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宋代) 소식(蘇軾)의 시와 선 / 소동파 시 모음

2019. 1. 17. 17:00



소동파 시 모음| 漢詩探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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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의 시 세계| 불교관련 글


유유|조회 168|추천 0| 2014.11.30. 18:37


송대(宋代) 소식(蘇軾)의 시와 선 

박영환 


1. 소식(蘇軾)과 선종(禪宗)

   육조혜능(六祖慧能) 스님이 중국화된 선종을 지향한 이후, 선종은 당대(唐代)에 이르러 오가(五家)의 선으로 크게 꽃을 피운다. 이러한 발전은 송대(宋代)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이어져 임제종(臨濟宗) 계열 황룡파(黃龍派)양기파(楊岐派)로 나누어져 소위 말하는 ‘오가칠종(五家七宗)’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불립문자(不立文字)로 대표되던 당대의 선 송대에 이르러서는 불리문자(不離文字)의 선으로 변천되어 갔다.

송대에 이르러 대량의 선어록(禪語錄)《오등회원(五燈會元),《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고승전(高僧傳)》 등의 출현이 바로 그것을 대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이, 차고 따뜻함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如人飮水, 冷溫自知)”는 것에서처럼 어느 사물에도 집착하지 않고 스스로의 깨우침만을 중시하던 초기의 선종은 깨우침의 경지로 인도할 수 있는 방편적인 도구로써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는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시에 크게 흥성한 임제와 운문(雲門) 양파 송고(頌古)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문자선(文字禪)’을 크게 흥성시켰기 때문에 선학은 새로운 발전단계로 접어들었다.

다시 말해서 선사들의 깨우침에 이른 오도송(悟道頌)이나, 공안(公案) 등을 후인들이 화두(話頭)로 삼아 깨우침에 이르는 하나의 수단으로 삼았기에 이러한 어록이 흥성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선종의 발전은 사대부와 문인들의 사유의식에도 영향을 미쳐 그들의 창작품과 문학이론 등에는 선종의 흔적이 매우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예를 들면 당대에는 시불(詩佛)이라 칭해지는 왕유(王維)를 필두로 유종원(柳宗元) 유우석(劉禹錫) 맹호연(孟浩然) 백거이(白居易) 등 적지 않은 禪詩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숙윤(戴叔倫)《송도건유방(送道虔游方)》에서 “시의 사유는 선의 관문에 들어가는 것이다,”1)


   서인(徐寅)《아도기요(雅道機要)》에서 “시라는 것은 유가(儒家) 중의 선이요, 한마디로 도와 통하는 것으로 만고(萬古)에 모두 아는 것이다,”2)

   제기(齊己)《기정곡랑중(寄鄭谷郞中)》에서 “시심은 어떻게 전하는가. 증명함이 스스로 선과 동일하다.”3)라고 논하고 있음을 볼 때 당시의 문인들이 선과 시의 관계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기에 시론의 형성에도 선종의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 “詩思入禪關.”(《全唐詩》 卷273).

 2) “詩者, 儒中之禪也. 一言契道, 萬古咸知.”(《吟?雜錄》 卷16) 

3) “詩心何以傳? 所證自同禪.”(《全唐詩》 卷840).


寄郑谷郎中_百度汉语

作者:齐己

诗心何以传所证自同禅
觅句如探虎,逢知似得仙。
神清太古在,字好雅风全。
曾沐星郎许,终惭是斐然。



   이러한 관점이 송대(宋代)까지 계승되어 선학(禪學)은 송대의 시와 시화(詩話) 이론에 더욱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쳐 많은 이선유시(以禪喩詩)의 내용을 담은 시화(詩話)들이 대량으로 탄생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주장으로는 오가(吳可)“시를 배우는 것은 혼연히 참선을 배우는 것과 같다(學詩渾似學參禪)”고 주장한 《시인옥설(詩人玉屑)》을 필두로 범온(范溫)《시안(詩眼)》엽몽득(葉夢得)《석림시화(石林詩話)》, 엄우(嚴羽)《창랑시화(滄浪詩話)》 등이 대표적인 이선유시(以禪喩詩)의 저작들이다.


   그러나 송대 시가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실질적으로 ‘이선유시’와 ‘이선입시(以禪入詩)’의 기풍을 개창하고 발전시킨 사람이 바로 소식이다.

그는 “오랜만에 좋은 시집 빌려 밤을 지새운다. 좋은 구절 만나는 곳이 언제나 참선이네(暫借好詩消永夜, 每至佳處輒參禪)”4),


“고요하기에 온 세상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공허하기에 온 우주를 용납할 수 있다네.

시법과 불법이 서로 방해되지 않으니, 이 말을 마땅히 다시 물어 보리라

(靜故了群動, 空故納萬境. 詩法不相妨, 此語當更請)”(〈送參寥師〉),


“나의 마음이 공허하고 사물이 없으니, 삼라만상이 스스로 왕래한다네

(我心空無物, 萬象自往還.)”(〈書王定國所藏王晉卿畵著色山〉 其一),


“도인의 마음은 마치 물과 같아, 아름다운 꽃을 비춤에 걸림이 없네.”5)


등등의 선의 깨달음에 이르는 사유방식을 시의 창작론에 대비시키는 이선유시(以禪喩詩)의 창작론과 풍격론의 주장 후대 시의 창작이나 시론에 큰 영향을 미쳐 중국의 문학이론형성과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고 있다.6)


4) 〈夜直玉堂李之儀端叔詩百餘首讀至夜半書其後〉,《蘇軾詩集》 卷30, 臺灣學海出版社. 

5) 〈臥病彌月聞垂雲花開順 黎以詩見招次韻答之〉: “道人心似水, 不碍照花姸.”(《蘇軾詩集》 卷32). 

6) 拙著, 《蘇軾詩集》 卷10, 〈九日, 湖上尋周李二君, 不見, 君亦見尋于湖上, 以詩見寄, 明日乃次其韻〉.


夜直玉堂携李之仪端叔诗百余首读至夜半书其

【作者】苏轼 【朝代】

玉堂清冷不成眠,伴直难呼孟浩然。
暂借好诗消永夜,每逢佳处辄参禅。
愁侵砚滴初含冻,喜入灯花欲斗妍。
寄语君家小儿子,他时此句一时编

https://hanyu.baidu.com/shici/...     - 百度快照


〈소식의 문학이론과 선종〉, 《中國文學》 제36집(2001년 11월).


   그리고 스스로를 동파거사(東坡居士)라고 칭하고, 20세부터 선승과의 교류를 시작하여 일생 동안 백여 명 가까운 고승대덕들과 깊은 교류를 하였다. 그러므로 《오등회원(五燈會元)》에는 소식 동림상총(東林常總) 선사의 법사(法嗣)로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수많은 고승들과 교유를 통하여 심후한 우정을 쌓으면서 또한 그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아 농후한 선기(禪氣)를 양성하였기에 소식의 시문(詩文) 도처에는 선종의 사상을 담은 작품이나 기록들을 많이 남기고 있다.


