의 성을 딴 투후국의 ‘금성’과 신라의 수도 ‘금성’ 두 이름이 일치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산동성 하택시 투국의 옛성



4. 신라는 이주민이 세운 나라,
 그렇다면 흉노족과 관련이 있다는 걸까?

왕망의 신나라에서 사용되던 ‘화천’이 출토된다. 이것이 발견된 지역은 중국에서 한반도 서남해안을 거쳐 일본에 이르는 무역로와 거의 일치한다. 중국왕망의 난에 가담했던 투후 김일제의 자손들은 왕망의 피살과 함께 뿔뿔이 흩어진다. <삼국사기>나 <삼국지 위지동이전> 등 역사서에는 대륙의 정세가 급변할 때마다 북방의 이주민이 한반도 남단 진한 땅으로 이주해왔다는 기록이 여럿 등장한다. 그렇다면 투후 김일제의 자손들도 신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화천



5. 성한왕은 누구를 지칭하는가?

문무왕의 15대조는 김알지의 아들 세한이다. 추사 김정희가 비문의 내용을 집대성한 <해동비고>에 보면 문무왕비문에 기록된 성한왕은 바로 ‘김알지’라는 기록이 나온다. 비문의 성한왕에 대한 묘사는 김알지의 설화와 거의 동일한 것으로 분석된다. 성한왕은 바로 신라 김 씨 시조 김알지를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에서 이주해온 김 씨가 세력을 형성하고 이주민에 불과했던 김 씨들이 최초의 왕인 미추왕을 배출한다. 문무왕에 이르러서는 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 패권을 장악한다.
▲해동비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대당전쟁마저 승리한 문무왕. 그의 비문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석탈해가 사라지고 성한왕만이 존재한다. 신라는 이제 김씨 단독 왕국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바로 문무왕릉비문인 셈이다.

신라김씨왕족의 자신감은 신라김씨 시조 성한왕과 더불어 흉노 태자 투후 김일제까지 자신들의 뿌리가 닿음을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문무왕비문은 신라 김씨가 한반도의 패자로 성장해간 비밀을 담고 있는 고대사의 블랙박스였다.

 

 

김수로왕과 허황옥

흉노왕의 후손 투후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
2009/01/09 오 전 4:15김수로왕과 허황옥



▲ 신라왕족의 조상이라는 김일제의 석상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
  김대성 전 한국일보 편집위원·한국문자학회 부회장 

  
1200만 인구를 자랑하는 한국 김씨들의 성(姓)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세계 최초로 '金'을 성씨로 사용한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와 한국의 김씨들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최초로 김씨의 연원을 찾는 이색 탐사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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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 근의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체 인구수는 대체로 274개 성씨에 4500만명 가량이다. 이중 김씨는 241개의 본관을 가지고 있고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가위 민족세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세력이라 할 것이다.

김씨는 대체로 신라, 가락(가야)의 두 집단이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고, 조선조 임진왜란 이후 귀화해 사성(賜姓)을 받은 김씨가 별도로 있다. 여기다 가락계 김씨의 외가인 허씨 집안 및 허씨가 당나라 때 당태종으로부터 사성을 받은 인천 이씨 등도 범(凡) 김씨 계열에 포함된다.

그런데 김씨 계열 중 신라와 가락의 양대 김씨는 족보상 그 선조가 난생설(卵生設)이나 천강설(天降說)의 주인공으로 묘사됨으로써, 그 전의 상황을 알 수 없게 돼 있다.
신라계인 경주 김씨들은 시조를 ‘김알지’라고 한다. 또 가락계인 김해 김씨들은 시조로 가락국의 창시자인 ‘김수로’를 꼽는다. 이들 모두가 알에서 태어난 것으로 돼 있다. 어느 민족이건 시조 탄생에 대해서는 신비스러운 전설로 미화시키는 전통이 있다.
그러나 김알지와 김수로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지금으로부터 불과 2000년 전의 일이다. 이때는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이미 화폐가 통용되고 있었고, 철기를 생산하고 있었으며, 갖가지 신무기가 개발되고 있던 때였다. 그때는 나름대로 문명의 첨단시대였다.

이런 개명(開明)한 시대에 김알지나 김수로가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필자 자신이 김해 김씨지만 김수로나 그 부인인 허왕후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를 보면서, 틀림없이 출자(出自)를 내놓고 밝히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해왔다. 그리고 그 내놓고 말하지 못할 사연을 밝혀낸다면, 김알지와 김수로가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출생의 비밀도 저절로 풀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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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궁금증의 주인공 '김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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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초 필자는 ‘한민족 정체성을 찾는 답사팀’을 만들어 보름 일정으로 중국을 탐사할 계획을 세웠다. 지난 20년간 궁금해 마지 않던 ‘김일제(金日?)의 묘’ 존재 여부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상 최초로 등장하는 김씨 성의 주인공 김일제, 그리고 막연하게 몇몇 전문가의 입으로만 전해오는 ‘김일제의 묘’의 실재 여부는 김씨 성의 기원을 추적하는 일에 관심 많은 필자에게는 매우 중대한 일이었다.

1978년 필자는 김알지, 김수로가 등장하기 150여년 전에 이미 김씨 성을 가진 김일제라는 인물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몇 년 전 작고한 재야사학자 문정창(文定昌)씨의 저서 ‘가야사’ (백문당, 1978)를 통해서였다. 우리의 역사 연구를 강도 높게 비평하며 충격적인 논문을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킨 문정창씨는 이 책에서 김일제가 한국 김씨들의 직계 선조가 된다는 것을 여러 전거를 들어 밝히고 있었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학설이었다.

그러다가 10년이 지난 89년 한국문자학회 회장 김재섭(金載燮·66)씨에게 중국의 금문(金文)을 배우면서 또 다른 사실을 알았다. 김일제의 묘가 한(漢)나라 7대왕 무제(武帝·141∼87 BC)가 묻혀 있는, 중국 섬서성 함양 부근의 무릉(茂陵)에 함께 배장(陪葬)돼 있다는 정보였다.
또 고(古)문자학을 공부하면서 김일제의 성(姓)인 김이 한무제로부터 사성(賜姓)을 받은, 즉 한무제가 특별히 내려준 성이었다는 것도 그제서야 알았다. 말하자면 김일제가 세계 역사상 최초로 ‘김’을 성씨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김일제가 과연 김씨의 시조가 될 수 있는 것인지, 그의 묘가 실제로 한무제가 묻혀 있는 무릉에 배장돼 있는지, 도무지 막연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같은 한자 문화권인 동양 3국에서 성의 글자가 같다고 해서, 먼저 살다 간 유명 인물에게 족보를 갖다붙여 그의 후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92년 중국과 국교가 트인 후부터 이제는 마음놓고 김일제의 묘를 확인해볼 수 있겠구나 하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지만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무릉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모아본 결과, 한나라 왕 무제를 도와 서역(西域)을 개척한 영웅 곽거병(?去病·140∼117 BC)의 묘는 있어도 김일제 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곽거병이 누구인가. 그는 바로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休屠王)을 죽이고 김일제와 그의 동생, 또 그의 어머니를 포로로 잡아온 장본인이었다. 김일제로서는 원수일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과 나란히 무릉에 배장돼 있을 것이라고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이번에 빈손으로 돌아올지언정 일단 무릉을 찾아 주위에 널려 있다는 많은 묘소를 이잡듯 찾아보기로 작심하고 중국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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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곽거병, 초라한 김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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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西安)에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무릉을 찾은 것은 6월12일 오시(午時)였다. 섭씨 34도로 땡볕이 지독했다. 일제 마이크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따가운 햇살이 정수리를 쿡쿡 찔러 올 정도였다. 습기가 없는 건조한 기후인데도 열탕에 앉아 있는 듯 온몸에서 땀이 배어 올랐다. 땀이 나면 건조한 공기가 그대로 빨아 마셔버리니, 햇볕에 내놓고 있는 얼굴이며 목이며 팔의 피부가 따가웠다.

그런데 햇볕과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긴가 민가 하던 김일제의 묘는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더냐는 속담은 역시 들어맞았다. 한국에서 수집한 자료가 부실했을 뿐이지, 현장에는 김일제라는 인물에 대해 해설을 해놓은 책자와 묘지 안내 간판까지 걸려 있었다.

김일제가 한국 김씨의 시조든 아니든 간에 2100년 전 김씨 성을 가진 인물의 묘는 현재의 지명으로 중국 섬서성(陝西省) 흥평현(興平縣) 남위향(南位鄕) 도상촌(道常村)에 있다. 김일제의 묘는 한무제가 묻혀 있는 무릉의 들머리에서 동쪽으로 1km나 떨어진 곳이다. 또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 가족들을 포로로 잡은 곽거병의 묘에서 보면 동쪽으로 우뚝 서 있었다.

