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晉)서 동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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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晉)서 동이전

타이기록보유자 2007-01-01 18:3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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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나라 태종(太宗)의 지시로 방현령(房玄齡) 등이 찬한 진(晉)왕조의 정사(正史). 130권. 644년 편찬. 제기(帝紀) 10권, 지(志) 20권, 열전(列傳) 70권 외에 재기(載記) 30권이 있다. 



晉書卷九十七   列傳第六十七   東夷: 夫餘國․馬韓․辰韓․肅愼氏․倭人․裨離等十國. 東夷: 夫餘國․馬韓․辰韓․肅愼氏․倭人․비리등십국. 前言   夫恢恢乾德, 萬類之所資始; 蕩蕩坤儀, 九區之所均載. 考<羲><軒>於往統, 肇承天而理物; 訊<炎><昊>於前 , 爰制地而疏疆. 襲冠帶以辨諸華, 限要荒以殊遐裔, 區分中外, 其來尙矣. 九夷八狄, 被靑野而亘玄方; 七戎六蠻,  西宇而橫南極. 繁種落, 異君長, 遇有道則時遵聲敎, 鍾無妄則爭肆虔劉, 趨扇風塵, 蓋其常性也. 詳求遐議, 歷選深謨, 莫不待以羈 , 防其猾夏


   지아비는 넓고 하늘의 덕도 넓으니 수많은 종류의 무리가 시작하는 근본이다. 땅의 풍속이 흩어지니, 구역이 균등하여 졌다. 상고해 보니 '복희'와 '헌원'이 큰 물줄기가 되었다. 하늘을 받듬으로 시작하니 만물의 이치이다. '염제'와 '소호'의 앞선 임금에게 하문하니, 이에 땅을 제도하여 그 막힌 지경을 뚫었다. 그 벼슬을 받음으로써 중토의 제후들을 나누고, 황무지를 구하여 그 경계로 함으로써 먼 후손이 서로 끊어지게 되고 중토 밖을 나눔으로 숭상하게 되었다(?). 구이팔적은 동쪽에 달하고, 북방에 달한다. 칠융육만은 서쪽에 접하고 남쪽에 걸친다. 많은 무리가 흩어져 흥하니 그 군장이 달라, 우연히 도가 있으면 곧 때때로 가르침의 소리에 순응하고, 망령됨이 없이 모이면, 곧 공경함이 사라져 거리낌없이 다투니, 전란이 재촉하여 그 성품을 덮었다. 자세한건 구하고 먼 것은 의논하여, 깊은 꾀를 가려내어 전하니, 대비하는 것은 고삐를 죄는 것과 같은 것으로 큰 교활함에 대비하는 것이다. 



<武帝>受終衰<魏>, 廓境全<吳>, 威略旣申, 招 斯廣, 迷亂華之議, 矜來遠之名, 撫舊懷新, 歲時無怠, 凡四夷入貢者, 有二十三國. 旣而<惠皇>失德, <中宗>遷播, 凶徒分據, 天邑傾淪, 朝化所覃, <江>外而已,  貢之禮, 於 殆絶, 殊風異俗, 所未能詳. 故採其可知者, 爲之傳云. 北狄竊號中壤, 備於載記; 在其諸部種類, 今略書之. 


   '무제'가 약해진 위나라를 끝마치고 받아들였다. 오나라의 성곽은 온전하게 하였다. 이미 서남방은 위엄으로 다스리어, 이 넓은 땅을 이끌어 다스렸다. 중화의 의견이 어지러움에 빠지어 멀리 있는 군신이 와서 불쌍히 여기니, 옛것을 어루만지어 새로움을 품었다. 연중 게으름이 없다. 무릇 사이가 들어와 공물을 받치는 자가 이십삼개국이다. 이미 '혜황'이 덕을 잃고, 중종이 천도하여 씨를 퍼트리고, 흉한 무리가 나누어 일어나니, 수도가 뒤집히고 잠기었다. 알현하고 따르는 곳이 한정되어지고, '장강'밖은 이미 그치고, 보화를 받치는 예의는 이미 거의 끝어졌다. 특이한 바람으로 풍속이 이상해 지나 아직 능히 이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 고로 가려내어 이를 가히 아는 자는 이를 하고 전할 것이다. '북적'이 중토를 침략하니 이에 그 여러 종류의 무리들을 있어 갖추어 기록한다. 이제 다스리어 이를 쓴다.