   이외에 결코 순탄하다고 할 수 없는 벼슬길에 있어서의 좌절과 인생에 있어서의 고행이 그로 하여금 더욱더 불교 선종에 심취하게 하여 그는 전형적인 외유내불(外儒內佛)을 띠고 있는 중국문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랬기에 소식은 불교경전과 문헌, 그리고 선종어록에 대해서도 상당히 익숙하였는데, 특히 그의 많은 선시 속에는 《반야경》 《유마힐경》 《능가경》 《원각경》 등의 선종의 경전을 원용하고 있음을 보아 충분히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송대를 대표하는 시인인 소식의 선시에 나타난 주제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소식 선시의 특징과 내용을 파악하는 동시에 선종 사상이 소식의 인생관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고, 그로 인한 소식의 생활방식과 사유방식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더 나아가서는 선종사상이 기타 중국 문인사대부들에게 미친 영향을 유추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2. 소식 선시의 특징과 주제


1) 생활 속의 오성(悟性)의 발로

   소식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자주 선종의 사유방식을 운용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시는 매우 풍부하고 심오한 선종의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평소에 선종사상에 대해 대단한 지식과 식견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고로 유희재(劉熙載) “동파의 시는 공(空)에서 유(有)를 잘 만들고, 또한 무(無)에서 유(有)를 잘 만들어내는데 그 주된 이유는 실질적으로 선의 깨달음에서 온 것이다.”7)라고 말하고 있다.


   그 자신 스스로도 “해가 감에 따라 점점 은거하는 의미를 알아, 생각한 것을 침대를 사이에 두고 고승(淸順)과 논한다네(年來漸識幽居味, 思與高人對榻論).8)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 속에는 이러한 보편적인 생활 속의 깨우침을 나타내는 많은 선시가 있다.

예를 들어〈금시(琴詩)〉를 살펴보자.


7)  《藝槪》 卷2, 〈詩槪〉, 臺灣廣文書局, 10쪽. “東坡詩善于空諸所有, 又善于無中生有, 機括實自禪悟中來.” 

8)《蘇軾詩集》 卷8, 〈是日宿水陸寺, 寄北山淸順僧〉 其一.


若言琴上有琴聲, 만약 거문고 소리가 거문고 위에서 난다면,
放在匣中何不鳴. 어찌 그대로 두면 속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가?
若言聲在指頭上, 만약 거문고 소리가 손가락 위에서 난다면,
何不于君指上聽. 어찌하여 그대는 손가락 위에서 듣지 않는가?


   이 시는 마치 선사의 게송과 비슷하다.

거문고와 퉁기는 손가락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소리를 울리지 못한다.

《능엄경》에 보면 “예를 들어 거문고와 비파는 비록 아름다운 소리를 가지고 있지만, 만약 오묘한 손가락이 없다면, 결국에는 소리를 낼 수 없다. 당신과 중생들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譬如琴瑟琵琶, 雖有妙音, 若無妙指, 終不能發. 汝與衆生亦復如是.)”라고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시인이 《능엄경》을 인용하여 주관과 객관적인 조건이 서로 교묘하게 잘 결합하여야 비로소 좋은 효과를 이루어 낼 수 있다는 보편적인 철리를 매우 생동감 있게 설명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의 생(生)과 멸(滅)도 이것과 같은 도리임을 알 수 있다.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소식 〈제서림벽(題西林壁)〉도 역시 자연 사물에 대한 깨달음을 통하여 선종의 심오한 이치를 나타내고 있다.


橫看成嶺側成峰, 가로로 보면 고개 옆에서 보면 봉우리,
遠近高低各不同. 원근고저의 보는 각도에 따라 각각 다르게 보이네.
不識廬山眞面目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는 까닭은 
只緣身在此山中. 단지 이 몸이 이 산 속에 있기 때문이네.


   이 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유명한 작품이다.

이전의 많은 시인들은 이 여산을 노래하면서 대부분 웅장하거나 수려한 여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했다.

그러나 소식의 이 시는 여산의 실질적인 풍광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산을 유람하면서 느낀 시인의 정감을 의론으로 표시하고 있다. 무명(無明)을 제거하고, 주관과 객관의 대립성을 없애야 비로소 우주인생의 궁극적인 철리를 명백히 깨달을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여산연우(廬山煙雨)〉를 살펴보자.


廬山煙雨浙江潮, 여산의 안개와 비, 전당강(錢塘江)의 조류,
未到千般恨不消. 이르지 않으면 원망이 사라지지 않는다네.
到得還來無別事, 도에 이르러 되돌아오니 차별이 없어,
廬山煙雨浙江潮. 여산의 안개와 비, 전당강의 조류.


   이 시는 불교와 선종의 많은 종파에서 인용하는 선리시(禪理詩)깨우침에 이른 경지와 이르지 못한 경지를 매우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소식은 여기에서 무궁무진한 변화를 이루는 여산의 경치와 절강의 전당강 조류의 묘사를 통하여 그 속에 인생의 철리를 암묵적으로 비유하고 있다. 만약 사람의 마음이 바깥 사물의 영향을 받으면, 곧 바로 취함과 버림, 사랑과 증오 등의 편견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오로지 올바른 정념(正念)을 간직하면, 마음의 근원이 맑고 투철해져 마음의 경지가 거울과 같이 투명하여 비로소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1구와 4구는 표면적으로는 똑같은 구절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경계가 다른 것으로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경계인 것이다. 즉 정(正), 반(反), 합(合)의 논리를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여산을 노래한 〈증동림총장로(贈東林總長老)〉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溪聲便是廣長舌, 계곡물 소리는 바로 부처님의 상이니
山色豈非淸淨身. 산색은 어찌 청정한 법신이 아니리요?
夜來八萬四千偈, 밤 사이에 팔만 사천 게송이 있으니
他日如何擧似人. 다른 날 어떻게 사람들에게 설명할까?


   광장설이란, 《법화경》 〈신력품(神力品)〉에서 나온 것이다.

“세존이 큰 신력으로 광장설을 나오게 하였는데 위로는 범세(梵世)에 까지 이르렀다(世尊現大神力, 出廣長舌, 上至梵世).”가 그것이다. 불교에서는 부처가 소위 32상(相)을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형상으로 나타나 설법을 한다고 전한다.

광장설이 바로 32상 중의 하나인 것이다. 청정신이란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의 준말로 삼신(三身) 중의 하나이다.

만법(萬法: 森羅萬象과 宇宙萬物)은 모두 진여(眞如) 법성(法性) 자성(自性)에서 나온 것으로, 고로 만법 자체가 바로 진여이고 법성이며 자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만물 모두가 부처이기에 삼라만상 모두에도 자성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광장설상과 청정법신을 인용하여 불법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음을 비유, 설명하고 있다.9)


   불법은 진여법체(眞如法體)의 완전하고 큰 공간 속에 위치하고 있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이 언제 어디서든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9) 이것은 선종의 “푸르고 푸른 대나무 모두가 법신이고, 울창한 황색 꽃은 반야가 아님이 없다.(靑靑翠竹, 盡是法身. 鬱鬱黃花, 無非般若.)”(《景德傳燈錄》)의 사상과 일치하고 있다.


   이로 보아 소식은 일반적인 생활 속에서 사물을 관조한 결과, 그의 시가 속에는 이러한 선종의 경전과 선승들의 깨달음의 표시인 선종 공안(公案)의 화두(話頭)나 기봉(機鋒) 등이 들어가 매우 생동감이 뛰어나며 풍부하고도 오묘한 철리성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시 이외에도 〈등령롱산(登玲瓏山)〉 〈사주승가탑(泗州僧伽塔)〉〈화자유민지회구(和子由뗏池懷舊)〉 등이 모두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2) 인생여몽(人生如夢)을 노래

   불가에서는 모든 세계가 상성(常性)을 가지고 있지 않아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인생도 생로병사 등의 여러 변화가 있기 때문에 상성이 없다고 보고 있다.

