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산천 김명희의 「사차(謝茶)」시와 초의의 제 2 다송

2019. 2. 25. 01:55차 이야기

산천 김명희의 「사차(謝茶)」시와 초의의 제 2 다송


앞서 살폈듯 산천(山泉) 김명희(金命喜, 1788-1857)는 향훈(香薰)에게 「다법수칙(茶法數則)」을 써주었을만큼 차를 몹시 즐겼을 뿐 아니라, 그의 호가 말해주듯 샘물에도 관심이 높았다. 초의가 보내온 차를 마시고 감사의 뜻을 담은 「사차(謝茶)」시가 초의의 『일지암시고』에 수록되어 있거니와, 초의 또한 이에 화답한 시를 남겼다. 이번 호에서는 산천과 초의의 수창시를 꼼꼼히 읽어 보겠다.


산천과 초의의 인연

산천과 초의의 첫 대면은 1815년 초의가 처음으로 상경했을 때 이루어졌다. 이후 두 사람은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러다가 1830년 10월 8일 추사의 부친 유당(酉堂) 김노경(金魯敬)이 정쟁에 몰려 강진현에 속한 고금도(古今島)로 위리안치 되면서 다시 왕래가 재개되었던 듯하다. 당시 다산의 아들 정학연은 강진에 있던 다산의 제자들에게 친구인 추사의 부친을 돌보게끔 했다. 이 과정에서 초의를 비롯한 대둔사 승려들도 추사 형제가 부친을 뵈러 고금도에 내려오자 유당도 보살필 겸 이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갔던 모양이다. 『일지암시고』에 실려 있는 「금호에서 산천도인과 유별하다(琴湖留別山泉道人)」란 시에 이때의 일이 적혀 있다.

憶曾傾蓋西館雪 일찍이 눈 오던 서관(西館)에서 만났을 때
更闌華燭光明滅 밤 깊자 화촉 불빛 모두 다 사위었지.
颯爽不似在人間 상쾌하여 인간에 있는 것 같지 않고
爲近仙子氷玉潔 신선에 가까워서 빙옥인양 깨끗했네.
忽間氛䘲久冥冥 홀연 나쁜 기운 오래도록 깜깜하여
海闊天長鱗鴻絶 넓은 바다 긴 하늘에 소식조차 끊겼었지.
-因讒阻絶十有餘年 참소로 인해 10여년이나 소식이 끊어졌다.
明月久曠同澄輝 밝은 달 오래어도 맑은 빛은 한가진데
白雲空復淸怨結 흰 구름 하릴없이 맑은 원망 맺혔구나.
天涯涕淚爲汍瀾 하늘가서 흘린 눈물 하염없이 흐르니
舊日天機還高挈 지난 날의 천기(天機)가 도로 높게 이끄누나.
-古湖見後, 還如舊好 고호(古湖)에서 본 뒤로 다시 예전처럼 좋아졌다.
蘭操細將幽恨傳 고운 가락 세세히 그윽한 한 전해주니
償音最是關情切 노래 듣자 마음 끌림 몹시도 간절해라.
當時世事何崢嶸 당시의 세상 일은 어찌 그리 험했던고
太行孟門同嶻嶭 태항산 맹문산과 높고 험함 꼭 같았네.
千里忽傳新安耗 천리라 홀연히 신안(新安) 소식 전해지니
-公在古湖, 聞夭慼之報 공이 고호에 있을 적에 요절의 슬픈 소식을 들었다.
人間何怨可相埓 인간 세상 어떤 원망 여기에다 견주리오.
我亦曾看英妙姿 나도 진즉 영묘한 자태를 보았거니
玉蘭銀桂藹將擷 옥란(玉蘭)과 은계(銀桂)가 우거져 캘만 했네.
我若詳言恐斷腸 내 자세히 말을 하면 애 끊을까 염려되어
爲君且置休煩說 그댈 위해 공연한 말 놓아두고 그만하리.
扶旺今日泰運來 오늘은 왕성하게 큰 운이 돌아와서
琴堂影翠摩漢洌 금당(琴堂) 푸른 그림자가 한강물에 비치누나.
-蒙宥上洛時居琴湖. 사면을 받아 서올로 올라왔을 때 금호(琴湖)에서 지냈다.
三秋高會窮憐歡 삼추의 고회(高會)에서 슬픔 기쁨 다 나누며
-甲午秋重會琴石亭 갑오년(1834) 가을에 다시 금석정(琴石亭)에서 만났다.
閒碾鳳團燒鷄舌 한가로이 봉단(鳳團) 갈고 계설향(鷄舌香)을 살랐다네.
人生聚散苦難常 인생 만나 헤어짐이 일정찮음 괴로운데
凄勵風前復遠別 차고 매운 바람 맞고 다시 멀리 헤어진다.
-又留別南歸 또 남겨두고 작별하여 남쪽으로 돌아간다.
醉德飽義更何時 덕에 취하고 의에 배불릴 날 다시 어느 때일런가
此身還復如飢餮 이 내 몸 도리어 굶주려 배고픈 듯.