 夫餘國   <夫餘國>在<玄兎>北千餘里, 南接<鮮卑>, 北有<弱水>, 地方二千里, 戶八萬, 有城邑宮室, 地宜五穀. 其人强勇, 會同揖讓之儀有似中國. 其出使, 乃衣錦 , 以金銀飾腰. 其法, 殺人者死, 沒入其家; 盜者一責十二; 男女淫, 婦人妬, 皆殺之. 若有軍事, 殺牛祭天, 以其蹄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 死者以生人殉葬, 有 無棺. 其居喪, 男女皆衣純白, 婦人著布面衣, 去玉佩. 出善馬及貂 ․美珠, 珠大如酸棗.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被破. 其王印文稱[<穢王>之印]. 國中有古<穢城>, 本<穢貊>之城也. 


   '부여국'은 '현토' 북방 천여리에 있다. 남쪽은 '선비'에 접하고, 북쪽은 '약수'에 있고, 그 땅은 이천여리이며, 호는 팔만호이다. 성읍과 궁실이 있으며, 땅은 오곡에 마땅하다, 그 사람들이 강하고, 용감하며 모임에서 서로 읍하고, 사양의 예의로 중국과 같음이 있다. 나타날때는 옷은 비단으로 하고, 금은으로 허리띠를 꾸민다. 그 법은 살인한 자는 죽이고, 그 집을 압수한다. 도둑질한 자는 하나로 인해 열두사람을 꾸짓고, 남녀가 음탕하고 부인이 시샘하면 모두 이를 죽인다. 만일 군사를 일으키면, 소를 죽여 하늘에 제사하고, 그 굽을 보아 길흉을 점치는데, 굽이 흩어지면 흉하고, 합해지면 길하다. 죽은자는 산사람을 순장하고, 곽은 있으나 관은 없다.(??) 상을 당하면, 남녀는 모두 순백색의 옷을 입고, 부인은 베를 짜서 얼굴을 가리고, 옥노리개를 땐다. 좋은 말과, 담비, 아름다운 진주가 나온다. 진주는 크기가 대추만 하다. 나라가 성하고, 부유하니, 스스로 선대부터 내려오니, 아직까지 이르러 깨뜨리지 못하였다. 그 왕의 도장 무늬를 '예왕'의 도장이라 일컷는다. 나라 가운데에 예로부터 '예성'이 있었는데, 본래 '예맥'의 성이었다. 



<武帝>時, 頻來朝貢, 至<太康>六年, 爲<慕容 >所襲破, 其王<依慮>自殺, 子弟走保<沃沮>. 帝爲下詔曰: [<夫餘王>世守忠孝, 爲惡虜所滅, 甚愍念之. 若其遺類足以復國者, 當爲之方計, 使得存立.] 有司奏護東夷校尉<鮮于 >不救<夫餘>, 失於機略. 詔免< >, 以<何龕>代之. 明年, <夫餘>後王<依羅>遣詣<龕>,{《御覽》七八一引[遣]下有[使]字.} 求率見人還復舊國, 仍請援. <龕>上列, 遣督郵<賈沈>以兵送之.{<周>校:當照《慕容 載記》作 [督護]. 按:《通鑑》八一亦作[督護].} < >又要之於路, <沈>與戰, 大敗之, < >衆退, <羅>得復國. 爾後每爲< >掠其種人, 賣於中國. 帝愍之, 又發詔以官物贖還, 下<司>․<冀>二州, 禁市<夫餘>之口. 


