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현묘지도와 난랑 外

2019. 9. 18. 10:03차 이야기




최치원의 현묘지도와 난랑| 지식백과사전

흙돌 심재방 | 조회 193 |추천 0 | 2017.05.30. 13:15

國有玄妙之道

한민족 정신세계의 원형은?

 

 

 

영상은 8분...꼭 한번 보세요!
우리민족의 정신세계, 알아 둬야지요. -[國松]-

   신교는 7500년동안 우리민족의 국교였고 지금까지도 면면히 흘러 내려오고 있는데,
그 맥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유 불 선의 모체가 된다는 사실이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쓴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 있습니다.
난랑이라는 화랑에게 지은 글인데, 그 내용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 중에서...]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말하기를 풍류라 한다.


說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 三敎 接化群生
이 종교를 일으킨 연원은 선사[仙家史書]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근본적으로 유 불 선 삼교를 이미 자체 내에 지니어 모든 생명을 가까이 하면 저절로 감화한다.

且如 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집에 들어온 즉 효도하고 나아간 즉 나라에 충성하니, 그것은 노사구

(공자)의 교지(敎旨)와 같다.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함 없는 일에 머무르고 말없이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은 주주사(노자)의
교지와 같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모든 악한 일을 짓지 않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축건태자(석가)의 교화(敎化)와 같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당시 그것을 사구라고 했기 때문에 노사구는 공자를 얘기하는 겁니다.

공자가, 우리 신교의 사상 중에서 입즉효어가하고 출측충어국하는 사상을

자기의 종지로 삼았습니다.


  주나라에 주사라는 벼슬이 있었습니다. 주사는 도서관 직원을 가리킵니다.

노자가 주나라에서 도서관 직원을 했어요. 그래서 주주사는 노자를 얘기하는 겁니다.

노자도 역시, 신교의 사상 중에서 하나를 절췌해서 자기의 사상으로 삼았습니다.

석가모니 역시, 우리 신교사상에서 하나를 가져가 자기의 종지로 삼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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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신채호님의 조선상고사에서 주지하던 바와 같이...
신라의 대학자, 고운-최치원님이 란랑비문에서 이르던
그 국유현묘지도(國有 玄妙之道)가, 이제 세상에 모습을 다시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나라의 정신계를 선도하는 문인들이
우리역사에 보다 많은 관심과 공부가 필요한
아주, 중대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고운-최치원 님이, 난랑비문에서 이르던
우리 민족 고유의 도로써, 수천년간 비전 되어 온
국유 현묘지도가 작금에 와서야,
비로소 다시 세상에 드러나고 알려지는 것일 뿐입니다.
개천성조-한배검-한웅 할아버지의 삼일철학-삼신사상은
지금, 세상에서 잘못 호도되기도 하고
왜곡 오인하고 있는 여타의 종교나 단군교 같은 것도 아닙니다.
대부분 자칫 오인하는데...
저는, 종교를 믿는 게 아닙니다.
대순진리교나 증산도 대종교, 단군교  등등...
그런 일련의 종교와는 일체, 무관합니다.
국유 현묘지도 (國有 玄妙之道)는, 종교가 아니랍니다.-[國松-李時明]-

 

 

* 鸞郞碑序

 난랑(鸞郎)은 신선과 화랑도를 함께 엮어 동시에 표현한 복합명사입니다


화랑은 난조(鸞鳥)처럼 오색이 찬란하며,

연한 녹색의 구슬로 장식하고, 분을 곱게 바르며, 아름다운 옷을 입고, 산수간을 다니면서 도의를 갈고 닦고 풍물놀이와 노래와 춤을 즐긴 것입니다


또 겸손하여 지위가 높아도 윗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검소하여 부자이면서도 사치하지 아니하며, 인자하여 권세가 있어도 허세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이를 삼덕행(三德行), 삼미행(三美行)이라고 하였습니다.