1834년 가을에 초의는 철선(鐵船)과 향훈(向薰), 자흔(自欣) 등과 함께 상경했다. 산천과 불등(佛燈)에 걸고 약속한 금강산 유람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때 산천이 중병을 앓아 여행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들은 수십 일 동안 불경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천의 병구완을 하며 지냈다. 위 시는 해남으로 돌아갈 때 산천에게 작별 선물로 지어준 시다.
초의는 자신이 산천과 처음 만난 곳을 서관(西館)이라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지 분명치 않다. 두 사람은 첫 대면에서부터 의기가 통해 밤새도록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서는 참소로 인해 10여년 간 소식이 끊어졌다고 했다. 이후 추사 집안에 불어 닥친 정쟁의 회오리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러다가 고호(古湖)에서 다시 만나 예전의 우의를 회복하게 되었다. 고호는 1830년 이후 4년간 유당이 귀양 와 있던 고금도(古今島)를 가리킨다.
시를 보면 당시 산천이 부친을 모시려고 고금도로 내려와 있을 때 아들이 요절하는 참척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아들은 초의가 10여년 전 처음 만났을 당시 이미 영묘한 자태를 보았다고 했으니, 근 20세에 가까운 나이였을 것이다. 장성한 자식이 갑작스레 세상을 뜨자, 산천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법 하다.
이후 1834년 가을 상경 시에 초의 일행은 한강가 금호(琴湖)에 있던 추사의 별장에서 잠시 묵었다. 그곳의 금석정(琴石亭)에서 초의가 가져온 떡차인 봉단차(鳳團茶)를 차맷돌에 가루내어 차를 끓이고, 정향나무 꽃잎으로 만든 계설향(鷄舌香)을 피우며 반가운 재회의 자리를 가졌다. 산천의 아우인 기산(起山) 김상희(金相喜)도 이때 초의차를 받고서 「사차장구(謝茶長句)」를 지어 사례하였고, 초의가 이에 화답한 시가 『일지암시고』에 실려 있다. 기산의 시는 남아 있지 않다.


산천의 「사차」시

1834년 만남 이후 두 사람은 또 한 동안 서로 대면하지 못했다. 1838년 초의는 4년 전에 이루지 못한 금강산 유람을 실행에 옮겼고, 이후 동대문 밖 청량사 등에서 머물렀다. 1840년 이번에는 추사가 제주로 유배를 갔다. 초의는 1843년에 바다를 건너가 추사를 만났으나, 산천과의 회면은 이뤄지지 않았다. 1848년 추사가 해배되어 상경하면서, 초의차를 요구하는 추사의 편지가 과천과 해남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다음 시는 1850년, 초의차를 받은 김명희가 감사의 뜻을 담아 초의에게 보낸 「사차(謝茶)」시다. 이 시를 지을 당시 산천은 이미 63세의 노인이었다. 『일지암시고』에는 「부원운(附原韻)」이라 하였고, 시 끝에 다음과 같은 긴 글이 제목 대신 들어 있다.

학질을 앓아 갈증이 심하므로 신령한 차를 청했다. 근래 연경의 시장에서 구입해 온 것은 비단 주머니에 수 놓은 천으로 싸서 한갓 겉치장만 힘쓸 뿐 거친 가지와 질긴 잎이 차마 입에 넣을 수가 없다. 이러한 때 초의가 부쳐온 차를 얻으니, 응조(鷹爪)와 맥과(麥顆)가 모두 곡우 이전의 좋은 제품이었다. 한 그릇을 다 마시지도 않았는데, 문득 번열을 씻어내고 갈증을 해소시키니, 전씨(顓氏)의 갑옷은 이미 저만치 멀리 물러나고 말았다. 고려 때 차를 심게 하여 토산의 공물과 대궐의 하사품을 모두 차로 썼다. 5백년 이래로 우리나라에 차가 있는 것을 알지 못했는데, 이를 따고 덖어 묘함이 삼매에 든 것은 초의에게서 처음으로 얻었다. 공덕이 참으로 무량하다. 산천 노인이 병든 팔뚝으로 쓴다.
病瘧渴甚, 乞靈茗椀. 近日燕肆購來者, 錦囊繡包, 徒尙外飾, 麤柯梗葉, 不堪入口. 此時得艸衣寄茶, 鷹爪麥顆, 儘雨前佳品也. 一甌未了, 頓令滌煩解渴. 顓氏之冑, 已退三舍矣. 麗朝令植茶, 土貢內賜, 皆用茶. 五百年來, 不識我東有茶. 採之焙之, 妙入三昧, 始於艸衣得之. 功德眞無量矣. 山泉老人試病腕.