   '무제'때부터 자주 와서 조공하더니, '태강' 6년에 이르러 '모용귀'가 처들어가 깨뜨렸다. 그 왕 '의라'가 스스로 죽고, 자제는 '옥저'로 도망하여 보전하였다. 제가 아래에 고하여 말하기를 " '부여왕'은 세세토록 충과 효를 지키었다. 나쁜 오랑캐에게 멸함을 당하니 심히 걱정스럽다. 고로 그 남은 무리로써 다시 나라를 세울 여러 가지 책략을 하여, 존립을 얻어라" 하였다. 한 벼슬아치가 있어 아뢰길 호동이교위 '선우영'이, '부여'를 구하지 못하여, 다스림의 틀을 잃어 버렸다. '영'을 해고하여 고하기를 '하감'을 대신케 하였다. 다음해, 부여의 다음왕 '의라'가 '감'에게 사신을 파견하였다.[어감 칠팔일에 '귀'자 밑에 '사'가 있다.] 백성을 변별하여 이끌어 구하여 돌아와 옛 나라로 돌아가기를 다시 청원하였다. '감'이 독우'고심'을 파견하여 살핌으로써 이에 병사를 보내왔다. ['주'서에 '모용외전기'에는 '督護'로 적혀 있다. '통감'도 같다.] '외'가 또한 요처에서 이를 막자, '심'이 함께 싸워 크게 패하였다. '외'가 무리를 이끌고 퇴각하니, '라'가 다시 나라를 얻었다. 이 후로 매양 '외'가 그 무리를 노략질 하여 중국에 팔았다. 제가 이를 근심하고 파견하여 고하길 벼슬과 물건으로 죄를 면하여 주고 돌아가게 하고 '사''기' 두주에서 이로부터 부여인의 매매를 금하였다. 



   馬韓   <韓>種有三: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在<帶方>南, 東西以海爲限.


 '한'은 세가지의 종류가 있다. 하나는 '마한'이고 둘은 '진한'이고 셋은 '변한'이다. '진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으며 동서로써 바다에 면한다. 


   <馬韓>居山海之間, 無城郭, 凡有小國五十六所, 大者萬戶, 小者數千家, 各有渠帥. 俗少綱紀, 無 拜之禮. 居處作土室, 形如 , 其戶向上, 擧家共在其中, 無長幼男女之別. 不知乘牛馬, 畜者但以送葬. 俗不重金銀錦 , 而貴瓔珠, 用以綴衣或飾髮垂耳. 其男子科頭露 , 衣布袍, 履草 , 性勇悍. 國中有所調役, 及起築城隍, 年少勇健者皆鑿其背皮, 貫以大繩, 以杖搖繩, 終日 呼力作, 不以爲痛. 善用弓楯矛櫓, 雖有鬪爭攻戰, 而貴相屈服. 俗信鬼神, 常以五月耕種畢,  聚歌舞以祭神; 至十月農事畢, 亦如之.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謂爲天君. 又置別邑, 名曰蘇塗, 立大木, 懸鈴鼓. 其蘇塗之義, 有似<西域>浮屠也, 而所行善惡有異. 


   마한은 산과 바다 사이에 거하고, 성곽이 없다. 무릇 작은 나라가 오십육개국이다. 큰나라는 만호를 거느리고 작은 나라는 수천가를 거느린다. 각각 거수가 있다. 풍속은 그 기강이 적고, 꿇어 앉아 절하는 예는 없다. 토실을 지어 거하는데, 형태는 무덤과 같다. 그 문은 위를 향하고 있고, 그 가운데에 집안 사람이 함께 거하니,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다. 소와 말을 타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쌓아 올리는 것으로 장사지낸다. 풍속에 금은 비단을 중히 여기지 않고, 옥구슬을 귀히 여긴다. 옥구슬을 사용하여 옷에 꿰메고, 머리를 장식하고, 귀걸이를 한다. 남자는 과두(맨머리)에 상투를 드러내놓고, 옷은 베옷에 솜을 넣었다. 풀을 엮어 신을 신고, 성질은 용감하고 사납다. 나라에 조역이 있어, 성을 쌓고 해자(성주위의 연못)를 파는 일이 일어나면, 용감하고 강한 어린 소년들이 모두 등가죽을 뚫어 큰 줄로 꿰어 지팡이에 줄을 묶어 종일 힘을 들여 소리치지만, 아파하지 않는다. 올바르게 활과 방패, 창과 망루를 사용하고, 비록 전쟁하여 공격하더라도, 서로 굴복함을 귀히 여긴다. 풍속이 귀신을 믿고, 항시 5월에 밭갈고 씨 뿌림을 마치면 무리가 모여 노래하고 춤추는 것으로 귀신에 제사지낸다. 시월에 이르러 농사를 마치면 역시 이와 같다. 나라의 수도에 각 한사람이 천신에 제사지냄을 주제하는데, 이를 천군이라한다. 또한 나누어진 읍이 두는데 이를 '소도'라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았다. '소도'란 뜻은, 서역의 부도(절)과 같은데, 그 선악을 행함에는 다름이 있다. 