화랑이 오색찬란하게 구슬로 분장함은 난조의 몸체에 오색을 갖춤과 같았으며, 화랑이 춤을 즐겼음은 난조가 오음(五音)을 즐기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화랑의 삼덕행은 난조의 인자함과 유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난랑을 신선화랑(神仙花郞)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최치원의 현묘지도와 난랑

2017.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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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기획ㆍ특집 풍류도(風流道) 신라의 청년들을 찾아서


1천300년 전, 돌에 목표·언약을 담아낸 청년 둘은 화랑이었을까?

홍성식기자
등록일 2019.07.11 18:41
게재일 2019.07.12


풍류도(風流道)

신라의 청년들을 찾아서 ②





   경주 화랑마을에 전시된 임신서기석(보물 제1411호)의 복제품. 약 30cm 길이의 비석에 두 명의 인물이 나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을 새긴 삼국시대 신라의 비석이다.



   경주시 석장동에 자리한 화랑마을을 찾아가던 날. 도시의 아스팔트와 지붕을 적시던 세찬 소나기가 그치고 올여름 첫 더위가 시작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갈 듯한 세련된 기와가 인상적인 화랑마을. 그곳 전시장에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보물 제1411호)’을 만났다. 30㎝ 길이의 돌에 화랑의 결의가 새겨진 비석. 거기 쓰인 일흔네 자의 글씨를 오늘날의 문장으로 쉽게 풀어 쓰면 아래와 같다.



경주 화랑마을에 전시 된 보물 ‘임신서기석’
길이 30㎝ 돌에 일흔네 자 글씨 새겨진 비석

화랑도의 지도 이념은 ‘풍류도’ 라는 역사학자
유교·도교·불교 융합적 조화로 신라 발전 기여



   “임신년 6월 16일 우리 둘은 더불어 맹세하며 여기에 기록한다. 앞으로 3년 이후에도 충성스런 도리를 가슴에 새겨 이를 지키며 변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만약 우리 가운데 하나가 이 다짐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늘로부터 큰 벌을 받을 것이다. 나라가 어지럽고 세상이 크게 불안해진다고 해도 이 맹세는 지켜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한 지난날 약속했듯 다양한 책을 읽어 학업에도 정진할 것임을 다짐한다.”

신라시대 청년들의 유교적 도덕성과 그 실천의지를 담아낸 ‘임신서기석’은 서두에 적힌 ‘임신(壬申)’이란 글자로 미루어 볼 때 임신년에 세워진 것이라는 학설이 힘을 얻고 있다. 그렇기에 신라 진흥왕 시절인 552년, 또는 진평왕 때인 612년, 혹은 성덕왕 재위 기간인 732년에 만들어졌다고 보는 게 역사학자들의 견해다.

   다른 어떤 물질보다도 내구성이 강한 돌은 변치 않을 의지와 숭배의 마음을 담기에 좋은 재료였다. 세계관의 중심이 신(神)에서 인간으로 넘어오기 전인 르네상스(Renaissance) 이전 시대. 이탈리아 사람들은 돌을 깎아 성당을 만들었다. 불멸한다고 믿는 신의 존재를 현실에서 보여주기에 그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

   1천 년 전 캄보디아에선 크메르(Khmer) 왕조의 사원과 궁전을 미려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건축물들의 재료 또한 돌이었다. 수백km 거리에서 코끼리 수천 마리를 동원해 실어온 돌로 만든 석조건물은 자야바르만, 수리야바르만 등으로 불렸던 왕들의 권위를 더욱 강화시켰다.

   경주의 향토사학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1934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 석장사(石丈寺)터 인근에서 발견된 임신서기석은 신라의 청년 지도자였던 화랑들이 어떤 마음가짐과 비전을 가지고 생활한 것인지를 추측하게 해주는 귀한 사료(史料)”라고.



◆ ‘풍류도’와 ‘임신서기석’은 어떤 관계가?


   다수의 연구자들이 내놓은 그간의 성과물들을 종합하면 화랑은 20세 이전의 신라 청년들이었다. 현재의 시각에서 보자면 겨우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좀 더 범주를 넓힌다고 해도 대학교 1학년이나 사회 초년생에 불과한 또래다. 소년에 가까운 이들이 어떤 이념과 규범에 의해 교육받았기에 ‘임신서기석’에 쓰인 문구를 쓸 만큼 조숙할 수 있었을까? 의문과 다소간의 의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역사학자 최광식 “화랑도의 지도 이념은 풍류도”라고 주장했다. 절친한 두 명의 화랑이 자신들의 맹세와 다짐을 뜨거운 불과 세월의 풍화작용으로도 온전히 없앨 수 없는 돌에 명명백백(明明白白) 새겨 스스로를 다잡고자 만든 ‘임신서기석’.

