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화공(火攻).희대의 도굴꾼 조조[문화심리학으로 풀어보는 삼국지]

2019. 1. 17. 16:49잡주머니

.

 

 

 

[문화심리학으로 풀어보는 삼국지]

적벽대전에서 백만대군을 삼킨 화마

 

불은 좋은 종이자 나쁜 주인…지혜의 도구도 징벌의 불도 될 수 있어

 

 

 

 

 

인간의 타락한 모습이 영 마뜩찮았던 제우스는 사람들이 불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빼앗아 버렸다. 제우스와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던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세상에서 불을 훔쳐 인간 세상에 가져다준다.

분노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코카서스산 정상의 바위에 쇠사슬로 묶어 놓고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징벌을 내린다.

 

정도전은 그의 저서 ‘삼봉집(三峰集)’에서 난방, 음식 조리, 제련 등 불의 효용을 밝히면서 이렇게 말한다.

“불의 생김이 신묘하기가 저와 같고 불의 용도의 유익함이 이와 같은데, 그대들은 다 중하게 여기지 않는구나!”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불이 ‘인간과 신을 구별해 주는 지혜의 상징’이었다면 삼봉이 보는 불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주는 문명의 전제 조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은 문명의 전제 조건

 

복잡다단한 인간 세상에서 불은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띤 채 여러 방면에 이용됐다. 불은 삼봉이 말한 것처럼 일상생활의 필수품이었다. 예로부터 불은 생명의 씨앗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연금술에서는 세상의 사물이 움직이는 중심에 불이 가장 핵심적인 작용을 한다고 봤다.

 

기독교에서 불은 정화(淨化)의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고 했다. 징벌의 의미도 있다. 타락한 소돔을 징벌할 때 야훼 하나님은 유황불을 썼다. 불은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지도자 모세에게 야훼 하나님은 시내산 정상의 불 속에서 나타나 계시한다.

 

백년전쟁을 다룬 소설 ‘삼국지’에서 불은 대부분이 화공(火攻)이라는 주요 전투 방법의 하나로 등장한다. 물론 전투와 무관하게 다뤄진 예외적인 경우가 몇 개 있기는 하다. 그중 하나가 동탁의 장안 천도와 관련된 것이다. 반(反)동탁연합군의 기세에 놀란 동탁은 낙양을 버리고 장안으로 수도를 이전하기로 한다.

“낙양은 이미 기운이 다했어. 황제를 모시고 장안으로 가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천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황릉을 도굴해 금은보화를 챙기고 귀족과 부호들의 재산을 약탈했다. 낙양을 떠나는 날 동탁은 궁궐과 민가에 불을 질렀다. 고도 낙양은 하룻밤 만에 초토가 되고 말았다.

 

지난번에 소개한 조조의 ‘분소밀신(焚燒密信)’ 사건도 있다. 관도전투에서 원소의 군대를 궤멸시킨 조조가 원소의 본영을 점령했을 때의 일이다. 조조 진영의 대신들이 원소와 주고받은 밀서가 대량으로 발견됐다. 조조는 “스파이를 색출해 처단하자”는 제안을 뿌리쳤다.

“원소가 강할 때는 나도 두려웠다. 하물며 그들이야 어떠했겠느냐? 밀서를 모두 불에 태워 없애라. 과거의 죄는 묻지 않겠다!”

 

‘삼국지’ 후반부에 쇠약한 몸을 이끌고 북벌에 나선 제갈공명이 자신의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천지신명에 치성을 드리는 장면이 나온다. 공명은 진지 한쪽에 장막을 치고 7일 기도에 들어간다.

“천지신명이시여! 제 나이 막 50을 넘었습니다. 아직 대업을 이루지 못하였사옵니다. 이 가운데 등불이 제 생명의 등불이오니 7일 동안만 꺼지지 않으면 제가 12년을 더 사는 줄 알겠습니다. 굽어 살펴주소서!”

그는 장막 속으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다.

 

‘인명은 재천(人命在天)’이라고 했던가. 하늘은 제갈량에게 생명 연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엿새째 되는 날 “조조 군대의 침략을 승상에게 급히 보고하겠다”면서 초병을 밀치고 장막으로 들어서던 위연이 그만 제갈량의 생명등을 걷어차 불을 꺼지게 만든 것이다.

