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골문자보다 천년 앞선 동이(한민족) 골각문자 발표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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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관리자 email gukhak@gukhak.org
작 성 일 2009-07-20 13:46:01 조 회 수 1682
제 목 後漢書 東夷傳의 새로운 해석을 통한 東夷 인식-참고자료1
내 용

(참고자료 01)

史記 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 第五十五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 都王險.

會孝惠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眞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元封二年, 漢使涉何譙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上, 臨浿水, 使御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 卽渡, 馳入塞, 遂歸報天子曰殺朝鮮將. 上爲其名美, 卽不詰, 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發兵襲攻殺何. 天子募罪人擊朝鮮.

其秋, 遣樓船將軍楊僕從齊浮渤海兵五萬人, 左將軍荀彘出遼東討右渠. 右渠發兵距險. 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 敗散, 多還走, 坐法斬. 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 右渠城守, 窺知樓船軍少, 卽出城擊樓船, 樓船軍敗散走. 將軍楊僕失其衆, 遁山中十餘日, 稍求收散卒, 復聚.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自前.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 (下略)

 

 

조선왕 滿은 예전의 燕 사람이다.

처음 燕의 전성기로부터 일찍이 眞番과 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秦이 燕을 멸망시킨 이후에는 遼東의 변방까지 소속시켰는데, 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浿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燕에 복속시켰다.

燕王 盧綰이 漢을 배반하고 匈奴로 들어가자 滿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명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遼東의 요새를 나와 浿水를 건너 秦의 예전 空地인 上下鄣에 살았다. 점차 眞番과 朝鮮의 蠻夷 및 예전 燕과 齊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王이 되었으며 王儉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때는 마침 孝惠와 高后의 시대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遼東太守는 곧 滿을 외신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여,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모든 蠻夷의 君長이 漢 天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天子도 이를 듣고 허락하였다. 이로써 滿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小邑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眞番과 臨屯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

아들을 거쳐 손자 右渠 때에 이르러 유인해낸 漢의 망명자 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 天子에게 入見치 않을 뿐만 아니라, 眞番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天子에게 謁見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元封 2년 漢은 사신 涉何를 보내어 右渠를 꾸짖고 회유하였으나, 右渠는 끝내 天子의 命을 받들려 하지 않았다. 涉何가 돌아가면서 국경인 浿水에 이르러 마부를 시켜 전송나온 朝鮮의 裨王 長을 찔러죽이고 바로 浿水를 건너 요새 안으로 달려 들어간 뒤, 天子에게 朝鮮의 將帥를 죽였다고 보고했다. 天子가 그 功을 기려 꾸짖지 않고, 涉何에게 遼東東部都尉의 벼슬을 내렸다. 이에 朝鮮은 涉何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 기급공격해 涉何를 죽이니, 天子는 죄인을 모집하여 朝鮮을 치게 하였다.

그해 가을에 樓船將軍 楊僕을 파견하여 齊로부터 渤海를 건너게 하고, 군사 5만으로 左將軍 荀彘는 遼東에 출격하여 右渠를 토벌하게 하였다. 右渠는 군사를 일으켜 험준한 곳에서 대항하였다.

左將軍인 卒正 多는 遼東의 군사를 이끌고 먼저 출병하였으나 싸움에 패하여 군사는 흩어지고, 多도 도망하여 돌아왔으므로 법에 따라 斬刑하였다. 樓船將軍은 齊의 병사 7천명으로 먼저 王險에 이르렀는데, 右渠가 城을 지키고 있으면서 樓船의 군사가 적음을 알아내고, 곧 성을 나와 樓船을 치니 樓船軍은 패배하여 흩어져 도망갔다. 장군 양복은 믾은 군사를 잃고 10여일을 산중에 숨어 살다가 점차 흩어진 병졸들을 다시 거두어 모아들였다. 左將軍도 朝鮮의 浿水 西軍을 쳤으나 깨뜨리고 전진할 수가 없었다.

天子는 두 장군의 전세가 유리하지 않다고 여기고, 衛山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가서 右渠를 달래게 하였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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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용

(참고자료 01)

史記 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 第五十五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 都王險.

會孝惠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眞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元封二年, 漢使涉何譙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上, 臨浿水, 使御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 卽渡, 馳入塞, 遂歸報天子曰殺朝鮮將. 上爲其名美, 卽不詰, 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發兵襲攻殺何. 天子募罪人擊朝鮮.

