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 6. 03:27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어찌되었든, ~요서 지방에서 발생한 지나支那 문화인 홍산문화가 서쪽으로 가서 은나라를 세우고, 동쪽으로 옮겨와 고구려와 부여 같은 나라의 기원이 되었으며, 아즈텍문명, 마야문명을 일으킨 이들도 상商나라의 후예들이다~는 경철화耿鐵華 교수의 주장이나,
~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중원으로 내려와서 흥했으며, 상이 망하자 다시 동북으로 갔다~는, 안양현 은허殷墟 유적 발굴을 총지휘했던 부사년傅斯年(1896~1950)의 주장을 미루어,
~지나의 고대문명과 국가형성은 황하黃河유역의 하夏나라에서 시작해 상商과 주周나라로 이어짐이 아닌, 오랑캐라 부르던 요하遼河에서 시작되어 황하유역으로 넘어갔다~는, 현대 고고학의 결론에 기대어 보면, 요하문화권의 신앙이 황하로 흘러 상나라의 신앙이 됨을 유추할 수 있으며, 상나라는 동이족임에 무게가 있다.
필자는 요하문화에서 오늘날의 우리 무巫신앙을 찾고자 하며,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오환烏丸 선비조鮮卑條’의, ~지배자가 죽으면 붉은산(赤山)에 가서 장례를 지낸다~는 기록과 요하문명을 이끄는 홍산문화에서 발견된 유적, 유물에서 동이의 고유신앙을 보고자 한다.
요하 문화 유적에서 발견된, 사해유적의 돌로 쌓아 만든 석소룡石塑龍이나, 가장 오래된 토기에 부조된 용龍문양 등과 ‘부신현 호두구’의 석관묘의 돌담장의 형태가 상층이 원형이고 하층이 정방형인 제단이란 사실과, 객좌현喀左縣 동산취東山嘴나 건평현建平縣 우하량牛河梁 유적에서, 토기제기나 지모신地母神사상을 엿볼 수 있는 나체 잉부상孕婦(임신한 여인)像이나 양 손을 잡고 무릎을 굽혀 반듯이 앉은 여신상과 석주石柱를 세운 방형의 지단地壇과 여신女神을 모신 원형의 천단天壇으로 구성된 종교적 제사 시설물에 주목한다.
은나라 왕조 계보
1대 성탕成湯, 2대 외병外丙, 3대 중임中壬, 4대 태갑太甲, 5대 옥정沃丁, 6대 태경太庚, 7대 소갑小甲, 8대 옹기雍己, 9대 태무太戊, 10대 중정中丁, 11대 외임外壬, 12대 하단갑河亶甲, 13대 조을祖乙, 14대 조신祖辛, 15대 옥갑沃甲, 16대 조정祖丁, 17대. 남경南庚, 18대 양갑陽甲, 19대 반경盤庚, 20대 소신小辛, 21대 소을小乙, 22대 무정武丁, 23대 조기祖己, 24대 조경祖庚, 25대 갑甲, 26대 늠신凜辛, 27대 경정庚丁, 28대 무을武乙, 29대 태정太丁, 30대 제을帝乙, 31대 주紂.
단일 민족을 부르짖던 한국인이, 오늘날 다문화 가정을 외치듯이, 중원으로 건너와 세월의 흐름 속에서 동이족인 상나라도 역시 동북의 요하시절을 잊게 되었듯이, 대륙은 새로운 역사의 장으로 시작되니, 우리는 주周나라를 기억한다.
주周나라(서주西周BC1046년-BC771,동주東周BC771∼BC249)를 세운 주족周族의 시조는, 중국 신화에서는 농업신 후직后稷으로 서술되고, 문헌상으로는 요임금의 조정에서 농업을 관장하던 후직后稷으로, 후직의 어미는 제곡帝곡의 정비正妃인 강원姜原으로, 들에 나가 거인의 발자국을 밟음으로 잉태를 하게 되어, 낳으니 아들인데, 잉태의 과정이 불길하여, 비좁은 골목에 버리니 소, 말이 아이를 피해가고, 산속에 버리니 산에 사람이 모여들고, 얼어붙은 강에 버리니 날짐승들이 깃을 깔고 날개로 덮으니, 버리려 했다하여 ‘기棄’라 이름 하여 성장하여, 농사를 잘 지으매, 요임금이 기棄를 태邰에 봉하고 후직后稷이라 칭하여, 희姬씨 성을 하사하니, 요나라의 제후족으로 출발하는데, 부줄不茁-국鞠이 대를 이어, 지금의 섬서 지방의 위수渭水 유역에서, 신석기 앙소와 용산문화를 계승하여, 서북의 오랑캐인 융적戎狄 사이에 섞여 주변의 유력한 세력들과 통혼하며 세력을 확대하였고, 공류公劉에 이르러, 선조 이래의 봉지인 태邰(섬서성 무공현의 동남부)땅을 떠나, 夏나라 말기에 빈(섬서성 순읍현 서부지역)으로 대이동하여 주족周族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여, 경절慶節-황복皇僕-차불差弗-훼유-공비公非-고어-아어-공숙조류公淑祖類까지 살다가, 상나라의 영향 속에서 상 왕실과 혼인관계로 맺어진 상나라의 제후국이었다.
