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진대성(句陳大星) / 조선왕조실록용어사전 外

2019. 8. 5. 08:15별 이야기




구진대성(句陳大星)| 조선왕조실록용어사전(1)


樂民(장달수) | 조회 42 |추천 0 | 2018.08.06. 15:37



정의

   구진 6성좌 중 가장 밝은 별로, 현재 북극성(polaris)에 해당하는 동양식 별자리 이름.

개설
   구진6성(句陳六星) 중 가장 밝은 별을 구진대성(α UMi, 1.9~2.1등성, 변광성)이라 하며, 현재의 북극성을 지칭한다. 구진(句陳)은 별자리 형태가 갈고랑이 모양으로 굽어진 데서 붙여졌고, 구진 1번, 2번, 3번, 4번 별은 서양의 작은곰자리 일부에 해당한다.

내용 및 특징
   조선초 천문서인 『천문류초』에서 구진6성은 천제가 거처하는 궁궐로 묘사되었고, 그중 가장 밝은 구진대성 천제의 원비(元妃)이자 여주(女主) 별자리로 간주하였다. 이 같은 생각은 이미 전한(前漢) 초 『사기』 「천관서」에서부터 시작된 관점인데, 구진 제1성이 정비(正妃)라면 그다음 구진 제2, 제3, 제4성은 후궁(後宮) 별자리로 보았다. 당나라 초기에 편찬된 『진서「천문지」구진대성천황대제(天皇大帝)의 정비이며 대제가 항상 머무는 거처로 설명하였다. 이런 생각이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진 것임을 『천문류초』가 잘 보여준다.

   그런데 세차운동(歲差運動)에 따라 한나라 때 북극성이던 제성(帝星)이 북극점에서 멀어지고, 당나라 무렵에는 천추성(天樞星)이 북극점에 가까워져 새로운 북극성으로 관측되었다. 그러다 13세기 원나라 무렵에 이르면 5.3등성으로 어두운 천추성보다 더욱 밝은 2.1등성의 구진대성이 북극점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때부터 북극성을 지칭하는 별자리 이름으로 천추성과 구진대성이 대립하는 형국을 이룬다. 『명사』「천문지」에 구진대성 이름이 등장한 것은 그 때문이다.

변천
   『세종실록』『국조역상고』의 기록을 살피면, 1432년(세종 14) 4월 15일에 주야측후기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가 완성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지은 승지 김돈(金墩)의 서명(序銘)에 따르면, 적도면에 평행한 3개의 고리(주천도분환, 일구백각환, 성구백각환)와 이에 수직되는 방향으로 2마리의 작은 용(길이 1척)이 떠받치는 정극환(定極環)을 만들어 올리고 있다. 정극환은 글자 그대로 북극을 정하는 고리이며, 당시 측정한 한양의 북극고도에 맞춘 것이다. 이때 정극환은 2개 내외 고리로 구성되며, 바깥 외환은 너비 3푼에 지름 2촌 3푼이고, 안쪽 내환은 너비 4리에 지름 1촌 4푼 반 크기이다. 이들 내환과 외환 사이에는 구진대성이 나타나고, 내환 안에는 천추성이 나타나도록 하였으니, 남북 적도(赤道)를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정극환의 내환 중심에 천추성을 맞추고 있다는 말은 세종조 당시의 북극성을 천추성으로 보았다는 의미이며, 구진대성은 북극점에서 외환 범위 내로 떨어져 있는 별을 말한다. 그런데 1500년 기준으로 거극도가 천추성은 3.86°이고, 구진대성은 3.21°로 이미 역전되므로, 세종대는 더욱 밝아서 관측하기에 용이한 구진대성을 새로운 북극성으로 주목하였어야 할 시기이지만, 세종대 천문역법은 모두 원나라의 수시력 관측치와 이론에 기반하고 있던 까닭에 일성정시의에 그 같은 새로운 천체 변화를 반영하지는 못했다.

