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7. 3. 00:28ㆍ경전 이야기
김굉필
김굉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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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54년 조선 한성부 정동 |
사망 | 1504년 10월 7일 조선 전라도 순천군 철물시 |
사인 | 사형(사약) |
거주지 | 한성부 정동, 달성군 현풍, 합천군, 평안도 희천(유배지), 전라도 순천군 승평(유배지) |
국적 | 조선 |
별칭 | 자(字)는 대유(大猷), 호(號)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 한훤(寒暄)·말곡(末谷) 시호 문경(文敬). |
학력 | 김종직 문하에서 성리학 수학 1480년 ~ 1494년 성균관 수학 |
직업 | 문신, 사상가, 도학자, 정치가, 화가 |
종교 | 유교(성리학) |
부모 | 아버지 : 김유, 어머니 : 청주한씨 한승순(韓承舜)의 딸 |
배우자 | 순천 박씨 |
김굉필(金宏弼, 1454년 ~ 1504년 10월 7일)은 조선 전기의 문인, 교육자, 성리학자, 화가로 호(號)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1] 또는 한훤(寒暄), 말곡(末谷[2])이며 자(字)는 대유(大猷),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김일손, 김전, 남곤, 정여창 등과 동문이었다.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하였고, 《소학》의 가르침대로 생활하였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480년(성종 11) 식년과 생원시와 초시에 합격하고, 다시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1494년(성종 25년) 훈구파 출신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출사하여 주부(主簿),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연좌되어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지방관으로 부임한 조원강의 아들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무오사화 때 유배되어 희천군 시장에서 사형되었다. 중종 반정 후 복권되어 승정원도승지에 추증되고, 1517년 증 우의정, 1575년 증 영의정에 거듭 추증되었다.
그는 1484년 10월 스승 김종직이 이조참판이 된 뒤에도 훈구파에 대해 간하지 않자, 이를 계기로 풍자시를 지었다가 김종직과 결별하게 되었다. 그 자신도 조광조·이장곤·주계정 이심원·김안국·이연경 등의 제자들을 배출했으며, 김종직 사후 사림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김굉필의 문인들과 이들의 학통은 후대에 가서 조광조, 백인걸의 학통과 함께 기호 사림파를 거쳐 서인학파를 이루게 되었다. 《소학》을 행동의 근간으로 삼아 《소학》을 알지 못하고는 사서육경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본관은 서흥(瑞興)이며, 한성부 출신이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한성 정릉동 출신.
목차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한훤당 김굉필은 1454년 한성부 정동에서 어모장군 행충좌위사직(禦侮將軍 行忠佐衛司直) 김유(金紐)와 한승순의 딸 청주한씨의 아들로 한성부 정릉동에서 태어나, 집안을 따라 달성군 현풍으로 이주, 그 곳에서 성장했다. 그리하여 일설에는 그의 고향을 대구광역시나 경상북도로 보기도 한다.
수학과 청년기[편집]
영남의 유학자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하던 중 어느날 《소학》의 어느 글귀를 읽고 깊이 감동한다. 이후 소학을 읽고 스스로 "소학동자 (小學童子)"라 일컬었고 평소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길재,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학문 전통을 이어, 성리학에 능하였으며 실천 궁행을 위주로 하는 학자가 되었다.[3] 그는《소학》을 행동의 근간으로 삼아 《소학》을 알지 못하고는 학문을 할 수 없고, 사서육경을 알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는 소학에 나온대로 실천궁행에 힘썼다.
그는 남들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학업을 시작하여 이 때문에 고민하였으나, 김종직은 그에게 학문을 하는데 있어 늦고 빠른 것은 없다며 자신은 새벽에 닭이 울 때 일어나 세수하고 앉아서 책을 읽는다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실천에 힘쓴다면 나중에는 크게 발전할 것이라며 권면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남들보다 늦게 시작하였으니 더 열심히 할 것을 다짐하였다. 초기에는 힘들었으나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단정히 앉아 책을 읽기 시작, 나중에는 새벽에 닭이 울지 않아도 저절로 기상하게 되었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전(金詮), 김일손, 권오복, 남곤, 이목, 정여창 등을 만나 교류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그는 김종직의 뛰어난 수제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김종직의 문하에 있을 때 향시에 합격했는데, "업문유미식천기, 소학서중오작비, 종차진심공자직, 구구하용선경비"라고 쓴 향시의 답안이 전한다.
