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郞道의 硏究 -成立과 思想을 中心으로- (李 夏 田)

2019. 9. 19. 06:23차 이야기


  *** 내용 정리중입니다.   ㅡ ((*)) ㅡ



花郞道의 硏究 -成立과 思想을 中心으로- (李 夏 田)| 花郞徒
溫故知新|조회 32|추천 0|2013.01.14. 13:07



花郞道의 硏究 -成立과 思想을 中心으로- (李 夏 田)


花郞道의 硏究
-成立과 思想을 中心으로-


李 夏 田



目 次

Ⅰ.序言 ……………………………………………… 1
Ⅱ.花郞道의 成立 ………………………………… 3
1.中央集權體制의 强化 …………………… 3
2.花郞道의 起原 …………………………… 5
3.花郞道의 成立 …………………………… 7
4.花郞道의 祖織 …………………………… 9
5.花郞道의 修練 …………………………… 15

Ⅲ.花郞道의 思想 ……………………………… 18
1.花郞道와 山神思想 …………………… 22
2.花郞道와 儒敎思想 …………………… 25
3.花郞道와 佛敎思想 …………………… 27
4.花郞道와 道敎思想 …………………… 30
5.花郞道와 風流思想 …………………… 33

Ⅳ.花郞道의 成格과 變遷 …………………… 37
1.統一以前의 花郞道의 成格 ……………… 37
2.統一以前의 花郞道의 成格 ……………… 46
3.花郞道의 變遷 …………………………… 54

Ⅴ.結 語 ……………………………………… 57

參 考 文 獻 ……………………………………… 61
ABSTRACT ………………………………………… 64


Ⅰ. 序 論

   新羅는 三國 중에서 가장 뒤늦게 成立되어 여러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中央集權體制를 갖추면서 民族統一의 大業을 완성하였다. 여기에는 많은 요인이 있었겠지만 그 중 주목할 수 있는 것은 花郞道를 통한 인재양성의 결과라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花郞道 硏究는 新羅社會의 이해와 통일전쟁과 관련하여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고, 또 花郞道의 起源이나 조직 및 기능에 대하여 다각도의 검토와 적지 않은 硏究業積이 나왔다.

   특히 1943년에 간행된 三品影渶≪新羅花郞 硏究≫가 주목된다. 三品氏는 花郞의 文化的 성격을 南方文化와 관련하여 파악하고 北方文化에 속하는 高句麗나 만주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花郞을 청년조직의 한 事列로 보고 이를 民俗學·民族學을 인용하여 논증하였다. 이러한 그의硏究는 당시만해도 획기적인 것이어서 이후 모든 花郞道 硏究에 지침서 역활을 해왔으나 국내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三品의 南方文化圈說에 대하여 이기백 교수高句麗 경당硏究를 통해서 高句儷에도 花郞道와 비슷한 靑少年集會가 있었음을 밝혀 그 한계성을 극복하려 헀다. 또 花郞道 문제를 전면적으로 집대성한 李基東 도 人類學·社會學 등 인접학문의 학문적성과를 참고하여 花郞道의 成立 배경과 骨品制道下의 기능·조직·수련에 대하여 새로운 정리를 시도하였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新羅의 社會溝造를 이해하는 방법의 하나로서 기존의 硏究成果를 바탕으로 花郞道의 成立과 사상 그 성격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다만, 花郞의 한 측면을 고찰한 것에 지나지 않아 그 한계가 있음을 諒解하기 바란다.