老夫平日不愛茶 이 늙은이 평소에 차 즐기지 않았는데
天憎其頑中瘧邪 하늘이 미워하여 학질에 걸렸다네.
不憂熱殺憂渴殺 열 나는 것 걱정 않고 갈증 심함 염려되어
急向風爐瀹茶芽 급히 풍로(風爐) 가져다가 차싹을 달인다네.
自燕來者多贋品 연경(燕京)에서 들여온 것 가짜가 많다하니
香片珠蘭匣以錦 향편(香片)이니 주란(珠蘭)이니 비단 갑에 담았구나.
曾聞佳茗似佳人 듣자니 좋은 차는 고운 여인 같다는데
此婢才耳醜更甚 이 계집종 재주 용모 추하기 그지없다.
艸衣忽寄雨前來 초의 스님 갑자기 우전차(雨前茶)를 부쳐오니
籜包鷹爪手自開 대껍질 싼 응조차(鷹爪茶)를 손수 직접 끌렀다네.
消壅滌煩功莫尙 막힘 뚫고 번열(煩熱) 씻음 그 공이 대단하여
如霆如割何雄哉 우레 같고 칼 같으니 어이 이리 웅장한가.
老僧選茶如選佛 노스님의 차 고르기 부처를 고르듯 해
一槍一旗嚴持律 일창일기(一槍一旗) 여린 싹만 엄히 지켜 가렸다네.
尤工炒焙得圓通 덖어 말림 솜씨 좋아 두루 통함 얻으니
從香味入波羅蜜 향기와 맛을 따라 바라밀(波羅蜜)로 드는구나.
此秘始抉五百年 이 비법 5백년에 비로소 드러나매
無乃福過古人天 옛 사람 그때보다 내 복이 훨씬 낫네.
明知味勝純乳遠 그 맛은 순유(純乳) 보다 훨씬 나음 알겠거니
不恨不生佛滅前 부처님 계실 적에 나지 못함 유감 없네.
茶如此好寧不愛 차가 이리 좋으니 어이 아끼잖으리오
玉川七椀猶嫌隘 노동(盧仝)의 일곱 잔도 오히려 부족하다.
且莫輕向外人道 가벼이 외인에게 말하지 마시게나
復恐山中茶出稅 산 속의 차에 대해 세금 매김 염려되니.

평소에 자신이 차를 그다지 즐기지 않았는데, 그 잘못을 하늘이 미워해서 자신이 학질에 걸리게 되었노라며 말문을 열었다. 열 나는 것이야 그러려니 한다 해도, 갈증이 나서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만은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제서야 차 생각이 나서 풍로를 가져오게 해 차를 달이기 시작한다. 그 차는 어떤 차인가? 초의가 부쳐온 우전차다.
산천은 시 앞에 수록한 글과 시의 중간 부분에서 당시 중국에서 흔히 들어왔던 형편 없는 품질의 가짜 차에 대해 성토했다. 중국차는 비단 주머니에 수놓은 천으로 차를 포장해서 향편(香片)이니 주란(珠蘭)이니 하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놓았다. 막상 차를 끓여보면 가지는 거칠고 잎은 질겨서 향은커녕 입에 댈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산천은 좋은 차는 가인(佳人)과 같다고 한 소동파의 싯귀를 끌어 온 뒤, 중국에서 들여온 차는 재주와 용모가 몹시 추악해서 차마 봐줄 수 없는 계집 종과 같다고 비유했다.
그러다가 초의 스님이 부쳐온 곡우 전에 딴 응조차(鷹爪茶)와 맥과차(麥顆茶)를 마주했다. 응조는 매발톱이고, 맥과는 보리 알갱이다. 채 펴지 않은 차의 첫잎을 형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응조차니 맥과차니 말하는 것은 곡우 전에 딴 첫물차라는 말이다.
이어 산천은 초의차의 포장 상태와 효능에 대해서도 적었다. 포장은 탁포(籜包), 즉 대나무 껍질로 쌌고, 응조와 맥과라 했듯이 일창일기(一槍一旗)의 여린 싹만을 엄선해서 덖고 말리는 수단을 발휘했다. 효능은 ‘소옹척번(消壅滌煩)’ 즉 막힌 체증을 뚫어주고 번열(煩熱)을 씻어내 준다고 했다. 전씨의 군대가 저만치 물러나고 말았다는 것은 온 몸을 옥죄던 답답한 기운이 활짝 가시어져서 흔적 없이 되었다는 의미다.
또 우리나라가 고려 때 토산의 공물과 대궐에서 신하에게 내리는 하사품을 모두 차로 썼을만큼 차문화가 진작에 발전하였으나, 지난 500년간 적막하게 단절되어 차가 무슨 물건인지조차 모르게 되었는데, 초의에 와서 그 단절을 메워 제다의 비법이 복원될 수 있었으니, 공덕으로 쳐도 큰 공덕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끝은 차맛이 이다지도 훌륭하므로, 공연히 바깥 사람에게 알려져서 차에 세금을 매기게 되거나, 이런저런 요청으로 성가시게 될 것이 걱정이란 말로 맺었다.