其秋, 遣樓船將軍楊僕從齊浮渤海兵五萬人, 左將軍荀彘出遼東討右渠. 右渠發兵距險. 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 敗散, 多還走, 坐法斬. 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 右渠城守, 窺知樓船軍少, 卽出城擊樓船, 樓船軍敗散走. 將軍楊僕失其衆, 遁山中十餘日, 稍求收散卒, 復聚.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自前.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 (下略)

 

 

조선왕 滿은 예전의 燕 사람이다.

처음 燕의 전성기로부터 일찍이 眞番과 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秦이 燕을 멸망시킨 이후에는 遼東의 변방까지 소속시켰는데, 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浿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燕에 복속시켰다.

燕王 盧綰이 漢을 배반하고 匈奴로 들어가자 滿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명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遼東의 요새를 나와 浿水를 건너 秦의 예전 空地인 上下鄣에 살았다. 점차 眞番과 朝鮮의 蠻夷 및 예전 燕과 齊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王이 되었으며 王儉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때는 마침 孝惠와 高后의 시대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遼東太守는 곧 滿을 외신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여,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모든 蠻夷의 君長이 漢 天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天子도 이를 듣고 허락하였다. 이로써 滿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小邑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眞番과 臨屯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

아들을 거쳐 손자 右渠 때에 이르러 유인해낸 漢의 망명자 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 天子에게 入見치 않을 뿐만 아니라, 眞番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天子에게 謁見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元封 2년 漢은 사신 涉何를 보내어 右渠를 꾸짖고 회유하였으나, 右渠는 끝내 天子의 命을 받들려 하지 않았다. 涉何가 돌아가면서 국경인 浿水에 이르러 마부를 시켜 전송나온 朝鮮의 裨王 長을 찔러죽이고 바로 浿水를 건너 요새 안으로 달려 들어간 뒤, 天子에게 朝鮮의 將帥를 죽였다고 보고했다. 天子가 그 功을 기려 꾸짖지 않고, 涉何에게 遼東東部都尉의 벼슬을 내렸다. 이에 朝鮮은 涉何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 기급공격해 涉何를 죽이니, 天子는 죄인을 모집하여 朝鮮을 치게 하였다.

그해 가을에 樓船將軍 楊僕을 파견하여 齊로부터 渤海를 건너게 하고, 군사 5만으로 左將軍 荀彘는 遼東에 출격하여 右渠를 토벌하게 하였다. 右渠는 군사를 일으켜 험준한 곳에서 대항하였다.

左將軍인 卒正 多는 遼東의 군사를 이끌고 먼저 출병하였으나 싸움에 패하여 군사는 흩어지고, 多도 도망하여 돌아왔으므로 법에 따라 斬刑하였다. 樓船將軍은 齊의 병사 7천명으로 먼저 王險에 이르렀는데, 右渠가 城을 지키고 있으면서 樓船의 군사가 적음을 알아내고, 곧 성을 나와 樓船을 치니 樓船軍은 패배하여 흩어져 도망갔다. 장군 양복은 믾은 군사를 잃고 10여일을 산중에 숨어 살다가 점차 흩어진 병졸들을 다시 거두어 모아들였다. 左將軍도 朝鮮의 浿水 西軍을 쳤으나 깨뜨리고 전진할 수가 없었다.

天子는 두 장군의 전세가 유리하지 않다고 여기고, 衛山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가서 右渠를 달래게 하였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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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자보다 천년 앞선 동이(한민족) 골각문자 발표 - 중국학자들|한글과 한자
미래를 위하여|조회 9597|추천 6|2008.10.24. 15:30http://cafe.daum.net/121315/CH9M/33 


 

 

[밝은 앞날][꿈은 이루어진다][꿈은 미래의 현실이다]


백두산 천지

 

[ 과거현재미래를 위해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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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지역은 석관묘(돌로 관을 만든 묘)의 주요 분포지역이고

또한 고인돌, 비파형동검 등 한민족 고대전통문화의 지역. 

 

 

 

 비파형 동검

 중국 산동성에서 은나라 갑골문보다 천년(1000년) 더 오래된 문자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발표되었다.

 

 

 

 

 

 

 

 

 

만주와 중국 동해안에서 은나라 갑골문 보다 더 오래된 글자들이

많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예전부터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중국학자들이 중국동해안의 고대문자를 공개했다.

물론 그 문자들의 극히 일부만 보도되었다. 

 

하지만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이 

언론 기사에 중국 고고학자들이

 

" 당시 산둥 지역은 한민족을 포함한 동이(東夷)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 골각문자는 동이문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 했고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고 지적했고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는 것.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는 말은

이미 많은 수의 동이문자 들이 이미 발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동이문자 계열]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

 

은나라 갑골문도 고대한민족의 글자를 배워간 것이라는 주장.

 

한자의 기원이 고대한국에 있다는 말.

 

고대한국의 문자가 중국한자의 기원이라는 말.