Ⅱ. 花郞道의 成立

1. 中央集權體制의 强化
   古代國家로서 新羅의 모체가 된 것은 6개의 邑落(村)으로 이루어진 斯蘆國이었다. 이렇게 成立된 斯蘆國은 주변의 小國들과 연맹하거나 흡수하면서 소국연맹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때는 연맹장의 위치가 三姓에 의해 교체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4세기에 이르러서는 中央의 執權力이 보다 강해지는 새로운 전환기를 맡게 되는 데 그러한 전환은 정치적 지배자의 칭호가 尼師今에서 정치권력이 보다 강력해졌음을 意味하麻立干으로 바뀐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朴·昔·金으로 교체되던 王位金氏 세력에 의해 세습하게 되었으며, 이는 경주평야에 거대한 積石木槨墳이 조영된 사실에
서도 입증된다.
   내물마립간 이후 눌지마립간에 이르기까지 金氏의 왕위세습권 확립은 이전의 소국연맹체 단계의 소국 首長들의 정치적 독립성을 약화시키고 이들을 중앙귀족으로 전환시키는토대가 마련되었다. 여기에 6部를 개편하여 행정구역화하였고 西方에 郵驛을 설치하고 도로·통신망을 정비하여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처럼 新羅는 국내의 支配體制를 강화하는 한편 對外的으
로는 高句麗의 남하정책에 대비하여 백제와 동맹관계를 강
화하였다. 이것은 百濟 동성왕과의 혼인관계라든가 高句麗
가 百濟의 雉壤城을 공격할 때 新羅가 百濟에 원군을 파견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대내·대외적인 발전을 거쳐서 新羅가 中央集權的
貴族國家로서의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은 6세기초인 智證王代
의 일로 생각된다. 3년(502)에 우경의 시작과 수리사업의 보
급으로 농업발전에 커다란 계기를 가져왔으며, 이러한 농업
의 발전은 新羅社會의 발전에 커다란 추진력이 되었음에 틀
림없다. 더우기 牛耕이 시작되던 해에 殉葬을 금지한 조처
는 노동력 확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 國號를 新羅라 정하고 마립간 대신에 중국식 王號를 사
용하여 고도의 중국식 정치조직을 받아 들이려는 노력의 표
시였다.
이와 같은 개혁을 거친 新羅는 법흥왕(514-540)대에 이르
러 中央集權的貴族國家로서 統治體系의 완성을 보게 된다.
그것은 兵部의 설치(516-517경), 율령반포, 上大等制度를 채
택 하였고, 또 23년(536)에에 建元이라는 독자적인 年號를
사용함으로써 왕권이 확립되고 이는 대외적으로 중국과 대
등한 國家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더우기 法興
王 22년(535)의 佛敎公認은 상당한 진통을 겪기도 하였으나
공인됨으로써 민족통일을 위한 思想的 뒷받침을 얻게 되었
다.
이로써 眞興王代의 정복사업은 先王의 體制정비에 힘입어
비약적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內部的으로 왕권이 강화되고 外部的으로 영토가
확대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정치제제에 알맞는 인재의
배출이 요구되어 이에 기존의 청년조직이 개편되어 花郞道
조직으로 成立을 보게 되었다.
2.花郞道의 起源

新羅가 6세기에 이르러 中央集權體制를 강화하면서 成立을
보게 된 花郞道는 청소년을 중심으로 한 조직이었다.
花郞道의 起源에 대하여 가장 종합적인 검토를 시도한 사
람은 三品彰渶이었다. 三品氏는 花郞을 남자집회의 한 事列
로 보고 일본·대만·北美 인디안 등의 남자집회와 관련시켜
민속학·민족학적으로 究明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花郞의 起
源을 세계 각 민족의 原始社會에서 볼 수 있는 성년식에까
지 관련하여 추정함으로써 韓族의 원시적인 一習俗으로 考
證하였다. 그는 ≪三國志≫ 夷傳 韓條의 기사와 ≪後韓書≫
東夷傳 韓條에 의거하여 소국단계의 성년식의 존재와 청소
년 집회소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를 통해 花郞道의 起源을
소국단계의 청년조직에 연결된다고 하였다. 三品彰渶의 이
러한 학설은 이후의 花郞道 硏究에 있어서 중대한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花郞制度는 南方文化圈에 속하고, 高句麗는 北方文
化圈에 속한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많은 반박의 이론이 속출
하였다.
대표적으로 이기백 교수는 高句麗의 경당 硏究를 통해서
경당이 신라의 화랑과 마찬가지로 미성년집회소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인식하여 高句麗·百濟·新羅를 하나의 文化圈으
로 묶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한편 이병도 박사는 ≪三國志≫ 東夷傳 韓條 {相呼皆爲道}
의 徒에 주목하면서 오늘날까지 풍습이 남아있는 두레와 연
결시켰다. 또 이 두레를 納入, 納聚, 人間의 뜻으로 보면서
村落의 공동체로 파악하였다. 그래서 화랑도도 바로 徒(두
레)에 起源을 가지면서 新羅에 원시종교단에서 파생된 수양
단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花郞道도 바로 도(徒)두레에 起
源을 가지면서 新羅의 원시종교단에서 파생된 수양단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최근에 花郞道의 起源에 주목할 만한 硏究성과를
보인 李基東 교수는 花郞道의 起源을 三韓時代의 연령으로
구성된 청년조직이었다고 하였다.이로써 新羅 花郞道의 起
源을 三韓社會까지 거슬러 올라갈수있는 가능성을 제시하
였다.