중국측 묘지안내 자료에 의하면 김일제에게 할당된 묘역은 1만8748m2. 묘의 높이는 12m, 분묘 동편의 길이는 41.2m, 서편이 41.9m, 남편이 35.5m, 북편이 36.3m로 1479평방m2에 이르렀다. 묘는 남쪽을 바라보고 누워 있었다. 아마 경주의 천마총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김일제의 묘는 무릉의 주인공인 한무제의 묘나 한나라의 기반을 굳건히 한 곽거병, 위청(衛靑) 장군 등의 묘 규모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곽거병의 묘역은 경내에 웅장한 담벼락을 두르고 있었고, 그 들머리에 무릉박물관을 만들어 화려한 연못과 높은 관망대까지 조성하는 등 그것만으로도 관광명소로 만들어두었다.

반면 김일제 묘는 사대부 집의 대문간 청지기가 사는 집 정도로 초라해 보였다.
김일제의 묘역은 주위가 담벼락 대신 밀밭과 과수원이 울을 치고 있었다. 입구에 해당하는 묘의 코앞에 배나무 과수원이, 옆구리며 머리 쪽에는 밀밭이 들어서 있었다. 말하자면 입구나 출구가 모두 봉쇄된 무덤이었다.
아무리 봐도 조금은 섭섭한 대접을 받는 묘였다. 빈정대는 식으로 표현을 하자면 그저 한무제의 미덕을 칭송하기 위한 액세서리에 불과한 묘라고나 할까.

김일제가 한족(漢族)이 아닌 흉노족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그랬을까? 무릉박물관에서 팔고 있는 무릉 관련 책자에는 김일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흉노왕의 태자로 비록 잡혀와 노예가 됐지만 한무제에게 충성을 다한 공으로 ‘투후(?侯)’라는 천자(天子) 다음으로 높은 벼슬을 받을 수 있었고, 죽어서는 제왕이 누워 있는 능의 옆에 묻힐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그러나 김일제의 묘는 현지에서 ‘미티(Miti)’라고 부를 뿐, 실제로는 그가 누구인지 왜 이런 묘를 만들어 두었는지 관심 밖이었다. 스포트라이트는 무릉과 곽거병의 묘이니, 그곳에만 관광객이 모일 것은 뻔하다.

묘하게도 중국의 역사에 굵은 선을 그어놓은 영웅 곽거병의 묘 앞에는 곽거병의 전공을 새긴 ‘마답흉노석상(馬踏凶奴石像)’이라는 석조물이 조성돼 있다. 말 그대로 곽거병이 타던 천리마가 흉노족을 짓밟고 있는 형상이다. 답사팀은 말에 짓밟힌 흉노족이 곽거병이 죽인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이 아닐까 생각했다. 적어도 답사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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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제 묘에 분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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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제의 후손들이 한 왕실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100여년 동안은 후손들의 참배가 거창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이후 지리멸렬해졌고, 2000여년이 지난 지금은 내놓고 이 묘를 찾을 후손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 이렇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김일제의 묘 꼭대기는 사람들이 많이 오르내린 듯 잔디가 벗겨져 사방으로 흙색의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뱀이 기어가는 듯 여러 갈래의 산책로 같은 길이 나 있었다. 묘에 오르지 못하도록 계획적으로 심었는지 알 수 없으나, 묏등 전체에는 무릎까지 오는 키 작은 가시나무가 고르게 덮여 있었다.

이곳에서 밀과 옥수수를 재배하고, 사과 과수원을 하고 있는 장지염(張志廉·50)씨는 할아버지대부터 3대째 농사를 짓고 있다고 했다.
장씨는 “작년 2월인지 3월인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만주 요령성에 있는 60∼70대의 할아버지 두 사람이 찾아와 자신들이 김씨라고 하면서 묘에 절을 하고 갔다”고 말했다. 그 외에 이 묘를 찾는 사람은 아직 본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김일제 묘에는 남쪽에 있어야 할 묘비가 보이지 않았다. 답사팀은 처음에는 묘비가 없는 줄 알았다. 그렇지만 적어도 무릉에 배장될 정도의 묘라면 묘비가 없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 사람이 나서서 묘비 수색 작업을 벌였다.
아니나 다를까. 묘의 남쪽 정면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무작정 과수원 속으로 20여m 들어갔더니 묘비가 있었다. 묘비는 어른 키만한 배나무 사이에 들어앉아 있어 눈여겨 찾지 않는 한 발견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배밭 주인인 50대 아주머니가 뛰어와 허락도 없이 들어갔으니 고발하겠다며 심하게 투덜대는 것을 달래느라 한참 고생했다.

답사팀 중 김씨 성을 가진 일행이 인사라도 올리고 가자고 제안했다. 이번 여행의 중요 목적이 김일제의 묘를 찾는 것이었으므로 모두가 찬성했다. 그러나 배나무 과수원 속에 있는 묘비 앞에는 차례를 지낼 손바닥만한 공간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묘의 동쪽 넓은 터에다 말리고 있는 밀짚을 약간 걷어내고 간단한 차례상을 차렸다.

한국에서 만든 순수한 우리 향을 피우고, 전남 승주에서 신광수(申珖秀)씨가 직접 만든 작설차를 올렸다. 제주는 답사팀 팀장인 김세환(金世煥·70)씨가 맡았다. 신라 김씨 계열의 의성 김씨(義城金氏)인 김세환씨는 답사를 나서기 전 김알지가 탄강했다는 경주 계림을 찾아서 중국의 김일제 묘를 찾으러 간다고 고유제를 올릴 만큼, 김씨의 뿌리를 찾는 작업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후배들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눈치였으나 그는 차례를 지내는 동안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답사팀 모두가 경건하게 차례를 올렸다.
과수원의 나무에 달려 귀가 따갑도록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축문으로 삼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그리고 묘소를 한 바퀴 돌며 좋은 날을 잡아 차례다운 차례를 올릴 것을 다짐했다. 답사팀은 물론 김일제가 김씨의 시조가 된다는 전제하에 이렇게 차례를 올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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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km의 사막, 河西走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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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과연 김일제는 역사에 어떻게 등장하고 있을까. 답사팀은 그 역사의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김일제라는 인물이 태어났던 기원전 2세기경 김일제를 둘러싼 내외 사정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가 흉노의 왕으로 살고 있던 땅은 지금 서안 북쪽 땅인 무위(武危)의 언지산 (焉支山)과 돈황(敦煌)의 삼위산(三危山)이 있는 감숙성(甘肅省) 지역이다. 휴도가 이웃나라 왕인 곤사왕 (昆邪王)의 꾐에 빠져 죽고 일제와 동생 윤(倫), 그의 어머니 알지(閼氏)가 한나라 곽거병에게 포로로 잡힌 곳이 바로 삼위산이다.

동쪽 아래에 있는 한(漢)나라 측에서 보지면 이 지대는 오초령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신강에 이르기까지 길이가 1000km에 이르며, 그 폭은 40∼100km나 되는 광활한 땅이다. 중국 사람들은 이 지역을 계곡으로 보았던지, 황하의 서쪽을 달리고 있는 긴 복도라는 뜻으로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고 부른다.
비록 복도라고 부르지만 결코 좁지 않은 광활한 지대다. 좌우가 험악한 산맥과 사막인 탓에 이 기나긴 지대말고는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이 없다. 따라서 이 지대를 거치지 않고서는 서역으로 갈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사막지대로 이어지는 이 땅은 황량하기 짝이 없지만,
해발 4000∼5000m인 기련산맥(길이 800km)에는 3000여개의 빙하가 2000km2의 거대한 얼음 호수를 형성하고 있어 멋진 대비를 이룬다. 여기서 녹아 흘러내린 물이 곳곳에 강과 호수를 이루고 넓은 오아시스를 형성한다.
이 오아시스 지대에 넓은 초원이 펼쳐져 목축이 번성하고, 비옥한 땅이 개간돼 농업이 발달해 감숙성의 곡창지대로 군림할 수 있었다. 이곳은 또한 동서무역의 관문으로 이곳을 지배하는 민족이라야 중원 땅을 부리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진(秦)나라는 감숙성 천수(天水) 땅에서 나라를 일으킨 뒤 섬서성 북서쪽에 있는 이곳 하서주랑을 차지함으로써 천하통일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진시황제가 죽고 나자 간신들은 시황의 태자 부소(扶蘇)를 살해하고, 동생 호해(胡亥)를 내세워 천하를 주무르다 한고조인 유방에게 나라를 뺏긴다.
이때 훗날 재탈환을 꾀하고자 서북쪽으로 망명해간 세력이 태자인 부소의 계열, 즉 휴도왕 계열이라는 것이 한국문자학회 김재섭씨의 시각이다. 어쨌든 휴도왕 세력은 이곳에 근거지를 두고 계속 한나라를 넘보았다.