   이어지는 김돈의 서문에 따르면 주천환(周天環)을 사용할 때 관측 막대기인 계형(界衡)으로 북극 제2성의 위치를 관측하여 바퀴의 가장자리에 표시하고서 동짓날 자정의 주천도 초도(初度)를 맞춘다 하였는데, 이는 북극 제2성이 북극에서 가깝고 가장 붉고 밝아 쉽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 언급된 북극 제2성은 북극5성좌 중 제2제성(帝星)을 일컫는 것인데, 제성은 2등성으로 상당히 밝은 별(β UMi, 2.0~2.3 등성)이다. 그렇지만, 북극 제2제성은 거극도가 1500년 기준으로 13.81°여서 세종대 당시 북극점에서 이미 매우 멀어진 별이어서 이를 기준으로 주천도 초도를 맞추기에는 편차가 상당히 심해진다. 제성 대신에 그와 밝기가 비슷한 구진대성으로 관측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구진대성은 이후로도 점점 더 북극점에 가까워져 서기 2102년에 0.46°로 최근접한다.

   이와 같이 세종조에 낮과 밤의 시각을 두루 측정하는 의기로 일성정시의를 제작하면서 북극점에 가까운 천추성과 구진대성을 관측하여 시간 측정의 기준점으로 삼고자 하였음을 엿볼 수가 있다. 이 일성정시의는 당시 4벌 제작하여, 하나는 내정(內庭)에, 하나는 서운관에, 나머지 둘은 함경도평안도절제사 감영에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천체 관측에 바탕한 시각의 정확성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 『서운관지(書雲觀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천문류초(天文類秒)』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국역 고려사지』, 경인문화사, 2011.
  • 김일권, 『동양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예문서원, 2007.
  • 陳遵嬀, 『中國天文學史』上ㆍ中ㆍ下, 上海人民出版社, 2006.




                                                        구진대성(句陳大星)

2018.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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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영상 : 한국의 전통천문학 (한국천문연구원)


https://youtu.be/ovv3bB4TTI8




                                   




우리나라 별자리-2-삼태성(三台星),삼수(參宿),삼대성(三大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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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에서 북두칠성 다음으로 잘 보이는 성좌는 오리온 별자리인데,
이를 동양에서는 삼수(參宿), 삼대성(三大星)이라고 한다네요.


-양력3/12(음1/23)경 저녘8시 남서쪽하늘꼭대기-이하사진-비영리 단순보도용


-양력3/12(음1/23)경 저녘8시 남서쪽하늘꼭대기,별만

이 삼수(參宿)를 삼태성(三台星)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이는 잘못인 것 같고 진짜 삼태성(三台星)은
북두칠성 밑에 늘어서 있는 상태 중태 하태의 별자리를 말한답니다.



-양력3/12(음1/23)경 저녘8시 북동쪽하늘꼭대기




-양력3/12(음1/23)경 저녘8시 북동쪽하늘꼭대기,별만

삼태성(三台星,三胎星)의 전설

흑룡강 이남의 만주 벌판이 고조선, 부여, 고구려등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우리의 영토였고 지금도 그 후손들이 살고있는 곳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시는 사실이구요.

그 만주지방의 조선족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그 만주벌판 흑룡강가에는 흑룡담이라는 넓은 늪이 있고
그 늪 근처에는 큰 마을이 하나 있었다는데.. 이 마을에 한 부인이
세쌍둥이의 유복자(遺腹子-아버지가 죽은 후에 낳은 아이) 낳았다네요.
그 어머니는 아들 삼 형제가 아비없는 자식이라는 비난의 소리를
듣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가정교육을 철저히 시키던 중
애들이 여덟살 되던 해에 집에서 내보내며 십년 후에 돌아올 때는
훌륭한 재주를 한가지씩 배워 오라고 하였답니다.

10년 동안 공부를 하고 집에 돌아온 첫째는 방석을 타고 하늘을 날아
다니는 재주를 배워왔고, 둘째는 한 눈으로도 구만리를 볼 수 있는
천리안의 능력을 배워왔으며, 셋째는 십팔반무예(十八般武藝)를 익혀
칼과 활의 명수가 되어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던 중..

하루는 이 마을에 풍폭우가 휘몰아치더니 하늘의 해가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네요?? 마을의 노인들은 하늘의 개가 해를 삼켰으니 얼마간
지나면 꼭 해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며 낙관적인 이야기를 하였답니다.