3. 花郞道의 成立
花郞道가 三韓의 소국단계의 청년조직에 그 기원을 갖는다
하여도 신라의 그것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花郞道가 만들
어진 6세기의 新羅는 이미 강력한 集權體制를 갖추게 됨에
따라 村落의 구조와 성격에도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따
라서 이전의 村落共同體를 中心으로 한 청년조직에 起源을
갖는 花郞道의 成立은 6세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관련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6세기 新羅는 王權의 强化와 國家支配體制의 整備에 따른
새로운 인재 등용이 國家的 요구가 절실한 시기였으므로 花
郞의 成立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政治的·社會
的인 구조변화로 말미암아 종래의 청년 조직은 眞興王代에
이르러 花郞道로 개편되었다.
三國史記 眞興王 37年條(576)에 보면 花郞道가 제정되어 정
착되기 이전에 원화도가 먼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三十七年 春 始奉源花 初君臣病無 知人 欲使類聚群遊 觀其
行義
然後學而用之 逐簡美女二人 一日南毛一日俊貞
聚徒三百餘人 二女爭娟相妬 俊貞引南毛於私弟 强勸酒至醉
而投河水 殺之 俊貞伏姝 徒人知和擺散 其後 更取美貌
男子 粧飾之 名花郞 奉之 徒衆雲集
이라 하여 미녀 二人을 뽑아 이를 源花라 하였는데, 徒의 중
심인물인 南手와 俊貞의 투기·질투로 살인에 이르게 되자
원화를 폐지하고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花郞으로 삼았다는
기록이다.
또 ≪三國遺事≫ 卷 3,彌勒仙花 未層郞 眞慈師條에 "대왕이
명을 내려 源花를 폐지하고 여러해가 지나 다시 우리나라를
중흥하려면 반드시 風月의 道가 있어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명을 내려 양가의 남자중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花
郞이라고 바꿔 부르게 하고 薛源郞을 國仙으로 삼아 받들게
했다. 이로써 花郞 國仙이 처음 시작되었다.
위의 기록대로 한다면 화랑은 眞興王 37年 봄 이후에 成立
된 것이 된다. 하지만 花郞에 관한 다른 기록을 보면 ≪三國
史記≫ 眞興王 23年에 花郞이 斯多含을 부장으로 삼아 가야
정벌에 종군시켰다는 기록이 있고 ≪東國通鑑≫ 眞興王 卽
位年(540)에 新羅에서는 童南으로 風月主라 이름하고 善士
를 구하여 그 무리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三國史節
要≫에는 眞興王 27年(566)에 "白雲이 國仙에 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眞興王 37年에 花郞이 成立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화랑은 中央執權化가 정비되기 시작된 中古時代
初期에 들어와 그때까지 촌락동동체를 기반으로 하여 일종
의 結社體的 성격을 띠면서 발전해 온 청소년 조직이 중앙
에 흡수되어 제도화된 것이다.

4. 花郞道의 組織
   다음으로 花郞의 組織에 대해 살펴보겠다.
花郞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법률로서 제정한 정식국가
기관이 아니고 일종의 半官半民의 성격을 가진 조직체였다.
花郞은 一代에 몇개의 花郞集團으로 나뉘어 있고, 이를 중
앙에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소위 國仙(花主)이었다. 一代花
郞集團의 숫자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으나 眞平王代(579-
632)의 사실로서 제5, 제6, 제7 花郞등 소위 三化之徒의 명
칭이 나타나고 있어 그 집단의 숫자가 적어도 7개 이상이었
던 것을 암시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花郞道가 歷史上 최전
성기를 謳歌할 때의 사실이므로 이를 보편적인 것으로 해석
하기에 무리가 있을 수 있겠으나 어쨌든, 各個의 花郞集團
은 花郞 한 명과 僧侶郞徒 한 명, 그리고 수많은 徒衆 즉,郞
徒로 구성되어 있다.
花郞道의 구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로는 金歆運 列傳의

