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미도중 曳尾塗中 / 고사성어대사전 外

2019. 4. 10. 01:18잡주머니



고사성어대사 

예미도중

다른 표기 언어 曳尾塗中 , 曳尾涂中 , yè wěi tú zhōng



요약 테이블
풀이 끌 예 · 꼬리 미 · 진흙 도 · 가운데 중

   꼬리를 진흙 속에 묻고 끌다. 부귀영화를 누리며 속박을 당하는 것보다는 가난하더라도 자기 뜻대로 자유롭게 사는 것이 좋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출전

   「장자(莊子)복수(濮水)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초왕(楚王)이 대부 두 사람을 보내 장자에게 관직을 맡기고 싶다는 뜻을 전하게 했다. 장자는 낚싯대를 쥔 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제가 듣기에 초나라에는 신령스런 거북이 있어서 죽은 지 이미 3천 년이나 되었는데, 왕께서는 이 거북을 헝겊에 싸서 상자에 넣고 묘당(廟堂)의 위에 모셔 놓았다고 하더군요. 이 거북은 죽어서 뼈를 남긴 채 귀한 대접을 받기를 원했을까요,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바랐을까요?” 두 대부가 말했다. “그거야 차라리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서 돌아가십시오. 나도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고 싶으니까요.”(莊子釣於濮水, 楚王使大夫二人往先焉, 曰, 願以境內累矣. 莊子持竿不顧曰, 吾聞楚有神龜, 死已三千歲矣. 王以巾笥而藏之廟堂之上. 此龜者, 寧其死爲留骨而貴乎. 寧其生而曳尾於塗中乎. 二大夫曰, 寧生而曳尾塗中. 莊子曰, 往矣. 吾將曳尾於塗中.)」

   이 이야기는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나온다.

용례

   자유분방한 삶을 동경했던 한 친구는 조직 생활이 도저히 생리에 맞지 않는다며 차라리 ‘예미도중’하며 살겠다고 사직을 하고 산골로 들어가 버렸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김성일 집필자 소개

   김성일(金聖日)은 문학박사. 전라북도 도청에서 국제정책전문위원으로서 중국과의 국제교류 업무를 담당하는 한편, 단국대학교, 전남대학교,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백석대학교 등에서 중국어문학을 가르쳤다..펼쳐보기

출처

고사성어대사전
고사성어대사전 | 저자 김성일 | cp명시대의창 전체항목 도서 소개

   선인의 경험이 깃들어 있고, 지혜와 지식의 보고인 고사성어. 우리 생활과 밀접한 일상의 언어이기도 하다. 고사성어에 얽힌 역사적 사실과 문화적 배경을 철저한 조사와 고증으로 소개한다. 접기



ㅡ 다음 백과






예미도중(曳尾塗中)과 자유| 자유게시판

조회 9 |추천 0 | 2008.01.16. 14:52



      ♣ 예미도중(曳尾塗中)과 자유 ♣ 

       예미도중(曳尾塗中)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에 있는 말씀으로

      "꼬리를 진흙 속에 끌고 다닌다. "

      즉, 부귀를 누리면서 구속된 생활을 하는 것 보다는 비록 가난하더라도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는 것이 낫다는 뜻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초(楚)나라 왕이 어느날 사람을 보내어 낚시를 즐기고 있는 장자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장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합니다.  

       

         "초나라에는 3천년 묵다 죽은 거북을 계단으로 싼 상자 안에 넣어 묘당(廟堂)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고 듣고 있소.  만약 거북이가 살아 있다면 생전에 꼬리를 진흙 속에라도 넣고 끌고 다니기를 바라겠소(曳尾塗中)? 아니면 지금처럼 죽어서 소중히 간직되기를 바라겠소?"  

       

      "물론 진흙 속에서라도 꼬리를 넣고 끌고 다니길 바랐겠지요."  

       

      이렇게 대신이 대답하자 장자가 다시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얘기가 된 것 같소.

