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아침] 아날로그 시대의 사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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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있는 아침] 아날로그 시대의 사랑법 | 아트칼럼

바람아 2014.07.13 11:46





조지 킬번의 ‘편지쓰기’(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젊은 여인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상대는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일까. 화가가 그의 왼편(감상자의 오른편)에 한 다발 핑크빛 장미를 슬며시 놔둔 걸 보면 그런 추측이 틀림없다. 그의 표정은 누가 봐도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여인의 그것임을 숨길 수 없다.

   영국화가 조지 킬번(1839~1924) ‘편지쓰기’는 아날로그 시대의 연애 방정식을 잘 보여준다. 잔잔한 문구로 상대편의 마음에 서서히 스며들어가 사랑의 영토를 갈무리하는 견고한 사랑법 말이다. 그가 쓰고 있는 한 뼘의 편지 속에는 하늘을 가리고도 남을 무한한 열정이 담겨있고 매 단어마다 사랑의 텃밭을 다지는 두툼한 시간의 켜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조지 G. 킬번의 작품 감상하기]-19세기 초 영국의 낭만을 담다

 

   그림을 보기 시작하면서 개인적으로 좋아진 것 중 하나는 상상력이 늘었다는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보거나 구도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좋지만 이야기를 만들어 보는 재미가 제일 인 것 같거든요. 그런 저를 보고 아내는 뻥을 친다고하지만 세상이 이만큼 온 것은 수 많은 의 산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물과 풍속을 묘사한 화가로 이름이 높았던 영국의 조지 G. 킬번 (George Goodwin Kilburne / 1839 – 1924)의 작품 속에는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요?

 

듀엣   The Duet

 

   피아노와 하프가 만났습니다. 등을 돌리고 앉았지만 두 사람이 연주하는 소리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고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겠지요. 아니, 모든 소리에는 감정이 실리기 때문에 얼굴보다는 마음이 빈틈없이 서로를 읽고 있겠지요. 서로 다른 소리가

합해져서 또 다른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을 창조라고 한다면 우리는 매일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셈입니다. 물론 불협화음이 계속 되다가 결국 한 사람이 퇴장해버리면 모든 것이 날아가지만요. 그래서 자기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지음(知音)이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과연 나는 누의 소리에 내 소리를 맞추고 있는 걸까요?

 

   킬번의 아버지는 학교 교장 선생님이자 과학자였고 미술가였습니다. 재능이 많은 분이었지요.

삼촌은 은행가였는데 호주 멜버른으로 이민을 가서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고 고모는 미혼인체로 중국으로 건너가서 그림을

그렸다고 하니까 쟁쟁한 식구들이었군요. 막내 아들이었던 킬번은 아버지가 선생님인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합니다.

 

 

편지   A Letter / 71.1cm x 91.81cm

 

   한동안 손 편지를 안 쓰다가 요즘 간혹 편지를 쓸 일이 생겼습니다. 종이 위를 미끄러져가는 만년필 소리를 듣다 보면 편지를

받을 사람의 표정이 떠 오릅니다. 받침 하나의 삐침에 웃다가 그 속에 담긴 뜻이 뭘까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 같은 것들 말입니다. 문득 편지를 써 가다가 편지 속 내용과 연관된 상념에 빠지기도 하죠. 그림 속 여인도 꼭 그런 모습입니다. 손으로는 편지지를

잡고 있지만 이미 턱 밑에 가 있는 펜은 여인의 상상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잘 지내고 있죠?

어쩌면 여인은 그 한 마디만 써 놓고 남은 이야기는 아련한 눈빛에 담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학교 공부가 끝난 킬번은 런던에 있는 달지엘 브라더스 (The Dalziel Brothers)라는 목판화와 삽화를 그리는 회사에 견습생으로 들어갑니다. 이 회사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영국판에 들어가는 삽화를 넣은 곳입니다.

5년간 견습생으로 일이 끝나고 킬번이 선택한 것은 목판화가 아닌 수채화와 유화였습니다.

 

 

엄마와 딸    Mother and Daughter



  벽난로의 따뜻한 불기가 건너오는 의자에 앉은 엄마는 책을 펴고 장난감 놀이에 신이 난 아이를 불렀습니다.

그림을 짚어가며 이야기를 엮는 엄마의 말씀에 아이가 빠져 들었습니다. 혹시 기억 나시는지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 모든 엄마들은 세계 최고의 구연동화 전문가였죠. 아이의 넋을 쏙 빼 놓을 만큼 다양한 성대모사를 보여주었죠. 또 이야기를 즉석에서

만드는 뛰어난 소설가이기도 했습니다. 예전 우리 아이들이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면 제가 늘 해주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빠가 어렸을 때 산을 넘어가는데 호랑이가 나타났어.

아이들 눈이 동그랗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뒤도 안 돌아 보고 산을 넘어 달렸지.

그래서?

아이들이 침을 꼴딱 삼켰습니다.