한편 한나라를 세운 한 왕실은 이 하서주랑을 손에 넣지 않고는 하루도 편한 날을 보낼 수 없었다.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땅이었다. 대대로 중원을 통치한 이들은 이곳에 사는 종족을 야만시해 흉노족이라고 낮춰 불렀다.
흉노의 생활과 풍속은 한족과는 판이했다. 초원과 물을 찾아 이동해 다니면서 털로 짠 파오(천막)생활을 했기 때문에 생활은 늘 전투 태세였고, 무엇보다 말을 가까이했기에 기동력이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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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와 곽거병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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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에서는 7대 임금으로 16살난 무제가 즉위한다(기원전 140년). 무제는 즉위와 함께 흉노정벌을 왕조의 제1과제로 삼았다. 한제국의 세계쟁패를 위해서 흉노를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이다.
흉노정벌에 노심초사하던 무제는 이웃 월지국이 흉노에 짓밟혀 하서에서도 서쪽고원으로 옮겨 복수할 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신하인 장건(張騫)을 파견해 월지와 동맹하여 흉노를 협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장건 일행은 되레 흉노에게 붙잡혀 10년 동안이나 유배당했다가 겨우 탈출에 성공한다. 그는 귀국하지 않고 월지왕을 찾아가 월지와 동맹을 맺고자 했으나 편안히 안주하고 있던 월지를 움직일 수 없어 13년 만에 귀국한다.

그러나 장건은 매우 유용한 정보를 갖고 온다. 대원이라는 나라에는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천마(天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무제는 흉노보다 뛰어난 기동력을 갖추기 위해 대원정벌에 나서서 수많은 천마를 얻게 된다. 천마를 얻고 나서부터 무제의 정벌이 순조로워진다.
드디어 무제 휘하의 위청(衛靑) 장군이 흉노정벌에 나선다. 기원전 121년 봄, 곽거병이 1만명의 정예군단을 편성해 위청 장군과 합류하면서 하서지방 정벌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무제의 부인인 위황후 언니의 아들로 태어난 이가 곽거병이다. 그는 이모부인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시중이 되었으며, 위왕후의 형제인 외삼촌 위청 장군을 따라 흉노정벌에 나서 혁혁한 무공을 세우게 된다.
곽거병은 먼저 광대한 초원지역인 언지산(焉支山)을 공격한 후, 이어 기련산 너머로 달아난 흉노를 쳐부수어 4만명 이상의 흉노를 포로로 사로잡는 대전과를 올렸다.

당시 광활한 하서지방 중에서도 노른자위 땅을 다스린 통치자는 곤사왕(昆邪王)과 휴도왕(休屠王)이었다. 한나라의 정벌군에 계속 밀리던 곤사왕은 흉노의 천자(天子)인 선우의 질책이 두려워 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을 설득해 투항키로 한다. 그러나 휴도왕은 투항을 거부하고 전쟁준비를 한다. 그러자 곤사왕은 휴도왕을 꾀어내 죽여버리고 4만명의 무리와 함께 곽거병에게 항복하고 만다. 곽거병은 항복한 흉노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개선했는데 10만의 대군단이었다고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전한다.

이후 곽거병은 무제를 도와 서역개척에 지대한 공헌을 세웠다. 젊은 나이로 무려 여섯 차례나 출정, 번번이 대승을 거두었으나 24세 때 갑자기 요절해버렸다. 이에 무제는 비통해 마지 않았다고 하며, 그래서 위청 장군과 함께 곽거병의 묘도 자신의 능에 배장되도록 했던 것이다.
김일제라는 인물은 한무제가 아니면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다. 김일제는 한나라의 역사서 ‘한서(漢書)’ ‘김일제전(金日?傳)’에 상세히 설명돼 있다. 물론 철저하게 한인(漢人) 본위로 기록했겠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놀랄 만한 역사의 사실들을 찾을 수 있다. 필자는 20여년 전 문정창씨의 ‘가야사’에서 처음 김일제를 만난 이후 ‘한서’의 ‘김일제전’을 찾아 살펴보았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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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漢書)’의 김일제 전(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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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해 이르기를(贊曰), 김일제는 이적(夷狄)의 사람으로 그의 모국을 잃고 한의 궁중에 매인 노예였으나 임금을 독실하게 공경하고 타일러, 스스로 충성스러움과 믿음이 나타나 공적에 의해 상장(上將)이 되고 나라를 후사에 전해 자손은 대대로 충효로 이름나고 7대 왕에 걸쳐 궁중을 돌본 일, 어찌 그리 성했는고. 본시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제천(祭天)한 까닭으로 김씨의 성을 주었다고 한다.

―김일제의 자(字)는 옹숙(翁叔), 본래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다. 일제는 아버지가 항복하지 않고 죽었으므로 어머니 알지?閼氏?와 동생 윤(倫)과 함께 한관에게 몰수돼 황문(黃門)에 옮겨져 말을 길렀다. 이때가 나이 14세였다. 그 뒤 무제는 잔칫날에 말을 검열하였다. 거기엔 후궁의 여인들이 가득히 모여 있었다. 일제 등 수십인이 차례로 말을 끌고 어전 아래를 통과했는데 여인들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자가 많았다. 그런데 오직 일제는 궁녀들을 훔쳐보지 않았다. 일제는 키가 8척2촌, 용모는 엄숙하고 끌고 있는 말 또한 살지고 훌륭했으므로 임금이 기이하게 생각하고 물어보니 사실대로 대답했다. 임금은 기특히 여기고 즉일로 목욕시키고 의관을 주어 마감(馬監)으로 임명했다. 곧 시중부마도위 광록대부(侍中附馬都衛 光祿大夫)에 올랐다.

일제는 임금에게 가까워진 이래 전혀 과실이 없어 임금의 신임과 사랑을 받아 상을 받은 것이 누천금이나 되었다. 임금이 밖에 나갈 때는 함께 타고 갔으며 안에 있을 때는 좌우에서 모셨다. 주위에서 “폐하가 망령이 들어 한 오랑캐의 애새끼를 얻어 도리어 귀하고 중하게 여긴다”고 수군거리니 임금은 그 소리를 듣고 더욱 후하게 대하였다.
일제의 어머니는 두 아들(일제와 윤)을 가르침에 매우 법도가 있어 임금이 이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겼다. 병으로 죽자 어명으로 감천궁(甘泉宮)에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휴도왕 알지(休屠王閼氏)’라고 표제를 붙였다. 일제는 그 초상을 뵐 때마다 예배하고 쳐다보고 눈물을 흘리고 난 뒤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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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후 벼슬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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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임금은 좌우에서 모신 지 수십년에 이르렀다(이 사이에 일제는 임금을 암살하려 하는 자를 잡아내 더욱 임금의 신뢰를 받았음). 임금은 일제에게 궁녀를 주었으나 절대로 가까이 하지 않았다. 임금이 그의 딸을 후궁으로 삼고자 했으나 승낙하지 않았다. 그의 독실과 근신이 이와 같아 임금은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임금이 앓아 눕게 됐다. 무제는 모하라(임금을 암살하려 한 자)를 토벌한 공으로 일제를 ‘투후(?侯)’에 봉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나 일제는 무제에 이어 즉위한 임금(昭帝)이 어리므로 봉을 받지 않았다.

어린 임금을 보조한 지 1년 쯤 지나서 일제는 앓아 눕게 되고 병이 깊어졌다. 대장군 곽광이 임금께 진언하여 일제는 드러누워서 열후(列侯)의 인수(印綬)를 받았다. 하루가 지나서 죽었다(나이 50세로 추정). 장례에 필요한 물건을 주고 묘지를 주어 경차와 무장병을 딸려 장송하니 군대의 진을 펴고 무릉에 이르렀다. 시호를 경후(敬侯)라고 하였다.

―일제의 두 아들 상(賞)과 건(建)은 원래 시중(侍中)이 되고 소제(昭帝)와 나이가 비슷해 함께 기거했다. 상은 봉거도위(奉車都衛)로, 건은 부마도위(附馬都衛)가 되었다. 상이 투후를 계승하여 두 개의 인수(印綬)를 차게 돼 임금이 곽장군에게 이르기를 “김씨 형제가 모두 두 개의 인수를 달게 하면 안 됩니까” 하고 물으니 곽광이 대답하기를 “상은 아버지의 벼슬을 이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했다. 그때 나이 모두 8, 9세였다.

선제(宣帝)가 즉위한 뒤 상은 태복(太僕)이 됐다. 그런데 곽광 장군이 모반의 낌새를 보이자 상서하여 곽씨의 딸인 부인과 이혼을 했다. 임금도 이를 애처롭게 여겼으며 이로 인해 상은 연좌되지 않았다. 원제(元帝) 때 광록(光祿)의 훈(勳)을 받고 죽었으나 아들이 없어 그 나라는 없어졌다. 선제에 이어 제위에 오른 원제(元帝) 초에 일제의 차남인 건(建)의 손자 당(當)을 투후로 봉하여 일제의 뒤를 잇게 했다. 다시 당의 아들인 성(星)이 투후를 계승한다.
정리하자면 일제는 한무제로부터 김이라는 성을 받고 가장 아끼는 신하가 된다. 무제를 암살하려는 자를 무제 앞에서 격투 끝에 체포한 공으로 한나라 제후국의 왕인 ‘투후’라는 벼슬까지 받는다. 일제의 아들 상(賞)도 투후가 되나 일찍 죽고, 후에 5대손인 성(星)까지 투후 벼슬을 받아 제후국의 왕이 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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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김이 김일제의 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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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김일제 일가에 자주 등장하는 ‘투후’라는 이름은 놀랍게도 신라 30대 왕인 문무왕 비문에서 다시 나타난다. 지금 경주국립박물관에 남아 있는 문무왕의 비석은 윗부분 전체가 없어져버렸고 비의 아래 둥치만 남아 있다.
현재 탁본으로 남아 있는 비문의 글자는 원래 비문의 일부밖에 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문무왕의 계보가 완전치는 못하다 하더라도 뚜렷하게 남아 있어서, 신라 왕가의 가계도를 살펴보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점이다.
자취를 감추었던 문무왕비가 다시 발견된 것은 1796년(정조 20년)에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서다. 이는 당시 경주부윤을 지내던 홍양호(洪良浩·1724∼1802년)에게 보고됐고, 홍양호는 이를 탁본해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이 비문은 발견 당시에 이미 글자의 반수 이상이 심하게 마모돼 완전하게는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수 있다.

