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송대 餠茶와 團茶 제다법 비교연구(Ⅱ) - 蒸茶/ 搗茶와 硏茶를 중심으로 , (IV)- 건조를 중심으로

2019. 2. 27. 23:45차 이야기






당·송대 餠茶와 團茶제다법 비교연구(Ⅱ)* - 蒸茶/ 搗茶와 硏茶를 중심으로| 중국인문과학


| | 樂民(장달수)    2018.10.28. 19:07




당·송대 餠茶와 團茶제다법 비교연구(Ⅱ)*- 蒸茶/ 搗茶와 硏茶를 중심으로



송 해 경**


―――――――――――――― < 目次> ――――――――――――――


Ⅰ. 머리말

Ⅱ. 병차와 단차 제다의 蒸茶
1. 당대 병차 제다의 蒸茶
2. 송대 단차 제다의 蒸茶
3. 병차 단차 제다에서 蒸茶의 차이점 비교
Ⅲ. 병차와 단차 제다의 搗茶와 硏茶
1. 당대 병차 제다의 搗茶
2. 송대 단차 제다의 硏茶
3. 병차 搗茶와 단차 硏茶의 차이점 비교

Ⅳ.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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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당대의 餠茶와 송대의 團茶는 중국 고형차를 대표하는 차이다. 인류가 최초로 제다과정을 거쳐 만든 차는 삼국시대 장읍<광아>에 기록된 병차이다. 광아의 병차 제다법을 수용한 것은 당대 陸羽(733~803)의 <다경>이였다. 다경에는 차나무, 차의 정신, 병차 제다법, 전차 음다법, 차의 역사, 차사, 차 생산지 등을 체계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육우는 추차, 산차, 말차, 병차 등 네 가지 차를 언급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차는 병차로서 병차의 제다법과 음다법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다경의 병차 제다는 採·蒸·搗·拍·焙·穿·封의 일곱 단계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는데, 육우는 제다도구의 설명을 통해 제다법을 설명하는 독특한 기술방법을 택하고 있다.




* 이 논문은 2017년 원광디지털대학교의 교비 지원에 의하여 수행됨.
** 원광디지털대학교


中國人文科學第67輯- 466 -

  송대에는 병차가 주류를 이루면서도 병차에서 발전한 臘茶와 團茶같은 硏膏茶가 황실에 진공되는 貢茶로서 상류층의 차문화를 주도하였다. 특히 龍鳳團茶는 단차를 대표하는 차가 되었다. 송대의 많은 다서 어차원이 있었던 복건성 건안북원지방 공차 단차를 다루고 있고, 저자는 복건성 전운사 출신이 많았다. 단차 제다는 비교적 많은 다서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비교적 후대에 쓰여진 조여려<북원별록>판 벌리기(開焙 : 배로 열기) 에서부터 차 말리기(過黃)까지 8과정으로 나누어 상세히 잘 기록하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병차와 단차는 중국에서 삼국시대부터 당·송대를 거쳐 상당히 오랫동안 애음되었던 차이다. 차의 역사는 옛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차가 생겨났으며, 많은 노력을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병차와 단차 모두 고형차라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어 제다법상 유사한 부분이 있지만 동시에 세세한 차이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당·송대의 고형차인 병차와 단차 제다법의 차이점을 비교 검토하는 을 목적으로 한다.

   그동안 선행연구에서는 당대와 송대 차문화 전반에 관한 연구가 대부분이었고, 당대의 병차 제다에 관해서는 김진숙당대 제다 공구의 종류를 통해서 제다법을 소개하고 있고, 송대의 차에 관해서는 서은미의 논문이 다수 있으나 차생산지와 차산업에 관해 다루고 있으며, 제다에 관해서는 극히 단편적인 내용을 언급하는 정도이다.1) 본 연구자는차와 단차 제다법 중 채다 부분을 비교 연구한 바 있다.2)

   본고에서는 채다에 이어 시루에 찌는 蒸茶 절구에 찧는 搗茶 그리고 瓦盆에 가는 硏茶의 상호 차이점을 규명하고자 한다. 고형차를 만들기 위한 증차 과정에서 찌는 정도와 찌고 난 후 찐 차의 처리과정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리고 증차 이후 병차의 도다와 단차의 자다와 연다는 완전히 다른 과정이다. 당대도다는 찐 찻잎을 덩어리로 만들기 쉽도록 절구에 넣고 절구공이로 찧었던 과정이다. 그러나 송대연다는 차고를 짜고 와분에 가는 병차와는 전혀 다른 제다 과정이다. 여기에는 의 진액인 茶膏의 유무가 중요하게 다루어지면서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운 공정이 요구되었다.

   제다법에 따른 차의 종류는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새로운 차를 추구하고자 하는 차인들의 노력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병차, 단차와 같은 고형차는 발전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병차와 단차 제다의 차이점을 분석하여 그 특징을 이해하고, 산차가 나오게 된 차문화 배경에 대해서도 논의하고자 한다.


1) 김진숙, 「다경에 나타난 唐代製茶工具考察」, 한국차학회지 Vol 14, 2008; 서은미, 「송대의 음다생활과 차 산업의 발전」, 동양사학연구 제90집, 2002;
2) 송해경, 「당·송대 餠茶와 團茶제다법 비교 연구(Ⅰ)-채다를 중심으로-」, 중국인문학회 제65집,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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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병차와 단차제다의 蒸茶

   삼국시대 이래로 병차와 단차 같은 고형차 시루에 찐 찻잎을 찧거나 갈아서 곱게 분쇄한 후에 틀에 박아 만들었다. 찻잎을 찌는 증청의 목적은 뜨거운 수증기에 의해 찻잎이 익으면서 끈기가 생겨 덩어리를 만들기 쉽고, 찻잎에 들어있는 효소(polyphenol
oxidase)의 활동을 억제시켜 비발효차를 만들기 위함이다. 따라서 당·송대의 고형차는 로 분류된다. 병차나 단차 제다에서 차싹이나 찻잎을 시루에 찌는 증청 과정은 동일하다. 그러나 증청의 정도나 증청 후 찻잎을 처리하는 과정은 상당히 다르다. 양자를 비교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1. 당대 병차제다의 蒸茶
   당대의 대표적인 다서 <다경>에서 육우는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병차 제다법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증청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부뚜막에 솥을 걸고 솥 위에 시루를 앉힌다. 솥은 입구 가장자리에 전이 있는 것을 사용하고,3) 솥과 시루 사이에는 김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진흙을 바른다.4) 육우는 전이 있는 솥을 화덕에 얹어 화력이 손실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솥의 물이 끓어 뜨거운 수증기가 시루에 온전히 전해지도록 솥과 시루의 틈 사이에 진흙을 발라 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였다.

<다경>에는 蒸茶할 때 소요되는 시간과 온도 그리고 종다래끼(箄)에 넣을 찻잎의 양에 대한 언급이 없어 당대의 증청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5) 그러나 시루(甑)의 설명을 통해 어느 정도 그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시루(甑)는 나무나 질그릇으로 만든다. 허리에 진흙을 두른다. 대바구니(籃)를 종다래끼(箄)로 삼아 대껍질로 엮어 쓴다. 김이 나기 시작하면(始其蒸也) 종다래끼를 시루에 넣고 찻잎이 익으면 종다래끼를 꺼낸다. 솥(釜)이 마르면 시루 안에 물을 붓는다. 또 세 갈래로 갈라진 닥나무 가지로 찐 차싹과 찻잎을 흩뜨려서 膏가 흘러나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6)茶經



3) 茶經 「二之具」“釜: 用脣口者”
4) 茶經 「二之具」“甑: 匪腰而泥”
5) 김진숙, 「다경에 나타난 唐代製茶工具考察」, 한국차학회지 Vol.14, 2008,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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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루는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어 구멍을 통해 뜨거운 수증기가 올라온다. 구멍은 비교적 크기 때문에 찻잎이 솥 아래로 빠질 수 있기 때문에 箄를 사용하였다. 布目潮渢에 의하면 “箄를 시루 밑에 까는 겅그레(簀の子)의 역할로서 작은 대바구니(小籃)로 보았다”7)
김진숙 “작은 대바구니 ‘箄’에 찻잎을 담아 ‘箄’채 시루 안에 넣었다가 찻잎이 다 익혀지면 ‘箄’째 꺼냈다”8)고 하였다. 여기서 ‘始其蒸也’를 대부분 ‘찌기 시작할 때’로 해석하고 있다. 물론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본 저자는 ‘김이 나기 시작하면’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증청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높은 온도에서 짧은 시간에 찌는 것이다. 즉 신속히 찻잎에 수증기를 쬐어 효소 활동을 중지시켜 찻잎의 산화를 억제해야하기 때문이다.9) 그러므로 찻잎을 넣는 시기는 물이 끓기 전이 아니라 솥의 물이 충분히 끓어서 김이 나오기 시작할 때 찻잎을 넣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찻잎을 찌는 정도는 푹 익혔을 것으로 유추된다. 왜냐하면 당대 병차의 원료는 차싹과 찻잎뿐만 아니라 어린 줄기도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찻잎은 얇아서 빨리 익지만 차싹과 줄기는 두툼하므로 차싹과 줄기도 충분히 익어야 절구에 넣고 찧을 때 잘 문드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찻잎이 익으면 시루에서 꺼내어 재빨리 흩뜨려 식혔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세 갈래로 갈라진 닥나무 가지로 찐 筍과 芽의 차싹과 찻잎을 흩뜨렸는데, 膏가 유실될 것을 염려해서였다.10)
시루에서 뜨거운 수증기로 찐 찻잎은 매우 뜨겁다. 그러므로 재빨리 식히기 위해 세갈래로 갈라진 닥나무 가지(穀木枝三椏)를 사용하여 재빨리 흩뜨렸다. 穀木枝三椏대 허차서가 솥에서 살청할 때 “손에 木指를 끼고 급히 찻잎을 움켜쥐었다가 돌렸다”11)고 한 木指와 유사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육우가 찐 찻잎을 재빨리 식힌 이유는 차의 진액인 膏가 흘러나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고에는 점성이 있어서 찻잎끼리 달라붙어 덩어리가 진 것은 解塊하여 풀어주어야 한다.12) 따라서 뜨거운 찻잎을 빨리 흩뜨려 식히는 攤凉을 하지 않으면 찻잎은 누렇게 변색되고 탕색이 탁하고 답답한 향기가 난다.13) 또한 찐 찻잎을 빨리 흩뜨려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차의 膏가 흘러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송대의 黃儒는 육우의 膏에 대한 설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6) 茶經 「二之具」“甑:或木或瓦匪腰而泥籃以箄之篾以系之始其蒸也入乎箄既其熟也出乎箄釜涸注於甑中”
7) 布目潮渢, 中國茶の文化史, 硏文出版, 2001, p.26.
8) 김진숙, 「다경에 나타난 당대 제다공구 고찰」, 한국차학회지 Vol.14, No.1, 2008, p.87.
9) 치우치핑 지음, 김봉건 옮김, 茶經圖說, 이른아침, 2005, p.54. ; 김종태, 차의 과학과 문화, 보림사, 1996, p.108.
10) 茶經 「二之具」“甑:又以彀木枝三椏者制之散所蒸芽筍並葉畏流其膏”
11) 許次舒, 茶疏 “炒茶: 手加木指急急鈔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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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사람 육우는 차에 대해 잘 알았으나 육우가 알고 있던 차는 모두 오늘날의 草茶이다. 왜 그럴까? 홍점의 이론에 의하면 ‘찐 차싹과 찻잎의 고가 유실될까 두려워했다’고 하였다. 초차는 맛이 옅고 담박하기 때문에 고를 제거하는 것을 항상 두려워했다. 그러나 건차는 맛이 진하고 달아서 오로지 고를 제거하고자 했다.14)ㅡ 品茶要錄


   여기서 草茶建茶는 차가 생산되는 지역에 따른 명칭이다. 초차육우가 살았던 강절지방의 차로 江茶라고도 불리웠다. 건차송대에 공차 생산지가 복건성의 건안지방으로 옮겨 오면서 유명해진 차로서 硏膏茶인 臘茶와 團茶가 이에 속한다. 초차는 맛이 약하므로 膏를 찻잎에 가두어두려고 한 반면에 건차는 맛이 진하기 때문에 膏를 짜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면 당대의 병차는 시루에 찌는 증청도 중요하지만 증청 후 뒤처리에도 많은 주의를 기울였던 것 같다.