<武帝><太康>元年․二年, 其主頻遣使入貢方物, 七年․八年․十年, 又頻至. <太熙>元年, 詣東夷校尉<何龕>上獻. <咸寧>三年復來,{ 《 注》:<咸寧>建元在<太康><太熙>之前, 本傳先後互倒.} 明年又請內附.


 '무제' '태강' 원년 이년 그 주인이 자주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칠년 팔년 십년에도 자주 이르렀다. '태희'원년, 동이교위 '하감'이 이르러, 천자에 나아갔다. '함령'삼년 다시왔다. ['각주' : 함령은 태강,태희의 전이다. 앞뒤가 바뀌었다. ]다음해에 또 안으로 의지하길 청했다. 



   辰韓   <辰韓>在<馬韓>之東, 自言<秦>之亡人避役入<韓>, <韓>割東界以居之, 立城柵, 言語有類<秦>人, 由是或謂之爲<秦韓>. 初有六國, 後稍分爲十二, 又有<弁辰>, 亦十二國, 合四五萬戶, 各有渠帥, 皆屬於<辰韓>. <辰韓>常用<馬韓>人作主, 雖世世相承, 而不得自立, 明其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也. 地宜五穀, 俗饒蠶桑, 善作 布, 服牛乘馬. 其風俗可類<馬韓>, 兵器亦與之同. 初生子, 便以石押其頭使扁. 喜舞, 善彈瑟, 瑟形似筑. <武帝><太康>元年, 其王遣使獻方物. 二年復來朝貢, 七年又來.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스스로 말하길 '진'의 망인이 사역을 피하여 '한'으로 들어왔다. '한'은 동쪽 경계를 나누어 이에 거하게 하였다. 성책을 세우고, 말은 '진'인과 비슷하다. 이로써 말미암아 혹은 '진한(秦韓)'이라고 한다. 처음에 육국이었는데, 후에 점점 나누어져 십이국이 되었다. 또한 '변한'이 있으니 역시 십이국이다. 합하여 사오만호이다. 각각 거수가 있고, 모두 '진한'에 속한다. '진한'은 항시 '마한'사람을 주인으로 세우고, 세세토록 승상하여도 자립을 얻지 못하였다. 밝히건데 이건 이주해온 사람이기 때문이고, 고로 '마한'의 제어를 받았다. 땅은 오곡에 알맞고, 풍속은 넉넉하고 양잠을 하며, 알맞어, 비단과 베를 지었다. 소를 길들이고 말을 탔다. 그 풍속은 '마한'과 가히 비슷하고, 병기 또한 이와 같다. 처음 아들을 낳으면, 돌을 놓아 누름으로써 머리를 편편하게 하고, 춤추기르 좋아하고, 거문고 타는 것을 잘한다. 거문고의 형태는 '축(악기)'과 같다. 무제 태강 원년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받쳤다. 이년 다시 와서 조공하고 칠년 다시 왔다.