특히 《금강경》에서는 일체의 모든 법은 바로 꿈, 환상, 거품과 같다고 강조하고 있는데10) 바로 인생은 ‘여몽(如夢)’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10)《금강경》: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러한 《금강경》을 선종에서는 매우 중시하고 있는데, 오조홍인(五祖弘忍)《금강경》으로 제자들을 거두어 들였고,

육조혜능《금강경》을 통하여 깨우침을 얻은 것으로도 이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

러므로 매우 곡절 있는 인생역정을 겪었고, 또한 선종사상에 심취한 소식은 이러한 ‘인생여몽(人生如夢)’을 주제로 한 선시를

적지 않게 남기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북송 선종(神宗) 때,
조정에서는 변법(變法)의 시행 여부 등을 둘러싸고 통치계급 내부에서 극심한 다툼이 시작되었다.

소식은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선종 희령(熙寧) 6년(1073), 항주 통판(通判)으로 부임하여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으니, 백년의 과객이 되려 한다네(人生如朝露, 要作百年客).”11)라는 인생의 감개를 발하였고, 3년 뒤 희령 9년, 밀주(密州)에서도 인생의 고단함과 짧음을 노래하였다.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고, 백발은 나날이 늘어가네(人生如朝露, 白髮日夜催).”12)


   다시 2년 후(1078) 서주(徐州)에서 〈차운왕정로퇴거견기(次韻王廷老退居見寄)〉시를 지어 직접적으로 인생몽환(人生夢幻)을 노래하고 있다.


11)《蘇軾詩集》 卷10, 〈九日, 湖上尋周李二君, 不見, 君亦見尋于湖上, 以詩見寄, 明日乃次其韻〉.

12)《蘇軾詩集》 卷14, 〈登常山絶頂廣麗亭〉.


浮花不辨春, 흔들리는 꽃 봉우리에 봄을 분별 못하고,
歸來方識歲寒人. 돌아와서 비로소 굳은 사람 알았네.
回頭自笑風波地, 생각하니 스스로 풍파 겪은 곳 우습고,
閉眼聊觀夢幻身. 눈을 감고 잠시 보니 꿈같은 인생이네.


次韵王廷老退居见寄_百度汉语

作者:苏轼

浪蕊浮花不辨春,归来方识岁寒人。
回头自笑风波地,闭眼聊观梦幻身。
北牖已安陶令榻,西风还避庾公尘。
更搔短发东南望,试问今谁裹旧巾。
接果移花看补篱,腰镰手斧不妨持。
上都新事长先到,老圃闲谈未易欺。
酿酒闭门开社瓮,杀牛留客解耕縻。
何时得纤纤玉,右手持杯左捧颐。



   이 시에서 소식 자신이 온갖 풍파를 겪은 후에야 비로소 인생이 꿈이요, 환상임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어떠한 흔적을 남기는 실상이 아닌 것과 같이 눈 깜작할 사이에 사라지는 한바탕의 꿈, 환상, 거품이라는 선리(禪理)와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인생관은 오대시안(烏臺詩案, 1079)13)을 겪은 후에도 계속 지속될 뿐만 아니라, 더욱 심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풍 5년(1082) 황주 유배지에서 지은 정월이십일, 여번곽이생출교심춘, 홀기법년시일동지여왕성작시, 내화전운(正月二十日, 與潘郭二生出郊尋春, 忽記去年是日同至女王城作詩, 乃和前韻)〉의 시도 역시 인생여몽(人生如夢)을 이야기하고 있다. 


13) 송 선종 때인 원풍 2년(1079년) 소식의 나이 44세에 ‘오대시안’이라는 문자옥(文字獄)이 발생하였다.

당시 소식은 시를 지어 조정의 신법(新法)을 풍자비판하였는데, 신법당들이 이를 빌미삼아 조정을 비판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하여 어사대옥에 감금하였다. 역사에서는 이를 ‘오대시안’이라고 칭한다.

당시 이 문자옥은 유가의 경세사상에 의거하여 자기의 포부를 실천하려던 소식에게 정신적·사상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준 사건이 되었다. 출옥한 이후 황주로 유배되어서는 모든 것을 초월한 심정으로 불교 선종과 가까이 하게 된다.


東風未肯入東門,  동풍이 동문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으니,
走馬還尋去歲村.  말 타고 또 다시 작년에 간 곳 찾아가네.
人似秋鴻來有信,  사람은 마치 가을 기러기 오듯이 확실하니,
事如春夢了無痕.  그 일은 마치 봄날의 꿈같이 흔적이 없네.


   세상사 모든 것이 지나간 이후에는 마치 봄날의 꿈과 같이 아무런 흔적이나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가 겪었던, 즉 오대시안(烏臺詩案) 같은 모든 고난 등을 포함한 일체의 미련과 번뇌가 모두 봄날의 꿈과 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원우(元祐) 원년(1086) 구법당(舊法黨)의 집권으로 잠시 조정으로 돌아 온 소식은 왕진경과 조정에서 만나 시를 받고화왕진경(和王晉卿)〉이란 답시를 지었다.


吾生如寄耳, 나의 인생은 잠시 기탁한 것일 뿐,
何者爲禍福. 무엇이 화가 되고 복이 되는가!
不如兩相忘, 둘 모두를 잊어버림이 좋지 않은가,
昨夢那可逐. 어젯밤 꿈을 어찌 쫓아가겠는가?


   일반적으로 객관적인 현실을 잊어버리는 제일 좋은 방법 바로 그것을 ‘여몽(如夢)’이나 ‘여환(如幻)’으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교와 선종을 자기의 사상기반으로 자기의 정신적인 탈출구를 찾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고로 위의 시에서도 불가에서 말하는 무상성(無常性)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인생 자체가 잠시 기탁한 허상인데 화와 복을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소식이 12세에 소순을 따라 건주(虔州)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때 부근의 천축사(天竺寺)에 들러 백거이가 쓴 시를 보았다.

47년이 지난 59세 때(1094) 다시 건주를 지나면서 천축사에 들렀는데, 이때는 이미 백거이의 시가 보이지 않아 이에 <천축사〉란 시를 지어 자기의 감회를 서술하고 있다.


香山居士留遺跡,  향산 거사의 유적이 남아 있고,
天竺禪師有故家.  천축선사의 옛 집도 있다네.
(중략)
四十七年眞一夢,  47년 세월이 진실로 하나의 꿈과 같고,
天涯流落淚橫斜.  세상 끝 유랑하니 눈물이 옆으로 흐르네.


   이 시도 위의 시와 마찬가지로 ‘인생여몽(人生如夢)’의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젊었을 때 보았던 시가 지금은 보이지 않고 47년의 세월 동안 경험한 정치적인 좌절과 유배생활 등 모든 것이 하나의 꿈이라는 것이다. 이로 보아 소식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심리적으로 깊은 변화가 일어나 세상사의 모든 것이 허황되고 무상함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해인 1095년 소식혜주(惠州)에서 〈사월십일 일초식려지(四月十日日初食곳支)〉의 시에서도 역시 같은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


我生涉世本爲口, 나의 인생 벼슬길로 든 것은 원래 입 때문,
一官久已輕蓴鱸. 관직은 전부터 순채, 농어보다 가볍게 여겼네.
人間何者非夢幻, 인간사 어떤 것이 꿈과 환상이 아닌가?
南來萬里眞良圖. 남쪽으로 만리 오니 정말 아름답다네.


   여기에서 소식은 인연을 따르는 생활태도와 인생은 꿈이고 환상이라는 개인적인 감정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만물을 초월한 정신적인 배경 아래에서 자신이 비록 남쪽으로 만리나 좌천되어 왔지만, 그러나 이곳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만족한다는 시인의 낙관적이고 광달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소식이 벼슬길에서 겪은 여러 차례의 좌절이 그로 하여금 불교 선종에 더욱 심취하게 하였으며, 또한 그로 하여금 불교 선종에서 말하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상성(常性)’이 없고 ‘무상(無常)’한 세계임을 깨닫게 하였다.


