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 1. 03:53ㆍ글씨쓰기
신품사현
신품사현(神品四賢)은 신라 · 고려 시대의 신품이라 불릴 만큼
글씨가 빼어난 경지에 이른 네 사람을 일컫는다.
신라의 김생, 고려의 유신 · 탄연 · 최우가 이에 속한다.
신품사현의 글은 송광사에 있는 유신의 〈보조국사비문〉과,
청평사의 탄연이 쓴 〈문수원기〉에 남아있다.
생황
국악기 중에서 유일한 화음악기이며, 아악기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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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과 역사
본래 중국의 전통 악기이다.
한국에 언제 유입되었는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사찰의 범종이나 탑에 이를 연주하는 사람이 장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 시대부터 고구려나 백제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에 그 형태와 이름의 뜻이 밝혀져 있다.
영조대 까지만 해도 중국에 악사를 보내 그 제조법을 구해 오기도
했으나, 그 후에는 연주법만 남아 전해지며 오늘에 이른다.
이용과 편성
독주나 합주에는 별로 쓰이지 않으며, 병주(竝奏)나 세악편성에
자주 쓰인다.
특히 단소와의 중주로 많이 쓰이는데, 이러한 음악의 형태를
'생소병주(笙簫竝奏)'라고 한다.
형태
원래는 박으로 만든 바가지에, 길고 짧은 여러 개의 대나무관을
꽂아서 만든다. 죽관에는 아래쪽에 지공(指孔)이 뚫려 있으며,
속에는 쇠로 만든 청이 있다.
원하는 음을 내는 죽관의 구멍을 막고 바가지 옆에 길게 나온 취구로
숨을 넣거나 들여 마시면 이 쇠청이 진동하면서 소리가 나게 된다.
죽관의 개수는 본래 13개, 17개, 19개, 23개, 36개 등으로 다양하였으나,
지금은 관이 17개인 것만을 사용한다.
17개 중 한 개의 관은 '윤관(閏管)' 또는 '의관(義管)'이라고 해서
사용하지 않고 16개만을 사용한다.
소리와 음역
음역은 황종(黃: E♭)부터 청남려(湳: A♭)까지이다.
의관을 제외한 16개의 관이 12율 4청성을 내었지만 향악에 쓰이기
시작하면서부터 더 넓은 음역을 가지게 되었다.
특징
국악기 중에서 유일한 화음악기이다. 음빛이 곱고 아름답다.
대개 3음을 동시에 내는데, 2음은 옥타브 소리이며 1음은 4도 또는
5도 아래의
유신(柳伸)
성명(姓名) |
유신(柳伸) |
본관(本貫) |
전주(全州) | ||
시대(時代) |
?∼1104(숙종 9) |
자(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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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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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履歷) |
?∼1104(숙종 9). 고려의 명신.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인(仁). 체구는 작았으나 담략이 있었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였고, 청렴과 근신으로 이름이 높았다. 일찍이, 기거사인(起居舍人)을 거쳐 청주목사가 되었는데 정치를 잘하였다. 1087년(선종 4) 예빈소경(禮賓少卿)으로 고주사(告奏使)가 되어 요나라에 다녀왔고, 1093년에는 공부시랑으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송나라로 가서 《책부원구 冊府元龜》를 가져왔다. 이어 급사중지주사(給事中知奏事)를 거쳐 1101년(숙종 6) 예부상서 동지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禮部尙書同知樞密院使翰林學士承旨)에 임명되고, 1103년에는 좌복야 정당문학(左僕射政堂文學)에 올랐다. 문종에서 숙종까지 5대를 섬기면서 충의로 일관하였다. 한때 조정에서 남경(南京)으로의 천도운동이 거론되었을 때,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서예에 뛰어나 김생(金生)·최우(崔瑀)·탄연(坦然) 등과 함께 신품사현(神品四賢)으로 일컬어지며, 특히 행서와 초서를 잘 썼다. 전라남도 승주군 송광사(松廣寺)의 불일보조국사탑비(佛日普昭國師塔碑)를 썼다. 상서우복야 정당문학으로 죽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신(忠愼)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槿域書畵徵. 〈朴龍雲〉 |
승평부(昇平府) 조계산(曹溪山) 송광사(松廣寺)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비명(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지공주사(知公州事)부사(副使) 겸 권농사(勸農使)관구(管句) 학사(學士)장시랑(將仕郞) 겸예부상서(兼禮部尙書)이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김군수(金君綏)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碑文)을 짓고
문림랑(文林郞)이며 신호위장(神號衛長)인 신(臣) 유신(柳伸)은 교지(敎旨)를 받들어 비문을 쓰다
선나학(禪那學)의 근원은 가섭존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인도의 제28조인 달마대사가 이어받아 와서 진단(震旦)을 교화하였다. 이를 전해 받은 자들은 부전(不傳)으로써 전하였으며, 이를 닦는 사람들은 무수(無修)로써 닦아 엽엽(葉葉)이 상승(相承)하며 등등(燈燈)이 함께 비추었으니, 참으로 어찌 그리 기이한 것인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지 더욱 오래되어 불법(佛法)도 따라서 해이하여져서 학자(學者)들이 진언(陳言)만을 고수하여 밀지(密旨)를 망각할 뿐 아니라, 근본은 버리고 지말(枝末)을 따라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로 말미암아 관찰(觀察)하여 오입(悟入)하는 길이 막히고 문자(文字)로 희론(戱論)하는 발단(發端)이 봉기(鋒起)함으로써 정법안장(正法眼藏)은 거의 땅에 떨어졌다.
이러한 때에 한 스님이 있어 홀로 부위(浮僞)한 세속을 등지고 바르고 참된 종(宗)을 흠모하여, 언전(言詮)을 연마하여 진리에로 나아가는 데에서 시작하여 선종(禪定)을 닦아 지혜를 발명(發明)하는 것으로 마치고, 이러한 경지를 체득한 다음 이타(利他)인 법시(法施)에 전력하는 한편, 침체된 선풍(禪風)을 다시 진작(振作)하여 어두워진 조월(祖月)을 거듭 밝게 하였다면 참으로 가섭(迦葉)의 적손(嫡孫)이며 또한 달마(達磨)의 종자(宗子)로서 잘 이어받고 훌륭하게 조술(祖述)한 사람이라 할 만하다. 우리 스님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 하겠다.
