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고려 학술 강연(7)- 고려시대 제다(製茶)와 탕법(湯法)- 박동춘(19.2.14)

2019. 2. 27. 21:55차 이야기



대고려 학술 강연(7)- 고려시대 제다(製茶)와 탕법(湯法)- 박동춘(19.2.14)| 역사문화기행 


권진순 | 조회 27 |추천 0 | 2019.02.16. 05:28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시중인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연계하여 전문가 초청 학술 강연회(4차, 마지막 강연)이

2019년 2월 14일 대강당에서 있었습니다. 강연 요지와 전시유물 사진을 일부 삽입하여 글을 올림니다. 대고려 특별전 전시는 오는 3월 2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하고 있습니다.


고려시대 제다(製茶)와 탕법(湯法) (사)동아시아차문화 연구소 박동춘 소장(2019년 2월 14일,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 1. 고려시대 차 문화의 흐름 우리나라에 차문화가 소개된 것은 7세기 불교의 유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나말려초(羅末麗初) 구산선문(九山禪門)의 개창으로 불교의 교세가 확장되자 차 문화 또한 왕실 귀족층 및 승려, 관료 문인으로

널리 퍼지는 경향을 보인다.

* <구산선문 법맥도 九山禪門 法脈圖> 초조 달마 ㅣ 2조 혜가 ㅣ 3조 승찬 ㅣ 4조 도신 - 법랑 - 신행 - 준범 - 혜은 - 지증도헌 - 양부 - 정진긍양 ------------- 희양산문 ㅣ (경상북도 문경 희양산 봉암사, 935년) 5조 홍인 ㅣ 6조 혜능 - 청원행사 - 석두희천 - 약산유엄 - 운거도응 - 진철이엄 --------------- 수미산문 ㅣ (황해도 해주 수미산 광조사, 932년) 남악회양 ㅣ 마조도일 ---------- 장경회희 --- 원감현욱 --- 진경심희 ----------------------- 봉림산문 ㅣ (경기도 여주 혜목산 고달사) (경상남도 창원 봉림산 봉림사, 890년) ㅣ ㅣ----- 남전보원 ---철감도윤 --- 징효절증 ----------------------- 사자산문 (전라남도 화순 쌍봉산 쌍봉사)(강원도 영월 사자산 법흥사, 882년) ㅣ ㅣ ㅣ----- 마곡보철 ---낭혜무염 ------------------------------------ 성주산문 (충청남도 보령 성주산 성주사, 847년) ㅣ ㅣ ㅣ---- 염관제안 --- 통효범일 ------------------------------------ 사굴산문 (강원도 강릉 사굴산 굴산사, 847년) ㅣ ㅣ ㅣ---- 서당지장 --- 적인혜철 ------------------------------------ 동리산문 (전라남도 곡성 동리산 태안사, 839년) ㅣ ㅣ ㅣ--도의국사 --- 염거 ---------------보조체징 --- 가지산문 (강원도 양양 설악산 진전사, 821년) (전남 장흥 가지산 보림사, 860년) ㅣ ㅣ--증각홍척 ----------------------------------- 실상산문 (전라북도 남원 지리산 실상사, 828년) 구산선문 계보도, NAVER지식백과, 시공불교사전 신라말기 부패해 가는 귀족중심의 교종(敎宗:종교의 교리,부처님의 말씀만 중요시하는)을 벗어나서 깊은 산속에 참선(參禪)을 중심으로 일어난 九山禪門을 말한다. 처음 가지산문(迦智山門)을 일으킨 도의선사(道義禪師)를 비롯하여 혜철(慧徹), 홍척(洪陟) , 현욱(玄昱), 낭혜(朗慧), 범일(梵日), 도헌(道憲), 이엄(利嚴)등 9명의 선사(禪師)가 창건한 선종(禪宗)을 이른다. 그중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先生은 신라사산비명(新羅四山碑銘)중에 성주산문(聖住山門)의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명(白月葆光塔碑銘)과 희양산문(曦陽山門)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 (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을 지은것이 유명하다. 九山禪門 (구산선문) 1. 迦智山門 가지산문: 道義 도의 (장흥 보림사) 2. 桐裏山門 동리산문: 慧徹 혜철 (곡성 태안사) 3. 實相山門 실상산문: 洪陟 홍척 (남원 실상사) 4. 鳳林山門 봉림산문: 玄昱 현욱 (창원 봉림사) 5. 師子山門 사자산문: 道允 도윤 (영월 법흥사) 6. 聖住山門 성주산문: 朗慧 낭혜 (보령 성주사) 7. 闍崛山門 사굴산문: 梵日 범일 (강릉 굴산사) 8. 曦陽山門 희양산문: 道憲 도헌 (문경 봉암사) 9. 須彌山門 수미산문: 利嚴 이엄 (해주 광조사)