그뒤 1480년(성종 11) 식년과 생원시에 3등으로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는 중에도 조정의 정책에 대한 여러 상소를 올렸다. 성균관 유생이 된 첫 해에 초시에 합격하였다.
김종직과의 결별[편집]
그러나 1484년 10월 스승 김종직이 이조참판에 등용된 뒤 훈구파와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자 김굉필은 이를 비판하였다. 이때 김굉필을 비롯한 김종직의 문하생들은 스승이 훈구파에 맞서 조정을 바로잡아 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오히려 중직에 임용되자 김종직은 조정에 건의 하나 올리지 않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김굉필은 스승과 사이가 벌어질 것을 각오하고 한 편의 시를 지어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김종직의 현실타협적인 처세를 완곡하게 비판했다.[4]
도(道)라는 것은 겨울엔 갖옷 입고 여름엔 얼음 마시는 것인데 /
날 개면 가고 비 오면 그치는 것을 어찌 전능(全能)이라 하겠는가 /
난초도 속된 것을 좇아 결국 변한다면 /
어느 누가 소는 밭을 갈고 말은 사람이 타는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4]
자신을 신랄하게 풍자한 제자의 시에 심기가 불편해진 김종직은 이에 화답하는 한 편의 시를 지어 보내면서 임금을 제대로 보필하고 세상을 바로잡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내비치면서 자신의 처세가 권세와 이익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분수에 맞지 않게 공경대부 높은 관직에 올랐지만 /
내가 어찌 임금을 보필하고 세상을 바로잡는 일을 해낼 수 있을까? /
그대 같은 후학(後學)들이 나의 허물과 어리석음 조롱하지만 /
구차하게 권세와 이익을 따르지는 않네.[4]
그러나 이때의 일로 김굉필은 김종직과 틈이 갈라져 끝내 사제 간의 정을 회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굉필의 나이 39세가 되는 1492년 스승 김종직과 절친한 지기 남효온이 모두 세상을 떠났는데 연보(年譜)에는 남효온의 집을 방문한 기록은 나오지만 김종직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4] 그러나 사림의 학통과 인맥은 김종직이 세상을 떠난 이후 오히려 김굉필을 김종직의 뒤를 이를 사림의 영수로 만들었다.[5]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편집]
오랫동안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그는 1492년 스승이 죽자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서실을 열고 성리학을 연구하며 제자를 길러냈다. 그는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을 널리 확산시켰다.
수많은 양반 관료들과 중인들, 양인 자제들까지도 그의 문하에 찾아왔고, 그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문하생을 받아들였다. 재물 욕심이 없던 그는 일부 뜻있는 지인들과 제자들이 일부 수업료를 냈을 뿐, 수업료 역시 받지 않았다. 그의 문하에서는 모재 김안국과 김정국 형제, 주계정 이심원, 이연경, 이약수(李若水), 문서귀(文瑞龜), 안우(安瑀) 등의 제자들이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수기(修己), 치인(治人)을 직접 현실에서 실천으로 옮기는 것을 중시했다. 이러한 수기와 치인의 직접적인 실천을 중시하는 현상은 조광조 등을 거쳐 후대의 사림 내에 확산되었다. 그밖에 그는 또 이(理)를 절대적인 선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관료생활과 무오사화[편집]
1494년(성종 25년) 경상도관찰사로 있던 훈구파 재상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출사하였다. 훈구파의 거물이었던 이극균은 김종직의 문하생을 대거 발탁해서 요직에 앉혔는데, 그는 후일 갑자사화를 일으키는 이극돈의 친동생이었고, 이극균 자신도 김굉필과 김종직의 문하생을 추천했다는 이유로 무오사화 때 화를 당한다.