스님의 휘(諱)는 지눌(知訥)이니 경서(京西)의 동주(洞州 : 황해도 서흥) 출신이다. 자호(自號)는 목우자(牧牛子)이며, 속성은 정씨(鄭氏)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광우(光遇)이니 국학(國學) 학정(學正)을 역임하였으며, 어머니는 조씨(趙氏)이니 개흥군부인(開興郡夫人)이다. 스님은 날 때부터 병이 많아 백약이 무효였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부처님께 기도하면서 만약 병을 낫게 하여 주시면 출가시켜 부처님을 섬기도록 하겠다고 서원을 세우자마자 병이 곧 완쾌되었다. 8살 때에 조계종(曹溪宗)의 운손(雲孫)인 종휘선사(宗暉禪師)를 은사로 하여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다. 이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불교를 수학(受學)하되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오직 도덕이 높은 스님이면 곧 찾아가서 배웠다. 지조가 고매(高邁)하여 무리 중에서 뛰어났다.
25살 때인 대정(大定) 22년 임인(壬寅)에 대선고시(大選考試)에 합격하였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남방(南方)으로 유행(遊行)하다가 창평(昌平) 청원사(淸源寺)에 이르러 주석(住錫)하였다. 우연히 어느 날 학료(學寮)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다가 정혜일체(定慧一體) 제3과에 이르러 “진여자성(眞如自性)이 기념하여 육근(六根)이 비록 견문각지(見聞覺知)하나 삼라만상에 오염되지 아니하고, 진여(眞如)의 성(性)은 항상 자재(自在)하다”는 구절에 이르러 깜짝 놀라면서 크게 기꺼워하여 미증유(未曾有)의 경지를 얻었다. 곧 일어나 불전(佛殿)을 돌아다니면서 외우고 생각하니 스스로 체험한 바가 컸다. 이 때부터 마음은 명리(名利)를 싫어하고 항상 깊은 산중에 숨어 각고정진(刻苦精進)하면서 도를 닦되 조차(造次)의 위급한 경우에도 구도(求道)의 정신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대정 25년 을사년(乙巳年)에 이르러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로 옮겨 주석하던 중,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이장자(李長者)가 지은 「화엄경합론(華嚴經合論)」을 보다가 거듭 신심(信心)을 일으켜 화엄경의 오묘한 이치를 찾아내고 깊이 숨어 있는 난해한 뜻을 드러내어 제가(諸家)의 설(說)과 비교하여 더욱 정통하였다. 이에 따라 전해(前解)가 점점 밝아져 항상 마음을 원돈관문(圓頓觀門)에 두었으며, 또한 말학(末學)들의 미몽(迷蒙)을 인도하여 못과 쐐기를 뽑아주고자 노력하였다. 그 때 마침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득재(得才)라는 선로(禪老)가 팔공산(八公山) 거조사(居祖寺)에 주석하고 있으면서 함께 정진하자고 간절히 초청하므로, 드디어 그곳으로 가서 머물렀다. 널리 여러 종파의 세상 명리(名利)를 포기한 고사(高士)들을 맞아들여 힘써 습정균혜(習定均慧)를 닦도록 간청하여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음이 여러 해였다.
승안(承安) 2년 무오년(戊午年) 봄에 몇 사람의 선려(禪侶)와 함께 삼의(三衣) 일발(一鉢)만 갖고 지리산(智異山)을 찾아가 상무주암(上無住庵)에 은거하였으니, 경치가 그윽하고 고요하여 천하에 제일이며 참으로 선객(禪客)이 거주할 만한 곳이었다. 스님은 여기서 모든 외연(外緣)을 물리치고 오로지 내관(內觀)에?? 전념하였다. 갈고 닦아 예리한 지혜를 발하며, 깊이 깊이 잠심(潛心)하여 궁극의 근원까지 궁구하였다. 그 동안 득법(得法)할 때마다 나타났던 몇가지의 서상(瑞相)에 대하여는, 말이 너무 번다(繁多)하여 비(碑)에는 싣지 않는다. 스님께서 일찍이 말씀하되 “내가 보문사(普門寺)에서 지낸 이후 10여년이 경과하였다. 비록 뜻을 얻고 부지런히 수행하여 허송한 적이 없으나 아직 정견(情見)이 사라지지 아니하여, 마치 어떤 물건이 가슴에 걸려 있어 원수와 함께 있는 것과 같아서 항상 꺼림직 하였다.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 주석하면서 정진하는 여가에 대혜보각선사(大慧普覺禪師)의 어록(語錄)을 보다가 ‘…… 선불재정처(禪不在靜處)하며 역부재요처(亦不在閙處)하고 부재일용응연처(不在日用應緣處)하며 부재사량분별처(不在思量分別處)니라. 연(然)이나 제일(第一)에 부득사각정처(不得捨却靜處)와 요처(閙處)와 일용응연처(日用應緣處)와 사량분별처(思量分別處)하고 참(參)하여야만 홀연히 눈이 열려서 바야흐로 이것이 바로 옥리사(屋裏事)임을 알 수 있느니라’라는 구절에 이르러 뜻이 딱 들어맞아 마음에 깨달으니, 자연히 가슴이 후련하며, 원수와 멀리한 것 같아서 곧 마음이 편안하였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혜해(慧解)가 점차로 높아져서 대중들의 종앙(宗仰)하는 바가 되었다. 5년 경신(庚申)에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로 옮겨서 11년간 대중을 지도하되, 혹은 담도(談道), 혹은 수선(修禪), 안거(安居), 두타(頭陀) 등을 함에 있어 한결같이 율장(律藏)에 의거하였다. 사방으로부터 스님과 신도들이 스님의 고매한 명성을 듣고 찾아와 수많은 대중이 운집하였다. 심지어 명예와 벼슬과 처자를 버리고,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함께 오기도 하고 입사(入社) 수도(修道)하겠다는 왕공(王公)·사서(士庶)들도 수백명에 이르렀다. 스님은 수도에만 자임(自任)할 뿐, 사람들이 칭찬하거나 비방하는 것에는 전혀 그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또한 자비와 인욕으로 후배(後輩)를 제접(提接)하였다. 비록 대중 중에 무례하게 뜻을 거역하는 자라도 오히려 능히 자비로 섭호(攝護)하고 항상 정(情)으로 통솔하되,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귀여워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 그리고 대중에게 송지(誦持)하기를 권함에는 항상 『r금강경(金剛經)』으로써 법을 삼도록 하고, 교의(敎義)를 연설함에는 『육조단경』을 강설하며, 통현장자(通玄長者)의 『화엄론(華嚴論)』으로써 주장을 펴고, 『대혜어록(大慧語錄)』으로써 함께 우익(羽翼)을 삼았다. 삼종문(三種門)을 열었는데,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경절문(徑截門)이니, 이 3문에 따라 수행하며 신입(信入)하는 자가 많았다. 그리하여 선학(禪學)의 왕성함은 근고(近古)에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스님은 또한 위의(威儀)가 엄숙하여 소의 걸음에 범의 눈길이었으며, 연거(燕居)할 때에도 태도가 근엄하여 몸가짐이 해이함이 없었고, 대중이 운력할 때에도 빠지는 적이 없을 뿐아니라 항상 솔선수범하였다. 억보산(億寶山)의 백운정사(白雲精舍), 적취암(積翠庵), 서석산(瑞石山)의 규봉난야(圭峯蘭若), 조월암(祖月庵) 등은 모두 스님께서 창건하고 왕래하면서 정진하던 곳이다. 희종 임금께서 동궁에 있을 때부터 스님의 명성을 듣고 흠모해 오다가, 보위(寶位)에 오른 후 왕명(王命)으로 송광산 길상사를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로 고치고 어필(御筆)로 편액을 써서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만수가사(滿繡袈裟) 한 벌을 하사하여 존경을 표하였으니, 스님을 광호(光護)하는 돈독한 정성은 다른 어떤 왕과도 견줄 데 없었다.