이 비문에서 중요한 것은 문무왕의 출자(出自)가 보인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유득공 (柳得恭·1749∼?)이 그의 저서 ‘고예당일기’에서 언급한다. “신라의 김이 김일제의 김인가?” 그러나 유득공은 더 이상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문무왕의 비문에는 문무왕의 선대(先代)가 누구 누구라는 것이 명확하게 밝혀져 있다. 그 선대를 표시하는 글자들은 ‘화관지후(火官之后)’니 ‘투후’니 ‘성한왕(星漢王)’이니 해서 지금 사람들이 보면 무슨 암호처럼 잘 알 수 없는 말이다. 그럼에도 문무왕 비문에 남아 있는 글자를 조립해 분석을 해보면 과거의 많은 금석문에서처럼 조상을 미화해서 신화로 꾸미는 가식이 없다는 점이 돋보인다.

비문에 남아 있는 문무왕의 출자는 문무왕 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7단계로 구성돼 있다. 이 7단계 인맥 계보를 구체적 역사에 잇대어 설명해낼 수 있다면, 지금까지 이르지 못한 고조선이나 삼한 등이 이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도 풀릴지 모른다.

비문의 다른 내용은 접어두고, 가장 주목되는 7단계의 출자 부분은 이렇다.
① 화관지후(火官之后): BC 2300년대
② 진백(秦伯): BC 650년대
③ 파경진씨(派鯨津氏): BC 200년대
④ 투후(?侯): BC 100년대
⑤ 가주몽(駕朱蒙): BC 50년대
⑥ 성한왕(星漢王): AD 20년대
⑦ 문무왕(文武王): AD 660년대

옆에 덧붙인 연도는 문자학회 김재섭씨가 주장하는 것이다. 문제는 ①의 ‘화관지후’가 사람의 이름인지 당시의 관직 이름인지 ②의 ‘진백(秦伯)’이나 ③의 ‘파경진(派鯨津)’이 무슨 뜻인지 모호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후대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 신라 문무왕 당시에는 이런 글자가 무슨 뜻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새겼을 것이다.

일단 결론부터 추단해 본다면 ①의 화관지후는 BC 2300년 경 관직 이름으로 현재로서는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의 임금인 순(舜·재위 9년 BC 2320∼2312), ②의 진백(秦伯)은 진시황제의 20대 선조인 진 목공(穆公), ③의 파경진씨(派鯨津氏)는 진나라가 망하면서 안전지대를 찾아 경진씨를 파견한 휴도왕, ④의 투후는 김일제, ⑥의 성한왕은 김일제의 4대손인 김성(金星)으로 이 성한왕이 바로 김알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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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은 소호김천씨의 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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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역사서에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기록이 존재한다. 신라 6촌장들이 진나라에서 망명해 온 사람, 즉 ‘진지망인(秦之亡人)’이라는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기록도 있고, 점필제 김종직의 ‘이존록(훙尊錄)’이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끝머리에 붙여진 김부식의 논찬과 같이 “신라인이 소호김천씨의 후손이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말하자면 한국 김씨의 선계가 소호씨 계열임을 말하는 것이다.

묘하게도 중국이 신화시대로 간주하고 있는
삼황오제시대의 한 사람인 소호김천(少?金天·재위 7년, BC 2474∼2468년)은 진나라와 연관된다. 진나라가 세워질 때 서방의 신을 모시고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는 백제사(白帝祠)가 등장하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백제(白帝)는 소호김천을 가리키며 백제사는 소호김천을 위한 사당이었다.

또 진나라가 망하고 진나라 왕족 계열인 휴도가 서쪽 돈황으로 피난 가서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냈다고 하는 금인제천(金人祭天)의 금인(金人)도 소호신(少?神)을 이르는 말이 될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문무왕 비문에는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다(?侯祭天之胤)’는 글이 등장하게 된다. 또 한나라 무제가 일제에게 성을 내리면서, ‘제천금인’한 휴도왕의 왕자니 성을 김(金)으로 했다는 것과도 연결이 될 것이다.

게다가 다른 것은 제쳐놓더라도 ④의 투후와 ⑥의 성한왕이라는 이름은 한나라의 역사서인 ‘한서(漢書)’에 관직 명칭으로 나온다. 실제로 ②의 진백과 ④의 투후 사이의 역사 기년을 추적해보면 진나라 멸망과 투후가 생긴 내력이 중원에서 일어난 일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족보와 관련해 가장 관심을 끄는 사항은 ⑥의 성한왕이 과연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문무왕 기록은 이런 등식이 성립해야만 해독될 수 있다.

다시 당시의 역사 상황으로 되돌아가보자. 한고조 유방(劉邦)이 세운 한왕조는 13대 200여년 만에 왕망에게 나라를 뺏긴다. 그 후 15∼17년 만에 다시 나라를 찾게 되니, 역사에서는 이를 후한(後漢)이라고 부르며 이전의 전한(前漢)과 구별한다.
왕망(王莽·BC 45∼AD 23년)은 한왕실 10대 원제(元帝·BC 49∼33년)의 황후 왕씨(王氏) 가문 출신이다. 11대 성제(成帝·BC 33∼7년)가 즉위하자 큰아버지 왕봉(王鳳)이 대사마대장영상서사 (大司馬大將領尙書事)가 되어 정치권을 장악했고 왕망 역시 38세(BC 8년)에 재상격인 대사마(大司馬)가 되어 한왕실을 장악한다.

그런데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자인 당(當)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의 남편으로 당에게는 이모부인 셈이다. 당은 일제의 후손으로 이 당시에 투후 벼슬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왕망은 투후 김씨 계열과는 외가 사이였던 것이다.
왕망은 9살의 어린 평제(平帝)를 옹립, 13대 제위에 올리고 자기 딸을 황후로 삼는다. 4년 만인 기원후 5년 어린 평제를 독살하고 9대 황제였던 선제(宣帝)의 현손인 2살짜리 영(孀)을 제위에 올리고 섭정을 하다 서기 8년에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신제국(新帝國)’을 세웠다.

왕망이 김일제 이후 한왕실에 깊숙이 개입해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김씨 계열의 힘을 업고 있었다는 것은 ‘한서 왕망전’에 상세히 나와 있다. 물론 왕망이 전권을 장악함으로써 외가인 김씨 계열은 모조리 정치 실세가 됐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왕망은 전국에 흩어져 있던 유씨들의 저항에 부딪혀 꿈을 펼치지 못하고 15년만에 망했다. 이렇게 됐으니 신제국에서 요직을 맡고 있던 김씨계는 필사의 탈출을 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요서와 요동, 한반도의 서북과 남쪽 김해 및 제주도, 바다를 건너 일본 규슈와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왕망때 만든 화폐 오수전(五銖錢)이 출토되는 것은 왕망과 정치일선에 같이 참여했던 세력이 목숨을 건지기 위해 대륙 밖으로 이동한 흔적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따라서 문무왕 비문과 왕망의 시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보건대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바로 성한왕, 즉 일제의 5대손인 성과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한편 일각에서는 김일제의 자손 중 또다른 김씨들이 가락으로 대거 이동해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핵심으로 꼽히는 사람이 김일제와 같이 포로로 잡혀온 동생 윤(倫)이다. 윤은 일찍 죽고 그의 아들 안상(安上)이 투후 벼슬과 동격인 도성후(都城侯)가 됨으로써 자손이 번창하게 된다. 그리고 윤의 4대손이자 안상의 3대손 탕(湯) 역시 왕망의 실패 이후 이 땅으로 망명해 오는데, 바로 그가 김수로라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투후 일제의 5대 자손이 신라 김씨계이고 윤의 5대 자손이 가락김씨계가 된다는 것이다.