   특히 오대시안(烏臺詩案) 이후 하마터면 목숨조차도 잃어버릴 뻔한 인생 최대의 고비를 넘긴 소식이 향을 사르고 묵좌(默坐)를 행하면서 깊이 깨달은 것이 바로 ‘인생여몽(人生如夢)’이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공명과 부귀에 대한 관념이 점점 옅어졌으며, 또한 세속을 초월하여 자유자재하고 담박한 정신으로 ‘인생여몽’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3) 일체개공(一切皆空)의 깨침

   소식은 ‘인생여몽(人生如夢)’ 이외에 역시 선종의 핵심사상인 ‘일체개공’을 통하여 그의 정신적인 해탈을 추구하고 있다.

《반야경》에서는 인간 세상의 모든 물질과 사람의 신체는 본래 공(空)한 것이며, 실체가 없는 것이라 정의하고 있다.

임제종의 창시자 임제의현(臨濟義玄) 선사 《임제어록》에서 다음과 같이 인간의 공허한 분별심과 객관적인 세계를 부정하고 있다.


(제자가)묻는다:

   “어떤 것이 진정한 부처이고, 진정한 법이며, 진정한 도입니까?”

스승이 대답하기를:

   “부처라는 것은 마음이 깨끗한 것이고, 법이라는 것은 마음이 밝게 빛나는 것이며, 도라는 것은 도처에 걸림이 없는 맑은 빛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 개가 바로 하나이며, 모두 헛된 이름으로 실질적으로 있지 않은 것이다."


14) 14) 위의 책, 367쪽. 《臨濟語錄》: “問: ‘如何是眞佛, 眞法, 眞道?’

師云: ‘佛者心淸淨是, 法者心光明是, 道者處處無碍淨光是,’ 三卽一, 皆是空名, 而無實有.”


   이 세상 모든 일과 모든 사물이 모두 허상이고 환상이며
실질적으로 있지 않은, 즉 실체가 없다는 것이 바로 ‘공(空)’의 사상인 것이다. 사람이 느끼고 있는 모든 사물과 감정은 허망한 망상이며, 단지 청정한 비어 있는 심령만이 바로 진실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覺悟)에 이르려면 우선적으로 망념(妄念)을 제거하여 현상세계의 오염을 받지 않고 현실세계의 객관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경계에 도달하는 길만이 성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소식〈문조양오자야출가(聞潮陽吳子野出家)〉에서 조양군오자야가 세속을 떠나 출가한다는 것을 듣고 자기의 일생 동안 겪은 과정과 오자야의 출가를 대비하며 인생의 객관적인 실체를 모두 부정하면서 선종의 공사상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敝履, 처와 자식을 진정으로 낡은 신발처럼,
脫棄何足惜. 벗어 던지면 애석해 할 필요가 없는지?
四大猶空幻, 사대가 모두 공하며 헛된 것인데,
衣冠外物. 의관은 하물며 외물에 불과하다네.
一朝發無上, 한때 불법의 길로 들어섰다면,
願老靈山宅. 오랫동안 영취산에 있기를 바라네.
世事子如何, 당신은 세상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禪心久空寂. 선심은 오래도록 공적에 이르렀네.


ㅡ 全文   / 중국 바이두백과

予昔少年日,气盖里闾侠。
自言似剧孟,叩门知缓急。
千金已散尽,白首空四壁。
烈士叹暮年,老骥悲伏枥。
妻孥真敝履,脱弃何足惜。
四大犹幻座,衣冠矧外物。
一朝发无上,愿老灵山宅。
世事子如何,禅心久空寂。
世间出世间,此道无两得。
故应入枯槁,习气要除拂。
丈夫生岂易,趣舍志匪石。
当为狮子吼,佛法无南北。


   그는 유가의 사상 속에서 인생의 답안을 찾지 못하고 불교 선종에 심취하였고 결국에는 사대(四大), 즉 사람의 몸과 인생이 모두 환상이고 공허한 것임을 알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벼슬도 신외지물(身外之物)로 여기며 조금도 애석해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무상(無上)’이란 바로 불법의 길을 가리키고, 영산이란 영취산(靈鷲山)을 이른다.

또한 오자야에게는 ‘선심(禪心)이 이미 오랫동안 공적(空寂)의 경계에 이르렀다’ 고 말하고 있다.


   소성(紹聖) 4년(1097) 소식이 62세에 혜주의 유배지에서 더욱 황량한 해남도로 옮기라는 명을 다시 받고도

“황량한 남방에서 아홉 번 죽어도 후회 않으며,

이러한 기이한 절경을 유람하니 내 인생의 최고라네.”15)

라는 낙관적이고 광달한 면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해남도로 떠나며 동생 소철에게 보낸 차전운기자유(次前韻寄子由)〉의 시속에도 이러한 불교 선종의 공사상을 통하여 정신적인 안정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5) 《蘇軾詩集》 卷43, 〈六月二十日夜渡海〉: “九死南荒吾不悔, 玆游奇絶冠平生.”



我少卽多難, 나 젊었을 때 많은 고난의 길,
回一生中. 일생을 머뭇거리며 살아왔다네.
百年不易滿, 백년의 세월 쉽게 차지 않고,
寸寸彎强弓. 갈수록 강한 활을 당긴다네.
老矣復何言, 늙었으나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榮辱今兩空. 지금 보니 영욕이 모두 공허하네.
泥洹尙一路, 열반의 한 길만을 바라보니, 
所向餘皆窮. 가는 곳마다 여유가 끝까지 미치네.


次前韵寄子由_百度汉语      邅 : 머뭇거릴 전

作者:苏轼

我少即多难,邅回一生中。百年不易满,寸寸弯强弓。老矣复何言,荣辱今空。泥丸尚一路,?古语云,十方薄伽梵,一路涅槃门。?所向余皆穷。似闻崆峒西,仇池迎此翁。胡为适南海,复驾垂天雄。下视九万里,浩浩皆积风。回望古合州,属此琉璃钟。离别何足道,我生岂有终。渡海十年归,方镜照两童。还乡亦何有,暂假壶公龙。峨眉向我笑,锦水为君容。天人巧相胜,不独数子工。指点昔游处,蒿莱生故宫。


   시에서 시인은 자기 인생의 모든 영화와 욕됨은 바로 하나의 실체도 없는 공허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니원(泥洹)이란, 바로 불교 선종의 열반(涅槃)을 일컫는 것이다.

열반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세상을 떠난다는 의미, 즉 죽음을 이야기하고, 다른 하나는 생사윤회를 초월한 깨달음의 경계로 불교 수행의 최고의 이상 경지를 말한다. 불교 선종의 공관(空觀)의 운용을 통하여 자기의 정신적인 의탁처로 삼아서

광달함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식은 선종의 공사상을 시 속에 주입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선종의 깨달음에 이르는 사유방식을 시의 창작론에도 운용하고 있다.

송참료사(送參寥師)〉의 시는 첫 구절부터 선사가 인생의 험난함 속에 일체가 공함을 배워 백 가지의 상념이 이미 차가운 재로 변하였네(上人學苦空, 百念已灰冷).”라고 참료 선사뛰어난 인품과 깨달음(空)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칭찬하고 있다.


細思乃不然,  자세히 생각해보면 그렇지 아니하고, 
眞巧非幻影.  진정으로 교묘하면 환영(幻影)이 아니라네.
欲令詩語妙,  좋은 시어를 오묘하게 하려면,
不厭空且靜.  공(空)과 정(靜)을 싫어하지 않아야 하네.
靜故了群動,  고요하기에 온 세상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空故納萬境.  공허하기에 온 우주를 용납할 수 있다네.