처음으로 스님이 남류(南遊)하면서 수행의 길에 오르고자 할 때, 동학도반(同學道伴)과 함께 약속하되, “나는 지금부터 깊은 곳에 숨어 향사(香社)를 맺고 전적으로 정혜(定慧)를 닦고자 하니, 스님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라 하니, 대중이 말하기를 “지금은 말법(末法)이므로 그렇게 할 시기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의문을 표시했다. 이 말을 들은 스님은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이르기를 “시기는 변천하지만 심성(心性)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교법(敎法)이 흥왕하거나 쇠퇴한다고 보는 것은 삼승(三乘)인 권학(權學)의 견해일 뿐이어늘, 지자(智者)가 어찌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중들은 모두 복종하면서 “옳은 말씀입니다. 뒷날 함께 결사(結社)를 맺으면 반드시 정혜결사(定慧結社)라 이름합시다”라고 하였다. 거조사(居祖寺)에 있을 때 과연 정혜사(定慧社)를 세우고 곧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었으니, 이는 초지(初志)를 이룬 것이다. 그 후 송광사(松廣寺)로 옮겨 결사를 맺고도 역시 정혜결사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얼마를 지난 후 멀지 않은 곳에 같은 이름(吉祥寺)이 있으므로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왕명을 받아 조계산 수선사라 개칭하였으니, 이름은 비록 다르나 뜻은 다르지 않다. 스님이 한결 같이 정혜에 뜻을 두었던 것이 이와 같았다.
대안(大安) 2년 봄 2월에 국사께서 어머니를 천도하기 위하여 수순(數旬) 동안 법회(法會)를 열었는데, 이때 결사 대중에게 이르기를 “나는 이제 세상에 있으면서 설법(說法)할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대중은 각각 정진에 노력하라”고 당부하였다. 얼마 후 3월 20일에 발병하여 8일만에 입적하였으니, 스님은 가실 때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시자(侍者)가 스님이 임종할 것을 알아차리고 임종게(臨終偈)를 청하는 한편 여러 가지 질문을 했더니 스님은 종용(從容)히 대답하였다. 야애(夜艾)에 이르러 방장실(方丈室)로 들어갔는데 문답이 처음과 같이 계속되었다. 새벽에 이르러 물으시기를 “오늘이 며칠인가?” 하므로 대답하되 “3월 27일입니다”라 하였다. 스님께서 법복(法服)을 입고 세수와 양치질을 한 다음, “이 눈은 조사(祖師)의 눈이 아니고, 이 코도 조사의 코가 아니며, 이 입은 어머니가 낳아주신 입이 아니고, 이 혀도 어머니가 낳아준 혀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법고(法鼓)를 쳐서 대중을 모이게 하고 육환장(六環杖)을 짚고 선법당(善法堂)으로 걸어 올라가서 축향(祝香)하고 법상에 올라 앉아 설법하는 것이 평상시와 같았다. 육환장을 떨치고 전날 밤 방장실중(方丈室中)에서 문답한 어구(語句)를 그대로 들고 이르되, “선법(禪法)의 영험(靈驗)이 불가사의함을 오늘 이 자리에서 대중에게 설파(說破)코자 한다. 대중들은 매(昧)하지 아니한 일착자(一着子)를 질문하라. 노한(老漢)도 또한 매하지 아니한 일착자로 대답하리라” 하고, 좌우를 돌아보고 손으로 육환장을 만지면서 이르기를 “산승(山僧)의 명근(命根)이 모든 사람들의 손에 있으니, 모든 사람들에게 일임한다”라 하고, 육환장을 횡(橫)으로 잡고 거꾸로 끌었다. “근골(筋骨)이 있는 자는 앞에 나오라” 하고 문득 발을 뻗어 법상(法床)에 걸터앉아 묻는대로 대답하되, 말소리가 또렷또렷하고 그 뜻도 자상하며 언변(言辯)이 조금도 걸림이 없었으니, 구족(具足)한 사실은 임종기(臨終記)의 내용과 같다. 마지막으로 어떤 스님이 묻기를 “옛날 유마거사가 비야리성(毘耶離城)에서 시질(示疾)한 것과, 오늘 조계산에서 목우자(牧牛子)가 작병(作病)한 것이 같은가? 다른가?” 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너희들은 같은지 다른지를 배워라” 하고, 주장자(柱杖子)를 잡고 몇 번 내리치고 말하되 “천가지 만가지가 모두 이 속에 있느니라” 하고, 주장자를 잡고 법상에 걸터앉아 부동자세로 고요히 입적하였다. 문도(門徒)들이 향등(香燈)을 베풀고 7일간 공양을 올렸다. 얼굴 빛은 생시와 같았으며, 수발(鬚髮)은 계속 자랐다. 다비(茶毘) 후 유골을 수습하니 오색이 찬란하였다. 사리(舍利)가 출현하였는데 큰 것이 30과(顆)이고, 적은 것은 무수하였으므로 수선사의 북쪽 기슭에 사리부도(舍利浮屠)를 세웠다.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크게 진도(震悼)하면서 시호를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탑호를 감로(甘露)라 하였다. 세수는 53세요, 법랍은 36이었다. 저술로는 「정혜결사문」·「상당록(上堂錄)」·「법어(法語)」·「가송(歌頌)」 각 1권이니, 종지(宗旨)를 밝게 발양(發揚)한 내용들이므로 모두 가히 읽을 만한 책들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스님께서 돌아가시니, 더욱 크게 돋보인다”라고 하였다. 스님은 능히 생명을 버리고 열반에 드시어 적멸세계(寂滅世界)에 우유(優遊)하고 자재(自在)하시니, 이는 반드시 몰량대인(沒量大人)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지도(至道)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다지 위대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왜 그런고 하니 노자(老子)는 학식보다 나를 아는 사람이 드문 것을 귀하게 여겼으며, 장자(莊子)는 살아감에 있어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하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옛날 도를 닦은 사람들은 모두 일반 사람과 같이 평범함을 보였다. 