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택신회를 중심으로 한 북종선과 남종선 사상의 비교 고찰

2019. 9. 12. 19:38경전 이야기



선의 세계

 

하택신회를 중심으로 한 북종선과 남종선 사상의 비교 고찰



프로파일임기영 불교연구소 2019. 8. 4. 18:02

1993. 6 (선불교연구 논문)


荷澤神會를 中心으로 한 北宗禪과 南宗禪 思想의 비교 고찰

- 차 례 -

서론

1. 荷澤神會의 生涯와 滑臺의 宗論

2. 神會의 北宗禪비판

3. 神會와 慧能(南宗禪)

결론 - 神會가 중국 선불교에 미친 영향

참고문헌

서 론

   中國禪宗史 전체를 놓고 볼 때 사상적으로 변혁을 일으킨 핵심적 인물을 넷 들자면 菩提達磨, 曹溪慧能, 馬祖道一, 臨濟義玄을 들 수 있다. 菩提達磨는 二入西行과 壁觀으로 修行을 단순화시켰고, 慧能(638-713) 頓悟見性 사상으로 중국선종이 인도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중국불교로 토착화하는데 기여했으며, 馬祖道一(709-788)의 선의 특색은 ‘平常心是道’로, 사람들의 생활과 밀착된 현실적인 새로운 종교로 등장했고, 이러한 분위기는 臨濟義玄(?-867)에 와서 그 절정에 이르러 無位眞人, 無依道人 사상으로 현실세계의 절대긍정이라는 중국인의 전통적 정신세계와 하나로 밀착되는 중국화된 선불교로서 확립케 된 것이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중국 선불교계는 6조 慧能을 기점으로 하여 중국의 독특한 새로운 종교로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本稿에서는 慧能의 사상 안에 어떤 면이 이런 변혁을 일으키게 한 원동력이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계에서 밝혀진 바로는 禪宗史를 다루고 있는 傳燈史들의 대부분이 南宗禪을 中心으로 한 僞作이라는 것이 드러났고, 따라서 敦煌本에서 발굴된 책들로 후기 선종사를 다시 쓰게 되었다.

   결국 후기 선종사가 새로 씌여지면서 그 전에 ‘南頓北修’이라고 내건 주장에 의문을 갖게 되었고, 중국 선불교계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던 慧能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많은 학자들은 남종선에서 주장하는 頓悟思想이 北宗禪內에 이미 있었던 것이었고, 그것이 단지 남종선에 와서 크게 드러난 것 뿐이라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本稿에서는 이러한 現 禪佛敎의 추세에 또 다시 의문을 갖고, 과연 慧能의 사상이 단순히 神秀를 中心으로 한 북종선 내에 있었던 것의 재발견에 불과했겠는가? 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神會가 無遮大會를 통해 慧能을 제 6祖로 모시는데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투쟁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단순히 慧能의 정통성을 증명함으로서 자신이 그 법맥을 이은 제 7조임을 입증하기 위한 자기 명예 회복의 발로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慧能이 단순히 神會에 의해 역사적으로 조장된 인물에 불과하다면 지금까지 慧能이 중국선불교계에 그토록 중요한 인물로 남아 있었겠는가? 라는 문제점을 안고, 이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중국의 胡適씨와 일본의 鈴木大拙씨에 의해 발견되어 교정출판된 돈황 출사 사본인 胡適校 <神會和尙遺集>(1968)과 鈴木大拙 <敦煌出土荷澤神會禪師語錄>(1934)을 중심으로 하여 그 해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1. 荷澤神會의 生涯와 滑臺의 宗論

   神會의 생몰연대에 대해선 胡適氏가 여러 자료를 분석하여 670년에 출생하여 762년에 93才로 入寂했다고 주장했으나, 최근 <<荷澤神會塔銘>>의 발견에 따라 684년에 출생하여 758년 75才에 入寂한 사실이 밝혀졌다. 神會의 전기를 싣고 있는 諸傳에서 한결같이 전하는 건 그의 俗姓이 高氏이고 하북 襄陽출신이라는 점이다. <<宋高僧傳>>에서는 그가 <<後漢書>>를 읽고 佛敎의 교설을 알아 그것을 인연으로 仕官에 지원하는 것을 그만두고 출가했다고 전한다.

