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 6. 03:27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2007년 갑골을 무색케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산동성 창락현의 신비 갑골문의 수수께끼를 풀다(山東昌樂神秘甲骨文解謎), 안양갑골문보다 훨씬 빠른 시기이다(比安陽甲骨文更早)~,
~신비의 동이갑골문東夷甲骨文이 산동성 유방濰坊에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神秘东夷甲骨文惊现潍坊)~라는 보도가 국내외의 지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먼저, 산동대 미술고고학 류펑쮠 교수의 저서인 ‘창락골각문자 발견과 연구’와 이와 관련된 매체의 기사를 통해, ‘창락골각문자昌樂骨刻文字’에 관한 일화를 알아보자.
~2004년 여름, 산동성 창락현 원가장과 일대의 쇼우꽝 지타이 등의 고문화 유적지에서 밭을 갈던 촌로가 주운 대형 소 어깨뼈를 창락현의 수장애호가 샤오꽝더가 발견하고, 고대 농기구의 일종이라고 짐작하여, 깨끗이 뼈를 세척하자, 문자 같은 획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획이 새겨진 뼈들을 수집하여 보관해오다,
2005년 봄, ‘중국초기문자와 서예예술’의 주제를 연구하던 류펑쮠 교수에게 의뢰하매, 류교수가 ‘선사시대의 뼈 위에 새겨진 획은 확실한 문자’로 파악하여, 샤오꽝더가 소장하고 있는 뼈 조각의 비밀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웨이팡, 베이징의 전문가들을 찾아가며 가르침을 구했으나, 어떤 이는 이것이 벌레가 먹었거나 풀뿌리가 썩은 흔적이라, 어떤 이는 현대인이 새긴 것이라, 어떤 이는 류교수를 제쳐놓고 샤오꽝더에게 접촉하는 등의 일들이 있었으나,
2007년 6,7월경에 샤오꽝더와 여러 차례 전화로 연락하다, 7월 중순, 제남시 난쨔오 호텔로 일곱 덩어리의 글자가 있는 뼈 조각을 가지고 찾아왔고, 그가 들고 온 뼈 조각과 수집 과정의 설명을 듣고 난 후, 수년의 전문적 연구와 검정경험에 비추어 보아, 이 각자刻字(뼈에 새겨진 글자)가, 4000~4500년 전의 산동 용산문화 시기의 동이東夷문자에 속하는 중국 초기의 도화상형圖畵象形 문자로, 안양 은허 갑골문과 다른, 점술흔적이 보이지 않는 기사記事문자라고 판단함에, 세계문자역사연구중 비교적 중대한 사건인, 이 문자의 발견을 두고 농업종합개발사무실 류젼쳥주임 및 창락현 문화부 사람들과 류교수의 검증을 논했고,
검증결론이 2007년 7월30일 ‘웨이팡일보 창락소식’과 이후의 ‘웨이팡일보’, ‘치루만보’, ‘따쭝일보’, ‘웨이팡방송국’, ‘산동위성방송’, 및 포털사이트에 발표되었고, 사회와 학술계에 큰 주목을 받았다.~
당시 보도된, 치루만보(齊魯晚報)의 2007년 7월 13일자 기사.
~산동성 창락현의 신비 갑골문의 수수께끼를 풀다, 안양갑골문보다 훨씬 빠른 시기이다(山東昌樂神秘甲骨文解謎, 比安陽甲骨文更早)~라는 보도 내용에 이은, 30일자 기사를 ‘대종언어연구소’의 해석본으로 수록하면,
~제로만보齊魯晚報의 7월 13일 간행 지면에 등재된, ‘신비의 동이갑골문東夷甲骨文이 산동성 유방濰坊에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라는 보도가 국내외의 지대한 관심 과 집중을 불러 일으켰다.
齊魯晚報7月13日刊登的《神秘東夷甲骨文驚現濰坊?》引起國內外強烈關注
최근의 중국 문자연구의 권위 있는 전문가인 ‘중국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연구원인 왕우신교수 등이 산동성 창락현에 모여 연구경과를 토의했고, 전문가들은 여러 가지 신 비한 갑골위에 ‘행렬정제’된 부호가 중국의 초기문자라고 처음으로 인정하였다.