그들이 어찌 스스로 궤이(詭異)하며 기위(奇偉)한 자취를 자랑하여 남들이 알아주기를 희망하였겠는가? 세존(世尊)을 법중왕(法中王)이라 존칭하며, 신통작용(神通作用)으로 유희자재(遊戱自在)하지만 마지막으로 구시나가라 쌍림(雙林)에서 입적하실 무렵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제 등이 매우 아프니 곧 열반에 들 것이다”라 하시고, 드디어 오른쪽 갈비를 땅에 붙이고 발을 포갠 다음 입적하였다. 또 당(唐)나라 등은봉선사(鄧隱峯禪師)는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죽었는데, 비구니(比丘尼)가 된 누이동생이 와서 원망하기를 “노형(老兄 : 오빠)은 평생 동안 법률(法律)을 따르지 않더니, 죽어서도 사람들을 현혹한다”라면서 혀를 찼다. 이제 스님께서는 생전에 개당(開堂)하여 많은 법문(法門)을 보여주었거늘, 죽는 날에까지 다시 법고를 쳐서 대중을 운집하고 법상에 올라 설법한 다음, 법상에 걸터앉아 입적하였으니 이것이 도(道)에서 본다면 군더더기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대저 도의 작용은 방소(方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행함이 같지 않으므로 천하에 일리(一理)뿐이지만 백려(百慮)의 차별이 있고, 지방에서 출발하는 길은 다르지만 서울에 도착함은 같은 것이다.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그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또 역대(歷代)로 선문(禪門)의 많은 조사(祖師)들이 임종할 때 법을 부촉(付囑)함에 있어 반드시 신이(神異)를 나타내었으니, 승사(僧史)에 자세히 실려 있다. 과거 많은 스님들 중에 법상에 올라 앉아 설법하고 입적한 스님으로 흥선사(興善寺)의 유관(惟寬)은 상당(上堂)하여 임종게를 설하고 편안히 앉아 입멸(入滅)하였고, 수산성념선사(首山省念禪師)는 임종게를 남긴 다음 온종일 상당하여 설법하고 편안히 앉아 장왕(長往)하였으며, 서봉(瑞峯)의 지단선사(志端禪師)는 삭발 목욕하고 법상에 올라 앉아 대중들에게 하직하고 편안히 앉아 천화(遷化)하였고, 대령(大寧)의 은미선사(隱微禪師)는 상당하여 임종게를 설한 다음 탈화(脫化)한 사실들을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비방할 수 있겠는가?
슬프다! 상계(像季)의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의심은 많고 신심(信心)은 적어서 선각자(先覺者)들의 자비로 선교방편(善巧方便)으로써 개시(開示)하거나 지도하여 개시하는 마음을 일으키도록 하지 않으면 비록 성도(聖道)로 나아가고자 하더라도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스님의 마음을 짐작해 보건대 이것 역시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일단(一端)임을 알 수 있다. 스님께서 입적하신 이듬해에 사법제자(嗣法弟子)인 혜심(惠諶) 등이 스님의 행장(行狀)을 갖추어 임금께 올리고, “원하옵건대 스님의 행적(行跡)을 후세에 길이 전시(傳示)할 수 있도록 입비(立碑)를 윤허해 주소서”라고 간청하였다. 임금께서 이 주청을 받아들여 윤허하시고, 소신(小臣) 군수(君綏)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신(臣)이 유교(儒敎)를 수학(受學)하였으나 유학에도 변변치 못한데 하물며 불심(佛心)과 조인(祖印)인 방외(方外)의 논리에랴? 그러나 강박한 명명(明命)을 사양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유문(諛聞)한 천식(淺識)을 모두 동원하여 감히 스님의 성미(盛美)를 비면(碑面)에 나타내려고 한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손을 들어 아이에게 달을 가리키지만,
달은 본시 손가락 끝에 있지 않는 것을
언어(言語)로써 고구정녕(苦口叮嚀) 알려주려 하여도
오묘(奧妙)한 그 진리는 언어(言語) 속에 없는 것을 ①
사십구년(四十九年) 설법(說法)하신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여!
중생들의 근기(根機) 따라 팔만문(八萬門)이 열렸네!
맹팔랑(孟八郞)이 망치 들고 조관(祖關)을 분쇄하고
오직 하나뿐인 최후관문(最後關門) 통과하였다. ②
영산회상(靈山會上) 설법(說法) 때 천파화(天波花)를 거시(擧示)하니
백만대중(百萬大衆) 운집 중에 가섭(迦葉)만 미소(微笑)하다.
달마대사(達磨大師) 소림굴(少林窟)에 앉아 면벽(面壁)할 적에
영특한 혜가대사(慧可大師) 팔을 베어 바쳤도다. ③
열반(涅槃) 묘심(妙心) 나의 법등(法燈) 너에게 전(傳)하노니
유(有)도 무(無)도 일(一)도 이(二)도 아닌 그 마음이여!
일법(一法)과 다법(多法) 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들이
천차(千差)요 만별(萬別)이나 그 모양은 둘 아닐세. ④
청풍불(淸風拂) 명월조(明月照)에 무한한 그 풍경(風景)을
모든 중생 수용(受用)해도 무진(無盡)한 보고(寶庫)일세.
과거 현재 미래 세상(世上) 위인(偉人)이 나타나서
위법망구(爲法忘軀) 고해정진 혜명(慧命)을 이었도다. ⑤
생사(生死)를 초월하여 열반세계 우유(優游)하니
마치 농중(籠中)에 갇힌 새가 벗어남과 같네!
거울같이 맑고 밝은 스님의 정신세계
청정무구(淸淨無垢) 티가 없이 법계(法界)에 두루하네! ⑥
경상북도 예천군의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서
통현장자(通玄長者) 화엄론(華嚴論)을 자세히 열람하다.