가락의 시조 김수로의 직계가 김일제의 동생 윤(倫)의 가계라면 가락 김씨의 시조할머니 허왕후는 인도에서 온 공주라는 설도 설득력이 없어진다. 허왕후의 인도 아유타 공주설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 양자강 상류 보주에서 양자강을 타고 내려와 김해로 왔다는 설 등 그야말로 설왕설래다.
문정창씨는 “허왕후의 유입과정과 그 상황 등에 비추어 김수로 일문은 신제국이 망한 후 발해연안 또는 산동반도 지방에서 항거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가 마침내 그 아성이 무너졌으므로 유랑하여 한반도에 온 것 같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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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왕실에 등장하는 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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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허왕후의 출자 또한 뒤바뀔 공산이 많다. ‘한서’의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면 단언은 할 수 없을지언정 허왕후가 한 왕실 출신이라는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한 왕실에서 김씨계와 허씨계 두 집안은 초창기부터 강하게 얽혀 있었다. 허씨는 9대 선제(宣帝)의 황후였다. 김일제의 동생 윤(倫)의 아들 도성후(都成侯) 안상(安上)과 황후 허씨의 아버지 평은후(平恩侯) 허광한(許廣漢)은 7대 무제(武帝·재위 141∼87 BC), 8대 소제(昭帝·재위 87∼74 BC) 이후 왕실의 외척으로서 당대를 주도한 곽씨 일파와 정권경쟁의 라이벌이었다. 그래서 곽씨 일파의 허황후 살해음모를 들춰내 공을 세우게 된다.

10대 원제(元帝·재위 BC 49∼33), 11대 성제(成帝·재위 BC 33∼7), 12대 애제(哀帝·재위 BC 7∼1), 13대 평제(平帝·재위 BC 1∼AD 5)와 신제국 왕망의 멸망시기까지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는 외척과 공신의 후손으로 황제의 부마인 허광한과 안상의 자손이 서로 혼인한 사이인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허광한의 경우는 황후가 된 딸만 있었고 그의 두 동생도 각각 박망후(博望侯) 요성후(樂成侯)가 되었다. 마지막 신제국에서 허광한을 이은 경(敬)과 박망후를 이은 병(竝), 또 병을 이은 보자(報子), 요성후를 이은 상(常) 등을 보면 김수로가 되어 가는 도성후 탕(湯)의 왕후인 허씨의 출자가 어느 곳인지를 짐작하게 된다.

잃어 버린 역사를 되찾는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문정창씨나 김재섭씨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득을 해도 한번 각인된 역사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김일제가 김씨의 직계가 아니라고 해도 좋다. 일단 가설을 세우고 이를 증명하는 노력이라도 보여야 할 것이다.

학계에서 인정하든 말든 고문자학은 중국인 학자가 신화 전설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신농과 황제 소호김천 등 삼황오제시대가 실제의 시대라고 명쾌하게 증명하고 있다. 지금 한국문자학회는 역사의 시작시대인 삼황오제시대가 또한 고조선시대임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논리적으로도 이를 증명해내고 있는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일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희망 찬 미래를 위해 정체성을 찾으려는 것일 뿐이다.

2008년 3월

《 금의 시조 금함보는 과연 누구일까? 》

http://blog.naver.com/4701n/20014930880




출처블로그 : 煐元瀚帝國-天上帝國 링크 



출처카페 : 煐元瀚帝國-天上帝國 / 4701n님 
 
金의 始祖 금함보는 과연 누구일까? 三姓 淵源譜나 경주김씨 족보(북쪽 발행)를 살펴
보면 항려운동을 주도한 왕자로 奮왕자와 鎰왕자 두 분을 들 수있다. 그런데 남쪽에
서 발행된 경주 김씨 족보에는 奮왕자가 빠져 있다.

또 우리가 알기로는 경순왕의 부인이 竹房婦人박씨, 낙랑공주 王씨, 별빈 안씨부인
이렇게 세부인을 둔 것으로 알고있는데, 三姓淵源譜를 보면 첫째부인으로 松希부인
(昔씨)이 나오고있다. 뿐만아니라 송희부인은 5왕자를 둔것으로 기록돼어 있는데
이 부분은 확실하게 고증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왕자들 중의 한분이 금나라 시조 금함보와 연관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松希 부인의 5왕자 함자를 보면 佺, 瑤(完山君), 琨, 英(廣州君), 奮(三大君)이다.
그럼 지금부터 이 궁굼한 사항을 추론 해보기로 하자.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양위
하였을 때 신라 조정에서는 무기력하게 왕권을 넘겨 주었을까?
아니다! 삼성 연원보를 보면 왕 앞에서 자결한 왕자가 2명이나 나온다(松希婦人의 소생
임). 佺왕자와 琨왕자가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간 왕자가 2명인데 송희부인의 다섯째 奮왕자와
박씨왕비의 첫째 鎰 왕자이다. <개골산으로 들어간 왕자를 마의태자라고 부르기
때문에 두 왕자 모두 마의태자라고 부를 수 있다.

즉 금강산으로 들어 갔다는 것은 신라 부흥운동을 위하여 떠났다고 볼 수있는 것이
다. 그리고 그 당시 신라에는 왕건의 반대 세력이 많았는데 아마 수 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떠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이 군사를 지휘한 장군이 猛將軍으로 전해지고있다.
즉 한계산성과 설악산 일대가 신라 부흥운동의 근거지로 추정 할 수 있는 곳이다
(역사 스페설 미스테리 마의태자에서 보여줌). 이곳을 중심으로 해서 실제 군사행동
에 돌입하기 위해서 군사훈련이 있엇을 것으로 보며 그 시기와 때를 기다렸을 것이
다. 그렇지만 실제 군사행동에 들어 가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본다.

왕자들 입장에서 보면 고려에 대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한편 부왕에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군사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본다. 다만 군사행동을 하기
위한 시기를 저울질 하였을 것이고 또 왕자들은 신분을 노출하지 않을려고 이름도
가명으로 사용 하고, 승려로 위장하면서 때를 기다렸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고려의 군사력이 날로 강성해지고 또 경순왕도 장수를(92세) 하였기 때문에
고려를 칠 기회를 잡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상태로 지내다 결국 왕자들의 나이도
60세에 가까왔을 것이고 맹장군도 사망하여 고려땅에서 부흥 운동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후일을 기약하면서 두 왕자중의 한분이 만주로 건너 갔을 것아라는
가설이 성립할 수 있다.
따라서 금함보는 두 왕자중의 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지금부터 금함보의 출생년
도를 살펴 보기로한다.



고려사 세가 예종편을 보면 아골타의 계보가 적혀 있는데 여길보면 아골타는 금함보
의 5代孫으로 기록돼어있다.


금함보=금준=금행 → 금극수 → 고을 → 활라 → 핵리발 → 아골타



문헌에 따라서는 6대손, 7대손, 8대손등 제 각각이다. 이것은 世와 代 구분을 잘못해
서 한경우도 있을 것이다.

즉 5代孫=6世孫, 6代孫=7世孫이 올바른 표기이다.


그럼 두가지 경우로 금함보의 출생년도를 살펴보자. (금함보의 출생년도는 아주 중요
함)

첫째 아골타가 금함보의 5代孫인 경우

1세대를 20년으로 보고 아골타가 금을 건국 하였을 때를 47세로 보면 20×5=100,
100+47=147, 그리고 금함보가 만주에 건너 갔을때 이미 60세 이므로(금사에 기록됨)
147+60=207 다시 말하면 金 나라 建國 207년전에 태어난 인물이 금함보인 것이다.

금의 건국이 1115년 이므로 1115-207=908 오차 범위를 5년으로 보면 908년 또는 913년
에 태어난 인물일 것이다. 신라의 멸망이 935년이니 이때 금함보의 나이는 22세 또
는 27세로 추정되어 실제로 우리가 역사에서 아는 鎰왕자(마의태자)의 나이가 신라
멸망시 20세 초 였을 것이므로 금함보는 확실히 마의태자 자신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아골타가 금함보의 6대손인 경우

마찬가지로 20×6=120, 아골타(1068~1123)가 47세에 금을 건국하였으므로
120+47=167,금함보가 만주에 들어 갔을 때 60이므로 167+60=227 즉 금 건국 227년 전
에 태어난 인물일 것이다. 1115-227=888이므로 신라 멸망시 47세가 된다고 볼 수있다.
다만 1세대를 20년으로 보는 것은 정확한 것은 아니고 대충 그렇다는 것이다.

오차 범위가 10-20세까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의 경우도 우리 派祖의 22
代孫인데 계산법으로는 20×22=440이지만 실제로는 547년으로 107년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이러한 대수 계산에서는 한세대별로 4-5년정도 오차범위를 두는 것이 바람직
하다. 따라서 이렇게 보면 상기연대는 오차범위 안에 들기 때문에 금함보는 일왕자
또는 분왕자로 추정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살펴 보아야 할것은 금사와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기록돼어있는 3형제
에 관한 부분이다.  원래 송희부인의 소생은  5형제 이지만 두 왕자가 경순왕 앞에
서 자결 하였기 때문에 삼형제만 남은 것이다.  그렇다면 금사와 동사강목에서 삼형
제라고 기록된 부분과도 완전히 일치 하는 것이다. 삼형제의 함자는 요(완산군),  영
(광주군), 분(삼대군)이다. 

<다만 이 글에서 분왕자를 거론한 것은 분왕자가 개골산으로 들어 갔다고 기록돼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왕자인 영왕자도 금함보가 될 수있다는 ?