고공단보古公亶父(太王)는 周족의 중흥시조로 고공은 본호, 단보는 이름인데, 공류가 정착시킨 빈에서 융적戎狄 등의 주변 이민족들의 침범을 자주 받게 되자, 빈을 융적에게 내어주고 기산岐山 밑의 주원周原땅에 도읍을 옮겨가니, 빈의 백성들이 모두 따라옴에, 비로소 국호를 주周라고 정하고, 융적戎狄의 풍속을 버리고 성곽과 궁실을 축조하여 읍락邑落을 탄탄히 하니, 말을 기르고, 전차戰車를 개발하고 청동 무기로 무장하여 상당한 무력을 축적했다.
이는, 상의 무정武丁으로 부터 1-2세기 이후의 일로, 은허殷墟 전기의 무정복사武丁卜辭에, 일찍이 은의 서쪽 나라였던 ‘주방周方’으로 확인되는, 주후周侯롤 토벌하는 일에 대해 점을 치고 있음을 보면, 고공단보 이전의 주周는 상商에 위협적인 존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경詩經 대아편大雅篇의 청묘지습靑廟之什천작天作’에 고공단보의 덕을 기리는 시를 보자.
~하늘이 기산을 높이 만드시고, 태왕께서 이를 닦으셨네(天作高山 大王荒之)
임께서 이루신 것을, 문왕께서 평안하게 하셨네(彼作矣피작의 文王康之)
임께서 그 곳에 이르시어, 기산에 평평한 길을 닦으셨다.(彼徂矣피저의 岐有夷之行)
자손들은 대대로 이를 잘 보전할 지어다.(子孫保之)
다음 왕인 고공단보의 막내아들인 계력季歷(왕계王季)은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정벌하여 힘을 비축하다, 상왕 문정文丁에 의해 살해되자,
상나라 귀족의 딸과 결혼한 창昌이 대를 이어, 기산岐山에서 위수渭水를 넘어 동쪽으로 진출하여, 새 도읍을 관중關中평야의 요충지인 풍豊(陝西省西安)으로 옮겨, 은으로부터 서쪽의 패자라는 ‘서백西伯’으로 인정받아 50년간 재위하며, 은殷왕조王朝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하다가, 1144년에 은의 마지막 주왕紂王에게 포로로 잡혀 3년간 감옥에 있으니, 주나라 사람들이 미녀 1명, 좋은 말 1필, 4대의 전차戰車를 지불해 풀려났는데, 3년간 감옥에 있으면서 주역의 괘사卦辭를 지었다는, 후일 ‘백이, 숙제’ 고사 속의 문왕文王이다.
다음의 무왕武王은, 창昌에 이어 서방의 부족들로부터 서쪽 나라의 우두머리인 서백西伯이라 불리니, 서방의 제후들을 거느리고, 즉위 12년에 여상呂尙(강태공)의 도움으로 주왕을 쳐서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풍豊에서 호鎬(호경鎬京또는종주宗周 陝西省西安)로 옮겨, 주周나라를 건국하고, 멸망시킨 상나라의 유민遺民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주왕의 아들 무경녹보武庚祿父를 세워 은의 옛 영토를 봉토封土하여 다스리게 하고, 동생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에게 이를 감독시키는 등의 체제를 정비하다 2년 만에 병사하였다.
잠시, 강상, 강태공, 곧 태공망 여상에 관해 알고가자.
강상은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알려져 있지 않으나, 동해상東海上 사람으로 동이東夷의 선비(士)라고 알려져 있다.
동해상은 당시의 제나라로 오늘날의 산둥 반도 지역인데, 강상은 70세에 주 문왕이 그를 발탁할 때까지 위수渭水가에서 미끼를 쓰지 않고 미늘도 없는 바늘을 사용하여 낚시를 하며 지냈는데, 주 문왕이 어느 날 사냥을 가려고 거북점을 쳤는데, 잡히는 것이 용도 범도 곰도 아닌, 패왕覇王을 도울 인물이라는 점괘를 얻은 뒤, 사냥을 나간 주 문왕은 위수 강변에서 어떤 노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니 보통 인물이 아닌 강상이었다.
주 문왕이 기뻐하여 말하길, ~선왕인 태공太公 때부터 ‘성인이 나타나 도울 터이니 주나라는 그 사람 때문에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대가 바로 그 성인이십니다.~하며, 태공이 바라던 인물이라 하여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러 궁에 들이니, 주나라의 정치를 맡은 강상은 주周 문왕과 아들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켰다.