  

 

이에 대한 언론기사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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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자보다 1000년 앞선 골각문자 발견

4000 ~ 4500년 전 추정 … 동이족 문자 가능성

 

[중앙일보 2008.10.22]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甲骨)문자보다 1000년이나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문자가 발견됐다.

갑골문자는 중국 고대 상(商·BC 1600~1046년)나라의 수도인 은허(殷墟·허난성 안양현)에서

1899년 처음 발견된 이후 중국 최초의 문자로 인정받아 왔다.

산둥(山東)대 고고미술학연구소 류펑쥔(劉鳳君) 소장이 최근 중국 고고학 관계자들을 초청한 세미나에서

갑골문자 이전에 다른 형태의 골각(骨刻)문자가 산둥성 창러(昌樂)현 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홍콩 문회보(文匯報)가 21일 보도했다.

 

류 소장은 중국 고고미술학의 창시자로 학계의 명망이 깊은 학자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회과학원 왕위신(王宇信) 교수 등 은상문화협회(殷商文化協會) 관계자 5명은

모두 류 소장의 학설에 동의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세미나에서 이 문자는 ‘창러골각문’으로 이름 붙여졌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산둥성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골각문자(左),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문자(右).

 

류 소장은 산둥성 민간 소장가인 샤오광더(肖廣德)가 2004년부터 최근까지 창러현 지역 주변에서 수집한

수백 개의 골각문자를 연구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류 소장에 따르면 이들 도안은 소의 어깨뼈와 사슴·코끼리 뼈에 새겨져 있었다.

도안의 형태는 다양했다.

뼈 한 곳에 100여 개의 서로 다른 도안이 새겨진 것도 있고, 1~2개의 도안만 새겨진 뼈도 있다.

여러 개의 도안은 세로로 정렬돼 있어 특정 사안을 기록한 문자로 봐야 한다는 게 류 소장의 주장이다.

단순한 그림일 경우 이처럼 정렬된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점복(占卜)기록인 갑골문자와 달리 골각문자에선 점복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류 소장은 “뼈의 색깔과 석화(石化) 상태를 판단해 볼 때 문자를 새긴 연대는 4000~4500년 전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 산둥성의 룽산(龍山) 신석기 시대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함께 출토된 뼈로 만든 칼과 송곳은 전형적인 룽산 중·후기 시대의 도구들이었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당시 산둥 지역은 한민족을 포함한 동이(東夷)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 골각문자는 동이문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 소장은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류 소장은 이어 “안양(安陽)을 중심으로 한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20세기 중국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 갑골문자 발견이었다면

이번 골각문자 발견은 중국 역사를 지금보다 1000년 이전으로 돌리는 21세기 중국 고고학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홍콩=최형규 특파원

http://news.joins.com/article/3346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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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少昊)족은 지금의 산동반도 

소전(少典)족은 지금의 서안,함양 지역에 있었다.

 

고대한국 사람들이 건너가서 그 지역 원주민들에게 문명을 전하며

공동체를 이룬 것이 소호(少昊)족과 소전(少典)족.

 

소(少)라는 말은 적다 즉 드물다, 귀하다는 뜻.

아무데나 널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

 

소(少)라는 글자는 한강, 대동강, 압록강변에 있었던 (지금도 일부 남아있는)

[고대한국 3연성 중심 피라미드]를 뜻하는 글자로 본다. 

 

피라미드는 동이(東夷)민족의 것 - 설문해자 <- 관련글

 

즉 소호(少昊)나 소전(少典) 모두 고대한국 중심지에서 간 사람들이

그 곳 원주민에게 문명을 전하면서 공동체를 이룬 것.

 

중국의 시조로 통하는 [황제헌원씨]는 [소전의 아들(少典之子)]로 불리는데

이는 홍산문화를 통해서 서안,함양으로 이동한 고대한국인의 후손이라는 말로 본다.

지금의 교포2세, 3세 하는 식으로.

 

[염제신농씨(강신농씨)] 역시 [소전의 아들(少典之子)]로 불리는데

또한 [황제헌원씨]와 같은 경우로 본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염황지손(炎黃之孫)]이라 불러왔는데

이는 [염제신농씨]와 [황제헌원씨]의 자손이라는 말.

그런데 사실은 중국인들에 있어서 [염제신농씨]와 [황제헌원씨]는

핏줄의 선조인 면은 적고 문명의 선조인 면은 많다.

현 중국인들보다 현 한국인들이 [염제신농씨]와 [황제헌원씨]의 혈통과 더 가깝다.