2. 송대 단차제다의 蒸茶
   송대의 단차는 황실에 진공했던 공차였으므로 주로 찻잎이 펴지지 않은 차싹으로만 만들었다. 차를 만드는 원료 자체가 병차와는 달랐다. 그러나 단차 역시 채다한 차싹을 시루에 찌는 증차의 과정을 거쳤다.
차싹은 네 번 깨끗이 씻어 청결하게 한 후, 물이 끓는 것을 살펴 시루에 넣고 찐다. 그러나 증청은 지나치게 찌거나 설익게 찌면 병폐가 있다. 지나치게 찌면 색이 누렇고 맛이 담담하다. 설익게 찌면 색은 푸르나 가라앉기 쉽고 풋내가 난다. 오직 중도(得中)가 적당하다.15) ㅡ 北苑別錄


12) 김진숙, 앞의 논문, p.87.
13) 吳覺農, 茶經述評, 農業出版社, 1988, p.56.
14) 黃儒, 品茶要錄 “後論 : 昔者陸羽號爲知茶然羽之所知者皆今之所謂草茶何哉如鴻漸所論‘蒸笋幷葉畏流其膏’ 蓋草茶味短而淡故常恐去膏建茶力厚而甘故惟欲去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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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다한 차싹물에 여러 번 씻어 청결하게 하였다. 대관다론에도 “마실 때 모래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세척을 잘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16)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차싹에 묻은 오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한 두 번이 아니라 네 번씩이나 씻었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있다. 아마 세척의 목적에는 청결도 있지만 단차 제다에서 사용을 기피하였白合, 烏蒂, 盜葉17)을 제거하기 목적도 함께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백합과 도엽은 가벼워서 물 위에 뜨기 때문에 물을 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떠내려 보내고 차싹만을 가려냈을 것이다.

   당대와 마찬가지로 시루에 찔 때는 물이 충분히 끓은 후 차싹을 넣었다. 증청의 정도는 설익지도 지나치게 익지도 않은 적당한 중도(得中)를 중요시하였다. 단차는 차싹만을 원료로 하였기 때문에 당대의 병차보다 증청이 쉬웠을 법한데도, 대관다론 품다요에서는 설익게 쪘을 때(蒸不熟) 지나치게 쪘을 때(過熟)의 병폐를 상세히 지적하고 있다.
차의 품질이 좋고 나쁨은 차싹을 찌고 누르기에 달려 있다. 찔 때 설익으면 싹이 매끄러워 색은 맑으나 맛이 강하다. 지나치게 찌면 차싹이 문드러져서 붉은색이 나며 점도가 떨어진다.18) ㅡ 大觀茶論
증불숙: 찔 때 설익은 병폐와 지나치게 익은 병폐가 있다. 설익으면 비록 정선된 차싹이라도 손해가 많다. 시음할 때 색은 푸르나 가라앉기 쉽고, 복숭아 씨같은 맛이 나는 것은 설익어서 생기는 병폐다. 오직 잘 익어야만 맛이 달고 향기롭다.
과숙: 차싹을 찔 때에는 김이 나는 징후를 잘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시험할 때 색이 누렇고 좁쌀 같은 거품이 큰 것은 지나치게 익은 병폐다. 그러나 비록 지나치게 익었더라도 설익은 것보다는 달고 향기로운 맛이 낫다.19) ㅡ 品茶要錄


15) 趙汝礪, 北苑別錄 “蒸茶: 茶芽再四洗取令潔淨然后入甑俟湯沸蒸之然蒸有過熟之患有不熟之患過熟則色黄而味淡不熟則色青易沉而有草木之氣唯在得中爲當也”
16) 徽宗, 大觀茶論 “製造: 飮而有少砂者滌濯之不精也”
17) 白合은 차싹을 양쪽에서 싸고 있는 抱葉으로 鱗片이라고도 하며 싹이 자라면 저절로 떨어진다. 烏蒂는 차싹에 줄기의 일부가 붙어있어 검은색을 띈다. 盜葉은 가지 아래에 달려 있는 작은 잎으로 魚葉 혹은 턱잎이라고 한다. 백합, 오체, 도엽은 모두 차의 색깔을 해치므로 송대 단차제다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다.(송해경, 「당•송대 병차와 단차제다법 비교 연구Ⅰ」, 중국인문과학 제65집, 2017, p.397.)
18) 徽宗, 大觀茶論 “蒸壓: 茶之美惡尤係于蒸芽壓黃之得失蒸太生則芽滑故色清而味烈過熟則芽爛故茶色赤而不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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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체로 차싹이 설익었을 때 차의 색깔은 푸른색을 띄어 아름답지만 點茶할 때 쉽게 가라않고 풋내가 나며, 때로는 복숭아씨 같은 맛이 난다. 반면에 지나치게 쪄서 過熟하게 되면 색깔은 누렇게 되고 차싹은 문드러져서 붉은색을 띄며 접착력이 떨어진다. 점차할 때 좁쌀같이 자그마한 거품이 풍성해야 하는데, 과숙하면 거품의 크기가 크고 맛이 담담해진다고 언급하고 있다.

   증청의 정도는 시루에서 나는 김의 징후를 보고 차가 익었는지를 판별하였다. 북원별록에서 차싹이 설익지도 지나치게 익지도 않는 중간(得中)이어야 한다고 했지만 적정한 정도를 가늠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품다요록에서는 둘 중에 굳이 고른다면 지나치게 익은 과숙이 설익은 것보다 달고 맛이 향기로운 편이라고 하였다.

   찐 차싹은 곧바로 물에 담갔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빨리 식혀 차싹이 누렇게 변하는 것을 방지하여 녹색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차싹 안에 있는 심만을 가려낸 水芽를 손쉽게 가려내기 위해서였다. 단차가 공차로 바쳐지면서 더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한 경쟁이 심했다. 다농들이 차맛을 시험하고 겨루었던 試茶에서 발전한 鬪茶는 사대부 뿐만 아니라 황실에서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단차는 더욱 고급화되었고 초기 투차에 사용되었던 단차 원료는 雀舌이나 鷹爪와 같은 小芽는데, 나중에는 그보다 훨씬 더 고급하고 섬세한 水芽로까지 발전하였던 것이다.20)

   宣和庚子年(1120) 조신 鄭可簡은 처음으로 銀線水芽를 만들었다. 차싹을 선별하여 익힌 다음 다시 싹 안에 있는 한 가닥 심(水芽)을 발라내어 진귀한 그릇에 담긴 깨끗한 물에 담그면 밝은 광택이 나는 것이 마치 은실과 같았다.21) ㅡ 宣和北苑貢茶錄
차싹을 순차적으로 쪄서 익힌 후 물동이에 넣고 차싹의 精英을 발라내어 취하는데 마치 작은 바늘과 같다. 水芽라고 하는데, 小芽중에서도 으뜸이다.22) ㅡ 北苑別錄


19) 黃儒, 品茶要錄 「蒸不熟」“蒸有不熟之病有過熟之病蒸不熟則雖精芽所損已多試時色青易沉味爲桃仁之氣者不蒸熟之病也唯正熟者味甘香” 「過熟」“茶芽方蒸以氣爲候視之不可以不謹也試時色黃而粟紋大者過熟之病也然雖過熟愈於不熟甘香之味勝也”
20) 송해경, 「당·송대 병차와 단차 제다법 비교 연구(Ⅰ)」, 중국인문과학제64집, p.396.
21) 熊蕃, 宣和北苑貢茶錄 “宣和庚子歲漕臣鄭公可簡始創為銀線水芽蓋將已揀熟芽再剔去只取其心一縷用珍器貯清泉漬之光明瑩潔若銀線然”
22) 趙汝礪, 北苑別錄 “揀茶: 以其芽先次蒸熟置之水盆中剔取其精英僅如鍼小謂之水芽是小芽中之最精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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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아의 차싹으로 만든 銀線水芽는 차를 좋아했던 휘종 황제 때 복건 전운사였던 鄭可이 처음 만들었던 고급 단차다. 겨울을 난 어린 冬芽안에는 5~7장의 찻잎이 단단하게말려 있다.23) 따라서 소아의 겉잎을 벌려 벗겨내면 속에 있는 하얀색 수아가 드러난다.
그런데 익은 차싹은 무르기 때문에 심을 발라내는 과정에서 찢어지거나 문드러지기 쉽다. 그러므로 물속에서 작업이 수월했고, 지나치게 익은 것보다는 설익은 차싹이 발라내기는 쉬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차의 색과 맛을 중요시했던 송대 황실을 만족시키기 위해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던 것이 단차였던 것이다.


   차싹을 시루에 찌는 과정은 비교적 간단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고급 단차를 만들기 위해서 차를 찔 때에는 설익지도 지나치지도 않은 중간을 유지하여야 했다. 또한 작은 차싹의 심만을 물속에서 발라내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단차는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들었던 귀한 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병차와 단차 제다에서 蒸茶의 차이점 비교
   병차와 단차 제다에서 증청은 전기한 바와 같이 차싹이나 찻잎을 시루에 넣고 찌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차 속에 들어 있는 탄수화물이나 펙틴과 같은 성분이 뜨거운 수증기에 의해 끈적끈적하게 변하는 糊化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므로 시루에 쪄낸 차를 절구에 찧거나 盆에 갈아 틀에 박았을 때 접착력이 생겨 단단한 고형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증청을 마친 뜨거운 찻잎은 빨리 식혀 차싹이나 찻잎이 누렇게 변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이러한 증청의 과정이나 목적은 병차나 단차의 경우 대동소이하다. 각 세부 과정은 다음과 같은 상이점이 있다.


   첫째, 차싹이나 찻잎을 찌는 정도가 다르다. 당대의 병차는 차싹과 찻잎 그리고 줄기있었기 때문에 한꺼번에 시루에 넣고 쪄도 각기 익는 정도가 달랐다. 찻잎은 얇아서 빨리 익는 반면에 차싹과 줄기는 천천히 익기 때문에 차싹과 줄기가 익을 정도의 기준으로 증청했을 것이다. 차싹과 줄기도 충분히 익어야만 절구에서 찧을 때 잘 찧어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송대의 단차는 차싹만따서 만들었다. 따라서 잎이나 줄기가 없고 차싹 한가지만을 익혔기 때문에 병차보다 오히려 증청하기 쉬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송대의 단차는 황실에 진공하는 공차로서 단차의 증청은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설익지도 지나치게 익지도 않는 적절한 상태(得中)를 유지하려고 그들은 매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3) 農文協, 茶大百科Ⅱ, 2008, p.28.


당·송대 餠茶와 團茶제다법 비교 연구(Ⅱ) - 473 -


   둘째, 시루에 찐 후 식히는 과정이 다르다. 당대의 병차는 찻잎이 익으면 시루에서 꺼내어 재빨리 흩뜨려 식혔다. 찐 차는 뜨거워서 세 갈래로 갈라진 닥나무(穀木三枝椏)를 사용하여 차싹과 찻잎을 빨리 펼쳐 널었다. 그 이유는 차의 진액인 고가 유출되는 것을 막고자 함이었다. 뜨거운 찻잎을 빨리 흩뜨려 놓지 않으면 찻잎끼리 달라붙어 덩어리가 지고 색깔이 누렇게 변색 될 뿐만 아니라 문드러지기 쉽다. 이렇게 되면 차맛이 지나치게 담담해지게 되어 좋은 차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송대의 단차는 찐 차싹을 찬물에 담가 식혔다. 차의 색깔이 누렇게 변하는 것을 막고자 함은 당대의 병차와 같다. 찐 찻잎을 물에 담가 식힌 이유는 銀線水芽水芽와 같은 어린 차싹을 쉽게 얻기 위해서였다. 수아는 雀舌이나 鷹爪와 같은 어린 小芽의 겉을 싸고 있는 잎을 제거한 후 가장 안에 들어있는 은색 실같은 차싹이다. 수아의 심을 효과적으로 발라내기 위해서 수아를 싸고 있는 겉잎을 물속에서 한 장씩 떼어 내는 것이 차싹이 찢어지거나 문드러지지 않고 온전한 수아를 얻을 수 있었다.