산을 하나를 넘고

그 다음에는

또 산을 넘고

우리나라 국토의 70%가 산이니 그 산을 다 넘으려면 시간이 좀 걸렸죠. 전체 1%의 산도 넘기 전에 아이들은 제게서 흥미를

잃었고 아이들이 있던 자리에는 부엌에서 도끼눈을 하고 있는 아내의 싸늘한 눈초리가 대신 자리를 잡곤 했습니다.

 

킬번이 판단하기에 목판화는 소위 말하는 돈이 되는분야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선택한 분야는 수채화와 유화였습니다.

금전적인 이유 때문에 당시 수채화로 시작해서 유화로 옮겨 간 화가들도 있지요. 그렇다고 킬번이 목판화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를 놓고 보면 킬번의 선택이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망이 없군요   A hopeless case / 76.9cm x 116.7cm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사람들의 자세를 보면 누가 유리한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급한 사람일수록 바둑판 앞으로 몸이 기울죠. 전체를 보려면 멀리서 봐야 하는데 몸이 정반대로 움직이는 것은 조급함 때문입니다. 남자의 시선은 체스판에 고정되어 있는데 여인의 시선은 붉은 색 쥘부채 사이로 남자의 얼굴에 머물러 있습니다. 여인의 표정에는 승자의 여유가 있습니다.

한 눈에 봐도 체스 좀 한다는 남자가 여인에게 된통 당한 꼴입니다. 여인의 눈빛을 보면 적당히 이 순간을 즐기는 것 같습니다. 남자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시는지요?

괜히 두자고 했어, 그냥 이야기나 할 걸, 괜히 두자고 했어

저 같으면 어떻게든 판을 넘어뜨렸을 겁니다. 미안해서 어떡하지, 다시 둘까?

 

초기 킬번작품 주제 18세기말부터 19세기 초, 인물과 풍속이었습니다. 목판화에서 배운 섬세하고 정확한 선처리가

작품을 제작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잡지에 수 많은 흑백 삽화를 연재했는데 이 작품들은 인쇄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었습니다.

 

 

지피기   Stoking the Fire

 

   숲으로 소풍을 갔겠지요. 멤버들의 구성을 보고 추정을 하자면 아마 가족 단위로 식사 당번을 맡은 모양입니다.

나뭇가지를 주어온 딸과 함께 아빠는 불을 피우고 있는데, 주전자에 물을 담고 오는 엄마의 표정은 아주 심드렁합니다. 한껏

멋도 냈는데 물을 길어와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아주 마뜩잖겠지요. 누군가는 해야 일이라면 먼저 하는 , 기분 좋게 하는 것이 세상을 조금 밝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림 여인은 아직 모르는 모양입니다.

얼굴 똑바로 펴봐

나무를 태우는 연기 사이로 남자의 속도 타고 있습니다.

 

   전문적인 화가로 자리를 잡기까지 킬번달지엘 브라더스에 적을 두고 있었는데 회사의 주인 중 한 사람이 킬번의 재주를

눈 여겨 보았습니다. 스물 세 살이 되던 해 킬번은 주인의 딸 자넷과 결혼 합니다. 마치 동화속에서 나오는 이야기 같습니다.

부부는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큰 아들 찰스는 나중에 아버지처럼 화가가 되어 동물과 인물화로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나머지 아이들도 모두 전문직업을 가지거나 명망있는 집안과 결혼을 합니다. 이것도 부모의 능력이라면 능력입니다.

 

할머니께 드리는 꽃다발    Posy for Grandma


 풍속화를 보다 보면 여인 3대가 묘사된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오랜만에 할머니를 찾은 손녀가 엄마보다 먼저 문을 열고 들어와 꽃다발을 내밀었습니다. 지긋이 눈을 감은 할머니는 꽃 향기를 마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손녀의 예쁜 마음도 함께 가슴 깊이 담고 있습니다. 약간 떨어져 있는 여인과의 거리를 보다가 문득 떠 오른 생각이 있습니다. 문화 인류학에서는 조손(祖孫) 관계가 좋은 이유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라이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너무 차갑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지요. 더구나 그 사랑이 자신을 구속하지 않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저도 언젠가 할아버지가 될 마음의 준비를 하는 모양입니다.

 

   1863, 킬번은 처음으로 로얄 아카데미에 작품을 출품합니다. 이 때부터 시작한 그의 작품 출품은 1918,여든 살이 될 때까지 계속되는데 총 37점을 출품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었고 곧 영국에서가장 많이 찾는 화가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실례지만---       May I / 36.6cm x 25.4cm / Watercolor

 


   이거 참 난감한 상황입니다.

의자에 앉은 여인에게 다가가 모자를 벗고 정중하게 춤을 추자고 청할 생각이었습니다. 모자는 벗었고 팔을 들어 실례지만이라고 까지는 했는데, 이런 다음 말이 이어지지를 않습니다.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멍하게 거울을 바라보는 남자의 표정이 안쓰럽습니다. 앉아 있는 여인도 남자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인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뻔뻔스러움이 필요하다니까요, 용기가 아니고 뻔뻔스러움, 아시겠습니까?

저라고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빨리 이 상황을 끝내주고 싶습니다.