 

이는 약 4~6천년전 아프리카계로 보이는 많은 수의 [지나족(가칭)]들이 중국 남부로 들어왔고  

약 2천년전 한나라 시대를 전후하여 중국 남부의 지나족들이

대거 중국에 편입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때 [중국인]들의 혈통이 많이 바뀌었다.

현 중국의 [한족]이 실제로 형성된 것은 약 2천년 정도밖에 안된다 하겠다.

 

한족(漢族)의 비밀  <- 관련글

 

5천년전인 [태호 복희씨]는 [염제신농씨]보다 더 전이지만

[동방의 인물]로 유명하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대체로 자신들을 그냥 [염황지손(炎黃之孫)]이라 불러왔다.

이는 아마도 그들 생각에도 [태호 복희씨]가 [한반도-만주] 출신임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리 보면 고대 중국 지도자는 

[염제신농씨] -> [황제헌원씨]-> [소호금천씨]-> [제곡고양씨]-> [제곡고신씨] -> [요임금] -> [순임금]으로 이어지고  

그 후에 [하나라 -> 상(은)나라 ->주나라]로 이어진다.

 

상나라(은나라)는 대강 3천6백년전부터 3천년전까지 존재.

 

 

                   상나라(은나라) 전성기 영역도



 


은나라 당시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중국 동해안을 중국역사책은 인방(人方)이라고 많이 기록하는데

이는 [인(人)의 지역] 이라는 말.

 

大라는 한자는 원래 [고대한국 중심의 훌륭한 사람들]을 그린 것이고

人이라는 글자는 그 사람들에게 교화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는 동이(東夷) 즉 고대한국인을 뜻하는 글자인 [이(夷)]자를 보아도 알 수 있다.

 

[夷(이)-갑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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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internationalscientific.org/CharacterASP/CharacterEtymology.aspx?characterInput=%E5%A4%B7&submitButton1=Etym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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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夷(이)-갑골문]은 고대한국인(大)가 주변지역 사람들(人)을 교화하는 모습.

단군신화에서 곰토템 부족(熊:웅)이 인간다운 인간인 인(人)이 되었다는 것도 이러함을 뜻한다.

동물 곰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짐승 같은 사람들'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

 

물론 단군신화는 [한반도-만주]의 일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겠지만

고대한국지도자들의 문명전파는 [한반도-만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문명전파가 된다.

이는 [홍익인간]이라는 4자로 표현되어 있고

세계 학계에서는 이미 7천년전부터 시작된 [아리안의 이동]을 주목하게 한다.

 

[아리안의 이동]은 [게르만의 이동]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문명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 거의 모든 유럽어가 아리안의 말을 모태로 한다.

아리안어족은 인도-유럽어족이라고도 불린다.

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30864000

 

아리안에 대해서는 시간을 두고 차차 정리하기로 한다.

수메르인, 이집트 고대왕조, 인도의 브라만 등 거의 모든 고대문명은 

아리안을 모태로 한다.

 

아리수 - 아리랑 - 아리안 

 

아리 아리 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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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夷(이) - 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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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夷(이) - 전서]는 활(弓)의 원조이고 잘 다루는 고대한국인(大)을 뜻한다.

 

중국 최고의 한자사전이란은 [설문해자]도 [夷(이)]자는 大에서 유래되었고 

사람의 형상을 본뜬 글자라 쓰고 있다.(東夷從大大人也)

 

大자는 고대한국인을 뜻하는 글자 (간략정리) <- 관련글 (누르시면 열립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5~6천년 전에는 지구기온이 높아서 지형도가 대략 위와 같았다.

 

산동반도로 전해진 문명이 소호(少昊)문명이고

(물론 산동반도에는 그 이전에도 고대한국문명이 많이 전해진다.

그 중 하나가 대문구문명(大汶口文明 (약 6500년전 이미 시작))

 

서안,함양으로 전해진 문명이 소전(少典)문명.

 

고대한국 피라미드가 홍산, 서안(장안), 함양으로 전파되다.  <- 관련글

 

중국고대사는 소호(少昊)족과 소전(少典)족의 어우러짐으로 이루어진다.

소전(少典) 출신 지도자는 [염제신농씨(강신농씨)], [요임금] 등이고

소호(少昊) 출신 지도자는 [소호금천씨], [전욱고양씨], [순임금] 등인데

 

순임금이 동이족(고대한국인) 출신으로 유명한 것은

그가 [한반도-만주]와 가까운 소호(少昊) 출신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물론 요임금 역시 동이족의 후손이지만

소전(少典)은 소호(少昊)보다 비교적 고대한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성향이 강했다고 본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직접 계승한 일]은

단지 친아들이 아닌 인물에게 왕위를 계승했다는 부분만이 아니라    

소전(少典) 출신 지도자가 소호(少昊) 출신 인물에게 왕위를 계승시켰다는 데 큰 저기가 있다 하겠다.