    肅愼氏   <肅愼氏>一名<邑婁>, 在<不咸山>北, 去<夫餘>可六十日行. 東濱大海, 西接<寇漫汗國>, 北極<弱水>. 其土界廣 數千里, 居深山窮谷, 其路險阻, 車馬不通. 夏則巢居, 冬則穴處. 父子世爲君長. 無文墨, 以言語爲約. 有馬不乘, 但以爲財産而已. 無牛羊, 多畜猪, 食其肉, 衣其皮, 績毛以爲布. 有樹名 常, 若中國有聖帝代立, 則其木生皮可衣. 無井 , 作瓦 , 受四五升以食. 坐則箕踞, 以足挾肉而啖之, 得凍肉, 坐其上令暖. 土無鹽鐵, 燒木作灰, 灌取汁而食之. 俗皆編髮, 以布作 , 徑尺餘, 以蔽前後. 將嫁娶, 男以毛羽揷女頭, 女和則持歸, 然後致禮 之. 婦貞而女淫, 貴壯而賤老, 死者其日卽葬之於野, 交木作小槨, 殺猪積其上, 以爲死者之糧. 性凶悍, 以無憂哀相尙. 父母死, 男子不哭泣, 哭者謂之不壯. 相盜竊, 無多少皆殺之, 故雖野處而不相犯. 有石 , 皮骨之甲, 檀弓三尺五寸,  矢長尺有咫. 其國東北有山出石, 其利入鐵, 將取之, 必先祈神. 


   '숙신씨'는 일명 '읍루'이다. '불함산'의 북쪽에 있으며 '부여'에서 가히 60일을 간다.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고 서쪽은 '구만한국'에 접하고, 북쪽은 '약수'이다. 그 땅의 경계는 길이가 수천리이다. 깊은 산속과 막힌 골짜기에 거하여 그 길이 험하므로, 차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 여름은 집에서 거하고 겨울은 동굴에서 거한다. 부자가 대를 이어 군장을 하고 글과 먹이 없어 말로써 약속을 한다. 말이 있으나 타질 않고, 다만 재물로써 인정하여 그친다. 소와 양은 없고, 돼지를 많이 사육하여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을 입으며, 그 털을 꼬아 베를 만든다. 나무중에 '낙상'이란 나무가 있어 만약 중국에서 성제가 서면 그 나무의 껍질로써 가히 옷을 만든다. 우물과 부엌이 없어 기와로 솥 같은 것을 만들어 사오되 정도를 받아 먹는다. 앉을 때는 걸터 앉아 발로 고기를 끼워서 이를 먹는다. 고기가 얼어 있으면, 그 위에 걸터 앉아 따뜻하게 한다. 땅에서 소금이 나오질 않아 나무를 태워서 재를 만들고 물을 부어 그 즙을 먹는다. 풍속은 모두 편발이고, 베를 지어 '첨(소매가 짧은 헡옷)'을 짓는다. 길이가 한 척 정도로 앞뒤만을 가린다. 장차 시집가고 장가들 때 남자는 털과 깃털로써 여자의 머리에 장식하고, 여자는 응하여 곧 보전하여 돌아온다. 그러한 연후에 라야 예로써 장가든다. 부인은 정조를 지키지만, 여자는 음란하고, 귀한 사람은 굳세지만 천한사람은 쇠하였다. 죽은 자는 그날 바로 들에 장사지내고 나무를 엮어 작은 곽을 만들고 돼지를 죽여 그 위에 쌓는다. 이로써 죽은 자의 양식으로 한다. 성질은 포악하고 사나우며 근심하고 슬퍼하지 않음을 높인다. 부모가 죽어도 남자는 울지 않고 우는 자는 씩씩하지 아니하다고 이른다. 훔치는 것은 많고 적음이 없이 모두 죽이고 고로 비록 들에 거하더라도 이를 해치지 않는다. 돌화살촉이 있고, 가죽과 뼈로 갑옷을 만들고 단궁이 있어 길이가 삼척 오촌이다. 화살은 긴 것과 짧은 것이 있다. 나라의 동북쪽 산에서 돌이 나오니 이 날카로움이 쇠를 뚫는다. 장수는 이를 취할때, 반드시 먼저 신에게 고한다. 


<周><武王>時, 獻其 矢․石鏃 . 逮於<周公>輔<成王>, 復遣使入賀. 爾後千餘年, 雖<秦><漢>之盛, 莫之致也. 及<文帝>作相, <魏><景元>末, 來貢 矢․石 ․弓甲․ 貂皮之屬. <魏>帝詔歸於相府, 賜其王< > ․錦 ․ 帛. 至<武帝><元康>初, 復來貢獻.{《 注》:《武紀》獻 矢石 在<咸寧>五年. [元康]爲<惠帝>年號, 大誤. 按:<咸寧>五年十二月使來, 翌年春卽改元<太康>, 疑[元康]爲[太康]之誤.} <元帝>中興, 又詣<江左>貢其石 . 至<成帝>時, 通貢於<石季龍>, 四年方達. <季龍>問之, 答曰[ 每候牛馬向西南眠者三年矣, 是知有大國所在, 故來]云. 