   셋째, 단차의 증청 병차에 비교해서 매우 세심하고 복잡하였다. 병차는 비교적 대중적인 차였으나 단차는 공차로서 경쟁적으로 더 좋은 차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과거보다 이른 시기에 딴 어린 차싹을 이용하였고, 더욱 복잡하고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야만 했다. 또한 병차는 사용하는 재료도 차싹과 찻잎 그리고 줄기까지 사용하였으나, 단차는 매우 어린 차싹이나 심지어 은실처럼 가느다란 수아를 사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단차의 증청과정은 매우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품질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해 다농들은 차를 겨루는 試茶를 하였고 후에 鬪茶로 발전하였다. 투차는 황실과 사대부뿐만 아니라 서민들 사이에서도 유행을 하였고, 자연스럽게 차의 품질을 고급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채다한 차싹이나 찻잎을 증청하는 과정은 당대나 송대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 내용면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당대 육우의 병차는 대중적인 차로서 증차 과정은 찻잎을 시루에 쪄서 흩뜨렸다. 송대의 단차는 공차로 진공했던 고급차였기 때문에 증청 역시 섬세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Ⅲ. 병차와 단차 제다의 搗茶와 硏茶
   병차와 단차 제다에서 찐 찻잎을 찧거나 가는 搗茶硏茶는 산차 제다에서 揉捻해당된다. 산차에서 유념은 살청한 찻잎을 손으로 비벼주어 부피를 줄이고, 외형을 결정하며 차를 우릴 때 잘 우러나도록 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고형차에서 搗茶와 硏茶는 찐 찻잎을 절구에 찧거나 盆에 갈아, 찻잎의 섬유소를 잘게 부수고 입자를 곱게 하여 덩어리를 만들기 쉽게 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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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차는 찐 찻잎을 절구에 넣고 찧는 搗茶의 과정을 거쳐 만든다. 반면에 단차는 병차의 搗茶에 해당되는 榨茶硏茶 두 과정이 있다. 자다는 연다 과정 전에 찻잎의 물기를 제거하고 차의 진액인 膏를 제거하기 위해 찐 찻잎을 가볍게 자에 넣고 압착하는 과정이다. 또한 도차와 연다는 목적이나, 방법, 요령 등이 서로 다르며 당연히 사용하는 도구도 다르다.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병차 제다에서의 搗茶
   당대의 병차에서 搗茶과정은 찐 차싹과 찻잎이 잘 문드러지도록 절구에 넣고 찧는 비교적 단순한 과정이다. 搗茶의 목적은 병차의 고형 덩어리를 만들기 쉽고, 건조한 후에는 병차가 갈라지지 않도록 섬유소를 짧게 끊어 주는 과정이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차를 마실 때 덩어리진 병차를 가루내기 쉽도록 하는 목적도 있다.
   육우 茶經에서 搗茶는 차 만들기인 「삼지조」에서 언급하지 않고, 제다도구를 설명하는 「이지구」와 차를 끓이는 「오지자」에서 언급하고 있다.
절구공이와 절구는 일명 碓라고도 하며 항상 사용하던 것이 좋다.24) ㅡ 茶經


   차를 만들기 시작함에 있어 지극히 여린 것을 쪄서 뜨거울 때 찧으면 잎은 문드러지지만 싹은 남아 있다. 힘 있는 사람이라도 千鈞의 절구공이를 가지고 문드러뜨리지 못한다. 마치 칠과주와 같아서 힘센 장사가 칠과주를 손가락으로 능숙하게 정지시키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잘 찧으면 줄거리(穰骨)가 없는 것처럼 된다.25) ㅡ 茶經


   우선 搗茶에 필요한 도구는 절구와 절구공이다. 찐 찻잎을 절구에 넣고 절구공이로 찧는다. 육우는 제다도구를 설명하면서 독특한 서술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차 전용도구를 말하면서도 일반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체 가능한 도구를 순차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26) 예를 들어 차를 찧는 전용 절구 대신 일반 방아(碓)도 사용 가능하다는 조언 등인데, 이러한 특징은 육우 검박정신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또한 항상 사용하던 기물을 추천함으로써 새로 제작한 도구에서 나는 냄새가 차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도 또 다른 특징이다.


24) 茶經 「二之具」“杵臼:一名碓惟恒用者為佳”
25) 茶經 「五之煮」“其始若茶之至嫩者蒸罷熱搗葉爛而芽筍存焉假以力者持千鈞杵亦不之爛如
漆科珠壯士接之不能駐其指及就則似無穰骨也”
26) 布目潮渢, 茶經詳解, 淡交社, 2001,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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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기한 蒸茶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茶經「이지구」에서는 차를 절구에 찧기 전에 찐 찻잎을 세 갈래진 닥나무로 재빨리 흩뜨려서 식힌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지자」에서는 ‘지극히 여린 것을 쪄서 뜨거울 때 찧으면 잎은 문드러지지만 싹은 남아 있다’ 하였다.


   따라서 절구질할 때도 요령이 필요하다. 차싹은 작고 단단하여 절구공이로 내려칠 때 칠을 한 구슬 같아서 미끄러지고 잘 찧어지지 않는다. 힘이 세다고 잘 찧는 것이 아니라 차싹을 잘 조준하여 인내심을 가지고 절구질하여야 싹의 심이나 줄기의 구분 없이 고르게 찧어지고, 완성된 병차도 매끄러운 모습을 갖게 된다. 일반적으로 병차는 건조되면서 수축이 일어나 표면이 매끄럽지 않고 거칠거칠하게 된다. 육우는 병차 표면의 주름진 모양에 따라 胡靴에서 霜荷까지 8등급으로 나누고 있다. 그 중에서도 품질이 좋은 것 6가지를 精腴라 하였으며, 거칠고 조악한 것 2가지를 瘠老라 하였다.27) 육우는 차를 감별함에 있어 병차의 외형을 보고 판단하는데, 완성된 차의 표면이 주름지고 울퉁불퉁한 원인을 茶膏로 보고 있다.


   膏가 빠지면 빛이 나고, 膏가 있으면 주름이 생긴다. 하룻밤 지난 다음 만들면 검은색이 되고, 당일에 만들면 누런색이 된다. 쪄서 세게 누르면 평평하고, 느슨하게 누르면 울퉁불퉁하다. 차와 초목의 잎도 마찬가지다. 차의 좋고 나쁨은 口訣에 의해 전해진다.”28) ㅡ 茶經


   육우는 고가 유실되는 것을 두려워해서 찐 찻잎을 재빨리 흩뜨려 식혔다. 고가 있는 병차는 주름이 있었고, 精腴와 같은 차를 품질이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차의 감별은 매우 어려운 것으로 육우도 차의 九難 중 두 번째에서 “嚼味嗅香非別也”라 하여 차를 씹어서 맛을 보거나 냄새를 맡아 차를 안다는 것은 표피에 불과한 감별법이다.29) 즉 차 품질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은 한마디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 祕訣은 口訣로 전해온다고 하였다. 오랜 경험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 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27) 1)호인의 주름진 신발과 같이 蹙縮然한 것, 2)물소의 앞가슴 주름과 같은 廉襜然한 것, 3)산위에 떠있는 구름이 중첩되어 있는 것 같은 輪囷然한 것, 4)가벼운 바람에 물결친 것 같이 涵澹然한 것, 5)도공이 흙을 물에서 수비한 것 같은 것, 6)새로 난 길에 폭우가 지나가 도랑이 파인 것 같은 모양은 모두 차의 精腴이다. 7)마치 대나무 껍질과 같이 가지와 줄기가 뻣뻣하여 쪄서 찧기 어려운 고로 藘簁然한 것, 8)서리맞은 연잎처럼 줄기와 잎이 축 처져서 그 모양이 委萃然한 것은 모두 차의 瘠老이다.
28) 茶經「三之造」“出膏者光含膏者皺宿製者則黑日成者則黃蒸壓則平正縱之則坳垤此茶與草木葉一也茶之否臧存於口訣”
29) 짱유화, 煮茶學, 도서출판국차미디어, 2011,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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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리하면 당대 병차의 搗茶는 병차를 만들기 쉽도록 찐 찻잎을 절구에 넣고 찧는 과정이다. 蒸茶를 통해 찻잎의 탄수화물이나 펙틴 같은 성분이 糊化된 상태에서 절구에서 줄거리가 없게 잘 찧으면 틀(規)에 넣어 성형을 할 때 잘 뭉쳐졌다. 또한 搗茶를 통해 찻잎이 균일하게 잘 찧어져야 완성된 병차의 표면이 갈라지거나 부서지지 않았다.


2. 단차 제다의 硏茶
1) 茶膏를 짜는 착다(榨茶)

   단차 제다의 硏茶는 병차 제다의 搗茶와 유사한 과정이지만 훨씬 까다롭고 복잡하다.
찐 찻잎을 가는 硏茶를 하기 전에 茶膏를 짜는 榨茶과정을 거쳤다. 북원별록에는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차가 익은 것을 茶黃이라고 한다. 모름지기 여러 번 씻어서 식히고자 했다. 네모난 小榨에 넣어 물기를 제거한다. 또 大榨에 넣어 膏를 짠다. 水芽는 馬榨에 눌렀는데 싹이 어리기 때문이다. 먼저 보자기에 싸서 대껍질로 묶은 후에 大榨에 넣어 눌렀다. 한밤중이 되면 꺼내어 비벼서 푼 후 다시 榨에 넣어 반복하는데 翻榨라고 한다.30) ㅡ 北苑別錄


   차싹은 시루에 찌기 전에도 깨끗이 씻었지만 쪄서 익은 茶黃도 물에 여러 번 씻어 식혔다. 그리고 착즙기와 같은 榨에 넣어 물기와 膏를 제거하였다. 착에는 小榨, 大榨, 馬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소착은 물에 씻은 차황의 물기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므로 압력이 그리 세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차고를 본격적으로 짜는 것은 대착다. 어린 싹인 水芽는 더 강력한 마착에 넣고 눌렀다. 다의 방법 차황을 헝겊에 싼 후 대나무 껍질로 묶은 후, 대착에 넣고 눌러 놓았다. 그리고 한밤중에 꺼내어 고르게 비벼 편 후 다시 榨에 넣어 눌러 반복하는 翻榨과정을 통해 물기와 고를 완전히 제거하였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단차 제다에서는 차의 진액인 고를 최대한 짜 내고자 하였다.
고의 유무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랐다. 당대 육우 다경의 저술 배경이 되었던 양절지방의 차는 江茶(혹은 草茶)라 하였고, 송대 복건성 건안 북원지방차는 建茶로 불리었다. 건차에서 생산되었던 공차의 대표적인 차가 바로 납차단차였다.


30) 趙汝礪, 北苑別錄 「榨茶」“茶旣熟謂茶黃須淋洗數過欲其冷也方入小榨以去其水又入大榨出 其膏水芽則以馬榨壓之以其芽嫩故也先是包以布帛束以竹皮然後入大榨壓之至中夜取出揉勻 復如前入榨謂之翻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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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병차와 달리 단차에서 차고를 제거하고자 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건차의 맛은 진하고 오래가서 강차(초차)와 비교도 안된다. 강차는 고가 유실될까 염려했고, 건차는 오로지 고를 다 짜내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고를 다 짜내지 않으면 색과 맛이 무겁고 탁하기 때문이다.31) ㅡ 北苑別錄


   홍점의 이론에 의하면 ‘찐 차싹과 잎의 차고가 유실되는 것을 경계했다’고 한다. 초차는 맛이 옅고 담박했기 때문에 고를 제거하는 것을 항상 두려워하였다. 건차는 맛이 진하고 달아서 오직 고를 제거하고자 노력하였다.32)    ㅡ 品茶要錄


   차싹이 설익으면 초목기가 있고, 고를 다 제거하지 않으면 색이 탁하고 맛이 무겁다. 연기를 쐬면 향을 빼앗기고, 壓黃을 하면 맛을 잃어버린다. 이러한 것이 모두 차의 병폐이다.33) ㅡ 東溪試茶錄


   차는 고의 유무에 따라 색향미에 차이가 난다.

   첫째, 고를 제거하지 않으면 색과 맛이 무겁고 탁하였다. ‘茶色貴白’ 34)이라 하여 차의 흰색을 귀히 여겼다. 고를 짜 내어 완성된 차의 색깔이 흰색에 가까운 옅은 녹색을 띄었으며, 點茶할 때 생기는 하얀 乳華를 선호하였다. 또한 차의 색깔이 옅을수록 단차 표면을 무늬를 새긴 숫틀로 눌러 찍었을 때 문양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다른 이점도 있었다.35) 즉 화려한 문양을 세밀하게 새기기 위해서도 단차의 고를 짜 내었던 것이다.


   둘째, 맛이 진하고 달기 때문에 고를 제거해도 괜찮았다. 건차의 생산지는 강차 생산지에 비해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기후가 따뜻하므로 중엽종의 차나무가 자란다. 잎이 크고 두꺼울수록 쓰고 떫은 폴리페놀 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 폴리페놀의 함량이 많은 찻잎으로 녹차를 만들게 되면 맛이 강한 편이었다. 이러한 점에 대해 東君 “차의 쓴맛을 극복하기 위해 당대의 육우는 차를 끓일 때 소금을 첨가했지만 송대에는 榨茶공정이 필요했다”36)고 보았다. 宍戶佳織“착다의 주요한 목적은 차의 쓴맛과 떫은맛을 제거하는 것이다”37)고 하였다.


31) 趙汝礪, 北苑別錄 「榨茶」“蓋建茶味遠而力厚非江茶之比江茶畏流其膏建茶惟恐其膏之不盡 膏不盡則色味重濁矣”
32) 黃儒, 品茶要錄 「後論」“如鴻漸所論‘蒸笋幷葉畏流其膏’ 蓋草茶味短而淡故常恐去膏建茶力 厚而甘故惟欲去膏”
33) 宋子安, 東溪試茶錄 “茶病: 蒸芽未熟則草木氣存去膏未盡則色濁而味重受煙則香奪壓黃則 味失此皆茶之病也”
34) 蔡襄, 茶錄 「色」
35) 송대 단차를 제작하는 틀에는 암틀과 숫틀이 있다. 섬세한 문양을 새긴 것은 주로 숫틀이었고, 재질은 금속성의 은이나 동을 사용하였다.(송해경, 「병•단차의 틀에 관한 연구」, 차문화연구지 제14권, 2006,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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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차고를 제거했을 때 맛이 더 부드럽고 순하게 되어 차맛을 오히려 더 좋게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대관다론에는 “蒸壓이 지나치면 오히려 맛은 순하지만 풍미가 부족할 수 있다”38)고 하여 지나친 차고의 제거를 경계하고 있다. 또한 榨에 넣고 누를 때 지나치게 눌러 차싹이 누렇게 변하는 壓黃은 늘 경계의 대상이었다.