* 중국을 내왕했던 구법승(求法僧)들은 다사(茶事)에 밝았던 계층으로, 고려 초기에 왕실 귀족층과 함께 차 문화를 이끈 주역으로 부상했다. 사전(寺田)을 바탕으로 풍부한 경제력을 갖춘 사원에서는 수행에 필요한 차를 자급자족하는 방법을 모색하여 통도사 부근에 다촌(茶村)이 형성되기도 했다.



[通度寺舍利袈裟事績略錄], "北冬乙山茶村乃造茶 貢寺之所也 貢寺茶田茶泉 至今猶存不泯 後人以爲茶所村也."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 북쪽 동을산다촌은 차를 만들어 절에 바치던 장소이다. 절에 바치던(차를 만든) 차 밭과 다천(茶泉)은 지금도 오히려 없어지지 않았고 남아 있으니,

후세 사람들은 (이곳을) 다소촌(茶所村)이라고 한다.




송의 새로운 제다기술(製茶技術)이나 탕법(湯法)을 고려는 적극적으로 들여와 고려만의 색채를 띤 차 문화를 구축했다.

종교와 정치의 영역에 차가 깊게 침투해 있었다는 점이다. 그 예로, 왕실이 주관하는 연등회, 팔관회 등 불교의식에서 왕이 몸소

차를 갈아 부처님께 올렸으며, 9품 이상의 관료나 80세 이상의 노인, 승려, 신하가 죽었을 때도 차를 하사했다. 한편 관청의

'다시(茶時)' 거행도 고려시대의 독특한 차 문화 유형이다. '茶時'는 심신을 맑게 하는 차의 효능을 극대화하여 국익을 도모한

사례로써 음다(飮茶)가 일상화된 송나라에서도 시행된 적이 없는 국가 제도이다.


1)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 中 훈요6조 나의 지극한 소원은 연등회와 팔관회에 있으니, 연등회는 부처를 섬기는 일이고, 팔관회는 하늘의 신령 및 오악, 명산, 대천,

용신을 섬기는 일이다. <중략>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겠다고 맹세했으니 내 뜻을 받들어 시행하도록 하라. [其六曰 朕所至願 在於燃燈.八關 燃燈所以事佛 八關所以事天靈及五嶽名山大川龍神也 <中略>

君臣同樂 宜當敬依行之]


2) 최승로의 시무책 28조(崔承老 時務策二十八條) 제가 듣건대, 전하(성종)께서는 공덕재를 베풀고, 혹은 몸소 차를 갈고 혹은 차 싹을 가루로 낸다고 하시는데, 저의 우매한

생각에는 전하의 몸이 피로해질까 염려됩니다. [竊聞 聖上爲設功德齋 或親碾茶 或親磨麥 臣愚深惜聖體之勤勞也]


80세 이상의 國老 尙書右僕射 최보성과 司宰卿 조옹...각각 公服 1벌과 幞頭 2개와 腦原茶 30角을 하사하고...(문종 3년) <그 후 무신의 난 이후에는 차를 하사하는 사례가 점점 줄어들었다>


* 고려시대 이전의 차 문화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大廉)이 차나무 종자를 가져왔다. 임금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善德王) 때 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크게 유행하였다. 삼국사기 제10권, 흥덕왕 3년(828) "入唐廻使大廉 持茶種子來 王使植地理山 茶自善德王時有之 至於此盛焉"


차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고려 초기, 차는 사찰을 중심으로 형성된 다촌(茶村)에서 만들어져 왕실과 사원의 수요를 충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다소(茶所)를 설치하고 수준 높은 단차(團茶)를 생산했다. 차의 산지에 차세(茶稅)를 부과하여 왕실과 귀족층과 관료 문인들의 수요를 충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2. 고려시대의 제다법(製茶法) 고려는 10세기말 이후 고려만의 색채를 띤 차를 생산, 자급자족을 도모했다. 11세기 이후에는 수준 높은 단차(團茶)를 생산하였다. 12세기 이후 송나라에서 유행했던 백차(白茶)를 생산하여 흰 거품이 나는