      나 역시 진흙 속에 꼬리를 넣고 다니는 길을 택하겠소"

       

       

      자유

       

         돈, 권력, 명예를 다 함께 움켜쥐고 살아갈 수 있는 삶이라면 이는 분명 축복받은 삶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돈, 명예, 권력 보다도 더 소중한 삶은 역시 그 어떤 것에도 구속 또는 속박 당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돈을 벌고 그 돈의 힘으로 명예를 얻게 되면 욕심 많은 사람들은 권력까지 넘보기 마련이지만...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말씀처럼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까지 모두 함께 향유하기

      위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엄청난 노력과 고통도 함께 지불해야 함도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욕심쟁이들은 흔히 돈을 벌어 그 돈의 힘으로 권력을 취하고 또 그 권력으로 명예까지 넘보다가 망신을 당하거나 먼저 명예를 뿌리고 그 후광으로 권력을 탐하다가 심한 마음 고생 끝에 건강과 명예마저 잃고 야사에나마 제 이름 석자를 기필코 올려 놓고야 마는 것 같습니다.

       

         즉, 아직도 많은 경제인, 언론인, 학자 그리고 연예인 등 이미 제 이름을 공인이나 사회적 리더의 반열에 올려 놓은 사람들까지 그 험한 길을 마다 않고 화려한 불빛을 찾아 몸을 날리는 부나비처럼 권력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자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미 자기자리에서 성공하였다는 자타의 인정을 받고 있음에도 장자가 이미 수 천년에 행한 "예미도중"이라는 말씀 정도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말입니다.

       

        구속과 속박으로부터 靈魂과 肉身의 자유로움, 그 참가치보다는 외양의 화려함을 쫓는 인간들의 심리...

      어쩜 인간은 영원히 이 권욕의 포로라는 멍애를 스스로 쓰고 구속하며 속박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슬픈 동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영화 빠삐용에서는 과도한 죄를 뒤집어 쓴 주인공이 평생을 사회로부터 구속 격리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유를 그리며 끝내 바다로 뛰어들어 죽음을 택함으로써 삶에 있어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주고 있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즉, 제 아무리 부와 명예 또 권력까지 다 손에 쥔들 그것을 지탱해 주는 영혼의 참된 자유가 부제한 삶이거나 빠삐용처럼 심신이 속박된 한정된 외로운 환경에 처한 삶이라면 이는 너무나 가엾고 슬픈 삶일 거라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해서 명작 영화 "빠삐용"의 주제곡  "Free As The Wind(바람처럼 자유롭게)"를 모셔다가 오늘의 화두 '예미도중'이 내포하고 있는 "자유"와 함께 되새겨 보고자 준비해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벌써 1월 16일~

      이제 새해 1월도 그 절반을 지나쳐 가고 있습니다.

      중년에서 바라보는 세월이란 철로변에서 바라보는 고속열차의 진행만큼 그 빠름에 넋을 빼았길 때가 자꾸만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고속열차같은 빠른 세월 안에서 맞이하는 새시대의 포효하는 함성들과 기 기세에 주눅들어 아직도 조율조차 못하고 탁음만을 거듭내는 아마추어 악단실을 곁에 둔 사람들은 지성과 작은 양심마저 기를 접은 채 그 소음과 몰아닥친 혹한에 불안해 하기도 하구요.

       

         성전에서 말해지기만 하는 사랑~

      또 도금된 자비에서 울리는 둔탁해진 소리도 사람들의 기죽은 지성과 양심을 깨우지 못하고 예미도중의 자유로움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제단과 묘당에서만 그 참뜻이 암송되어 진다는 생각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비록 급락한 영하의 날씨에서도 예미도중의 삶을 추구하는 마음마다의 자유는 도도히 흐르기에  우리에게 내일은 희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해서 오늘도 내일도 그 자유로움이 님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지속되기를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

       



       

      "Free As The Wind(바람처럼 자유롭게)

       

      Yesterday's world is a dream like a river

      지난날은 강물처럼 흘러 옛 꿈이 되고 말았습니다.

      that runs through my mind made of fields

      내 마음 자락에 아직도 남아 있는

      and the white pebbled stream

      넓은 들판과 하얀 조약돌이 깔려 있던 시냇가,

      that I knew as a child.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가득 찬 그 곳

       

      Butterfly wings in the sun

      창공을 날고 있는 나비들의 날갯짓을 통해

      taught me all that I needed to see,

      나는 내가 보고 싶었던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for they sang, sang to my heart,

      내 마음을 향해 노래 부르는 듯한 나비들의 소리가

      들립니다.