강상은, 은 멸망 뒤에 제齊나라의 후侯로 봉해졌으며, 그의 7대손 여적呂赤의 증손 혜傒가 있어, 산동의 노盧나라를 분봉 받으니, 그가 노盧씨의 시조가 되었다.
강상의 병법서 ‘육도삼략’은 고대 중국의 7가지 병법서의 하나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나이어린 성왕成王이 대를 이으나, 주공周公 단旦이 섭정攝政이 되니(일설에는 단旦이 왕이 되었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이에 불만을 품은 상의 옛 땅을 감시하던 관숙, 채숙, 곽숙이 무경녹보武庚祿父와 함께 ‘삼감三監의 난’을 일으키니, 주공은 소공召公 석奭 등과 함께 3년 만에 난을 평정하여 강숙康叔을 위衛의 제후로 봉하고, 무경의 백부인 미자계를 송宋에 봉해 상 왕조의 제사를 계속하게 하고, 상의 유민과 상 왕조에서 이어진 제후국 특히 동방의 제후들을 견제하여, 일부 지역은 상족의 읍을 해체하기도 하여, 은나라의 전 영역에 대한 주의 통치권이 확립되기 전에 반란이 일어나 진압에 3년이나 걸리긴 했지만, 결국 주나라가 대륙 전역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주공은 현재의 낙양洛陽에 상의 유민을 동원해 낙읍洛邑(성주成周)을 건설하고, 성주成周에 남아 동방을 다스리고, 성왕은 종주(호鎬)로 돌아갔다 하니, 당시 주나라의 영토는 주공과 성왕이 분할 통치함으로 파악한다.
주周는 전 지역에 대한 군주의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각지에 상대商代의 봉건제를 정비하여, 무왕, 성왕 때인 주초에, 각지에 분봉한 공신과 왕실의 자제, 왕실 일족의 제후국이 약 56개 국, 이성異姓제후가 약 70개국으로 추측되며, 전체 제후국은 약 130-180개국으로 추산하며, 이들 제후들에게 상대商代의 봉건제에서 사용되던 조근과 공물을 바치고 군사적인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의무를 부여하여 통제하니, 이를 주周의 봉건제도라 한다.
당시의 희씨 성이 군주인 주나라의 대표적인 제후국을 살펴보자.
무왕이 주공단에게 봉지를 내려, 노魯라하여 제후국으로 삼으니 노魯나라이고, 은나라 옛 땅의 관숙, 채숙, 곽숙藿叔의 관管나라, 채숙의 아들 채호蔡胡의 채蔡나라, 무왕의 동생 숙진탁叔振鐸의 조曹나라, 성숙무成叔武의 성郕나라, 곽숙霍叔의 곽霍나라, 강숙康叔의 위衛나라, 삼감의 난의 공신인 염계冉季 재염載冉의 심沈나라, 정환공鄭桓公의 정鄭나라, 소공召公석奭의 연燕나라, 성成왕의 동생 우虞의 당唐나라는 반란으로 진晉나라로 바뀌어 당진唐晉으로 부르는데 춘추시대에 초나라와 패권을 다투는 패자의 위치였으나, 춘추말기인 기원전 453년 진양성晉陽城 싸움으로 한韓, 위魏, 조趙에의해 삼분되며, 이로부터 전국시대의 시작으로 보며, 문왕의 동생들인, 괵숙괵叔의 동괵, 괵중의 서괵등의 괵괵나라, 문왕의 백부인 오태백吳太伯의 오吳나라, 우중虞仲의 우虞나라 등이 있다.
공신들의 나라로는, 영贏씨 성姓의 비자非子와 진양공秦襄公의 섬진陝秦, 강태공姜太公(여상呂尙)의 제劑나라는 환공과 관중의 부국강병책으로 춘추시대의 강국으로 군림하나, 기원전378년의 전국시대에 전상田常이 국권을 뺐으니, 강姜씨의 나라에서 전田씨의 나라가 된다.
삼감의 난을 평정하고, 은나라 유민을 이주시켜 은의 제사를 이어가게 한 미자개微子開의 송宋나라, 웅역熊繹의 초楚나라, 우순虞舜의 자손인 규만嬀滿(=호공胡公)이 세운 진陳나라는 후손들이 전田씨로 개명하여, 여상이 세운 제劑나라를 탈취하며, 요임금이 책봉했다는 허유許由의 허許나라, 하우夏禹의 자손인 동루공東樓公의 기杞나라, 황제의 장남인 현효玄囂(소호少昊)의 자손인 거莒나라 등으로, 읍락국가형태의 봉건국가들은, 왕이라는 칭호가 아닌 공公으로 호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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