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25. 19:45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등교과서 한국사
도교와 풍수지리설
고려 시대 도교와 풍수지리설
고려 시대에는 유교, 불교와 함께 불로장생과 현세 구복을 추구하는 도교도 성행하였다. 예종 때 도교 사원이 처음 세워지고, 많은 곳에서 여러 신을 모시면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도교 행사가 개최되었다. 또한, 나라의 안녕과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국가적 행사도 자주 열렸으며, 궁궐에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초제가 성행하였다. 그러나 도교는 불교적 요소, 도참사상, 민간 신앙적 요소가 섞이면서 일관된 체계를 갖추지 못하였으며, 별도의 교단도 성립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불교 승려였던 묘청이 8명의 산신을 모시는 팔성당을 건립한 것처럼, 도교 행사에는 도교와 불교, 그리고 민간 신앙 등이 뒤섞인 모습이 자주 나타났다. 국가 행사의 하나로 명산대천에 제사하는 팔관회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러한 행사들은 풍수지리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풍수지리설은 도참사상과 합쳐져 고려 시대에 널리 유행하였다. 신라 말 도선은 풍수지리설을 체계화하였으며, 태조의 훈요 10조에서도 사원을 지을 때 풍수지리설에 입각하도록 하였다. 풍수지리설은 개경과 서경이 명당이라는 설을 뒷받침하여, 서경 천도와 북진 정책 추진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이후 풍수지리설은 천도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논리적 근거로 활용되었다.
문종 전후 시기에는 북진 정책의 퇴조와 함께 한양이 명당이라는 설이 새롭게 나왔다. 이 때문에 삼경 중의 하나인 동경(경주)이 남경(한양)으로 대치되면서, 남경에 새로 궁궐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 도참사상 : 미래의 길흉에 대한 예언을 믿는 사상으로, 어떤 자연 현상이나 징조에 대한 해석을 통해 미래를 파악한다.
│생활 속의 도교 풍속│
태자가 안경공 왕창을 맞이하여 잔치하고 풍악을 울려 밤을 새웠다. 나라 풍속이 도가(道家)의 말에 의하여 매번 이날이 되면 반드시 모여 마시고 밤이 새도록 자지 않았다. 이것을 ‘경신을 지킨다(守庚申).’라고 한다. - “고려사절요” -
풍수지리설은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되었을까?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토지의 기운이 모이는 명당에 궁궐, 절 등을 짓게 되면 나라의 운명이 길하게 된다. 이후 풍수지리설은 미래의 복을 비는 수단이 되면서 점차 신비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태조 왕건은 도선의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자신의 고려 왕조 창건을 합리화하였다. 도선은 왕건의 아버지에게 풍수지리설에 따라 새로 지을 집의 구조를 알려 주고, 이 집에서 삼한을 통합할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후삼국 통일 후 왕건은 훈요 10조에서 사원을 지을 때 풍수지리설에 따라야 한다는 조항을 넣었다.
또한, 풍수지리설은 고려 말까지 수도를 옮기려는 계획에 이용되었다. 그러나 우왕 때 이르러 유교적 논리나 현실적 필요에 의해 천도 장소를 정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관련문제
- 1. 도참사상과 결합하기도 하였다.
- 2. 신라 말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 3. 한양의 남경 승격의 배경이 되었다.
- 4. 고려의 북진 정책 추진에 영향을 주었다.
- 5. 국가가 초제를 주관하는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 정답
- 5
- 해설
- 자료는 서경 천도 운동과 관련된 내용으로 풍수지리설을 배경으로 전개되었다. ⑤ 초제는 도교와 관련된 제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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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교육열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 김일성 1인 체제의 형성
- 전후 사회주의 경제 체제의 수립
- 북한의 농업 협동화는 어떻게 추진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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