전라남도 순천군의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에서
법문을 마치시고 법상(法床)에서 입적(入寂)하다. ⑦
일생(一生)동안 갈고 닦아 맑고 깊은 선종수(禪定水)
모든 번뇌 사라지고 담적(湛寂)한 해인삼매(海印三昧)
혁혁(赫赫)한 지혜 광명 그 횃불을 높이 드니
그 광명(光明) 십방세계(十方世界) 골고루 비추시도다. ⑧
달마(達磨)가 동토(東土)를 찾아온 뜻을 물음 대해
조주(趙州)는 그 물음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네.
연꽃처럼 맑고 밝아 향기로운 그 법력(法力)
걸림없는 사변재(四辯才)로 진종(眞宗)을 연설하다. ⑨
사방(四方)에서 구름처럼 모여든 치백(緇白) 중(中)에는
수백명(數百名) 왕공사서(王公士庶) 수선사(修禪社)에 입사(入社)했네!
현하(懸河)같은 변재(辯才)로써 종지(宗旨)를 천양하니
일음(一音)으로 용용(舂容)한 그 모습 부루방(富樓邦) 같네! ⑩
나고 죽는 인생살이 자세히 살펴보니
유여몽환포영(猶如夢幻泡影)이며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일세.
진(眞)과 망(妄)이 어찌 다르랴! 망(妄)이 곧 진(眞)이니,
손등과 손바닥이 둘이 아닌 것과 같네! ⑪
슬프도다! 법상(法床)에서 석장(錫杖)을 떨치시니
이 세상(世上)의 삼라만상 모두가 하나로다.
훈훈한 봄바람은 버들가지 위에 불고
쏟아지는 소낙비는 배꽃을 강타(强打)하다. ⑫
대금(大金) 대안(大安) 3년 신미(辛未) 12월 일에 전전(殿前) 보창(寶昌)은 비문을 새기고, 대금(大金) 숭경(崇慶) 2년 계유(癸酉) 4월 일에 내시(內侍) 창락궁(昌樂宮) 녹사(錄事) 신(臣) 김진(金振)은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석을 세우다.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4】(1997)〕
고려시대
【그림과 글씨】 그림은 국초 이래 화가 양성을 위하여 도화원(圖畵院)을 설치하였다. 대표적 화가로는 《예성강도(禮成江圖)》의 이령(李寧),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의 이광필(李光弼),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의 공민왕, 혜허 등이 유명하다.
전하는 작품으로는 《천산대렵도》 《음산대렵도(陰山大獵圖)》, 이제현(李齊賢)의 초상화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안향(安珦)의 초상화가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있고, 혜허의 양유관음상이 일본에 있다. 벽화로는 모란과 들국화를 그린 예산 수덕사의 벽화와 사천왕상과 보살상을 그린 부석사 조사당의 벽화가 현존한다. 개풍군 수락암동(水落岩洞) 및 장단군 법당방(法堂坊) 고분의 벽화가 있다.
고려시대의 서체(書體)는 무신 집권기까지는 왕희지체(王羲之體)와 구양순체(歐陽詢體)가 유행하였고, 충선왕 때부터는 조맹부체(趙孟體)인 송설체(松雪體)가 유행하여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다. 그 중 유명한 사람은 유신(柳伸)·탄연(坦然)·최우(崔瑀)·이암(李) ·유공권(柳公權)·한수(韓脩) 등이다.
한국 서예
■ 서예 개요
━개론
ㅇ동양예술의 한분야인 ‘서예’는 달리 ‘서도’라고도 한다.
ㅇ이 서예는 중국에서 후 한 이래 종이의 발명, 붓 개량으로 성행하기
시작하여‘위/ 진나라’에 이르러 ‘왕희지’ 부자의 출현으로 ‘왕희지체’가 등장하면서부터 전성기를 이루었다.
ㅇ이러한 한문 글씨체를 판독하여, 역사유물을 감별하는 학문을 ‘금석학’이
라고 한다.
━중국 형 서체 갈래
ㅇ전서체: 우리가 대하는 ‘한문옥편’의 글씨체를 말하며,
달리 ‘전자체’라 한다.
ㅇ예서체: 중국 진나라 때에 ‘운양’ 지방의 옥리(교도서 관리)인
‘정막’이 ‘전서체’의 번잡 한 것을 생략해 만들었다.
ㅇ행서체: ’해서체’와 ‘초서체’의 중간 정도의 글씨체를 말한다.
ㅇ초서체(오늘날의 속기 체)
━흘리어 쓰는 글씨체를 말하며 달리 ‘흘림체’라고도 한다.
한문의 획순이 너무 많아 여러 번 획을 그어야하는 불편함을 덜
자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대체로 한 획으로 한자 1글자를 흘리어
쓰도록 되어있다.
━한국형 서체갈래
ㅇ해서체
━이는 중국형 서체인 ’예서체’에서 발달 한 것으로, 보통 붓글씨
하면 이 글씨체를 말하고, 한글을 쓸 때에 대체로 이 글씨체를
이용한다.
흔히 ‘한석봉 글씨체’라고하며 달리 ‘해자체/ 진서체’ 등으로
불린다.
ㅇ궁서체
━중국 형 서체에서 흘림체로 ‘초서체’가있다. 그런데 한글에서도
‘흘림체’가있는데, 이는 ‘초서체’와 같은 ‘속기 체’가아니다.
획순은 그대로 두고 다만 그 글씨체를 흘려서 쓰는 것에
불과하다.
이를 ‘궁서체’라고하며 조선시대에 있어 궁궐에 있는 여인들이
사용하였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문화재와의관계
ㅇ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서예에 능한 이의 필적은 현재 전하는
문화재에서 많이 접할 수 있다.
특히, 예술분야의 문화재중에는 더욱 그러하다.
비석에 있어 비문, 각종건조물의 이름을 알리는 편액(현판) 등이
바로그것이다.
목판 또는 금속활자의 자체 또한 그러하고,
글씨와 관계 하지 아니하고는 역사 그 자체도 논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 서예 글체(시대별)
━고려시대서체
ㅇ고려초기에는 ‘구양순체’와 ‘왕희지체’가유행하였고, 후기에는
송설체(조맹부체)가 유행하였다.
ㅇ 이 송설체는 충선왕이 중국에서 ‘송설 조맹부’와 교제 하면서
익혔다가, 귀국하여 고려에 전래시킨 글씨체이다.