 

인명재천의 교훈을 되새기게 하는 일은 또 있었다. 제갈량이 기산에 진을 치고 위나라 승상 사마의와 대치하고 있었다. 공명은 호로곡이라는 계곡에 가짜 식량 창고를 만들어 놓고 사마의를 호로곡에 유인해 불태워 죽일 작정이었다. 공명의 계책은 성공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호로곡으로 들어온 사마의 군대를 촉나라 군대가 화공으로 급습했다.

 

사마의는 탄식했다. “내가 결국 이곳에서 죽는구나!”

공명도 미소를 지었다. “사마의, 자네도 이제는 별 수 없구먼. 허허.”

그러나 갑자기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졌다. 노회한 사마의는 이 틈을 타서 호로곡을 잽싸게 빠져나갔다. 공명이 탄식했다.

 

“일을 계획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이루는 것은 하늘이로구나.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야

(謀事在人, 成事在天, 不可强也)!”

 

다루는 방법에 따라 결과는 천지 차이

 

‘삼국지’ 초반부에 황보숭·주전과 같은 명장들이 관군을 지휘하면서 화공을 앞세워 황건적의 기선을 제압한 적도 있다. 황건적의 지휘자인 장보·장량 형제의 무리는 대패하고 그들의 수령이자 장형인 장각에게로 도망간다.

 

전국옥쇄를 원술에게 맡기고 군사 3000명, 말 500필을 빌린 손책이 강동 지역의 맹장 태사자를 사로잡아 자신의 부하로 만들 때 사용한 병법도 화공법이었다. 조조가 하후돈에게 10만 대군을 주어 신야성에 있는 유비의 군대를 치게 했을 때 고작 6000명의 군사로 하후돈 군대를 몰살시킨 제갈량의 전법도 화공법이었다.

 

하지만 화공법을 이용한 ‘삼국지’ 최고의 전투는 역시 적벽대전(208년)일 것이다. 조조가 100만 대군이 타고 온 수백 척의 배를 쇠사슬로 묶었다. 길이가 장장 300리나 됐다. 밤중에는 밝힌 불로 그야말로 불야성(不夜城)을 이뤘다. 고육계·반간계·연환계 등 각종 전략 전술이 총동원된 이 거대한 전투에서 조조의 백만 대군은 불길에 휩싸여 연기로 사라지고 잿더미만 남았다.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다. 불타는 적벽에서 통한의 패배를 기록한 조조. 회심의 미소를 날렸던 유비. 그러나 불과 10여 년 후에 있을 이릉전투(222년)에서 운명의 여신은 다른 선택을 한다. 적벽대전에서와 마찬가지로 화공법을 앞세운 조조 군대가 유비의 75만 군대를 궤멸시킨다. 진법도 제대로 모르는 유비가 제갈량의 조언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숲속에 장사진을 쳤다가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자초한 것이다.

 

전투 중간에 상황을 보고받은 제갈량이 경악했다.

“대체 어떤 놈이 이 따위 진법을 폐하께 올렸단 말이냐? 내 그놈의 목을 베고야 말겠다!”

 “폐하께서 직접 결정하신 것이옵니다.”

때는 이미 늦었다. 공명은 탄식했다. “한나라의 운수가 다했구나!”

 

 

사족.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불은 좋은 종(從)이지만 나쁜 주인이기도 하다(Fire is a good servant, but a bad master).”

불은 우리 생활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지혜롭게 잘 다루면 한없이 좋은 도구가 되지만 자칫 잘못 다루면 무능한 장수가 군대를 자멸시키듯이 위험해진다.

 

사람들이 불의 중요성을 잘 모르고 함부로 다룬다고 나무라던 정도전의 안타까운 마음이 이해가 간다. 그것은 실제의 불에도 해당되고 우리 마음속 분노의 불, 원한의 불에도 해당된다. 불을 잘 다스려 불같이 내려오는 성령의 세례를 받을 것인지, 징벌의 유황불 세례를 받을 것인지는 우리 각자의 몫이다. 이 말은 신학적인 메시지와 심리학적인 메시지를 같이 담고 있다.

 

 

 

 

 

 

[문화심리학으로 풀어보는 삼국지]

도굴을 피하지 못한 영웅들의 무덤

 

희대의 도굴꾼이었던 조조, 자기 무덤엔 “금은보화 넣지 마라” 유언

 

 

 

 

 

“낙양성 십리 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 민요 ‘성주풀이’는 이렇게 시작된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

황제고 노비고 예외는 없다.

