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華白瓷의 裝飾, 화원의 솜씨

2019. 2. 12. 02:41美學 이야기



靑華白瓷 | 澗松峴

핵아 2018.08.21 19:19



靑華白瓷의 裝飾, 화원의 솜씨

   청화백자는 호, 병, 편병, 잔받침, 뚜껑, 양이잔, 팔각잔, 화형잔, 연적, 개합 등 다양한 종류가 제작되었고 순백자와 형태, 크기, 세부의 특징, 제작방법 등이 동일하지만 수량은 상대적으로 적다. 청화백자가 관요에서 제작되고 수요자도 왕실로 한정되어 그림장식의 소재나 구성이 서로 유사하거나 동일한 예가 많다. 이것은 그림장식에 화원이 참여하면서, 왕실 취향의 그림을 임의로 변경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백자청화송월문잔받침 파편>   


왕실용 백자를 제작한 도마리1호 가마터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 하나로, 조선 전기에 청화백자의 장식으로 즐겨 그려지던 소나무가 보인다. 소나무 주변에는 달과 별이 나타나는데,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달밤의 풍경을 묘사한 듯 재미있다.[국립중앙박물관, 조선 1505년 전후, 도마리1호 가마터 출토.]

청화백자와 관련하여 관심을 끄는 것 중에 하나가 안료의 출처에 대한 문제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1463년, 1464년, 1469년 등 국내 각지에서 안료를 찾으려는 노력이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전라도 강진과 순천부, 경상도 밀양부와 의성현, 울산군 등지에서 회회청, 회회청상사석, 심중청, 토청, 삼청 등을 채취하기도 하고 나아가 채색을 찾는 사람에게 포상을 내걸기도 하였다. 안료의 조달은 청화백자의 제작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인데, 관요 설치 이후에도 공급이 일정하지 못하였다. 실제로 1488년 화원 이계진이 중국에서 회회청을 사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는데, 회회청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고 민간에서 쓰는 것도 아니어서 구하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회회청을 국내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시도되긴 하였지만 관요 설치 당시부터 중국에서 공무역의 형태로 구입해 쓰고 있었던 것이다.

1525년 편찬된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에는 “회회청을 중국에서 구하여 술병과 술잔에 그림을 그렸는데, 중국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회청이 드물고 귀하여 중국에서도 많이 얻을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에서는 그림 그린 사기그릇이 매우 적다.”고 기록하고 있어, 중국을 통한 안료 수입도 어려웠으며 안료 부족이 청화백자의 제작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상황을 엿볼 수 있다.203)

도마리 1호 청화백자 16점, 우산리 9호 청화백자 10점, 번천리 5호 청화백자 1점, 번천리 9호 청화백자 9점 등 관요 발굴에서만 수천 점의 순백자 파편이 출토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청화백자는 희귀하므로 당시 기록이 사실이었음을 알려준다. 중국에서 회회청을 구입하는 일은 16세기 중반에도 계속되어, 1541년 천추사가 중국에서 회회청의 구입을 시도하였지만 무역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직후인 1618년에도 “조정의 연향 때 사용하는 화준이 난리를 치른 후 하나도 남은 것이 없어 청화안료를 사다가 구워내려 하였지만 사올 길이 없었다.”고 하는 등 기록으로 보면 조선 전기의 청화백자는 중국산 청화안료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204)

청화백자는 다양한 기형이 만들어졌지만 특이하게도 가장 많은 수량이 제작된 발과 접시에 그려진 예는 거의 없다. 발이나 접시와 같은 일상 용기보다는 특정한 종류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제작된 것으로 이해된다. 백자에 보이는 청화장식은 비중에 따라 주 문양과 보조 문양으로 나누기도 한다. 중심부에 그려지는 주 문양은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 보상화, 보상당초, 당초, 포도, 수목 등 식물과 사슴, 학, 새, 용, 말 봉황, 호랑이, 물고기 등 동물, 이외에 인물, 산수, 초충, 달, 별, 구름 등이 있다. 보조 문양은 몸체 상단과 하단, 밑면, 혹은 가장자리, 주 문양의 사이에 크기를 작게 하거나 성글게 장식하기도 하며 모란, 연잎, 보상, 당초, 국화 등 식물 소재 가 주류이고 드물게 동심원이나 구름도 보인다. 그림은 병, 호, 잔받침에 집중적으로 그려졌고 소나무, 매화, 대나무가 즐겨 채택되었다. 