最近中國文字研究權威專家、中國社會科學院曆史所研究員王宇信教授等人聚集昌樂,經過研 究,專家們初步認定這些神秘甲骨上所附的“行列整齊”的符號爲中國早期文字
시기상으로는 하남河南성 안양安陽시에서 발굴된 ‘은허갑골문殷墟甲骨文’보다 훨씬 이전 의 것으로 그 기원이 판명되었으며, 전문가들은 이 ‘신비부호’의 이름을 ‘창락골각문자昌 樂骨刻文字’라 명명하였다.
在出現時間上應早於河南安陽殷墟甲骨文,爲區別起見,專家把這些神秘符號命名爲昌樂骨刻 文字
2004년부터 창락현의 수장애호가인 소광덕肖廣德이 창락현에 있는 원가장袁家莊및 그 부근의 기태紀台등 고문화 유적지에서 발견하여 수집하였고, 거기에서 한 노인이 땅을 파다 밖으로 드러난 대자골두帶字骨頭를 수집하였다.
自2004年以來,昌樂縣收藏愛好者肖廣德在昌樂縣袁家莊及其附近的紀台等古文化遺址上發 現並收集了一批當地老百姓翻地挖出的帶字骨頭
2007년 7월 산동대학교 미술고고연구소 소장이며 박사과정의 유봉군교수가 대자골두에 대한 연구를 처음으로 시작하였고, 그는 이런 자료들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 었다.
2007年7月,山大美術考古研究所所長、博士生導師劉鳳君教授開始對帶字骨頭進行研究,他 認爲這批資料極爲重要
만약 정말로 고문화유적지에 속한 곳에서 수집되어 나온 거라면, 그것은 응당 용산문화 의 유물로 중국의 조기 문자이고, 만약 그것이 후대에 조각된 것이면 마땅히 모본이 있 어야 하고, 그 모본들도 당연히 용산 문화적 유물이므로 반드시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
如果真是從古文化遺址上收集來的,它應是山東龍山文化的遺物,是中國早期的文字;如果是 後人刻的,應該有摹本,這摹本應是龍山文化的遺物,應該把它找出來
유봉군劉鳳君은 소광덕肖廣德 집안에 있는 일백 여개의 각자가 새겨진 골두骨頭를 보게 되었다. 유봉군은 각자의 골두들을 지금으로부터 4,000~4,500여년전의 동이문자東夷文 字에 속하는 산동용산문화 중말기의 유물임을 알게 되었다.
劉鳳君在肖廣德家裏,又看到了一百多塊刻字的骨頭。劉鳳君認爲這批刻字的骨頭是山東龍山 文化中晚期的遺物,距今約4000—4500年,屬東夷文字
7월 30일 중국고문자연구의 권위있는 전문가이며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연구원 이고 중국은상문화학회中國殷商文化學會의 회장인 왕우신王宇信교수 등 5인이 창락현에 모여 대량의 골각문자의 사진과 실물을 살펴보았고 일차 좌담연구토론회를 개최하였다.
7月30日,中國古文字研究權威專家、中國社會科學院曆史研究所研究員、中國殷商文化學會 會長王宇信教授等5人聚集昌樂,觀看了大量的骨刻文字照片和實物,舉行了一次座談研討會
회의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류봉군劉鳳君의 감정 의견에 모두 찬성 동의하였고, 이 문자 들은 안양갑골문자와 비교해 훨씬 이전의 일종의 원시문자原始文字로 인정하였고, 안양 점복의 갑골문과는 서로 같지 않음을 인식하고, 이를 기사골각記事骨刻으로 ‘창락골각문 자昌樂骨刻文字’로 칭하기로 하였다.
與會專家一致贊同劉鳳君的鑒定意見,認爲這批文字是比安陽甲骨文更早的一種原始文字,認 爲它與安陽占蔔的甲骨文不同,是一批記事骨刻,應稱爲“昌樂骨刻文字”
회의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그것은 안양갑골문 발견된 이후에 이어진 또 하나의 중대한 발견이라는 것에 인식을 같이 하였다.
與會專家認爲它是繼安陽甲骨文後的又一重大發現
관련 전문가들의 인정이 있음으로 해서 ‘창락골각문자昌樂骨刻文字’의 발견을 세상에 알 려지게 되었고, 중국 초기인 4,000여년전에 이미 문명을 나타내는 문자를 만들었다는 것 이고, 전설적인 용산문화 시기가 역사임을 믿게 하였다.