   셋째, 차고는 맛뿐만 아니라 향기를 결정하는 중요한 성분이기도 하다. 차의 진액인 차고를 제거하면 향기는 당연히 부족해졌을 것이다. 채양茶錄에는 “입공하는 차에연고차에 용뇌를 조금 섞어 향기를 보충하였다. 건안 민간에서 試茶할 때는 진향을 빼앗길까 봐 모두 향을 넣지 않았다.”39)고 하였다. 단차 제조 초기에는 부족해진 향을 보충하기 위해 공차에 용뇌향을 추가하였다. 그러나 大觀茶論에서 “차에는 眞香이 있어 용뇌나 사향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40)라고 하였고, 宣和北苑貢茶錄에서는 “처음에는 공차에 모두 용뇌향을 섞었으나 후에 차의 진미가 훼손될 것을 염려하여 쓰지 않게 되었다.”41)라는 기록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차의 진향이 점차 강조되면서 향료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차고를 제거하는 자다 과정이 송대의 단차 제다를 제외하고는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보면 차의 평가 기준도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차싹을 瓦盆에 가는 硏茶
   송대 단차의 시작은 硏膏茶였다. 연고차는 차의 膏를 짜내고 盆에 갈아서 연고상태로 만든 차를 말한다. 선화북원공다록에 의하면 “오대 때에 남당에 속해 있던 건안 북원에서 해마다 차를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연고차를 만들었고, 계속해서 납면차를 만들었다”42)라는 기록이 있다. 용봉단차는 송나라가 南唐(937~975)을 복속시킨 후인 태평흥국(976~983) 초부터 관리를 파견하여 만들기 시작하였다.


   품질 좋은 황실 진공용 단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차의 고를 짜내고 盆에 넣고 가는 가 매우 중요하였다. 북원별록에서는 연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36) 東君, 「固形茶から散形茶へと變化する原因について, 茶から茶道へ , 市井社, 1998, p.75.
37) 宍戶佳織, 「中國宋代における茶の加工法の變化と鬪茶」, 人間科學硏究제18권 제2호, 2005, p.157.
38) 徽宗, 大觀茶論 「味」 “其味醇而乏風骨者蒸壓太過也”
39) 蔡襄, 茶錄 「香」 “茶有眞香而入貢者微以龍腦和膏欲助其香建安民間試茶皆不入香恐奪其眞”
40) 徽宗, 大觀茶論 「香」“ 茶有眞香非龍麝可擬”
41) 熊蕃, 宣和北苑貢茶錄 “初貢茶皆入龍腦至是慮奪眞味始不用焉”
42) 熊蕃, 宣和北苑貢茶錄 “五代之季建屬南唐歲率諸縣民採茶北苑初造硏膏繼造臘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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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다도구는 잣나무 절구공이와 瓦盆이다. 단차에 따라 물을 나누어서 붓는데 역시 횟수가 모두 정해져 있다. 위로는 勝雪, 白茶16水, 아래로는 揀芽6水, 龍鳳4水, 大龍鳳2水, 기타 나머지는 모두 12水이다. 12수 이상은 하루에 團하나를 간다. 6수 이하는 하루에 3개~7개를 간다. 매번 물을 넣고 갈 때에는 반드시 차에 물이 스며들어 마른 후에라야 한다. 물이 마르지 않으면 차가 익지 않는다. 차가 익지 않으면 (단차의) 표면이 고르지 못하고 차를 달여 시험할 때 가라앉기 쉽다. 그러므로 차를 가는 硏夫는 강하고 힘이 있는 자를 귀하게 여긴다.43)   北苑別錄

   고를 짜낸 차싹은 수분이 거의 없어 푸슬푸슬한 상태다. 연다를 하기 위해서 질그릇으로 된 瓦盆에 넣고 물을 조금씩 부어 가면서 잣나무 절구공이로 갈았다. 병차제다에서 절구에 찧는 것과는 달리 처음 시도된 제다법이었다. 북원의 차는 등급에 따라 물을 붓는 회수가 달랐다.44)  즉 고급차일수록 물을 여러 번 나누어 부었으며 오랫동안 갈았다.
승설과 백차와 같은 고급차는 16수로 16번에 걸쳐 물을 부어가며 갈았다. 12수 이상은 힘센 연부가 하루에 겨우 1단 갈았다고 하며, 6수 이하라도 하루에 3~7개 정도 밖에 갈지 못하였다.

  연다를 할 때 주의할 점은 물이 겉돌지 않고 차에 스며들 정도로만 물을 붓는 것이다.
물을 붓는 회수에 따라 차의 입자가 점점 고와져서 정성 들여 오랫동안 간 연고차는 표면이 고르고 단단했다. 그래야만 단차 표면에 찍는 무늬의 문양도 섬세하고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연다가 송대 연고차의 특징인데, 그 과정이 너무 어렵고 힘들었기 때문에 연고차가 후대로 이어지지 못했던 이유 중에 하나라고 판단된다.45) 서민들이 마시는 것과 차별화하기 위해 만들었던 용봉단차는 서민들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귀한 차였던 것이다.

3. 병차의 搗茶와 단차의 硏茶 차이점 비교
   당대의 병차와 송대의 단차는 모두 고형차라는 점은 동일하다. 그리나 절구에 찧는 搗茶나 盆에 가는 硏茶과정도 유사한 점도 있지만 세부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다. 병차의 도다와 단차의 연다의 차이점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43) 趙汝礪, 北苑別錄 「硏茶」“硏茶之具以柯爲杵以瓦爲盆分團酌水亦皆有數上而勝雪白茶以
十六水下而揀芽之水六小龍鳳四大龍鳳二其餘皆以十二焉自十二水以上日硏一團自六水而下
日硏三團至七團每水硏之必至於水乾茶熟而後已水不乾則茶不熟茶不熟則首面不勻煎試易沉
故硏夫尤貴於强而有力者也”
44) 짱유화, 點茶學, 보이세계, 2008, p.302.
45) 류건집, 송대 다서의 주해 하, 이른아침, 2012,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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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단차硏茶를 하기 전에 膏를 짜내는 榨茶과정이 있다. 병차는 시루에서 찐 찻잎을 절구에 찧어서 덩어리 형태의 고형차로 만들었다. 그러나 단차는 찐 차싹을 분에 갈기 전에 膏를 짜내는 榨茶과정이 선행되었다. 시루에서 쪄 낸 뜨거운 차싹을 식히기 위해 물에 담궜고, 압력이 낮은 小榨에 넣고 눌러서 차싹의 물기를 제거하였다. 그 다음 본격적으로 大榨에 넣고 눌러 膏를 짜 내었다. 水芽의 차싹은 압력이 센 馬榨에 넣어 를 최대한 제거하였다. 이렇게 고를 반복해서 짜내는 翻榨작업은 밤새도록 이루어졌다. 송대 단차제다에서 이처럼 큰 수고를 하며 고를 제거한 이유는 ‘茶色貴白’ 의 풍조로 인하여 단차의 색깔이 흰 것을 귀하게 여겼고, 무늬가 새겨진 틀로 찍었을 때 문양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특히 투차의 우열을 결정하는 5가지 품질 요소(色, 香, 味, 浮, 水痕) 중에서 궁정 투차색과 거품(浮)을 중시하였다.46) 건잔의 대표적인 흑유 찻잔은 흰색의 거품을 돋보이게 하였으므로 송대 최고의 찻잔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둘째, 병차의 搗茶절구(臼)에 찧었지만 단차의 硏茶瓦盆에 갈았다. 병차는 찐 찻잎을 절구에 넣고 절구공이로 찧었다. 병차의 원료는 차싹과 찻잎 그리고 줄기가 포함되어 있다. 절구에 찧을 때 면적이 큰 찻잎은 잘 문드러지지만 차싹은 칠과주와 같이 매끄러워 잘 찧어지지 않으므로 숙련된 솜씨를 필요로 하였다. 차싹과 찻잎, 줄기의 형태가 없어질 정도로 골고루 곱게 찧어야 차가 매끄럽게 잘 뭉쳐져야 건조되었을 때 갈라지거나 부서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차는 차싹의 물기와 고를 제거한 榨茶 이후에 瓦盆에 가는 硏茶의 과정 거쳤다. 盆은 분마기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유약을 발라 매끄러운 것은 적당하지 않았다. 질그릇으로 만든 와분은 바닥이 거칠어서 마찰이 생겨 분쇄가 용이했다. 와분에 푸슬푸슬한 차싹을 넣고 절구공이(杵)로 가는 연다는 절구에 찧는 도다에 비해 훨씬 많은 시간과 공력을 필요로 했다.

  셋째, 병차의 搗茶찻잎 자체의 수분으로 찧지만 단차의 硏茶물을 첨가하며 아주 곱게 갈았다. 병차는 시루에 찐 찻잎을 곧바로 흩뜨려서 식힌 다음 절구에 넣고 찧었다. 이 때 찻잎에 적당한 수분이 있어야 틀에 박아낼 때 쉽게 덩어리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슬 맞은 찻잎 자체의 수분만으로도 덩어리를 만들기에 충분했기에 찐 찻잎에서 나오는 수증기를 빨리 흩뜨려 식힘으로서 적당한 수분을 유지시키고자 하였다. 찻잎이 익으면서 생긴 끈적한 茶膏와 더불어 절구에 찧는 搗茶의 과정은 섬유소를 짧게 끊고 입자를 작게 분쇄함으로써 접착력을 높였다.
   반면에 榨茶의 과정을 거쳐 茶膏를 짜낸 차싹은 물기가 없이 푸슬푸슬하여 끈기가 없었다. 수분이 거의 없는 차싹을 와분에 갈 때에는 물을 조금씩 첨가하면서 연고상태갈았다.


46) 고연미, 「한·중·일 點茶文化에 나타난 송대 建盞연구」, 원광대 박사논문, 2008, pp.200~201.


당·송대 餠茶와 團茶제다법 비교 연구(Ⅱ) - 481 -
 硏膏茶의 입자가 작을수록 단을 만들 때 표면이 매끄럽고 단단했다. 차의 등급에 따라 물을 첨가하는 회수도 달랐다. 2수에서 16수까지 다양한데, 물을 12수 이상 붓는 단차는 힘센 硏夫도 하루에 겨우 1단을 갈았다. 고급 단차일수록 물을 붓는 횟수가
많았고,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었다.

  넷째, 병차는 문양이 없지만 단차榨茶와 硏茶는 문양을 넣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였다. 병차는 차고를 짜지 않았기 때문에 완성된 차의 색깔이 진한 녹색이고, 차의 입자도 단차에 비해 비교적 거칠었다. 세밀한 문양을 넣는다 해도 잘 드러나지 않았다. 따라서 병차동그라미, 네모, 꽃모양의 틀에 박아 내었을 뿐 병차에 무늬가 없었다. 반면에 단차는 榨茶와 硏茶를 통해 차의 색깔은 흰색에 가까웠고, 입자도 매우 미세하였다. 완성된 단차의 조직은 매우 치밀하여 쇳소리가 날 정도로 단단하였다. 남송시대
심안노인다구도찬木待制는 단차를 부수는 전용 절구가 있었고,47)대관다론는 떼어낸 단차 조각을 금속제 茶碾에 갈 때 나는 소리를 ‘碎玉鏘金’이라고 하여 옥이 깨질 때 나는 (금속성) 소리라고도 칭하였다.48) 문양을 새기기 위한 단차의 틀은 암틀과 숫틀로 나뉘었고, 암틀에 차를 담고, 문양이 새겨진 숫틀로 눌러 찍었다. 선화북원공다“태평흥국 초에 용봉무늬 틀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북원에서 단차를 만들었는데, 서민들이 마시는 것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49)고 하였다. 용봉단차는 황실에 진공했던 공차였기 때문에 이처럼 榨茶와 硏茶의 까다롭고 힘든 과정을 거치고, 아름다운 문양도 새겨 넣었던 것이다.