차의 풍미를 즐겼다. 차를 마시는 계층이 관료 문인으로 확산되는 등 차의 수요가 많아지자, 왕실에서는 특화된 기술력이 집약된 다소(茶所)

만들어 공납(貢納) 차를 만들었다. 이후 차 산지에 차세(茶稅)를 부과했고, 왕실에 올리는 토공(土貢) 차는 지방관리가 관리하였다. 이런 사실은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 권13, "손한장부화차운기지(孫翰長復和次韻寄之)"에서

"관에서 감독하여 노약(老弱)까지 징발(徵發)하였네(官督家丁無老稚)"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송의 정위(丁謂, 966~1037)와 채양(蔡襄, 1012~1067)이 대소 용봉단을 만들었고, 송 휘종년간(徽宗, 1100~1125 재위)에

백차가 유행했다. 고려는 극품의 백차를 만들기 위해, 여린 차싹을 채취했다.

이규보[부용전운증지(復用前韻贈之)

"좁쌀 같은 누런 싹 마디마다 맺혔으니/ 같은 하늘 아래 지방 절후 각기 다르네."[金粟黏枝已結類/均天所覆地各異]라는 구절이

이를 가리킨다.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한 첫 공정은 차를 따는 것에서 시작된다. "좁쌀 같은 누런 싹"이란 바로 응조(鷹爪), 곡립(穀粒), 작설(雀舌)같은 형태의 차 싹을 말하는 것인데, 최고품의 백차를 만들기에

적합한 원재료이다. 좋은 차를 얻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조건은 오염되지않은 천혜의 자연 환경이다. 이규보 [雲峯住老珪禪師 得早芽茶示之 予目爲孺茶 師請詩爲賦之]에는 차의 생육환경을 선명하게 언급하였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남방사람 맹수도 두려워하지 않아(南人曾不琶怕髬而) * 怕(두려워할 파), 髬(갈기 치세울 비,이) 험난함을 무릅쓰고 칡덩굴 휘어잡아(冒險衝深捫葛藟) * 藟(덩굴 루),捫(어루만질 문), 루(덩굴 루艹畾糸) 간신히 채취하여 단차를 만들어(辛勤採摘焙成團) * 摘(딸 적), 焙(불에 쬘 배) 남보다 앞서 임금님께 드리려하네(要趁頭番獻天子) 이규보는 제다법을 "배성단(焙成團)"이라고 표현했다. '배(焙)'는 차를 만드는 방법과 건조하는 과정을, '단(團)'이란 완성된

차의 형태를 말함이다. 불이나 증기를 이용하여 차의 독성을 제거하고 차의 효능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사람의 몸으로 부터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고 이를 보정(輔正)하며 병을 물리쳐 태화(太和)에 도와주는 음료이다." (裵汶, [茶述], "夫物能祛邪 必能輔正 安有蠲逐聚病而靡裨太和哉") * 祛(털어 없앨 거) 차 싹을 따서 줄기나 백합(百合, 차 싹을 싸고 있는 겉피)를 제거하는 이유는 "백합을 제거하지 않으면 차 맛을 해치고 줄기를

따내지 않으면 색을 해치기(百合不去害茶味 烏帶不去害茶色)" 때문이다.




고려시대의 단차 복원 과정 찻잎따기-> 찻잎 고르기-> 시루에 찌기-> 식히기-> 고(膏) 짜기->돌절구에 찧기-> 청자 다연에 갈기-> 틀에 넣고 찍어내기->

무쇠가마솥에서 건조시키기-> 온돌건조 다음으로 쪄낸 차 싹을 식힌 후, 절구에 넣고 찧어낸다. 이후 차를 동이(盆)에 넣고 간 다음에 거의 가루처럼 부서진 차를

뭉쳐서 틀에 넣어 찍어낸다. 틀의 모양은 方形, 花形, 圓形이다.이것을 뜨거운 숯불에 말리는데 이것을 배건(焙乾)이라고 한다. 12세기 백차의 제다법이 등장한 것은 송 휘종 때이다. [大觀茶論]에서 "백차는 일반적인 차와는 다르다. 그 가지가 잇달아

펴졌고 또렷하고 그 잎은 투명하고 얇다(白茶自爲一種與常茶不同 其條敷闡 其葉瑩薄)." 라고 했다. 기존 차나무와 달리 엽록소(葉綠素,膏)가 적었다. 휘종은 "우연히 깊은 산간에서 발견한 것인데 사람의 힘으로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살아 있는 차나무도 한두 그루에 불과해서 (이 차를 따서) 만든 차도 2~3덩이뿐이었다

