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日本 천왕가(天王家)의 고향」대가야(고령-합천) 르포(1)

2019. 1. 17. 16:41여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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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문화의 여명은 가야인이 열었다!

 

日本 천왕가(天王家)의 고향」대가야(고령-합천) 르포(1)

 

글 |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글 | 이태훈 월간조선 사진기자

 

전성기 大加耶의 떼무덤

 

경북 고령군 지산동 주산 능선에는 대가야 왕과 왕족들의 무덤 200여개가 능선을 따라 펼쳐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최근 관광객들이 고분 사이로 난 산책로를 걷고 있다./조선DB

 

 

大加耶(대가야)는 後期(5세기 초엽~6세기 중엽) 가야연맹의 맹주국이었다. 대가야의 성장과 발전을 잘 보여 주는 곳이 경북 高靈郡(고령군) 고령읍 池山洞(지산동) 고분군이다. 지산동 고분군에는 主山(주산·310.3m) 남쪽으로 뻗은 主능선 위, 대가야의 왕도였던 고령읍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우람하게 조성된 대형 봉토분 5基를 비롯해 大小 200여 基가 분포하고 있다.

 

오전 9시, 지산동 소재 대가야박물관 앞 주차장에서 李泰勳 사진기자와 만나 박물관 옆으로 난 좁은 길을 통해 主山에 올랐다. 금세 편평한 구릉에 닿는다. 구릉의 한켠에 웅대한 「대가야왕릉전시관」이 보인다. 우리나라 최초로 확인된 대규모 殉葬(순장) 무덤인 지산동 44호분의 내부를 원래의 모습대로(1:1의 크기) 재현한 것이다. 무덤의 구조와 축조방식, 무덤의 주인공과 순장자들의 매장 모습, 껴묻거리(副葬品)의 종류와 성격 등을 살필 수 있다.

 

 

대가야의 금동관. 지산동 32호에서 출토된 이 금동관은 표면에만 도금이 되어 있다. 형태상으로 나뭇가지 모양(樹枝形), 새 날개 모양(鳥翼形) 장식과는 달리 풀잎 또는 꽃잎 모양(草花形) 장식을 세운 점에서 가야를 대표하는 관으로 평가된다. 높이 19.6cm. 중앙박물관 소장.

 

 

순장이란 한 사람의 무덤 주인공을 위해 살아 있는 사람을 강제로 죽여서 함께 매장하는 장례행위이다. 이는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때의 삶이 그대로 지속된다는 繼世(계세)사상을 따라 행해졌다.

 

순장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예속관계를 보여 주는 것으로 신분 계층이 뚜렷하고, 가부장적인 고대사회에서 성행했다. 先史(선사)시대의 인간은 死後世界(사후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현재의 삶이 끝나면 곧 來世(내세)로 들어간다는 신앙이었다.

 

따라서 사후세계에서도 현재와 똑같은 물질생활을 계속한다고 생각해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가지고 묻히는 형태로 순장이 나타난 것이다. 순장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계세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순장을 큰 저항 없이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그러나 망치 같은 것으로 가격되어 뒤통수가 함몰된 시체도 더러 발견되었다. 그런 모습들은 삶에 대한 애착 때문에 순장을 기피하려다 당한 흔적인 것으로 보인다.

 

국내 최대의 殉葬 무덤 지산동 제44호

 

44호분은 묘역 중앙에 으뜸돌방(主石室)과 딸린돌방(副葬石室) 2개의 대형 돌방을 만들고, 그 주위에 소형의 돌덧널(石槨) 32기를 빙 둘러 배치한 다음 타원형 둘레돌(護石·호석)로 둘러싼 多槨墳(다곽분)이다. 규모는 호석을 기준으로 최대 지름 27m, 높이 3.6m의 대형 봉토분이다.

 

순장자의 모습 등을 확인하기 위해 능묘 중앙부까지 돌출시킨 좁은 통로를 따라 으뜸돌방에 다가갔다. 으뜸돌방 중앙에 누운 주인공의 머리맡과 발치에 각각 1명씩 순장되어 있고, 딸린돌방 2개와 순장 돌덧널 32개에도 각각 1명씩 순장자가 묻혀 있다. 순장자 수가 무려 36명에 이른다.