金歆運 奈密王入世孫也 父達福健飡 歆運 少遊花郞文努之
門 時徒衆言
及某戰死 同門僧轉密曰……

기사에서 보면 花郞文努의 문하에는 歆運을 비롯한 많은
徒衆(郞徒)와 승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斯多含의 경우를
보면 낭도가 1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孝昭王代(692-
702)의 花郞인 夫禮郞의 門徒 역시 1천 명이었다고 하며 眞
聖王代(887-897)의 花郞인 孝宗郞의 경우도 그 낭도가 1천
명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개개의 花郞集團에 소속된 낭도수
는 대체로 7,8백명에서 1천명에서 1천명에 미치는 것으로
추측된다.
花郞이 될 수 있는 자격은 ≪擇貴人子弟之美者≫에서 볼
때 貴人子弟 즉 진골귀족 출신으로 볼 수 있다. 이 점은 현재
이름이 전하고 있는 花郞인 斯多含(眞興王代), 金庾信, 金歆
春(歆純)형제, 近郞, 竹旨郞(이상 모두 眞平王代), 官昌(太宗
武烈王代), 夫禮郞(孝昭王代), 金膺廉(憲安王代), 孝宗郞(眞
聖女王代)등의 출신을 보면 모두 진골 출신이라는 데서 확
인된다. 물론 2백명에 달했다고 하는 新羅代 花郞의 전체 숫
자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한 이들의 例만 갖고서 花郞
이 모두 진골 귀족출신이라고 단정하는 데는 무리가 있을런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음의 이유에서 花郞은 귀족 출신
이어야만 했다. 첫째는 당시 신라국가가 貴族支配的인 것,
둘째는 이러한 단체를 운영함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던
것, 셋째는 그 지도자는 계급적 地位와 學問, 敎養이 필요했
던 것을 들 수 있다.
花郞이 되기 위해서는 진골 출신이어야 했지만 진골 출신
이라고 하여 모두 花郞이 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화랑
선발의 일정한 기준이 있었다. 그 기준의 첫째는 美貌가 있
어야 한다는 점이다. 花郞 선발시에 이처럼 美貌를 중시한
것은 이전의 소녀를 中心으로 한 源花徒의 영향이 아닐런지
모르겠다. 선발기준의 둘째는 德行이다. 이 德行은 ≪三國
遺事≫의 <選良家男子有德行者>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여
기서의 良家男子란 진골귀족 자제를 意味하는 것이며 그중
에서도 德行者를 뽑는다는 것이다.
이 德行의 중시는 花郞道의 설치목적이 우리들의 行義를
보고 인재를 등용하려 한 데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충분히 이해가 되리라 본다.
花郞이 될 수 있는 연령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은 없다. 그
러나 ≪三國史記≫列傳에 立傳에 花郞을 보면 대개 15-16세
로 나타나 있다. ≪三國史記≫ 金庾信傳에 의하면 그는 15
세에 花郞이 되었다고 한다. 眞興王代의 花郞 斯多含은 15-
16세 때에 大伽倻 정벌에 출전하였다가 軍功을 세운 후 17
세에 病死했다. 또한 太宗武烈王代의 花郞이었던 官昌은 黃
山 전투에서 16세에 戰死했다. 시대가 좀 늦지만 憲安王代
의 花郞인 金膺廉은 15세에 臨海殿 宴會에 초청되었다. 따
라서 花郞이 되는 연령은 15-16세로 볼 수 있다. 이들의 成
業기간은 眞興王의 親政시작이 18세라든가 金陽의 初仕時
의 연령이 21세라든가 하는 사실에서 볼 때 대개 3年 정도
였을 것이다.
한편 花郞道의 구성에 있어서 僧侶郞徒가 있음을 3前章에
서 잠시 언급 하였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사실은 알 수가 없
다. 일반적으로 三國時代의 僧侶는 최고 貴族層인 동시에
최고의 지식인이었으므로 아마도 花郞道조직에서 花郞을
보좌하고 花郞道의 敎化와 자문을 담당하였으리라 짐작된
다. 그러므로 僧侶郞徒는 花郞集團에 섞여서 知的·精神的