여기에는 둘을 매료시켰던 ‘풍류도’의 향기와 흔적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풍류도’가 역사상 최초로 언급되는 것은 통일신라시대 학자 최치원(857~?)‘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다.

난랑(鸞郞)이란 이름을 가진 화랑을 기려 만든 비석을 해석한 ‘난랑비서’에서 유(儒)·불(佛)·선(仙) 통합주의자 최치원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다소 길지만 그 중요성을 감안해 현대적으로 해석된 문장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인용한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이를 ‘풍류’라 한다. 가르침을 세운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다. 그 내용은 삼교(三敎)를 본디부터 포함한 것으로서 많은 사람을 접촉하여 교화한다. 이를테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주지(主旨)와 같고, 무위(無爲)로 일을 처리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종지(宗旨)와 같으며,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敎化)와 같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유교, 도교, 불교를 효과적으로 융합하고 충돌 없이 조화시킨 ‘풍류도’가 바로 신라의 발전에 기여하는 동시에 화랑들의 정신적 지향점이 된 ‘현묘한 도(玄妙之道)’라는 것.

   ‘임신서기석’에 자신들의 향후 목표와 언약을 담아낸 청년들은 화랑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그들 역시 풍류도(풍류정신), 혹은 풍월도의 가르침에 근거해 비문(碑文)을 새기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이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경주 화랑마을의 임신서기석 전시관의 모습.




◆ ‘풍류도’란 단어가 생겨난 근원은…


   이처럼 신라사회와 그 사회를 주도했던 청년들의 조직 화랑도(花郞徒)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풍류도(풍월도)의 어원(語源)을 찾아보는 작업은 의미가 작지 않을 터.

철학자 한흥섭의 논문 ‘풍류도의 어원’은 주요 학자들의 견해를 치우침 없이 두루 소개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한흥섭은 풍류도“고대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한 사상 가운데 하나”라고 정의하며, “한국 철학사에서 풍류도의 위상은 중국에서 유입된 유교, 불교, 도교와 비교해 초라하기 짝이 없다”며 안타까워한다. 그는 자료의 숫자가 적고, 신빙성 여부의 판단이 어려우며, 논리 전개에서의 객관적인 설득력 결여가 풍류도를 하나의 체계를 갖춘 학문적 이론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풍류도의 어원’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풍류도의 본질과 뿌리를 찾아보자는 한흥섭이란 학자의 열정에서 출발된 것이 아닌가라고 짐작해본다. 그는 위에 언급된 논문에서 최남선(1890~1957), 안호상(1902~1999), 양주동(1903~1977)이 각기 주장한 풍류도의 어원과 그 의미에 관한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 최남선 “풍류와 풍월의 어원은 부루”


   육당 최남선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이다. 한흥섭에 따르면 최남선은 풍류도의 어원 ‘부루’에서 찾고 있다.

‘부루’란 예부터 존재한 고유 신앙이며, 그 신앙의 요지는 ‘하늘의 도(天道)’를 실현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 최남선의 주장. 더불어 최남선은 이 신앙이 유교와 불교에 앞서 있고, 유교·불교가 유입된 후에도 함께 존립했다고 봤다. 그렇다면 육당이 풍류도의 어원이라 칭한 ‘부루’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닌 단어일까? 최남선의 저서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이 물음에 답하고 있다. 다음과 같다.

