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8. 18. 00:42ㆍ경전 이야기
진공묘유(眞空妙有)
- 풍랑 일어도 바다의 성품은 변하지 않아 -
- ‘공은 색포함한 근원자리’ 양자역학 밝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즉 무(無)란 무엇인가? 우리는 보통 무(無)를 존재에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 내용으로부터 추상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쟁반 위에 사과가 몇 개 있다가 다 먹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듯이,
존재가 정의되고 나서 가능해지는 무이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공 혹은 무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공은 존재를 무화시킴으로써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근원자리이기 때문이다.
현대물리학이 다루는 세계가 고전물리학이 다루는
세계를 포함하듯, 공의 세계가 색의 세계를 포함한다는 말을 하였으며, 30억년에 결쳐 형성된 무명으로 싸인 세계인식이 불법을
만나 확장된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여기서 공의 세계가 색의 세계를 포함한다는 것은 무를 존재에 의하여 정의하고자 하는 입장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공이 색을 포함하고도 남을 수 있는가?
이
문제와 연관하여 지난 번에는 디랙의 상대론적 양자 역학의 세계상 즉 현대물리학의 진공 개념을 물고기의 예를 들어 비유적으로
설명하였다. 이 비유는 물리학의 진공개념을 거의 왜곡시키지 않고 그대로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현대물리학이 파악하고
있는 진공이란 허무단명의 공이 아니고 묘유(妙有)하는 공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이다. 물고기의 비유는 현대물리학과 연관되는
것이지만 우리 주변에서도 그와 유사한 예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우선 0이라는 수를 살펴보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수로 나타내면 0이 될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하나도 없다고 하여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어디서 돈을 빌려서 투자를 한다면 빌려온 돈과 투자한 돈이 서로 상쇄되어 자산은 변함없이 0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가능성은 무한히 열려 있게 된다. 오히려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가능할 수도 있다. 사실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무소유에 의한? 자유 뿐만 아니라 무한한 정신적 자유마저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무소유의 자유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닷물과 파도의 비유이다. 바닷물이 잔잔하여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고요하다면 이는 공의 상태에 해당된다. 그 바다에 바람이 불어 풍랑이 일게 된다면 풍랑이라는 색이 나타나게 된다.
고요한 바다에 바람이라는 에너지가 들어가서 풍랑이라는 형상이 나타나게 되지만 단지 그것뿐 풍랑이 이는 바다도 역시 바다이다.
풍랑이라는 형상이 나타나더라도 바다라는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
이를 금강경의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과
연관시켜 생각해보자. 수미산과 같이 큰 파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유한한 색의 제한을 가지고 있는 한, 바다라는 성품 자체와
그 크기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수보리 존자는 ‘불설비신 시명대신(佛說非身 是明大身)’이라고 대답하였다. 공성(空性)의
바다는 색상의 파도를 언제나 그 안에 포함한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다 텅빈 것이지만 연기에 의해 잠시
색이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규봉스님은 금강경의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을 해설하면서 ‘공(空)은 모든 존재를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관찰하는 것이고, 가(假)는 인연에 의해 잠시 거짓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中은 그 공 가운데 가유(假有)하는 것을 똑바로
알아 그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는 없는 것이나 현실로는 없지 아니하니,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없어
진공묘유(眞空妙有)한 것이므로 중도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공이란 허무단멸의 공이 아니라는 것이 상대론적
양자역학의 결론이기도 하고 부처님과 조사 스님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욱(智旭)스님은 금강반야바라밀다파공론에서 “눈먼
중생들은 상을 타파한다는 말만 듣고 바로상이 아니라는 데에 집착하여…단멸공(斷滅空)을 취하고 악지견(惡知見)을 이루어 속제의
차별상을 파괴하고 생멸에 따른 인과법을 없앤다…그리하여 일체 환망의 상을 영원히 여의긴 해도 실상의 자체 성품이 단멸공이 아님을
모른다”고 하여 공의 실제 의미가 진공묘유임을 밝히고 있다.
출처 -> http://www.buddhapia.co.kr/_Service/_ContentView/ETC_CONTENT_2.ASP?pk=0000954074&sub_pk=&clss_cd=0002187496&top_menu_cd=0000000442&menu_cd=&menu_c
출처: https://redrails.tistory.com/4 [Romantic Egoist]
2008.07.23
redrails.tistory.com/4 Romantic Egoist
‘법신불일원’의 진리적 속성을 존재론적 입장에서 단적으로 표현한 말. 우주의 모든 현상 곧 천차만별의 차별현상은 진공묘유의 조화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의미해석]
원불교 최고종지인 법신불일원의 진리적 속성에 대해서는 ‘진공ㆍ묘유ㆍ조화’의 3속성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진공의 체성’과 ‘묘유의 조화작용’이라는 양면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궁극적 실재로서의 법신불일원 그 자체는 인간의 상대적 언어나 인식작용의 한계를 넘어선 초논리적, 초경험적 차원에 속한 절대의 경지라 볼 수 있으나, 그에 대한 인간 차원에서의 가능한 한 최대의 이해작업으로 불생불멸ㆍ인과보응, 변ㆍ불변, 유상ㆍ무상, 진공ㆍ묘유, 공ㆍ원ㆍ정, 이(理)ㆍ사(事), 대소유무, 동ㆍ정, 도ㆍ덕 등으로 제기된다.
이 가운데 진공ㆍ묘유의 양면관은 무엇보다 먼저 고려되어야 할 기본적 진리관이다. 진공ㆍ묘유의 논리는 불교를 비롯한 동양종교사상의 전통적 논리를 계승한 보편적 진리관일 뿐 아니라, 여타의 다양한 진리관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진공ㆍ묘유의 개념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해석의 차이에 따라, 동일한 법신불일원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세계관과 종교신앙관이 전개될 수 있다. 《정전》 ‘일원상 진리’장을 토대로 하여 진공과 묘유의 양면관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일원상진리를 본체론적 입장에서 본 ‘진공의 체성’ 그 자리는 대소유무와 생사변화와 선악업보와 길흉화복 등 일체의 상대적 차별현상을 초월한 진공의 경지를 말한다.
그것은 모든 차별현상의 근본 체성이므로 그러한 절대의 경지는 상대적 언어로 개념화하거나 표현할 수 없으며 일상적 사유로는 미칠 수 없는 자리로서, 오직 일체의 언어와 사유가 끊어진 입정의 체험, 즉 무분별지의 직관적 깨달음을 통해서만 체득될 수 있다. 일원상진리를 현상론적 입장에서 본 ‘묘유의 작용’이란, 일원의 체성이 일체의 상대적 차별을 넘어선 무상(無相)의 진공체이나, 그것은 물리적 진공이나 무기공(無記空)과 같은 악취공(惡趣空)이 아니라, 공적영지의 광명과 묘유의 조화작용을 포함한 신묘한 공(空)이다.
공적한 가운데 영지(靈知)가 내재되어 있어 묘유의 조화작용이 전개되므로 진여본체로서의 진공의 체성에 바탕하여 묘유의 조화가 작용함으로써, 천차만별한 현상세계가 전개된다. 그리하여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변화하고, 일월은 춘하추동과 주야로 운행하며, 만물은 형형색색 천차만별로 나타나고, 생로병사로 변화하면 진공에 바탕한 묘유의 조화에 의하여 우주의 삼라만상이 생사유전하고, 선악업보가 상응하며, 유무ㆍ음양ㆍ길흉ㆍ화복 등 일체의 상대세계가 끊임없이 펼쳐진다. 즉 진공ㆍ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해서 무시광겁토록 은현자재한다.
‘일원상진리’를 진공의 체성과 묘유의 작용이라는 양면으로 나누어 설명했으나, 편의상 하나의 진리에 대한 양면적 관찰에 불과하다. 그들의 관계는 선후나 주종의 관계가 아니라, 체와 용이 상즉하여 둘이 아닌 상즉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소태산은 일원상에 관한 ‘게송’에서,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이나 구공역시 구족이라”고 하여, 진공의 체성(俱空)과 묘유의 작용(具足)이 둘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공ㆍ묘유의 양면관을 근간으로 하여 변ㆍ불변, 유상ㆍ무상, 공적ㆍ영지, 공ㆍ원ㆍ정, 대소유무 등 다양한 논리적 구조들이 전개되고, 그들에 의하여 법신불일원에 함축되어 있는 다양하고 심오한 다차원적 의미들이 조명되고 있다.
일원상 진리의 논리 구조로서의 진공묘유의 양면은 원불교의 신앙과 수행 전반에 걸쳐 불가결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교리도’에 명시된 ‘인과보응의 신앙문’과 ‘진공묘유의 수행문’은 그 내용에 있어서는 물론, 명칭에서 조차 ‘진공묘유’의 개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인과보응의 신앙문’의 핵심내용을 이루는 ‘법신불사은’의 개념은 주로 진공묘유의 논리에 근거하여 전개된 것이라면, 이에 비해 ‘진공묘유의 수행문’은 진공묘유의 논리를 기본으로 하면서 공ㆍ원ㆍ정의 논리가 병용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공묘유의 조화 [眞空妙有-調和] (원불교대사전, 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
2019.01.19
blog.naver.com/dlpul1010/221445785119 임기영 불교연구소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신비(神秘)
범휴스님과의 인터뷰 중에서 . . . 글 - - 조용헌
진공묘유의 신비
11년간 미국에서 불교 수행을 지도하면서 현지 지식인 및 주류계층 사람을 만나온 조계종 범휴(梵休) 스님은..
미국인이 은퇴한 후 가장 머무르고 싶어하는 도시이자 영화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시장을 지낸 바 있는 캘리포니아 주 카멜(Carmel) 시의 삼보사(三寶寺) 주지를 지냈으며, 세계적으로 기(氣)가 세다는 애리조나 주 세도나(sedona)에서 토굴을 짓고 4년간 집중 명상을 하기도 한 선승(禪僧)이다. 서양식 말로 ‘젠 마스터(Zen master)’이다.
▼ 그렇지만 생노병사의 고통을 받는 ‘나’는 있지 않은가? 고통 받고 시달리는 지금 여기의 ‘나’가 어찌 없단 말인가?
“맞다. 그걸 현상은 있는데, 본질적인 실체는 없다고 한다. ‘유업보 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다. 현상이라고 하는 업보는 현상이 생겨나는 그 순간에 있는데, 그 현상의 근원을 파고들어가면 업보의 실체는 없다고 본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서 죽음 앞에서 고민하는 ‘나’는 누구인가로 시각을 전환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고민하는 ‘나’는 누구인가. 그 ‘나’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우주적 연기의 조합물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무아(無我)라는 방편 보다는 비아(非我)라는 방편이 더 적합하지 않나 싶다. ‘내가 없다’는 관념보다는 ‘내가 아니다’라는 관념이 현대인에게 더 설득력이 있다. 인간은 자신의 관념에 따라 현상을 다르게 본다. 똥을 예로 들어보자. 똥이 몸 안에 있을 때는 더럽지 않다. 그러나 몸 밖에 나오면 더럽다고 여긴다. 똥은 더러운 것인가, 더럽지 않은 것인가?”
▼ 몸이라는 현상이 그렇다고 한다면, 마음이라는 현상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마음이 없다고 하기에는 마음의 작용이 분명하고, 마음이 있다고 하기에는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진공묘유(眞空妙有)가 마음이다. 비어 있으면서도 묘하게 작용하는 것은 있다.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다. 말장난 같기도 하다.”
▼ 진공묘유라는 개념을 논리적 사고로 무장한 서양인이 받아들이는가.
“서양인들에게는 양자물리학 같은 첨단 물리학의 이치를 빌려와 설명하는 게 효과적이다. 물질의 극미세(極微細) 단위, 원자(양성자, 음전자, 중성자)든 소립자(쿼크quark· 보스boss, 렙톤repton)를 구성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기본적인 입자든 그런 미세한 단위로 들어가면 전자현미경이나 광학현미경을 들이대고 그것들을 관찰하는 과학자의 마음과 극미세 단위의 물질이 서로 교감한다는 게 현대 물리학의 발견이다. 마음과 물질이 교감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극미세계를 관찰하는 관찰자가 어떤 마음을 내느냐에 따라 극미세계의 입자들의 파동이 달라진다는 것 아닌가. 이것은 진공묘유의 관점과 일치한다. 극미세계를 진공(眞空)이라고 보면, 묘유(妙有)는 마음이 될 수 있다. 극미세계에 들어가면 물질은 물질이 아니다. 물질의 원료는 비물질인 에너지다. 물질과 비물질이 둘이 아닌 것이다. 현대물리학의 발견을 받아들인 서양인들은 진공묘유를 납득할 수밖에 없다. 불교를 이야기하면서 현대 물리학의 이치를 많이 인용한다.”
▼ 현대물리학과 불교를 엮어 설명하려면 현대과학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 어렵지 않나.
“내가 출가한 청화(淸華)문중이 유별나게 물리학에 관심이 많다. 나의 은사 용타(龍陀) 스님도 그렇고, 용타의 스승인 청화, 그리고 청화의 스승인 금타화상(金陀和尙)도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다. 금타는 일제강점기에 내장산 벽련암(碧蓮庵)과 백양사 운문암(雲門庵)에 주석했는데, 출가 후 물리학을 배우기 위해 잠시 환속한 적이 있을 정도로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다.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 : 다부지고 굳세어 분별 망상 번뇌를 부수어버리는 부처의 삼매)에 들어가서 체험한 것을 ‘마음천문도’로 그려 남겨놓기도 했다. ‘과거에 도를 깨달은 아라한들이 금생에 물리학자로 태어나 석공(析空 : 공을 쪼개다)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한 적도 있다. 물리학을 중시하는 가풍은 청화로 이어져서, 그 제자인 용타 스님과 나도 영향을 받았다. 이게 이타카에서 미국 식자층과 교류할 때 좋은 발판이 됐다. 현대 물리학과 진공묘유는 궁합이 맞는다."
-니나-
blog.daum.net/peoplespresident/7387980 Peoples' President
종교가 정신과 의식 나아가서 초월적인 것을 다루고 있는 반면에, 자연과학은 물질과 그들 간의 상호작용을 감각에 의지한 실험적 검증을 통해 분석적으로 다룬다. 이 양자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특히 불교와 현대물리학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과학시대를 사는 인류의 큰 관심사 중의 하나이다.
현대과학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산업화가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구체적이고 압도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가공할 무기의 생산, 물신주의(物神主義)의 팽배, 물질문명의 찌꺼기인 공해, 생명복제나 인지능력이 있는 로봇 개발의 현실화 등에 의한 인간소외 등으로 인류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 관련된 과거·현재·미래와 원자세계·일상생활·우주에 대한 정보까지 과학만큼 신뢰할 만한 지식을 제공해 주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현대인에게 과학은 사물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이며 언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물질과 우주의 생성 및 그것들의 상호작용 방식, 그리고 생명과 의식의 본질 등을 철저하게 추구하던 현대과학은 기존의 전통적 세계관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던 인식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전혀 새로운 해석을 내림으로써 인간의 사고체계에도 대전환을 요구하게 되었다. 또한 과학은 일부 종교에서 가지고 있던 부분적 편협과 독선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해 주기도 하였을 뿐 아니라, 결코 종교와 과학이 언제까지나 만날 수 없는 평행선만 달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접점에서 만나게 되리라는 가능성도 보여 주게 되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과학이 없는 종교는 장님이며, 종교가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다”라고 한 말은 종교와 과학의 상호보완성을 극명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다.
인간의 자연현상에 대한 인식능력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인지할 수 있는가. 또 그러한 물질세계에 대한 탐구와 이해로써 인간의 문제도 다 해결될 수 있는가. 그 한계와 경계선은 어디인가.
본능적 지각에 관한 한 만물 중에서 인간이 결코 뛰어나지도 않으며 동물이나 곤충만도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인간은 우선 눈·귀·코·혀·살갗(眼耳鼻舌身)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세상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오관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는 외부세계에 대한 정보란 생각보다는 훨씬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예를 들면 눈은 넓은 파장영역의 빛(전자기파) 중에서 아주 좁은 파장 구간인 가시광선(可視光線) 영역 밖에 볼 수 없다. 그 나머지 파장의 전자기파에 대해서는 눈의 구조적 특성상 아예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혹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전기적 신호로 처리되지 못하여 뇌에 그 사실이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 우주공간에 가득차 있는 전자기파 중 라디오파·TV파·마이크로파·적외선 등과 같이 파장이 길거나, 자외선·X선·감마선 같이 파장이 짧은 전자기파에 대해서는 인간의 눈은 장님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관찰대상의 크기도 무한정 작은 물체까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백분의 1㎜ 정도까지 볼 수 있을 뿐이다. 한편 인간의 귀가 들을 수 있는 소리도 고막이 40에서 2만 싸이클의 진동수 영역에서만 반응하므로 40 싸이클 이하의 저주파나 초음파와 같은 고주파에 대해서는 인간은 역시 귀머거리나 다름없다.
그런데 반해 사람과 다른 시각과 청각의 조직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나 곤충의 경우는 사람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파장의 전자기파나 음파를 감지할 수도 있다. 가령 박쥐나 돌고래는 초음파로 사물을 감지하거나 서로 교신을 하는데 인간은 그 대화에 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본능적 지각에 관한 한 만물 중에서 인간이 결코 뛰어나지도 않으며 동물이나 곤충만도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인간을 일곱 개의 작은 창문(두 눈·두 귀·두 콧구멍·입)을 가진 감옥에 비유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무엇으로 인간을 다른 생물들과 구분지을 수 있는가? 그 가장 본질적인 두 가지 요소는 아마도 논리적·합리적 사고로 물질세계를 다루는 자연과학의 추구와 행복이나 가치와 같은 정신세계를 다루는 종교적 심성을 지녔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우선 과학적 사고를 통해 인간은 도구와 기계를 고안해 내어 자연과 물질세계에 대한 인식방법과 감지범위를 놀랍도록 확대시켜 놓았다. 예를 들면 전자현미경으로 물체 속의 원자배열 사진을 찍었다고 하자. 원자는 눈으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원자들의 모양과 크기가 어떠하며 물체 속에서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에 대해 마치 눈으로 본 듯이 믿게 되었다. 이러한 초감각 세계로의 진입은 오관의 직접 경험을 넘어서서 분석·종합하여 모형화할 줄 아는 고도의 인간사고의 결과이다. 이렇게 해서 지난 1세기 동안 인간의 인식범위는 상상하기조차 힘들 만큼 넓어졌고,1) 앞으로도 계속 확대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언젠가는 종교의 영역이 사라질 것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종교의 영역이 더 분명해지고 그 역할도 더 중요하게 될 뿐이다. 왜냐 하면 종교의 영역은 과학의 한계가 드러나는 곳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은 물질 간의 상호작용과 그 변화에 대해서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지 궁극적으로 그것이 왜 생겨나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답은 줄 수 없을 뿐더러, 특히 인간의 마음과 의지 또는 가치판단에 대해서는 과학은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꽃을 보고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고 느꼈다고 하자. 과학이란 그 꽃이 어떻게 피고 어떻게 지며 어떤 작용으로 그런 파장의 빛깔을 내는지 밝혀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인간이 느끼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과 그 파급효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다. 또 현미경을 이용하여 아주 작은 미생물까지 볼 수도 있지만 인간이 현미경과 같은 안경을 끼고 살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 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손과 얼굴에 득시글거리는 세균들을 보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그런가 하면 아무리 의학이 발달하여 인위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더 연장시키는 방법을 제공한다 하더라도 그 삶의 모습이 추하고 모독적일 때에는 그 방법을 포기하고 자연스럽고 인격적인 죽음을 택할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이와 같이 과학이 밝혀 주는 자연현상과 인간이 받아들이는 행복, 의지 그리고 가치판단은 전혀 그 차원을 달리하기 때문에 인간의 삶에 있어서는 자연과학의 발달과 무관하게 종교의 고유영역이 항상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공격적이고 보수적인 종교인들이 자연과학의 발달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자신들의 종교영역의 축소를 못마땅해 하면서 갈등을 빚는 일은 적지 않다. 이러한 과학분야와의 투쟁은 그들의 아전인수, 그리고 편협과 독선을 드러낼 뿐 인간의 이성과 심성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현대과학에서 자연원리를 바탕으로 인간의 인식과 관념의 문제까지 다루기 시작하면서 종교와 중첩된 영역이 발생하기 때문에 양자의 활발한 교류는 불가피하게 된 측면이 없지 않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종교가 그 깊이를 품위 있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방법과 사실들에 대해 겸허하고 탄력적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 점에서 불교는 다른 어느 종교보다도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교리체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교와 과학의 상호보완적 접근 가능성은 과연 단순한 인간의 희망사항인가, 아니면 실제로 현대과학의 발전이 이루어 낸 업적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는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물리학의 세기’라고 하는 20세기의 초반에 완성된 두 가지 기념비적인 현대물리학의 핵심이론들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과 ‘양자이론(量子理論)’이다.