낙양의 북망산 공동묘지 앞에서 영웅호걸들이 생전에 누린 영화가 얼마나 헛되고 헛된지를 생각하는 노래다.

 

낙양(洛陽)은 중국 하남성에 있다. 동한 시대의 수도였다. 황건적의 공격으로 피해가 많았던 낙양은 동한 말기 동탁이 반(反)동탁연합군에 쫓겨 장안으로 천도하면서 폐허가 됐다. 동탁은 낙양 전체에 불을 지르고 궁궐과 민가를 약탈하고 무덤을 파헤쳐 보물을 챙겨 달아났다. 삼국을 통일하고 황제가 된 조조의 아들 조비(위문제)가 위나라 수도를 낙양으로 정하면서 낙양은 활기를 되찾았다.

 

장비의 무덤이 사천성에 있는 반면 관우의 무덤은 낙양에 있다. 장비의 부하인 범강과 장달은 주군인 장비를 주살하고 그의 수급을 들고 오나라로 항복하러 갔다. 사천성 운양현을 지나던 도중 정치적 상황이 바뀐 것을 알고 수급을 강물에 던져버렸다. 그 바람에 장비의 무덤이 운양현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관우는 오나라 손권의 부하인 여몽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한다. 손권은 후환이 두려워 관우의 수급을 조조에게 보낸다. 조조 역시 후환 때문에 나무로 몸통을 만들어 관우의 수급과 함께 후하게 장례를 치러 준다. 관우의 시신은 낙양에 안치됐는데 그의 무덤을 관림(關林)이라고 부른다.

 

호화로움의 극치 보여준 황제의 무덤

 

원래 땅 위에 솟아오른 봉토 부분을 능(陵)이라고 부르고 땅 밑의 건축을 묘(墓)라고 하는데, 요즘은 제왕의 무덤과 그 부속 건물을 합쳐 능묘(陵墓)라고 통칭한다.

일반인의 묘를 가리키는 분(墳)과 달리 황제의 묘는 능(陵), 왕과 제후의 묘는 총(塚), 성인의 묘는 림(林)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서를 막론하고 무덤은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통로를 상징한다. 그래서 망자가 저승으로 가는 먼 여행길에 필요한 동반자와 물건을 챙겨 주는 풍습이 생겼다. 무덤에 부장품을 넣는 풍습과 생사람을 잡아 같이 묻는 순장(殉葬)의 풍습이 여기에서 생겨났다.

 

무덤은 종교적인 이유로 만들어졌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파괴됐다. 제왕의 무덤에 넣어 주는 부장품은 호화로움의 극치를 달렸다. 경제적인 가치가 너무 컸다. 망자의 영원한 안식이라는 무덤 본연의 종교적인 이유가 사라지고 무덤은 태생부터 수난을 겪었다. 춘추전국시대 이전부터 도굴에 대한 두려움은 산 자와 죽은 자를 다 괴롭혔다.

 

위나라 초대 황제 위문제는 즉위 3년 차에 자신의 능묘를 조성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고금에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고 파헤쳐지지 않은 무덤이 없다.

내가 죽고 나면 내 무덤 안에는 값비싼 금은보화를 절대로 넣지 마라. 무덤이 파헤쳐지고 재물이 털리고 해골이 불태워진다면 이 어찌 두 번 죽는 고통이 아니겠는가?”

 

도굴에 대한 두려움은 제갈량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제갈량은 선제 유비와 함께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후주 유선에게 자신의 장례에 대한 아주 독특한 부탁을 한다.

 

“폐하! 제가 죽고 나면 4명의 병사가 제 관을 메고 남쪽으로 계속 가다가 관의 받침목이 떨어지고 밧줄이 문드러질 때 바로 그 자리에 저를 묻게 해 주소서!”

 

아버지 유비와 함께 오늘날의 촉한(蜀漢)이 있게 한 일등 공신 제갈량의 마지막 유언을 유선이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관을 멘 4명의 병사 때문에 사달이 났다. 시킨 대로 꼬박 하루를 주야장천 걸었지만 관의 받침목과 밧줄은 멀쩡했다. 탈진한 병사들은 잔꾀를 냈다. 대충 아무 데나 묻고 “승상의 유언대로 하였사옵니다”라고 황제에게 보고했다.