   “부루‘밝의 뉘’가 이리저리 변하여 달라진 말이다. 대개 ‘밝’은 광명과 신(神)이요, ‘뉘’는 세계이니 ‘밝의 뉘’라 함은 광명세계, 곧 신의 뜻대로 하는 세상이란 의미다. 훗날 ‘밝의 뉘’란 말이 여러 가지로 변하고 또 이것을 한문으로 이리저리 쓰는 가운데 그 종교적 진면목이 일정 부분 가려지게 되었지만, 그 고갱이(핵심)는 꾸준하게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위의 인용을 볼 때 최남선은 ‘풍류도’를 한국의 고대 신앙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 종교적 지향점이 ‘하늘의 도가 실현되는 밝은 세상’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한흥섭은 이 논지(論旨)를 보다 세밀하게 분석해 육당이 말한 바 ‘부루’ 즉 풍류도의 골자는 ‘홍익인간’이고, 주장의 연원은 ‘단군사화’라고 추정했다.



◆ 안호상 “배달길의 이두문(吏讀文)이 풍류도”


양주동 “풍류와 풍월은 순수 우리말인 ㅂ에서 유래”




   한흥섭에 의하면 사학자이자 정치가이기도 했던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기본적으로 배달교(단군교)에 근거한 주체적 민족주의자”다. 그렇기에 단군의 가르침을 우리 민족 고유의 정통적 철학과 사상으로 믿었고, 그것을 배달길(風流道 또는, 화랑도)로 표현했다. 안호상이 정의하는 풍류도(풍월도)는 ‘배달길’의 이두문(吏讀文·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은 것)이다. 아래 인용을 보자.

   “배달길을 풍월도라, 또 배달교를 풍류교(風流敎)라 번역한 것은 순전히 우리말의 음을 따라 이두문으로 적은 것이다. 풍월도의 풍(風)이 옛날엔 발함 풍자요, 또 바람을 배람이라고도 했다.

또 풍월도의 월(月)은 달 월자다. 이들 ‘발’과 ‘배’와 ‘달’을 합쳐보면 풍월도는 ‘배달길’이란 말이다. 또한 풍류도의 류(流)는 흐를 류자인 동시에 달아날 류자임으로 풍류도 역시 ‘발달길’이 된다.”

    안호상은 신에 대한 숭배, 조상 공경, 인간 사랑이라는 배달교의 3가지 덕목이 풍류사상의 핵심 내용과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관한 보다 면밀한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논문 ‘풍류도의 어원’에서 마지막으로 소개되는 것은 ‘전설적 국문학자’ 양주동의 풍류도 관련 주장이다. 양주동은 사뇌가(詞腦歌·향가)의 해석 과정에서 풍류도와 풍월도가 우리나라 고대(古代) 종교사상인 ‘ㅂ道’를 한자로 표현하기 위해 빌려온 글자라고 말한다. 즉, 풍류와 풍월은 순수 우리말인 ‘ㅂ’에서 유래했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ㅂ’과 ‘ㅂ道’는 뭘 의미하는 걸까? 이에 관해 한흥섭은 이런 해석을 내놓고 있다.

   “양주동의 글자 풀이에 의하면 ‘ㅂ’은 광명(光明)이나 국토(國土)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ㅂ道’ 즉 풍류도는 ‘광명도’나 ‘국토도’가 되고, 이는 곧 태양 숭배나 자연 숭배 사상임을 뜻한다. 이러한 관점은 최남선이 말한 광명계의 태양을 숭배하는 민족적 종교사상과도 일치한다.”

   광명세계로 가고자 하는 의지,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 자연을 대하는 겸양한 태도…. 기자가 판단하기에 풍류도는 이런 이데올로기의 집합체로 보인다. ‘임신서기석’을 뒤로 하고 화랑마을을 내려오는 길. ‘풍류도의 정신’을 가슴에 담고 자신과 나라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홍안(紅顔)의 청년들이 떠올랐고, 문득 1천300년 전 두 화랑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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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북매일(http://www.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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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이것이 다 유교 때문이다-유교의 어제와 오늘 