   ‘공허함과 고요함’ 속의 그윽한 사유가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처방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법(詩法)과 불법(佛法)이 상통하는 곳은 바로 ‘공허함과 고요함’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소식참료 선사를 칭찬한 “도인의 흉중에는 고요한 물이 맑고, 만상이 생기고 사라져도 본체가 달아나지 않는다(道人胸中水鏡淸, 萬象起滅無逃形).”(〈次韻僧潛見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구절에 “시법과 불법이 서로 방해되지 않는다(詩法不相妨).”고 결론을 짓고 있다.


   이와 같이 불교 선종의 사유방식을 그의 시론에도 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관점을 나타내고 있는 〈서왕정국소장왕진경화착색산(書王定國所藏王晉卿畵著色山)〉 기일(其一)을 보자.


煩君紙上影, 그대 종이 위 그림자가 산란하게,
照我胸中山. 내 마음속의 산을 비춘다네.
山中亦何有, 산중에는 또한 무엇이 있는가?
木老土石頑. 나무는 늙고 흙과 돌이 무디다네.
正賴天日光, 마침 하늘에 의지한 태양 빛 비추니,
澗谷紛斑. 계곡 사이에 여러 빛깔이 흩날리네.
我心空無物, 나의 마음이 공허하고 사물이 없으니,
斯文何足關. 이 무늬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君看古井水, 그대는 옛 우물을 보았는가.
萬象自往還. 삼라만상이 스스로 왕래한다네.



《书王定国所藏王晋卿画著色山二首》是宋代诗人苏轼的作品之一。

作品名称
书王定国所藏王晋卿画著色山二首
创作年代
宋代 
文学体裁
五言律诗
作    者
 苏轼

诗词正文

白发四老人,何曾在商颜。

烦君纸上影,照我胸中山。

山中亦何有,木老土石顽。

正赖天日光,涧谷纷斓斑。

我心空无物,斯文定何间。

君看古井水,万象自往还。

君归岭北初逢雪,我亦江南五见春。

寄语风流王武子,三人俱是识山人。

     ㅡ  书王定国所藏王晋卿著色山二首_百度百科


   왕진경(王晉卿)이 그린 〈착색산(著色山)〉이란 그림을 왕정국(王定國)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시인이 이 그림을 보고 느낀 바를 이 시로써 남기고 있다.

그림 속의 산의 형상이 작가의 마음을 비추고 마음속에는 흙과 돌, 늙은 나무, 태양 등 삼라만상이 들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4구는 바로 시에서 말하고 있는 “고요하기에 온 세상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공허하기에 온 우주를 용납할 수 있다.” 와 같은 경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정수(古井水)”는 바로 선가의 청정지심(淸淨之心)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본심(本心)’을 깨달으면 온 세계가 공하다는 것을 알게 되며, 또한 물아(物我)가 합일이 되어 나의 마음이 바로 우주만물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마음속에는 산하대지가 있고, 해와 달과 별 등 온갖 만물이 있으며, 나의 본심이 바로 부처이고 부처가 바로 나의 마음이라는 진리를 시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체득

   불교 선종에서 ‘무(無)’자의 운용을 통하여서도 공관(空觀)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소식은 자기의 작품 속에 위에서 언급한 ‘공’과 ‘몽(夢)’자의 운용 이외에 ‘무(無)’자의 묘사를 통하여 공의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 이를 통하여 소식은 인생에 있어서의 객관적인 실체를 부정하는 동시에 자기의 정신적인 깨달음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원풍(元豊) 2년(1079) 7월 발생 오대시안(烏臺詩案) 이후 소식은 이전의 정치상에 있어서의 포부를 거의 포기하고 “황주(黃州)에 두문불출하면서 불경으로써 세월을 보냈으며” , “향을 사르고 묵좌를 행하면서 깊이 자아성찰을 하여 물과 아를 서로 잊고, 몸과 마음이 모두 공해졌다.(焚香默坐, 深自省察, 則物我相忘, 身心皆空)”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이로 보아 황주로 유배된 이후로 그는 완전히 불교 선종에 심취하여 이것을 사상적인 무기로 삼아 인생의 고뇌를 해결하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시인의 나이 47세에 황주에서 지은 〈촉승명조사귀서룡구자벽(蜀僧明操思歸書龍丘子壁)〉 시는 황주에서의 유배 생활 속에 나타나는 작가의 고통을 선종의 공관을 통하여 해결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久厭勞生能幾日, 오랜 시간의 괴롭고 힘든 인생 며칠이나 남았는가
莫將歸思擾衰年. 고향 생각으로 노쇠해가는 해를 어지럽히지 말아라.
片雲會得無心否? 한 조각구름은 무심을 얻을 수 있는지?
南北東西只一天. 남북과 동서가 모두 한 하늘에 있다네.


   선종의 ‘무심(無心)’의 사상을 인용하여 심적인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을 추구한다.

선종의 화두에는 종종 구름으로 마음을 비유하고 있다.16)

즉 어느 곳에도 묶여 있지 않고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구름과 같이 사람의 마음도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함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16)《傳燈錄》: “惠忠國師, 自受心印. 肅宗上元二年赴京, 帝問師在曹溪寺得何法?

師曰: ‘陛下見空中一片雲嗎(么)?’(혜충국사가 마음의 인가를 받고, 숙종 상원 2년에 장안으로 돌아왔다.

숙종이 ‘스님은 조계사에서 어떤 법을 얻었습니까?’라고 물었고,

이에 스님은 ‘폐하께서는 공중에 한 조각의 구름이 보입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다음의 〈전도안유사운 “직수인취주인옹” 작양절희지(錢道人有詩云“直須認取主人翁”作兩絶戱之)〉기이(其二) 시는 육조혜능(六祖慧能)의 오도송(悟道頌)을 인용하여 선종의 공관을 나타내고 있다.


有主還須更有賓,  주인이 있으면 반드시 손님이 있어야 하니, 
不如無鏡自無塵   거울이 없으면 먼지가 없는 것보다 못하네. 
只從半夜安心后,  오로지 한밤중에 안심의 경지에 이른 후부터 
失却當前覺痛人.  바로 앞의 통증을 느끼는 이를 잊어버렸네.


   이 시의 제목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첫 구절은 전(錢) 승려“바로 주인공을 취하여 알아야 한다(直須認取主人翁)”의 구절을 겨누어서 지은 것이다.

여기에서의 주인공은 불교 선종에서 말하는 불성(佛性)을 이야기하고 있다.

육조혜능의 오도송을 인용하여 마음속에는 본래 주인과 객, 거울과 먼지 등 모든 분별의 관념이 없어야 한다 것이다.

그러므로 3,4구에서 《능엄경》을 인용하며,17) 스스로 참선하여 깨달음에 이르렀음을 나타내고 있다.


17) 《능엄경》 : “독침이 발을 상하게 하니, 몸을 움직이면 통증이 오는데, 청정심을 깨달으니, 조금의 아픔의 느낌도 없도다.(毒刺傷足, 擧身疼痛, 覺淸淨心, 無痛痛覺.)”



   소식이 만년에 지은 〈자제금산화상(自題金山畵像)〉의 시속에도 이러한 공관을 통한 안심(安心)의 경지를 묘사하면서 정신적인 해탈을 추구하고 있다.


心似已灰之木, 마음은 이미 재가 된 나무와 같고,
身如不繫之舟. 몸은 마치 묶이지 않은 배와 같네.
問汝平生功業, 평생 동안 쌓은 공덕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黃州惠州州. 황주와 혜주, 담주에 있다고 말하겠네.