      "Oh, look at me. Oh, Look at me.

      "이봐요, 이봐요, 날 좀 바라보세요."

       

      "Free as the wind, free as the wind,

      "바람처럼 자유롭게, 저 바람처럼 자유롭게

      that is the way you should be."

      당신은 그렇게 되어야 해요."

       

      Love was the dream of my life

      사랑은 내 인생의 꿈이었어요.

      and I gave it the best I know how.

      사랑이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것이라 생각했지요.

      So it always brings tears to my eyes

      이제 와 그 사랑의 노래를 부르노라니

      when I sing all of it now.

      속절없이 눈물만 흐르는군요.

      Gone like the butterfly sings

      노래하는 나비와도 같았던 내 유년의 한때는

      and the boy that I once used to be.

      다시는 되돌릴 수 없겠지요.

       

      But my heart still hears

      하지만 내 마음 속엔 아직도

      the voice telling me,

      속삭이는 한 소리가 있어요.

      "Look, look and you'll see."

      "바라보세요... 그러면 볼 수 있을 거예요."

       

      There's no regret

      내가 겪었던 온갖 고난,

      that I feel for

      인생의 모진 경험과 또한 즐거웠던 모든 일들,

      the bitter-sweet taste of it all.

      돌이켜 보니 그다지 큰 후회는 없습니다

       

      If you love,

      만약 우리, 삶을 사랑한다면

      there's a chance you may fly.

      나비처럼 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거예요.

      If you fall,

      그러나 그대,

      well, you fall.

      주저앉아 버린다면

      rather the butterfly's life,

      나비의 퍼득임처럼

      you have lived for a day and been free.

      허무한 몸부림이 되고 말겠지요.

       

      Oh, my heart still hears

      오,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아직도

      that voice telling me,

      외치는 한 목소리가 있습니다.

      "Look, and you'll see."

      "바라보세요, 그러면 보일 거예요."

       


                                                                            예미도중(曳尾塗中)과 자유 2008.01.16

cafe.daum.net/qnsekd123/GFzd/1136   멍청한 바람







■ 曳尾塗中(예미도중)| ☞·· 즐거운사랑방

심종기 | 조회 95 |추천 1 | 2016.06.30. 20:31


曳尾塗中(예미도중)

  

 

   고령화 사회와 1인 가족 사회가 급격하게 팽창하고 있다. 인구의 절반이상이 고령화 사회 또는 1인 가족 사회가 도래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런 사회가 급속하게 진행됨으로 인하여 인간과 인간의 관계 사회 보다는 인간과 동물 즉,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반려동물과의 사회란 패러다임으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반려동물 시장 규모는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고, 불황을 모르는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미래의 시장은 더 희망적이다. 반려동물은 첨단과학과 탐재되어 산업의 주요부문을 담당 할 날도 멀지 않았고, 반려동물과 관련된 직업은 날로 다양해지고 있다

                                            〈사진출처 : 다음 이미지


   미래사회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아닌 인간과 반련동물과의 관계가 중심사회로 변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고령화 사회와 1인 가족 사회가 건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로움을 극복해야 한다. 그 외로움을 극복하고 정서적 안정을 유지 할 수 있는 도우미가 바로 반려동물이기 때문이다. 미래사회는 혁신적인 자정기능이 발휘되지 못하면 반려동물이 배우자가 되고, 자식이 되고, 친구가 되고, 손자, 손녀가 되는 현실이 확률적으로 아주 높다고 말할 수 있다

 

 

   반려동물(伴侶動物)伴侶 이란 의미를 지닌다. 짝반은 반씩을 합쳐 이룬 한쌍이란 의미이고, 짝려는 등뼈의 마디가 이어져 있듯이 사람이 서로 유대관계를 맺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즉 인간과 동등하고 아내와 동등하다는 의미다.