 

부장품은 대부분 도굴되기는 했지만, 긴 목 항아리(長頸壺), 뚜껑 있는 굽다리접시, 뚜껑접시(蓋杯), 그릇받침(器臺) 등 토기류가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남쪽 딸린돌방에서는 대형 그릇받침 18개가 집중적으로 나왔다.

 

이 밖에 투구를 비롯한 철제 武具類(무구류), 말띠드리개, 금제 귀고리, 管玉(관옥)·유리옥·曲玉(곡옥) 등의 옥류, 청동그릇 등도 출토되었다. 백제 혹은 中國系로 보이는 등잔 1점과 오키나와에서 생산된 夜光(야광) 조개국자 1점 등이 발견되었다. 유물과 문헌기록으로 볼 때 5세기 후반에 조성된 왕의 무덤으로 보인다.

 

 

池山洞 44호분 발굴작업 모습.

 

 

대가야왕릉전시관 뒤로 난 오솔길을 통해 다시 主山으로 올랐다. 금동관이 출토된 32호분에 이어 33~39호분까지 자리잡고 있다. 지산동 44호분은 비교적 넓고 편평하나 主山이 경사져 내리는 끝부분에 걸쳐 있어 더욱 웅장해 보인다.

 

44호분 바로 위쪽에 45호분이 위치하고 있다. 45호분은 남북으로 경사진 묘역의 중앙에 으뜸돌방과 딸린돌방 2개를 나란히 설치하고, 그 주변에 11개의 순장석곽을 원주상으로 배치한 다곽분이다. 11기의 순장곽 외에 主石室에 2인 이상, 副石室에 1인 이상의 순장자가 있었다. 봉토의 규모는 최대 지름 28.2m, 높이 2.8m이다.

 

부장품은 으뜸돌방에서 뚜껑 있는 짧은 목 항아리 등 각종 토기류를 비롯하여 금동제 冠飾(관식)·금제 귀고리·曲玉이 달린 유리구슬 목걸이 등 장신구류와 말안장·재갈·금동은장형 마구류, 은장 환두대도, 鐵矛(철모), 철촉 등과 함께 찰갑편 등이 출토되었다.

 

45호분 위쪽에는 46~49호분, 50호·51호분 등이 열병을 하듯 줄지어 조성되어 있다. 대부분 5~6세기에 만들어진 무덤들이다. 이곳에는 고령읍을 끼고 흐르는 대가천과 안림천이 만나 한 줄기가 되는 會川(회천)이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로 望山(망산)이 오똑 솟아 있다.

 

폭 2m짜리 고분로는 아기자기한 10리 산길이다. 꿀밤나무와 소나무로 어우러진 「主山 삼림욕장」 들머리길 아래로 主山城(주산성)의 흔적이 숨어 있다. 주산성은 대가야의 宮城(궁성) 방어를 위한 산성이었다. 수직으로 쌓은 높이 2m의 석축-이제는 허물어져 지표 위엔 이 부분만 남아 있다.

 

삼림욕장을 지나 下山하면 나지막한 구릉 위에 高靈鄕校(고령향교: 고령읍 연조리 608)가 위치해 있다. 향교 자리는 대가야 시대의 왕궁지였다고 전해 온다. 대가야 멸망 후, 신라·고려 시대엔 불교사원, 조선시대엔 유교 교육기관으로 바뀌어 온 것이다.

 

읍내 한복판으로 내려왔다. 이곳에는 보물 제54호 지산동 幢竿支柱(당간지주)가 보인다. 당간지주는 절의 입구에 세워 在家(재가)신도들에게 불교 관련 행사를 알리는 깃발을 다는 게양대이다. 신라가 대가야의 왕궁터에 절을 세운 이유는 망국의 恨(한)을 안고 살아가던 고령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려 했던 것이라 한다.

 

 

국내 최대 규모의 殉葬墓(순장묘)인 지산동 44호분의 主석실 내부 모습이 대가야박물관 경내에 재현되었다. 主석실의 중앙에 주인공이 누워 있고, 주인공의 머리맡과 발치에 각 1명씩 순장되어 있다.