 

말하자면 이는 본국(本國)인 고대한국에 대한 마음이 비교적 컸던

소호(少昊)족과의 정신적 통합을 시도했던 면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순임금 이후 대에 바로 중국 최초의 [나라]라는 [하나라]가 세워진다.

 

순임금 때까지는 본국인 고대한국을 의식해서인지 [나라]를 표방하지는 않는데

요임금과 순임금이 소전(少典)과 소호(少昊)의 상징적 통합을 이루어낸 면이 있어서인지

순임금 다음 대에 바로 중국 최초의 [나라]라는 [하나라]가 세워진 것.

 

중국에서 순임금의 아버지가 악명으로 전해내려오는 것은

소호(少昊) 출신인 그가 고대한국에 대한 마음이 강해서

아들인 순임금이 소전(少典)으로 가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후에 중국인들의 미움을 사서 괜한 악명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중국사서에 [소호금천씨]가 [황제헌원씨]의 아들처럼 기록되어 있는 것은

[황제헌원씨] 다음 대의 유명한 지도자가 [소호금천씨]인 것을

마치 [황제헌원씨]의 아들처럼 잘못 기록된 것이라 본다.

 

 

현존하는 중국 최고(古)의 책이라는 산해경의 대황동경(大荒東經)편에 보면

[소호금천씨]가 [전욱고양씨]를 동해(우리의 서해) 밖 위대한 골짜기에서

즉 [한반도-만주]에서 키웠다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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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海之外 大壑 少昊之國 少昊孺帝顓頊于此 

동해지외 대학 소호지국 소호유제전욱우차 

 

[풀이]

 

 동해 밖 위대한 골짜기에 소호의 나라가 있다.

소호가 임금 전욱을 거기서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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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소호금천씨]와 그 후계자 [전욱고양씨]는 고대한국 출신이고 (압록강변 집안 추정)

계속 고대한국에 살면서 지도자였다거나

혹은 중국땅으로 건너가 정신문명 물질문명을 전파했다는 얘기.

 

  압록강변 출신인 소호금천씨와 전욱고양씨  <- 관련글

 

 

신라왕족 중 김씨계와 가야왕족이 스스로를 소호금천씨(少昊 天氏)의 후손이라 했다거나

고구려 왕족이 스스로를 전욱고양씨(顓頊 陽氏)의 후손이라 했다는 것도

[소호금천씨]와 [전욱고양씨]가 고대한국인이라는 하나의 방증이 된다 하겠다.

 

 

이번에 고대부터 인방(人方)이라 불리던 중국 동해안에서

은나라 갑골문보다 천년 전 문자인 골각문자가 발견되었고

이를 중국 저명한 학자들이 발표, 동의 했다는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라 하겠다. 

 

사실은 만주와 중국동해안에서는 은 갑골문보다 훨씬 앞선 연대의 고대문자들이

상당히 오래 전부터 많이 발견되었다.

이는 '그들'의 동북꽁정 감행의 큰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위 기사에서 산동(山東)대 고고미술학연구소 류펑쥔(劉鳳君) 소장이

이번에 발표된 골각문자에 대해서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

라고 했는데

 

위 이야기는 은나라 갑골문과는 좀 다른 문자인 [동이문자]가 있고

은나라 갑골문의 부모뻘인 [동이문자]에 대해서 그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얘기.

이번에 발표된 골각문자는 그 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이라는 얘기.

 

중국학자들이 만주와 중국동해안에서 많이 발견했지만

그동안 숨겨왔던 [동이문자] 즉 [한자의 원형문자]를

이제야 일부만 발표했다는 얘기.

 

중국학자들은 학자적 양심에 따라 예전부터 발견된

모든 [동이문자]를 모두 공개하기 바란다.

 

 

첫째는 본 카페의 글들에도 많이 나오듯이

소호도 그렇고 소전도 그렇고 모두 고대한국에서 건너간 문명이고

그러므로 문자 또한 고대한국에서 건너간 것이 계승, 변화된 것이

은나라 갑골문이라 보아 왔는데

이번에 이미 예견된 그 실체가 조금 드러났을 뿐이라 하겠다.

 

중국 동해안이 은나라 지역보다 문명이 앞섰다는 것이 이번 골각문자의 발표로 다시 한번 드러났다 하겠는데

중국 동해안보다 더 문명이 앞섰던 [한반도-만주]에서 그보다 더 먼저 글자를 사용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도 시간문제라 본다.