우리나라에서 송설체의 대가 꼽히는 이는 고려 충선왕 때의
‘이암’ 등이 있는데, 그는 송설체의 정신을 얻은 동방 최초의
인물로 불리 엇다.
━조선시대서체
①개요
ㅇ글씨를 ‘서예’라 하여 매우중요시하였다.
고려 말 이래 원나라 ‘조맹부’의‘송설체’가 유행하였고,
후기에는‘추사체’라는 한국형 글씨체가 등장하였다.
ㅇ송설체의대표자는 ‘안평대군’이었다. 명종 때의 ‘양사언’은 초서,
선조 때의 석봉‘한호’는 해서, 중종 때의 ‘김 유’는 ‘인수체’로
유명하였다.
조선후기에는 김정희/ 신위/ 조광진 등이 명필로써 이름을떨쳤다.
② 양송체
ㅇ율곡 학파의 양대 수장이었던 우 암 송시열(1607~1689년)’과 동춘 송준길(1606~1672년)의 글씨체를 합하여 ‘양송체’라고 한다.
■ 서예가
━신품 4현
ㅇ신라인 김생,
고려인으로 문종 때 유신, 인종 때 탄연, 고종 때 최우등이다.
-신라서예가
①김 생
ㅇ서예의 정도가 신의경지에 이르렀다는 ‘신품4인’ 중 한사람으로
우리나라서예의 원조(해동필가 원조)로서 ‘해동서성’으로 불리
운다.
ㅇ한편 고려왕조에 들어 고려사신 ‘홍관’이 중국 송나라에 갈 때에 ‘김생’ 의 글씨를 가져다 보이자 송나라에서는 ‘왕희지’에 비할 만한 천하 명필 이라 극찬하였다한다.
그 후로 중국사신은 김생 필적을 보배로 알고 이를 구하여 귀국하였다한다.
ㅇ남긴 필적= 백률사 석당기(경주분관), 백월서운탑비(경북영천),
창립 비(경북경주)
②요극일(신라 또는 고려인)
ㅇ ‘구양순체’에 능하며, 이 ‘구양순체’가 신라말기부터 고려시대에 성행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ㅇ ‘3국사기 김 생 전’에 보면 ‘요극일’에 관한기록이 있는데, 벼슬이 시중 겸 시서학사 에 이르렀고, 필법은 ‘구양순’에게서 받았는데 ‘김 생’에게는 미치지 못하여도 품격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ㅇ ‘서거정’이 쓴 ‘필원잡기’에보면 우리 동방의 필법은 ‘김 생’이제일이고 ‘요극일/ 중 탄연/ 영업’이 그 다음이며 모두 중국 ‘왕희지’의 필법 또는
‘구양순’의 필법을 본받았다고 하였다.
ㅇ ‘지붕유설’에 보면 동방서가 이름 중에 고려의 사람 ‘요극일’이라고 밝히
고 있다.
ㅇ남긴 필적= ‘3국사기’에 ‘삼랑사 비’는 그가 쓴 것이라 하였다.
━고려시대서예가
①유신
ㅇ신품 4현 중 1인. 고려중기 문종대의 명필.
ㅇ ‘이상국 집’ 에 의하면 ‘왕자경’의 행서체를 써서 신의 경지(신경)에 이르렀고 신라의 김생, 고려 중 탄연/최우 다음으로 넷째 가는 명필 이라하였다.
ㅇ남긴 필적= 송광사 불일 보조국사 탑비 등.
②최우 : 신품 4현 중 1인. 고려 고종 때의 명필.
③탄연 : 신품 4현 중 1인. 고려 인종 때의 명필. 성격이 또한 고상
하고 글씨는 ‘구양순’의 체를 본받았다.
‘서거정’이쓴 ‘필원잡기’에 보면, 동국의 필법에 ‘김 생’이제일이요,
요극일, 영업, 탄연이 다음 간다고 말 하였다.
ㅇ남긴 필적= 춘천문주원비, 예천복룡사비, 삼각산 승가굴증수비 등을 썼
다.
④홍관 : 고려 인종 때의 명필, 신라 ‘김생’의 필법을 본 받았다.
중국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김생’의 행초서 1권을 가지고
가서 그들로부터 ‘왕희지’에 비길 만 한 천하의 명필이라고 격찬을
받은 바 있다.
ㅇ남긴 필적= ‘해동역사’에 의하면 ‘보문청연이각’의 서화를 ‘홍관’이그렸다
고하며,‘보전화루’의 병풍/ 편액이 그의 필적이라 적고 있다..
⑤유공권 : 고려중기의 명필.
⑥이 암.:고려 말기의 명필. 서도에 뛰어나 동국의 ‘조자앙’이라고
하였고, ‘대갑 편’을 옮겨 써서 왕에게 올렸다.
그림으로는 묵죽을 잘하였다.
ㅇ남긴필적= 춘천 청평산의 문수원장경비등.
━조선시대서예가
①김유 : 조선초기의 명필, 행/ 초서를 잘 썼고 문명이 당대에 높았
다.
②김정희(추사)
ㅇ개요
━월령위 김한신(영조부마/ 1720~1758년)의 증손자 로서
‘김조순(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의 서체를 계승하였고,
양송체(우암 송시열/ 동춘 송준길 글씨를 합친 글씨체) 및 중국의
구양순/ 안진경체 로부터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 .
━당시까지 우리 서예의 근간이 되어 왔던 ‘구양순체’로 필력을 다진 다음 중국 한 나라의 예서체로 조종(뿌리)을 삼으면서 우리 역대의 필법과 중국 필법의 장처를 혼합 하여 패기에 넘치는 서체를 이룩하여 ‘추사체’ 또는 ‘완당 체’라는 서체를 남기게 되었다.
━이 사실은 유일한 혈육이던 서자 ‘김상우’에게 글씨 쓰는 법을 가르치는 글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글씨 쓰는 법은 ‘구양순’의 ‘예천명’이 아니며 손에 익힐 수 없다.”고 허두를 떼고는 “예서는 서법의 근본이니, 만약서도에 마음을 두고자 한다면 예서를 알지 않을 수 없다”고 못 박은 것이 그것이다.
ㅇ추사 김정희 업적
━그는 24세 때에 아버지를 따라 중국 베이징(북경)에 갔다가 그곳에서역대 문필가의 필적을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그 장점만을 모아 새로이 ‘추사체’를 개발 해 냈다.
━한편 그는 ‘금석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진흥왕순수비’를 처음으로 고중 하기도 하였다.