 

   킬번은 여행을 많이 한 화가로도 기억됩니다. 1875년과 1876, 킬번은 이태리 여행을 합니다. 로마에서는 3개월 동안 머물면서 작품을 제작합니다. 물론 베니스에서도 작품 제작 활동을 계속했지요. 이어 노르망디와 스위스를 방문 수 많은 스케치를

남기는데 영국과 웨일즈의 이 곳 저 곳을 찾아 다니면서 그의 스케치 여행은 계속되었습니다.

 

아이 보기    Admiring the Baby / 127cm x 91.5cm

 어쩜, 아이가 이렇게 잘 생겼니!

붉은 색 꽃이 장식된 모자의 할머니는 쉴 새 없이 아이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새로 태어난 아이를 보러 노부부가 집을 방문했습니다. 하녀가 데려온 아이를 엄마가 조심스럽게 받아 안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혹시 아이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닐까요? 다시 세대를 이어 갈 아이를 보는 즐거움이 노인의 지팡이 위치에 담겨 있습니다. 지팡이 보다 한참 앞으로 나와 몸을 기울인 모습에서 기쁨과 호기심을 볼 수 있거든요.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디를 가도 비슷합니다.

 

   킬번의 작품에는 화려한 실내 묘사가 등장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나폴레옹 3가 죽고 잠시 그의 아내 유제니 황후로부터 몇

점의 작품 제작 의뢰를 받습니다. 치즐허스트에 있는 황후를 여러 번 방문하면서 작품 제작을 했는데 마지막 황제가 사용하던 실내 장식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죠.

 

강둑에서    On The River Bank / 25.3cm x 35.5cm / 1874 / watercolor and pencil heighten

 


   살아온 환경이 상상의 세계를 결정짓는다는 것을 강둑이 들어간 작품을 볼 때마다 실감합니다. 제 머리 속에 자리 잡은 강둑은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밭이 짙어 오는곳이고 남포로 님을 보내는 서러운 노래들리는 곳입니다. 그래서 높은 둑이

강과 들판을 구분하는 장소로 남아있습니다. 그림 속 강둑은 제 머리 속에 자리잡은 것과는 다르지만 여인의 자세는 아주 비슷합니다. 나무에 손을 잡고 여인이 바라보는 곳, 배가 떠가고 있지 않을까요? 여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나뭇가지로 강에서는

여인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겠지요. 흘러가는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때 쯤이면 여인이 서 있는 곳도 초록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색으로 덮일 것입니다. 그래서 강둑은 저에게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는 곳입니다.

 

   1883, 마흔 네 살이 되던 해 아내 자넷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 뒤 예순이 되던 1899, 킬번은 에디스라는 여인과 재혼

하는데 그 다음 해 아들을 낳습니다. 그리고 2년 뒤 둘째 아들을 낳습니다. 환갑이 넘어 아이를 둘이나 낳은 킬번, 참 대단한

 남자입니다. 아마 그가 이런 눈부신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뛰어난 스포츠맨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크리스마스 무렵      Yuletide / 36.3cm x 27.1cm / watercolor with pencil


 과문한 탓인지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은 봤어도 갑옷을 장식하는 것은 처음 봅니다. 생각해보면 꼭 나무일 필요는 없겠다

싶습니다. 나의 죽음을 피하고 상대를 죽이기 위해 입는 갑옷에 꽃을 얹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요. 갑옷이 전쟁터에

있지 않고 집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평화가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꽃 한 송이, 갑옷의 발등에 얹어 놓았으면

좋겠습니다.

 

   킬번은 승마를 좋아했고 사냥과 사이클 타는 것 그리고 골프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또 칼과 같은 무기와 갑옷을 수집하는데도 아주 열성이었는데, 그의 작품 속에 소품으로 등장하기도 하죠.

사냥은 어렵지만 사이클은 가능할 것 같은데 --- 그래도 킬번의 능력은 놀랍습니다.



     Goodbye / 36cmx 52.7cm/ Watercolor

 

   작별은 언제나 가슴이 저립니다. 제가 결혼을 한 이유 중 하나도 집 앞에서 헤어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그때가 결혼을 할 때라고 하더군요. 작품의 구성이 재미 있습니다. 남자 곁에는 말이 있고 반대편에는 여인과 개가 있습니다. 떠나는 사람과 남아 있는 사람의 상징이겠지요. 손을 잡고 남자의 얼굴을 보는 여인의 표정이 간절합니다. 아가씨, 작별 인사도 버릇됩니다.

그 남자와 헤어질 때마다 작별 인사를 하면 나중에 다른 사람과 작별 인사를 할 때도 그 남자가 떠 오르거든요.

 

   19세기가 끝날 무렵 수 많은 매력적인 크리스마스 카드와 다른 여러 종류의 카드를 제작합니다.

카드를 만드는 일을 하다가 눈에 심각한 통풍이 찾아 옵니다. 아마 정교한 작업을 쉬지 않고 했기 때문에 찾아온 질병이었겠지요. 그래도 로얄 아카데미 출품은 계속되었습니다. 킬번은 여든 다섯의 나이에 오랫동안 그가 살았던 집 옆집에 살던 딸의

집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리허설    The rehearsal





                                            [그림이 있는 아침] 아날로그 시대의 사랑법

2014.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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