 

 

대가야 토기의 특징-풍만함 속의 곡선미

 

 

고령군 개진면 낙동강변의 開浦나루. 대가야시대에는 對外교역의 창구로 활용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 초엽에 팔만대장경이 이 포구를 통해 海印寺로 옮겨진 후에는 開經浦라고 불리기도 한다

 

 

가야산과 낙동강 중류 사이에 위치한 고령군은 先史시대 유적 등 많은 문화유산이 전해 오는 유서 깊은 고을이다. 고령읍 지산리 460에 위치한 대가야박물관은, 대가야의 문화와 역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곳이다.

 

필자는 지산동 고분군 답사 하루 전날, 2005년 9월에 개관한 대가야박물관에 들러 학예연구사 鄭東樂 (정동락)·손정미씨에게 고령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설명을 듣고, 대가야박물관을 견학했다.

 

대가야박물관에는 대가야 특유의 챙이 달린 철제 투구 등 무기류도 눈길을 끌었지만, 대가야 토기들이 「艶麗(염려)한 미인」처럼 길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가야 토기의 특징은 부드러운 곡선미와 풍만감이다.

특히, 뚜껑 있는 긴 목 항아리(有蓋長頸壺)는 강렬한 글래머이다. 긴 목은 가운데를 조르는 듯해 그릇의 허리 부분이 잘록하다. 그 안에는 잔잔한 물결 무늬가 새겨져 있다. 뚜껑 위에는 긴장한 乳頭(유두)를 닮은 꼭지가 달려 있다.

 

원통형 그릇받침(圓筒形器臺)은 늘씬하다. 암팡지게 부푼 모습의 굽다리 부분 위에 上下가 늘씬한 원통형 몸체를 세우고, 그 위를 볼록 솟아오르게 만든 다음 에 맨 꼭대기의 그릇받침부는 납작하고 넓게 벌어지게 했다. 몸통과 굽다리 부분에는 삼각형 혹은 사각형 透窓(투창)을 뚫었고, 투창 사이에는 좁은 물결 무늬가 새겨져 있다.

 

「大王」이란 글씨가 새겨진 뚜껑 있는 항아리는 대가야 왕의 位相(위상)을 말해 주는 것이며, 「下部思利利」란 글씨가 새겨진 항아리는 대가야의 행정체계가 정비돼 있었음을 나타내는 물증으로 보인다.

 

 

男根을 닮은 고령군 운수면 신간리 立石.

立石을 중심으로 청동기시대의 자연촌락이 분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가야 토기는 5세기 초반부터 고령 지역 바깥으로 확산돼, 5세기 중엽에는 합천·거창·함양·산청을 거쳐 남원·하동 지역까지 뻗어 나갔다. 이런 대가야 토기의 분포 범위는 대가야의 정치적 발전과 궤를 같이했다.

 

대가야 장신구의 화려하고 실용적인 면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금관과 금동관 및 금귀고리이다. 가야 금관의 특징적인 모습은 꽃과 풀잎 모양이다.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오늘에 전해 준다. 그렇다면 대가야人은 어떻게 살았을까.

 

지산동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금동관 등을 보면 대가야人들은 신라와 다른 의관을 사용했음을 보여 준다. 대가야人은 오곡을 주식으로 하고, 닭 등 가축을 길렀으며, 그물추를 이용해 누치 등 민물고기들을 잡았다. 그리고 남해안 지역으로부터 대구·청어 등 해산물을 수입해 먹었다. 무덤에서는 대가야人들이 먹고 버린 바다 생선의 뼈 등을 담은 토기도 발견되었다.

 

일반민은 땅을 파서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이은 竪穴(수혈: 半地下)가옥에서 살았지만, 지배층은 高床(고상)가옥에서 살았다. 무덤에서 발굴된 집 모양 토기를 통해 대가야 당시의 가옥 형태를 엿볼 수 있다.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고령 지역.

 

 

대가야의 宮城을 방어하는 主山城의 석축.

 

 

지산동 32SE-3호 내에서 음식물이 담긴 토기가 발견되었다.