-게르만 신화에 나오는 늑대- 펜리르

왜냐구요? 이는 게르만 신화에도 나오는 이야기로, 그 옛날
까막 나라의 마왕은 억센 불개(火犬)를 인간 세상으로 보내 해와 달을
빼앗아다가 까막나라를 밝히라고 명령한 적이 있었다네요.

그러나 해는 너무 뜨겁고, 달은 너무 차가워서 불개는 해를 물었다가
토해내고 달을 물었다가도 토해 낼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러나 까막나라의 마왕은 기회만 생기면 해를 가져 오라,
달을 가져 오라며 불개를 들볶는 바람에 불개는 할 수 없이 해와 달을
물기는 무는데 너무 뜨겁고, 또 차거워서 토해낼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이 때마다 일식과 월식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얘기였구요.

그러나 노인들의 이러한 예측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해가 나타나지를 않자, 마을 사람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했지요.

이때, 삼 형제의 어머니는 아들들을 불러 놓고 해를 찾아올 것을
당부하였답니다. 삼 형제는 즉시 해를 찾아 집을 나섰으나
몇 년을 헤매어도 해를 찾지 못하여..
결국 둘째의 스승을 찾아가서 상의하게 되였고.. 그 스승님도
그 스승님의 스승님을 찾아가서야 비로소 흑룡담 물속에 사는
한 쌍의 흑룡이 해를 삼켜 버렸다는 사실을 알아 내게 되었다지요?
삼 형제는 곧바로 방석을 타고 하늘로 날아 올라가 흉폭한 흑룡과
싸움을 벌였는데.. 두 마리의 흑룡은 삼 형제에게 패하여 달아나다가
한 마리는 흑룡담 물속으로 피하여 숨어 버리고,
해를 물고 있던 또 한 마리는 화살에 맞아 해를 토해 내고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답니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해를 되찾아 기뻐하였으나, 삼 형제의 어머니는
흑룡담 물속에 살아남은 흑룡이 언제 또 다시 하늘로 올라가 해를
삼킬지 알 수 없다며 삼 형제에게 명하여 하늘에 올라가
영원히 해를 지키라고 하였으니 이 삼 형제들은 즉시 하늘로 올라가
삼태성(參胎星 ㅡ> 三台星 세쌍둥이라는 뜻)이 되어 흑룡을 감시하게 되었답니다.



그후 사람들은 왕릉이나 고인돌 등에 북두칠성과 함께
삼태성도 함께 새겨넣게 되었답니다.

이 이야기는 백두산 주변에서 악천후와 싸우며 살아온
우리 민족의 강인한 투쟁 정신을 보여주는 신화이기도 하며
태양을 지켜야 한다는 태양숭배사상이 깃들어 있어서,
이는 고구려 멸망후 고구려 유민들이 삼족오 사상과 함께
이 태양숭배사상을 일본에 전수시켜준
사상이기도 하답니다.
일본의 까마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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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별자리-2-삼태성(三台星),삼수(參宿),삼대성(三大星) 2015.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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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까마귀는 일본의 국조 | <일본> 별거 없다데스!

송근원 2016.03.18 08:27

        



<사진> 찌온인 앞


20. 까마귀는 일본의 국조


200622일 목요일(맑음)

 

   찌온인 밖으로 나오니 왼쪽 옆에 공원이 있다.


   공원으로는 차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말뚝으로 막아 놓았는데, 청수사와 고태사로 가는 표지판이 보이고, 원 왼쪽으로는 못을 포함한 인공정원이 있다.


   못에는 재두루미 비슷한 놈이 그 못 가운데 삐쭉이 나온 돌 위에 앉아 있다.



<사진> 재두루미


   한편 저쪽으로는 가지만 늘어진 수양버들이 한 그루 서 있는데 까마귀들이 열댓 마리 앉아 있다.


   설화에서 까마귀는 해의 정()이라 하는데 일본의 국조이다.


   옛날 동이족 가운데 새를 토템으로 하는 종족은 전설상에 나오는 봉황(鳳凰)이나 난조(鸞鳥) 이외에도 현조(玄鳥: 까마귀)를 숭상했다고 하는데 그 풍습이 그대로 일본에 남아 있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까마귀를 시체를 뜯어 먹는 아주 불길한 새로 여기며 흉물스러워하는데, 이는 옛날 백인들이 동이족을 두려워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용 역시 마찬가지이다.