有關專家認爲,昌樂骨刻文字的發現表明,中國早在4000多年前就已有了作爲文明標志的文 字,使傳說中的龍山文化時期成爲信史
그밖에, 창락골각문자와 은허갑골문자의 닮은 점은, 모두 짐승의 뼈나 거북등껍질(龜甲) 위에 새겨졌으며, 이것과 지초紙草, 니판泥板(진흙판), 석판石板위에 문자를 기재하는 고 후古埃나 고파古巴와 더불어 순서를 견줄 때, 새겨서 문자 체계를 이룬 고대 이집트, 고 대 바빌로니아, 고대 인도의 문자 체계와 명확히 다름이 드러났다. 이것의 발견(문자기재 의 방법)은 중국 문자기재의 역사시기를 가능한 훨씬 앞으로 당겨주게 하였다.
另外,昌樂骨刻文字和殷墟甲骨文類似,都是刻在獸骨或龜甲上,這和以紙草、泥板、石板爲 文字載體的古埃及、古巴比倫、古印度文字體系明顯不同;它的出現,使有中國文字記載的曆 史可能再次提前~라는, 기사를 실었다.
다시, 류펑쮠 교수의 저서인 ‘창락골각문자 발견과 연구’의 내용으로 돌아가면,
~ 2007년 하반기, 刻字각자에 대한 류박사의 검증결론은, ‘창락현 위원회’, ‘창락현 정부’에 보고되었고, 2008년 7월 산동대학 미술고고학연구소와 ‘창락현 정협 문사위원회’는 정식으로 연구경비와 대량의 사업지원금을 ‘창락현 정협’이 부담한다는, ‘창락골각문 연구프로젝트 협의서’를 협정했다.
창락골각문이 발견되기 전에도, 발견된 기타 소량의 자잘한 초기문자(부호)들이 있었는데, 이 문자들은 각기 서로 달라, 학술적 의미를 부여할 수 없었다.
1980년대 협서성 창안현 화로우쯔 용산문화 유적지에서 10여 개의 골각문자와 부호가 출토되었고,
1991년 산동성 쪼우핑 띵꽁유적에서 용산문화로 보이는 도자기문자가 출토되었고,
1990년대 강소성 까오요우치우지아쫭 용산문화 유적지에서 도자기 편에 새겨진 문자가 출토되었고,
1995년 산동 헝타이스지아 유적지 문화 제사기물 갱坑에서 세 덩어리의 복사가 새겨진 뼈가 출토되었지만,
대문구문화 도존陶尊(도자기로 만든 술 담는 용기)상에 새겨진 부호와 앙소문화에 새겨진 부호들처럼, 모두 문자의 탄생과정 중의 표지적 작용만 하는 지사指事(부호가 의미를 함축하는, 문자의 성질을 가진 상징적인 부호)현상으로 파악하며, 일종의 記事기사현상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창락골각문’은 이런 전통을 직접적으로 계승한, 문자라는 것에 확신한다.
2008년7월30일, 산동대학 미술고고학연구소와 창락현 정협은,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연구원인 왕위씬교수, 쯔보시 문물국 부국장인 짱꽝밍 교수, 산동갑골문국제교류센터 리라이푸이산장과 쭈위에핑 교수등 전문가들을 창락에 초청하여, 주로 창락현 위엔지아쫭및 그 부근 쑈우꽝기타이 유적지에서 출토된, 글자가 새겨진 뼈조각의 실물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심도있는 좌담 연구토론회를 가진 끝에, 이 골각문이 안양 은허의 복사 갑골문과 다른 기사記事(함축된 의미를 지닌 부호가 나열되어 의미를 연결시키는)골각骨刻 이라 결론짓고, ‘昌樂骨刻文창락골각문’이라 명명했다.~고, 류펑쮠 교수는 저서를 통해, ‘창락골각문자’의 에피소드를 피력한다.
당시인, 2008년 10월 30일자 신화 산동채널 보도를 정리하면,
~중국고고학 전문가들에 의하면, 4년 전 산동성 창락현에서 출토된 100여개의 짐승 뼈 조각에 새겨진 600여 부호들이 일정한 규율에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 4500년전 의 중국초기 문자임이 확실하다고 한다.
이 신비한 수갑골상의 새겨진 "행렬이 정치된" 부호는 획과 글자의 과도한 상태로 보아, 은허 갑골문에 비해 더 원시적이며, 은허갑골문과 이 부호가 계승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 으로 보이며, 한자기원의 새로운 증거로 해석된다.