에테르(ether)라는 절대기준계를 찾는 데 실패하면서 우주와 극미세계에서의 관찰과 측정의 본질에 대해 의심하던 물리학자들이 발견한 상대성이론과 등분배 정리의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다가 원자이론으로 거듭나게 된 양자역학은 현대물리학에서 예전의 뉴턴 역학을 대체하게 되었다.2) 상대성이론이 수백 년 간 서구의 과학을 지배해 오던 뉴턴식 기계론의 성곽을 골격부터 뒤흔들어 놓은 것이라면, 양자론은 이제 그 성곽이 서 있는 지반 자체를 없애 버린 셈이다. 이 두 이론에 의해서 이전의 소위 고전물리학으로 풀지 못하던 문제들의 대부분이 이해되기 시작하였고, 그 깊은 의미는 수십 년이 지난 이제서야 자연과학의 모든 분야는 물론 철학·종교·심리학·사회학 등의 다른 학문분야에서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였다. 물론 시공에 대한 절대성의 부정이나 물질과 의식, 그리고 주체와 객체 등의 통합성은 그러한 개념들이 없어도 상식적인 자연현상들이 근사적으로 설명되므로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그 중요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광대한 우주의 문제나 극미한 입자들의 현상에서는 상대론과 양자론의 개념은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것이며, 나아가서 인간의 사고방식이나 인식행위 전반에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과학자들은 더 이상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을 파장으로 분석해 내고 우주의 운행을 엄격한 힘의 관계로 낱낱이 분해해 버리는 차디찬 관찰자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 종교와 철학이 말하던 그 신비로운 영역의 입구까지 와서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짓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구의 환원주의적 세계관은 물질세계를 끝없이 쪼개어 부분에 대한 분석만으로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전통에 기초한다. 자연과학은 이를 근거로 발전하기는 했지만,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깊어감에 따라 전체계는 단순한 부분계의 합이 아니며 그 이상의 어떤 것이라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부분의 성질을 이해하는 것 못지않게 전체를 아우르는 시스템(system)적 안목이 절실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기 시작한 것이다. 실험과 관찰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과학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오직 명상만으로 찾아낸 불교의 연기론적(緣起論的) 세계관에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고 불가사의하기까지 하다.
불교와 현대과학은 각각 다루는 내용은 다를 수 있겠지만, 두 분야 모두 고도의 정신활동이라는 점, 현상의 본질과 원리를 철저하게 의심한다는 점, 어떤 문제이든 근원부터 다시 살펴보는 ‘성성한 깨어있음’과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도 버릴 수 있는 ‘철저한 비판정신’을 근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 세계에 대한 접근방식이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3)
그렇게 함으로써 행성을 천사가 날갯짓으로 민다든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든가 하는 등의 오해와 선입견을 깰 수 있었고, 마침내 뉴턴(Sir Isaac Newton, 1642∼1727)이 사과와 달의 운동이 동일한 운동법칙인 만유인력에 의해 진행된다는 보편적 법칙을 찾아내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무수한 천체의 운동이 설명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전자기학 이론이 발전하면서 그 이전에는 전혀 다른 것으로 알았던 전기현상과 자기현상이 동일한 물리적 근원에서 연유된다는 것과 빛이 전자기파의 한 형태라는 것도 증명되었다. 특히 양자역학은 파동과 입자가 동일한 성품의 두 얼굴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특수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서로 독립적이지 않으며, 물리학자 뉴턴과 철학자 칸트에 의해 제시된 선험적 절대적 시공간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일반상대론은 중력과 가속도가 동일하고 질량과 에너지가 동일하다는 것도 보임으로써 세계관의 큰 변혁을 가져올 수 있었다.
서양문화가 이원론적·분석적·미래지향적이라면 동양문화는 전일적·직관적·현세관조적이라고 할 수 있고, 서양이 자연과 인간의 문제를 부분적·대립적 개념을 토대로 변증법적 해결을 부단히 시도해 왔다면 동양은 전체적·조화적 개념을 토대로 연기론적 해소를 끊임없이 추구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서양문명의 중심축인 과학과 동양문화의 제반 핵심사상들을 연결 지으려는 시도가 196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활발해짐에 따라 불교와 현대물리학의 만남은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과 현대과학의 개념들은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추구하고 있는 분야 중의 하나인데, 그것은 불교가 인간이 얽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모든 현상들을 파악하는 데 과학적인 방법들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현대물리학의 확립에 크게 기여한 물리학자들이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4) 더구나 불교에서는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마저 구분하여 보지 않는다.5) 종이의 양면 같이 분리될 수 없다고까지 한다. 따라서 현대과학에서 제기되는 많은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은 과학 내부가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불교의 연기론에서 말하는 상호연관성 및 통합적 사고방식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사물의 존재 방식에 대한 중요하고 믿을만한 단서를 과학이 제공하여 준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현대과학이 제시하는 세계상에 의하여 부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길 또한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점에서, 본고는 앞으로 일곱 차례에 걸쳐 현대물리학이 제시하고 있는 사물 인식에 대한 본질과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 사이의 유사한 점들을 여러 측면-사물의 존재와 인식, 절대성의 부정, 시공간의 상대성, 결정론의 퇴조, 양자적인 세계, 사물의 본질은 자유 등-에서 비교·검토함으로써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었으면 한다.
2. 불교와 현대물리학
1) 사물의 존재와 인식
모든 사물과 현상은 어떻게 존재하고 어떻게 인식되는가. 불교에서는 인간과 사물의 존재방식, 그리고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 즉 고통의 뿌리에 대해 유일신을 믿는 종교와는 전혀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 우선 모든 현상은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는 근본원인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인과론(因果論)은 모든 과학의 기본입장-물론 현대물리학에서는 종래의 개별적이고 엄격한 인과율보다 집단적이고 확률적인 인과율을 말하고 있지만-과 궤를 같이 하고 있으며, 적어도 불교의 윤회사상이나 업보사상은 바로 이 인과론의 개체적 내지 사회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불교의 핵심사상인 연기론적 세계관에 의하면, 어떤 사물이나 인간도 완전히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다만 다른 사물들이나 인간들과의 상호작용이나 관계로서만이 존재하고 인식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인간이면 누구나 애지중지 끌고 다니는 ‘나(我)’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나’라고 할 때 나를 ‘나 자체’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상식적으로 ‘나 그 자체’는 아니라고 믿어온 것들, 또는 그런 것들과의 관계로서만이 나를 특징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름·몸·성별·생김새·신분·역할·직업·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즉 부자·부부·친구·선후배 등, 이 모든 것들은 껍질을 벗기고 또 벗기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양파와 같은 자아에 불과하기 때문에 나의 본질이 아닌 것 같지만, 그러면서도 나를 기술할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자연세계이든 인간세계이든 모든 존재는 예외 없이 그러한 상호연관성으로 존재하고 인식된다는 것이 연기론의 상의상존적(相依相存的) 세계관이다. 내가 가지는 생각이나 사상 같은 추상적 개념들까지도 다른 개인이나 사회 내지는 자연과의 부단한 상호작용 속에서 생기고 변화해 갈 뿐이지, 결코 나 개인으로부터 독자적으로 나오고 그대로 지켜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와 같이 ‘나’라는 것은 처음부터 상호의존적 인식과정을 떠나서는 실재(實在)하지 않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나’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써 파악될 수 없고, 이런 관점에서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를 주체가 없다고 한다(諸法無我). 이 점은 비단 인격체인 나에 대해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인식하는 유형·무형의 모든 삼라만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모든 존재의 실체가 없으므로 모든 현상 또한 한 순간도 정지해 있지 않고 쉴 새 없는 상호작용 속에 변해가고 있으며(諸行無常), 인간의 모든 고통과 문제들은 바로 이러한 무아(無我)와 무상(無常)의 원리를 체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생기는 탐욕·집착·무지에 연유한다고 한다(一切皆苦).
그렇게 머물지 않고 변해간다는 사실, 즉 무상에 대한 자각은 단순히 ‘있음’과 ‘없음’에 대한 분별이 아니라 ‘있게 되어 가는' 것과 ‘없게 되어 가는' 흐름에 대한 깨달음이며, 허무와 적멸의 실존논리가 아니라 다양성과 새로움, 그리고 가능성의 존재논리이다.
무아와 무상의 도리를 철저히 자각한 상태는 어떠한 것인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으며, 이 우주 안의 그 어느 하나도 서로 연관성이 없는 것은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가 본질에 있어서는 다른 존재들의 결합이라는 확신이 자각의 실체이며 불교의 이른바 연기론적 입장이다. 유형의 모든 사물들은 물론 무형의 모든 정신작용들도 그물코와 같이 서로 얽혀 있어서 그 중 어느 하나가 움직여도 다른 모든 것에게 영향을 주게 되고, 따라서 이 우주 안의 모든 것을 한 덩어리, 한 생명체인 유기적 공동체로서 파악하여야 한다. 그러기에 불교에서는 인간을 ‘소우주(小宇宙)’라고 하고 심지어는 ‘한 티끌도 전 우주를 포함한다(一徵塵中含十方)’고 말한다.
이러한 연기론적 세계관을 잘 표현한 것 중에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가 있다. 그 첫 귀절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로 시작되는데, 가을에 피는 국화꽃과 봄의 소쩍새 울음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 같으나 불교의 연기론적 관점에서는 서로 충분한 연관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내가 거실에 서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나 혼자만의 의지와 힘으로 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님을 곧 알 수 있다. 마루바닥이 나를 받쳐주고, 벽이 마루바닥을 버텨주고 있으며, 벽은 기초공사 때 세운 기둥에 의지하고 있고, 콘크리트 기둥은 그 속의 철근 때문에 힘을 받고 있고, 그 모든 건물덩이가 결국 땅이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안전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잡아당기면서 동시에 밀쳐내는 두 역할을 다하는 셈이다. 또 내가 마루 위를 걸어가는 경우를 생각해 보아도 내 발과 거실 바닥 재료의 분자들간에 아주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적당히 잡아당기는 마찰력이 존재하지 않고는 한 걸음도 떼어놓을 수 없다. 이 때 관여하는 분자의 수는 또 얼마나 되나. 직접 맞닿는 분자들도 있겠지만 그런 분자들이 그렇게 존재하게 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분자들이 연결되어 개입하고 있다. 나 하나를 서 있게 하고 걸어가게 하는 데에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난 숫자의 분자들이 함께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상해보라. 전 우주에 퍼져 있는 모든 분자 하나하나가 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결과가 나로 하여금 마루 위에 서 있게도 하고 걷게도 하는 것이다. 내가 서 있다는 이 간단하게 보이는 사건 하나에도 전 우주가 동시에 참여하고 있다.6) 심지어 누가 누구를 받치고 있는지조차도 불분명하지 않은가. 그야말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상즉상입(相卽相入)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주 작은 모래알 하나, 이름 모를 꽃 한 송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벌레 한 마리까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렇게 서로 의지하여 있게 하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장엄하게 어우러진 화엄세계요, 한생명이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그 자체로서 존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땅·바다·해·달·공기·습기·열기·짐승·새·물고기·곤충, 그리고 무수히 많은 하찮은 미생물까지 함께 어우러져 있음으로 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는 상의상존적 관계와 동체적(同體的) 질서를 자각한 자만이 우주적 생명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화엄경(華嚴經)」에서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인드라(Indra)의 진주 그물7)에서도 일(一)과 다(多)가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중중무진법계연기(重重無盡法界緣起)를 잘 표현하고 있다.8)
하나의 유기적 공동체로 파악된 ‘나’는 무아(無我)가 아니라 우주적인 전아(全我)로서 자아개념의 무한한 확대를 의미하고, 유한이 아닌 무한한 확대란 오히려 그 전아라는 관념마저도 부정하는 철저한 초월을 말하며 자연과의 합일(合一)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부단히 변화하는 모든 상대적 현상 그 자체가 바로 절대적 실상(實相)임을 확신함으로써, 있는 그대로 완전한 자유 즉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한편 무아의 경지 또는 절대적 자유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개체로서의 한 인간의 행위는 상당 부분 그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르며 그 책임 또한 철저하게 그 개인이 자각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원론적으로 볼 때 어디까지가 ‘나’인지가 분명하지는 않겠지만 나 개인을 떠난 전체 또한 있을 수 없고 모든 개체들이 우주적 질서에 평등하게 참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행위에 대한 옳고 그름은 단지 그 행위가 무아적 또는 전아적 입장에서 취해졌는지 아니면 아직 자각되지 않은 소아적 입장에서 취해졌는지 하는 기준밖에 있을 수 없다. 전자의 경우가 소위 업(業)을 녹이는 행위가 될 것이요, 후자의 경우가 업을 쌓아 가는 행위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분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을 무명(無明)이라 하여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우리 모두가 고도로 통합되고 상호연결된 한 조직체의 구성원이라는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전체적이고 조화로운 세계관을 체득하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하고 있다.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여래를 본다”는 부처님 말씀은 불교의 핵심을 한 마디로 드러내 보여 주는 가르침이다.
모든 사물은 상의상관적(相依相關的)으로 존재하고 인식되며 그 관계 속에는 인식행위인 마음이 반드시 작용한다는 불교의 연기론적 입장에서는 모든 존재는 절대적으로 독립된 실체가 없으므로 몸과 마음, 물질과 의식, 주체와 객체까지도 엄밀하게 분리시킬 수 없다. 주객이 부딪치면서 객관의 경계가 주관의 인식 세계에 어떻게 나타나는가는 얼마든지 가변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인식에 관한 한, ‘모든 현상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 마음은 주인이며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一切唯心造)’라고 할 수 있고, 「화엄경」에서도 “주(心)와 객(境)이 하나로 합하여 법계(法界)를 두루 통한다”고 설하고 있다.
과학에서도 역시 사물들 간의 상호작용이나 측정될 수 있는 양(量)들 간의 관계만을 다룬다. 즉 ‘무엇’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으며 그 무엇이 ‘어떻게’ 행동하고 그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인 힘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를 밝혀내고자 한다. 물리학에서 다루는 대표적인 몇 가지 힘(중력·전자기력·핵력 등)과 보존법칙(에너지·운동량·전하량 등)은 바로 ‘무엇’이라기보다 ‘어떻게’라는 관계를 말한다. 과학에서 연속적으로 ‘왜’라고 질문하는 경우에도 종국에는 ‘어떻게’라는 현상해석으로 결론을 낼 뿐 신학에서처럼 신(神)이라도 가정함으로써 어떻게든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과학이 형이상학과 달리 철저하게 측정이라는 방법을 통해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수치적인 결과 또는 기술방법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고, 그런 범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아예 과학의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서양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는 모양·크기·위치 등은 순전히 물리적 대상 자체에 귀속되는 객관적 성질이고 색·소리·냄새·맛·감촉 등은 인간 고유의 주관적 성질로 보아 철저히 분리해 왔다. 그러나 과연 아름다운 무지개, 감동적인 음악, 향기로운 냄새, 맛있는 음식, 부드러운 감촉은 그 자체로 객관적인 진리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이 대상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에 불과할 뿐 객관적이고 고정불변인 무엇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일곱 가지 색깔의 무지개가 우리 눈에 나타나는 이유는 빛의 굴절과 반사, 파장에 따른 굴절률의 차이라는 물리학적인 설명 외에 인간은 빨간색에서부터 보라색에 이르는 파장대의 빛만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일 뿐, 만일 우리가 적외선이나 자외선을 감지할 수 있다면 무지개는 일곱 가지 이상의 색으로도 보일 것이고, 빨간색만을 감지할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빨간색 원호를 보게 될 것이며, 하늘색만을 감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늘과 무지개를 구별하지 못하여 무지개라는 현상 자체를 감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다른 종류의 감각에 대해서도 똑 같은 논리가 적용될 수 있음은 자명하다.
한편 우리가 무엇을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경험한 것과 비교하여 판단할 뿐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은 눈앞에 내밀어도 그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오관을 통한 감각은 순간적이지만 대상의 세계 전체와 기억과 같은 나의 인식의 역사, 아니 어쩌면 인류 역사 전체를 동원해야만 비로소 인식이 가능해진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한 가지 사물을 보고 인식하는 일조차도 우주를 관통하는 모든 인식의 눈이 동원된다는 사실이 참으로 새삼스럽다.
뿐만 아니라 현대물리학에서는 바로 여기에 이렇게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던 위치라든가, 크기·시간·속도·에너지와 같은 모든 구체적인 물리량들은 이제는 그것을 혼자 떼어서는 정의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마저도 가장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우주 규모의 현상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들을 분리시켜 생각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9) 우리 몸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살갗에 조그만 상처가 나도 온몸이 아파하는 모습을 우리말로 ‘엄살떤다’고 하는데, 그 엄살의 어원은 빠알리어로 전체라는 뜻인 ‘옴’에서 와서 ‘옴살’, 다시 그것은 ‘온살’ 즉 온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엄살을 떨 수 있으려면 새끼손가락 끝의 작은 세포조직이 몸 전체와 밀접한 연결망(network)을 갖고 있으면서 늘 깨어있고 대화함으로써 하나의 세계가 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중국 양자강에서 한가롭게 노니는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수천만 리 떨어진 뉴욕에 폭풍우를 몰고 올 수 있다는 소위 ‘나비효과(butterfly effect)’10)도 그 단적인 예 중의 하나이다. 부분적인 성질이 전체적인 성질을 지배하고 나타낸다는 현대 통계물리의 Fractal 이론도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화엄사상과 상통하고 있다. 이 우주의 한 모퉁이에서 펼쳐지는 조그마한 사건도 우주 전체의 관계에서 만들어지고 다시 또 우주 전체로 파급되는 것이 연기론적 실재이며, 이는 현대물리학에서 어김없이 확인되고 있다.