이종우 칼럼니스트 

승인 2019.05.03 11:01 


▲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유교 탈레반 국가


   요즈음 팟캐스트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 성적인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을 비판하면서 그 결론으로 이렇게 말한다. 또한 오랫동안 노자와 장자를 연구한 모 교수도 사석에서 ‘유교는 그 등장부터 지배층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생긴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필자는 이러한 주장들에 일부 공감한다. 특히 유교가 처음 생기기 시작했을 때 그 논리가 기득권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상당부분 공감하며 향후 연구를 통해 논증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 여기에 필자가 조금 추가할 수 있는 이야기는 유교가 “유교 탈레반 국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유교가 보급된 것에 대한 것이다.유교의 집대성은 공자(孔子)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다. 우리나라에 유교가 처음 보급된 것은 위만조선, 즉 고조선이 생기고 난 뒤 한(漢)에 살던 위만이 사람들과 함께 고조선으로 귀화하면서 함께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공자의 경학사상, 즉 공자에 의해서 집대성된 각종 유교 경전과 그것에 대한 공부가 도입된 것은 삼국시대인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고구려 소수림왕 때 국가 교육기관인 대학(大學)이 유교의 각종 경전을 교육하는 기관이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적어도 이 시기에는 유교가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그런데 유교가 처음부터 당대에 지배적인 이념이 된 것은 아닌 것으로 예상된다. 고조선 때부터 우리나라에는 토착 사상이 있었다. 최치원의 난랑이라는 화랑(일각에서는 화랑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주장한다)에 대해 비석에 쓴 <난랑비서(鸞郎碑序)>에는 우리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며, 유(儒), 불(佛), 선(仙)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풍류도(風流道)라는 고유한 사상이 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당대 유행했던 각종 사상과 종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전통적인 사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이 말은 통일신라 당시 유교가 이미 상당부분 보급돼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유교가 하나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불교가 삼국시대에 전래되었고, 그 이후 불교가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이자 종교의 역할을 담당해왔기 때문에 유교가 사람들에게 많이 보급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이러한 모습은 고려 말까지 계속됐다. 고려 초 최승로가 새로운 왕조의 통치 방법을 제안한 시무책(時務策) 스물여덟 개의 조항에 따르면 불교의 폐단을 줄이고, 승려의 고리대금을 단속하며,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보급할 것, 그리고 미신을 타파할 것도 제안한다. 이것은 당시까지 불교가 폐단이 일어날 정도로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최승로가 “미신”이라고 말한 것도 당대에 존재했던 전통적인 신앙 형태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추측도 합리인 것으로 보인다.성리학을 주로 한 유교 사상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등장하고 백성들에게까지 확산된 것은 고려 말부터다. 앞에서 언급한 최승로 역시 유교적 지식을 평가하는 과거를 통해 관직에 올랐는데,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관료들이 유교 지식을 평가하는 과거를 통해 지배층이 되기 시작한 것은 유교의 확산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고려 말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삼았던 신진사대부무신인 이성계와 연대해서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세우면서 성리학은 본격적인 지배 이데올로기가 됐다. 그런데 1500여년동안 유교와 불교와 토착 사상이 공존해 온 상황에서 조선 왕조의 개창(開創)을 기점으로 성리학이 한 번에 백성들에게까지 보급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앞의 칼럼에서 언급했던 대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해서 국가 의례를 규정지었고, 각 지역의 지역 의례까지도 국가의 통제와 규정 아래 두려고 시도하였다. 또한 성리학의 시조인 주희가 가정에서의 유교식 의례에 대하여 기술한 『주자가례(朱子家禮)』도 보급했다. 이러한 노력은 16세기에나 그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그 결실이 조선 후기 상당기간 동안 유지됐지만, 국가의 문호가 개방되고, 새로운 사상이 보급되며, 근대화가 강제되면서, 조선 말과 일제 강점기, 그리고 오늘날까지 기독교를 비롯한 서양의 사상과 기존의 사상이 공존하고 경쟁했다. 그리고 기존의 사상들은 근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인식되면서 혁파되는 경우도 있었고, 전통의 한 형태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국가 차원에서 관리와 보호의 대상도 됐다.이러한 과정에서 유교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지역의 의례는 “유교화됐다”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그 원형을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국가 차원의 인구 조사에서 자신이 특정한 신앙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종교를 ‘유교’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그리고 가부장제도를 비롯해서 성에 대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에게 유교는 모든 폐단의 원인으로 평가받는 현상도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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