   주 '무왕'때 화살과 돌화살촉을 받쳤다. '주공'에게 보내어 '성왕'을 돕게 했다.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하례하였다. 이 후로 천여년이 지났고, 비록 '진'과 '한'이 성하였지만, 이에 오지 않았다. '문제'가 정승이 된 '위'나라 '경원' 말 화살과 돌화살촉, 궁갑, 담비가죽등을 받쳤다. '위'의 황제가 조서를 내려 상부로 보내어 그 왕 '녹계(?)'에게 비단을 하사하였다. '무제' '원강'초에 이르러 다시 조공하였다.[각주: '무기'에 화살과 돌화살촉을 받친 것은 '함녕' 5년이다. '원강'은 '혜제'의 연호이다. 큰 잘못이다. '함녕' 5년 12월 사신이 왔다. 다음해 봄에 '태강'으로 연호를 고쳤다. '원강'은 '태강'의 오기로 의심스럽다.] '원제'가 중흠하자, 또 '강좌'에 이르러 돌화살촉을 받치고 '성제'때에 이르러 '석계룡'을 통하여 공물을 바치고자 하므로 '이룡'이 까닭을 물으니 답하기를, "시절마다 소와 말이 서남쪽을 바라보고 졸은지 삼년이 되었다. 그래서 큰 나라가 있는 줄 알고 온 것이다." 했다. 



   倭人   <倭>人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地多山林, 無良田, 食海物. 舊有百餘小國相接, 至<魏>時, 有三十國通好. 戶有七萬. 男子無大小, 悉 面文身. 自謂<太伯>之後, 又言上古使詣中國, 皆自稱大夫. 昔<夏><少康>之子封於<會稽>, 斷髮文身以避蛟龍之害, 今<倭>人好沈沒取魚, 亦文身以厭水禽. 計其道里, 當<會稽><東冶>之東. 其男子衣以橫幅, 但結束相連, 略無縫綴. 婦人衣如單被, 穿其中央以貫頭, 而皆被髮徒跣. 其地溫暖, 俗種禾稻紵麻而蠶桑織績. 土無牛馬, 有刀楯弓箭, 以鐵爲鏃. 有屋宇, 父母兄弟臥息異處. 食飮用俎豆. 嫁娶不持錢帛, 以衣迎之. 死有棺無곽, 封土爲 . 初喪, 哭泣, 不食肉. 已葬, 擧家入水 浴自潔, 以除不祥. 其擧大事, 輒灼骨以占吉凶. 不知正歲四節, 但計秋收之時以爲年紀. 人多壽百年, 或八九十. 國多婦女, 不淫不妬. 無爭訟, 犯輕罪者沒其妻 , 重者族滅其家. 舊以男子爲主. <漢>末, <倭>人亂, 攻伐不定, 乃立女子爲王, 名曰<卑彌呼>. <宣帝>之平<公孫氏>也, 其女王遣使至<帶方>朝見, 其後貢聘不絶. 及<文帝>作相, 又數至. <泰始>初, 遣使重譯入貢. 