1494년(성종 25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의 천거로 김굉필은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되었다. 전생서참봉, 북부주부 등을 거쳐 1495년(연산군 1년) 12월 28일 북부주부(北部主簿)에 제수되고, 1496년(연산군 2년) 군자감주부가 되었다.
그 뒤 사헌부 감찰을 거쳐 1497년 형조좌랑이 되었으나 7개월만에 사직상소를 내고 내려갔다. 1498년(연산군 4년) 동문 김일손 등이 실록에 조의제문을 실은 것과 남곤 등의 연산군 비판, 폐비 윤씨 복위 반대에 염증을 느낀 연산군에 의해 무오사화가 발생했다. 오랜 고문 끝에 김일손이 그해 7월 17일 김종직의 문인이라고 진술한 명단에 그의 이름이 끼어 있어 그도 처벌을 받게 된다.
유배 생활과 최후[편집]
이때 그는 김일손, 권오복, 남곤 등의 동문이며 김종직의 문도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희천(熙川)에 유배되었고, 2년 뒤에는 전라도 순천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에 힘썼고 특히 지방관으로 부임한 조원강의 아들 조광조를 만나 그에게 학문을 전수하였다.
그밖에도 이장곤, 김안국, 김정국, 이장길, 정붕, 성세창, 강흔, 정응상, 이연경, 주계부정 이심원, 윤탁, 우성윤, 김구(金絿), 정응상, 허경, 박한참, 윤신, 유우, 민구손, 최수성, 이담 등이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굉필이 유배지(流配地)를 평안도 희천에서 전라도 순천(順天) 승평(昇平)에 있던 친한 후배 정여해의 집 가까운 곳으로 유배지를 옮기자 정여해는 항상 병으로 가마를 타고 김굉필을 방문하여 위로했다. 한번은 정여해가 그를 찾아와 김굉필의 신구를 청하는 상소문(上疏文) 초(草)한 것을 보이고 그를 구하려 하였다. 그러나 김굉필은 그 상소문을 살펴보고 안 된다고 하며 '만약 이 소장을 올리면 우리 동지들이 더 큰 화를 입게 될 것이니 올리지 말라'고 만류하였다. 실망한 정여해는 그날부로 상소문을 불살라 버리고 어찌할 수가 없음을 알고 통곡하며 순천의 집으로 돌아와 이후 아무도 만나지 않고 두문불출하며 은거하였다.
유배지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정여해 등의 친구들이 그를 방문하여 위문했다. 저서로 《경현록》, 《한훤당집》이 전한다. 그는 그림에도 능했다 한다. 1504년(연산군 10년) 다시 갑자사화가 발생하자 궁중파의 탄핵을 받고 전라도 순천에 유배, 그해 10월 7일 철물시(鐵物市)에서 효수(梟首)하라는 명을 받고 유배지에서 사형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51세였다.
사후[편집]
죽은 뒤 그의 수급은 효수(梟首)되어 순천부의 철물시장에 걸려졌다. 중종 반정 뒤 연산군 때에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짐에 따라 증 승정원도승지겸 경연침찬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았다. 이황은 그를 '근세 도학(道學)의 조종(祖宗)'이라 하여 성리학 도통의 정통으로 규정했고, 그의 제자 중 조광조와 그의 문인 백인걸, 백인걸의 문인 이이, 성혼 등을 통해 기호학파를 형성하고, 이들은 다시 선조 때에 서인 당을 형성하게 된다.
중종 반정 이후 사림파의 개혁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구축과 인재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됨에 따라 그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는데,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 컸다.