   동양 사람들 특히 중국인들은 용을 상서로운 동물로 여기지만 서양 사람들은 용을 퇴치해야할 괴물로 생각한다.


   헤라클레스의 신화에서도 용을 퇴치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이러한 사고의 편린이 서양의 동화에 그대로 반영되어 용을 퇴치하고 공주를 구하는 왕자의 이야기가 동화의 주요 주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볼 때 서양인들이 옛날에 동양인들로부터 많은 피해를 보았기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양의 사고를 그대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까마귀를 불길한 새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동이족의 후예인 우리가 까마귀를 멸시하는 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리라.


   동이족이 숭배하던 까마귀가 어느 때부터인가 까치로 둔갑되었으니 말이다.



<사진> 까마귀


   허긴 초등학교 때부터 까마귀는 흉조(凶鳥)고 까치는 익조(益鳥)라고 배우고, 서양의 동화책만 읽었으니······.


   사실 동양(동북아시아)의 설화가 얼마나 무궁무진한데 그것을 모르니 그럴 만도 한다.


   역시 교육이란 무서운 것이다.


   그나마도 일본에서나마 까마귀가 대접을 받는다니 새를 토템으로 하는 한반도의 후예가 일본의 지배층이 되었기에 그나마 가능한 것이리라.


   실제 우리 설화에서 나오는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 이야기는 까마귀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설화이다.


   잠깐 이 설화를 챙겨보자.

 

   신라 8 임금 아달라(阿達羅 때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바다 위에 홀연히 바위 나가 나타나자 연오랑은 이것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는 바위를 타고   사람을 왕으로 모셨다

   한편 아내인 세오녀는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궁금하여 바다에 나가 보았다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보고 자기도  바위에 올라탔다그리하여 세오녀도 일본으로 건너가 남편을 만나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부부가 신라 땅을 떠난 뒤부터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왕은 천문을 맡은 신하에게  연유를 물었더니  신하는 "해와 달의 () 우리 나라에 있다가 이제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이런 변괴가 생기는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은  사신을 일본에 파견하였다연오랑 부부를 귀국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연오랑은 "우리가 여기에  것은 하늘의 뜻이니어찌 홀홀히 돌아갈  있겠소그러나 나의 아내가 가는 명주를  터이니 이것을 가지고 가서 하늘에 제사하면 해와 달이 다시 빛을 발할 것이오." 라고 말하며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비단을 가지고 와서 하늘에 제사했더니 과연 해와 달이 옛날같이 빛났다고 한다그래서  명주를 국보로 모시고 창고를 귀비고(貴妃庫) 했고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이라고 하였(출전: 삼국유사 1, ‘기이(奇異)' 

 

   연오랑과 세오녀의 가운데 글자 가 까마귀 오()자이고, 이 설화가 해와 관련되는 까닭이다.



<사진> 찌온인 옆 공원


   동화를 읽으면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은 동화 속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우리 어린이들이 서양의 설화와 전설만 읽으면 되겠는가?


   우리 조상들의 사고가 응축된 우리의 신화와 전설--동양의 신화와 전설--을 수집하여 그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읽혀야 할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읽으면서 왜 동북아시아의 신화는 읽히지 않는가?


   혹자는 우리의 전설이나 신화가 빈약해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르는 말씀이다.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우리 동양의 신화와 전설은 그야말로 서양의 그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풍부하다. 더욱이 그 상상력의 풍부함이란!


   근대화 이후 우리의 문물이 서양화되면서 이 나라의 선각자인양 하던 일부 몰지각한 학자들의 서양사대주의(西洋事大主義)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발굴되지 못하고 정리되지 못해서 그럴 뿐이다.


   이런 점에서 신화학자나 민속학자나 국문학자들은 해야 할 일이 많다. 우리 후손들에게 우리의 설화와 전설을 읽히기 위해서는.


<사진> 찌온인 옆 공원


 



20. 까마귀는 일본의 국조 2016.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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