 
김근학|조회 145|추천 0|2018.03.10. 14:02

 

          숭혜전(崇惠殿)과 최고(最古)의 영정(어진)

    

 

경주시 문화재자료 제256

경북 경주시 황남동 216

숭혜전은 신라 최초의 김씨 임금인 13味鄒大王(미추대왕)과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30文武大王(문무대왕), 그리고 신라 마지막 임금인 56敬順大王(경순대왕)의 영위를 모신 廟殿(묘전)이다.

원래 이 묘전은 경순대왕의 가없는 敬天順民(경천순민)大義(대의)를 실천한 자애로운 仁德(인덕)을 길이 기리고 崇慕(숭모)하기 위하여 978년 대왕께서 송경(개성)에서 昇遐(승하)하시고 陵墓(능묘)를 파주(현재는 연천) 湍陵(단릉)으로 모시자 월성(경주)의 이름 없는 백성들이 사당을 지어 影幀(영정)을 모시고 제향을 봉행해 왔었으나, 조선 宣祖(선조)25(1592)에 발발한 임진왜란 시 왜적의 방화로 소실되고, 仁祖(인조)5(1627)에 동천동에 새로 사당을 지어 東泉廟(동천묘)라하고 경순대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봉행해왔다.

 

景宗(경종)3(1723)敬順王殿(경순왕전)으로 고치고 正祖(정조)18(1794)에 신라 김씨왕족의 역대 묘원인 사적512호 대릉원(大陵園)의 부지인 황남동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皇南殿(황남전)이라 고쳤다.

그 후 高宗(고종)24(18870)에 미추대왕의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 문무대왕의 위패를 같이 모시게 되었다. 이때 고종은 묘전을 크게 짓게 하고 숭혜전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앞면 5, 옆면 3칸인 맞배집으로 왼쪽에 永育齋(영육재), 오른쪽에 敬慕齋(경모재)가 있다.

앞에는 경순왕 신도비와 비각이 있고, 길 건너 50m 상거한 곳에 신라김씨 도시조인 大輔公(대보공, 追尊 世祖大王) 金閼智(김알지)의 묘전인 鷄林世廟((계림세묘)가 있다.

***미추대왕(재위 262-284)***

신라13대왕(이사긍),최초의 김씨왕이다.

신라김씨 시조인 김알지의 7대손으로 왕비는 광명부인 석씨이다.

12대 침해왕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으로 추대되었다.

백제의 봉산성, 괴산성 침략을 격퇴하고 농사를 장려해 민생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왕릉은 대릉원의 죽장릉이다

 

***문무대왕(661-681)***

신라30대왕, 신라김씨15대왕이다.

태종무열왕 감춘추의 장남으로 태자에 책봉되어 660년 김유신 장군과 함께 백제의 정벌전쟁에 참전하여 당나라와 연합으로 백제를 멸망시킴,

661년 고구려 정벌을 벌이고 있을 때 부왕인 태종무열왕이 승하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백제의 부흥 세력을 소탕하고 당의 제도와 관제를 도입해 따랐다

668년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정복하였다.

고구려 멸망 후 당이 고구려, 배제의 옛 땅에 도호부와 도독부를 설치하고 신라에도 계림도독부를 설치하고 통치하려는 마각을 드러내자,이를 단호히 저지하는 전쟁을 벌려 20만 당의 대군을 격퇴하고 삼국통일(대동강-원산만 이남)의 대업을 성취하였다.

승하할 때 유언에 의해 화장한 후 경주 감은사 동쪽 바다에 있는 대왕암에 수중릉으로 장례를 모시었다.

***경순대왕(927-935)***

신라의 56대 마지막 왕이고 신라김씨 38대왕이다.

 

김알지의 28대 손이고 마지막 화랑인 이찬 김효종(추존 신흥대왕)의 아들이다.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왕의 강압에 자진한 후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강토와 백성이 월성(경주)만 남아 있어 국가를 도저히 유지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자 경천순민의 대의에 따라

신라천년사직을 신흥 고려 왕건에게 평화적으로 넘겨주었다.

때문에 신라의 찬란한 문화와 유적이 보존되고 자손들이 남북한 통 털어 1000만에 가까운 명문거족으로 번성하게 되었으며 대왕을 기리고 숭모하는 묘전이 조선조 말까지 수십 군데가 있었으나 지금도 역대제왕 중 제일 많은 7곳이 남아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숭혜전과 최고(最古)의 영정(어진), 경순왕 영정

                             

                                           -  계자 황왕자 범공선사가 해인사에 봉안한 영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숭혜전에 신라 56대 마지막 경순왕의 영정이 5본 보관되어 있는데 이 영정이 국내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어진이라는 사실이 두 차례에 걸친 학술 세미나에서 밝혀졌다.

이 경순왕 영정에 대해 2008117일 경주문화원부설 향토문화연구소의 제3회 학술대회에서 <경주 숭혜전과 경순왕 어진의 문화사적 고찰>의 학술보고서와 2010612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국미술사연구소의 제20회 한국미술사연구소 학술세미나의 <최고의 어진, 신라 경순왕 어진의 회화사적의의(201012월 학술지 강좌 미술사에는 신라경순왕영정의 제작과 그 의의[정병모]로 발표)학술 자료에 의해 학계에 보고되어 공개된 것이다.

정병모 교수의 학술 세마나에 보고된 <경순왕영정의 제작과 그 의의>기록을 집약하면 [신라의 국운이 다하여 935년 고려에 평화적으로 나라를 이양할 때 경순왕의 태자 일(마의태자)은 금강산으로 들어가고, 계자(막내아들) 황왕자가 범공선사가 되어 가야산 해인사로 입산할년 때 부왕의 어진을 각각 모봉하여 봉안하였으나. 태자가 가져간 영정은 행방이 미상이고, 범공선사가 935년에 해인사에 봉안한 영정은 영천 은해사로 이안 되어 있다가 1749년에 이모되고 이것은 1778년 숭혜전(당시 동천묘)으로 이봉한 것으로 1792(정조12)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다시 이명기가 그린 <경순왕 영정>. 이진춘이 그린 <경순왕영정>으로 제작되어 숭혜전에 봉안되어 황왕자본(해인사본)이 경주 숭혜전에 소장된 어진의 주류가 된 것이다.]

<<<경순왕 영정이 두 차례의 학술세미나를 통해 최고의 영정으로 밝혀지기까지는 김병호(경주인) 숭혜전 참봉이 2008214일 신라김씨연합대종원 총회(14대 김영삼 대통령 산수연)에 참석하여 숭혜전 소장 영정의 존재를 알리고, 참고자료의 협조를 호소해와 황왕자가 해인사에 봉안한 경순대왕의 영정에 대한 자료를 갖고 있던 사단법인 범공선사숭선연구회 회장(당시 나주김씨중앙종친회장)320일 숭혜전 춘제에 참제할 때 경주김씨문헌록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등 자료를 제공하여 본격적인 학술연구를 하는 계기에 일조를 한바 있음>>>

경순왕 영정은 당초 제작시기가 935년으로 현존하는 어진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조선시대 모본을 이모한 화가의 명성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이모 시기도 영정 중 가장 오래되어 문화사적으로나 회화사적인 가치가 출중한 영정이다.

이 영정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410(2009,4,30)로 지정되어 있으나 무심한 세월에 훼손 상태가 심각하여 유물보존 처리를 위해 경주국립박물관에 관리를 위탁하고 있다가 2013624일 기증해 보관 중인데 기증 당시에는 보존처리 후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신청 한다고 하였는데, 기증 후 5년이 다 됐는데도 아직 아무런 조치가 없어 궁금하기 만하다.

현존하는 어진 중 가장 오래된 어진으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유물이기 때문에 국가 문화재 지정 등 합당한 조치가 조속히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1> 경순왕영정의 계보

계통

영정 봉안처

비고

()왕자본

- 935년 무렵 금강산 고자암(孤慈菴)

현재 소장여부 미상

경순왕의 장자

부안 김씨의 시조

()왕자본

935년 무렵 해인사 봉안

은해사 상용암(은해사 상용봉 충효암이란 설도 있음)으로 이안

1677년 은해사 상용암본 모사

1784년 경주 숭혜전(경주 김씨)으로 이안

1794년 이명기필 <경순왕영정>제작, 경주, 경주 숭혜전 봉안

1904년 이진춘필 <경순왕영정>제작, 경주 숭혜전 봉안

2007년 국립경주박물관 위탁보관

-경순왕의 차자

-나주 김씨의 시조

()으로도 표기

범공(梵空)이란 법명으로 법수사 승녀가 됨

명종(鳴鍾)왕자본

-978년 이후 제천(현 원주) 고자암(高自菴)봉안

-1785년 경주 숭혜전 이안

-경순왕의 삼자

경주 김씨의 시조

하동 경천묘본

-원 고자암본을 이안하려 했으나, 실제는 이명기의 어람용 소본이 봉안됨

1904년 하동 견천묘(경주 김씨)봉안

2008년 국립진주박물관 위탁보관

 

송광사본

송광사 봉안

일본

송광사 봉안(현재 미상)

 

경주 월성본

경주 월성 봉안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

 

 

 

 