그 결과 1517년(중종 12년) 정광필(鄭光弼)·신용개(申用漑)·김전 등에 의하여 학문적 업적과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증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도학(道學)을 강론하던 곳에는 사우가 세워져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그에게 내려진 증직 및 각종 은전은 1519년(중종 13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그의 문인들이 화를 받으면서 남곤(南袞[6])을 비롯한 반대세력에 의해 수정론이 대두되었다. 당시의 이같은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뒤 그를 받드는 성균관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중종 반정 직후부터 계속되어 1575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1577년(선조 10년)에는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10년(광해군 2년)에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동방 5현으로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아산의 인산서원, 서흥의 화곡서원, 회천의 상현서원, 현풍의 도동서원, 순천의 옥천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문묘 종사 배경[편집]
중종 때 이여가 정몽주의 문묘종사를 청했다. 중종은 이여의 건의와 유생의 상소에 따라서 정몽주의 문묘종사를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했다.[7]
그 후에 조강에서 태학생(太學生)들이 정몽주와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상소한 문제를 의논하자고 임금이 제안했을 때, 정광필은 자신의 자제가 김굉필의 문하생인데 추향이 지극히 바르고 실천이 독실한 사람이기는 하나 문묘종사에는 신중해야 할 것이라고 신중론을 폈다.[8]
당시 시강관 조광조가 종사를 발의하고 기준(奇遵)이 종사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정몽주가 도학의 연원을 열었으며, 정몽주가 길재를, 길재는 (여러 대를 거쳐) 김종직을, 김종직은 김굉필을 가르쳤으니 (도학의 학통이 이어진 것이며) 김굉필이 송유(宋儒)의 실마리를 얻어 주자와 같은 위치에 올랐으니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정여창, 김굉필, 성삼문과 박팽년에 대해서도 [9] 종사를 의논하도록 했다. 이때 조광조가 이심원을 거론하자 정광필이 반대했는데 임금도 이에 동의했다.[10] 참찬관 김정(金淨)이 대학연의를 강의하다가 김굉필의 문묘종사를 건의했다.[11] 그를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자신들의 직계 스승을 배향하기 위한 것이라며 훈구파는 물론 온건 사림파들, 김종직의 다른 제자들이나 다른 제자의 문인들 역시 반대하였다. 결국 광해군 때 가서야 문묘에 종사된다.
가족 관계[편집]
- 할아버지 : 김소형(金小亨) - 본관 서흥
- 아버지 : 김유(金紐)
- 어머니 : 한승순(韓承舜)의 딸 - 청주한씨
- 부인 : 순천 박씨
- 아들 : 김언상(金彦庠)
- 손자 : 김립(金立)
- 아들 : 김언상(金彦庠)
- 부인 : 순천 박씨
저서[편집]
- 《한훤당집》
- 《경현록 (景賢錄)》
- 《가범》
평가[편집]
평소 육경(六經) 연구에 몰두하여 성리학에 통달했으며, 문하에서 조광조·이장곤(李長坤)·김안국(金安國)·이연경 등이 배출되었다. 조광조의 학맥은 조광조-성수침-성혼으로 이어지는 한편 율곡 이이와 성혼은 조광조의 문인 백인걸의 문하에서 수학, 사숙함으로써, 조광조의 후계자들은 서인 학파를 이루게 된다. 김안국의 제자는 김인후이고 김인후의 문인이 정철로, 정철 역시 성혼, 이이와 함께 역시 서인 학파를 형성하였다.
김장생은 예학은 송익필에게 수학했지만 이이,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한 일로 학문적 연원이 김굉필을 거쳐서 김종직까지 올라가게 된다.
기타[편집]
사상과 영향[편집]
학맥상으로는 백이정과 안향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백이정, 안향→이제현→이색→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진다. 그의 대에 이르러 조광조 등을 양성하고 이들은 후일 동인과 서인의 연원이 된다.
각주[편집]
-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중종실록 100권, 중종 38년 1월 4일 기유 8번째기사 1543년 명 가정(嘉靖) 22년 판중추부사 김안국의 졸기
- ↑ 《글로벌 세계대백과》〈김굉필〉
- ↑ 이동: 가 나 다 라 한정주,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 : 조선 500년 명문가 탄생의 비밀》 (다산초당, 2015) 193페이지
- ↑ 한정주,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 : 조선 500년 명문가 탄생의 비밀》 (다산초당, 2015) 194페이지
- ↑ 같은 스승 김종직에게서 수학한 동문이기도 하다.