(崖林之間 偶然生出 雖非人力所可致 有者不過四五家 生者不過一二株 所造止于二三胯而已)" * 胯(사타구니 과) 이때부터 고(膏, 葉綠素)를 짜내는 백차 제다법이 나왔다. 차 싹에서 고를 짜내 분에서 갈아내면 연고차(硏膏茶)라하며 엽록소를 최소화하여 부드럽고 향기로운 맛과 향을 얻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팽다(烹茶)할 때 사발에 차를 넣어 다선(茶筅 ,點茶할 때 쓰는 다선은 묵은 대나무로 만든다)을 이용하여

격불하면 차 거품이 흰 구름이나 흰 눈처럼 흰빛을 띤다. 그러므로 백차라 부른 것이다. 고려에서 만든 차로는 뇌원차(腦原茶)대차(大茶)가 있는데 10~11세기에 생산되었다. 유차(孺茶)는 12세기, 원옥차(圓玉茶)가 13세기에 생산됐다. 화전춘(火前春)작설차(雀舌茶)는 14세기 왕실 하사품으로 귀족층,

승려, 관료 및 문인들이 즐긴 차였다. 3. 고려시대의 탕법(湯法) 고려시대에 유행된 점다(點茶) 혹은 팽다(烹茶)라는 말은 가루차, 즉 단차나 백차를 즐길 때 차를 내는 행위를 의미한다. 팽다를 위해 우선 단차를 부숴 가루를 내야한다. 연(碾)에 차를 갈아 채로 쳐서 고운 가루를 만든다. 햇차는 굽지 않아도 되지만 오래된 차는 굽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송의 채양(蔡襄)[다록茶錄]에서 "묵은 차는 깨끗한 그릇에 뜨거운 물을 (차에) 부어 담겼다가 고유(膏油)를 한 양쯤 제거한 후,

은근한 불에 구운 연 후에 연에 갈다. ([灸茶], "茶或 經年則...於淨器中 以沸湯漬之 刮去膏油一兩中....微火灸乾然後碎碾" * 漬(담글 지)


휘종大觀茶論의 재질과 구성에 관해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碾)은 은으로 만든 것이 가장 좋고, 숙철은 그 다음이다. 생철은 가려 뽑이 제련한 것이 아니니 (생철의) 틈에 검은 가루가

틈에 끼어 있어 차색을 해치는 것이 더욱 심하다. 무릇 연은 구유를 깊게 하고 높아야 하며 바퀴는 날카롭고 얇게 만들어야 한다. (徽宗, 대관다론, [羅碾], "碾以銀爲上 熟鐵次之 生鐵者非掏揀捶磨所成 間有黑屑藏幹隙穴 害 茶之色尤甚 凡碾爲制 槽欲深而峻 輪欲銳而薄" * 掏(가릴 도), 捶(채찍 추), 屑(가루 설)



고려시대 단차 탕법 : 차 깨기(나무 절구에서 차 부수기) 1. 쇄다(碎茶, Crush cake of tea)- 2. 연다(碾茶, Grind tea into Powder)- 3. 라다(羅茶, Sift tea Powder)- 4. 다말치합(茶末置盒, Place powder into container)- 5. 촬말어잔(撮末於盞, Put tea powder into bowl)- 6. 점다(點茶, 注湯入盞, Add water)- 7. 람반다말(攬拌茶末, Whisk the tea)- 8. 치다탁(置茶托, Place in bowl stand) 馮明珠 編, 寥翼秀 저, [(也可以淸心) 茶器, 茶事, 茶畵] (臺北, 國立故宮博物院, 2002)



고려시대 단차 탕법 : 맷돌에 차 갈기 돌 쪼아 차 맷돌을 만들어 차 맷돌 돌리랴 어깨가 괴롭구나(琢石作孤輪 迴旋煩一臂) 그대는 어찌 차를 마시지 않고 초당으로 보냈는가. 내 졸기를 좋아하여 보낸 것이로다. (차 맷돌) 갈자 푸른 찻 가루 나오니 우리 그대의 뜻 더욱 느끼리.... 이규보, [謝人贈茶磨]. 동국이상국집. 권14


차 맷돌 천천회 돌려 월부를 막 돌리자, 옥가루 날리네.(風輪不管蟻行遲 月斧初揮玉屑飛) 법희란 본디 참 자재(自在)함에서 오는 것 맑은 하늘에 우레치고 눈이 펄펄 내리는 듯... 이인로(1152~1220), [僧院茶磨], 보한집 중편