방면에 활동하였고 특히 道德的 敎育에 일정한 구실을 하였
을 것이다.
이밖에 僧侶郞徒 중 月明師 경우, 花郞集團의 宗敎的 儀式
의 執行者 또는 歌辭의 作者로서 역활을 하였던 것으로 보
인다. ≪三國遺事≫에는 眞平王代 女子花郞의 郞徒 惠宿,
孝昭王代 未禮郞의 郞徒 安常, 景德王代 月明師 등의 기록
이 전하나 정확히 그들의 行跡에 대해서는 알길이 없다.
어쨌든 일반적으로 三國時代의 僧侶들이 최고 貴族層의 한
분자였으며 동시에 최고 지식인이었다는 견해는 시사해 주
는 바가 크다.
다음으로 花郞集團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郞徒를 살펴
보겠다.이들은 진골 출신이나 6頭品 이하의 頭品 신분도 있
었고 또 일반 평민 출신자들도 있었던 것 같다.
眞骨 出身者로 郞徒가 된 例로는 金歆運의 경우를 들 수 있
다.歆雲은 내물왕 8세손이었고 父는 達禍選飡이었는데 잡찬
(제3위)이었고<新羅 之貴骨>이라든가 <彼骨貴而勢榮>이
라 한 데서 진골가문이 분명하며 딸서 진골출신자로 郞徒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6頭品 출신자의 경우로는 竹旨廊의 郞徒였던 得烏의
기록을 보면, 그는 竹旨郞의 郞徒로 있으면서 富山城의 倉
直으로 차출되었는데 후에 그가 級飡이 된 것을 볼때 6頭品
出身者로 볼 수 있다.沙粱官 舍人으로서 花郞 近郞의 郞徒
였던 劍君은 아버지 관등에서 미루어 보아 5頭品이 아니었
을까 짐작된다.
平民出身의 郞徒는 현제의 기록으로는 그 존재를 찾을 수
가 없다.三品彰渶은 眞骨 이하 四頭品에 이르는 骨品에 속
하는 貴族階級 出身의 청년으로 보면서 平民子弟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헀다.
이에 대해 최근 李基白 교수는 王京에 거주에는 三頭品이
하 一頭品까지의 平民들도 郞徒에 포함되었을 것이라는 견
해를 제시하였다. 소위 名望軍의 보충의 위한 것이 이 화랑
의 조직인데 8세기초 新羅의 歷史的인 金大問이 그의 저서
≪花郞世記≫에서 <賢挫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
>이라 한 바, 良將과 勇卒은 花郞들이 장군이 되는데 비하
여 郞徒들은 停·幢의 기본적인 군인인 일반 武官이나 兵卒
이 되었던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花郞을 따르는 무리의 수가 일천 명을 헤아리고
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이 郞徒가 모든 眞骨·頭品 출신자들
로만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郞徒의 상당수에는 平民
出身者가 郞徒 구성의 대부분을 차지 했을 것으로 본다.
花郞은 이처럼 眞骨貴族에서부터 일반 平民에 이르기 다양
한 身分에 속하는 王京 거주의 청소년들의 대상으로 하여
편성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花郞의 구성원
들이 어디까지나 그들 자신의 意思에 따라서 自發的으로 맺
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花郞은 구성원들의 自
發的인 참여 아래 일종의 誓約의 형식을 통해서 조직되고
있다. 이는 지난날 村落共同體를 기반으로해서 발달해 왔던
청소년 조직의 전통이 강하게 保存되어 있음을 示唆하는 것
으로 생각된다. 이 점에서 花郞은 新羅社會의 血緣主義,氏
族的 結合主義를 초월한 하나의 自治團體的 性格을 띠는 團
體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5. 花郞道의 修鍊
花郞의 修鍊에 대해 살펴 보기로 하겠다. 花郞은 일정한 기
간을 정해놓고 단체생활을 한 듯하다. 新羅社會에서는 통상
3年을 하나의 誓約·修鍊·義務기간으로 정하고 있었는데 대
표적인 花郞이었던 金庾信의 傳記를 보더라도 그 수련기간
이 3년이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다음으로 화랑의 수련방법에 대해서 ≪三國史記≫에 <或