<2> 경순왕영정의 변천

연도

사건

경순왕영정 제작

935

경순왕이 고려에 정권 이양

 

935년 무렵

경순왕의 영정을 해인사에 봉안

    

978년 무렵

고자암에 경순왕영정 봉안

고자암 경순왕영정

고려중엽

황산거사(黃山居士)가 고자암 터에서 가시 덤불을 헤치고 무너진 벽 위에서 화상을 취하고, 전우를 중수하여 그 화상을 봉안함

 

14세기말

이색, 권근, 권희, 권천 등이 다시 고자암을 수축

 

조선전기 이전

월성에 경순왕 사당을 세우고 영정을 모심

 

임진왜란

월성의 영정이 불에 탐. 이후 영정 대신 위패를 봉안

    

1627(인조 5)

영남안찰사 김시양과 경주부의 유생 김성원 등과 함께 반월성의 전각을 금학산 아래 동천동에 이전하여 중건. 이를 동천전(東泉殿)이라 함

 

1656(효종 7)

조속이 <금궤도>를 그림

 

1677

(숙종3)

원주목사 김필진이 <경순왕영정>을 제작하여 고자암에 봉안함

고자암 경순왕 영정 모사

1697

(숙종23)

고자암이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으나 오직 영정만이 무사함

 

1723

(경종 3)

관찰사 조태억이 조정에 품계하여 시조묘에 崇德殿), 동천전에 경순왕전(敬順王殿)‘이란 액호를 내리게 함

    

1748

(영조24)

경순왕릉인 장단(長湍)능을 발견

 

1749

(영조 25)

경순왕의 원당인 은해사 상용암에서 <신라경순왕진영>을 제작함

은해사 <신라경순왕진영>

1778

은해사 상용암 <신라경순왕진영>을 동천전으로 이전 봉안함

 

1785

(정조 9)

김시목이 관동지방의 사람이 가져온 원주 용화산(龍華山) 고자암의 <경순왕영정>을 동천전에 봉안

 

1794

(정조 18)

동천전 후면에 사태가 떨어지는 사건이 벌어짐

    

1794

동천전에서 황남전으로 이건

 

1794

화원 이명기가 <경순왕영정>2본을 제작

이명기필 <경순왕영정>

1887

(고종 24)

황남전을 중건하고 숭혜전(崇惠殿)이란 전호를 내려받음

 

1904

경주 숭혜전에 봉안한 이명기의 <경순왕영정>소본을 하동 경천묘에 이안함

이명기필 경순왕정소본

1904

화승 이진춘이 이명기의 <경순왕영정>을 다시 본떠 그린 영정을 숭혜전에 봉안함

이진춘필 <경순왕 영정>

 

 

 

<3> 이명기가 그린 초상화

연변

명칭

소장처 및 소재지

제작연도

재료 및 크기

참고자료

1

강세황자화상

姜世晃自畵像

강희동, 강영선

1782

비단에 채식

88.7×51.0cm

한국의 초상화, 429, 보물 제590

2

강세황초상

姜世晃肖像

강희동, 강영선

1783

비단에 채색

145.594.0cm

한국의 초상화, 428, 보물 제590

3

채제공초상(금관조복본)

蔡濟恭肖像

채규식

1784년경

비단에 채색

145.0×78.5cm

한국의 초상화, 310-313, 보물 제1477

4

유언호초상

俞彦鎬肖像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787

비단에 채색

116.0×56.0cm

한국의 초상화, 186-191, 보물 제1504

5/6

윤증초상(2)

尹拯肖像

윤완식(국사편찬위원회 보관)

1788

비단에 채색

118.6×83.3cm

한국의 초상화, 292-295, 보물 제1495

7

오재순초상

吳載純肖像

삼성미술관 리움

1791년경

비단에 채색

151.7×89.0cm

한국의 초상화, 178-181, 보물 제1493

8

채제공초상(사복본)

蔡濟恭肖像

수원시

1792

비단에 채색

120.0×79.8cm

한국의 초상화, 318-321, 보물 제1477

9

채제공초상(혹단령포본)

蔡濟恭肖像

채규식(국립부여박물관보관)

1792년경

비단에 채색

155.5×81.9cm

한국의 초상화, 314-317, 보물 제1477

10

허목초상

許穆肖像

국립중앙박물관

1794

비단에 채색

72.1×56.8cm

한국의 초상화, 280-283, 보물 제1509

11

서직수초상

徐直修肖像

국립중앙박물관

1796

비단에 채색

148.8×72.0cm

한국의 초상화, 230-235, 보물 제1487. 이명기, 김홍도 그림

 

 

 

2018.3.10

 

사단법인 범공선사숭선연구회 회장

지상 김 근 학



                                                                숭혜전

2018.03.10

cafe.daum.net/bumgongsunsa/ThkC/19  사단법인 범공선사숭선연구회






고대왕권국가 신라를 세운 지혜로운 왕 朴赫居世| ●―‥우리 사는 이야기
만사형통박종윤|조회 5|추천 0|2018.11.12. 13:58

박혁거세
고대왕권국가 신라를 세운 지혜로운 왕朴赫居世

출생 - 사망B.C. 69 ~ A.D. 4
1대 혁거세거서간B.C. 57-A.D. 4
2대 남해차차웅4-24
3대 유리이사금24-57
4대 탈해이사금57-80

혁거세(赫居世, BC 69~AD 4, 재위 BC 57∼AD 4)는 기원전 69년에 태어났다. 동해안의 한 바닷가에서 어진 사제 의선의 지도를 받아 성장한 혁거세는 우리나라 고대왕권국가의 문을 여는 신라를 세웠다. 고구려의동명왕보다 20년 먼저, 백제의 온조왕보다 40년이 앞선 시점이었다. 그는 어진 왕이었으며 지혜로운 왕이었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인 서기 3년, 혁거세는 하늘로 올라가고 7일 뒤에 몸만 땅으로 흩어 떨어졌다.

1신화로 보는 혁거세 사실로 보는 혁거세

마한 왕이 죽었다. 어떤 이가 혁거세 왕에게 아뢰기를, “마한의 왕이 지난번에 우리 사신을 욕보였으니, 이제 그의 장례를 기회로 정벌하면, 그 나라 정도는 쉽게 평정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요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하여 따르지 않고, 곧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삼국사기]에서).
깐깐한 성리학자였던 다산 정약용의 눈에는 박혁거세의 탄생신화도 적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하다. 우리 역사를 노래한 시에서 다산은,

<blockquote>오천 년 전 문헌들 허술하기 그지없어 / 載籍荒疏五千歲호해 마란 모두가 잘못된 전설이네 / 壺孩馬卵都謬悠[다산 시문집] 제2권,'조룡대(釣龍臺)' 중에서</blockquote>

라고 말한다. ‘호해(壺孩)’는 단지에서 나온 아이라는 뜻으로, 수로왕 탄생 신화를 말하는 듯하고, ‘마란(馬卵)’은 말 곁의 알이라는 뜻으로,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에 나오는 것이다. 알을 가르자 그 속에서 어린 아이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성리학의 이치로 따져 합리적인 사실을 증명하려는 다산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로부터 세월은 200여 년 흘러 이제 21세기. 오늘을 사는 우리는 다산의 태도와 많이 달라져 있다. 합리적이라면 더 합리적이 된 오늘날의 우리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옛 문헌을 다시 보배롭게 여기고, 터무니없는 말에 다시 귀를 기울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신화나 전설이 갖는 가치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리라.
신화와 전설은 시대를 증언하는 논리, 이전의 사실이다. 사람살이에는 논리로 설명하지 못할 사실이 있는 법이다. 특히 박혁거세에 관한 한 그의 출생에 따른 신비한 이야기는 그것 자체로 힘을 갖는 신화의 자리에 있다. 신화에 대해 관대하기 그지없을 뿐만 아니라 그 가치를 가장 먼저 인정했던 일연의 [삼국유사]나, 다산만큼은 아니라도 그에 못지않게 깐깐한 유학자였던 김부식조차도 [삼국사기]에서 그의 신비한 탄생 신화를 실어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 신화에서 출발해 그 속에 감춘 사실을 다시 구성해 볼 수 있다. 혁거세의 탄생은 그에 대한 어떤 사건보다 가장 중심에 있다. 신비로운 탄생은 곧 신라의 건국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탄생에 대해서 조금씩 다른 이야기가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차이를 가지고 퍼즐을 맞추듯이 짜나가다 보면, 신화를 넘어 사실의 경지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다.

2박혁거세가 태어난 알은 누가 낳았을까

혁거세는 기원전 57년 4월에 태어났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의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에서 웬 말이 꿇어앉아 울고 있었다. 다가가서 보자 말은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고 큰 알만 하나 남았다. 이 알에서 바로 혁거세가 나왔다는 것. 이어서 5년 뒤, 용이 알영의 우물에 나타나 옆구리에서 여자 아이를 낳았다.