2004년, 창락현의 민간 수장품 애호가 샤오꽝더 씨가 문자부호가 새겨진 뼈조각 편위, 뼈 내부, 뼈어금니 등, 600여 자의 도안문자가 새겨진 갑골 100여 편과 부서진 옥편 2 조각을 사들여서 보관중, 2008년 7월말, 산동성 갑골문 학회 부회장인 류펑쥔선생과 북 경과 산동에서 온 7명의 고고학자들이 전문적인 연구 검토하니, 이 부호들은 모두 음선 각에 속하며, 필획이 구성지게 굽이쳐 흐르고 새겨진 획이 섬세하며, 다량의 호선과 곡 선이 있으며, 게, 풀벌레, 새 형상 등의 형태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중국은상학회회장 왕위신선생은, 수골상에 새겨진 흔적은, 주로 붓이나 보조적인 붓으로 이루어진 사람에 의해 인공적으로 새겨진 것으로, 태양부호를 닮은 대여섯개, 삼각부호 너댓개, 작은 새(鳥)부호 너댓개의 등의 중복되는 부호는 그 당시 사람들의 의식적인 새 김 행위로 보여 진다고 말했다.
비교적 문자로서 체계가 완벽하고 발견시기가 가장 이른, 하남성 안양에서 출토된 상나 라 왕조가 점칠 때 사용했던 은허갑골문은, 풀로 만든 종이, 점토판, 돌판을 문자 재료로 사용했던 고대 이집트, 고대 바빌론, 고대 인도 등의 위대한 문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 게 만들었다
최근 몇 십년동안에 중국 각지에서는 은허 갑골문보다 이른 시기의 도기 부호, 채색부 호, 갑골, 옥기, 석기 위에 새겨진 소량의 부호 등, 한자기원과 관련된 계열의 출토자료 들이 발견되고 있었으나, 비록 한자의 맹아(싹)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모두 한글자로 규율 성이 없어 단정함에 무리가 있으나. ‘창락골각문자’의 포치 및 결구는 규율을 따르고 있 고, 어떤 편방이 여러 번 나타남과 이 지역에서 초기 문자가 발견된 적도 있어, 이번에 출토된 골각문자가 우연적 현상이 아니라고, 왕위신선생이 피력하고,
산동성 갑골문학회 회장 리라이푸선생은, 산동 및 이 부근 토지에서 생활한 고대 인류는 東夷人인데, 8300년전의 호우리문화부터 시작해서, 베이씬, 따원코우, 롱샨, 위에쓰문 화까지 이르며, 동이인들은 새를 토템으로 삼았는데, 공교롭게도 창락골각문에서는 매와 작은 새의 형상을 반영하는 것들이 발견되며, 연대는 4,5천년전의 용산문화시기로 보 며, 은허갑골문과 어떠한 계승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창락골각문’이 더 오래되었다고 주장한다.~는 기사로, ‘창락골각문자’의 학술적 추이를 선전하며,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류펑쮠 선생이 간단히 정리한, 산동 ‘창락골각문자’를 공부하자.
‘어린 새가 뽕나무 가지 위의 둥지에서 한가로이 떨어지는 해의 석양빛을 즐기고 있는’ 새둥지그림의 기사문자처럼, 봉황과 새와 관련된 것이 많은데, 이것은 단순한 회화가 아니라 특수한 상징적 의미가 담긴 조합글자 군群으로, 한 종족이 어떤 특정한 장소 내에서 진행했던 기재할만한 활동으로, 그림이라고 불러선 안 되는 기사문자라 해야 한다 하였다.
이러한 ‘창락골각문자’ 발견은, 2008년 10월 22일자 중앙일보에도 실렸는데,
~중국 산동성의 민간소장자 소광덕消廣德이, 2004-2008년까지 갑골문자가 발견된 은허 유적지인 안양현에서 산동성쪽에 더 가까운 지역인 ‘창락昌樂현’ 주변에서 수집한, 소의 어깨뼈, 사슴뼈, 코끼리뼈에 새겨진 도안을, 산동대山東大 고고미술학 연구소의 류봉군劉鳳君이, ‘갑골문자 이전의 다른 형태의 골각문자가 산동성 창러현 지역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표 하였다~하여, 한 때 국내의 비주류 사학자들 사이에, 문자에 관한 논란을 일으켜,
덕분에, 일부 사람만이 알고 있던, 2002년 ‘일요시사’ 신문에 실렸던, 농은 민안부선생의 ‘붓으로 쓴 갑골문자 천부경’이니, 신지新誌 혁덕赫德의 ‘녹도문鹿圖文’이나 ‘가림토문자’를 국민에게 널리 알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1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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