<백자청화보상당초문 받침>   


   왕실용으로 제작된 청화백자 중 하나로, 그림이 정교하고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빈 공간을 두지 않고 전면에 장식을 가득 채웠는데, 중앙의 꽃을 중심으로 주변의 꽃과 덩굴이 도식적이기도 하다. 유사한 구성 방법이 중국 명나라 초기에 제작된 청화백자에서도 나타나므로, 광주 관요 백자와 중국 백자 사이의 영향 관계를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일본 오사카시립 동양도자미술관, 조선 15세기, 높이 1.8㎝.]

청화장식은 소재의 구성이나 표현 방법에 따라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도식화된 소재이고 다른 하나는 회화장식이며, 마지막 하나는 시를 적은 것이다.

먼저, 도식화된 장식의 대표적인 소재로 보상당초, 연판과 여의두, 화엽, 칠보문이 있다. 보상당초는 백자의 형태나 공간에 맞추어 소재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고 다양한 변화와 변형을 추구하였는데, <백자청화보상당초문잔받침>이 대표적이다. 연판과 여의두, 화엽문은 폭이 좁은 띠를 두르듯 횡으로 장식하였다. 회화장식으로는 매화, 대나무, 소나무, 물고기와 수초, 운룡, 말 등이 그려졌다. 매화는 즐겨 그려지던 대표적인 소재로 단독 혹은 대나무, 새와 함께 나타난다. 대나무는 제작시기에 따라 개체의 크기와 세부 표현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1489년 제작된 <백자청화송죽문홍치이년명호>의 대나무는 매화와 비슷한 크기로 세부까지 섬세하게 그렸지만, 16세기 <백자청화매죽문양이잔>에서는 크기가 눈에 띠게 작아졌고 한 번의 붓질로 하나의 잎을 그리는 등, 전체 혹은 세부를 간략하게 묘사하는 변화가 있다. 이외에 회화장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가 용으로 관요에서 용이 그려진 파편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여러 종류의 백자 중에서도 잔받침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장식이 시를 적어 놓은 것이다. 관요에서 출토된 파편 가운데 중국 당나 라를 대표하는 시선 이태백의 ‘대주부지(待酒不至)’라는 오언시의 일부가 적힌 예도 알려져 있다.205) 잔받침에 쓰여진 시가 언제, 누구에 의해 지어진 것인지, 모두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조선 전기의 문학적 조류나 수요자의 취향과 맥을 같이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시는 모두 술과 관계된 것이어서, 이들 백자는 술잔의 받침과 같은 용도로 알려져 있다. 청화장식의 대체적인 흐름은 도식적인 장식에서 회화장식, 시문으로 주류가 바뀌어갔다. 그러나 전체적인 흐름이 변화되었을 뿐 이들이 순차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도식적인 문양이 많이 그려지던 초기에 그림 장식이 사용되기도 하였고, 회화장식이 주로 등장하던 때에도 소수 도식적인 장식이 채택되기도 하는 등 공존하였다. 이 과정에서 보조 문양의 생략 등을 통한 화면의 구성이나 소재의 구도, 세부의 표현도 변화되며, 다양한 특징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백자청화송죽문 홍치2년명 호>   

   형태도 힘이 넘치지만 대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그림 솜씨가 뛰어나며, 조선 전기에 제작된 청화백자 중에서 정확한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유물로도 유명하다. 굽 안쪽 면에 홍치(弘治)의 명문이 남아 있다.[동국대학교 박물관, 조선 1489년, 국보 제176호, 높이 48.7㎝.]


 
<백자청화매죽문양이잔>  
 
   크기가 작은 잔으로 측면 두 곳에 귀 모양의 손잡이가 있어 양이잔이라고 불린다. 손잡이는 제작 시기에 따라 별 혹은 활짝 핀 꽃 모양을 보이기도 한다. 전면에 그려진 매화와 대나무는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그림 장식에 즐겨 사용된 소재이다. 시간이 경과하며 대나무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아지고 주변에 여백이 나타나는 변화가 보인다.[삼성 미술관 리움, 조선 16세기, 높이 3.7㎝.]

광주 가마터에서는 상감장식이 있는 백자 파편도 발견되는데, 대체로 질이 거칠고 연회색 또는 진회색을 띠거나 담청색을 보인다. 상감백자는 관요 설치 이전의 가마에서도 만들어졌고, 관요에서는 관청용 백자를 제작하던 가마에서 주로 제작되었다. 특히, 상감백자의 형태와 소재, 장식기법에서 분청사기의 영향이 일부 확인된다.