 

 

   반려동물(伴侶動物)이란 명칭이 사용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8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인간과 애완동물 관계란 주제로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심포지엄 이후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로 신분이 상승되어 전 지구촌으로 바이러스 속도만큼 빨리 퍼져나갔다. 반려동물(伴侶動物)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동물을 통칭한다. 애완이라는 도구적 관점에서 탈피하여 동물 역시 인간처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가치를 부여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심포지엄에 참석한 학자들의 주장이었다.  

 

 

   반려동물이란 개념이 도입되기 전에는 애완동물로 인식하고 있었다. 애완이란 의미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의 의미가 담긴 것도 사실이다. 애완이라는 명칭 이전엔 동물이거나, 동물농장이었다. 인간과는 전혀 신분 자체가 다른 그저 동물로 인식했었다. 거리를 지나다 보면 동물병원이란 간판이 지금도 간혹 눈에 뛴다.반려동물 병원이란 표기가 시대상황에 부합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집에서 반려동물을 키우고 싶어 했다. 집에서 반려동물을 키울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큰 아이는 이내 수긍을 했으나 둘째 아이는 고집을 부렸다. 하는 수 없이 허락을 했다. 햄스터 쥐과 동물을 키웠다. 성장이 빠른 쥐과 동물은 번식력도 강했다. 많은 수를 무료로 분양했지만 더러는 죽었다. 죽은 햄스터를 땅에 묻어 주면서 아이는 많이 울었다. 그 이후로 집에서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는다

 

 

   장자(莊子)가 낚시를 하고 있는데, 초나라 왕이 사람을 보내 장자에게 관직을 맡기고 싶다는 뜻을 전하게 했다. 장자는 낚싯대를 쥔 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제가 듣기에 초나라에는 신령스런 거북이 있어서 죽은 지 이미 3천 년이나 되었는데, 왕께서는 이 거북을 헝겊에 싸서 상자에 넣고 묘당(廟堂)의 위에 모셔 놓았다고 들었습니다. 거북이는 헝겊에 싸여 상자에 넣어진 채로 묘당에 모셔지는 대접을 받기를 원했을까요?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바랐을까요?” 대신은 말했다. 그거야 차라리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 대답이 무엇인지 아셨을 터이니 돌아가십시오. 나도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고 싶으니까요.”

 

   큰 아이와 작은 아이에게 말했다. 사랑한다는 것과 구속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들에 예쁜 꽃이 피어있단다. 꽃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 갖고 싶었어! 그 꽃을 꺾어 집으로 가져와 심었단다. 그 꽃은 즐거워할까? 아님 슬퍼할까? 슬퍼할 거예요왜 그럴까? 꽃은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친구들과 함께 자유롭게 살고 싶었을 거예요. 그래 바로 그거란다. 꽃의 의사와 상관없이 내가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꽃을 꺾거나 캐서 집으로 가져 온다면 그것은 자유를 빼앗은 구속이야. 특히 살아있는 동물은 더 할 거야. 만약에 강아지를 집에서 키운다고 생각해 봐! 강아지의 의사와 상관없이 시끄럽다고 성대수술을 해야 하고, 수놈의 경우 거시기도 수술해야 하고, 하루 종일 방안에서 감옥생활을 하는 것처럼 살아야 해. 아빤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람들의 탐욕으로 인한 구속은 반대야!. 동물은 동물답게 들에서 산에서 자유롭게 살아야 해. 햄스터도 자기가 태어난 고향에서 자유롭게 살았다면 더 오래 살았을 거야. 아니 다른 동물들에게 잡혀먹어 더 짧게 살수도 있었겠지. 그렇지만 단 하루를 살더라도 자유롭게 살고 싶었을 거야. 자유는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본질이니까.“

 

   曳尾塗中(예미도중)이 말하고자 하는 속뜻은 이렇다. 비록 꼬리를 진흙 속에 묻고 살아가는 거북이의 삶일지언정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부귀영화를 누리며 속박을 당하는 것 보다 낫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가난하지만 속박당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자유롭게 사는 것이 후회가 적은 삶을 사는 것이란 것을 일깨워 주는 고사이다.