 

사필귀정

 

 

 

 

 

 

 

 

전북 임실 옥정호

 

 

 

 

 

 

 

 

 

전북 전주에서

 

 

 

가끔이라도 눈을 들어 하늘을 보자.

보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자신이 달라지므로.

 

 

 

남산타워

 

세계최대 아니다.

동양최대도 아니다.

하지만 크다고 소중한 것이 아니다.

크건 작건

소중한 것이 소중한 것이다. 

 

 

 

 

 

 

 

 

 

 

이상 2장 - 수원화성 일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은 동서양 성의 장점을 고루 갖춰서 또한 유명한 성. 

 

 

 [ 이상 모두 퍼온 사진들 : 출처 - 디시인사이드 http://gall.dcinside.com/list.php?id=cool ]

 

 

 

 

 

 

 

[ 영원(永遠)에 합당(合當)한 삶을 살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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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의 정신은 [사해동포주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민족, 다른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공연히 배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다이나믹 코리아, 게이트웨이 투 더 월드 

 

[밝은 앞날][꿈은 이루어진다][꿈은 미래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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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갑골문보다 1천년 앞선 골각문(骨刻文)|| ☞ == 전서(篆書) == ☜
時丁|조회 39|추천 0|2012.01.04. 19:45

골각문

중국 초기 문자의 신발견 

 

중국 월간지  <진챠오>

  2010 10월호

/ 리웨이

 

 2010 7 15 한국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는 사람들로 가득 찾다. 여기에서 동아시아 상고역사의 문화기원이라는 국제 포럼 개최되었다. 한국 국학원의 초청을 받은 류펑쥔刘凤君 산동대학山东大学 미술고고학연구소 소장 이번 포럼에 참석하여 전문가들 앞에서 중국의 신비한 골각문자에 대해 소개했다. 골각문은 중국 초기의 문자로 3500~4500 전에 발생한 것이다. 회의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소장이 연구 중인 골각문에 대해 인정하고 시기와 문자의 성격 조자 법칙에 관한 분석과 연구는 과학적이며 골각문 발견은 세계 문자역사상의 하나의 중대한 발견이라고 입을 모았다.

 

 

류펑쥔 刘凤君

 

 

 작은 조각 위의 신비한 도안

 

  1980년대 부터 시작해 산동성 중부지역인 웨이팡潍坊, 지난济南 일대와 중국관중关中지역 内蒙古내몽고 赤峰츠펑 등지의 고문화 유적지에서 문자가 새겨진 조각, 활석기, 도기, 도기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조각이 95%이상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조각에 새겨진 골각문은 고고학자들이 들판에서 여러 출토한 있으나 다만 이를 중요시하지 않았고 벌레의 흔적이나 부식된 것으로만 이해했었다.

2005 봄에 류펑쥐 소장은 지난에서 신비한 도안이 새겨진 작은 조각을 발견하고 잠정적으로 이를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고 위에 새겨진 것은 초기의 문자이다. 라고 판단했다. 2007 류펑쥔 소장 산동성 창러현昌乐县 소장된 골각문을 다시 감정하고 문자는 중국 초기문자 중의 종류라고 공개했다. 그는 산동 龙山文化용산문화 시기의 유물로서 지금으로부터 4000~4500 전의 것이고 동이문자에 속하며 중국초기의 도화 상형문자이다. 이는 安阳안양현 殷墟은허지역의 점복 갑골문자와 차이기 있는데 점복 흔적이 없는 기록문자이다.”라고 발표했다.

 도안이 새겨진 조각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류펑쥔 소장은 수년간의 야외조사와 종합적인 연구를 진행한 결과 산동성 寿光쇼우광, 青州칭조우, 济南지난 등지와 관중지역 츠펑지역에서 골각문이 발견하였고, 골각문의 사용시기는 지금으로부터 3500 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류펑쥔 소장은 웨이팡 지난 일대 문화유적 조사 결과, 3 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첫째, 大汶口文化대문구문화에서 상나라 유적 조사 이러한 골각문을 발견한 적이 있다. 둘째, 작은 유적지에는 없고 대부분 십만 ㎡이상의 구모가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셋째, 골각문은 골각문이 발견된 유적지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길이 100~200미터 범위 내에서 발견되었다. 사실로부터 소장은 당시 골각문은 생활구역의 일부 범위 내에서 만들어 졌고, 유통이나 사용 범위도 한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추론해 냈다.