또한 소립자들의 세계인 극미현상에서는 불확정성원리에 의해 물질과 물질간의 상호작용 뿐 아니라 관찰행위 자체도 자연현상에 영향을 주게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것은 바로 인식이란 행위가 물질적인 상호작용을 빌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인식의 한계 때문에 생긴다고도 볼 수 있다. 물리학계에서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물질의 이중성, 즉 물질의 본질이 입자냐 파동이냐 하는 문제에서도 역시 인식행위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자나 빛은 인간이 만들어 낸 그 두 개념을 동시에 갖고 있으면서 우리가 입자의 성질을 보기 위한 실험을 행하면 입자의 얼굴을 보여 주고 파동의 특성을 보려는 실험상황에서는 파동의 얼굴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종래 입자라고만 생각되어 왔던 전자는 파동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여겨졌던 간섭현상이나 회절현상을 나타내고(전자현미경 등), 또 전자기파인 빛도 그 간섭과 회절 현상이 파동의 개념으로 잘 설명이 되지만, 금속에 빛을 쪼였을 때 마치 입자로 때려 준 것처럼 금속 표면으로부터 전자를 떼어 내는 현상(광전효과)은 파동의 개념으로는 전혀 설명이 불가능하다. 1923년 프랑스 물리학자 드브로이(Louis V. de Broglie, 1892~1987)는 “자연은 대칭적이다”라고 생각하여 파동의 특성인 파장(λ)과 입자의 특성인 운동량(p) 사이의 일반적인 관계 λ= h/p, 즉 물질파 개념을 제안함으로써 전자의 회절현상을 예측하였다.11)
요약하면, 양자세계의 모든 대상은 관측에 의해 그 행동을 달리한다. 우리가 대상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확인하려고 하면, 확인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대상의 상태는 달라진다. 그러므로 대상은 더 이상 우리와 관계없이 행동하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고, 따라서 고정불변의 객관적일 존재일 수 없다. 양자역학은 이에 대해, 대상의 ‘있음과 없음, 그리고 그 모습’은 ‘우리와 무관하게 저만치 홀로 서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느끼며, 우리에 의해 정의되고, 우리와 함께 비로소 완성되어 의미가 있게 되는 그 무엇’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물질현상은 고정된 실체가 아닌 끊임없이 출렁거리는 상호작용과 관계만이 존재하며 인간의 인식행위도 필연적으로 그 관계 속에 개입된다는 현대물리학의 기본철학은, 우주로 열린 하나의 온생명이 있을 뿐 그러한 상의상관 관계 또는 인식과정을 떠난 영구불변의 개별적 주체 즉 자아(自我)라는 것이 본래 없다는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절대성의 부정
이 우주에는 과연 절대적 존재 또는 기준이 존재하는가. 우주의 중심은 어디이며 영원한 것은 존재하는가. 불교와 자연과학의 관점에서는 어떤 존재에도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절대성이나 중심을 부여하지 않는다. 만일 있다면 우주 전체와 우주 법칙 그 자체만이 절대적이며, 삼라만상의 모든 개체들은 다 연관성이 있고 각각 대등한 존재로서 스스로 중심이 될 뿐, 그 어떤 사물이나 인격체도 완전히 독립적이면서 절대적인 것은 없다. 따라서 신(神)도 부처도 절대자일 수 없다. 이 차원에서는 불교의 절대평등의 경지를 말하고 있으며, 부처는 단지 비밀스런 법(法)의 경계를 먼저 열어 보인 스승일 따름이다.
불교는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가 자기 자신에서 비롯된다고 보아 오직 수행을 통하여 우리 자신과 세계의 본래 모습을 깨달음으로써 스스로 속박을 끊고 완전한 자유 곧 해탈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전체가 한 생명인 우주 속에 평등하게 참여하고 있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구성원은 각자 스스로를 창조하고 유지해 나가는 주체일 뿐, 이러한 법계를 벗어나 존재하는 그 어떤 초월적이거나 절대적인 존재를 상정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복종해야 할 외부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치 않으며 밖에서 어떤 구원을 얻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신(神)을 어떻게 볼까? 서양사람들이 생각하는 절대유일신을 말한다면, 불교는 무신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의미가 깨달음에 있으므로, 신조차도 진리의 결집체일 수 없고 유일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아직도 업장에 눌려있는 깨우쳐야 할 몸 없는 중생으로 보아 결코 경외시하거나 숭배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임제선사의 살불살조(殺佛殺祖)가 말해주듯 깨달음의 경지에서는 부처마저 신격화·관념화 하지 않기 위해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라’고 가르치는 마당에 하물며 귀신이랴. 그러기에 종교생활에서는 물론 사회생활에서도 신이나 지도자에게만 의존하는 노예근성을 불교에서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물리학의 상대성이론에서 절대좌표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논리와 같다. 예를 들어, 다리 위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거나 잔디밭에 누워 떠가는 구름을 볼 때 사실은 강물이나 구름이 흘러가는지 내가 흘러가는지 알 수 없고,12) 또 나란히 서 있던 두 차 중 어느 하나가 움직일 때 옆 차가 움직이는지 내 차가 움직이는지 모를 때가 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절대좌표계가 없기 때문에 어느 것이 움직이고 어느 것이 정지해 있다고 말할 수는 없고 다만 두 물체는 상대적으로 움직인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모든 물리법칙, 즉 물리량들의 관계식은 두 계에서 동등하게 성립되므로 어떤 실험으로도 두 좌표계의 우위를 판별할 방법은 없으며, 결국 두 계는 상대적으로 동등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고방법은 모든 물체의 운동에 대하여 참고하고 비교하여 이것은 움직인다, 저것은 정지해 있다고 말해 줄 절대좌표계가 우주 어디엔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고 싶은 인간의 집착에 커다란 변화를 강요하게 된다. 실제로 19세기 후반까지 물리학자들은 에테르13)라는 가상의 물질이 이 우주공간에 꽉 차 있다고 가정하여 절대 고정좌표계로 삼으려고 시도하였다. 에테르라는 절대정지계가 있다면 지구는 그것에 대해 운동하고 있으며,14) 지구의 자전·공전을 생각하면 지구상에서 측정하는 빛의 속도에 그 영향이 나타날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여러 가지 실험적 사실은 에테르라는 물질이 대기 또는 진공 중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고 해석될 수밖에 없는 결과가 나왔다. 즉 서로 다른 운동을 하고 있는 좌표계에서는 빛의 속도가 다르게 관측되기 때문에, 에테르에 대한 지구의 운동, 곧 절대정지계에 대한 지구의 상대적 운동을 검출한다는 것은 지구상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행하는 빛의 속도가 차이가 나는 것을 측정하여 쉽게 증명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런데 이를 검증하기 위해 1887년 마이켈슨(A.A. Michelson, 1852∼1931)과 몰리(E. Morley, 1838∼1923)가 시도한 정밀간섭실험 결과, 여러 방향으로 측정한 빛의 속도가 동일한 값으로 관측됨으로써 예측이 빗나갔던 것이다.
이에 대한 설명을 위해 여러 제안이 나왔지만 최종적으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등장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아인슈타인은 광속도불변의 원리에 의해 절대정지계의 존재, 즉 오랜 동안 물리적 실체로 상정되고 있던 에테르의 존재는 물론 절대정지계 자체를 부정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절대좌표계는 미련 없이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21세기에 ‘절대성의 부정’에 근거를 둔 상대성이론을 의심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다.
또한 무엇이 우주의 중심인가 하는 문제에서도 지구를 중심으로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소위 천동설(天動說)에서처럼 지구가 물질세계의 기하학적 중심에 위치하여야 지구가 우주 역사 전개의 주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생물은 오직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여야 인간이 역사의 중심이 되는 것도 아니다. 현대과학의 발전과 함께 신중심, 지구중심적 사고에서 인간중심으로 이동하기는 했지만, 인간중심마저 철저히 반성하게 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현대물리학에서 모든 자연현상에 대한 상대성의 인식과 절대좌표계의 포기는 실로 인간사고의 혁신적인 진전이며, 고정불변의 실체를 부정하고 무상한 상대성 그 자체를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불교의 연기론과 기본적으로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사물에 대한 상대적 인식을 불교에서는 일수사견(一水四見)으로 비유하면서 유연하게 인정하고 있다. 같은 물이라도 ‘천상의 사람이 보면 유리로 장식된 보배로 보이고, 인간이 보면 마시는 물로 보이며, 물고기가 보면 사는 집으로 보이고, 아귀가 보면 피고름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인식 뿐 아니라 쓰임새로도 달라지게 되는데, ‘물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지만,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는 백유경(百喩經)의 말씀이 그 좋은 예이다.
반면에 서구역사에서 종교가 상대성과 유연성을 상실한 채 편견과 독선으로 저지른 과오는 과학과의 마찰에서도 적지 않은 사례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우주론의 문제였는데, 기독교의 엄격한 교리해석 때문에 우주에 관한 한 논의 자체가 자유롭지 못했고,15) 심지어는 우주가 유한한 지 무한한 지에 대한 논의로 인해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16) 고대 사람들이나 기독교인들은 자연을 초월한 어떤 존재, 즉 신이 세상과 자연을 창조했다는 우주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매일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미루어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들이 24시간을 주기로 회전운동하고 있다’는 천동설이 2세기 초엽 프톨레마이오스에 처음 의해 제안되었고, 6세기 경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다시 정리되고 주장되었다. 이러한 ‘지구중심적 우주론’은 중세 교회의 교리로 채택되어 소위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서양의 세계관을 지배하게 되었다. 1천5백여 년이나 부동의 권위를 누려 왔던 세계관이 혁명적으로 바뀌게 된 일련의 사건, 즉 과학혁명은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지동설(地動說)을 발표하면서 엄청난 충격과 함께 막이 오르게 된다.17) 천체가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일명 태양중심설)을 발전시킨 과학자는 갈릴레이였다.18) 그러나 그는 로마 교황청에 고발되어 종교재판에 회부되는 수난을 겪게 되는데, 생명에 위협을 느낀 그가 공개적으로는 지동설을 강하게 주장하지 못했지만, 재판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한 말은 유명하다.
현대 과학은 지구와 태양만이 아니라 우리 은하도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주의 기하학적 구조 때문에 우주의 어느 곳에도 중심이라고 할 만한 곳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중심이 있어야 한다면 우주의 모든 부분이 다 중심이다.19) 그들이 모두 중심이고 그들이 각각 모두 동등한 주인공이다. 자신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이 우주의 일원이 되었을 때 그 모두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주인공이라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화엄의 세계이며,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란 부처님의 선언도 바로 이러한 절대평등, 절대자유를 바탕으로 한 인간해방이자 생명해방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가 여러 민족, 다양한 문화 속에 전파되면서도 비교적 갈등을 야기시키지 않고 융화될 수 있었으며,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가 지적했던 “세계적인 종교 중 종교를 명분으로 내세워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던 종교는 불교뿐이다”라는 사실은 불교의 삼라만상에 대한 절대성·영원성의 부정이 그 깊은 뿌리였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자기의 견해를 주장할 때에는 ‘이것은 내 견해, 내 생각이다’고 해야 하는데, ‘이것만이 진실하고 다른 것은 모두 잘못 되었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악은 결코 악으로 갚아지지 않는다. 인내와 관용만이 악의 순환을 막을 수 있다”고 독선과 편견을 경계하고 양보와 화해를 덕으로 삼을 것을 누누이 지적하신 바 있다. 2천5백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이 말씀이 새삼 절절한 것은 왜일까. 일부 국가와 정치지도자들이 자유·인권·평화와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행복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희생정신과 인간해방을 강변하고 있지만, 그것은 짐짓 탐욕을 숨긴 경우이거나 아니면 종교와 결탁한 집단최면에 의한 자기 합리화 또는 대중 속이기에 불과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특히 절대신을 절대로 믿는 종교근본주의20)의 독선과 편견에 의한 배타성과 호전성은 그 폐해가 실로 심각하다 할 것이다. 일체 만물이 동등하게 참여하고 있다는 불교적 사고와 달리, 절대신의 존재와 그 완전성·불변성·유일성·절대성·무모순성·정지성을 확신하는 종교일수록 세계를 선과 악으로 간단히 구분하고21)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획일성이나 자신만이 옳다는 착각으로 모든 것을 자기 잣대로 재단함으로써 결국 증오와 갈등을 부추기고 재생산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서구의 역사를 4백여회의 종교전쟁의 역사라고 할 만큼 유일신을 믿는 종교들간의 증오와 충돌이 그칠 새가 없었던 것은 절대기준과 흑백논리가 그 뿌리이며 과연 이렇게 전쟁을 충동질하는 종교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다시 하게끔 한다. 현대물질문명을 꽃피우고 있는 21세기를 사는 현재 지구상에도 성전(聖戰) 또는 정의로운 전쟁(Just War)이란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가. 절대성의 부정, 다양한 가치의 상대적 인정, 관용과 화합은 평화를 염원하는 인류가 늘 되새겨 봐야 할 화두이다.
3) 시공간(時空間)의 상대성(相對性)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양인가. 불교와 현대물리학에서는 모두 시공(時空)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있다. 즉, 시간과 공간은 고정된 척도가 아니라 계(系)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시간과 공간은 개인이 처해 있는 상황이나 세계에 따라 그 크기를 달리 느낄 수 있는 양이며, 그 자체로서는 절대적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연기론적 해석이다. 특히 상대적 시간개념이 많이 소개되는데, 예를 들어 <현우경(賢愚經)>에서 ‘천상(天上)에서의 수명은 4천 년’이라고 하고 ‘도솔천(도率天)의 하루는 지구에서의 4백 년’에 해당된다고 한다. 또 <화엄경>의 <초발심공덕품(初發心功德品)>에서도 “긴 겁(劫)이 짧은 겁과 평등하고 짧은 겁이 긴 겁과 평등하며 일 겁이 무수한 겁과 평등하고 무수한 겁이 일 겁과 평등하며…”라고 하여 시간 개념의 상대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시공의 개념은 인간이 인간세계에서 따로 따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 뿐, 있다면 끊임없이 생멸(生滅)하는 현상만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보통 시간과 공간에 대해 고정관념을 가지고 산다. 시간이란 인간의 삶이나 자연현상과는 무관하게 이 우주 속에 흘러가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또 한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한 시간이며, 1m라는 길이도 어느 누구에게나 1m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서구과학의 물질관에서 물질은 시간과 독립된 속성을 가지며 시간의 흐름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물질이 변화한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예를 들면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시간과 공간이 경험적 개념이 아닌 선험적 개념이기 때문에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은 그 자체로서 자명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뉴턴도 1687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에서 “절대적이고 본래적이며 수학적인 시간은 그 자체가 하나의 본성이다. 따라서 외부의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변함없이 흐른다. 그리고 이는 ‘지속’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고 함으로써 소위 ‘절대시간’을 주장하였다.
그에 반해 불교에서는 항상 변하고 있는 무상성(無常性)을 깨닫는 일이 전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구사론(俱舍論) 같은 불교론서에서 물질을 시간과 결코 분리시켜 볼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하고 있음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관점은 철학에서 시공간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오직 현상 또는 사건만이 존재한다는 소위 사건이론(event theory)과 흡사할 뿐 아니라, 그동안 완전히 별개로 생각해왔던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분리되지 않고 소위 4차원 시공간으로 함께 다루어야 하며, 그 크기도 관측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측정될 수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론과도 아주 유사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운동의 상태를 기술하는 기준계에 절대좌표계의 존재가 부정되므로 시공간은 관측자의 운동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는 것은 당연하다.
다 시 말해 실험적 관측을 통한 사물의 인식에 관한 한 시공에 대한 인간의 고정관념은 아무런 근거도 없고 옳지도 않다는 것이 밝혀진 셈이다. 시간과 공간이란 도대체 어떻게 정의되고 어떻게 측정되는가. 물리학에서의 시간이란 한 지점에서의 두 사건 사이??예를 들면 시계추가 한 번 왔다 갔다 하는 것 따위??를 어떤 양으로 약속하는 것이고, 공간도 두 지점 사이??예를 들면 막대의 양 끝 따위??를 동시에 측정한 양으로 정의된다. 특수상대성 이론에서 운동하는 계와 정지해 있는 계에서 관측하고 있는 동일한 사건의 시간이 서로 다르게 측정된다는 것은 운동을 매개로 시간과 공간이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상 대성이론에 의하면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두 관측자는 자기 것보다 상대방의 시계는 느리고 길이는 짧게 느끼는데,22) 이미 논의했던 바와 같이 절대좌표계가 존재할 수 없으므로 두 관측자들의 주장은 모두 옳다. 다만 이와 같은 ‘시간지연’ 또는 ‘길이축소’를 쉽게 느낄 수 없는 이유는 측정대상이 빛의 속도에 가까워질 때만이 비로소 상대론적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일상생활이나 뉴턴 역학에서 공간의 수축이나 시간의 늘어짐을 관측할 수 없거나 무시해도 괜찮은 것은 운동하는 물체의 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워낙 작아서 상대론적 효과가 거의 감지될 수 없을 만큼 미미하기 때문이다.23) 그러나 상대론적 시공간은 원자 또는 그보다 더 작고 빠르게 운동하는 소립자의 미시세계24)에서는 물론 우주 속의 은하계나 행성과 같은 거시세계25)의 운동을 논하는 데 있어서도 어김없이 확인되는 보편적인 법칙임이 입증되었다.
한 편 인간은 동일한 시간일지라도 그 사람의 감정 상태에 따라 느끼는 시간의 크기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과연 과학적 실체가 아닌 환상에 불과한 것일까. 가령 꼭 봐야 할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거나 정말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경우 그 1분은 한 시간처럼 길게 느껴진다. ‘일일여삼추(一日如三秋)’라는 느낌은 일상에서 누구나 어렵지 않게 겪게 되는 심리상태이다. 반면에 좋은 사람과 함께 있거나 재미있는 일에 몰두할 경우 몇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은 빠른 법이다. ‘백년을 하루 같이’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어쩌면 두 심리 상태에 있는 사람의 경우 실제로 여러 가지 육체적 변화가 생기는지 정밀하게 측정해 봐야 할지도 모른다. 공간축소도 마찬가지이다. 꼭 보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은 ‘천리를 한 걸음에’ 달려가서 온몸으로 맞게 된다. 또 동양에서는 예부터 몸이 아주 날쌘 사람은 똑같은 거리를 가더라도 마치 다른 사람보다 짧은 거리를 가는 것처럼 빨리 달린다고 해서 소위 ‘축지법(縮地法)’을 쓴다는 말을 하는데, 이 역시 단순히 상상의 세계가 아닐 수도 있다. 순전히 이론적으로만 본다면 빠르게 달리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빠르다는 사실 외에도 정지해 있거나 느리게 가는 사람이 보는 거리보다 짧게 인식하기 때문에 축지가 가능하다. 다만 그 빠르다는 것이 빛의 속도에 비해 견줄만한 것일 경우에만 그 차이를 관측할 수 있을 텐데 사람이 날쌘 것을 두고 상대론적 효과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 러나 생명의 세계에서도 상황에 따라 시간이 신축적이라는 얘기는 의미가 있다. 예를 들면 지구에 대해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은 수명이 더 길어질 것이다. 그래서 필립 프랭크라는 물리학자는 “여행하라. 그러면 젊음을 유지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빠르게 운동하는 세계에 사는 하루살이 역시 내 시계로 관측할 때 몇 날 또는 몇 년을 살 수도 있다. 물론 상대방의 맥박도 시계도 그만큼 느리게 뛰고 느리게 갈 것이므로 그 세계에서는 역시 하루살이에 불과할 것이고, 따라서 더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불교경전 여러 군데에서 이와 유사한 시간개념, 즉 이미 언급했듯이 각기 다른 세계에서는 시간단위가 다르다는 언급이 보이는 것과 특히 시간에 대해 ‘겁’이나 ‘찰나’ 등의 세밀한 정의가 내려진 점은 흥미롭다.26)
그 런데 시공간이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다고 해서, 그리고 다른 좌표계에서 볼 때 선후관계가 다르다고 해서 한 좌표계 또는 한 관측자의 입장에서 볼 때 사건의 순서마저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가령 비행기가 뜨기도 전에 목적지에 닿는다거나 어머니보다 자식이 먼저 태어난다거나 하는 일이 있다면 이 세상은 대혼란이 초래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없다. 상대성이론에서는 각각 다른 세계에서 사건의 시공간적 치밀도가 달라지거나 사건의 선후를 다르게 판정 내릴 뿐, 한 세계에서는 일관성 있게 시간이 적용되고 사건의 전개되므로 인과론의 근본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더 구나 우리가 정지해 있다, 느리다, 빠르다 하는 문제도 사실은 상당히 상대적이다. 물체의 속도라는 물리량은 움직인 거리를 시간으로 나눈 양인데, 관측하는 사람의 운동 상태가 규정되지 않고서는 정의조차 되지 않는다. 앞마당에 서 있는 나무는 분명히 정지해 있다. 그러나 그 나무가 그 곳에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내가 일상적으로 정지해 있다고 단정하고 있는 지구 표면을 무심코 그 기준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구 자전을 생각하면 지구표면에 있는 모든 물체는 1초에 460m, 즉 아주 빠르게 달리는 고속철의 5배 이상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구덩어리 자체가 매 초당 30km나 되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산다.27) 그러면서도 나무가 움직인다고 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항상 나무와 함께 움직이고 있는 그러한 상황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그것을 관측하는 나와의 인연, 그것이 서 있는 대지와의 연관 속에서 오직 상대적으로 서 있을 뿐이다.