   '왜'인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의 가운데에 있다. 산과 섬에 의지하여 나라가 있고, 땅은 산림이 많다. 좋은 밭은 없어 해물을 먹는다. 오래부터 백여개의 소국이 서로 접해있는데, '위'때에 이르러 삼십국이 통하여 좋게 지내고 있다. 호수는 칠만이다. 남자는 크고 작음이 없고, 모두 얼굴에 문신을 하였다. 스스로 '태백'의 후예라고 일컷는다. 또한 상고때에 사신으로 중국에 이르러 모두 스스로를 대부라 칭하였다고 한다. 옛날 '하'나라 '소강'의 아들은 '회계'에 봉하였더니, 머리를 깍고, 문신을 함으로써 교룡의 피해를 면하였다. 이제 '왜'인이 물속에 들어가 물고기 잡기를 좋아하고, 또한 문신을 함으로써 물짐승을 피하고, '회계' '동치'의 동쪽으로 이러한 헤아림이 도리가 아닌가 한다. 남자의 옷은 횡과 폭으로써 단지 서로 이어서 묶고, 꿰메지 않는다. 부인의 옷은 홑이불과 같고. 중앙을 뚫어 머리를 넣어 입고 모두 머리카락을 풀고 맨발이다. 땅은 따뜻하고, 풍속은 벼를 심고, 베와 마, 양잠으로 직물한다. 땅에 소와 말이 없고, 칼과 방패, 활과 화살이 있으며, 쇠로 화살촉을 한다. 집이 있으며, 부모형제가 처하는 곳이 다르다. 음식에 단두를 사용하고, 시집, 장가할 때 돈과 비단을 가지지 않으며, 옷만으로 이에 헤아린다. 죽은자는 관은 있고 곽은 없으며, 흙을 덮어 무덤을 만들고, 상을 당하여 울고, 고기를 먹지 않는다. 장사를 마치면, 사람들이 물속에 들어가 씻어 스스로를 깨끗이 하여 상서롭지 못한 것을 없앤다. 큰 일이 있으면, 뼈를 구워 길흉을 점친다. 올바른 세월과 사절기를 알지 못하여, 다만 가을에 추수때를 기하여 그 해의 기준으로 삼는다. 사람의 목숨이 많아, 백년 혹은 팔구십년이고 나라에 부녀가가 많으나 음란하지 않고, 시샘하지 않는다. 다툼과 송사가 없고 가벼운 죄를 지은자는 죽이고 그 처는 노비로 삼고 무거운 죄를 지은 자는 그 가족을 멸한다. 옛날에는 남자를 왕으로 하였는데, '한'말 '왜'인이 혼란하고 공격하며 벌하여 안정하지 않아 여자가 이에 왕으로 섰다. 이름을 '비미호'라 한다. 선제가 공손씨를 평정하고(??) 그 여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대방에 이르러 조견하였다. 그 후로 조공이 끊이질 않았다. '문제'가 제상이 되어도 또한 여러번 이르렀다. 태시초에 사신과 통역관을 보내어 공물을 받쳤다. 


   裨離等十國   <裨離國>在<肅愼>西北, 馬行可二百日, 領戶二萬. <養雲國>去<裨離>馬行又五十日, 領戶二萬. <寇莫汗國>去<養雲國>又百日行, 領戶五萬餘. <一 國>去<莫汗>又百五十日, 計去<肅愼>五萬餘里. 其風俗土壤 未詳. <泰始>三年, 各遣小部獻其方物. 至<太熙>初, 復有<牟奴國>帥<逸芝惟離>․<模盧國>帥<沙支臣芝>․<于離末利國>帥<加牟臣芝>․<蒲都國>帥<因末>․<繩余國>帥<馬路>․<沙樓國>帥< 加>, 各遣正副使詣東夷校尉<何龕>歸化. 


   '비리국'은 '숙신'의 서북쪽에 있다. 말로 가히 이백일을 간다. 호구는 이만이다. '양운국'은 '비리'에서 말로 또한 오십일을 가고 호구는 이만이다. '구만한국'은 '양운국'에서 또한 백일을 가고 호구는 오만여이다. '일군국'은 막한에서 또한 오십일을 가고 계산하니 '숙신'에서 오만여리이니, 그 풍속과 토양은 모두 아직 자세히 알지 못한다. '태시' 삼년 각각 그 작은 읍에서 방물을 받치고 보내왔다. '태희' 초에 이르러 다시 '우노국' 장수 '일지유리, '모로국' 장수 '사지신지', '우리말리국' 장수 '가모신지', '포도국' 장수 '인말', '승여국' 장수 '마로', '사루국' 장수 '삼가', 등이 있어, 각각 정사와 부사를 보내서 동이교위 하감에게 와서 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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