여기까지가 [삼국사기]가 전하는 박혁거세 탄생 신화의 일단락이다.처음부터 신이로운 탄생 부분을 그대로 살려 신라 왕실과 혁거세의 위대성을 드러내려 한 것은 모처럼 [삼국사기]가 거둔 성과였다. 바로 다산과 다른 김부식의 일면이다. 신라 6부의 사람들이 출생이 신이한 혁거세를 받들어, 나이 열세 살이 되자 왕으로 세웠다는 부분에 와서는 애써 논리를 갖추려 하지만 말이다.
이 신화에서 혁거세는 철저히 신비로운 출신으로 포장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오면 이것은 더 재미있고 실감 나는 이야기로 확대된다. 혁거세가 담겨 있던 알이 자주색이라고 한다거나, 알영의 몸매와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지만, 입술이 닭의 부리 같아 월성의 북천으로 데려가 씻겼더니, 그 부리가 떨어져 나갔다는 대목은 읽는 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 한다. 알영은 그렇다 치고 혁거세가 태어난 알은 누가 낳았단 말일까?
김부식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겪은 일 하나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맨 마지막에 적혀 있다. 고려 예종 11년(1116), 김부식은 사신의 일행이 되어 송나라 조정에 갔다. 일행을 접대하는 송나라 사람 왕보(王黼)가 한 사당에 걸린 선녀의 초상을 보여주는데, 이이는 고려의 신이라 하며, “옛날 어느 제왕가의 딸이 남편 없이 임신해 사람의 의심을 받게 되자, 곧 바다를 건너 진한에 도착해 아들을 낳았는데, 곧 해동의 첫 임금이다.

딸은 지선(地仙)이 되어 오랫동안 선도산에 살았는데 이것이 그 초상화이다.”라고 설명해 주었다.김부식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선도산 신모며 아들이라니,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가. 조공을 드리러 온 나라의 신하 입장에서 그는 더는 입을 열지 못했지만, 불만은 가득한 표정이 역력하다. [삼국사기]의 다음 대목에 김부식은 분명히 ‘그의 아들이 어느 때 왕 노릇 했는지 모르겠다.’고 적었다.
정작 이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사람은 일연이었다. 일연은 [삼국유사]의 '감통' 편을 선도산 신모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신모는 본디 중국 황실의 딸로 이름은 사소(娑蘇)였다. 어려서 신선의 술법을 익혀 동쪽 나라에 와서 살더니,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았다. 아버지인 황제가 솔개의 발에다 편지를 묶어 부치면서, “솔개를 따라가 멈추는 곳에 집을 지어라.”라고 하였다. 사소는 편지를 받고 솔개를 놓아주자, 이 산에 날아와 멈추었다.

그대로 따라와 집을 짓고, 이 땅의 신선이 되었기에 이름을 서연산(西鳶山)이라 했다.일연이 적은 이 기록은 김부식이 송나라 관리에게 듣고 적은 부분보다 훨씬 길어졌다. 그만큼 더 실감 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일연은 그다음 줄에서 아예, “신모가 처음 진한에 왔을 때, 성스러운 아들을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게 하였으니, 혁거세와 알영 두 성인이 그렇게 나왔다.”라고 하여, 혁거세의 출신이 중국에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럼 혁거세의 알을 낳은 이는 중국 황실의 딸 사소인가?

3혁거세의 고기잡이 어미 ‘아진의선’

혁거세의 정체를 알려주는 작은 기록 하나가 더 있다. [삼국유사]의 '탈해왕' 조에서, 탈해를 거두어 기른 여자 아진의선(阿珍義先)에 관한 설명 부분이다.
“마침 포구 가에 아진의선이라는 노파가 살았는데, 혁거세 왕의 고기잡이 어미였다. 노파는 배를 바라보면서, ‘이 바다에 바위가 없었거늘 웬 까닭으로 까치가 모여 우는가?’라고 하며, 날랜 배를 보내 살펴보게 하였다. 까치는 한 배 위에 모여 있었다. 배 안에 궤짝 하나가 실렸는데, 길이가 20자요 너비가 13자였다. 그 배를 끌어다 수풀 한 귀퉁이에 두었지만, 그것이 좋은 징조인지 아닌지를 몰랐다.”
탈해를 태운 배가 아진포에 도착하는 순간을 그린 대목이다. 여기서‘아진의선’은 ‘아진포에 사는 의선’이라고 풀 수 있겠다. 그의 신분을 ‘혁거세 왕의 고기잡이 어미’라고 한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원문에는 ‘고기잡이 어미’를 해척지모(海尺之母)라 쓰고 있다. 해척은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는 사람을 뜻한다. 가척(歌尺)은 노래하는 사람, 무척(舞尺)은 춤추는 사람과 같은 용례가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수척(水尺)은 무당을 뜻한다. 무당은 제정일치시대에 꽤 높은 위치였다. 그런데 신라 귀족의 제4등 파진찬(波珍湌)의 별명이 해간(海干)이었다. 수척과 해간을 묶어보면 해척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사제의 임무를 맡은 고위급의 여성을 해척이라 불렀음직하다.

시대는 아직 제정일치사회였다. 거기서 사제는 그대로 두고, 남성이 왕의 권력을 떼어내 독립하는 일이 벌어지는 때를 우리는 고대왕권사회라 부른다. 신라에서 처음 그 일을 한 사람이 혁거세였다. 그런데 의선이 혁거세의 ‘고기잡이 어미’였다면, 고기잡이가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앞서 설명처럼 ‘고기잡이=사제’라 풀어보면, 의선은 사제로서 혁거세를 든든히 받쳐준 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혁거세는 그가 어디 출신인지를 극도의 비밀에 부쳤다. 알로 태어났다든지, 중국 황실의 공주가 신라로 옮겨와 선도산의 신모가 되어 거기서 태어났다든지, 신화로 도배된 기록이 전면에 나서 있다. 그런데 뜻밖에 탈해의 출신 배경 담에 와서 비밀이 새는 느낌이다. 도배된 신화의 뒤편에, 정작 자신을 키운 이는 시골 바닷가의 무당이었음을 나타내는 ‘해척지모’라는 말이 [삼국유사]에서 일연의 입을 통해 나와 버리고 만 것이다. [삼국사기]만 해도 의선을 ‘해변의 할머니’라고 적었을 뿐, 혁거세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썼었다.
상상이 허락된다면, 아진포는 신라 왕실 초기에 새로운 정치인을 길러내는 기숙학교가 있는 곳이었다. 그 학교의 교장이 바로 아진의선이다. 의선은 혁거세를 길러내 경주로 보냈고, 이어 탈해까지 키워서 다시 경주로 보냈다. 이렇게 보면 신화의 틀은 아주 사라지고, 가장 현실적인 혁거세의 출신이 드러나는 느낌이다.

4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들은 서로 존경하고 겸양하는 나라

혁거세의 탄생이 너무나 극적이기에 우리는 흔히 거기서 그의 이야기를 끝내고 만다. 그러나 그는 신라의 왕이 되어 61년간이나 다스렸다. 그동안어떤 정치를 펼치던 왕이었을까. 다만, 혁거세의 일생을 그린 [삼국사기]의 분량은 원문으로 따져 7쪽에 지나지 않는다. 10년의 일들이 평균 1쪽으로 요약된 꼴이다. 그만큼 이 시기의 사실을 아는 데는 절대적으로 자료가 부족하다. 그나마 일식이니 별자리니 중국의 사료에 의지했을 기사를 제외하고 나면, 혁거세의 치적을 보여주는 기사는 다음과 세 가지뿐이다.
첫째, 혁거세 왕 30년에 낙랑의 침범을 물리침. 낙랑군은 밤에도 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노적가리가 들을 덮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사람들은 서로 훔치지 않으니 도의가 있는 나라.’라 하고 물러났다. 왕으로서 잘 다스린 혁거세의 면모가 엿보인다. 둘째, 혁거세 왕 38년에 호공(瓠公)을 마한에 보냈더니 자기네에게 공물을 바치지 않는다고 화를 낸 일. 호공은 탈해, 김알지의 기사에서도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마한의 왕에게,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서로 존경하고 겸양한다.’며, 그 공을 혁거세 왕 부부에게 돌리고 있다. 역시 잘난 왕의 면모이다. 셋째, 공물을 요구하던 마한 왕이 죽자 어떤 이가 이 기회에 마한을 쳐야 한다고 건의한다. 혁거세 왕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요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하다.”며 사양하였다. 혁거세의 사람됨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동해안의 한 바닷가에서 어진 사제 의선의 지도를 받아 성장한 혁거세는 우리나라 고대왕권국가의 문을 여는 신라를 세웠다. 고구려의 동명왕보다 20년 먼저, 백제의 온조왕보다 40년이 앞선 시점이었다. 그리고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인 서기 3년, 혁거세는 하늘로 올라가고 7일 뒤에 몸만 땅으로 흩어 떨어졌다. 왕후 또한 죽자 사람들이 합하여 장례를 치르려 하였다. 그런데 큰 뱀이 나타나 막는 것이었다. 그래서 몸을 다섯으로 각각 묻고 오릉(五陵)을 만들었다. 지금 경북 경주시 탑동에 있는 그것이다.

 

                                     고대왕권국가 신라를 세운 지혜로운 왕 朴赫居世   2018.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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