이 제 우리는 시공개념의 절대성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원래 상대성원리는 아인슈타인이 두 장소에서 일어나는 두 사건의 동시성(同時性)과 같은 기본적 개념까지 비판함으로써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사건의 동시성이나 존재의 시초(始初)나 종말(終末)에 관한 논란도 냉철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동시성에 대한 우리의 상식이 얼마나 단순한지 알아보자. 세 사람 A, B, C가 나란히 한 직선 상에 있다고 가정하자. 세 사람이 상대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경우 A와 C에서 동시에(멀리 있는 제 4의 관측자가 보기에) 전구를 켜면 물론 B는 두 전구가 동시에 켜졌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각각 상대방의 신호가 자기에게 도착하는 데 시간이 걸리므로, A는 자신의 전구가 먼저 켜졌다고 할 것이고 C 또한 자신의 전구가 먼저 켜지고 나서 A의 전구가 나중에 켜졌다고 주장할 것이다. 즉 B에게는 동시적으로 일어난 두 사건이지만, A와 C에게는 전구가 켜진 사건이 자기에게서 먼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만일 B가 A쪽으로 달려가면서 두 사건을 관측한다면, A에서 오는 빛이 먼저 도착하는 반면 C로부터는 멀어지면서 관측하기 때문에 C의 빛은 나중에 도착할 것이므로 B는 당연히 A의 전구가 먼저 켜졌다고 판정을 내릴 것이다. 사건의 선후관계와 동시성이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인가? 세 사람 모두 빛이 도달하기 전에는 사전에 전등이 켜진 사실을 알 방법이 없으므로 모두가 옳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시간은 공간과 분리될 수 없으며, 모든 존재는 자신에 의해 의미가 부여되는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있을 뿐, 어느 세계가 진실이고 어느 세계가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대등하며 소중하다.
별 의 관측도 마찬가지이다. 빛이 태양으로부터 지구까지 오는 데 8분 정도 걸리고, 태양계 밖의 가장 가까운 항성인 알파별에서는 4년, 우리 은하계 중심으로부터는 3만년, 은하계의 다른 끝에서는 10만년, 그리고 우리의 은하계 밖에 있는 다른 별무리인 안드로메다(Andromeda) 은하에서는 250만 년이나 걸린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관측하고 있는 안드로메다의 빛은 실제로는 250만 년 전에 그 별을 떠난 빛이므로 현재의 그 별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되어 있는가에 대해서는 알아낼 방법이 없다. 즉, 우리가 지금 관측하고 있는 여러 별빛에 대한 지식은 우리에게는 동시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만, 별들의 거리에 따라 각각 다른 시간에 떠난 정보이므로 실제로는 시간적 ‘깊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천체물리학에서는 이 우주가 언젠가 순간적으로 대폭발(big bang)을 일으켰고 그 후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으며 이 팽창속도로부터 역으로 계산하면 우주의 나이가 137억 년이나 되며 오차는 1% 이내라고 한다. 그런데 창조론자들은 이것을 근거로 해서, 우주는 누군가에 의해서 창조되어 시작되었고 따라서 바로 그 누군가에 의해 종말도 올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초가 있을 것이고 그래서 언젠가 종말이 올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 단순하고 선형적인 사고의 산물이다. 만일 먼 거리로 떨어져 있는 공간이 순간적인 시간차원에서 하나로 모아질 수 있는 우주공간이 있다면 그런 우주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는 성질이 아주 다른 우주일 것이다. 과거에 있던 것과 새로 탄생된 것 사이에는 소위 특이점(critical point)이라는 경계로 구분되어 있어서 서로 넘나들 수 없는 전혀 다른 물리계라는 것이다.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시공간은 극도로 휘어질 수 있고, 만일 4차원의 시공간이 시간축 쪽을 향해 닫혀질 수 있다면 우주는 수백억 년의 주기로 현재와 같은 시간이 반복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흔들이 우주론(oscillating universe)’28)의 가능성은 오히려 동양적 성주괴공(成主壞空)의 반복 또는 불교의 윤회전생설(輪廻轉生說)을 뒷받침하고 있어서 창조론자들의 아전인수격 주장보다 ‘시작도 끝도 없다(無始無終)’는 우주의 운명에 대한 불교적 해석에 오히려 무리가 없다고 보여진다.
4) 결정론적 세계관의 퇴조
인 간의 자유의지는 인정되는가. 물질은 물론 정신 영역까지도 이미 정해진 역학관계에 의해 펼쳐지는 운명은 아닌가. 불교의 인과응보 사상은 불교가 인과론과 함께 자유의지에도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자연과학의 입장은 어떠한가. 금세기 이전의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믿어 왔던 기계론적 세계관이나 엄격한 인과론에 의하면, 지나치게 개체들의 인과율에 집착한 나머지 오히려 자유의지마저도 부정되는 경향을 보여 온 게 사실이다.
기 계론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우선 정신과 육체 또는 물질은 분명히 별개의 세계에 속한다고 보며 또 개개의 입자들도 서로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하면서 물질세계는 그 입자들의 단순한 집합체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구성요소들의 움직임과 인과적인 연결만 정확히 관찰하여 기술하면 완벽한 이해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데카르트가 추론해 낸 이와 같은 분석적이고 기계론적인 발상은 물질세계를 다루는 데 대단히 편리한 방법으로 근대과학의 기초가 되었다. 뉴턴 역학 역시 기계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물질세계의 이해이며 우주의 운명에 대한 결정론(決定論)적 사고를 낳게 한 배경이 되었다. 19세기 정상급 물리학자였던 켈빈은 “이제 물리학에는 그저 ‘소수점 아래’를 다듬는 정도의 사소한 문제밖에 남아있지 않다”고까지 자신만만하게 말하기도 했다.29)
이 와 같이 우주의 모든 현상들이 이미 사전에 역학적으로 결정되어 있고 단지 그대로 진행되고 있을 뿐이라는 결정론이나, 모든 우주의 운행과 개체들의 행위까지도 우리들의 권한 밖의 어떤 초월적인 힘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는 운명론은, 너무 경직되어 있어서 인간의 심성이나 주변상황을 개선해 보고자 하는 종교적 노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어 왔다. 한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것은 예정된 대로 흘러갈 것이며, 혹 변화의 선택 가능성이나 자유의지를 말하더라도 그것조차도 이미 결정되어 있던 사항으로 볼 것이다.
그 러나 결정론이나 운명론에 강한 의심과 불안을 품고 있던 인간들에게 자유의지가 들어설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은 소위 ‘상보성원리(相補性原理; Complementarity)’와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 Uncertainty Principle)’이다.
보 어가 제시한 ‘모든 물질은 근본적으로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소위 입자-파동의 이중성(二重性), 즉 상보성 원리는 고전물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난해한 문제점 중의 하나였다.30) 입자란 돌멩이와 같이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의 작은 덩어리이며 파동이란 빛이나 물의 파도와 같이 흩어져 퍼질 수 있는 물질적 또는 비물질적 떨림으로, 이 둘은 본질적으로 다른 성질을 갖고 있다. 그런데 양자역학적 실험상황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것처럼, 모든 물질의 존재모습은 그 자체로 고유하게 확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둘러 싼 환경, 즉 그 존재를 관찰하기 위한 실험상황 또는 인식행위에 따라서 입자로서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고 파동으로서의 특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 한 관찰자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가 따로 있다는 고전물리학의 전제가 무너지는 것은 입자-파동의 이중성(二重性), 즉 ‘상보성 원리’와 함께 하이젠베르그가 주창한 ‘불확정성원리’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가령 위치와 운동량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정확히 알면 다른 하나는 오히려 전혀 모르게 된다. 그러므로 관찰자는 이 두 가지 속성 가운데 어느 것을 관찰할 것인가를 먼저 선택해야 하고, 따라서 관찰자 스스로가 관찰대상의 속성을 함께 지어낸다는 뜻이 된다.
뉴 턴식 기계론적 인과율은 그 시대의 과학자들이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었던 바이지만,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 나름대로 자연의 질서를 훌륭히 설명해 내는 근사치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미시세계에는 우리가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거시세계와는 전혀 다른 양자역학 특유의 고유현상이 존재한다. 양자이론에는 개별 입자에 대한 모든 양들이 집단의 차원에서 통계적인 확률로만 표현될 수 있을 뿐이고,31) 그 현상을 측정하는 관찰자의 의식이 개입되지 않고는 아무것도 정의될 수도, 의미를 가질 수도 없다. 측정 이전에 대상의 상태는 여러 상태의 중첩(‘and')으로 주어질 수 있지만, 측정이란 행위를 거치면 대상은 비로소 이 값 아니면 저 값 중 택일(’or')하여 그 얼굴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and'가 ‘or'로 바뀌는 이 ‘오그라듦’은 고전이론을 조금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이론을 완전히 폐기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대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러한 양자역학의 ‘비결정론적 성격’ 역시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 없이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도 스스로 양자현상인 광전효과를 통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음으로써 양자역학의 확립에 크게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1926년 동료 막스 보른(Max Born, 1882~1970)에게 보낸 편지에서 “양자역학은 아주 주목받을 만한 이론이다. 그러나 내 자신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속삭인다. 양자이론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지만, 우리를 ‘큰 어른’의 비밀 가까이로 안내하지는 못한다. 어쨌든 나는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32) 밝힘으로써 오늘날 현대물리학을 주도해 가고 있는 양자물리학의 확률적 해석 또는 비결정론적 성격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으며, 이러한 그의 견해는 평생 바뀌지 않았다.33) 특히 ‘객관적 실재’와 ‘측정’의 문제에 대한 격렬했던 논쟁은 1927년 보어가 소위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Copenhagen Interpretation of Quantum Mechanics)이란 이름으로 발표하면서 더욱 뜨겁게 달궈졌다.
양 자역학의 일차적인 특성은 확률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물리적 개념이 대상의 속성을 완전하게 포착하지 못할 수 있다는 최초의 경험으로서, 당시 물리학자들은 극미세계의 지식에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에 대단히 실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고전통계역학에서처럼 대상의 상세한 내용을 관측자가 모두 알 수 없다는 관측자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 자체가 본질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앙상블(ensemble; 많은 수의 동일계) 뿐 아니라 단 하나의 개별계에 대해서도 확률분포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양자역학은 가능한 사건들과 개별계들 각각의 확률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 양자역학 이론이 완벽하다는 것이 코펜하겐 학파의 생각이었다.
또 한 양자현상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극미세계에서는 근원적으로 비분리성(non-separability) 또는 비국소성(non-locality)을 갖는다. 즉 양자계는 실제적인 실험을 통한 관측 또는 측정과 무관하게 개별적인 물리량을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따라서 어떤 물리량의 값이 측정 전에 ‘있다’거나 ‘얼마’라고 말하는 것조차 부적절하고 불필요하다는 것이다.34) 관측자와 전혀 무관한 대상이라고 보는 ‘실재주의’(realist)나 물리적 대상과 관측자를 섞지 않고 둘 다에 별도의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려는 ‘이원론’(dualist)의 입장과 달리, 양자역학은 관측자나 관측 상황을 함께 고려해야만 비로소 의미를 갖기 때문에 측정주체와 관측대상 어느 한 쪽만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지를 한 덩어리로 보아 항상 함께 기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노벨상 수상자 신이치로(朝永振一郞, 1906∼1979)는 양자의 세계를 ‘단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그 행동이 변하는 아주 수줍은 처녀’에 비유한 바 있다.
그 러나 양자역학의 해석에서 당시는 물론 오늘날의 일부 물리학자들도 그러한 사물의 존재와 인식 방식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곤 한다.35) 고전역학은 물론 전자기이론과 상대성이론에서조차 수식으로 씌어진 물리량은 우리가 측정을 수행하든 하지 않든 무관하게 그 값을 물리적 대상이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에 반해 양자역학의 해석에서 당시 뿐 아니라 지금의 물리학자들도 심기가 불편함을 느끼는 까닭 중 하나는 양자이론이 기술하는 대상 자체가 대상에 대한 측정장치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점에 있다. 게다가 비분리성?비국소성과 관련, 아인슈타인에게는 미시세계의 개체들도 그 외형적 조건처럼 하나, 둘 셀 수 있는 분리적인 상태를 의미했고, 그래서 한 개에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 서로 무관할 것 같은 분리된 두 개가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분리성과 국소성을 뛰어넘는 세계의 연관성을 실제 일상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보어에게는 외형적으로는 셀 수 있는 분리된 개체처럼 생각되는 미시 입자의 개체들이 실제로는 모두 연결된 하나의 비분리적 상태에 있다고 보았다.36)
아 인슈타인의 끈질긴 반박37)과 보어의 참을성 있는 답변이 계속되는 동안 양자론과 연관되어 제시된 많은 제안과 실험 사실들이 종합되어 확고한 이론체계로 정리되면서, 결국 아인슈타인도 반론을 제기할 여지가 없음을 인정함으로써 논쟁에서 패배했고 하이젠베르크조차 “우리는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면서 보어에 설득 당하게 된다.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기초한 새 이론은 기존 상식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야 했고, 이런 저항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결국 새로운 세계관은 확고하게 설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 러나 그 이후에도 반세기 동안이나 아인슈타인 진영과 보어 진영 사이에는 인과성(因果性)의 범위 안에서 물리현상을 국한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전통적 인과율에 맞지 않는 비분리의 물리상태를 인정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이어져 왔다. 그러다가 1970년대 들어와서 사고(思考)실험이 아닌 실제적인 실험결과에 의해서 보어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특히 50여년이 지난 다음인 1982년에 비로소 아인슈타인의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이론은 모순에 부닥치며 양자역학의 기술이 정당하다는 것이 실험적으로 밝혀졌다. 코펜하겐 해석에 기초한 양자론은 이제 모든 검증을 통과했고 고전역학만큼이나 잘 정리된 논리적인 이론체계로 뿌리내림으로써 원자와 미립자들의 행동을 근본적으로 설명하는 유일한 이론으로 남게 되었다.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 확률이 아니라, 대상 자체를 기술해 줄 새 이론'이 나와서 양자역학을 대신하리라고 기대하는 물리학자들은 거의 없다.
보 어의 상보성원리는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 데는 그 물질 자체의 고유성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관찰하는 의식주체의 선택의지도 포함되어 함께 만들어 간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불확정성원리에 의하면 개개의 입자들로 볼 때는 원인 없는 사건들이 있을 수 있으며 바로-여기에 자유의지가 끼어들 수 있다고 본다-그래서 엄격한 개별적 인과율보다는 많은 수의 입자들에 대해서만 확률적 인과율이 적용되어 현상화 한다고 본다. 자연과 자연, 그리고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이 서로 그렇게 접하여 일그러지고 중첩되면서 점점 더 복잡한 세계를 펼쳐 보이는 것이다. 혹 개별적인 존재나 사건을 말하더라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확률적인 속성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자론적인 물리세계에서는 하나의 원인과 그의 결과로 딱 떼어 낼 수 있는 그렇게 단순하고 직선적인 인과관계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점은 단순하면서 정확한 개체적 인과율을 믿고 싶은 인간에게 커다란 갈등의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고정되고 객관적으로 인식 가능한 현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우리가 경험하면서 그 세계에 참여하는 방식을 통해 현실세계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가기 때문에, 모든 현실을 포괄하면서 저 높이 우뚝 솟은 곳에서 현실을 내려다보는 관점은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 많은 서양인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 러나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은 오히려 현대과학에 근거한 이와 같은 세계관과 맥락을 같이 한다. 왜냐하면 불교와 과학은 우리에게 외형적으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들도 그 근원에서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불교에서 간접적 원인인 연(緣)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여타의 인과론에서 볼 수 없는 연기론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일대 일 대응방식의 선형적인 인과율, 즉 결정론적 세계관보다 좀 더 통합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 라서 윤회(輪廻; Samsara) 등의 개념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불교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환생(還生) 또는 윤회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무아(無我)와 연기(緣起)로 요약되는 불교의 근본가르침으로 볼 때,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생이 업(業)에 따라 삼계육도(三界六道)38)에서 생사를 반복하는 윤회 자체를 결코 불교의 중심사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는 무아와 윤회가 양립할 수 없는 서로 모순된 개념이라고 비판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현상적 자아의 배후에 참된 자아를 상정하고 주체성을 부여하는 이원성(二元性)에 토대를 둔 서양철학으로 비이원성(非二元性)을 골간으로 하는 불교의 연기무아설이나 무아윤회론에 곧바로 적용될 수 없음을 간과한 데서 오는 오류이다. 더구나 영원불멸의 ‘나’라고 하는 것이 실재하지 않는 관념에 불과함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 즉 ‘깨달음의 경험’을 통해서만 궁극적으로 논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무아와 윤회는 철학적으로 ‘모순이다, 아니다’라고 확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윤 회는 삶의 한 형태가 삶의 다른 형태로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윤회라고 하면 사후에 영혼이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원래 Samsara에는 그런 의미가 없다. Samsara란 생명의 물결, 생명의 파동과 같은 것인데, 물리학에서의 파동이 물질 자체가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매개로 하여 에너지가 전해지는 것이듯, 윤회란 영혼 자체가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삶의 진동이 스스로의 삶이나 다른 삶의 진동에 영향을 주며 이러한 영향이 끊임없이 순환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동일하지 않지만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다르다고 할 수도 없고(不一不異), 항상하는 것도 아니지만 결코 단절되는 것 또한 아니다(不常不斷).39) 깨닫지 못한 채 집착이 강하면 마치 어떤 의식이 다른 삶에 가서 붙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변치 않는 무엇, 즉 영혼이 있어서 이 몸 저 몸을 돌아다닌다는 생각은 고대인도 사상의 일부일 뿐 불교와는 전혀 관련 없는 소박한 믿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를 하면 무엇이 된다든지 하는 식의 일대 일 대응 식의 결정론적 인과응보 해석은 벗어나야 한다.