청조고증학파 실학자
ㅇ안진경 풍의 글씨를 쓰게 된 동기
━일찍이 ‘정조’는 ‘양송체’를 근간으로 하는 조선고유 서체를 익히 고 나서‘안진경체’의중후한 맛에 매료 되어 그가 가장 존경하던 우암 ‘송시열’과 충무공 ‘이순신’의신도비를 어제로 직접지은 다음 안진경 글씨를 집자하여 이를 쓰게 하였다.
이로부터 안진경체가 점차 유행하게 됨 으로 하여, 추사 ‘김정희’는 초기에 안진경 풍의 옹방감(1733~1818년) 글씨를 따라 쓰게 되었다.
③송시열(우암) : 조선중기 명신, 남긴 필적으로는 자운서원 비(경기파주),
노량대첩비(전남용남), 이순신충렬 묘비(전남용남/ 남해소재)가
있다.
④송준길(동춘) : 조선중기명신, 남긴 필적으로는 이시발 신도비(충북진천),
윤계순절비(남양), 이운갈(전북김제) 등이 있다.
⑤서봉오(석재) : 근대서화가. 1898년 중국에 유학하여 거기서 당시 유폐생활을 하던 대원군, 망명중인 민영익 등과 교우 하면서 서화 세계의 깊이를 쌓은 뒤, 1905년 귀국 해서는 ‘교남시 서화연구회’를 만들어 경북대구를 중심으로 후진 양성을 했다.
ㅇ그는 풍류를 좋아 하여 8가지 능하여 ‘8천석’이라고 불리 웠다 한다.
‘시/ 글씨/ 그림/ 가야금/ 장기/ 바득/ 의학’ 등
⑥신위(자하):조선말기의 3절(시/ 서도/ 그림에 능한 자), 그는 조선 개국 이후에 시 짓기(시작)를가장 많이 한 인물로, 이후 백년이 지난 후의 시인들도 모두 그를 작시법(시 짓는 법)의 스승으로 추대하였다.
또한 필법 및 화품이 다 신의 경지(신경)에 이르러 그가 쓰고 그린종이조각 하나라도 보배로서 전 하여진다.
ㅇ남긴 필적= 경수당전고, 분여 록
⑦안동 김씨일가(김수증/ 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김조순/ 김병주)
⇒대한민국/ 일중 ‘김충현’ 참고
⑧안평대군 : 조선세종의 셋째 아들, 남긴 필적= 세종영릉신도비.
⑨양사언(봉래/ 완구/ 창구/ 해용) : 조선중기 명필, 해서 및 초서를
잘 썼다.
⑩조광진(구눌/ 눌인)
ㅇ조선 후기 명필. ‘자하신위/ 추사 김정희’ 등과 사귀 었으며
‘이광사’의 글씨를 배우고‘안로공’의 법수를 얻었으며, 행초(행서 및
초서)는 유석암, 지예는 ‘장수옥’을 따랐다.
ㅇ그의 서풍은 침착하고도 비후 하며 정중하고 웅기하여 중국의 사신이 그의 지예를 보고 동국(한국)에 이러한 명필이 있는가 고 찾았으나 이미 죽은후라 한탄하며 탑본을 얻어 가지고 갔다는 일화도 있다.
⑪한호(석봉) : 흔히 ‘한석봉’이라 부르는데 ‘석봉’은 ‘한호’의호이다.
그는 ‘진체’의 대가로서 해/ 예/ 초서에 모두 능 하였으며,
중국에까지 왕우군/ 안진경등과서로 필적 하리라는 평을 얻
어 후대에 까지 그 영향을 미치니 그의 필적으로된 석봉
서법/ 석봉천자문등의 모사본은 오늘날 까지 행해 지고
있다.
━대한민국서예가
①일중 김충현(1921년~)
ㅇ개요
━‘한석봉’의서체에 대한 계보는 이를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김수증/ 안진경/김정희/ 윤용구/ 김용진’ 등에 의해 전승되었다. .
━여기서 ‘김수증’은 1623년의 인조 반정이후 후기 조선왕조를 이끌어 온
율곡 학파의중심 가문중 하나 였던 안동김씨 집안의 후예로서
이후 그 후손인 김조순⇒김병주⇒김충현등에 의해 전승 되고 있다.’
━이 ‘김수종’ 가문에서는 글씨를 ‘한석봉 체’에 그 뿌리를 두고
‘안진경체’를가미 한‘양송체’를 주로 따라 쓰게 되었다. .
ㅇ계보
━곡운 김수증(1624~1701년) : ‘김수항’의 맏형
* ’한석봉’의 글씨체를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인물로, 금석학에 밝고 전서와 예서에 능하여 수많은 비석의 비전은 물론 ‘자운서원묘정비
/정몽주신도비’ 등 예서로 쓴 ‘비’를 남기었다.
━문곡 김수항(1629~1689년)의 아들 6형제(몽와 김창집/ 농암
김창협/ 삼연 김창흡)
*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1676~1759년)을 길러내며 조선 고유 색짙은 진경문화를 주도 하게 되자 숙종(1675년)에서 정조(1800년)에 이르는 1백 25년간의 조선 고유문화 절정기인 진경시대를 이끌었다.
━풍고 김조순(1764~1831년)
* 당시 임금인 ‘순조’ 장인(국구)으로서 안동 김씨세도정치를 이끈 중심인물, 그는 ‘청조고증학’에 밝은 ‘북학파’로서, 추사 ‘김정희’와 후손인 ‘김병주’에게 그 서체를 전승하였다.
━창녕위 김병주(1819~1853년)
* 추사체(김정희 체)를 구사 하며, 금산 ‘보석사’에 세운 의승 ‘영규 대사 비’를 남겼다.
━일중 김충현(1921년~
* 일어와 영어를 배우며 한글의 중요성을 깨우치게되어 중동학교재학 중에“우리 글씨 쓰는 법”을 저술 하고 위당 ‘정인보(국어학자)’의 인정을 받으면서 이를 기반으로 한글서체 정립에 평생을 바쳐 한글서예의 성립을 가능하게 하였다.
* 그리고 가학을 바탕으로 현대 감각에 맞는 새로운 서체를 개발 하려 노력한 결과 ‘안진경’체로 필력을 얻고 나서 ‘장천비/ 예기비’ 등 중국한나라시대의 예서를 조종으로 삼고 한글 옛 글체의 필법인 전서체를 가미해서
‘일중체’를 이룩하였다.