<백자청화 시문받침>   

   왕실용 백자를 만들던 도마리 가마터에서 다량의 순백자와 함께 출토된 청화백자 파편으로 안바닥에 시가 적혀 있다. 시를 장식한 청화백자는 몇 점이 전세 유물로 전하기도 하지만, 이 유물이 대표적인 예로 유명하다.[국립중앙박물관, 조선 1505년 전후, 도마리1호 가마터 출토.]

 
<백자상감모란문병>   

   상감백자는 15세기에 주로 제작되었으며, 16세기에는 그 수가 급격히 감소하다가 제작이 중단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광주 가마에서 주로 발견되며, 질은 좋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다. 장식은 모란이나 당초 등을 간략하게 도식화한 것이 많지만, 드물게 나무 등 특이한 예도 나타난다.[호림박물관, 조선 15세기, 보물 제807호, 높이 29.6㎝.]

 
<백자철화매죽문발>  
 
   조선 전기에 제작된 철화백자 중 하나로, 발의 형태나 장식 소재, 구성 등이 동 시기에 제작된 청화백자와 동일하다. 질과 형태, 장식 등으로 보아 왕실용 백자를 제작한 관요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삼성 미술관 리움, 조선 16세기, 높이 6.7㎝.]

그러나 16세기 중반 관요에서 출토된 상감백자의 연잎장식은 청화백자에 그려지던 보조 문양을 차용한 것이어서, 청화백자의 특징도 엿볼 수 있다.206) 청화장식의 영향이 상감백자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며, 15∼16세기 철화백자에도 나타난다. 철화백자의 대표적인 장식이 매화와 대나무인데, 소재와 구성 모두 청화장식과 동일하다. 현재까지 조선 전기에 철화백자를 제작한 곳으로 확인된 가마터가 몇 곳에 지나지 않고 유물도 소수에 불과한 점, 유물의 형태와 질, 굽, 받침, 장식 소재나 구성이 관요의 순백자 혹은 청화백자와 동일한 점, 그리고 당시 청화백자가 활발히 제작되었고 수요자 역시 청화백자를 선호하였던 점 등을 고려하면 철화백자는 청화안료의 부족으로 그때그때 일시적으로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즉, 철화백자의 제작은 수요자의 취향보다는 중국으로부터 청화안료의 조달이 여의치 못하였을 경우와 같은 문제가 생겼을 때 대안으로서 소수 제작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5∼16세기 백자의 장식은 두 개의 커다란 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상감백자는 관요 설치 이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청화장식의 요소를 새롭게 차용하면서 16세기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진 축이다. 다른 하나는 청화장식으로 관요 설치 이후 본격적으로 화원의 그림이 장식되기 시작하여 16세기 말까지 계속되었으며, 소재와 구성, 표현 방법 등이 화풍에 따라 변화되거나 새로워졌다. 이 과정에서 청화장식과 유사하거나 동일한 철화장식이 필요에 따라 제작되었다.


[필자] 전승창


203)『성종실록』 권211, 성종 19년 1월 23일 및 『용재총화』권10.
204)『중종실록』 권97, 중종 36년 12월 28일 및 『광해군일기』, 10년 윤4월 3일(호암미술관 학예연구실, 「청화안료에 대하여」, 『조선백자전』Ⅱ, 호암미술관, 1985, pp.69∼80).
205)잔받침에는 시의 앞부분 4구절만이 적혀 있는데, 원문과 그 의미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玉壺繫靑絲(술병에 푸른 실을 묶어) 沽酒來何遲(술을 사 오는 것이 왜 이리 더딘가?) 山花向我笑(산의 꽃은 나를 보고 웃으니) 正好銜杯時(술잔을 머금고 있을 때 참으로 좋도다) 晩酌東窓下(동쪽 창 아래에서 해질녘에 술을 따르니) 流鶯復在玆(하늘을 나는 앵무새도 다시 여기에 있는 것 같구나) 春風與醉容(봄바람과 술에 취한 사람이) 今日乃相宜(오늘에야 제 짝을 찾았구나).”
206)번천리 9호에서는 3편의 상감백자가 출토되었는데, 상감백자의 장식으로 즐겨 사용되던 연화문이 있는 구연부 파편과 초화문이 장식된 몸체 파편, 그리고 새롭게 보이는 연잎장식이 있는 제기 爵의 파편이 그것이다(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앞의 책, 2007, p.228).



                                                                  靑華白瓷

2018.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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