   다섯째, 병차에는 향을 첨가하지 않았지만 초기 단차에는 을 첨가하였다. 차에는 차고유의 眞香, 眞色, 眞味가 있다. 육우는 찻잎만을 사용하여 병차를 만들었다. 차를 끓일 때에 약간의 소금을 첨가했지만, 여러 재료와 함께 끓인 차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했고, 차의 本味를 강조하는 淸飮法을 더욱 강조하였다.50)
   단차는 여러 번에 걸친 榨茶과정에서 차의 진액인 차고를 제거하여 완성된 단차는 색깔은 흰색이지만 차의 고유한 향미는 많이 사라졌다. 그래서 入貢하는 차에는 부족한 차향을 보충하기 위해 硏茶할 때에 용뇌향을 섞어서 갈았다. 그러나 점차 차의 眞香을 중요하게 여겨 용뇌나 사향과 같은 향료를 첨가하지 않게 되었다.

   이상에서 당대 병차도다송대 단차연다는 고형의 덩어리를 만들기 위한 선행과정이었지만 많은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선 병차의 도다는 차싹과 찻잎 그리고 어린 줄기까지 포함된 차를 절구에 넣고 절구공이로 찧는 비교적 간단한 과정을 거쳤다.


47) 高橋忠彦, 「茶具圖賛 に就きて」, 東京學藝大學紀要第2部門第48集, 1997, pp.375~376.
48) 류건집, 앞의 책, 이른아침, 2012, p.91.
49) 熊蕃, 宣和北苑貢茶錄 “太平興國初特置龍鳳模遣使卽北苑造團茶以別庶飮”
50) 김진숙, 「唐代의 飮茶文化」, 한국차학회지Vol 13, 2007,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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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비해 단차는 원료 자체가 차싹인 小芽를 사용하였고, 은선수아 같은 차는 소아의 심만을 발라낸 水芽를 사용하였다. 연다는 차고를 짜는 다 과정 거친 후에 와분에 넣고 절구공이로 물을 첨가해가면서 오랫동안 곱게 갈았다. 당대의 병는 손쉬운 제다공정을 거친 대중적인 차였다면 송대의 단차는 만들고 마시는 과정이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웠으며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귀한 차였으므로 당연히 대중적인 차와는 거리가 먼 고급차였다.


Ⅳ. 결론

  당대의 병차송대의 단차고형차로서 삼국시대 이래로 중국에서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차이다. 고형차라는 유사점이 있지만 제다 과정상에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다.

   첫째, 사용하는 재료 찻잎이 매우 달랐다. 병차는 차싹과 찻잎 그리고 어린 가지까지를 사용하였으나 단차는 매우 어린 차싹만을 사용하였고, 때로는 아직 피지도 않은 차싹 속의 가느다란 은실 같은 수아를 사용 하였다.

   둘째, 蒸茶에서는 찌는 정도에 차이가 있었다. 병차는 차싹과 찻잎 그리고 줄기가 있어서 차싹이나 줄기가 익을 정도로 푹 쪘다. 단차는 어린 차싹 한 종류만을 사용하여 증청이 쉬울 수도 있었으나 황실에 진공하는 차는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지나치게 찌면 색이 누렇고 맛이 담담하며, 설익게 찌면 색은 푸르나 가라앉기 쉽고 풋내가 났다. 특히 은선수아의 경우 푹 찌게 되면 물속에서 심을 발라낼 때 문드러지기 쉬위 찌는 정도는 병차에 비해 약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적당한 중도(得中)를 지키면서 차를 쪘던 단차의 증차는 병차에 비해 하는 것이 훨씬 어려웠던 것이다.

   셋째, 찐 차를 식히는 처리과정이 달랐다. 茶黃(익은 찻잎)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穀木枝三椏를 사용하여 재빨리 흩뜨려 茶膏가 유실되는 것을 막았었다. 단차는 찐 차싹을 곧바로 찬물에 담가 여러 번 씻었다. 그 이유는 차싹이 누렇게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힌 것이었다. 그리고 은실과 같은 水芽를 얻기 위해 차싹의 겉잎을 발라내는 과정에서 차싹이 찢어지거나 문드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넷째, 병차의 도다단차의 연다물의 첨가에서도 많은 차이점이 있었다. 병차 도다는 찻잎을 절구에 거칠게 찧었지만 단차의 연다는 차싹을 와분에서 곱게 갈았다. 이 과정에서 병차는 이슬맞은 찻잎이었기에 자체 수분만으로도 덩어리를 만들기 쉬웠지만 단차다과정을 거처 수분이 거의 없으므로 와분에 갈 때 물을 첨가해야 했다. 물을 첨가하는 횟수가 많을수록 고급차였으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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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째, 병차문양이 없지만 단차용봉무늬와 같은 세밀한 문양을 새겨 넣었다.
병차는 고를 빼지 않아 진한 녹색으로 문양을 새기고자 해도 잘 나타나지 않으므로 문양 없이 틀에 넣어 박았다. 단차는 서민들이 마시는 차와 구분하기 위해 용봉무늬 틀을 설치하여 문양을 찍었고, 섬세한 문양이 드러날 수 있도록 차고를 짜 내는 와 입자가 고운 연고상태로 만든 연다 과정이 추가되었던 것이다.

   여섯째, 병차는 향을 첨가하지 않았지만 단차는 초기에 향을 첨가하였다. 병차를 만드초차의 담박한 맛에 비해 단차의 건차는 맛이 강하였으므로 그 강한 맛을 순화시키기 위해서도 단차는 착다과정을 통해 차고를 제거하였다. 차고의 제거는 차의 고유한 색향미를 잃게 했기 때문에 단차의 부족한 향을 보충하기 위해 초기에는 용뇌향을 첨가하기도 하였다.


   이상의 분석과 같이 병차와 단차는 제다과정에서 차를 찌는 蒸茶찐 찻잎을 가는 과정에서 절구에 넣고 찧는 搗茶와 차고를 짜는 榨茶瓦盆에서 가는 硏茶에서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오늘날 중국 제다사에서 병차와 단차와 같은 고형차는 자취를 감춘 차이다. 이러한 고형차의 제다법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매우 고답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역사는 발전이나 진보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옛 것에는 항상 새로운 것이 있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오래 된 과거에서 오히려 우리는 현재를 발전시킬 수 있는 많은 새로운 것들을 찾아 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옛 것을 귀히 여기고 그것에 대한 연구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즉 지금은 사라진 고형차에서 오늘날의 산차가 발전되어 나왔듯이 더 나은 현대 차를 만들 수 있는 밑거름이 과거에 대한 연구를 통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당· 송대의 고형차는 제다, 음다 과정에서 많은 시간과 공력이 필요하다. 반면에 명대 이후 등장한 산차는 만들기도 쉽고 마시는 방법도 용이하였다. 또한 녹차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발효차가 생겨났다. 오늘날 중국에서 병차와 단차와 같은 고형차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인기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송대의 고형차는 제다방법의 다양성과 차의 품질 그리고 고급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오히려 이 어려운 제다와 음다과정이 있었기에 명대에 이르러 산차라는 대중적인 차가 발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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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Block tea(餠茶) and cake tea(團茶) are both the typical Chinese tea in Tang and Song dynasty. Block tea was may be the Chinese original tea, and was very popular in Tang dynasty. Cake tea is more elaborated tea and was very popular in Song dynasty. Both teas are 固形茶, but similarity stops at that point. Block tea uses relatively young leaves and they sometimes uses young branches also. 


   Comparing to the Block tea, Cake tea uses very young leaves and sometimes they uses the thread like leaves which even come out from the wrapping leaves. They also different in boiling method, cooling method and even different in adding water when grinding.

   Cake tea uses so young leaves and pressing and grinding so many times the surface of cake tea is so smooth that very delicate figures can be decorated, but not the block tea. Block tea does not press much after grinding that the original taste and flavor can be remained within the tea. However cake tea was so much pressed that original tea flavor may be lost. So to compensate this loss cake tea added fragrance in it. Both tea were long gone and hard to find, but studying the old tea methods could be very important way to widen the variety and preparing the modern tea culture.


【Key words】Block tea(餠茶), Cake tea(團茶), Tea boiling method(蒸茶), grinding tea, pressing and grinding tea


접수일자 2017. 11.10 심사완료일 2017. 12.06 게재확정일 2017. 12.09




                           당·송대 餠茶와 團茶제다 비교연구(Ⅱ)*- 蒸茶/ 搗茶... 2018.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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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대 餠茶와 團茶 제다법 비교연구(IV)- 건조를 중심으로 -| 중국인문과학 

                 

樂民(장달수) | 조회 63 |추천 0 | 2018.12.30. 14:31 

   

당·송대 餠茶와 團茶 제다법 비교연구(IV)- 건조를 중심으로 -


30)송 해 경**



―――――――――――――― < 目 次 > ――――――――――――――
Ⅰ. 머리말
Ⅱ. 당대 병차 제다의 건조
Ⅲ. 송대 단차 제다의 건조
Ⅳ. 병차와 단차 건조의 차이점 비교
Ⅴ. 결론
――――――――――――――――――――――――――――――――――




Ⅰ. 서론
   중국의 당, 송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큰 변화의 시기였다. 이런 변화는 차 문화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대에 차는 전국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송대에는 開門七件事에 차가 들어갈 정도로 황실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음다 생활은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이런 엄청난 차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차의 생산량이나 제다법은 당송대에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음료로서의 제다가 시작된 것은 중국 삼국시대였다.


   삼국시대 장읍 ≪廣雅≫에서 제다법에 대해 최초로 언급하고 있으며, 그 때의 차는 병차였다. 그리고 병차 제다법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당대의 陸羽(733~804)였다. 육우는 그의 저서 ≪茶經≫에서 병차의 제다 과정을 採·蒸·搗·拍·焙·穿·封일곱 단계(七經目)로 구분하였다. 송대에는 당대의 병차단차로 발전하였으며, 차의 품질과 모양이 정교하고 화려해졌다. 그 중에서도 용봉단차는 가장 고급차로서 황실에 진공되는 貢茶였다.

  당대의 병차와 송대의 단차는 모두 고형차였기 때문에 습기로부터 비교적 안전하였고, 설령 습기를 머금었을지라도 적절한 온도의 숯불에 구워서 습기를 제거할 수 있었다.1) 그러나 명대의 散茶에 비해서는 제다 과정이 훨씬 까다롭고, 완성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 이 논문은 2018년 원광디지털대학교 교비 지원에 의하여 수행되었음

** 원광디지털대학교 차문화경영학과 부교수

中國人文科學 第69輯    - 494 - 

  고형차의 제다에서 마지막 과정은 제다한 차에서 습기를 제거하는 건조 과정이다.
그러나 흐트러진 모습의 산차에 비해 고형차는 차를 압착하여 단단하게 만들고, 두께 또한 두껍기 때문에 고형차의 안까지 완전히 건조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으며, 적절하게 건조되지 않은 차는 변질되기 쉬웠다. 이런 이유에서 다농들은 고형차의 제다에서 건조 과정에 심혈을 기울였었다.


   본 연구자는 선행연구인 <당․송대 餠茶와 團茶 제다법 비교 연구>의 시리즈 논문에서 병차와 단차의 採茶 그리고 蒸茶와 搗茶 과정을 두 차례에 걸쳐 발표하였다.2) 이번 연구는 그 후속 연구로서 차를 오랫동안 저장하고 보관하기 위한 건조 과정에 대해 비교 연구하였다. 본 연구에서 저자는 병차와 단차의 건조 과정의 차이점을 상호 비교 연구하였으며, 또한 건조 과정에 대한 우리나라 기존 문헌의 해석에 대해서도 새로운 이유를 제시하였다. 즉 단차를 건조하는데 사용하는 배루(焙簍)의 역할을 새롭게 규명하였으며, 과황에서 ‘過沸湯爁之’하는 이유를 새로운 관점에서 논의하였다.

Ⅱ. 당대 병차 제다의 건조

   당대 육우≪다경≫에서 병차 제다의 건조 과정인 焙茶는 차를 오랫동안 보관하였을 때 차가 변질되지 않도록 수분을 제거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틀에서 성형한 후 빼낸 병차는 함수량이 높으므로 대나무 채반(芘莉)에 널어 말리는 攤晾 과정에서 자연스런 건조 과정이 시작되었다.3)  당대 병차의 크기나 두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지만, 병차의 겉과 속이 균일하게 건조시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틀에서 빼낸 병차는 수분이 많은 상태이므로 일단 채반인 비리에 널어놓았다. 芘莉에 널어 말리는 攤晾 과정에서 병차의 표면은 바람에 의해 어느 정도 반 건조 상태로 마르게 된다. 그러면 병차의 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대나무 꼬챙이(貫)에 꿰어 배로에서 본격적인 건조를 하였다.