* 그는 윤용구(추사 ‘김정희’로부터 간접적인 영향을 받음)로부터 추사이래로 전해지는 ‘서법정전’을 전수받은 한편, 조부 ‘김영한’ 및 일가인 ‘김용진’을 통해 초창석등 청조 말기 ‘비학파’들의 서법을접 한바 있다.
* 그의 행서 소자(작은 글씨로 쓴 행서)가동글 동글 부드러 운 맛이 나서 마치 청나라 서예 대가인 석암 유용(1719~1804년)의 글씨 와같은 풍미가 있다.
* 그러나 ‘일중체’에서미흡한점은우리전통적인미적감각이라고할수있는
강경한 암석기(바위같은기운)가 부족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전하는 서예 작품
━추사 김정희 관련 유물
①김정희 종가 유물일괄
ㅇ보물 제547호 김정희 종가 유물일괄.
서울 용산구 용산동 국립중앙박물관소장
ㅇ김정희 인장/ 벼루/ 붓
②예산백송
ㅇ천연기념물 제106호(1962.12.3 ) 예산백송.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9평)
③김정희 종가 : 충남유형문화재제43호
④완당 세한도 : 국보 제180호 완당 세한도 1축. 개인소장(서울 종
로구 가회동)
━석봉한호 관련 유물
①개요
ㅇ석봉 ‘한호’의유물로 전해지고 있는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작 등 10여점이 있다.
그중 ‘한석봉 증유 여장서첩’은 보물 제1078호로 지정되어 있고,
1998년 9월 23일공개된 금강산 유람기인 ‘유금강산기’는 석봉
‘한호’의 최고의 명필로 손꼽히는 것으로 이 책은 빠른 시일 내에
국보로 지정 될 것으로 보인다.
②유 금강산기(금강산 유람기)
ㅇ개요
━석봉 ‘한호’의 최고 수준의 작품으로 말로만 전해져 오던 것이
1998년 9월 23일 처음 공개 되었다.
━이 책은 빠른 시일 내에 국보로 지정 될 것으로 보인다.
ㅇ규격 및 체제
━가로 20cm, 세로 25.5cm의 한지에 모두 12쪽 인이 ‘유금강산기’는 석봉 ‘한호’와 친 하게 지낸 문장가 ‘최 림’과 ‘이호민’이 글을 짓고 이를석봉 ‘한호’가 글씨로 옮긴 것이다.
━이 가운데 앞부분 6쪽은 ‘회림’이석봉 ‘한호’와 1603년(선조36) 8월에 함께 금강산을 유람 한 뒤 그 감상을 적은 뒷부분 6쪽은 ‘이호민’이석봉 ‘한호’ 일생으로부터 금강산이야기를 전해 듣고 동행 하지 못 했음을 애석 해 하는 심정을 토로 한 것이다.
━당시 금강산유람에는 석봉 한호, 최 림, 이광준 강원도 관찰사 및 그의
두 아들이 동행하였다.
ㅇ글씨체 : 해서체+ 행서(흘림체)
ㅇ소장자 : 부산시 거주 도종현
③한석봉 증유여장서첩
ㅇ보물 제1078호 한석봉 증유여장서첩, 서울용산구 용산동 국립중
앙 박물관소장.
━기타인물 에 대한 서예유물
①⇒예술편\ 공예\ 비석참고
②충재권발 종손가 소장 유묵
ㅇ보물 제902호 충재권발 종손가 소장 유묵, 경북봉화군 봉화읍
안에 보존.
③유인석 의병장 유묵
ㅇ 1900년대 의병장이었던 ‘유인석’은 1908년 연해주로 망명 하여
해외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ㅇ그가 남긴 유묵으로는 ‘나라를 위하여 싸우자(위국투쟁)는 내용이 있다.
④김옥균 유묵
ㅇ ‘김옥균’은 1884년(고종21)에 일어난 갑신정변당시 14개조 의
혁신정강을 내 걸고 개혁운동을 주도한 인물로서,
그가 남긴 유목으로는 ‘믿음이도와 근원이다(신위도근원)’는
내용이 있다.
⑤안중군 의사 유묵
ㅇ보물 제569호안중근의사유묵,
1)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泰和),서울 성북구 정동 안에 보존.
2)일일불독서구중생자극(一日不讀書口中生刺棘),
서울중구 필동3가 동국대 도서관안에 보존.
3)연년세세화상이세세연연입불동(年年歲歲花相以歲歲年年入不同),
서울종로 경운동 안에 보존.
4)치악의악식자부족거의(恥惡衣惡食者不輿議),
서울종로구세종로1가 안에 보존.
5)동양대세사작현유지남아개현안안화국미성유용개정계불개직인
(東洋大勢思雀玄有志男兒豈玄安眼和國未成猶傭槪政界不改直燐),
서울동작구 상도동 숭전대학교 박물관안에 보존.
6)견이사의견위수명(見利思義見危授命),
부산 동대신동 동아대학교 박물관안에 보존.
7)용공난용속구기재(庸工難교用速拘奇材)
서울중구 도동 안중근의사기념관에 보존.
8)인무속려난성대업(人無遠慮難成大業)
서울상도동 숭전대학교박물관에 보존.
9)오노봉위필청천일장지상작연지사아복중시
(五老峰爲筆靑天一丈紙湘作硯池寫我腹中詩)
서울마포구 상수동 홍익대학교 박물관안에 보존.
10)세한연후지송백지불조(歲寒然後知松栢之不彫),
서울중구 도동 안중근의사기념관에 보존.
11)사군천리이표촌성망안욕아신물부정
(思君千里以表寸誠望眼慾아辛勿負情) 광주동구계림동안에보존.
12)장부난사심여철의사임위기사운 (丈夫難死心如鐵義士臨危氣似雲)
서울동작구 상도동 숭전대학교박물관안에 보존.
13)박학어문약문이례(博學於文約文以禮) 서울중구 도동 안중근의사 기념관 보존.
14)제일강(횡서) (第一江) 서울동작구 상도동 숭전대학교박물관안에 보존.
15)청초당(靑草堂), 서울용산구 서빙고동안에 보존.
16)고막고어자지(孤莫孤於自持) 서울종로구 삼청동안에 보존.
17)인지당(횡서) (仁智堂),서울종로구 창신동안에 보존.
18)인내(忍耐),서울마포구 공덕동안에 보존.
19)극락(횡서) (極樂),서울성북구 정능동 안에 보존.
20)운제(횡서) (雲齋),서울종로구 효자동안에 보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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