   神會가 慧能을 만난 뒤 그의 門下에 있었던 年數 또한 慧能 입적시 그의 나이 등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마는 그 중 <<宋高僧傳>> 說이 가장 믿을만한 것으로 호적은 보고 있다. 이 <<宋高僧傳>>의 설은 神會가 당시 詩畵의 大家였던 王維(700?~761)에게 付託하여 지은 慧能의 碑文과 같은 내용인데 이 說에 의하면 神會가 慧能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4세 때요, 慧能 입적 시에는 神會의 나이가 46세였다. 그렇다면 神會는 慧能의 문하에서 32년을 수학정진 했으므로 神會의 어록 중 慧能의 사상이 상당 부분 닮아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神會는 732년 1월 15일 滑臺의 大雲寺에서 법회를 열어 신수의 후계자普寂의 禪宗을 맹렬히 공격했는데 이 법회에 대해선 뒤에 상세히 서술하겠다. 732-745년 사이에 神會의 활동에 관한 자료는 거의 없다. 745년 神會는 병조참판 宋鼎의 청으로 낙양의 하택사에 머물렀다. 여기서 神會는 계속 慧能의 남돈종을 선양하고, 보적의 북점종을 공격했다.

神會는 8년 후 北漸宗을 편애하던 뛰어난 설법가인 盧奕과 부딪혔고, 노혁은 神會과 모반을 꾀한다고 밀고해서 결국 추방되었다. 그가 추방되어 있는 동안 756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국가가 재정적인 곤경에 처하자 국가는 도첩제를 팔 수 있는 규정을 시행했다. 이 시기에 神會는 군사비 조달운동과 낙양의 수계를 감독하라는 명을 받고 추방에서 풀려났다. 이 일의 성공으로 神會는 곤경에 처한 정부를 구체적으로 돕게 되었다.

大歷 13년 (778)에 국가는 慧能을 중국 선종의 제 6祖로 인정했고, 神會는 제 7祖로 추앙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中國禪宗의 역사에서 새로운 획을 긋는 커다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頓悟最上乘論이라는 별칭을 가진 <<南宗定是非論>>獨孤沛의 序에 의하면 神會는 현종 開元 20년(732년) 正月 15日 일찍이 형주 玉泉寺에서 보적, 의복과 함께 신수가 영남 조계의 법통이라는 지위를 얻었던 滑臺 大雲寺에서 無遮大會를 열고 널리 천하의 學道者들을 모아 놓고 법통에 대한 宗論을 개최했는데 수세에 몰린 북종의 대표자는 산동의 嵩遠法師였다.

   開元 20년은 꼭 慧能의 입적후 20년에 해당되는데 <<歷代法寶記>>돈황본 <<六祖壇經>>에서 慧能이 입멸에 즈음하여 스스로 유언하길 자기의 입멸후 20년에 자기의 正法을 선양하는 제자의 출현을 예언한 것이 나오는 데, 이는 神會의 無遮大會를 두고 한 말로 그 후에 神會의 제자들에 의해 첨가된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서 멀리 獨孤沛의 서문을 통해 滑臺의 宗論의 개요를 살펴보면 다음의 4항목으로 요약할 수 있다.

① 達磨는 如來禪을 傳한 祖師라는 것.

② 達磨는 來朝하여 梁 武帝와 만나서 武帝 의 造寺와 度僧과 寫經의 功德을 「無功德」이라 고 물리친 일.

③ 崇山 少林寺에서 慧可를 만나서 印可하고 傳信의 袈裟를 수여한 것.

④ 北宗의 六代 祖承을 更新하여 第 六祖를 曹溪慧能으로 결정한 것.