 

 

   세계의 돈 많은 갑부들은 수억 원을 들여 복제 견을 주문하고 있다. 동물들에게도 인격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198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인간과 애완동물 관계 심포지엄이 인간사회와 동물사회를 황폐화시키는 주범으로 전락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인간이 사는 세상, 그 세상이 바람직스럽지 못하더라도 인간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사회 공동체 정신이 우선되어야 한다. 사람으로 채울 수 없는 마음은 떠도는 구름 같은 것이다.

 

   인간이나 동물에게 가장 존중되어야 하는 것은 자유로운 생각과 자유로운 활동이다. 국가도, 사람도 그 누구도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자유를 빼앗으면 안 된다. 그들이 사회공동체의 규범에 벗어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20160511 칼럼니스트 심종기)



                                                                                 ■ 曳尾塗中(예미도중) 2016.06.30

cafe.daum.net/lee10520nowonlove/5G28/32759   노원사랑방








[시민일보_고하승] 曳尾塗中 예미도중| 칼럼니스트

희망 황우석 | 조회 6 |추천 0 | 2008.08.19. 14:34


曳尾塗中
편집국장 고하승

   {ILINK:1} 꼬리를 진흙 속에 끌고 다닌다는 뜻의 ‘예미도중(曳尾塗中)’은 부귀로 인해 속박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난을 즐기며 자유롭게 사는 편이 낫다는 것을 비유해서 쓰는 고사성어다.

   장자추수편(秋水篇)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장자가 강가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는 어느 날, 초나라 왕이 두 대신을 그에게 보내 ‘선생님께 나라의 정치를 맡기고 싶습니다’라는 뜻을 전하게 했다.

   그 때 장자는 낚시대를 잡은 채 돌아보지도 않고 이렇게 물었다.
“들으니 초나라에 신귀(神龜)라는 3000년 묵은 죽은 거북을 왕이 비단 상자에 넣어 묘당(廟堂) 안에 간직하고 있다더군요. 그 거북이 살았을 때, 죽어서 그같이 소중하게 여기는 뼈가 되기를 원했겠소. 아니면 꼬리를 진흙 속에 끌고 다니더라도 살아있기를 바라겠소?”

두 대신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야 물론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기를 바랐겠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장자는 “그렇다면 그만 돌아가 주시오. 나 역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겠으니”라고 말했다.

   사기에는 또 이렇게 기록돼 있다.
초위왕이 사신을 보내 장자를 초빙했을 때에 그는 제사에 쓰이는 소와 더러운 도랑에서 자유롭게 놀고 있는 돼지새끼를 비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몇해 부귀를 누리다가 권력투쟁의 제물이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평민의 몸으로 평생을 아무 일 없이 보내고 싶다.”
대선을 불과 40여일 앞둔 지금 정치권을 보고 있노라면 장자가 남긴 ‘예미도중(曳尾塗中)’에 대한 교훈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실제로 ‘국민통합 21’ 정몽준 의원과 최근 대선출마를 선언한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지난 1일 시내 모 호텔에서 회동, 대선에서 협력키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두 사람은 오찬회동 후 발표문을 통해 “현재 정치가 국가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으며,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치개혁과 국민화합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 아무런 조건없이 협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정말 조건이 없다면 몰라도 물밑 거래가 있었다면 ‘예미도중(曳尾塗中)’의 교훈을 잘 모르는 것이다.

   또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대선구도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한국미래연합 박근혜 대표와 박태준 전 총리 등 이른바 ‘제3세력’을 우군화하기 위한 각별한 ‘공들이기’를 계속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현역 의원들 사이에서는 이 당에서 저 당으로 그것도 떼를 지어 옮기려는 모습까지 감지되고 있다. 무슨 부귀영화를 보려는 것인지, 그렇게 해서 뜻을 이룬 들 과연 마음이 편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비단상자 속 죽은 거북이 아무리 귀한 대접을 받는다해도 살아 진흙 속을 누빔보다 못한 것처럼 설혹 꽃봉오리를 펴지 못하고 중도에 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영달’에 줄을 대는 탐욕스런 이합집산보다는 백 번 낫지 않을까. 