제 2의 다송(茶頌), 초의의 답시

산천의 「사차」시를 받아든 초의는 다시 같은 운자로 답시를 썼다. 초의가 정학연과 김상희의 사차시를 받고 쓴 답시가 문집에 실려있지만, 다른 시에는 차와 관련된 내용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에 반해 초의의 이 답시는 「동다송」에 이은 제 2의 다송(茶頌)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차에 대한 깊은 논의를 담았다. 제목은 「산천도인의 사차시에 삼가 화운하여(奉和山泉道人謝茶之作)」이다. 경술년(1850)에 지었다.

古來賢聖俱愛茶 예로부터 성현은 모두 차를 아꼈나니
茶如君子性無邪 차는 마치 군자 같아 성품에 삿됨 없다.
人間艸茶差嘗盡 세상의 풀잎 차를 대충 맛을 다 보고서
遠入雪嶺採露芽 멀리 설령(雪嶺) 들어가서 노아차(露芽茶)를 따왔다네.
法製從他受題品 법제하여 이를 통해 제품(題品)을 받고서는
玉壜盛裹十樣錦 옥그릇에 갖은 비단 감싸서 담았다네.
水尋黃河㝡上源 황하의 맨 위 근원 그 물을 찾고 보니
具含八德美更甚 여덟 덕을 두루 갖춰 더욱더 훌륭하다.
-『서역기(西域記)』에 말했다. “황하의 근원은 아욕달지(阿褥達池)에서 처음 나온다. 물이
여덟 가지 덕을 머금어, 가볍고 맑고 차고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냄새나지 않고, 마실 때
알맞으며, 마신 뒤에 병이 나지 않는다.”
(西域記云: 黃河之源, 始發於阿褥達池. 水含八德, 輕淸冷軟美, 不臭, 飮時調適, 飮後無患.)
深汲輕軟一試來 경연수(輕軟水) 깊이 길어 한차례 시험하자
眞精適和體神開 참된 정기 마침 맞아 체(體)와 신(神)이 열리누나.
-『다서』「천품(泉品)」에 말했다. “차란 것은 물의 신이고, 물은 차의 몸체다. 참 물이
아니고서는 그 신을 드러낼 수가 없고, 좋은 차가 아니라면 그 체를 살피지 못한다.
(茶書泉品云: 茶者水之神, 水者茶之體. 非眞水莫顯其神, 非精茶莫窺其體.)
麤穢除盡精氣入 나쁜 기운 사라지고 정기(精氣)가 들어오니
大道得成何遠哉 큰 도를 얻어 이룸 어이 멀다 하리오.
持歸靈山獻諸佛 영산(靈山)으로 가져와서 부처님께 올리고
煎點更細考梵律 차 달임 더욱 따져 범률(梵律)을 살피었네.
閼伽眞體窮妙源 알가(閼伽)의 진체(眞體)는 묘한 근원 다하였고
-범어로 ‘알가화(閼加花)’는 차를 말한다.(梵語閼加花言茶.)
妙源無着波羅蜜 묘한 근원 집착 없어 바라밀(波羅蜜)이 그것일세.
-『대반야경』에 말했다. “일체의 법에 집착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바라밀이라 한다.”
(大般若 經云: 於一切法無所執着, 故名波羅蜜.)
嗟我生後三千年 아아! 나는 삼천년이 지난 후에 태어나
潮音渺渺隔先天 물결 소리 아득해라 선천(先天)과 막혔구나.
妙源欲問無所得 묘한 근원 묻자 해도 물을 곳이 바이 없어
長恨不生泥洹前 부처님 열반 전에 나지 못함 한탄 했지.
-니원(泥洹)은 열반과 뜻이 같다.(泥洹涅槃義同.)
從來未能洗茶愛 이제껏 차 사랑을 능히 씻지 못하여서
持歸東土笑自隘 우리 땅에 가져오니 속좁음을 웃어 본다.
錦纏玉壜解斜封 옥그릇에 비단 두른 빗긴 봉함 풀어서
先向知己修檀稅 지기(知己)에게 먼저 보내 단세(檀稅)를 바치구려.