 * 儋 : 멜 담


   이 시는 마치 불가의 게송과 비슷한데 정국(靖國) 원년(1101) 7월 28일, 소식의 나이 66세 때 지은 것으로 이 시를 지은 지 2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소식은 이 시를 통하여 자신의 험난한 일생을 되돌아보고 이에 대한 감회를 적고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옛날 이용면(李龍眠)이 그린 소식의 초상화 금산사에서 보관하였는데, 지금 다시 금산사를 지나면서

자기의 초상화를 보고 이 시를 읊은 것이다.

불교 선종에는 ‘고목(枯木)’이란 용어가 있는데 이것은 무심의 상태를 비유, 즉 일체의 망념과 망상을 끊고 모든 것이 멸한 상태를 말한다.18)


18)《佛光大辭典》, 臺灣佛光出版社, 3844쪽


   송휘종 정국 원년(1101) 7월, 소식이 임종하기 이틀 그의 옛 친우이며, 옛날 항주에 있을 때 경산사(徑山寺)의 주지였던

유림(維琳) 스님이 상주(常州)로 병 문안차 소식을 방문하였다.

유림 스님은 소식에게 〈여동파문질(與東坡問疾)〉이란 시를 지어 소식의 마지막을 위로해주었고,

이에 소식은 아래의 〈답경산유림장로(答徑山琳長老)〉란 시로 유림 스님에게 답하였다.


與君皆丙子, 그대와 나는 같은 병자생,
各已三萬日. 각각 이미 삼만 일을 살았네.
一日一千偈, 하루에 천개의 게송 외우니,
電往那容詰. 시간의 흐름 속에 어찌 멈추리.
大患緣有身, 큰 병은 몸이 있는 인연이고,
無身則無疾. 몸 없으니 바로 괴로움도 없노라.
平生笑羅什, 평생을 구마라집을 비웃은건,
神呪眞浪出. 신통한 주문이 진정 소용없기에.


   근심과 병이라는 것은 본래 몸의 인연에 의하여 생기는 것인데, 자기에게는 원래 몸이라는 것이 없으니 당연히 병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본래 하나의 사물도 없다’혜능의 오도송을 인용하여 객관적인 자기 몸의 실체를 부정하면서 유림 스님에게 병문안 올 필요가 없음을 말하고 있다.


   마지막 두 구에서는 구마라집이 임종 전에 자기의 병을 낫게 하려고 제자에게 신통한 주문을 외우라고 한 행위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소식이 생사에 초연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은 바로 만물이 실체가 없는 공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소식은 육조의 게송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을 인용하여 사람의 자성이 청정함을 주장하거나 혹은 모든 번뇌를 벗어난 안심(安心)의 경지와 선종의 공사상을 선양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복잡다난한 일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게송을 원용하여 인생의 해결점을 모색하는 동시에 정신적인 고뇌로부터 탈피하려 하였고, 이러한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은 그로 하여금 세속적인 것을 초월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시인은 개인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언제나 수연자적(隨緣自適)하거나, 낙관광달(樂觀曠達)하며 해학적인 면모도 보여주고 있다.



3. 결론


   소식(蘇軾)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직접적으로 선종의 사유의식을 원용하여 많은 선시를 창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바로 그가 오랫동안 불교 선종에 대해 지속적인 흥미를 가진 결과이며, 또한 선종사상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특히 벼슬길에 있어서 좌천과 유배로 점철된 그의 불우한 일생과 이로 인한 이상과 현실 속에서 느끼는 내심의 갈등은 그로 하여금 더욱더 선종에 귀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 속에는 자주 ‘공(空)’ ‘무(無)’ ‘몽(夢)’ 등의 사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공’의 사상은 단순히 인생이 짧고 덧없음을 한탄하는 형이하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인생 자체가 공하다는 통찰의식의 토대 위에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세 가지 방면으로 소식 선시의 의미를 귀결할 수 있다.


   첫 번째, 소식은 세속을 초월한 담박한 정신으로 ‘인생여몽(人生如夢)’ ‘일체개공(一切皆空)’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노래할 수 있었기에,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낙관적이고 광달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역정을 선리를 통하여 더욱더 높은 경지의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였고, 이것이 자기 인생의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데 가장 유익한 처방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연이은 좌천과 유배의 곤궁한 현실 속에서도

시인은 언제나 대범함을 유지하여 수연자적(隨緣自適)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정신적인 고민과 번뇌 속에서도 자아해탈을 추구하여 낙관적이고 광달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선시 속에 마치 세속을 벗어난 선사의 풍모가 보이거나, 혹은 선사의 기봉(機鋒)과 같은 시가(詩歌)가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소식은 선학(禪學)에 대한 학습과 동시에 직접적인 실천이 있었기에 세속의 일에 초연하며, 맑고 청명한 마음을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창작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평정(平靜)한 마음과 선종에 의지한 처세태도는 바로 자기 인생에 대한 이지적인 반성을 불러왔고, 이를 토대로 정신적인 안위와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시 속에는 언제나 선리(禪理)와 선취(禪趣)가 담겨져 있는 동시에 인생을 달관한 듯한 해학적인 면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식 시가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바로 해학성과 유머 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의 성격의 영향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선가(禪家)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선사들이 제자들을 깨우침으로 인도하기 위해 행하는 성을 초월하는 행위와 언어 속에는 언제나 해학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함이 묻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소식의 선시는 후대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어, 《오등회원(五燈會元)》에는 자주 소식의 공안(公案)과 기봉(機鋒)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학생이자 친구인 황정견도 소식의 뒤를 이어 많은 선시를 창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개창한 강서시파(江西詩派) 역시 선종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여 송대의 선시는 새로운 발전단계로 접어들었다.

그러므로 소식과 황정견 등의 ‘이선입시(以禪入詩)’의 광범위한 유행은 바로 당시(唐詩)와는 구별되는 송시(宋詩)의 새로운 특징인 ‘철리(哲理)’를 형성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동시에 소식의 이선유시(以禪喩詩)의 창작론과 풍격론의 주장은 대 시의 창작이나 시론에 큰 영향을 미쳐 중국의 문학이론 형성과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고 있다.

이렇게 송대의 소식은 선종사상 속에서 자기의 인생관과 삶의 철학을 찾아내어 험난한 역경 속에서도 달관적이고 광달한 면을 보이는 동시에 평정한 마음으로 창작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인생태도는 후대 문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후일 사대부의 하나의 전형이 되고 있다.