 ‘소신정치’가 아쉬운 정치의 계절, 예미도중(曳尾塗中)의 교훈이 새삼스럽다.



 
다음검색


                                                                                       曳尾塗中 예미도중 2008.08.19

cafe.daum.net/DeStinyLove/Gh3v/359   사랑하는 대!한!민!국!






예미도중(曳尾塗中)이란? | # 세상만사얘기

나나리샘 | 조회 6 |추천 0 | 2015.08.10. 12:53


예미도중

[ ]

 

요약
진흙탕 속에서 꼬리를 끌며 살아도 죽은 후의 호강보다 좋다는 말로 부귀롭지만 속박받는 삶보다는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삶이 좋다는 뜻.
 

: 끌 예
: 꼬리 미
: 진흙 도
: 가운데 중


   《장자()》추수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장자는 전국시대의 사상가이다. 초나라의 임금이 사자를 보내 장자에게 정치를 맡아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자 낚시질을 하던 장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초나라에는 신귀(神龜)라는 3천년 묵은 거북이 등딱지가 묘당 안에 있다지요. 듣건대 왕은 그것을 비단천으로 싸서 호화로운 상자 안에 소중히 받들어 모신다더군요. 그런데 그 거북이 죽어서 그와 같이 소중하게 여기는 뼈가 되기를 바라겠소?() 아니면 그보다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기를 바라겠소?()”

   열어구편에는 를 초빙하기 위해 찾아온 임금의 사자에게, “당신들은 제사에 쓰는 소에게 비단옷을 입히고 풀과 콩을 먹이지만 태묘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그 소가 송아지가 되기를 바란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

   《사기()》에도 장자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이 두 이야기를 묶어 장자는 몇 해 부귀를 누린 후에 권력투쟁의 제물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벼슬하지 않은 평민의 몸으로 욕심없이 살면서 삶을 누리기를 바라면서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예미도중

[ ]

한자 뜻과 음

끌 예, 꼬리 미, 진흙 도, 가운데 중.

풀이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닌다. 거북은 죽어서 점치는 데 쓰이어 귀하게 되는 것보다는 살아서 꼬리를 진흙 속에서 끌고 다니기를 더 좋아함. 벼슬아치가 되어 (속박)받는 것보다는 (필부)로서 편안히 살기를 원함. (장자)가 (재상) 자리를 거절할 때 한 말.

유래 및 용례

   (장자)≫ (추수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장자)(복수) 가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초)나라 이 두 대신을 보내, “선생님께 나라의 정치를 맡기고 싶습니다”라는 뜻을 전하게 했다. 장자는 낚싯대를 잡은 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들으니 초나라에는 (신귀)라는 (삼천 년) 묵은 죽은 거북을 왕이 비단 상자에 넣어 (묘당) 안에 간직하고 있다더군요. 그 거북이 살았을 때, 죽어서 그같이 소중하게 여기는 뼈가 되기를 원했겠소. 그보다 살아서 꼬리를 진흙 속에서 끌고 다니기를 바랐겠소.” “그야 물론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기를 바라겠지요.” “그렇다면 그만 돌아가 주시오. 나는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겠으니.” (장자)≫ (열어구) 편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임금이 장자를 (초빙)했다. 장자는 사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제사에 쓰는 소를 보았겠지요. 비단옷을 입히고 풀과 콩을 먹이지만, 끌려 (태묘: 죽은 사람의 영혼을 모시는 사당)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 소가 외로운 송아지가 되기를 바란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우리나라 속담에 ‘죽어 석 잔 술이 살아 한 잔 술만 못하다’, ‘말똥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말이 있다.



                                                                           예미도중(曳尾塗中)이란? 2015.08.10

cafe.daum.net/nanalycon/YLEt/72   나나리컨설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