예전부터 성현들은 모두 차를 사랑했다는 말로 서두를 열었다. 차의 성품은 군자와도 같아서 삿된 기운이 하나도 없다. 이어지는 차의 연원에 대한 설명이 묘하다. 작품에는 「동다송」과 마찬가지로, 중간중간에 협주를 달았다. 협주는 모두 5개다. 『서역기(西域記)』와 『다서』, 『대반야경(大般若經)』을 인용했고, 『다서』를 제외한 나머지 넷은 모두 불경에서 끌어왔다.
차의 근원에 대한 설명도 특이하다. 인간 세상에서 나는 풀잎 차를 대개 맛 본 뒤에 설령(雪嶺), 즉 히말라야로 들어가서 노아차(露芽茶)를 따와 제품으로 만든 것이 차의 시원이라고 했다. 수품(水品) 또한 황하의 발원지인 아욕달지(阿褥達池)에서 나는 가볍고 맑고 차고 부드러우며, 아름답고 냄새 없고, 마실 때 알맞고 마신 뒤에 뒤탈이 없는 여덟 가지 덕을 갖춘 경연수(輕軟水)를 길어서 이 물로 차를 끓였다. 그러자 차의 체(體)와 신(神)이 환하게 열려, 나쁜 기운은 말끔히 사라지고 정기(精氣)가 스며들어, 청정한 정신으로 득도의 경지에까지 가볍게 오를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차를 영산(靈山)으로 지녀와 부처님께 바치기 시작했다. 또 점다법(點茶法)을 더욱 발전시켜 범률(梵律), 즉 부처님의 율법처럼 정밀하게 체계를 갖추니 차의 진체(眞體)가 묘원(妙源)을 다하게 되어 바라밀의 대법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초의는 이 시에서 차의 연원을 신농씨의 『식경(食經)』에서 찾는 전통적인 설명법과 달리 불경에 근거하여 차의 불교 시원설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차가 범어로는 알가화(閼加花)라 한다든지, 부처님 열반 전에 태어나지 못함을 안타까워 했다든지 하는 언급은 차가 부처님 시대부터 이미 세상에 행해져서 득도(得道)의 한 방편으로 사랑을 받았음을 밝힌 대단히 흥미로운 내용이다. 근거로 삼은 문헌은 당나라 현장 스님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인 듯 한데, 이에 관해서는 앞으로 좀더 정밀한 논의가 필요하다.
초의는 자신이 부처님보다 3천년이나 뒤늦게 태어나, 당시의 다도를 물을 길이 없고, 그 방법도 알 수가 없게 되었음을 안타까워 했다. 그런데 여태까지도 차를 사랑하는 습벽만은 씻어낼 수가 없어, 이 차가 우리나라 땅에까지 전해져 널리 퍼지고 있으니, 차에 대한 그 맹목적인 집착을 웃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마지막 두 구절에서는 산천이 말한 옥그릇에 비단으로 감싸둔 비싼 중국차를 혼자만 마시지 말고, 단세(檀稅) 즉 부처님 전에 바치는 세금 삼아 자신에게도 좀 보내 보라고 말한 것이다.
이상 초의와 산천 김명희의 교유를 살펴보고, 산천이 초의에게 보낸 「사차」시와 이에 대한 초의의 답시를 읽어 보았다. 두 작품은 모두 차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펼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초의의 답시는 차의 불교 시원설을 과감하게 제창한 내용으로, 문헌 근거를 비롯하여 향후 차계의 더 꼼꼼한 연구가 요청된다. 조선 후기 차문화사의 모든 중심에는 이렇듯 늘 초의가 존재했다. 여기에 그의 스승인 다산과 벗인 추사 형제 등이 포진하여, 차문화의 힘찬 고동을 알렸다.

출처 : 茗田의 차사랑
글쓴이 : 茗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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