한 편 현대과학에서 생명현상은 수없이 많은 개체들의 집단적 총체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도 확률적 인과율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유’가 아니라 많은 것들과의 관계를 가장 편하게 또는 자유롭게 하는 절제된 ‘의지’라는 점에서, 무상이란 실상 속에서 연기적 자아의 확대, 즉 사회적 통합과 공명을 꾀하는 불교의 공업(共業)에 바탕을 둔 자유의지 개념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5) 양자적인 세계
물 질세계와 정신세계는 근본적으로 연속적인가 불연속적인가. 물질의 양은 임의의 값을 가질 수 있는가, 또 깨달음도 조금씩 조금씩 다가갈 수 있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현대물리학에서는 사물의 본질을 불연속적으로 보며, 불교에서의 깨침도 어느 순간 때가 되어 한꺼번에 홀연히 얻어지는 것이지 조금씩 깨우치는 연속적인 발전이 아니라고 답한다. 그것은 깨달음의 속성상 차원을 달리 하는 눈뜸(開眼)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 류는 지금 디지털혁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정보를 0과 1만으로 표시하는 2진법의 세계인데, 컴퓨터회로의 근본 구성 원리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기억용량의 무제한 커뮤니케이션의 광속화(光速化)가 가능해졌고, 정보통신기술의 혁명은 과학 분야를 뛰어넘어 모든 분야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으며 아직도 그것은 진행형이다. ‘디지털(digital)’이란 전자시계나 계산기의 자판에서와 같이 정보를 수치, 특히 정수로 바꾸어 처리하거나 나타내는 방식을 의미한다. 가령 사람 수를 세거나 서류를 뗄 때 몇 사람, 몇 통 식으로 말하지 0.5 사람이라거나40) 0.7통의 주민등록 등본은 무의미하다. 화폐의 기본단위도 1원이기 때문에 돈의 액수도 1원의 정수배만이 가능할 뿐 1.3원이란 금액은 없다. 이에 대비되는 개념인 ‘아날로그(analog)’는 어떤 자료를 연속적인 값으로 나타낼 수 있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시침과 분침이 있는 시계는 시간을 불연속적인 값으로 읽기가 오히려 불가능하고 연속적인 값으로 나타낼 수 있어서 1초와 2초 사이에도 무한히 많은 서로 다른 시간이 존재한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세계를 극명하게 구분해 주는 또 다른 예로는 색깔정보를 숫자로 저장했다가 풀어놓는 디지털 카메라와 연속적인 색깔로 펼쳐 보이는 전통적인 카메라, 그리고 특정한 위치에서만 고정시킬 수 있는 구멍 뚫린 혁대와 어떤 위치에서도 고정 가능한 구멍 없는 혁대 등을 들 수 있다.
디 지털 방식에서는 현실적으로 정보가 딱히 0과 1이 아닐지라도 처리상 편리하도록 그렇게 구분하는 수도 있다. 어느 정도의 값보다 크면 1로, 그 아래 값이면 0으로 처리하여 그 중간 값들을 무시함으로써 계산을 간편하게 하기 위함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그러한 인위적인 면이 일부를 포용하지 않고 버릴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자료 조작이나 인간소외의 함정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아 날로그-디지털과 유사한 관계가 고전역학-양자역학 사이에서도 성립한다. 고전역학에서는 모든 물리량이 연속적인 값을 갖는다고 본다. 날아가는 공의 에너지 값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수치가 다 가능하다. 이와 달리 양자역학에서의 에너지는 불연속적으로 특정한 값만이 측정된다. 즉, 양자이론에서는 에너지를 포함한 대부분의 중요한 물리량들이 본질적으로 양자(量子, quantum)라는 ‘덩어리’ 또는 ‘알갱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반드시 정수배인 불연속적인 값만으로 측정되며, 모든 물질활동은 그 이하로 더 이상은 나누어지지 않는 최소량의 단위인 이 양자의 차원에서 일어난다고 본다.
1900 년 플랑크(Max C.E.L. Planck, 1858~1947)에 의해서 제안된 흑체(黑體) 복사(輻射)41) 이론은 고전물리학과 대별되는 새로운 양자론의 탄생을 알리는 출발점이었다. 뜨겁게 달구어진 공동(空洞)의 구멍으로부터 나오는 전자기파 복사의 분포를 올바르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빛을 복사하고 흡수할 때 원자의 진동 에너지가 연속적이 아니라 플랑크 상수(h)와 빛의 진동수()의 곱 h의 정수배만을 가진다는 가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제안한 것이다. 이어서 아인슈타인도 1905년도에 빛에너지가 h의 정수배인 광양자(light quantum, photon)라고 가정하면 빛의 흡수에 의해 전자를 방출하는 현상 즉 광전효과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였고, 바로 이 해석으로 그는 1922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고 전물리학에서는 이해 불가능한 이러한 에너지의 양자가설(量子假說, quantum hypothesis)은 1912년 보어로 하여금 수소원자 모형을 제안하는 토대가 되었다. 보어는 수소원자 내 전자의 정상상태를 규정하는 원궤도의 각운동량은 바로 그 플랑크상수의 정수배이며, 따라서 특정한 값의 불연속적인 에너지 준위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전자가 그 준위 사이를 오르내릴 때 연속적인 파장이 아닌 몇 개의 불연속적인 파장의 전자기파만을 방출하게 된다는 소위 수소양자조건, 즉 ‘보어가설’을 세웠다. 보어이론은 수소원자가 어떻게 빛을 방출하는지에 대한 실험결과를 뜻밖에 잘 설명함으로써 아인슈타인도 대단한 업적이라고 치켜세운 바 있다. 그밖에 대표적인 양자화 현상은 전자의 전하42)와 고체물질 내의 탄성파가 양자화 된 포논(phonon)43) 등이 있다.
과 학자들이 오랫동안 의심치 않았던 자연의 연속성에 대한 믿음을44) 포기하는 것은 확률론적인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만큼이나 혁명적인 사고가 아니고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미시적으로 볼 때는 이렇게 사물의 본질이 양자적이지만, 거시적인 물체의 운동이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우리의 지각능력이 미시세계의 양자적인 불연속성을 감지할 수 있을 만큼 미세하게 발달하지 못했고 따라서 자연을 연속적인 세계로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양자라는 최소단위를 설정함으로써 양자이론의 탄생을 알리는 기초개념을 제안한 두 거물, 즉 플랑크와 아인슈타인 자신들마저도 비록 스스로 필요에 의해서 양자개념을 선택은 했지만 이러한 비연속적 도약(discrete jump)에 대해 일생동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45)
그 러나 이제 양자개념은 물리학 분야를 넘어서 다른 분야에까지 확대 적용이 시도되고 있다. 예를 들면, 양자역학의 원리를 활용한 양자 컴퓨터(quantum computer)는 대량의 정보를 동시 병행 처리함으로써 수퍼컴퓨터로도 수십억 년이 걸리는 계산을 수 초만에 해치우는데, 그러한 양자 컴퓨터의 원리를 확인할 수 있는 회로도 최근 개발에 성공하였다고 발표된 바 있다. 또한 양자생물학(quantum biology)이나 양자의학(quantum medicine) 등 주변 관련분야까지 양자세계의 영역은 확장되고 있다.
한 편 물리학에서 추론한 양자가설, 즉 이 세계가 불연속적이며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알갱이인 기본입자들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근본적인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미세현상을 관측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입자라는 것은 공간적 크기를 갖는 것인가? 예를 들면 전자는 개별적 위치를 갖고 있는 물질인가, 아니면 존재가능성을 갖는 파동 또는 에너지인가?
우 선 분명한 것은 진리는 허구일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경험을 통해 확인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실증주의자인 과학자들과 불교수행자들에게 공통된 합의 내용이며 정신이다.46) 그러나 현실세계는 우리가 인식의 창을 여는 순간 잠시 활짝 펼쳐지면서 눈에 띄는 구체적인 질서를 만들어내고는 다시 접힌다. 이처럼 세상은 끊임없이 전개되고 접히는 숨바꼭질을 반복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 신비스러운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우주 구성의 기본입자가 존재하리라는 가정 하에 원자는 물론 양성자나 전자보다 훨씬 작은 극미립자를 찾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 왔다. 플랑크가 지적한 것처럼 인간은 종속적인 것 뒤에 감춰진 기본적인 것, 상대적인 것 뒤에 감춰진 절대적인 것, 겉모습 뒤에 숨겨진 진실, 일시적인 것 뒤에 감춰진 영구적인 것을 찾는 경향 때문이리라. 우리가 모르는 어떤 새로운 입자가 발견되기를 바라는 인간의 호기심 때문에 경쟁적으로 돈을 들여 가속기를 만들고 양성자나 전자를 광속에 가깝도록 가속시켜 고에너지 상태를 만든 다음 서로 충돌하게 함으로써 실제 많은 소립자(素粒子)들이 확인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그 근본 ‘알갱이’에 대해 논란 중이며 확신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우주가 출렁이다가 어느 순간 어느 곳에 주름이 잡혔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떨림의 차이, 즉 ‘존재’를 잠시 느낄 뿐이다. 인간의 오감의 구조상 그렇게 알갱이로서밖에 감지할 다른 방법이 없으니 인간의 인식은 극미의 현상을 포착할 수 없는 불완전한 도구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관측과 논리의 세계요, 경험과 의식의 본질일 것이다.
게 다가 인간의 경험이란 그 이전에 개념과 형식이 갖춰지기 전에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실제로 감각 경험은 개념화 될 때만 가능하다. 예를 들면 ‘나무’라는 개념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다. 그런데 모든 물리학 개념들은 인간 정신이 자유롭게 만들어낸 것이기에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외부세계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는 없다. 아인슈타인도 “자유로운 개념 작용 없이도 객관적 현상 자체는 과학적 지식의 근거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선입견일 뿐이다. 이런 착각이 생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 개념들이 오랜 관습과 확인을 통해 실질적인 물질과 즉각적인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사실을 쉽게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도 우리가 자유의지로 가정한, 즉 정신적으로 지어낸 것에 불과하다. 불교에서도 윤회, 티끌, 근원적인 요소 등과 같은 개념들은 모두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며, 이름과 형식이 어떤 근거도 없는 정신작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고정된 개념에 연연하면서 오류가 생기고 해탈의 길이 멀어진다고 한다. 단순한 믿음만으로 세계를 받아들이라고 하는 유일신의 종교에서와 달리 수행을 통한 철저한 자기 체험을 중시하는 동양의 종교전통은 이런 점에서 과학 정신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개념이 경험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논리와 개념의 한계가 곧바로 경험과 인식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연이 본질적으로 연속적인 임의의 수치를 가질 수 있느냐 아니면 불연속적인 양자로 이루어졌느냐 하는 문제는 현재로서는 간단하게 답해버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찾는 기본입자도 마찬가지다. 현대물리학적 해석은 그런 입자가 관찰될 때만 특정한 위치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관찰되지 않을 때는 존재가능성만을 지닐 뿐이다. 다시 말하면 관측 또는 경험의 토대 위에 존재여부를 가늠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지 못해도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과학의 세계를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경험이야말로 과학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론은 경험적으로 검증되어야 하고 이 과정을 통과하지 못한 이론은 폐기되거나 수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고유한 실체인 기본입자는 존재하는 것인지, 또 그것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지 쉽지 않은 문제다. 예를 들면 전자 같은 물질 입자란 엄청나게 강력한 세기를 가진 전자기장이 아주 작은 공간에 집중된 것에 불과하다. 이런 에너지 덩어리는 일시적으로 국부적인 질량으로 응축되지만, 장(場, field)의 나머지 부분과 뚜렷이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시 분해되고 호수의 수면에 퍼지는 물결처럼 빈 공간, 즉 고향인 에너지의 바다로 돌아간다. 따라서 전자를 구성하는 불변요소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점은 하이젠베르그가 “가장 작은 물질 단위는 물체 자체가 아니라 형식이다. 기본입자 자체는 물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기본입자는 물질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이다. 에너지는 기본입자의 형태를 취하고 그 형태로 나타남으로써 물질이 된다.”고 언급함으로써 영구불변의 기본단위가 실재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 바 있다. 불교에서도 “어떤 사물도 고유의 실체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착각은 그 근원까지 소멸된다.”고 말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복 잡한 물리적인 양자세계 외에 0과 1의 양자정보만이 측정되는 디지털의 세계도 단지 두 개의 상태만이 존재하는 가장 간단한 양자계인 셈이다. 측정 전의 양자계는 0과 1 두 가능성의 중첩상태에 있지만, 측정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중의 한 가능성만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이는 고전역학에서는 볼 수 없는 양자세계의 아주 기묘한 고유현상으로서, 마치 마지막 순간에는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만 결단을 내리기 이전에는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과 같다.
여 기에서 0과 1의 중첩이란 0과 1 사이의 0.5라는 산술적 평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계의 중첩상태는 0도 아니고 1도 아니지만 0과 1을 동시에 포함한다. 이는 불교의 중도(中道)라는 개념이 있음(有,1)도 아니고 없음(無,0)도 아니며 또한 있음과 없음의 중간(非有非無,0.5)도 아니지만 있음과 없음을 다 끌어안고 있는 것과 같다.
양 자역학에서 0과 1로 이루어지는 중첩상태의 수는 무한하다. 그러므로 0과 1만이 드러나는 가장 간단한 양자계도 무한한 가능성을 그 안에 내포한다. 우리의 사고도 단순한 흑백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무한한 가능성을 함께 현실화 할 수 있을 때 중도연기론적(中道緣起論的) 화엄세계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현 대물리학은 이 세계가 여러 계층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단계마다 다른 종류의 인과관계가 작용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존재양식이 구체적일수록 표면에 가까운 층에 속하고 심층으로 내려갈수록 사물들이 포착하기 어려운 극미의 세계, 즉 중층의 잠재력 상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일단 우리에게 포착된 세계는 양자적인 불연속적인 세계, 기본단위로 관측되는 세계로 나타난다.
가 령 공간의 깊이를 규정하는 차원(次元)이란 개념도 1차원, 2차원, 3차원으로 구분할 뿐 1.5차원이나 1.7차원은 의미가 없다. 1차원의 세계는 내 앞뒤만을 생각하는 3인의 세계요, 2차원의 세계는 앞뒤?좌우 개념이 있어서 비로소 곡선이 이해되고 널찍한 지 좁은 지를 구분할 수는 있으나, 역시 위아래 개념은 없다. 3차원이 되어야 비로소 앞뒤, 좌우, 위아래가 있는 공간, 즉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차원이 된다. 차원이 다를 때 통상적으로 고차원의 틀에서는 저차원의 현상이 무엇이든지 이해되지만, 역으로 고차원의 현상은 근본적으로 특성이 달라지는 부분이 있으므로 저차원의 개념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것들이 있을 수 있다. 가령 2차원의 세계에서는 3차원 운동, 즉 골프와 같은 운동은 도저히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2차원의 세계에 사는 존재47)에게는 골프공이 날아간 순간 그 세계에서 없어진 것이고, 얼마 후에 다른 지점에 떨어진 순간 그 공은 자기 세계에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 사이에는 골프공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마치 외계인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고차원의 세계는 단순히 1차원을 여러 개 합쳐 놓은 것이 아니고 전혀 다른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차원이 달라서 말이 안 통한다’라는 말을 곧잘 한다. 인간은 물리적으로는 3차원 공간에 시간을 넣어서 시공의 4차원 세계에 산다고 할 수 있는데, 마음이란 변수를 함께 고려하면 얼마나 깊은 중층의 차원이 존재하는가. 깨달음의 경지는 몇 차원이나 있으며 부처님은 과연 어떤 불가사의한 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는가.
한 편 불교계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논란도 깨달음과 수행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극미 차원의 문제가 아닐까. 북신수(北神秀)가 수행과정을 상식적으로 표현한 점수돈오도 있으나, 달마 이래 선가(禪家)에서는 돈오돈수를, 불일보조(佛日普照)는 돈오점수를 내세웠다. 그러나 깨달음에 관한 한, 크건 작건 양자적으로 차원을 달리해서 몰록 깨닫는 돈오에는 아무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실제로 수행의 시간에 비례해서 깨달음의 크기가 결정되는 아니다. 또 아무리 애를 써서 도와주려 해도 준비되지 않은 중생에게 깨달음은 딴 세상의 얘기일 뿐이다. 인연이 없으면 부처님을 만나도 몰라본다고 하지 않던가. 때가 되어 충분히 익어야만 비로소 눈이 열리고 무릎을 치는 작은 깨달음이라도 얻게 되는 법이다.48) 그렇더라도 한 발짝 먼저 앞서가는 사람은 뒤에 오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이끌어 주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양자적인 세밀한 깨달음은 선험자만이 제대로 점검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런데 수행에 있어서 점수와 돈수의 두 관점이 팽팽한데, 어느 것이 진리에 가까운가. 점수의 입장은 아무리 깨달았어도 그 동안 무시이래의 업장과 습을 털어 내어 오(悟)의 경지를 확인?실천하는 닦음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돈수의 입장은 본래부처라는 것을 몰록 깨쳐 밝은 덩어리가 불쑥 솟아오른 이상 어두움은 사라졌고 티끌도 이미 의미가 없어져 더 이상 더렵혀질 바 없으므로 닦을 것조차 없다는 관념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6) 사물의 본질은 자유
자연현상이나 생명현상의 본질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교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이나 현대과학에서 이해하고 있는 물질현상의 근본은 ‘자유’라고 볼 수 있다.
불 교의 연기론에서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탐욕?집착?무지로부터의 해탈 즉 완전한 자유를 얻는 데 있고, 전 우주가 한 생명체라는 확신이 곧 깨달음이며 온 중생이 추구해야 할 공동선(共同善)이다. 깨달음의 실체를 불교에서는 불(佛)?법(法) 또는 마음(心)이라 하고, 도교에서는 도(道)라고 했으며, 인도철학에서는 범(梵)이라 불렀고, 다른 종교에서는 신(神)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러한 관념에서조차도 자유로워야 한다고 해서 <열반경(涅槃經)>이나 <금강경(金剛經)> 등에서 살불살조(殺佛殺祖)를 누누이 역설하고 있는 것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자 연계에서 ‘자유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연현상에는 비가역성(非可逆性, irreversibility), 즉 되돌이킬 수 없는 성질이 존재하는데, 물리학에서는 모든 자연현상은 엄밀하게 말하면 일방적인 방향으로 일어나는 비가역적 과정이라고 보며 시간의 흐름도 그런 경험으로 이해하게 된다.
비 가역성을 좀 더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19세기 독일의 물리학자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 1822~1888)는 엔트로피(entropy)라는 개념을 생각해냈다. ‘에너지(energy)’ 라는 단어와 그리스어의 ‘변형(tropy)’ 이라는 단어를 합성한 이 용어로 그는 이처럼 당연한 듯이 보이는 비가역적 현상들을 설명하려고 했다.
엎 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며 시위를 떠난 화살도 되돌릴 수가 없다. 터진 풍선이나 깨진 그릇이 저절로 다시 합쳐져서 원상복구 되는 현상을 상상할 수 없다. 달걀이 병아리가 되고 어미 닭이 되었다가 결국 죽게 되는 것도 우리가 경험적으로 익숙해 있는 비가역적 자연현상이다. 좀 더 미묘한 비가역 현상의 예를 들어보자. 더운 물과 찬 물을 섞으면 미지근한 물이 되고, 잉크방울이 물에 떨어지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물속으로 확산된다. 그러나 역으로 미지근한 물이 더운 물과 찬 물로 저절로 나누어진다든가 확산된 미세한 잉크분자들이 다시 모여 잉크방울로 튀어 오르는 일 따위는 절대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어째서 열에너지는 항상 온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쪽으로만 이동하는가. 또 운동하는 물체의 운동에너지는 마찰에 의해 열에너지로 바뀌면서 결국은 정지하게 되는데 이 때 거꾸로 정지해 있는 물체에 열을 가한다고 해서 본래 방향으로 물체가 다시 움직이지는 않는다.