- ↑ 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49
- ↑ 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49
- ↑ 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49
- ↑ 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50
- ↑ 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50
관련 항목[편집]
외부 링크[편집]
- 한훤당 김굉필
- http://media.daum.net/cplist/view.html?cateid=1001&cpid=200&newsid=20110929032817942&p=chosun
요약
〈소학〉에 제시된 생활규범을 실천하기에 진력했으며, 그의 도학 실천 의지는 지치주의에 입각해 개혁정치를 주도한 기호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했다. 1480년(성종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이때 유학은 제가치국평천하의 도이며 불교는 일신의 청정적멸만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여, 척불과 유교진흥에 관한 긴 상소를 올렸다.
1486년 당시 이조참판으로 있던 스승 김종직에게 시를 지어올려 그가 국사에 대해 별다른 건의를 하지 않는 것을 비판, 사제지간에 사이가 벌어졌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죽음을 당했다.
성장배경
본관은 서흥. 어렸을 때의 이름은 효동이며, 자는 대유, 호는 사옹·한훤당. 아버지는 충좌위사용 유(紐)이며, 어머니는 중추부사 승순의 딸 청주한씨이다.
서흥의 토성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으로 성장한 집안이다. 경기도의 성남·미원과 야로(처가)·가천(처외가) 등지에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손(金馹孫)·정여창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소학〉 등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그는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누가 혹 시사를 물으면 소학동자가 무엇을 알겠는가라고 답할 정도로 〈소학〉에 심취했다.
관직생활
1480년(성종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이때 유학은 제가치국평천하의 도이며 불교는 일신의 청정적멸만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여, 척불과 유교진흥에 관한 긴 상소를 올렸다. 1486년 당시 이조참판으로 있던 스승 김종직에게 시를 지어올려 그가 국사에 대해 별다른 건의를 하지 않는 것을 비판, 사제지간에 사이가 벌어졌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은일지사로 천거하여 남부참봉이 된 뒤, 전생서참봉·군자감주부·사헌부감찰 등을 거쳐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1498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무오사화를 일으켰을 때,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고 하여 장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 조광조(趙光祖)가 그에게서 〈소학〉을 배운 것은 이때의 일이다. 2년 뒤에 유배지가 순천으로 옮겨졌다가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죽음을 당했다.
중종반정 뒤 신원되었으며, 1507년(중종 2) 도승지에 추증되고 1517년 홍문관부제학 김정(金淨) 등의 상소로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학통과 사상
김굉필은 정몽주·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도학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평가된다. 노불을 사도라 하여 배격하고 유학의 도통에 참여할 때 참다운 진리를 알게 된다고 생각했다.
수기의 대요는 언행을 삼가는 것[謹言行]과 위의를 바르게 하는 것[正威儀]에 있으며, 수기의 근본이 정심·성의에 있으니만큼 수기를 위한 궁행의 요체는 경외를 숭상하는 것[崇敬畏]과 일욕을 경계하는 것[戒逸慾]에 있다고 파악했다. 이러한 수기의 행(行)이 있은 다음에야 도술을 밝히는 것[明道術], 인재를 가리는 것[辨人才], 정치의 대체를 파악하는 것[審治體], 인정을 살피는 것[察人情] 등의 치인의 대요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수기의 궁행을 의리실천의 필수 전제조건으로 여기는 점이 학문은 〈소학〉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여 〈소학〉이 제시하는 생활규범을 실천하는 데 힘썼던 까닭이다.
그가 살던 시대에는 조선 주자학의 기본문제였던 이발과 기발의 문제가 아직 논의되고 있지 않았으나, 그는 이미 이일분수설을 간략하나마 다루고 있었다. "천하의 만물은 이(理)가 있고 분이 있으니, 이(理)는 만가지 것이 모여 하나가 된 것이고 분은 가지로 나뉘어도 흐트러지지 않는다"고 하여 보편과 특수의 일체성을 강조했다. 한편 "작은 털에도 태극이 갖추어져 있으며 태산이 크다고 하지만 그 역시 하늘이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형이상으로 보면 천지도 또한 일물이 되고 형이하로 보면 사물마다 무극이 된다"고 이일분수설을 설명했다.
그의 학문은 조광조·김안국(金安國) 등에 전해져 뒷날 지치주의에 입각한 개혁정치를 주도하게 되는 기호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했다. 문인으로는 조광조·김안국·이장길(李長吉)·윤신(尹信)·이장곤(李長坤)·김정국(金正國) 등이 있다.