   먼저 첫 번째는 神會가 종래의 북종선의 조로서 모시고 있는 菩提達磨를 빼앗아 그가 주장하는 남종선의 조로 모시고, 그 達磨로부터 비롯되는 남종선의 내용이 여래선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神會의 독창적인 설이다. 神會는 단순하게 <<楞伽經>>의 전수에 의한 전법의 사실을 강조하는 북종선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楞伽經>>에 설하는 사종선의 최위인 여래선을 차용하여 達磨가 전한 선법의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神會의 여래선은 실제 <<金剛經>> 혹은 반야주의의 입장이었다. 여래선은 <<楞伽經>>의 말이지만, 그 내용은 <<金剛經>>에 의한 것이며 神會의 활대의 정론의 쟁점의 하나는 <<楞伽經>>에서 <<金剛經>>으로의 이행이었다


   두 번째 達磨와 양 무제와의 상면과 「무공덕」의 얘기로 <<南宗定是非論>>에서 처음으로 주장된 것인데 <<역대법보기>>, 돈황본 <<六祖壇經>>, <<보림전>>에 계승되어 達磨전을 구성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神會가 達磨로 하여금 양 무제와 회견하여 제의 조사, 조상, 도승의 공덕을 「무공덕」이라 함은 신수천무후와 중종의 비호아래 양경법주, 삼제국사의 지위에 오름으로써 공덕주의적 불교신앙과 결합되어 있는 북종선에 대한 비난이다.

   즉 <<南宗定是非論>>遠法師 「수선사는 삼제국사가 되는 분인데 어째서 6조로 인정치 않는가?」라고 질문하자 神會 「達磨이래로 慧能대사에 이르기까지 6대 대사중 한분도 제사가 되신 분은 없었다.」라고 답함으로서 達磨의 袈裟에 대한 전승을 들고 나왔다.

즉 達磨가 혜가를 인가했을 때 그 증거로 한 벌의 袈裟를 주었으며 위 袈裟는 현재 曹溪慧能에게로 전수되었으므로 慧能이야 말로 남종 정통법계의 육조라는 점이다.

   세 번째는 傳法의 증거로서의 傳衣設은 네 번째의 慧能이 達磨이래 正法의 계승자로서의 근거로 제시한 것이다. 遠法師「그러면 도대체 법이 의상에 있는가? 袈裟를 가지고 傳法을 삼고 있습니까?」라고 따지자 神會法이 袈裟에 있을 까닭은 없지만 대대로 상승하여 온 전의로써 신으로 하는 것을 나타내어 學道者들에게 正法의 소재와 宗旨를 바로 알게 하여 그릇됨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말하자면 神會의 傳衣說 그 자체는 神會 자신의 북종의 전승을 傍系라고 배격시키기 위해 처음으로 창안한 것이므로 홍인이나 신수, 慧能은 이 사실을 알 까닭이 없다. 더군다나 傳衣說을 주장하는 神會 자신도 그 達磨所傳의 袈裟를 보았을 리가 없다. 神會는 傳衣說을 갖고 菩提達磨를 남종의 宗旨로 결정하여 신수계의 북종의 전승을 傍系라고 배척하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2. 神會의 北宗禪 비판

   神會의 북종선 비판을 살피기에 앞서 신수의 <<大乘無生方便門>>을 통해 핵심되는 북종선의 사상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신수는 <<大乘無生方便門>> 가운데에서 “이념(離念)은 부처의 본질이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묻는다. “어떠한 것이 부처입니까?” 대답한다. “부처라는 것은 마음이 깨끗하게 아주 맑아 있다거니 없다거니 하는 의식을 떠나 몸과 마음의 대립을 일으키지 않으며 항상 진여를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신수의 離念은 다음과 같은 <<기신론>>의 구절에 의거한 것이다.

“대체로 자기에게 눈뜬다는 것은 마음의 주체가 모든 분별의 의식을 떠나 있는(心體離念) 것을 말하는 것이며, 모든 차별의 의식을 떠난 마음의 상태는 마치 허공의 넓음과 같이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으며 모든 존재는 모두 평등하다.”

이러한 북종의 주장에 대해 종밀이 이를 평하여 “더러움을 제거하여 깨끗함을 찾는 방편으로서 일체의 경전에 용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마 타당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神會는 바로 이러한 북종 선안의 점수적이고, 방편적인 면에 대하여 불만을 갖게 되어 북종 공격을 시도했는데 그 대표적 문헌이 菩提達磨南宗定是非論(732년)이다. 이 문헌에 나타난 禪法의 相違와 그 비판은 대체로 ① 北宗禪法의 凝心入定, 住心看淨, 起心外照, 攝心內證에 대한 비판 ② 坐禪의 의의에 대한 相違 ③ 頓漸의 문제 ④ 禪으로서의 遠看近看에 대한 것이다.