은다연(銀茶碾), 唐代, 법문사 출토(1987년 발굴)








12세기 서긍(徐兢, 1091~1153년)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은 고려시대 탕법을 잘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여기에 "토산차는 맛이 써서 떫어서 입에 댈 수가 없다. 중국의 납차용봉사단을 귀히 여긴다. 하사한 차 이외에도 상가에서도 팔기 때문에 자못 차 마시기를 좋아한다. (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32, [器皿] 3, [茶俎] "土産茶味苦口 惟貴中國臘茶龍鳳賜團 自錫賚之外商賈亦通販 故爾來頗喜飮茶" 라고 하였고,


"하루에 세 차례 올린 차를 마신다. 이어 탕(湯)이 나온다, 고려인들은 탕을 약이라고 한다. 매번 사신들이 다 마시는 것을 보면 반드시 기뻐하고 만약 다 마시지 못하면 자기를 깔본다고 여겨 불쾌히 여기며 가버리기

때문에 항상 억지로라도 마셨다. (서긍, "日嘗三供茶 而繼之以湯 麗人謂湯爲藥 每見使人飮盡必喜 或不能盡以爲慢己 必怏怏而去 故常勉强爲之啜也" 라고 하였다. * : 水변, 刃刃,止止(글자, 떫다는 한자), 啜(마실 철)




고려시대에 찻물을 끓이는 도구로는 철병(鐵甁)이나 석정(石鼎), 석조(石竈), 석요(石銚, 냄비요), 다당(茶鐺,솥당), 소정(小鼎),

다병(茶缾,물장군 병) 등을 사용하였는데 이를 증명해 주는 근거 자료는 다양하다. 12세기 말 고려에서 단차가 유행했던 사실은

이색(李穡, 1328~1396)의 [전다즉사(煎茶卽事)에서 확인할 수 있다. 봄날에 계산을 찾아드니 그림도 이만은 못하리(春入溪山畫不如) 가벼운 천둥이 밤새 적막을 진동 시켰지(輕雷一夜動潛虛) 꽃 자기 잔의 흰빛은 조반을 먹은 이후요(花瓷雪色朝湌後) 돌 냄비의 솔 소리는 낮잠을 잔 뒤로다(石銚松聲午睡餘) 달을 보니 완연히 친한 이 얼굴을 본 듯하고(弄月宛然親面見) 바람을 타니 마침내 소생함을 묻고 싶네(乘風欲問到頭蘇) 하얀 귀밑머리에 누가 기심 잊은 자인고(鬢絲誰是忘機者) 흉중에 수많은 글을 깨끗이 씻은 이로세(淨洗胸中書五車)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靑磁 象嵌 菊花文 托盞), 고려 13세기, 2000년 구입 국화무늬 잔과 잔받침(靑磁 象嵌 菊花文 托盞), 고려 13세기, 1908년 구입


모란 넝쿨무늬 표주박모양 주자(靑磁 象嵌 牡丹唐草文 瓢形 注子) 고려 12~13세기, 1926년 구입, 국보 제116호 고려청자 가운데는 표주박모양의 주자가 많다. 이 유형은 중국의 당.송 자기에서도 볼 수 있지만 중국과는 다른 고려만의 산뜻한 조형 세계를 보여준다. 몸체 아랫부분은 약간 도안화(圖案化) 되었으나 사실에 가까운 모란 무늬를 소담하게 역상감(逆象嵌, 배경 부분을 상감으로 메워 무늬가 청자색이 나도록 하는 기법)했다.





고려의 문인들이 차를 즐겼던 이유는 다양했다. 첫째, 병의 치료나 양생을 위한 것이며 둘째,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세째, 정치적으로 수난을 겪었던 문인들은 근심을 잊게하는 위안처로 삼았다. 네째, 벗과 돈독한 정을 나누며, 수신과 문예를 통유(通遊)할 수 있는 매개물로 삼았다.


참조 전문가 초청 학술 강연회(4차,종강), "고려시대 제다와 탕법"- 박동춘 소장의 강연책자, 서긍의 저 "선화봉사고려도경", 2018년 7월 17일 강연하신 고려시대 단차의 특징- 박동춘 소장

강연 요지를 간추렸으며 . 지금 전시중인 특별전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과

조각공예실 전시관 고려 상감청자의 전시물을 참조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사진과 글 권진순 2019년 2월15일



                               고려 학술 강연(7)- 고려시대 제다(製茶)와 탕법(湯法... 2019.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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