 

 

 

http://blog.naver.com/arirang/140111108666

 

 

骨刻文 造字법칙

 

2008 12, 山东省 昌乐县창러현에서 동쪽으로 10 떨어진 남쪽 기슭 저수지 변두리에서 비교적 평평한 돌에 새겨진 首阳山쇼우양샨 岩书암서 발견되었다. 岩书암서는 시기에 나누어 새겨졌는데, 번째 시기에 새겨진 것은 선이 가늘고 얕으며 동물이나 사람 형상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번째 시기에 새겨진 것은 선이 굵고 깊으며, 어떤 것은 깊이가 1㎝에 달한 것도 있었다. 어떤 문자는 번째 시기의 문자 위에 새겨졌다. 문자 형태는 매우 간단하고 획수는 적은 편이다. 쇼우양산 岩书암서는 비록 전후의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도화 상형문자가 중심이다. 이는 골각문자와 같은 시기의 가지 형태의 초기문자라고 있다. 쇼우양산 암서의 발견으로 골각문의 시기와 성격이 확실해졌다.

 골각문자는 그림이라고도 있다. 문자와 그림의 기원이 같은 것은 중국 초기 문자 표현형태 중의 하나이다. 2008년에 류펑쥔 소장은 물상의 심미 재창조성, 지사의 조합 상징성, 용봉문화와 봉황 자의 다양성은 골각문자가 造字조자된 3 법칙이라고 주장했다. 골각문에는 주로 상형과 지사가 있는데, 중국 문자가 성숙된 후에 나타난 육서(상형, 지사, 회의, 형성, 전주, 가차) 이론으로는 이를 완벽하게 해석할 없다. 골각문은 중국 상고미술의 심미적 특징을 체계적으로 반영하였고 회화에 가까운 창조적 사유가 들어있다.

 

 

골각문은 갑골문의 중요한 기원

 

안양 갑골문이 발견된 , 사람들은 갑골문은 육서를 구비한 성숙된 문자이므로 분명히 문자의 기원이 있을 것이고, 변화 발전 과정은 적어도 1000 이상 걸렸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류펑쥔 소장 골각문은 갑골문의 주요 기원이고, 골각문이 갑골문이 되기까지 실제로 1000 이상이 걸렸다고 주장했다. 安徽省안휘성 蚌埠双墩벙부슈앙둔 유적지에서 출토된 도기, 대문구 문화시기 도기에 새겨진 부호, 앙소문화 시기 그릇에 새겨진 부호 모두 종류의 문자생성과정에 나타난 指事지사 현상이다. 골각문은 전통을 직접 본받았고 지사와 상형을 핵심 造字조자 규칙으로 발전시켰다. 골각문은 대문구문화 시기 도기 부호에서 상나라 갑골문까지의 1000 이상의 시간을 보완하였다. 도기부호, 골각문, 갑골문과 금문등은 모두 일맥상통한다.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황제, 염제, 치우와 그들의 계승자 우는 대체적으로 용산문화 시기 혹은 그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활동했었다. 그들은 주로 화하华夏문화와 동이东夷문화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지역에서의 문자발견은 고도로 발달되었던 동이와 서하 문명연구에 깊이를 더하는 역할을 왔다. 문자들은 오랫동안 존재해 왔던 중국문명의 기원과 발생문제를 둘러싼 논쟁에 대해, 문명의 기원시기와 문명발생의 중심내용 면에서 실제적이고 확실한 설명을 제공했다. 아니라, 전설로 치부되던 시기 역사가 확실한 문자기록이 있는 역사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중국 월간지 金桥 금교 

/ 리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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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arirang/140111108666

 

단법인 국학원은 2010年 7월 15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국학원 제22회 학술회의- 동북아평화정착을 위한 한중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동북아 문화의 이해를 위하여’를 주제로 동북아역사재단, (사)현정회 등이 후원한 이번 학술대회에 참석한 중국 산동대 류펑쥔 교수는 골각문 유물을 직접 가져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공개해 학자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골각문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4,500년 전후로 생겨나 사용되던 중국 초기 문자이며 갑골문보다 약 1천 년 앞섰다. 짐승 뼈에 새긴 글자로 매우 아름다운 창작성과 예술적 품격을 갖추었다고 평가된다. 류펑쥔 교수는 골각문의 연대를 측정하기 위하여 고문화 유적지에 대한 탐방과 조사를 했으며 ‘골각문’이란 개념을 정립했다. 창락, 적봉 등지에서 골각문을 발견해 2008년 12월 저서 <창락골각문>을 편찬했으며 최근 골각문에 관한 세 번째 저서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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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골문보다 1천년 앞선 골각(骨刻文)|

2012.01.04

cafe.daum.net/imgyou/E8aJ/55   林溪全漢淑 書藝硏究院






골각문자는 무엇인가| 신화전설방

T조세원 | 조회 32 |추천 0 | 2011.08.11. 10:43

류펑쥔(劉鳳君)의 골각문자설

 

중국의 갑골문자가 아닌 한민족(동이족)의 골각문자 - 갑골문자보다 1000년 앞서

                        중국 하남 신정구차산(河南新郑具茨山)에서 발견된 4000년전 암벽화

                            출처 : http://eurasiad.blog.me/50036534091

                                     http://blog.naver.com/bhjang3?Redirect=Log&logNo=140056948884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甲骨)문자보다 1000년이나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문자가 발견됐다.