1610년(광해군 2) 정여창·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이황은 그를 '근세도학지종'으로 칭송했다. 아산 인산서원, 서흥 화곡서원·희천 상현서원, 순천 옥천서원, 현풍 도동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현록 景賢錄〉·〈한훤당집〉·〈가범 家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이다.
요약 조선전기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개설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簑翁)·한훤당(寒暄堂). 예조참의 김중곤(金中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의영고사(義盈庫使) 김소형(金小亨)이고,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김뉴(金紐)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
(淸州韓氏)로 중추부사(中樞副使) 한승순(韓承舜)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소학(小學)』에 심취해
‘소학동자(小學童子)’로 불리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선조는 서흥의 토성(土姓)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士族)으로 성장했는데, 증조부인 김사곤(金士坤)이 수령과 청환
(淸宦)을 역임하다가 아내의 고향인 경상도 현풍현에 이주하면서 그곳을 주근거지로 삼게 되었다.
할아버지인 의영고사 김소형이 개국공신 조반(趙胖)의 사위가 되면서 한양에도 연고를 가지게 되어, 할아버지 이래
살아오던 한성부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저자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김굉필을 보면 모두
피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분발해 점차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근기 지방의 성남(城南)·미원(迷原) 등지에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주로 영남 지방의
현풍 및 합천의 야로(冶爐: 처가), 성주의 가천(伽川: 처외가) 등지를 내왕하면서 사류(士類)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이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小學)』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소학』에 심취해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일컬었고, 이에서 받은 감명을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했더니,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해 자식 구실을 하려 하노니,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 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라고
술회했다고 한다.
이후 평생토록 『소학』을 독신(篤信)하고 모든 처신을 그것에 따라 행해 『소학』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나이
삼십에 이르러서야 다른 책을 접했고 육경(六經)을 섭렵하였다.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때에 장문의 상소를 올려 원각사(圓覺寺) 승려의 불법을
다스릴 것을 포함한 척불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이학(理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명목의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해
남부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어서 전생서참봉·북부주부 등을 거쳐, 1496년 군자감주부에
제수되었으며, 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써, 희천에서는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 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중종반정 뒤 연산군 때에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면서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사림파의 개혁 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 구축과 인재 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되어 김굉필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다.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 결과 1517년(중종 12) 정광필(鄭光弼)·신용개(申用漑)·김전(金詮) 등에 의해 학문적 업적과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도학(道學)을 강론하던 곳에 사우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김굉필의 문인들이 피화되면서 남곤(南袞)을 비롯한 반대 세력에 의해 김굉필에게
내려진 증직 및 각종 은전에 대한 수정론이 대두되었다. 당시의 이 같은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뒤
김굉필을 받드는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575년 영의정 추증, 1577년(선조 10) 시호가 내렸졌으며, 1610년(광해군 2)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해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학문적으로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 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김종직을 사사(師事)한 기간이 짧아 스승의 후광보다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와 교육적 공적이 더 크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사우(師友)들 가운데에는 사장(詞章)에 치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정여창과 함께 경학(經學)에 치중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성향으로 인해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의 편향성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현실에 대응하는 의식에서도 그러한
성격이 잘 나타나, 현실 상황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응하려는 자세는 엿보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20여 인에 달하는 문인들은 두 차례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크게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나아가 유배지
교육 활동을 통해 더욱 보강되어 후일 개혁 정치를 주도한 기호계(畿湖系) 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소학』에 입각한 처신(處身), 복상(服喪)·솔가(率家) 자세는 당시 사대부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한훤당의 가범(家範)’
으로 숭상되었다. 후학으로는 조광조(趙光祖)·이장곤(李長坤)·김정국(金正國)·이장길(李長吉)·이적(李勣)·최충성(崔忠誠)·
박한공(朴漢恭)·윤신(尹信) 등이 있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서흥의 화곡서원(花谷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의 옥천서원(玉川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현록(景賢錄)』·『한훤당집(寒暄堂集)』·『가범(家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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