이 현상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가지 공통적인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모든 자연현상들이 단순하고 조직적인 상태로부터 복잡하고 무질서한 방향으로, 그러면서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구속된 상태에서 좀 더 자유스런 상태로 변화가 이루어진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소위 ‘엔트로피 증가법칙’ 혹은 '열역학 제2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이며 바로 이 엔트로피의 증가 현상으로써 ‘자연스런’ 과정을 정의하기도 한다.49) 따라서 엔트로피를 그 계(系, system)가 가지는 ‘자유도(degree of freedom)’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 근거를 이해하기 위해 간단한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가운데가 칸막이로 닫혀있는 어떤 상자 안에 한 쪽 공간에만 많은 기체분자들이 있다고 하자. 이제 이 칸막이를 치우면 기체분자들은 다른 한 쪽으로 확산되어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는 상자 속 전체를 채우게 될 것이며, 이 평형상태가 저절로 깨져서 본래의 반 쪽 공간으로 모든 기체분자들이 다시 모이게 되지는 않는다. 이 때 각 기체분자들이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은 두 배로 늘어났으며 기체분자들의 위치에 관한 한 더 자유스러워지고 무질서해졌음을 알 수 있다. 마치 터진 풍선 속의 공기분자들처럼. 이런 의미에서 엔트로피를 ‘무질서도(degree of disorder)’라고 부르기도 하나 어감 상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므로 자유도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통계역학적으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외부와 단절된, 즉 고립된 계(closed system)에서 일어나는 물리현상은 그 구성원인 모든 개체들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상태 또는 상황-위치나 운동량 등으로 정의되겠지만-의 수, 즉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엔 트로피의 증가, 즉 자유도의 증가가 내포하고 있는 철학적 의미는 어떤 고립계에서도 그 구성원들(물질계에서는 분자들)의 선택의 폭이 가장 넓고 다양한 쪽으로 진행하며, 자유도가 극대화되면 더 이상 자체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안정된 평형상태를 이룬다. 따라서 만일 역사의 발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인류가 더 자유로워지고 인류문화가 더욱 다양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에서 목표로 하는 해탈, 즉 ‘완전한 자유’는 엔트로피의 극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인간 교육의 목적도 엔트로피의 증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러나 이 같은 자연의 비가역적 섭리를 거역하는 것이 인간을 포함한 생물체이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자연현상과는 달리 생명현상은 대단히 무질서한 자연계의 무기물로부터 조직적이고 목적적인 유기물을 만들어 내므로 엔트로피가 감소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을 근거로 창조론자들50)은 이렇게 고도로 복잡한 조직과 엄청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생명체는 엔트로피 증가라는 자연법칙과 어긋나므로 신(神)이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 냈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51) 그러나 그와 같은 단순하고 편리한 사고방식은 그들의 성급한 희망 때문에 빚어진 오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엔트로피의 증가법칙은 완전히 고립된 계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이고, 상호작용하는 여러 계에 있어서는 국소적으로 어느 한 계의 엔트로피는 감소할 수 있으며 그런 경우에도 전체 계의 엔트로피의 합은 역시 증가한다는 사실52)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명체는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싸고 영향을 주는 우주 전체가 함께 해야만 존속되는 열린 시스템(open system)이다. 자동차에 연료가 필요하듯이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도 에너지가 있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지구상의 생명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도움으로 유지되지만 그 근본 에너지원은 바로 태양이다. 태양 내부에서 초당 무려 4백만톤의 수소가 사라지면서 핵융합반응을 일으켜 헬륨 원자핵으로 뭉쳐지는 과정에서 양전자와 중성미자가 방출되고 엄청난 양의 감마선이 쏟아져 나온다. 그 감마선이 태양의 표면으로 나오면서 가시광선과 자외선으로 바뀌어 1m2 당 7백W나 되는 에너지를 지구 표면에 보내주는데53) 이 에너지가 바로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를 살아 숨쉬게 하는 원동력이다. 따라서 에너지원인 태양과 구성물질 요소를 대주고 조건을 만들어 주는 지수화풍과의 부단한 교류 없이는 생명은 지탱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위환경과 부단히 상호작용하는 생명체의 엔트로피가 감소한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고, 주위환경을 포함한 우주적 엔트로피는 계속 증가하므로 엔트로피의 감소를 핑계로 생명현상에 신(神)이 개입할 근거는 찾을 수가 없다.
한편, 물질현상 측면에서만 볼 때 생명활동이란 엔트로피를 감소시킴으로써 자연현상을 거스를 뿐만 아니라 대단히 강한 자기복제성(self organization), 자기중심성, 개체보호성54) 및 배타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생명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무자비하게도 다른 생명을 죽이게 되며55) 주위환경도 더럽히고 무질서하게 만드는 속성이 있다. 그 추악하고 보잘것없는 생명체의 한계를 알아차린 인간은 자기존재의 합리화를 위해 더 고상한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애를 쓰지만, 육신을 보전하기 위한 생명활동만은 일반 동식물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무런 의심 없이 강한 생명력56)을 찬양하기도 하고 생명은 무조건 아름다운 것으로 미화하며 그 자체로 귀중하고 목적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러나 우리의 육체에는 무아(無我)의 행위를 방해하는 강력한 장치가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동식물과 마찬가지로 개체유지 또는 종족보존의 본능을 발휘하는 무시겁래의 업장(業障)인데, 이것이 우리를 나 중심의 생각, 인간 중심의 아집(我執)에 가두어 무아적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생명체들의 목적적 행위??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는 두꺼운 업장의 집착력에 의해 일어나는 엔트로피 감소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는 단순한 물질적 생명활동과 그 인과관계를 뛰어넘는 정신적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탐욕과 자기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얻는 것을 분명한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불교의 존재이유는 없으며, 불교적 생명운동- 환경운동이나 장기기증운동-의 뿌리도 단순히 생물체를 살리기보다 ‘함께 깨달음의 길로’ 향하는 데에 두어야 한다.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다겁생래의 업식(業識)이 접혀 축적되어 있는 육신을 보전하기 위해 ‘약으로 알아’ 음식을 받아먹는 것이며, 업장이 더 두꺼운 동식물보다 그래도 인간의 모습일 때 필사코 깨치고자 인간의 몸 받아나기 어렵다는 것을 맹구우목(盲龜遇木)에 비유하여 스스로의 채찍질로 삼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필경 그러한 업장을 녹여서 해탈에 이르면 그 곳이 바로 엔트로피가 극대화된 평형상태, 즉 열반적정(涅槃寂靜)이요, <아함경(阿含經)〉에서 “집착할 것이 없으면 스스로 열반을 얻어, 생(生)은 이미 다하고 범행(梵行)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스스로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는다”고 한 것도 생명의 집착성에 대한 경계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3. 맺는말(불교, 과학시대의 종교)
20세기에 들어서서 인간의 자연현상에 대한 지식은 폭발적으로 증가되어 인류문명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 왔지만 그에 걸맞은 인간의 자기이해에 대한 깊이는 답보상태이거나 오히려 줄어든 느낌마저 든다.
19 세기 말경 역학(力學)이 완전히 자리 잡게 되면서 각종 기계의 발명과 공업화로 인해 생활양식 및 사회구조는 급격히 달라졌는데, 그것은 과학에 대한 신뢰감을 바탕으로 인류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현재까지 인류는 화려한 과학문명의 성과인 풍요와 편리에 묻혀서, 바로 그것이 가져다 준 부정적 요소들을 소홀히 넘기면서 살아 왔다. 지난 한 세기는 전 인류가 함께 절멸할 수도 있는 경쟁적 무기 생산이나 지구적 환경문제와 같은 직접적인 불안요소는 물론, 물질 위주의 사고방식과 생명경시, 그리고 이념적?지역적 패권주의 때문에 대립과 긴장으로 보낸 한 세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서구과학문명이 지난 수백 년 동안 다져 온 기계론적 세계관 및 환원주의(還元主義)57)의 팽배로 인해 빚어진 전체성의 상실이 주원인이었다. 이미 고형화된 사고체계로는 실제로 복잡하게 맞물려 변화해가는 상황에 유연하게 적응하지 못하여 새롭게 생겨나는 문제도 주체적?창조적으로 풀어갈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사회적 긴장과 갈등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 러나 20세기 초 약 30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현대과학의 기본개념과 물질세계에 대한 사고방식의 극적인 대전환은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길들여져 왔던 절대좌표계나 개별입자의 기계론적 인과론 같은 기존의 세계관을 철저히 바꿔 놓았다. 그것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으로 대변되는 현대물리학이 발견해 낸 큰 길이요 업적인데, 이로 인해 데카르트-뉴턴식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더 이상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없게 되었고,58) 대신 전일적(holistic)이며 생태론적(ecological)인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사회운동, 시민운동 차원으로 발전되면서 줄기차게 전지구적인 안목과 대안을 요구해 왔다.
예 를 들면 시스템 이론(system theory)도 그 중의 하나다. 하나의 시스템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성분들은 그 때 그 때 기능에 따라 구분해 볼 수도 있지만, 유기적인 전체의 기능 내지 활동의 본질은 그렇게 구분된 조각을 단순히 합쳐 놓은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것이다. 가령 2만 여개나 되는 자동차 부속품들이 그냥 모여 있다고 해서 자동차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이 특정한 목적으로 특정한 관계를 이루며 조립되어 기능할 때만이 자동차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생명이나 인간의 마음도 살아 있는 유기체나 사회조직 또는 생태계를 특징짓는 시스템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생명현상을 이와 같이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시각으로 받아들이면, 생명현상이란 그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각각의 개체들로부터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어떤 특정한 방식에 따라 합쳐질 때만 나타나는 집단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신문에 나타난 사진이나 텔레비젼 화면을 가까이 볼 때 각각의 점들은 밝기가 각각 다른 독립된 점들에 불과하지만, 좀 떨어져서 보면 그저 단순한 점들만의 집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물체나 사람 얼굴로 나타남으로써 전혀 다른 특성을 보여주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생명현상이라는 것이다. 또 개미 하나하나는 원자들의 특수한 배열과 관계들로 한 생명체를 이루지만, 개미 집단이 되면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유기체로서 그 개체들인 개미의 생명현상과는 다른 차원의 생명현상을 보인다. 즉 생명의 비밀은 개개의 원자들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따라서 신(神)이 원자 하나하나에 생명을 불어넣을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그 구성요소들의 업식(業識)에 따라 뭉쳐졌을 때만 그 차원의 특이한 생명현상이 나타난다는 사고방식이 더 설득력이 있다.
이 러한 관점은 연기론에서 말하는 통합적 생명관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으며 그래야만 ‘공업(共業)’이라든가 ‘우주는 한 생명체’라는 말이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의 마음도 우선은 그가 속해 있는 사회라는 시스템의 정신계로 포함되며, 이는 다시 그를 둘러싼 생태계 전체의 정신계로, 그리고 다시 지구 전체의 정신계로 유입되어 결국은 전 우주의 커다란 마음 안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주만물은 기계적이며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유기적이며 역동적인 것으로, 우리는 이미 서로가 얽히고설킨, 근본적으로는 모두가 다 하나로 이어지는 그러한 세계에 살고 있다. 시스템 이론과 현대물리학이 보여 주는 이러한 통합적 세계상의 기본요소들은 흥미롭게도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의 핵심에 닿아 있을 뿐 아니라 어쩌면 결코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불 교의 중도연기론에서는, 설사 외형상으로는 완연히 구별되어 보이는 현상일지라도 본래는 모두가 동일한 실재에서 비롯된 서로 다른 가지일 뿐이며, 따라서 이 세상의 사물이나 현상을 각각 동떨어진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고 우리 자신을 이 세상과 맞서 있는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것을 망상으로서 어리석음(無明)에 그 뿌리가 있다고 가르친다. 또 생태론적인 안목과 전일적인 사고, 그리고 연기적인 세계관을 가진다는 것은 곧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는 그런 직관에 관통함을 뜻하며, 내가 더 이상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 완전히 하나로 합치되는 강렬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 모든 존재의 상대적 존재이유를 인정하면서도 그 어느 대립개념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월적으로 놓아 버림으로써, 문제를 해결(解決)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해소(解消)해 버리는 지혜를 터득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중국 선불교(禪佛敎)의 조사(祖師)들이 깨달음을 얻는 과정도 바로 이러한 ‘해소’의 철학을 극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2조(二祖) 혜가(慧可)가 스승 달마(達磨)에게 “어떻게 마음을 편안케 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 달마가 “그 마음을 보여다오” 하니, 곰곰이 생각하던 혜가는 “없습니다” 했고 달마는 “그렇다면 마음이 편해졌느니라” 하였다. 또 3조 승찬(僧瓚)이 참회에 대해서 물었을 때 혜가 역시 “그 죄를 내놓아라” 하였고, 4조 도신(道信)이 해탈에 대해 물었을 때도 승찬은 “누가 너를 얽매었는가”라고 반문하여 자유롭게 해주었다. “번뇌를 끊음은 두 번째 방법이요, 번뇌가 일지 않음이 곧 큰 열반이라(斷煩惱 名二乘 煩惱不生 名大涅槃)”는 <선가귀감(禪家龜鑑)>의 한 구절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분별적이 아니고 중도적인, 해결이 아닌 해소의 연기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악(惡)이란 선(善)이 스스로의 완전성 때문에 짊어진 그림자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사랑해야 할 원수는 없으며, 남녀는 조화로운 상대이고, 중생은 부처의 씨앗이며, 소멸은 새로운 탄생의 시작이고, 죽음은 삶의 일부이며, 정신과 물질, 공(空)과 색(色)은 종이의 안팎과 같이 구분할 수 없고,59) 진보와 보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동전의 양면으로 상호보완적인 관계이며,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으로 함께 살아가야 할 또 하나의 생명체이다.
불 교의 이와 같은 통합적이고 연기적인 사고방식은 중도적 문제 해소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 해소방법은 현대심리학의 추세이기도 하며 모든 인간문제의 지혜롭고도 근본적인 극복방법일지도 모른다. 최근 들어 불교식 사고와 명상 수행, 그리고 생활방식이 인간의 행복감을 증진시킨다는 사실이 과학적 방법을 통해 입증됨으로써 불교적 명상기법을 발달시켜 우울증 치료 등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는 잇단 보도는,60) 불교적 사유가 인류에게 어떻게 기여할 있을 것인지를 시사하는 대목이기도 하다.61)
반 면 일부 공격적이고 보수적인 종교인들이 자연과학의 발달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자신들의 종교영역의 축소를 못마땅해 하면서 갈등을 빚는 일은 적지 않다. 이러한 과학분야와의 투쟁은 그들의 아전인수, 그리고 편협과 독선을 드러낼 뿐 인간의 이성과 심성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현대사회에서 종교가 그 깊이를 품위 있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방법과 사실들에 대해 겸허하고 탄력적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 점에서 불교는 다른 어느 종교보다도 과학과 대화할 수 있는 폭이 크며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교리체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참여불교에서는 여기 포함/조계사 자료에서는 뺌) 현대인들에게 독소가 되는 인간소외, 신비주의, 그리고 문명중독증을 해독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아 직까지 현대과학이 불교의 중도연기론적 해소의 철학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미래의 과학시대에는 이 양자가 좀 더 가까이 만나게 될 것으로 보인다. 20세기의 대표적인 미래사학자 토인비(Arnold J. Toynbee, 1889~1975)도 “20세기의 가장 큰 사건은 불교가 서구에 소개된 것이다. 불교의 합리주의적 교리체계가 현대사회에 합치되며, 미래의 세계는 보살도의 실천으로 중생고통을 함께 해야 인류의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철학자들이 과학시대의 불교의 역할에 대해 희망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다.62)
과 학교육에 관심이 많은 달라이라마는63) “예전에 서구의 과학자 중 일부는 나에게 과학이 종교의 적이며, 과학이 많은 종교의 신앙체계를 어떻게 파괴했는지 설명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많은 과학자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유용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급진적인 유물론자들까지 과학 연구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체무아(一切無我)의 개념을 알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2003년 9월 미국 MIT공대 게놈연구센터를 방문한 자리에서도 그는 “과학자들은 이미 오래전에 붓다나 나가르주나에 의해 설명되었던 사실들을 경험적인 추리와 실제적인 실험을 통해 입증해내고 있다. 21세기에 종교와 과학이 함께 발달할 수 있다면 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종교는 불교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불교가 과학과 함께 할 미래의 동반자임을 선언한 바 있다.
이 것은 바로, 다른 종교에서와는 달리 불교의 연기론에서는 이렇게 우주적인 법칙과 도덕적인 질서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물질현상과 정신현상의 괴리가 있을 수 없고 윤리체계의 기반이 확고하여 맹목적이거나 무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탈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부처의 가르침은 여타의 동양적 사유와 마찬가지로 자연과 인간의 삶을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의 삶을 자연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파악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자연 속에서 이상적 삶의 원리를 찾아내고 이로부터 실천적 규범을 얻고자 한다. 세계가 어떤 것인지 혹은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지에 근거하여 우리의 사고나 삶의 태도가 어떠하여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따라서 과학의 발전에 의한 인간 사고의 변화는 불교적 세계관이 더욱 의미 있게 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 예상되며, 불교는 21세기 인류의 번영과 사회의 완성을 위한 생활철학으로 새롭게 떠오를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불교는 외재하는 유일신을 가정하지 않고 종말에 관한 두려움도 없이, 우리 존재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이해를 통해 타자에 대해 자비와 관용, 그리고 사회에 대한 보편적 책임 수행이라는 우주론적 미소를 머금을 수 있기 때문에 복잡한 미래사회에서 가장 종교적인 면모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한 편 무경계의 마음세계를 다루는 불교의 언어와 경험세계의 물질현상을 인간의 이성으로서 파악하려는 자연과학의 언어를 그 외형적인 유사성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일은 매우 위험하고 오만한 일이다. 자연과학의 어떤 구체적인 발견이 불교철학의 어느 특정한 부분을 입증하는 것으로 성급하게 결론짓는 것은 삼가야 하며, 또 불교가 과학적이라는 사실에 우월감을 가지거나 안주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불교 스스로 폭을 좁히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무런 관련성이 없어 보이던 양자가 서로 만나기 시작했고 그러기에 더욱 서로를 필요로 할 것이라는 점과, 불교사상의 전체적 흐름이 현대과학의 흐름을 무리 없이 수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호보완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런 통찰을 통하여 오히려 불교가 바라보는 열려 있는 세계의 다양한 속성을 확인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불교는 현대과학의 성과를 지식의 범주에서 포괄하려고 시도하기보다는, 과학적 세계관을 충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과학문명의 병리적 문제들을 보완하고 풀어갈 수 있는 넓은 관용과 유연성을 갖고 과학을 대해야만 할 것이다.