   비리(芘莉)영자(籯子) 혹은 방랑(篣筤)이라고 한다. 작은 대나무 2개로 길이 3자인데 몸체는 2자 5치, 손잡이가 5치이다. 대나무를 촘촘하게 엮어서 모눈 모양으로 엮는다. 마치 흙체와 비슷한데 너비 2자로 차를 널어놓는다.4)


1) 東君,〈固形茶から散形茶へと変化する原因について〉,《茶から茶道へ》, 東京, 市井社, 1998, p.70.
2) 송해경,〈당·송대 병차와 단차 제다법 비교 연구Ⅰ〉,《중국인문과학》제65집, 2017.
송해경,〈당·송대 병차와 단차 제다법 비교 연구Ⅱ〉,《중국인문과학》제67집, 2017.
3) 吳覺農, ≪茶經述評≫, 北京, 農業出版社, 1988, p.59.
4) ≪茶經≫ <二之具> “芘莉:一曰籯子 一曰篣筤 以二小竹 長三尺 軀二尺五寸 柄五寸 以篾織方眼 如圃人土 羅 闊二尺 以列茶也”


당·송대 餠茶와 團茶 제다법 비교연구(IV)    - 495 - 

   비리는 대나무를 엮어서 만들었는데 길이가 3자이고 몸체는 2자 5치이며 나머지 5치는 손잡이에 해당하고 너비는 2자였다. 흙을 치는 체와 유사한 모양이었으며 틀에서 빼낸 병차를 혼자서 운반할 수 있도록 손잡이가 한쪽에 있었다. 즉 비리는 바람에 의한 병차의 건조 도구였으며 또한 동시에 운반 도구로 활용되었다. 이처럼 병차를 먼저 반 건조한 이유는 병차 겉면이 적절하게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병차에 구멍을 뚫으면 마르지 않은 병차가 손에 들러붙어 차 모양이 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뾰족한 송곳[棨]으로 구멍을 뚫은 후 대나무 막대기[撲]로 구멍을 확장할 때에도 병차 모양이 흐트러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병차의 속까지 완전히 건조되면 굵은 대나무 꼬챙이[撲]를 꿸 정도의 큰 구멍을 뚫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병차를 芘莉에서 반 건조시킨 후 꼬챙이[撲]로 구멍을 넓혀 굵은 대나무를 꿰어 배로에서 본격적인 건조를 하였던 것이다.

   배로(焙)는 땅을 깊이 2자 너비 2자 5치, 길이 1장으로 판다. 그 위에 낮은 담을 높이 2자로 쌓아 진흙을 바른다.5)
대꼬챙이(貫)는 대나무를 갈라서 길이 2자 5치로 하여 구멍 뚫은 차를 꿰어 건조시킨다.6)  선반(棚)잔(棧)이라고도 하며 나무로 배로 위에 구조를 세우고 높이 1자로 양 층을 만들어 차를 건조한다. 차가 반쯤 건조된 것은 아래 선반에 올리고 완전히 건조되면 위 선반에 올린다.7)  당대의 배로는 한꺼번에 많은 병차를 건조하기 위해 크기가 상당히 컸다. 깊이 2자(60㎝) 너비가 2자 5치(75㎝)에 길이가 1장(3m)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2자(60㎝) 높이로 담을 쌓고 진흙을 발라 모두 4자(120㎝) 깊이의 넓은 공간을 만들었다. 배로 위에 나무로 구조물을 세워 1자 간격으로 선반[棚]을 만들고, 대꼬챙이[貫]에 꿴 병차를 올렸다. 병차의
두께를 1.3㎝~1.5㎝로 가정했을 때 貫에 꿸 수 있는 병차는 약 50여 개 정도 된다.8)  이런 병차 한 꿰미는 무게가 상당하였음으로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도록 대나무로 만든 관[貫]은 상당히 굵고 튼튼했다. 또한 배로의 길이는 1장(3m)이나 됨으로 상당히 많은 양의 병차를 한꺼번에 건조할 수 있었다.

   두꺼운 병차를 속까지 충분히 건조시키기 위해 배로 내에서의 건조는 천천히 이루어져야 했으며, 배로는 은근한 따뜻함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배로는 열 손실을 막기 위해 땅을 2자 정도 파고 그 위에 숯을 피웠으며, 따뜻한 열기를 모을 수 있도록 2자의 담을 추가로 쌓아 120㎝ 깊이의 공간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5) ≪茶經≫ <二之具> “:鑿地深二尺 闊二尺五寸 長一丈 上作短牆 高二尺 泥之”
6) ≪茶經≫ <二之具> “:削竹為之 長二尺五寸 以貫茶焙之”
7) ≪茶經≫ <二之具> “:一曰棧 以木構於焙上 編木兩層 高一尺 以焙茶也 茶之半乾 昇下棚 全乾 昇上棚”
8) 중국에서 육우 ≪茶經≫을 중심으로 재현한 병차의 지름이 1.3㎝ 지름이 7.5㎝로 발표된 적이 있다고는 하나 병차의 크기나 두께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추정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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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皮日休(834?~883?)의 茶中雜詠≫ 10편 중 <茶焙>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 푸른 바위 아래를 뚫어               鑿彼碧岩下
깊이가 2자나 되네                      恰應深二尺
진흙으로 바위에 띠를 두르기 쉽고     泥易帶雲根
불길은 돌벽이 장애되지 않는다네      燒難礙石脉
처음부터 금병을 잘 말리면             初能燥金餠
점차 차의 진액이 말라감이 보인다네  漸見乾瓊液
구리와 삼림의 배로는                  九里共杉林
서로 마주보며 산기슭에 있네          相望在山側 9)


   피일휴陸龜蒙(?~881?)은 晩唐(9C 후~10C 초) 시기에 활동했던 시인이다.10)  만당 시기는 현실을 도피해 운둔하고, 자포자기적이었으며 말세적 도덕관에 빠져 현실과는 동떨어진 순수 유미주의적인 시풍이 존재하였었다.11)  피일휴가 육구몽에게 ≪茶中雜詠≫10편을 보내면서 쓴 竝序에는 “내가 처음 육우의 책을 얻고서 이로써 다 갖추었다 했으나 후고저산기 2편을 얻고 보니 그 안에 차사가 많음을 알았다.”12)는 구절이 있다. 이 글로 보아 육우 사후(733~804년)에도 비슷한 모양의 배로는 계속 사용되었으며, 때로는 흙 대신 바위를 2자 깊이로 뚫어 그 위에 진흙으로 띠를 둘러 열기를 보존하면서 열에 의해 병차의 진액이 건조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런 방식으로 차를 건조하는 배로가 九里杉林 등 산 근처에 많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숯불을 넣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 학자에 따라 가로, 세로 크기가 다양하다. 본 연구자의 견해로는 <그림 1>와 같이 세로로 열려 있을 때에 훨씬 열효율이 더 좋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9) 皮日休, <茶焙>, ≪茶中雜詠≫
10) 피일휴와 육구몽의 교유는 피일휴가 함통 10년(869) 소주자사 최박의 막하로 오면서부터 이루어졌고, 두 사람은 금란지교를 맺고 매일 시로써 서로 증답하여 글을 남겨 두 사람은 皮陸으로 불리웠다. 피륙의 창화시는 후에 ≪송릉집≫으로 엮어졌으며, 피일휴의 ≪茶中雜詠≫10편과 육구몽
≪茶具十詠≫이 실려있다.(김대영, <당대 피일휴·육구몽의 다시 연구>, 원광대 석사학위논문, 2013, pp.75.)
11) 류성준, ≪중국 만당시론≫, 서울, 푸른사상, 2003, pp.21~22.
12) 皮日休, ≪松陵集≫卷四, <茶中雜詠>幷序 “余始得季疵書 以爲備矣 後又獲其顧渚山記二篇 其中多茶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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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세로 입구형13) 

<그림 2> 가로 입구형14)
<그림 3>배로에서 차를 말리는 광경15)


   병차를 배로 선반에 올려 건조할 때 비리에서 반쯤 건조된 차는 온도가 높은 아래 선반에 먼저 올리고, 어느 정도 건조되면 윗 선반으로 옮겨 더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건조시켰다. 배로의 크기가 크면 많은 양의 병차를 효율적으로 건조하기 위해 <그림 3>과 같이 여러 사람이 貫을 들고 위치를 옮겨가며 고루 건조하였다.

   그러나 당대에 차를 건조하는 방법은 배로 건조만은 아니었다. ≪茶經≫ <五之煮> 설명에서 즉 병차를 가루내기 전, 굽는 炙茶 과정 설명에서 육우는 “만약 불로 건조한 것이 속까지 익으면 그치고, 햇볕에서 건조한 것은 부드러워지면 그친다."16)라는 설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불로 건조하는 火乾과 함께 햇볕에 건조하는 日乾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불로 건조한 것은 충분히 굽는 반면에 햇볕에 건조한 것은 ‘누긋누긋’하게 부드러워질 정도로 굽기를 마친다고 하였다. 이 설명으로 유추하면 시간이 걸리는 햇볕 건조는 병차 속까지 바싹 마르지만, 숯불에 의해 빠르게 건조하면 햇볕으로 건조한 병차보다 함수율이 높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13) 김진숙, ≪중국차문화 다경≫, 서울, 국학자료원, 2009, p.389. : 류건집, ≪茶經註解≫, 서울, 이른아침, 2010, p.104.
14) 吳覺農, ≪茶經述評≫, 北京, 農業出版社, 1988, p.59. : 布目潮渢, ≪茶經詳解≫, 京都, 淡交社, 2001, p.56.
15) 裘紀平 著,《茶經圖說》, 杭州, 浙江撮影出版社, 2003, p.47.
16) ≪茶經≫ <五之煮> “炙茶: 若火乾者 以其熟止, 日乾者 以柔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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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외에 야외에서 급히 차를 만들어 마시고자 할 때 생략 가능한 도구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육우 “한식을 전후하여 들에 있는 절이나 산속 다원에서 채다하여 찌고, 찧어서 불에 구웠다.”17)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짧은 시간(卽乾)에 차를 건조하는 다른 방법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분석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대 병차의 가장 일반적인 건조 방법은 틀에서 빼낸 병차를 비리에 널어 1차로 자연 건조 한 후, 병차 중앙에 구멍을 뚫고 관에 꿰어 배로에서 본격적인 2차 건조를 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 이외에 산 속 다원 등에서 차를 따서 바로 차를 만들어 마시고자 할 때는 즉석에서 건조하여 완성하는 ‘卽乾’ 방법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Ⅲ. 송대 단차 제다의 건조
   송대 다서 중에서 단차 제다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책은 조여려≪북원별록≫며, 채양≪다록≫, 황유 ≪품다요록≫, 휘종 ≪대관다론≫, 웅번 ≪선화북원공다록≫ 등에서는 단편적으로 다루고 있다.18) 그리고 건조 과정은 차의 저장방법과 함께 서술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채양≪다록≫에서는 건조 과정에 대한 설명은 없고, 저장에 관한 내용만 있다.

   단차의 건조는 연고차를 삿자리(笪)에 널어 말리는 것부터 시작된다.
차는 본래 차싹과 잎을 틀(棬模)에 넣어 만든 것으로 암틀(棬)에서 빼낸 차를 삿자리(笪)에 널어놓고 (그 후) 배로에서 건조한다. 19)     ㅡ ≪품다요록≫

   그 해에 처음 나온 차싹을 즉시 배화 건조할 때는 물기를 제거하고 자연풍으로 습기를 제거한다.20)   ≪대관다론≫

   무릇 차는 硏盆에서 처음 꺼내어 균일하도록 주무르고, 매끄럽게 치댄 후에 (圈)에 넣어 덩어리(銙)를 만들고 삿자리(笪)에 널었다가 過黃을 한다.21)    ≪북원별록≫


17) ≪茶經≫ <九之略> “禁火之時 於野寺山園 叢手而掇 乃蒸乃舂乃炙 以火乾之”
18) 송대 30부의 다서에서 북원의 공차였던 단차와 관련된 책이 16부나 된다.(沈冬梅, ≪宋代茶文化, 學海出版, 2000, p.300.)
19) 黃儒, ≪品茶要錄≫ <傷焙> “夫茶本以芽葉之物就之棬模 既出笪焙之”
20) 徽宗, ≪大觀茶論≫ <藏焙> “要當新芽初生 卽焙以去水陸風濕之氣
21) 趙汝礪, ≪北苑別錄≫ <造茶> “凡茶之初出硏盆 盪之欲其勻 揉之欲其膩 然後入圈製銙 隨笪過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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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틀에서 빼낸 연고차는 아직 수분이 상당히 남아있고, 단차 표면에는 아주 세밀한 문양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단차 건조에는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하였다. 대나무로 만든 삿자리에 단차를 널어 바람이 부는 곳에 두면 단차 표면에 있는 물기가 마르게 된다. 어느 정도 단차 표면이 마르면 배루에 넣어 본격적인 건조를 하였다. 단차의 건조는 병차와 마찬가지로 속까지 오랜 시간 잘 건조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용봉단차와 같이 정교한 문양이 있는 차는 문양이 훼손되지 않으면서 겉과 속이 균일하게 건조되도록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으며, 건조의 성패는 불조절에 좌우되었다.