  갑골문자는 중국 고대 상(商·BC 1600~1046년)나라의 수도인 은허(殷墟·허난성 안양현)에서 1899년 처음 발견된 이후 중국 최초의 문자로 인정받아 왔다. 산둥(山東)대 고고미술학연구소 류펑쥔(劉鳳君) 소장이 최근 중국 고고학 관계자들을 초청한 세미나에서 갑골문자 이전에 다른 형태의 골각(骨刻)문자가 산둥성 창러(昌樂)현 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홍콩 문회보(文匯報)가 보도했다.

  전문가는 쥐츠산 암벽화는 우리나라 중부지역 암각, 암벽화의 공백을 메움으로써 중원지역 고문화의 내용을 풍부히 하고 이 지역 문화를 포함한 상고문화의 연구에 새로운 실물의 근거를 제공하는 중요한 학술가치가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여성의 생식 숭배의식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뼈에 새겨진 모양

 

   류 소장은 중국 고고미술학의 창시자로 학계의 명망이 깊은 학자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회과학원 왕위신(王宇信) 교수 등 은상문화협회(殷商文化協會) 관계자 5명은 모두 류 소장의 학설에 동의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세미나에서 이 문자는 '창러골각문'으로 이름 붙여졌다.

  류 소장은 산둥성 민간 소장가인 샤오광더(肖廣德)가 2004년부터 최근까지 창러현 지역 주변에서 수집한 수백 개의 골각문자를 연구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류 소장에 따르면 이들 도안은 소의 어깨뼈와 사슴·코끼리 뼈에 새겨져 있었다.

  도안의 형태는 다양했다. 뼈 한 곳에 100여 개의 서로 다른 도안이 새겨진 것도 있고, 1~2개의 도안만 새겨진 뼈도 있다. 여러 개의 도안은 세로로 정렬돼 있어 특정 사안을 기록한 문자로 봐야 한다는 게 류 소장의 주장이다. 단순한 그림일 경우 이처럼 정렬된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점복(占卜) 기록인 갑골문자와 달리 골각문자에선 점복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류 소장은 “뼈의 색깔과 석화(石化) 상태를 판단해 볼 때 문자를 새긴 연대는 4000~4500년 전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 산둥성의 룽산(龍山) 신석기 시대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함께 출토된 뼈로 만든 칼과 송곳은 전형적인 룽산 중·후기 시대의 도구들이었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당시 산둥 지역은 한민족을 포함한 동이(東夷)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 골각문자는 동이문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 소장은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류 소장은 이어 “안양(安陽)을 중심으로 한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20세기 중국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 갑골문자 발견이었다면 이번 골각문자 발견은 중국 역사를 지금보다 1000년 이전으로 돌리는 21세기 중국 고고학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흑룡강신문=하얼빈) /신화사------------------

 

 

 

 

 

 

                                  주(註) : 남해양아리석각의 관련 이해

 

                    남해양아리석각                                             가을 성좌도                           천상열차분야지도

① 청나라 사람 하추도(河秋濤)는 1860년 남해양아리석각을 서불기례일출(徐市起禮日出 : 서불이 일어

    나 뜨는 해에 예를 표하다)이라고 했다.

② 최근 중국인 류펑쥔(劉鳳君)은 2010년 7월 남해양아리석각이 아직 해독되지 않음을 미끼로 이를 골

    각문자로 봐야한다고 했다. 류봉군 저 ‘창락골각문(劉鳳君 著 昌樂骨刻文)’에 남해양아리석각을 골각

    문으로 수록함

③ 경남 남해 출신의 조세원(趙世元)은 2010년 8월 20일 이후 지상(紙上)에 남해양아리

    각 우리나라 가을하늘의 성좌도임을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에 명확히 밝혔다.

  

참조 

       http://www.nh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656)

       http://www.morningnews.co.kr/article.php?aid=129101644030129028

       http://www.news4000.com/news/articleView.html?idxno=7540

 

 



                                                          골각문자는 무엇인가

2011.08.11

cafe.daum.net/7jeju/ME76/36   제주큰동산 





*** “갑골문보다   1천년 앞선 골각문(骨角文)은 동이족의 글자”
출처 : 코리안스피릿(http://www.ikoreanspiri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