 

 

舊石器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땅

 

 

고령군 다산면 곽촌리 낙동강변에서 발견된 舊石器시대의 유물 多面石器. 길이 9.0cm.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舊石器(구석기)시대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50만~60만 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령 지역에서는 다산면 곽촌리·상곡동 일대 낙동강변에서 약 4만~13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면석기(多面石器), 망치돌, 떼낸석기 등 10여 점의 구석기가 채집되었다.

 

그리고 고령읍 저전리, 개진면 良田里·신안리·반운리, 운수면 봉평리·운산리, 성산면 박곡리·어곡리, 쌍림면 산주리·매촌리, 우곡면 사촌리 등에 분포하는 고인돌(支石墓)이나 운수면 신간리에 남아 있는 선돌(立石) 등을 통해 청동기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며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고령은 「岩刻畵(암각화)의 고장」이다. 암각화란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면에 그림이나 도형을 그리거나 새겨 놓은 것으로, 당시의 생활상과 신앙 등을 알 수 있는 유적이다.

 

고령에는 양전리(고령읍)·안화리(쌍림면) 등지에 청동기시대의 암각화가 분포되어 있다. 양전리 암각화는 고령읍 회천변 알터마을 입구의 나지막한 바위면에 새겨진 것으로 동심원과 여러 개의 가면 모양의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져 있다. 동심원과 기하학적 무늬의 의미는 뒤에서 상론할 것이다. 암각화가 위치한 곳은 솟대(蘇塗)와 같은 三韓시대의 聖域(성역)으로 首長의 주재 아래 농경사회의 풍요를 기원하는 祭儀(제의)와 관련이 있는 장소로 생각된다.

 

 

대가야의 前身-半路國시대

 

 

양전동 암각화

 

 

기원 1세기에서 3세기 무렵까지의 한반도 남부는 삼한시대였다. 삼한시대는 馬韓(마한)·辰韓(진한)·弁韓(변한)이라는 소국연맹체들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고령 지방은 변한에 속했으며, 그 이름은 半路國(반로국)이었다. 그러면 반로국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되었던 것일까.

 

인간의 역사에서 최대의 혁명적 진보는 농경의 시작이었다. 한반도에는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벼농사가 영위되었다. 농사가 시작되면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정착생활을 하게 되고, 문화를 축적하게 되었으며, 잉여 생산물의 소유 여부에 따라 계급이 발생하는 등의 일대 변화를 불러왔다.

 

이후,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만주로부터 철기가 전해지면서 한반도 내에서도 정치세력이 형성되었다. 그것이 삼한시대였다.

 

반로국은 경상남·북도 일대에 흩어져 존재하던 소국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경제적 중심지인 國邑(국읍)과 이에 소속된 몇 개의 邑落(읍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읍에는 소국의 최고 지도자인 主帥(주수), 읍락에는 차상급 지도자인 渠帥(거수)가 백성들을 다스렸다. 반로국 당시 고령 지역의 모습을 보여 주는 유물들은 개진면 반운리 일대에서 발견되고 있다.

 

대가야가 자리 잡은 고령 지역은 최상의 농업 입지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星州郡(성주군)에서 흘러오는 대가천은 가야산에서 흘러오는 안림천과 고령읍에서 합류하여 회천이 되고, 회천은 계속 남류하다가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대가천과 안림천은 고령읍과 그 부근에 비교적 넓은 골짜기와 충적지를 형성해 놓았다. 李重煥(이중환)은 그가 쓴 「擇里志(택리지)」에서 「고령은 衣食의 고향」이라고 표현했다.

 

 

대가야박물관 앞에 세워져 있는 양전리 암각화 모형

 

 

『골 바깥 가야천 주변은 논이 아주 기름져서 종자 한 말을 뿌리면 소출이 120~130말이나 되며, 적더라도 80말에 이른다. 물이 넉넉해 가뭄을 모르고 밭에는 목화가 잘 되어 이곳을 衣食의 고향이라 일컫는다』

 

가야천과 안림천이 합쳐서 이뤄진 회천은 낙동강 합류지점까지 약 15km에 걸쳐 좁은 골짜기 사이로 흐른다. 따라서 고령은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이고, 낙동강과도 좁은 골짜기를 통해 이어지기 때문에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고령 지역의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 것이 4세기 무렵에 이루어졌던 冶爐(야로: 경남 합천군 야로면 일대) 지역의 병합이었다. 冶爐라는 지명 자체가 「대장장이」와 「가마」를 뜻하는 것에도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유명한 철의 산지이다.