   불을 피워 불기운이 두루 통하면 재를 덮어 배로 속에 뜨거운 화기를 가둔다.
다농들은 實炭 사용을 좋아하지 않아 冷火라고 한다. 새로 만든 차떡의 습기를 신속히 건조해 팔고자 하는 판매상들은 불을 사용하므로 항상 연기와 불꽃이 많아 차를 살피는 것을 소홀히 하여 차떡에 연기가 훈습되는 고로 시험할 때(투차)에 색이 혼탁한 홍색을 띠고, 맛은 탄내가 나는 것이 (잘못된) 건조의 병폐다.22)

   여러 번 건조하면 차 표면이 건조해져 향이 줄어들고, 건조할 때 실수하면 여러가지 잡색이 나타나 맛이 흩어진다.23)
배로에서의 건조는 여러 번 반복해서 이루어지므로 불의 화력 조절이 매우 중요하였다. 배로에 사용되었던 연료는 주로 숯이었다. 그러나 實炭은 화력이 세기 때문에 숯불 위에 재를 덮어 온도를 조절하였다. 이를 다농들은 冷火라고 하였다. 냉화는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건조할 때 사용하는 불을 말한다. 그러나 “학원이나 사계지방에서는 상인들이 입도선매하여 차 가격을 미리 지불하기도 하고, 삿자리에 겨우 널어 둔 차를 경쟁적으로 값을 흥정하기도 한다.”24)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단차의 수요는 매우 많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상인들은 빨리 단차를 건조하고자 연기가 나고 불꽃이 있는 땔감을 사용하기도 하여 차떡에 연기가 훈습되기도 하였다. 반면에 다농들은 낮은 온도에서 은근하게 오랫동안 건조하는 냉화를 택했다. 그러나 여러 날 반복되는 배화건조는 불이 약하면 발효가 일어나 탕색이 홍색을 띠고, 불이 강하면 단차 겉 표면만 마르면서 탄내가 나고 얼룩이 생기며 문양이 뒤틀릴 수 있으므로 불 조절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22) 黃儒, ≪品茶要錄≫ <傷焙> “用火務令通徹 即以灰覆之 虛其中以熱火氣 然茶民不喜用實炭 號爲冷火 以茶餅新濕 欲速幹以見售 故用火常帶煙焰 煙焰既多 稍失看候 以故熏損茶餅 試時其色昏紅 氣味帶焦者 傷焙之病也”
23) 徽宗, ≪大觀茶論≫ <藏焙> “數焙則首面乾而香減 失焙則雜色剝而味散”
24) 黃儒, ≪品茶要錄≫ <辨壑源 沙溪> “售者已擔簦挈橐於其門 或先期而散留金錢 或茶纔人笪而爭酬所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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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관다론≫에는 단차의 건조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 해에 처음 나온 차싹으로 만든 차를 즉시 배화 건조할 때는 물기를 제거하고 자연 바람으로 습기를 제거한다. 건조는 熟火를 사용하여 배로(爐) 안에 놓는 데, 재로 7부를 묻고 3부의 불을 드러나게 한다. 가볍게 재를 덮어 한참 지난 다음 焙簍를 (배로) 위에 놓는다. 배루 안이 따뜻해진 후에 차를 그 안에 널어놓는다. 1角의 차를 펼쳐서 말린다. 바로 밀폐해서는 안 되고, 불기운이 빠르게 통한 후에 뚜껑을 덮는다. 불의 많고 적음은 건조하는 차의 크고 작음과 많고 적음에 따라 달라지는데 손을 배로 안에 넣어 보아 탐색한다. 불기운이 세서 사람이 손을 가까이 대지 못할 정도가 좋은 것이다. 때때로 손으로 차를 만져 보았을 때 뜨거워도 해롭지 않으니 화력이 차 속에까지 두루 통한 것이다.25)

   단차의 건조 순서①삿자리에서 자연풍으로 습기를 제거한다. ②熟火에 재를 덮고 焙簍를 얹는다. ③배루가 따뜻해지면 단차를 펼쳐서 널어 놓는다. ④불기운이 배루 안에 퍼지면 뚜껑을 덮는다.

<그림 4> 복건성 무이암차 홍배기26)


   ≪대관다론≫에서도 단차를 말리는 불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熟火는 숯이 빨갛게 달아 연기가 나지 않는 상태로 ≪품다요록≫實炭에 해당된다. 배로에 숙화를 담아 재로 7부를 덮고 3부는 숯불이 드러나게 하였다가 얇게 재를 덮어 한참을 둔 후에 배루를 얹어 놓고 배루 안이 따뜻해지면 1角27)의 단차를 널었다. 배루에 대한 정확한 언급은 없지만 <그림 4>28)와 같이 복건성 무이암차 건조에 사용되는 현재의 홍배기를 통해 어느 정도 그 모양을 유추할 수 있다.


25) 徽宗, ≪大觀茶論≫ <藏焙> “要當新芽初生 卽焙以去水陸風濕之氣 .焙用熟火置爐中 以靜灰擁合七分 露火三分 亦以輕灰糝覆 良久卽置焙簍上 而逼散焙中潤氣 然後列茶于其中 盡展角焙之 未可蒙蔽 候火速徹覆之 火之多少 以焙之大小增減 探手中爐 火氣雖熱 而不至逼人手者爲良 時以手挼茶 體雖甚熱而無害 欲其火力通徹茶體耳”
26) 陳德畵, <武夷岩茶的 烘焙法>, ≪茶藝≫ No.30, 五行圖書出版有限公司, 2002, p.50.
27) 각은 단차를 담는 자루를 뜻하며 일반적으로 1근의 단차 한 자루에 담는데 이를 1각이라고 한다.(짱유화, ≪點茶學≫, 서울, 보이세계, 2008,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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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이암차의 홍배기는 아래위가 뚫려 있고 잘록한 가운데 부분에 칸막이 체가 있어 많은 양을 건조할 수 없다. 또한 배루의 온도를 높이지 않고 처음부터 차를 넣게 되면 공기 중의 미생물이 차에서 번식하여 변질되기 쉽다. 그러므로 차의 크기와 양에 따라 배루의 크기나 온도는 달라야 한다. 또한 적절한 온도는 손을 집어넣지 못할 정도로 뜨거워야 단차 속에 있는 수분이 증발하여 건조가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차를 숙성시키거나 저장할 때 사용하는 배로는 뚜껑이 있어 향기를 가두었지만 건조에 사용하는 배루는 처음에는 뚜껑을 덮지 않았다가 어느 정도 수분이 날아간 뒤에 뚜껑을 덮었다.

   그러나 틀에서 빼낸 연고차는 수분도 많았지만, 단차 표면에 섬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어 건조에 특별한 주의를 필요로 하였다. 단차의 제다 과정을 가장 세밀하게 서술하고 있 조여려≪북원별록≫에는 過黃이라는 건조 과정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차의 과황은 처음에는 뜨거운 불로 건조하고 다음에는 끓는 물을 통과시켜 센불에서 건조한다. 이처럼 세 번을 반복한 후 하룻밤을 지나면 1화(一火)이다. 다음煙焙의 불로 건조하는데, 뜨겁지 않아야 한다. 뜨거우면 차 표면이 부풀어 오르고 색이 어두워진다. 또 연기가 나지 않아야 한다. 연기가 나면 향이 다하고 탄맛이 나므로 단지 따끈한 정도가 좋다. 무릇 불에 쬐는 횟수의 많고 적음은 모두 단차의 두께를 살펴 두꺼운 것은 10화에서 15화, 얇은 것은 8화에서 6화를 한다. 불 쬐는 횟수가 충족되면 (마지막으로) 끓는 물을 통과시킨 후 밀실에 넣고 급히 부채질한다. 그러면 자연스러운 빛깔이 난다.29)

   단차의 과황은 기존에 있던 건조와는 전혀 다른 건조 방법이다. 과황의 순서는 3단계다. ①1火 단계에서는 뜨거운 불[烈火]에 쪼이고 난 후, 끓는 물을 통과시키고 세찬 불에서 건조하는 과정[過沸湯爁之]하룻 밤에 세 번 반복한다. ②溫溫한 온도의 烟焙에서 단차의 두께에 따라 불에 쬐는 기간이 달랐는데, 얇은 것은 6일에서 두꺼운 것은 15일까지 건조가 이루어졌다. 공차로 진공이 되었던 북원 단차는 “경칩 이전에 만들기 시작하여 10일 만에 완성하여 말을 달려 中春이 되기 전에 서울 개봉에 도착하였다.”30)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촉박하게 단차를 만들어야 했음을 알 수 있다. 불 쬐는 날수가 충족되어 건조가 충분히 이루어지면 ③끓는 물에 통과시켜[過湯] 원하는 색깔이 나오면 밀실에 넣고 급히 부채질하여 겉의 수분을 증발시켜 자연스러운 광택이 나오게 되면 단차가 완성된다.

28) 陳德畵, <武夷岩茶的 烘焙法>, ≪茶藝≫ No.30, 五行圖書出版有限公司, 2002, p.50.
29) 趙汝礪, ≪北苑別錄≫ <過黃> “茶之過黄 初入烈火焙之 次過沸湯爁之 凡如是者三 而后宿一火 至翌日 遂過烟焙之火 不欲烈 烈則面炮而色黑 又不欲烟 烟則香盡而味焦 但取其温温而已 凡火之数多寡 皆視其銙之厚薄 銙之厚者 有十火至于十五火 銙之薄者 亦八火至於六火 火数既足 然后過湯上出色 出色之後 當置之密室 急以扇扇之 則色澤自然光瑩矣”
30) 熊蕃, ≪宣和北苑貢茶錄≫ “驚蟄前興役 浹日內成 飛騎疾馳 不出中春 已至京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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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내용 이유

1火
•뜨거운 烈火로 건조
•끓는 물에 통과시키고 세찬 불로 건조 3회 반복
•烈火 건조는 물에 단차가 풀어지지 않도록 함
•단차의 겉과 속이 균일하게 건조할 수 있도록 함

2火~15火
•烟焙에서 정해진 火數에 따라 건조
•뜨겁지 않고 온온한 정도로 연기가 나지 않아야 함
•속까지 천천히 충분히 건조 마무리
•끓는 물에 통과시킨 후 밀실에서 부채질하여 건조
•출색하여 윤기가 나게 함


   단차를 끓는 물에 넣기 전에 세찬 烈火에 쪼이는 이유는 삿자리에서 어느 정도 마르기는 했지만, 자칫 표면이 덜 마른 차를 물에 넣으면 풀어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끓는 물을 통과한 후 건조하는 과정을 3번 반복하는 ‘過沸湯爁之’의 과정을 거친다. 그 이유는 단차의 겉과 속이 균일하게 건조되어야 단차 표면이 편평해서 문양이 흐트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병차와 단차의 건조 차이점 비교에서 논의하겠다. 하루에 ‘過沸湯爁之’를 3번 반복한 이후에는 정해진 날수에 맞춰 烟焙에서 건조한다. 연배에서 건조를 마친 단차는 마지막으로 끓는 물에 통과시켜 ‘過湯’을 하고, 밀실에서 부채질을 하여 건조시키면 단차 표면에 자연스런 광택이 난다. 차 속에 들어있는 펙틴은 끈적끈적한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건조되면 광택이 난다. 그러므로 단차를 끓는 물에 통과시키는 과정은 펙틴을 겉으로 끌어내는 과정이 아닌가 추측된다. 


過黃의 순서를 정리하면 <표 2>와 같다.