과학 은 불교철학이 시사하는 깊은 의미를 늘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고, 불교 또한 분석적 과정을 소홀히 한 직관만으로는 본질의 파악에 미흡하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서 문명사적 전환기인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불교인으로서는 불교적 세계관이 서구과학문명의 모순과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고 인류의 미래를 함께 열어 갈 수 있을까에 대한 진지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참고도서
1. 김재희: 신과학 산책(김영사, 1994)
2. 道 法: 華嚴經과 생명의 질서(世界社, 1990)
3. 장회익: 과학과 메타과학(지식산업사, 1990)
4. 미즈하라 슌지(水原舜爾): 과학시대의 불교(이호준 옮김, 대원정사, 1986)
5. 아끼야마 사또꼬: 과학과 불교의 신비(김인재 옮김, 고려원, 1989)
6. 湯淺泰雄: 科學技術과 精神世界(박희준 옮김, 범양사, 1988)
7. Bentov, Itzhak: Stalking the Wild Pendulum, 「宇宙心과 정신물리학」(류시화?이성무 옮김, 정신세계사, 1987)
8. Capra, Fritjof: The Tao of Physics,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李成範ㆍ金鎔貞 옮김, 범양사, 1979)
9. Capra, Fritjof: The Turning Point, 「새로운 科學과 文明의 轉換」(李成範ㆍ具閏瑞 옮김, 범양사, 1985)
10. Davies, Paul: God and the New Physics, 「현대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류시화 옮김, 정신세계사, 1988)
11. Guaydier, Pierre: History de la Physique, 「物理學史」(魯鳳換 譯, 電波科學社, 1979)
12. Hawking, Stephen W.: A Brief History of Time, 「時間의 歷史」(玄正晙 譯, 三省이데아, 1988)
13. Rifkin, Jeremy: Entropy, A New World View, 「엔트로피의 법칙」(崔鉉 譯, 汎友社, 1983)
14. Wolf, Fred A.: Taking the Quantum Leap, 「과학은 지금 물질에서 마음으로 가고 있다」(박병철ㆍ공국진 옮김, 고려원 미디어, 1992)
15. 양형진 : 물리학을 통해 보는 불교의 중심사상 (물리학과 첨단기술, 2001년 1/2월호)
16. 최종덕 : 과학과 불교 (현대불교 연재, 2000년-2001년)
17. Mcfarlane, Thomas J. : Einstein and Buddha, 「아인슈타인과 부처」(강주헌 역, 황소걸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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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체의 크기만 해도 10-18m(전자의 크기)에서 1026m(제일 먼 별까지의 거리)까지 알고 있으며, 시간은 10-43초(우주폭발 직후 물리법칙이 최초로 적용되는 시간)부터 1039초(양성자의 수명)까지, 그리고 물질의 양도 10-31㎏(전자의 질량)부터 1053㎏(우주전체의 질량)까지를 다루고 있다. 흥미롭게도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며 사는 양들은 대체로 인식가능한 양극단의 중간쯤에 있다.
2) 뿐만 아니라, 양자역학은 1960년대부터 전자공학의 토대가 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대물질문명의 혁명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3)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뮌헨에서의 김나지움 시절 당시 유태인 학생들의 관습이었던 구약성서의 특수교육을 받고나서 얼마 동안은 성서(聖書)에 관한 보수주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나의 가족도 이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대중과학서적들을 읽으면서 나는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의 많은 부분이 사실일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나는 열광적인 자유사상가(自由思想家)가 되었고 국가가 학교의 종교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그 때부터 나는 모든 종류의 권위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특별한 사회적 환경 속에 자리잡고 있는 어떠한 신념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후일 나이가 들면서 인과(因果)의 관련성에 대하여 좀 더 깊은 통찰을 하게 됨으로써 초기에 가졌던 이러한 날카로움이 다소 무뎌지기는 하였지만 이런 회의적인 태도는 근본적으로 내 일생을 통해 지속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노벨물리학 수상자 파인만(Richard P. Feynman, 1918~1988)도 “과거로부터 전해진 것이 진정 올바른 것인지 의심하는 것, 그리고 처음으로 돌아가 직접 경험을 통해 실제 상황을 파악, 재발견하는 것, 이것이 바로 과학이다.”라고 강조했다.
4) 아인슈타인은 “현대과학에 결여된 부분을 메꾸어 주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불교이다”라고 하였고, 보어(Niels H. D. Bohr, 1885~1962)가 “원자이론의 가르침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나 노자(老子)와 같은 사상가들이 일찍이 부딪쳤던 인식론적 문제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라고 지적하였으며, 그리고 하이젠베르그(Werner Heisenberg, 1901~1976)도 “일본이 기여한 이론물리학에의 공헌은 극동의 전통 속에 담긴 철학적 이념과 양자이론의 철학적 본질 사이에 어떤 관계를 시사한 점일 것이다”라는 언급한 바 있다.
5) 1991년 3월 24일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에서 하버드 의대 주최로 ‘마음 과학:동양과 서양의 대화’라는 주제의 과학 심포지엄이 열렸다. 하버드대학의 의학, 정신과학, 심리학, 신경생물학, 비교종교학, 교육학 등의 전문분야 교수들과 나눈 대화의 내용을 엮은 책 「더 오래된 과학, 마음(Mind Science)」의 머리말에서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달라이 라마는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과 성취감을 얻는 것이라 믿습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사람들은 마음과 물질 모두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만 합니다. 인류의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접근, 양쪽 모두의 결합이 중요합니다”라고 강조했다.
6) 수필가 문윤정의 「세상을 맑게 하는 마음」이란 시의 일부, ‘한 장의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은/우주가 흔들리는 것과 같습니다./나뭇잎은 가지를 의지하고 있으며/가지는 뿌리를 의지하고 있습니다./뿌리는 대지를 의지하고 있으며/뿌리는 하늘과 땅을 순환하여/땅속으로 흐르는 물을 흡수합니다.’에서 우주적 흔들림을 잘 표현하고 있다.
7) 제석천에 있는 보배 그물로서 인타라망(因陀羅網) 또는 제망(帝網)이라고도 함. 낱낱 그물코마다 보주(寶珠)를 달았고, 그 보주 한 개 한 개마다 각각 다른 낱낱 보주의 영상을 나타내고, 그 한 보주의 안에 나타나는 일체 보주의 영상마다 또 다른 일체 보주의 영상이 나타난다.
8) “인드라의 하늘에는 하나만 보아도 나머지 전체 보석의 영상이 모두 보이게 되어 있는 진주 그물이 있나니, 이것은 세계 속의 어떤 물체라도 그 자체로서 독립되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나머지 모든 물체들과 연관되어 있으며, 그 물체가 곧 다른 모든 물체임을 뜻한다.”
9) 1960년대 이후 나온 구두끈(bootstrap) 이론과 같은 학설은 물질세계 전체를 상호연결된 관계의 역동적 그물로 보는 사상의 절정을 이루는 것으로서, 입자물리에서 아직까지도 찾고 있는 물질의 최소단위라는 생각부터 깰 뿐 아니라 어떠한 근본 실체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현대물리학도 불교철학의 수준까지 승화시키고 있으며, 어쩌면 이러한 이론 자체가 불교의 상의상관적(相依相關的) 연기론에 대한 물리학적 유추로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10) 1962년 MIT의 기상학과 교수 로렌츠(Lorentz)가 초보적인 컴퓨터를 사용하여 공기의 대류운동을 나타내는 비선형식을 계산하던 중 우연히 발견하게 된 사실로, 간단한 비선형계에서조차 종래의 선형적 인과율의 산물인 결정론적 근사방식으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혼돈(chaos)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예를 보임으로써 우연성의 과학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1) 아인슈타인의 에너지 식 에서 빛(광양자)의 경우 질량 m이 0이므로 E= pc이고 를 대입하면 λ= h/p를 쉽게 얻을 수 있다. 1927년 Davison과 Germer가 실제로 전자를 니켈금속에 때려서 마치 빛을 회절판에 때릴 때 나타나는 회절현상과 똑같은 패턴을 얻음으로써 전자의 파동성을 극명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이로써 드브로이의 물질파 개념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고, 드브로이는 1929년 노벨상을 받게 된다.
12) 2003년 6월 22일 수덕사에서 열린 ‘한나라당연수회’에서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이 정치인들에게 ??교류수불류(橋流水不流)??란 선불교의 화두(話頭)를 소개하면서, ??흔히 물이 흐르고 다리는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다리가 흐르고 물이 흐르지 않는 것과 같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라고 설명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13) 행성간의 공간을 채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매질(媒質)인 에테르에 역학적 물질성을 부여한 사람은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이다. 그는 자연의 연속성을 믿어 우주 공간이 아무것도 없는 진공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진공인 경우 만유인력 같이 물체가 직접 닿지 않으면서도 서로 힘을 작용하는 현상도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허공으로 보이지만 실은 힘을 전달하거나 빛이라는 파동을 전파하는 매질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빛은 먼 별들로부터 지구에 도달하므로 그것은 온 우주에 충만한 실체적인 물질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뉴턴도 「광학」이란 빛에 관한 저서에서 “신이 태초에 고체로 된 딱딱한 덩어리며, 뚫고 들어갈 수 없고 이동 가능한 입자들로 물질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게 그럴듯해 보인다. 그것들은 너무 딱딱해서 결코 닳거나 깨지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어떤 힘으로도 신이 직접 하나로 창조하신 그것을 갈라놓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에테르에 대한 확신을 언급한 바 있다.
14) 절대정지계인 에테르가 광대한 우주 속의 한 행성에 지나지 않는 지구에 대해 정지하고 지구와 더불어 움직이고 있다는 견해는, 천동설을 의미하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생각이다.
15) 서구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뉴턴마저도 그가 살던 시대가 여전히 종교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었기 때문에 ‘과학과 종교는 별개가 아니며 성서는 진실 그 자체’라고 믿었다. 예를 들면 뉴턴은 성서의 내용은 과학적 증거로 사용될 수 있으며, 우주가 창조된 시점과 사라지는 시기를 밝히기 위해 성서 연구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생에 걸친 연구 끝에 2060년이 되기 전에 지구가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까지 말한 바 있다. 흥미롭게도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 때까지 살아서 이러한 뉴턴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6) 16세기 이탈리아의 브르노(Giordano Bruno, 1548∼1600)는 “우주 공간에 경계나 가장자리가 있다면, 경계의 다른 쪽에는 무엇이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며 우주는 고정된 중심이 없는 무한한 공간이라고 주장했다는 사실 때문에 교회가 그를 이단으로 몰아 화형시키기까지 했다.
17) 폴란드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는 신부로서 생전에 발표하지 못하고 사후인 1543년에 출간된 저서에서 종래의 우주 모델을 뒤엎는 지동설을 발표하였다. 지구가 원형궤도를 그리며 공간을 공전하고 있다는 구상은 그 전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대 이래 필롤라오스(BC 5세기), 아리스타르코스(BC 3세기), 쿠자누스(15세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15세기) 등이 주창했다. 그 중에서도 아리스타르코스는 태양이 지구보다 크기 때문에 지구가 자전하면서 그 주위를 공전한다고 주장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유사한 결론을 얻었으나 오랜 동안 관심을 끌지 못했다.
18) 이탈리아의 천문학자?물리학자였던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는 뉴턴 이전에 이미 진공 속에서의 낙체(落體) 문제를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그 결과를 경사면(傾斜面)에서의 실험으로 실증함과 동시에, 이른바 관성의 법칙과 중력 하에서의 포물선 운동까지 제시한 천재과학자였다. 그 후 스스로 제작한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측하여 얻은 연구결과들로부터 일찍이 짐작하고 있었던 지동설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의 지동설을 둘러싸고 로마교황청 당국자 등과 타협을 보지 못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그 결과 1616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정식으로 이 학설이 금지되어 갈릴레이는 수년 동안 침묵이 강요되었다. 그러나 지동설을 포기하지 못하고 1632년 당국의 검열을 거쳐 「천문학대화(天文學對話)」를 출간하였는데, 이 저서에는 표면상 천동설의 승리를 말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지동설이 옳음을 나타내고 있었으므로 격렬한 비난이 일어나 고발되어서, 결국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표면상 굴복하게 된다. 나머지 생애는 엄중한 감시 하에 자택에서 고독한 여생을 보냈는데, 죽은 후 공식적으로 장례를 지내는 것도, 묘비를 세우는 것도 허가되지 않았다. 그의 저서 「천문학대화」가 금서목록에서 풀린 것은 1835년이다.
19) 이런 점에서는 내가 지구 위에 매달린 것이 아니라 지구가 내 발끝에 매달린 것이라 해도, 지구가 나를 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구를 머리에 이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20) 현대 종교근본주의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과 현대 과학사상 및 해방운동에 대한 일종의 반동적인 종교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1881년 프리스턴대학의 하지와 워필드가 주장하였고 철저하게 문자주의에 기초한 ‘성서(聖書)무오류설(無誤謬說)’을 그 핵심교리로 하고 있으며 타종교인은 물론 같은 종교인이라 해도 신앙 노선이 다른 사람까지도 거부한다. 20세기 초반까지 세를 얻다가 1930년대 반지성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신학계에서 퇴조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선교사들에 의해 1910∼20년대 한국 개신교에 큰 영향을 미침으로써 한국교회는 전체적으로 근본주의 성향, 즉 배타성이 강하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성경은 글자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믿는 목회자가 84.9%, 평신도는 92.3%에 달한다고 한다.) 미국도 기독교 근본주의가 1978년 레이건 대통령 후보 때부터 다시 노골화되기 시작하여 현 부시 대통령 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21) 하느님에 의해 거듭났다고 공언하는 미국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 발발 직후 전 세계를 향해 주저 없이 ‘미국 편에 서지 않으면 적인 테러리스트 편’이라고 윽박지르며 줄 세우기를 시도해왔는데, 이는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눅 11:23)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연상케 한다.
22) 어떤 사건을 한 계에서 측정한 결과 길이와 시간이 와 라고 할 때, 이 계와 상대적으로 라는 속도로 움직이는 계에서 똑같은 사건을 측정하면 그 길이는 로 줄고 시간은 로 늘어난다. 여기서 는 빛의 속도, 즉 초속 3×108m(30만km)이다. 따라서 상대속도 가 빛의 속도 에 가까워질수록 길이축소나 시간지연 효과는 점점 크게 나타날 것이다.
23) 예를 들어 투수가 가장 빠르게 야구공을 던진다고 해도 초속 44m 정도인데, 이것은 1 초에 지구둘레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도는 초속 30만km인 광속의 6백만 분의 1보다도 작다. 따라서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운동은 광속에 비해 무시될 만큼 느리고, 따라서 시간지연이나 길이축소 현상을 일상적으로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24) 예를 들면, 10km 상공에서 태어난 뮤온(muon)이란 소립자가 어떻게 지구표면에 도달할 수 있는지 보자. 우주공간으로부터 오는 우주선(고에너지의 양성자 등)이 성층권의 공기와 부딪쳐서 전자질량의 약 2백 배 되는 뮤온이라는 입자를 만들어낸다. 지구상의 실험실에서도 뮤온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그 수명은 백만 분의 2(2×10-6)초 밖에 안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누구나 쉽게 계산해 볼 수 있듯이 뮤온이 광속으로 달린다 해도(광속보다 빠른 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붕괴되어 없어질 때까지 움직일 수 있는 최대거리는 6백 미터에 불과하고, 지구 상공 10㎞ 이상의 지점에서 생성된 뮤온은 절대로 지구까지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광속의 0.998배로 빠르게 운동하는 뮤온의 입장에서는 지구까지의 거리가 16분의 1로 짧게(길이축소) 보이는 반면, 지구의 입장에서는 날아오는 뮤온의 수명이 16배나 길게(시간지연) 보인다. 따라서 각각의 시공간의 크기는 다르게 측정되지만 뮤온이 실제로 지구표면에 도착한다는 사건 또는 현상은 어느 계의 입장에서도 상대론적으로 정확히 설명이 된다.
25) 고속으로 회전하는 원반의 중심과 가장자리에 원자시계를 고정시켜 놓으면 가장자리에 있는 시계가 느리다는 사실이 관측되었고(1958년, 뫼스바우어), 또 최근에는 비행기로 서로 반대방향으로 날면서 시간을 측정한 결과 시간지연 효과가 1% 이내의 오차로 정밀하게 확인되었다.
26) ‘겁(劫)’이란 인도에서 범천(梵天)의 하루로서 인간세계의 4억3천2백만 년을 일컫는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보통 연월일로써는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을 말하는데, 개자겁(芥子劫) 즉, 둘레 40리 되는 성중에 겨자를 가득 채워놓고 장수천인(長壽天人)이 3년마다 한 알씩 가져가서 다 없어질 때까지, 또는 반석겁(磐石劫) 즉, 둘레 40리 되는 돌을 역시 하늘나라 사람이 무게 3수(銖`) 되는 비단 천의(天衣)로 3년마다 한 번씩 스쳐 그 돌이 다 달아 없어질 때까지의 시간을 말한다. 반면 ‘찰나(刹那)'는 지극히 짧은 시간을 말하는데, 120찰나가 1달찰나, 60달찰나가 1랍박, 30랍박이 1모호률다, 30모호률다가 1주야이므로 1주야 24시간을 120×60×30×30으로 나눈 것이니, 곧 1/75초에 해당한다. 뇌신경이 반응하는 시간대가 10ms(1/100초) 정도이니 어쩌면 생체의 최소 반응시간 즉 눈 깜짝하는 사이 정도를 찰나라고 정의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27) 그렇게 빠르게 운동하는 지구상에 살면서도 평상시 우리가 그 사실을 못 느끼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는 단지 속도가 크다고 해서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힘() 또는 뉴턴의 법칙()에 의해 가속도()가 있을 때만 감지하기 때문이다. 빠르게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는 편안하게 잘 수 있지만, 천천히 달리지만 울퉁불퉁한 자갈밭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잠자는 것은 그래서 어렵다.
28) 예를 들면 은하의 별들 사이로 암흑물질(dark matter)이라고 불려지는 보이지 않는 어떤 물질이 꽉 차서 그 물질의 인력 때문에 은하단이 흩어지지 않고 뭉치게 되었다는 가설이 있는데, 현 우주의 질량분포도에서 9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예상되는 암흑물질의 존재량에 따라서 우주 밀도가 달라질 것이고, 그 밀도가 어떤 수축 임계치보다 작을 때는 우주가 지금처럼 계속 팽창하겠지만, 만일 수축 임계치보다 크다면 이 우주는 팽창하다가 결국에는 수축으로 돌아설 것이다. 대폭발 이전의 세계가 그런 우주일 것인데, 이런 물리계는 영국의 세계적인 물리학자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 1942~)이 말한 엔트로피 감소가 일어나는 물리적으로 전혀 다른 우주공간으로 지금과 같이 과거에서 미래로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시간개념이 아니라 거꾸로 가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29) 1900년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맞아 윌리엄 톰슨(William Thomson; Lord Kelvin, 1824~1907)은 볼티모어에서 “열과 빛에 관한 역학적 이론에 드리워진 먹구름”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오늘날 국제단위계 기본단위의 하나인 절대온도의 단위 켈빈(K)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그는 우주에 대한 이해는 거의 완벽하기 때문에 물리학자의 하늘은 대체로 맑으며, 다만 에테르 속을 움직이는 지구의 운동을 설명하는 문제와 흑체 복사와 관련하여 에너지 등분배 정리가 입자 모형과 걸맞지 않는 문제, 이 두 문제만이 작은 먹구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두 작은 먹구름이 20세기에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라는 전혀 새로운 물리학으로 자라나서 우주에 대한 해석을 크게 바꿔놓으리라는 것을 예감한 사람은 당시 거의 없었다.
30) 18세기 초 중력을 바탕으로 과학혁명을 완성한 뉴턴은 빛의 입자성을 맨 먼저 제기했고, 뉴턴이 지녔던 엄청난 권위와 영향력 때문에 18세기를 지나는 동안 소수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빛이 입자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와서 회절과 간섭 현상이 발견되면서 과학자들은 다시 빛은 파동의 성질을 지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05년 아인슈타인이 광양자 가설을 제기하여 백년 정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던 빛의 입자성을 다시금 부활시킴으로써 양자론의 발전에 커다란 획을 그었을 뿐만 아니라 빛에 대한 현대적 해석인 파동-입자 이중성의 개념이 만들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1) 실제 자연계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많은 입자들의 계가 통계적?확률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손가락만한 물체도 실은 1024개(억의 억의 억 개) 정도의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상기하면 우리들이 사는 세계가 얼마나 많은 입자들간의 관계 또는 상호작용으로 출렁거리고 있는지 알 수 있다.