 

하루 만에 받침목과 밧줄이 닳고 떨어질 리가 없다고 생각한 유선이 병사들을 잡아 족쳤다.

“네놈들이 감히 황제를 속이려 들다니, 여봐라! 저놈들을 당장 끌어내 목을 베어라!”

이제 세상에 제갈량의 무덤이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옛날에도 죽은 자의 무덤을 파헤치는 일은 비윤리적이었다. 그래서 도굴은 라이벌을 중상모략하는 좋은 소재였다. 항우와 패권을 다투던 유방은 이런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항우가 진시황릉으로 쳐들어가 무덤을 지키던 병사를 죽이고 무덤을 파헤쳐 온갖 진귀한 부장품을 훔쳐갔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항우가 자신의 할아버지가 진나라 군대의 손에 죽은 것에 앙심을 품고 진시황 사후에 함양으로 쳐들어가 수많은 진나라 사람들을 도륙하고 아방궁을 약탈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도굴한 적은 없었다.

 

피라미드·마추픽추도 도굴엔 예외 없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삼국지’ 시대 최고의 도굴꾼은 역시 조조였다. 조조는 도굴 현장에서 모든 상황을 보고받고 하나하나 지시했다. 희대의 도굴꾼답게 조조는 대담무쌍하고 철두철미했다. 아예 도굴을 전문으로 하는 조직까지 만들었다. 발구중랑장(發丘中郞將)은 도굴 사령관이란 뜻이고 모금교위(摸金校尉)는 도굴 대장이라는 뜻이다.

 

조조가 이렇게 도굴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군자금 때문이다. 자신의 백성을 굶기는 군주가 죽임을 당해 마땅하듯이 병사들을 굶기는 장수가 어찌 군기를 잡고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일례로 조조는 서한 양효왕의 무덤을 도굴하고 취득한 재물로 자신의 휘하 군대를 3년간이나 먹여 살렸다고 한다. 난세의 간웅 조조가 도굴에 탐닉할 이유가 충분했던 셈이다.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했던가. 도굴꾼의 심리를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던 조조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장례와 관련해 이렇게 유언했다.

“아직 천하가 안정되지 않은 난세다. 장례를 오래 끌지 말고 즉시 일상으로 복귀하라. 입관할 때 내게 평상복을 입혀라. 금은보화도 넣지 마라!”

조조는 심지어 가짜 무덤(疑塚) 72기를 만들어 자신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조조의 무덤도, 오나라 손권의 무덤도, 손권의 형 손책의 무덤도, 제갈량의 형 제갈근의 무덤 역시 도굴을 피하지 못했다. 특히 조조처럼 도굴에 일가견이 있던 손권의 무덤은 하마터면 사라질 뻔했다.

명태조 주원장이 자신의 묘를 손권의 묏자리에 잡은 것이다. 마지막에 주원장이 “손권이 내 무덤을 지키게 하라. 하하하”라고 한 덕택에 가까스로 도굴은 면했다. 천하를 두고 쟁패하던 오나라 황제 손권이 죽어 주원장의 능참봉이 됐으니 이 무슨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사족.

누군가의 말처럼 “인간은 무덤을 만들기도 하고 동시에 무덤을 파헤치기도 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이집트 피라미드도, 마추픽추의 무덤도, 경주의 왕릉도 예외는 없다.

석회로 반죽한 76cm의 콘크리트로 만들어 거의 도굴을 당하지 않았다는 조선 왕릉의 자부심도 달리 보면 또 허망할 뿐이다. 무덤도 만들지 않고 그래서 도굴의 염려도 없이 ‘모든 걸 내려놓고’ 훨훨 떠나가는 수목장(樹木葬)의 마인드가 새삼스레 더욱 돋보이는 시절이다. 낙양의 북망산 가는 길은 대체 여기서 얼마나 멀고 험한 길일까.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

 

/ 한경매거진

 

 

 

............

 

 

 

 

 

도굴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

 

풍수지리에 통달한 사람이 도굴을 한다.

멀리서 봐도 "저기가 명당이니 뭐가 있겠다" 하고 쇠막대기(탐침봉) 하나 들고 가면 거의가 틀림없다고 한다.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