「마음을 집중시켜 선정에 들고, 마음을 머무르게 하여 청정을 觀하고, 마음을 일으켜서 외계를 통일하며, 마음의 작용을 거두어 안으로 침잠한다.」

   神會는 위 4句가 진정한 깨달음을 방해하는 것이며, 샤리두트라가 고요한 숲속에서 좌선하고 있을 때에, 유마에게 호되게 비난받는 것과 완전히 같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모두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결코 차별해서는 안 되며, 명상하여 마음을 집중시키는 일에 억매여서는 안 된다. 마음으로 마음을 가만히 응시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 만일 마음을 가만히 응시해 나간다면 그대들의 마음은 마음을 응시한다고 하는 집착에 빠진다. 그러한 명상은 해서는 안 된다. ...... 모두 해서는 안 된다. 경전에 말한다. “內觀하지 않는 일이 깨달음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기억이라고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요건대 자기의 마음 그 자체는 본래 텅 빈 것이다.”

   이런 비판과 함께 神會 「念不起를 坐로 하고, 本性을 보는 것이 禪이다.」는 남종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힌 새로운 좌선의 정의를 제시했다. 「念不起」를 좌로 하는 것은 즉 無念의 입장을 말하는 것이며, 神會가 주장하는 無念은 또 般若波羅密이라고 하고 있다. 즉 神會는 불교의 본질이 北宗神에서 설하고 있는 것처럼 坐禪方便을 통한 정신집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無念의 根底에 있는 自性의 자각이 아니면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3. 神會와 慧能(南宗禪)

   그러면 북종이 말하는 離念에 반하여, 神會가 말하려는 얽매임이 없는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壇語>>의 말을 빌려 보자.

제 자 :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마음은 是非가 있습니까?

답한다 : 없다.

제 자 : 마음은 머무는 곳이 있습니까?

답한다 : 마음은 머무는 곳이 없다.

제 자 : 마음이 어디에도 머무는 곳이 없다면 그것을 아는 것은 어떤 것 입니까?

답한다 :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것은 마음의 가라앉음이며 가라앉은 마음의 본체를 마음의 편안함(定)이라 부른다. 가라앉는 마음에 본체에는 저절로의 앎이 있어 자기 마음의 본체의 가라앉음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을 깨달음(慧)이라고 부른다.

   즉 지혜 바로 그것이 텅빈 마음의 본질 그 자체이다. 어디에도 머무는 일이 없는 마음은 그의 용어로는 「無住」이며 이 無住라는 본체로부터 일체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神會의 定慧사상은 燈과 등불로 비유하고 있는데 이는 저자는 불명확하다. 호적박사에 의해 神會와 그의 제자에 의해서 편찬되었다고 주장하는 <<六祖壇經>>에도 보인다.

   “선정과 지혜는 어떻게 같은가? 예를 들면 등불과 그 밑의 관계는 같다. 등불이 있으면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빛이 없다. 등불은 빛의 본체요. 빛은 등불의 작용이다. 따라서 등불과 빛이라는 두 이름이 있으나 본질상 그 둘은 둘이 아니다. 선정과 지혜도 이와 같다.

그동안 학자들의 연구결과 「壇經」「金剛經」을 所依로 하며 無念을 宗으로 한 것은 밝혀졌다. 壇經에서의 “無念爲宗 無相爲体 無住爲体”는 「壇經」 전체를 흐르는 근본취지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金剛經>>의 無相 無住에 의한 念의 住하지 않는 이치가 慧能에게 體得되었으며, 이 것을 神會가 적극 강조한 것이다.

   전통적인 如來藏系 經典에서는 眞如本性이 客塵에 물드는 것을 방지하는 것을 강조함에 반해, <<壇經>>에서는 客塵을 떨치는 데 중점을 두지 않고 眞如本性의 淸淨을 念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즉 無念이 念과의 상대개념이 아니라, 無念이 바로 念이 되며, 無念의 無는 念을 수식하는 부가언어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無念爲宗이라는 <<壇經>>의 宗致는 念도 역시 <<壇經>>의 宗致가 됨을 나타내었으며 그것이 바로 眞如의 用으로서의 念인 것이다. 唐 後期 宗密荷澤宗 ‘知’一字로 나타내었듯이 空寂한 가운데 빛나는 지혜의 개발이 중요한 점임을 지적한 것이라 생각된다.