32) 여기서 주사위 놀이란 양자역학의 확률이론을 빗대서 한 말이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큰 어른’ 또는 신은 “개인적인 기도를 듣고 응답하는 ‘인격적인’ 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우주라는 유기체를 대표하는 그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33) 아인슈타인은 65세가 되는 1944년에도 보른에게 편지를 보내 “나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의 완전한 법칙과 질서를 믿습니다. 젊은 동료들은 내가 늙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내 직관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될 날이 언젠가는 꼭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편지를 보냄으로써 물리학의 주류에서 벗어난 입장을 강변했다.
34) '궁극적인' 실재를 발견하려는 시도에 대해 보어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물리학의 과제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물리학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을 다룬다.”
35) 특히 아인슈타인은 산책 중 갑자기 동료 물리학자에게 “우리가 보는 동안에만 달이 존재한다는 것을 정말로 믿느냐”고 물음으로써, ‘존재’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늘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사물은 관찰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자신의 내재적 특성에 따라 존재해야 한다고 믿었고, 물리이론은 마땅히 이러한 실재성(reality)을 완벽하게 드러내야 하며 그렇지 못하다면 불완전한 이론이라고 생각했다.
36) 1990년대 어느 일본 생태학자가 발표한 바에 의하면, 일개미들 중에는 일을 하지 않고 노는 개미들이 항상 일정 비율로 존재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10만 마리의 개미군이 있다고 하자. 그 중에서 7만 마리는 일을 하고 있으며, 나머지 3만 마리는 놀고 있다. 그래서 일하는 개미 7만 마리와 노는 개미 3만 마리를 분리시켰다. 그런데 분리시킴과 동시에 일하는 개미 7만 마리 소군집 안에서 자동적으로 30%는 다시 노는 개미가 형성되고, 노는 개미 3만 마리 소군집 역시 그 안에서 자동적으로 70%는 다시 일하는 개미가 된다는 개미 군집의 생태적 연대성에 관한 보고였다. 이 보고서의 핵심은 분리시킨 두 소군집 사이에서 일어난 비율의 변화가 동시적이라는 사실과 그들 사이에서 어떤 개미는 일하고 어떤 개미는 놀게끔 하는 외형의 물리적 신호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 자동적으로 노는 개미와 일하는 개미의 분리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매우 놀랄만한 의미를 던져 주고 있다. 개미의 개체가 분리되어 있다는 이성적 전제를 가질 경우 우리는 이런 개미군집의 현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37) 아인슈타인은 ‘양자(量子)가 언젠가 어떻게 해서든지 제거될 것이고, 그래서 연속성과 그러므로 결정론이 회복되리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보어와 아인슈타인 두 사람 모두와 절친한 친구 사이인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 1880∼1933)가 반 농담으로 “아인슈타인이여, 좀 창피한 줄 알게! 자네는 바로 자네가 상대론을 발표할 당시 자네 이론을 비평하던 사람들과 똑같아 보이기 시작하는군 그래”라고 말했다고 한다.
38) 3계(三界)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6도(六道)는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39) BC 2세기 경 미린다(彌蘭陀; Milinda) 왕이 나선(那先; Nagasena) 비구에게 ‘죽어 없어진 자와 다시 태어난 자가 동일한지’의 여부를 물었다. 만일 동일하다면 영혼의 존재 혹은 생명체의 자성을 상정하는 것이어서 무아설과 모순되며, 만일 동일하지 않다면 윤회와 인과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결국 무아설과 윤회설이 양립할 수 있는가를 질문한 셈인데, 이에 대해 나선 비구는 “짜낸 우유가 굳은 우유가 되고 이것이 다시 버터가 될 때 그 각각은 동일한 것도 아니지만 굳은 우유나 버터는 우유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어린아이와 어른은 동일하지 않지만 어린아이가 자라 어른이 된다. 이와 같이 생겨나는 것과 없어지는 것은 별 개의 것으로 보이지만 순환이 지속된다. 이리하여 존재는 동일하지도 않고 상이하지도 않으면서 최종 단계의 의식으로 포섭된다.”고 답하였다.
40) 축구경기 중 선수가 퇴장 당하면 그냥 10명으로 싸워야 한다. 좀 가혹하기는 해도 0.5인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별 수가 없다. 어린이, 여자, 노인, 장애인 같이 약자라고 해서 0.5인 취급을 한다면 세상은 인권이 사라진 고약한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41) 물체의 복사열의 성질은 순전히 온도와 파장에 달려 있고 물체 자체의 성질과는 관계가 없다. 용광로처럼 가열된 구멍에서 복사되는 빛은 밝은 황색에서부터 적색, 청백색, 그리고 가장 뜨거운 '백열'에 이르는 스펙트럼을 발산하는데, 고전 물리학으로는 이 흑체복사 스펙트럼을 전혀 설명할 수 없었다.
42) 1909년에 밀리칸(Robert A. Millikan, 1868~1953)은 기름방울 실험을 통해서 전하가 임의의 값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전자의 전하(電荷), 즉 e=1.6×10-19C의 배수만 가능하다는 것을 밝혔는데, 이 e 값은 빛의 속도 c, 플랑크 상수 h 와 함께 우주의 구조를 결정짓는 중요한 상수 중의 하나이다.
43) 포논(phonon)은, 전자기파를 양자화 한 것이 광자(photon)인 것처럼, 고체물질 내의 원자들이 진동하는 에너지를 양자화 한 것으로 고체물성의 이해에 필수적인 개념이다.
44) 일찍이 라이프니츠(Gottfried Leibniz, 1646~1716)는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45) 아인슈타인은 죽기 4년 전인 1951년에 특허국 동료였던 베소에게 보낸 편지에서 “50년 동안 연구했지만,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없네. 과연 광양자라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썼다. 한마디로 아인슈타인은 양자이론의 확률적 해석 및 비연속성에 대한 부정적 선입관 때문에 스스로 이루어 놓은 뛰어난 발견과 업적의 가치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셈이다.
46) 아인슈타인은 “진리는 경험이란 시험을 이겨낸 것이다.”라고 하였고, 플랑크도 “근본적인 사실까지 파고들어라. 안다는 것의 시작, 즉 과학의 출발점은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 두어야 마땅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나가르주나(Siddha Nagarjuna, 龍樹, ~BC 212)는 “다르마(法, 진리)의 진정한 의미는 직접 경험할 때 드러난다.”라고 했고, 미국에 선불교를 전해준 일본인 선사(禪師) 스즈키(Daisetsu T. Suzuki, 1870~1966)도 “개인의 경험은 불교철학의 초석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극단적인 경험주의, 즉 실험주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47) 예를 들면 일개미는 평생 앞뒤 좌우만 알고 기어 다니기 때문에 2차원의 세계만 경험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48) 가령 옆집이나 놀이터 정도의 거리감각밖에 없는 네댓 살 된 아이에게 우리가 사는 지구를 이해시키려고 지구의를 돌려가며 설명한다고 하자. 국가라든가 지구 같은 공간개념이 전혀 딴 차원의 언어인 그 아이를 이해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1,2년 쯤 뒤에 다시 확인해 보면 그 아이는 이제는 안다는 듯이 빙그레 웃을 것이다. 그동안 그 문제만 계속 가르친 것도 아니고 저 혼자 화두처럼 씨름해서 알아차린 것도 아니다. 이처럼 어떤 개념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때가 되어 홀연히 알아지는 것이지 조금씩 깨우치는 연속적인 발전이 아닌 것이다.
49) 그러나 왜 자연이 그렇게 엔트로피 또는 자유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변화해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물리학자들은 이른바 ‘빅뱅'으로 생겨난 우주가 지금까지 계속 팽창하면서 부피가 증가함에 따라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쪽으로 가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엔트로피 극대의 상태인 '열역학적 평형'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을 뿐이다.
50) 미국에서 ‘창조과학’은 공적으로는 1987년 대법원의 위헌판결로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즉 과학이 아닌 종교로 판결이 난 것이다. 미국의 일반국민들도 95%가 하나님을 믿지만 과학교육의 측면에서 3분의 2(66%)가 과학에서 진화론만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미국의 창조론자들은 이미 창조과학을 공교육에서 가르치겠다는 꿈을 접은 지 오래며, 그 대신 이들은 진화론에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주장을 내세워 진화론 교육을 제한하려는 시도만을 할 뿐이다. 최근 미국 창조론자의 관심사는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 ID)로 옮아갔으나. 이 또한 초자연적인 원인(지적 설계자)의 개입을 증명하려는 ID가 ‘모든 사건이 순수한 자연적 원인에 의한다는 자연주의적 과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에서 미국의 과학자 단체의 연합인 ‘미과학진흥협회(AAAS)’이 “ID 이론을 창조론과 기타 종교교육을 다루는 식으로 과학과 분리시켜 다뤄야 하며, 미국 과학교육에서 ID 이론이 가르쳐지지 않도록 정책 결정자가 반대해야 한다”는 성명을 낸 바 있다. 2002년 1월 부시 대통령이 서명한 '연방교육법'에도 상원 법안에 포함됐던 ‘진화론 비판과 ID가 의도된 샌토럼(Sen. Rick Santorum) 수정안’이 제외됐다. 과학인 진화론과 종교적 의사(擬似)과학인 창조론과 ID를 분리시키려는 미국 과학계의 노력의 결과이다.
51) 1981년 창립된 ‘한국창조과학회’는 1986년 5월 당시 미국 창조과학회(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부회장이자 생화학자인 기쉬(Duane T. Gish) 박사를 초청하여 연세대에서 강연회를 가졌는데, 그 때 그는 이러한 논리를 폈고, 그 자리에 많은 과학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은 채 일간지마다 소개된 바 있다. 이렇게 과학적으로 옳지 않은 논리로 반복적으로 일반인들을 현혹시키는 창조론자들의 태도는 신앙과 과학을 무리하게 연결시키려는 성급함 때문이며 오히려 정신세계인 종교를 물질세계인 과학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결과만 초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52) 예를 들어 뜨거운 물과 찬물을 섞을 때, 찬물을 생각하면 엔트로피의 증가가 될 것이고 뜨거운 물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엔트로피의 감소가 틀림없지만, 그러면서도 미지근한 물 전체의 결과적인 엔트로피는 역시 증가한다는 것을 쉽게 증명할 수 있다. 또 온도가 내려가면서 원자들이 서로 붙어 기체가 액체로 되고 다시 고체 또는 잘 정렬된 단결정 상태를 만드는 것이나, 강하게 끌어당기는 중력장 부근에서 물질이 자발적으로 조직적 배열을 만드는 경향도 모두 국소적인 엔트로피 감소현상이다.
53) 태양은 앞으로 50억년 동안 지금과 같은 상태를 유지한 후에 점차 그 부피가 늘어나 적색 거성이 돼 우주의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물론 그때가 되면 인간의 운명도 다하겠지만, 인간이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 기껏해야 40만년 전이었으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다.
54) 2002년 1월 서울대 의대 생화학교실 박상철, 서유신 교수팀은 ‘생후 2개월 된 젊은 쥐와 26개월의 늙은 쥐에게 독성 물질을 투여해 유전물질인 DNA를 파괴한 뒤 젊은 쥐에게서 세포 자살 현상이 7배 정도 왕성하게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DNA가 손상된 세포가 암 세포로 변하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생체를 보호하는 현상과 병든 세포의 자살이 지연되는 경우 노화와 암의 중요한 한 원인이 된다’는 연구결과를 영국에서 발행되는 권위있는 과학잡지인 네이처에 발표해서 관심을 끈 바 있다. 즉 ‘상식과 달리 세포는 젊을수록 공해나 독성물질 등 외부의 유해 환경에 노출될 때 빨리 죽으며, 세포 자살을 통해 세포는 일찍 죽지만 암이 되지 않으므로 개체는 오히려 보호된다’는 것이다. 한편 식물의 씨는 영양은 풍부하지만, 동물이 먹으면 소화가 잘 되지 않도록 단백질 가수분해 억제제(inhibitor)가 다량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식물이 종족보존을 위해 동물들이 씨까지 먹어치우지 못하도록 하여 씨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55) 세계를 변화하는 과정으로 봄으로써 순수객관주의를 비판한 유기체 철학자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는 우주의 물리적 힘을 거슬리면서 자기조직만을 위해 다른 생명까지도 죽이는 생명현상을 두고, “Life is Robbery(생명은 도적질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56) 2002년 2월 미국 과학자들이 중국 동북부의 한 연못바닥에서 나온 500년 묵은 연꽃 씨를 배양해 꽃봉오리를 맺게 하는 데 성공했다고 보도됨으로써, 겨우 10년간 개체를 보존하는 볍씨나 콩, 밀과 달리 5세기 동안이나 잠자던 연꽃의 씨앗 속에 깃든 신비롭고 무궁한 생명력에 경탄한 바 있다.
57) 무엇이든지 쪼개어 보면 궁극적 최소단위까지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신념. 현대과학이 전체적 관련성을 해명하기보다는 부분적 확실성을 추구해 온 데에는 환원적ㆍ분석적 방법의 채택 못지않게 용이한 목적달성이라는 동기가 크게 작용하였다. 물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갈릴레이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면서 큰 문제를 논의하기보다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진실을 알아내는 길을 나는 따르겠다”고 선언한 것은 서구과학문명의 성격을 잘 대변하는 한 마디라고 할 수 있다.
58) 모든 자연현상은 오직 기계론 내지 환원주의의 원리에 따라 이해되고 설명될 수 있다는 확신은 급기야 다른 과학분야는 물론 거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예를 들면 경제학에서도 생태론적으로 모든 것이 얽혀 살고 있는 사실을 무시한 채 그저 경제라는 요소만을 떼어 내어 생태파괴적인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데카르트-뉴턴식 사고에 그 근본 뿌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59) 반야심경에서도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절절이 이르지 않는가. 그러나 공(空)과 색(色)을 우열로 구분하는 잘못된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부 불교계 또는 불교국가가 색의 세계, 즉 과학세계 또는 물질세계에 오히려 충실하지 못하게 되는 현실을 보게 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색을 분별의 세계에서만 보면 미망함에 빠지게 되지만 연기의 세계에서 보면 그대로 장엄한 화엄세계이고, 공을 이치의 세계에서만 보면 허무해 질 수 있지만 역시 연기의 눈으로 보면 바로 실상이기도 하다. 기계와 정보에 얽매이기 쉬운 현대인들에게 본질과 현상의 구별됨 없는 중도의 눈은 삶의 중요한 좌표계이기도 하다.
60) 2003년 5월 22일자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THE TIMES)는 평상심(平常心)을 추구하는 불교 신도가 보통 사람에 비해 훨씬 큰 행복감을 누리며 산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고 보도한 바 있다. 미 위스콘신 주립대 연구팀은 참선과 같은 명상 수행을 하는 불교신자들의 뇌파를 수년간 조사한 결과 기쁨과 안정감 등을 주관하는 왼쪽 뇌의 움직임이 다른 사람에 비해 이례적으로 활발하며, 불교식 생활습관은 명상을 할 때 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뇌의 움직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남을 밝혀냈다고 한다. 신경과학자들은 이 같은 연구결과가 종교적 수련으로 뇌의 반응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입증한 것이라며, 불교 수행자들이 공포와 불안감을 촉진시키는 뇌의 활동이 일반인에 비해 현저히 낮음으로써 일반인에 비해 침착하고 만족감이 높은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이유를 뇌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61) 예를 들면 환경운동가들의 필독서인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의 저자 프리츠 슈마허가 미얀마를 다녀와서 쓴 '불교경제학' 단원에는 “자본주의는 소비를 극대화함으로써 만족을 구하려 하지만, 불교에서는 적정한 소비를 통해 만족을 극대화하려고 한다”고 언급함으로써 서구인들의 만족과 불교인들의 행복이 질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대비시키면서, 결국 인류가 지향해야 할 가치로서 불교적 가르침으로 회귀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62) 김용옥은 「화두, 혜능과 셰익스피어」(1998)에서 “한 마디로 20세기 동안에 불교는 방치되어 있었다. 지성의 현장에서 추방되어 있었다. 식자의 관심 속에 소외되어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단언한다. 21세기는 불교의 중흥의 세기가 될 것이다. 불교적 가치가 어떠한 가치보다도 우위를 점하는 그러한 세기가 될 것이다.”고 주장하였으며, 박이문도 「문명의 위기와 문화의 전환: 생태학적 세계관을 위하여」(1996)에서 “인류가 다음의 세기에 수용해야 할 사고의 패러다임 즉 문화의 틀은 불교나 노장(老莊) 사상으로 대표되는 동양적인 것이어야 할 듯싶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63) 실제로 다람살라의 티베트 승려들은 비구계를 받기 전 13년의 교육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 중 4년간은 수학, 천문학, 물리학, 생물학 등 과학 관련 과목을 배운다고 한다.
출처: https://redrails.tistory.com/2 [Romantic Egoist]
*** 참고자료 링크 :
요약 참된 공이 별도과 분리된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사물 그 자체의 존재 양상, 곧 다양한 인연의 조합인 연기(緣起)라는 불교교리.
내용
불교의 근본 교리 가운데 하나인 공(空)은 이 세계의 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음을 표방하는 개념이다. 대승불교 중관학파의 용수(龍樹)는 초기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緣起)가 바로 공의 뜻임을 천명하였다. 연기는 이 세계의 만물이 다양한 인(因)과 연(緣)의 조합에 의해 생기하는 것이지, 고정 불변의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이와 같은 공에 대해 예부터 몇 가지 잘못된 이해 방식이 있었는데, 중국 화엄종의 승려 법장(法藏: 643~712)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주석서인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般若波羅蜜多心經略疏)』에서 이를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첫째는 공이 사물과 다르다는 견해이다. 이는 공을 사물과 다르다고 보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물을 떠나 별도의 공을 구하는 것이다. 법장에 따르면, 이런 견해에 대처하기 위해 『반야심경』에서 ‘색이 공과 다르지 않다[色不異空]’라고 하였다. 둘째는 공이 사물을 소멸시킨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는 이 세계의 구체적인 사물을 소멸시킨 뒤 남는 빈 공간을 공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대처하기 위해 『반야심경』에서 ‘색이 곧 공이다[色卽是空]’라고 하였다. 셋째는 공을 어떤 특정한 사물로 여기는 견해이다. 이는 공을 이 세계의 다양한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있는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대처하기 위해 『반야심경』에서 ‘공이 곧 색이다[空卽是色]’라고 하였다. 공에 대한 이런 잘못된 견해들을 타파하기 위해 불교도들은 진공(眞空), 곧 참된 공이란 이 세계의 사물 그 자체의 존재 양상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이 세계에 있는 만물의 관점에서 볼 때, 만물은 고정 불변의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생성과 변화가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만물이 공(空)하므로 비로소 생동감 있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세계의 만물과 공의 원리가 서로 장애함이 없는 관계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파악할 때, 진공 그대로 묘유가 된다는 관점이 성립한다.
이는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관점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부파불교 시기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같은 부파는 무상(無常)한 현실을 벗어나 무상하지 않은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사유 체계를 세웠다. 이에 따르면 열반은 무상한 현실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공묘유의 관점에 따르면, 진정한 열반이란 이 세계의 현실 속에서만이 실현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세계의 만물 자체에 공의 이치가 온전히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과 같이 대승불교에서 제창된 내용 역시 이러한 진공묘유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대승불교의 영향이 강한 동아시아 불교에는 진공묘유의 관점이 보편적으로 수용되었다. 이를 통해 대승의 불교도들은 기존의 염세적이고 소극적인 세계관으로부터 이 세계를 보다 긍정하는 적극적인 세계관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중국의 다양한 불교 종파들, 가령 화엄종, 천태종, 선종 등은 모두 일상을 떠나지 않고 불교의 진리를 구현하고자 시도하였고, 이러한 경향은 우리나라에 전래된 불교 종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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