<표 2> 過黃의 순서


   이상에서 단차 제다의 건조 과정을 상세히 분석하였다. 단차의 건조는 일반 고형차의 건조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북원별록≫에서는 끓는 물에 통과시켰다가 건조하는 과황과정이 추가되어 있다. 고형차는 겉과 속이 균일하게 건조되지 않으면 표면에 주름이 생기거나 울퉁불퉁하게 된다. 그러므로 표면에 섬세한 문양이 있는 단차는 문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겉면에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끓는 물에 통과시켰으며, 단차를 다시 건조한 후 광택을 내었다. 이러한 매우 정교한 건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용봉단차는 단순한 마실거리가 아니라 예술품의 경지에 이른 차의 극치라는 평을 현재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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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병차와 단차 건조의 차이점 비교


   송대의 단차 제다당대의 병차 제다를 계승하였지만 여러 면에서 큰 변화를 시도하였다. 외형적인 면에서도 크기, 단단한 정도, 섬세한 문양 등 공차였던 단차는 화려함과 정교함이 극에 달하였다. 병차와 단차에서 건조는 오랫동안 차를 저장하고 보관하기 위한 목적은 같았지만 건조 도구, 불의 사용법 그리고 구체적인 건조 방법 등에서는 여러 가지 큰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 爁   : 불 번질 남(람)

   첫째, 단차는 본격적인 건조에 앞서 센 불에 쬔 후 “끓는 물에 통과시켜 건조하는(過沸湯爁之)” 특이한 과정을 거쳤다.
조여려≪북원별록≫에는 용봉무늬가 있는 단차의 건조는 과황이라는 매우 복잡한 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건조 첫째 날에 삿자리에서 약간 건조된 단차를 센불에 쪼인 후 끓는 물에 통과시켰다. 그 후에도 끓는 물에 통과시켰다가 건조하기를 3번이나 반복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기존의 송대 다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내용이다.
   그러므로 ‘過沸湯爁之’에 대한 해석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류건집 “일부에서는 끓는 물에 넣어서 데친다거나 끓는 물속을 통과시킨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선뜻 수긍하기 힘들다.…그래서 차떡의 표면을 좋게 하고 색을 살리기 위해 끓는 물 위를 통과시킨다고 보려 한다.”31)고 하였다. 沈冬梅 역시 ≪대관다론≫에서 “여러 번 건조하면 차 표면이 건조해져 향이 줄어들고, 건조할 때 실수하면 여러 가지 잡색이 나타나 맛이 흩어진다(數焙則首面乾而香減 失焙則雜色剝而味散)”를 이유로 들었다.32) 


   물론 지나친 건조는 향기가 줄어들 수 있지만 ‘過沸湯爁之’의 정당한 해석은 아니라고 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단차 속까지 완전한 건조가 이루어지게 하려면 단차는 약한 불에서 서서히 건조하여야 한다. 그러나 공차였던 단차는 10일 만에 완성하여야 中春 이전에 황제가 있는 개봉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단차는 매우 빨리 완성해야만 했다. 그러나 센 불을 사용하여 속까지 빨리 건조시키면 자칫 겉은 타거나 지나치게 건조되어 부서질 수가 있다. 그래서 단차의 겉과 속을 비슷한 정도와 속도로 건조하기 위해 불이 닿는 단차 표면에 추가로 습기를 공급하기 위해 끓는 물에 넣었다가 뺀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표면에 습기(이 경우 물기)가 있는 단차를 다시 불로 건조하여 겉과 속이 균일하게 건조되면 표면이 편평하게 되고, 섬세한 문양도 흐트러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


31) 류건집, ≪宋代茶書의 註解≫下, 이른아침, 2012, p.62.
32) 沈冬梅, ≪宋代茶文化≫, 學海出版, 2000,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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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당대의 병차배로(焙)에서 건조하였지만 송대 단차焙簍나 烟焙에서 건조하였다.
당대의 배로는 땅을 파고 땅 위에 벽돌로 담을 쌓아 깊이가 4자(120㎝), 너비가 2자 5치(75㎝), 길이가 1장(3m)이나 되는 매우 큰 규모였다. 즉 당대의 배로는 땅을 파고, 벽돌을 쌓아 열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였으며 활용 공간도 넓었다. 그래서 길이가 2자 5치(75㎝)가 되는 貫에 병차를 꿰어서 선반에 나란히 펼쳐서 널게 되면 한꺼번에 많은 양의 병차 건조가 가능하였다.
   그러나 송대의 단차 건조 도구는 당대에 육우가 병차를 건조했던 배로와는 상당히 달랐다. 휘종≪대관다론≫ 에는 잿불이 있는 焙簍가 등장한다. 하나의 배루에는 많은 양의 단차를 말리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왜냐하면 단차는 표면에 섬세한 문양이 있어 병차와 같이 구멍을 뚫을 수가 없고, 구멍이 없기 때문에 단차를 여러 개 대나무 꼬챙이에 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차는 홍배기와 같은 배루에 ‘펼쳐서 널어놓고’ 건조하여야만 했다. ≪대관다론≫에서 1角(약 1근)의 차를 배루에 올린다고 했다. 이것은 배로에 넣는 병차의 양에 비교할 수도 없이 적은 양이다. 그러므로 많은 양의 단차를 건조하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배루가 필요했을 것이다.


   셋째, 병차와 단차를 건조할 때 사용한 불의 온도에 큰 차이가 있다.
병차를 건조했던 배로에서는 불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건조할 때 사용했던 연료는 숯(實炭)에 충분히 불이 붙은 熟火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즉 숯의 온도가 높았을 것이다. 또한 배로의 크기가 매우 컸기 때문에 따뜻한 열기가 흩어지지 않도록 보온성을 높이기 위해 땅을 파거나 산속의 암석을 파서 배로를 설치하였다. 그래서 병차의 경우에는 숯의 양으로 온도를 조절하였을 것이며, 병차가 어느 정도 건조되면 온도가 높은 아래 선반에서 위 선반으로 옮겨 가면서 건조하였다. 상당히 거친 방법으로 건조온도를 조절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차 건조에는 온도 조절에 매우 세심한 신경을 썼다. 배루에 뜨거운 熟火를 담았지만 숯의 7부는 재를 두껍게 덮고, 3부는 가볍게 재를 덮는 방법으로 온도를 세심하게 조절하였다. 이러한 불을 ≪품다요록≫에서는 冷火라고 하였다. 배루의 정확한 크기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그러나 단차제다에 사용되었던 배루가 오늘 날 복건성 무이암차 건조에 사용하는 홍배기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된다면 배루의 크기는 배로에 비해 상당히 작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현재 사용되는 홍배기도 크기는 다양하다. 그러나 단차병차에 비해 크기가 훨씬 작고, 단차는 시간상, 재료상의 한계 때문에 대량 생산을 할 수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배루의 크기는 배로의 크기 즉 깊이가 4자(120㎝), 너비가 2자 5치(75㎝), 길이가 1장(3m) 보다는 훨씬 작았을 것으로 유추된다. 그러므로 배루에 널어놓은 단차와 잿불 사이의 거리는 가까울 수밖에 없고, 그래서 숙화에 재를 덮는 방법으
로 온도를 조절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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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째, 건조하는 기간과 횟수에 큰 차이가 있다.
병차의 건조 채반(芘莉)에 널어 말리는 攤晾이라는 1차 반건조 과정이 있고, 그 후 반 말린 병차에 구멍을 뚫고 관에 꿰어 배로에서 한번 말리는 것이 전부였다. 여기에 비 단차말리는 과정이 3단계이고 불을 쬐이는 횟수도 매우 많다. 우선 1火 단계에서 뜨거운 불(烈火)에 쪼이고, 끓는 물에 통과시킨 후 세찬 불에서 건조하는 과정(過沸湯爁之)을 하룻 밤에 세 번 반복하였다. 그러나 단차제다는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친 후에도 다시 단차의 두께에 따라 얇은 것은 6일에서 두꺼운 것은 15일까지 건조하였다. 그리고 불에 쪼이는 횟수도 두꺼운 것은 10화에서 15화, 얇은 것은 8화에서 6화를 하였다. 배로에서 한번 건조하여 불과 하루 이틀만에 제다하는 병차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단차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다섯째, 병차배로에서 건조하면 완성되었지만 단차 過湯과 부채질을 하는 추가 과이 있었다.
단차의 제다에서 불을 쬐는 날 수(6~15일)가 충족되고 충분히 건조가 이루어지면 단차를 다시 끓는 물에 통과시켜[過湯] 발색을 시켰다. 그리고 발색된 정도가 원하는 수준으로 나오면 단차를 밀실에 넣고 급히 부채질을 하여 겉의 수분을 증발시켜 자연스러운 광택이 나오게 함으로써 단차를 완성하였다. 이런 過湯과 부채질 과정은 병차의 제다에는 전혀 없는 과정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우선 병차의 경우에는 차고가 그대로 남아있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병차의 색은 진한 갈색 빛으로 변한다. 그러나 단차의 경우에는 제다 과정에서 차고를 제거하기 때문에 (단차의 茶膏 제거과정은 본 논문의 범위 밖임으로 논의하지 않았음) 차는 연푸른색을 띄거나 차고를 거의 제거하면 하얀색의 단차 된다. 그리고 단차는 입자가 매우 고와 표면에 섬세한 문양을 새겼었다. 그렇기 때문에 단차는 미묘한 색의 변화를 매우 쉽게 느낄 수 있고, 또한 당시 유행이었던 투차(投茶)에서
차가 구름처럼 피어오른 모양과 색을 매우 중시여겼다. 이런 여러 이유에서 단차의 경우에는 차의 색이 매우 중요하였고, 당연히 자연스런 발색과 윤기를 내는 過湯과 부채질 과정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Ⅴ. 결론
   첫째, 병차 대꼬챙이에 꿰어 배로에서 많은 양을 건조하였으나, 단차 배루에 펼쳐 널어 건조하는 방식이었고, 건조하는 양도 적었다. 당대의 배로는 너비 2자 5치, 길이가 1장, 깊이가 4자나 되는 매우 큰 크기였다. 또한 배로에는 2개의 선반이 있어 반 건조된 병차를 대꼬챙이(貫)에 꿰어 아래 선반에 놓았다가 건조가 일정 정도 이루어지면 온도가 낮은 윗 선반으로 옮겨가며 건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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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한꺼번에 많은 양의 병차를 건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배루단차의 상대적인 크기, 제다에 필요한 시간과 재료 양의 제약 때문에 크기가 작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관다론≫에서도 하나의 배루1각(약 600그램) 단차를 널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단차의 건조 양은 병차에 비해 훨씬 적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둘째, 병차와 단차를 건조할 때 사용되었던 불의 온도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병차의 건조에는 배로가 크고 한꺼번에 많은 양의 차를 건조했기 때문에 뜨거운 熟火를 그대로 사용하여야 만 공간이 넓은 배로 전체를 골고루 덥힐 수 있었다. 그러나 단차에 사용되었배루는 배로에 비해 크기가 훨씬 작아 숯불과 단차 사이의 거리가 짧기 때문에 숙화에 재를 일부 덮어 온도를 낮춘 冷火를 사용하였다. 이런한 냉화에서 천천히 오랫동안 건조하여야만 품질 좋은 단차를 얻을 수 있었다.

   셋째, 건조하는 기간과 횟수에 큰 차이가 있었다. 병차의 건조는 채반[芘莉]에 널어 말리는 1차 반 건조하는 과정배로에서 다시 완전히 건조하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단차1火 단계에서 뜨거운 불[烈火]에 쪼이고, 끓는 물에 통과시킨 후 세찬 불에서 건조하는 과정[過沸湯爁之]을 하룻 밤에 세 번 반복하였다. 그 후에도 단차의 두께에 따라 얇은 것은 6일에서 두꺼운 것은 15일까지 건조하였고, 불에 쪼이는 횟수도 두꺼운 것은 10화에서 15화, 얇은 것은 8화에서 6화를 하였다. 하루 이틀 짧은 기간 안에 배로에서 건조하여 완성하는 병차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단차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하였다.

  넷째, 단차는 배루에서 건조 이후에도 過湯과 부채질을 하는 추가 과정이 있었다. 단차는 불을 쬐는 날 수(6~15일)가 충족되고 건조도 충분히 이루어지면 다시 끓는 물에 단차를 통과시켜[過湯] 발색 시키고, 그 후 단차를 밀실에 넣고 급히 부채질을 하여 자연스러운 광택이 나오는 과정이 추가되었다. 이는 병차의 경우에는 차고가 남아있어 병차의 색진한 갈색 빛이지만 단차는 차고를 제거하였기 때문에 연푸른색 또는 하얀색을 띄게 된다. 그리고 단차의 표면에는 섬세한 문양을 새겼었다. 그렇기 때문에 단차의 경우에는 차의 색이 매우 중요하였고, 자연스런 발색과 윤기를 내는 過湯과 부채질 과정이 필요했었던 것이다.

  다섯째, ≪북원별록≫過黃에서 ‘過沸湯爁之’하는 이유를 겉과 속이 균일하게 건조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명확히 밝혔다. 단차는 고형차이므로 겉과 속이 균일하게 건조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단차 표면이 뒤틀리거나 울퉁불퉁해진다. 그렇게 되면 단차 표면 문양이 흐트러지고, 단차 품질이 크게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끓는 물에 단차를 통과시켜 표면에 수분을 보충해 가면서 건조시켜야 차의 겉과 속을 균일하게 건조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즉 빠른 건조를 위해 센 불을 사용하면 단차 표면이 지나치게 건조되어 주름이 지거나 타게 되어 차의 품질을 해치게 되고, 단차 표면의 섬세한 문양도 유지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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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Song and Tang dynasties are very important periods in Chinese history. Many of important changes in culture, economics and political had been occurred, and it is same in tea culture. Tea was popular in Tang dynasty, but still it was the culture of selected few of hugh ranking society. In Song dynasty, however, tea became the beverages that everybody’s seeking for. This paper tries to analyze the differences in tea drying methods between cake tea and dancha especially on the type of fire, temperature, period required, firing times and the reasons of fan etc. Also try to identify the reasons of inserting the semi-finished dancha into the boiling water.


【Key words】DanCha, Cake tea, Drying methods, GwaHwang, Tea manufacturing


접수일자 2018.07.10 심사완료일 2018. 07.29 게재확정일 2018. 08.02




                                            당·송대 餠茶와 團茶 제다법 비교연구(IV)- 건조를... 2018.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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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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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陸游茶詩에 나타난 花果茶 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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