 

「世宗實錄(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야로에서 많은 철이 생산되어 1년에 精鐵(정철) 9500근을 나라에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야로면 야로2리 및 가야면 성기리 야동마을 뒤편에는 아직도 야철 유적이 남아 있다. 야로면과 인접한 고령군 쌍림면 용리 일대에도 야철 유적이 확인되었다.

 

반로국은 야로 지역 등의 철산을 확보해 철제 무기를 만들면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고, 청동기 농기구와는 한 차원 높은 철제 농기구를 만들면서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성장을 발판으로 반로국은 4세기에 들어서면서 加耶諸國의 맹주국인 대가야로 발전했다.

 

 

고령읍 연조리 대가야 왕궁 터에 세워진 고령 향교.

 

 

自尊의 대가야 建國신화

 

 

보물 제54호. 지산동 幢竿支柱(당간지주). 대가야 멸망 후인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다.

 

 

가야사회에는 두 계통의 건국신화가 병존하고 있었다.

하나는 「三國遺事(삼국유사)」 가락국記에 실려 있는 首露王(수로왕)의 天降(천강)신화이다.

다른 하나는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대가야의 惱窒朱日(뇌질주일)을 주인공으로 하는 건국신화이다.

 

대가야의 건국신화는 신라 말의 大유학자 崔致遠(최치원)이 지은 利貞(이정)이란 승려의 전기인 「釋利貞傳(석이정전)」에 기록된 것을 위의 조선시대의 지리지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가야산의 산신 正見母主(정견모주)가 天神인 夷毗訶(이비가)와 感應(감응)하여 대가야 왕이 되는 惱窒朱日과 금관국왕이 되는 惱窒靑裔(뇌질청예)를 낳았다. 뇌질주일은 대가야의 시조 伊珍阿?王(이진아시왕)이 되었으며,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

 

 

이와 같은 대가야 건국신화의 체계는 양전리 암각화에 기반을 둔 天神族(천신족)과 가야산을 근거지로 하는 地神族(지신족)의 결합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이는 대가야 王系가 절대적 신성성을 확보하고, 나아가 가락국 시조 수로왕을 이진아시왕의 동생으로 만들어 血緣化(혈연화)함으로써 대가야의 우위를 과시했으며, 언젠가는 가야 전체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대가야의 건국신화는 금관가야의 건국신화가 난생신화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과는 달리 天神과 山神의 결합에 의해 시조왕이 탄생하고 있다. 특히, 대가야 건국신화에선 가야산신인 正見母主가 주체가 되어 있는 점이 이색적이다. 이와 관련해 대구한의대 김세기 교수는 「대가야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것은 대가야가 流移民(유이민) 세력에 의해 성립된 국가가 아니라 이 지역에서 청동기시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토착세력을 중심으로 발전한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신화는 邑落(읍락)국가 반로국이 처음 건국되는 양전리·반운리 지역의 암각화에서 시작된 것이다』

 

회천변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암각화는 同心圓(동심원)과 얼굴 모양의 기하학적 무늬로 구성되어 있음은 앞에서 썼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다시 김세기 교수의 저서 「대가야연구」의 인용이다.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여 天神을 의미하고, 얼굴 모양은 人面·假面 혹은 神面으로 보아 地神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그런데 암각화 내용에 동심원은 4개인 데 비해 얼굴 모양은 17개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암각화는 천신과 지신의 결합에 의한 탄생의 의미를 가지고 만들어졌으며, 지신이 천신보다 더 강조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대가야와 금관가야의 시조왕이 천신의 아들이 아니라 正見母主의 아들로 표현된 것이다』

 

 

 

2005년 9월에 개관한 대가야박물관.

 

 

 

/ 조선PUB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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