   사실 오늘과 같이 물질만능과 배금주의가 팽배하며 사람 사이의 인정이 사라지는 각박한 세상에 선의 사유와 사상이 더욱더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선의 사유만이 우리들의 가슴을 넓혀주고 마음을 안정시키며, 삶의 여유를 높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소동파 모음

2017.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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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案100 聖嚴法師著

空中一片雲

[日期:2010-07-24] 來源:網絡轉載  作者:聖嚴法師著 如佛友覺得此書不錯,請按

   空中一片雲
  
  唐肅宗問慧忠國師得到了什麼佛法,國師反問他:「陛下見到空中一片雲嗎?」肅宗答:「見到了。」國師說:「釘釘著,懸掛著。」
  
  唐肅宗用空中一片雲來形容自己的心境,但真的是自由自在、無牽無掛嗎?他心中還有一片雲哩!他以自由自在為境界、為心的體驗,本身就是執著。好比說, 出家人沒有太太而對他人炫耀「我沒有太太耶!」出家人無妻是正常,你卻認為無妻是了不起的事,這就是罣礙。同樣地,唐肅宗執著自由自在的境界,那就是他的 罣礙。所以慧忠國師說:「你已經在心中把那片雲釘起來了、掛起來了。」表示他尚未得解脫,不曾真正體驗過自在。
  
  在日常生活中,幾乎每一個人都會發生這種情形。有人說:「我做不做官無所謂啦!」其實他講這句話的時候,相當在意自己做不做官,不過他能體會到「做官 很好,沒官做也沒辦法」,所以才這麼說。做生意的人也會講:「有錢賺很好,沒錢賺也沒關係。」畢竟他還是希望有錢賺,如果實在沒錢賺也沒辦法。有這種想法 已不錯,但不是大智者。
  
  真正有大智慧的人,空中都是雲也好,空中沒有雲也好,都跟他無關;有官做很好,沒官做也很好,都於他無礙。很多人口中說:「我做官是為了人民,我賺錢是為了社會。」
  
  其實心中想的是:「有官做對自己比較有利,有錢賺對自己比較方便。」先把自己擺在其中!這沒什麼不好,問題在於「有官做、有錢賺時是否洋洋得意、自認 尊貴?沒官做、沒錢賺時是否落寞失意、自覺窩囊?」如果居廟堂、賺大錢而不覺得意,下官位、處蹇澀而不覺失意,這才是「能屈能伸大丈夫」。伸屈自如而自在 自得,才是真正的智者。
  
  能屈能伸不容易,大丈夫也不多,但做人總希望少些煩惱、困擾、痛苦,多一分愉快,那就該學學禪者的智慧。即使學不起來也不妨模倣一下,能夠模倣也是一種幸福的享受。畢竟,人不可能永遠風光、永遠得勢、永遠順利。

空中一片雲_公案100 聖嚴法師著




自题金山画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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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题金山画像》以自嘲的口吻,抒写平生到处漂泊,功业只是连续遭贬。诗人面对当年自己的画像,抚今追昔,感慨万千,既有对目前垂垂老矣的描述,也有对自己一生的总结,多重感情交织在一起。造语苍凉,寓庄于谐,言有尽而意无穷。 [1-2] 
作品名称
自题金山画像
创作年代
北宋
作品出处
苏东坡全集
文学体裁
六言绝句
作    者
苏轼

自题金山画像作品原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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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题金山画像(1)
心似已灰(2)之木,
身如不系之舟。
问汝平生功业,
黄州惠州儋州。(3) [3] 

自题金山画像注释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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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题金山画像词语注释

(1)金山画像:指金山寺苏轼画像,李公麟所作。《金山志》 :“李龙眠(公麟)画东坡像留金山寺,后东坡过金山寺,自题。”
(2)心似已灰:即心如死灰。《庄子·齐物论》:形固可以使如槁木,而心固可使如死灰乎
(3)黄州惠州儋州:作者反对王安石新法,以作诗“旁讪朝廷”罪贬谪黄州,后又贬谪惠州、儋州。在这三个地方,作者度过了长期的贬谪生活。 [4] 

自题金山画像作品译文

心灵已然寂静无欲了,不会再为外物所动。这一生漂泊不定,好似无法拴系的小船。有人问我平生的功业在何方,那就是黄州、惠州和儋州。 [3] 

自题金山画像创作背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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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年三月,苏轼由虔州出发,经南昌当涂金陵,五月抵达真州(今江苏仪征),六月经润州拟到常州居住。《自题金山画像》是苏轼在真州游金山龙游寺时所作。 [1] 

自题金山画像作品鉴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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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题金山画像文学赏析

苏轼诗清新豪健,在艺术表现方面独具一格。本诗更是出语惊人,开端便说自己心如死灰,乍看似与诗人一向旷达豪爽的性格很不相附,然了解了诗人的经历、心情后,就不能不对作者这种心死之哀寄予深切的同情:苏轼“有大才气,真力量,所以沾濡涵泳,无昕往而不可,无所往而不能”(庄尉心《宋诗研究》)。
作此诗时,是苏轼去世前两个月,作者已年逾花甲,堪堪走到了生命的尽头。回首自己的一生,几起几落,失意坎坷,纵然有忠义填骨髓的浩瀚之气,也不得不化为壮志未酬的长长叹息。作者只能慷慨悲歌,自叹飘零。接下来的“身如不系之舟”指自己晚年生活的飘泊不定,抒写羁旅漂泊的忧伤情怀。如果仅限于“入乎其内。的抒写人生的苦闷,苏轼也就不成为令人发出会心微笑的“东坡老”。他不会,也不屑在哀愁中沉沦。且看后两句“问汝平生功业,黄州惠州儋州”一反忧伤情调,以久惯世路的旷达来取代人生失意的哀愁,自我解脱力是惊人的。苏轼认为自己一生的功业,不在做礼部尚书祠部员外郎时,更不在阀州、徐州密州(作者曾在此三地作过知府)。恰恰在被贬谪的三州。真是“满纸荒唐言”,然而这位“东坡看”最能够“白首忘机”。失意也罢,坎坷也罢,他却丝毫不减豪放本色,真是不可救药的浪漫。末两句,语带诙谐,有自我调侃的意味,却也深刻地传达了作者此刻的微妙心情。
整首诗庄中含谐,直中有曲。表现了东坡其人其诗特有的风格。读之使人击节可叹,极易受感染。 [2]  [5] 

自题金山画像历史评价

岳希仁《宋诗绝句精华》:“这是诗人生命最后阶段的作品。精炼概括了他一生的悲惨境遇。一代文豪。英才天纵。回首往事。唯存贬谪。其遭际之坎坷遂成千古伤心事。” [6] 

自题金山画像作者简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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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苏轼(1037—1101),字子瞻,一字和仲,号东坡居士,眉州眉山(今属四川)人。苏洵之子。曾上书力言王安石新法之弊,后因作诗讽刺新法而下御史狱,贬黄州。宋哲宗时任翰林学士,曾出知杭州、颖州,官至礼部尚书。后又贬谪惠州、儋州。在各地均有惠政。卒后追谥文忠。学识渊博,喜好奖励后进。其文纵横恣肆,为“唐宋八大家”之一。其诗题材广阔,清新豪健,善用夸张比喻,独具风格。有《东坡七集》、《东坡易传》、《东坡书传》、《东坡乐府》等。 [6] 
参考资料
  • 1.  刘乃昌选注.苏轼选集:齐鲁书社,2005:158
  • 2.  杨抱朴编著.《苏东坡集》诠释与解读:中国少年儿童出版社,2003:113
  • 3.  (宋)苏轼著.东坡集 插图本:万卷出版公司,2008:127
  • 4.  丁炳启编著.古今题画诗赏析:天津人民美术出版社,1991:45
  • 5.  张晨.中国题画诗分类鉴赏辞典:辽宁美术出版社,1992:489-490
  • 6.  许建中,汪俊选注.宋诗绝句三百首 图文本:广陵书社,2003: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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东坡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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东坡茶,苏东坡自创的饮茶法是:每餐后,以浓茶漱口,口中烦腻既去,牙齿也得以日渐坚密。用中下茶漱口,而上等好茶不易得,“间数日一啜,亦不为害也”。
宋代苏东坡不仅是一位大文学家,也是一位熟谙茶道的高手。他一生与茶结下了不解之缘,并为人们留下了不少隽永的咏茶诗联、趣闻轶事。
中文名
东坡茶
外文名
Dongpo tea
年    代
宋代
创建者
苏东坡
记    载
《叶嘉传》