   眞如淸淨의 상태를 眞佛이라고 慧能은 <<壇經>>에서 揭頌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밝고 깨끗하여 때가 끼일 틈이 없구나”

이와 같이 慧能에게는 本性의 淸淨이 妄念으로 가려졌다는 문구의 해독보다는 처음부터 그것을 근본적으로 전환하여 本性과 妄念 자체가 본래 相이 없다는 般若空의 입장에서 不染보다는 無相無住에로 관심을 옮기어 坐禪의 개념을 보다 확대 및 대중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眞如本性의 開顯는 일상생활의 수많은 생각 가운데서 이루어지지 결코 생각을 버린 離念의 상태에서는 성취되기 어려우며 비록 眞如本性이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하더라도 다시 一切境界에 부딪치면 가려지고 마는 것이다. 一切의 法들을 끊임없이 생각하되 그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境界에 집착하지 아니할 때 眞如淸淨性은 그 생각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생각에서 바로 本性淸淨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이 頓悟見性인 것이다.

결 론

   神會의 ‘돈오정수’의 사상은 중국 선종사상 최초의 주장으로 뒤에 종밀神會의 頓悟見性說을 계승하여 <<都書>>에 인용하였다. 그러나 神會 자신은 돈오설이 단순히 자기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達磨 이래 전통의 돈오선을 계승한 사람은 남종의 6祖 慧能이며 또 자신이라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神會가 주장하는 보리 達磨 남종은 독창적인 돈오사상의 전개와 더불어 중국 선종의 새로운 선사상의 시대를 이루었으며, 돈오선은 남종선의 대명사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神會의 돈오선의 주장은 당시 각자의 자각적인 비판으로 새로운 自派의 선사상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로 <<六祖壇經>>에서 누누이 주장하는 頓悟, 無念, 般若 등 거의 모든 교설이 神會의 선사상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것임에 재언을 要하지 않는다. 실로 神會는 중국선사상사에서 반야주의의 선사상에 근거를 둔 「頓悟見性禪」의 전개, 無住와 無念說. 「知의 철학」 등 다양하고 독창적인 선사상으로 남종의 여래선을 주창하고 있다.

   神會의 사상에 대하여 선불교계 학자들의 평은 다양한데 여기 그 대표적인 학자인 호적박사야나기다 박사의 평을 들어보겠다. 야나기다神會가 반야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나온 것은 새로운 창조라기 보다는 북종선 내에 있던 것을 끄집어 낸 ‘재발견’한 것으로 보았다. 神會는 達磨를 자기가 주장하려던 반야주의의 조사로서 새롭게 등장시킴으로써 기존의 대승벽관의 達磨의 모습을 상실케 했으며, 楞伽經에 있어서도 여래선 가치만을 인정하여 達磨가 楞伽經을 전수했다기 보다 金剛經을 전수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의 왜곡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야나기다씨의 평은 達磨의 金剛經 전수를 역사의 왜곡이라고 본 것은 사실이나, 神會가 선불교의 전통을 達磨에서부터 새로 쓰려고 했던 그의 취지, 즉 왜 神會가 반야주의적 입장을 들고 나올 수 밖에 없었나?하는 면은 간과해 버린 것이다.

   이에 반해 호적씨의 1929년 <<荷澤大師神會傳>> 논문에서 남종의 선봉자이며, 북종의 毁滅者이며, 新禪學의 건립자이고, <<壇經>>의 作者인 이가 바로 우리들의 神會이며, 중국 불교사상에 있어 이와 같이 위대한 공훈으로 영구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물은 없다고 지극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와 같은 胡適의 神會평가는 벌써 60년전의 일이었으므로 오늘날 재평가되어야 하지만, 필자는 胡適박사가 내린 결론중에서 神會를 “新 禪學의 건립자”라고 본 지적은 神會에 대한 가장 정확한 평가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