东坡茶典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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东坡茶
   除了茶诗、茶词外,历史上还流传几则苏东坡地许多茶事典故,传为美谈。 [1] 
典故一:据说王安石患有痰火之症,医生告诉他用阳羡茶可治愈,但须用长江中峡瞿塘的水煎服才有效用,那时东坡服父丧期满,正将返京复职,王安石捎信给东坡,要他出川时顺道带一瓮中峡的江水进京。东坡因贪看沿途的风景而忘记取水的事,等他想起时,船已到了下峡,遂取下峡的水交差,却被王安石发现了,王安石解释说:「上峡水性太急,下峡水性太缓,惟有中峡的水,缓急相半,水性中和;此水烹阳羡茶,上峡味浓,下峡味淡,中峡浓淡之间,方才见茶色迟迟未现,故知必为下峡水。
典故二:
东坡谪居宜兴蜀山讲学时,非常讲究饮茶,有所谓「饮茶三绝」之说,即茶美、水美、壶美,惟宜兴兼备三者。俗话说:“水为茶之母,壶是茶之父。”苏东坡对烹茶用具很讲究,他认为"铜腥铁涩不宜泉",而最好用石烧水。据说,苏轼宜兴时,还亲自设计了一种提梁式紫砂壶,烹茶审味,怡然自得,题有「松风竹炉,提壶相呼。」的诗句。后人为了纪念他,把这种壶式命名为"东坡壶"。
典故三:
东坡烹茶,独钟金沙泉水,常遣童仆前往金沙寺挑水,僮仆不堪往返劳顿,遂取其它河水代之,但为苏东坡识破。后来苏东坡准备两种不同颜色的桃符,分别交给僮仆和寺僧,每次取水必须和寺僧交换桃符,如此僮仆就无法偷懒了。
典故四:
一天,苏东坡、司马光等一批墨人骚客斗茶取乐,苏东坡的白茶取胜,免不了乐滋滋的。当时茶汤尚白司马光便有意难为他,笑着说:"茶欲白,墨欲黑;茶欲重,墨欲轻;茶欲新,墨欲陈;君何以同时爱此二物?"
东坡紫砂杯 东坡紫砂杯
苏东坡想了想,从容回答说:"奇茶妙墨俱香,公以为然否?"
司马光问得妙,苏东坡答得巧,众皆称善
典故五:东坡与茶联
苏东坡平素不讲究衣着,一日,他穿一件普通的长衫,到一个寺院里,寺院的主持大和尚并不认识他,仅说了一句:“坐。”招呼侍者:“茶。”东坡没有理他,集中精力欣赏寺内的字画去了,主持和尚见此位来客举止不凡,不由得肃然起敬忙又道:“请坐!”忙吩咐侍者:“敬茶!”那主持和尚请教客人的姓名,方知客人竟是大名鼎鼎的苏东坡时,满脸堆起笑容,恭请客人:“请上坐!”连呼侍者:“敬香茶。”当和尚请他写一对联时,东坡触景生情挥就一联:“坐,请坐,请上坐;茶,敬茶,敬香茶。”此联将势利鬼的姿态刻划得淋漓尽致。

东坡茶烹茶方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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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苏东坡烹茶有自己独特的方法,他认为好茶还须好水配,“活水还须活火烹”。他还在《试院煎茶》诗中,对烹茶用水的温度作了形象的描述。他说:“蟹眼已过鱼眼生,飕飕欲作松风鸣”。以沸水的气泡形态和声音来判断水的沸腾程度。

东坡茶烹茶用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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苏东坡对烹茶用具也很讲究,他认为“铜腥铁涩不宜泉”,而最好用石?烧水。据说,苏轼在宜兴时,还亲自设计了一种提梁式紫砂壶。后人为了纪念他,把这种壶式命名为“东坡壶”。

东坡茶东坡茶功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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苏东坡对茶的功效,也深有研究。在熙宁六年公元1073年在杭州任通判时,
东坡茶 东坡茶
一天,因病告假,游湖上净慈、南屏诸寺,晚上又到孤山谒惠勤师,一日之中,饮浓茶数碗,不觉病已痊愈。便在禅师粉壁上题了七绝一首:
示病维摩元不病,在家灵运已忘家。
何须魏帝一丸药,且尽卢仝七碗茶。
苏轼还在《仇池笔记》中介绍了一种以茶护齿的妙法
“除烦去腻,不可缺茶,然暗中损人不少。吾有一法,每食已,以浓茶漱口,烦腻既出而脾胃不知。肉在齿间,消缩脱去,不烦挑刺,而齿性便若缘此坚密。率皆用中下茶,其上者亦不常有,数日一啜不为害也。此大有理。” [1] 

东坡茶东坡茶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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苏东坡创作的散文《叶嘉传》,以拟人手法,形象地称颂了茶的历史、功效、品质和制作等各方面的特色。
苏东坡一生,因任职或遭贬谪,到过许多地方,每到一处,凡有名茶佳泉,他都留下诗词。如元丰元年(公元1078年),苏轼任徐州太守时作有《浣溪沙》一词:"酒困路长惟欲睡,日高人漫思茶,敲门试问野人家"。形象地再现了他思茶解渴的神情。
“白云峰下两旗新,腻绿长鲜谷雨春”是描写杭州的“白云茶”。
“千金买断顾渚春,似与越人降日注”是称颂湖州的“顾渚紫笋”。
而对福建的壑源茶,则更是推崇备至。他在《次韵曹辅寄壑源试焙新茶》一诗中这样写道:
仙山灵草温行云,洗遍香肌粉末匀。
明月来投玉川子,清风吹破武林春。
要知冰雪心肠好,不是膏油首面新。
戏作小诗君勿笑,从来佳茗似佳人。

东坡茶相关轶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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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代苏东坡不仅是一位大文学家,也是一位熟谙茶道的高手。他一生与茶结下了不解之缘,并为人们留下了不少隽永的咏茶诗联、趣闻轶事。
苏轼不仅以诗文名天下,而且还精于茶道。据史料记载,苏轼在黄州为官时,曾有一位名叫参寥的朋友从吴中来访,二人一起品茗,洽谈甚欢。一天,苏轼梦见参寥作了一首好诗,醒来后还记得其中二句:“寒食清明都过了,石泉槐火一时新”。
过了七年,苏轼到钱塘去任职,参寥正好住在西湖智果寺,寺院内有一泓泉水,从石缝中汩汩流出,异常甘冷,适合烹茶。在寒食的翌日,苏轼与朋友从孤山出发,泛舟西湖,去见参寥。在智果寺内,大家一起去汲泉水,钻火,烹黄蘖茶,真是其乐融融,非常尽兴。在饮茶时,苏轼猛然想起上次梦见参寥的事,他就朗声吟诗给大家听。梦中的诗,竟然在今碰巧应验,在座的朋友无不称奇。
苏轼对品茶有他独到的理解。他认为品茶的最高心境是“静中无求,虚中不留。 ”对茶友和茶具他也有很高的要求,在他的《扬州石塔试茶》中有二句诗即体现了他的品味:坐客皆可人,鼎器手自洁。苏轼对茶的养生作用也十分注重,他在《物类相感志》一文中说:吃茶多腹胀,以醋解之。不止如此,他还懂得茶的另一种与饮用无关的功用:驱蚊虫。每当夏季,他都会用陈茶点燃,然后再吹灭以烟驱蚊虫。
古人认为喝茶能治病,苏轼亦对此认同。他在杭州时,有一回一口气喝了七杯浓茶,感觉非常过瘾,还戏写了一首非常诙谐的诗,将茶的药用价值写入了诗中,其诗曰:示病维摩原不病,在家灵运已忘家。何须魏帝一丸药,且尽卢仝七碗茶。

参考资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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