相磨以道義 或相悅以可樂 遊娛山水 無遠不至>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花郞의 수련방법을 크게 <相磨以道
義> 와 <相悅以可樂> 과 <遊娛山水>로 나누어 볼 수 있겠
다.
첫째의 <相磨以道義>에서 道義란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道義 그 자체가 그 당시 사회질
서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德目과 깊은 관련을 가지는 것은
분명하다. 화랑의 도덕적 덕목으로 圓光法師의 世俗五戒를
들 수 있는데, 世俗五戒는 당시의 국가적 현실에 입각하여,
그 堅持에서 時世에 적절하고 필요가 있는 道를 說한 것으
로 볼 수 있다. 따라서 道義를 世俗五戒와 결부시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圓光法師로부터 이 가르침을 받은
귀산과 추항은 眞平王 建福 19年(602) 8月에 阿某城 전투에
서 百濟軍과 싸우다가 전사했던 바, 이들 兩人의 최후는 ≪
三國史記≫에 立傳된 花郞,郞徒, 기타 일반 무사들의 그것
의 한 全型이 되고 있다.
그리고 壬申誓記石에서 보듯이 두 花郞이 3년을 기약하여
忠道의 執持와 渦失 없기를 誓約하고, 나아가 時·尙書·禮記·
左傳 등의 습득을 맹세한 것은 유교 경전의 학습을 통하여
충효로 표현되는 윤리적, 도덕적 소양의 연마를 나타내는
것이며 이는 바로 <相磨以道義>와 직결된다고 하겠다.
둘째의 (相悅以可樂)은 원시사회에서 共同的으로 찾아볼
수 있는 歌舞的인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이 역시 道義 연마
와 연관이 있으며, 이 방법을 통하여 서로의 우정과 집단의
공동의식으 도모하고, 엘리트로서의 수양에 보다 더 예술적
이고 정서적인 훈련을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실제로 花郞들이 可樂으로서 서로 즐겼다는 것을 ≪三國遺
事≫에 나오는 花郞의 歌曲을 통해 알 수 있다. 景文王代에
國仙인 激元郞·譽昕郞·周元·叔宗郞 등이 金蘭을 遊覽할 때,
국왕을 위한 治國의 情에서 歌曲3首를 지어 이를 舍知 心弼
을 시켜 大和尙에 보내어 玄琴抱曲, 大道古, 間群曲 등 노래
3首를 짓게 하였다고 하며, 또한 眞平王代에 居烈郞·實處郞·
寶同郞 등 세 화랑의 무리가 楓岳에 놀러 가려던 중 彗星이
나타나 여행을 중지하려고 할 때 融天師가 노래를 지어 부
름에 怪星이 없어 졌다고 한다. 역시 竹旨郞의 郞徒였던 級
干 得烏가 郞을 추모하여 소위 慕竹旨郞歌를 지은 것이라든
가, 景德王代의 鄕歌作家로 저명했던 僧 月明師가 본래 郞
徒 출신이었던 것도 花郞과 가곡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
다. 이러한 몇가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花郞이 얼마나 음악
을 重視하고, 또 이에 馴致되어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셋째의 <遊娛山水>라고 하는 수련방법의 목적은 名山大川
을 巡禮하면서 心身을 단련하는 가운데 단체정신을 함양하
고, 국토에 대한 애착심을 기르는 한편 道義를 연마하는데
있었다. 花郞들이 遊娛하였다고 하는 山水는 慶州 南山을
비롯하여 金剛山이나 智異山,혹은 近者에 알려진 南 蔚州群
斗東面 川前里 계곡과 같은 名山大川 일 것으로 생각되나
이 花郞의 이른바 遊娛를 그들의 끊임없는 求道行脚으로 본
다면, 55善知 을 찾아서 南方에 유행한 佛敎의 聖者 善齊童
子가 연상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역시 國土巡禮,聖山
觀參,靈岳修驗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으며, 한편 이
는 三韓時代 청소년 조직 이래의 전통으로 볼 수 있다.
특히 金庾信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혼자서 中嶽石窟 및
咽簿山 등 깊은 산속의 동굴을 찾아가 단식 기도하면서 靈
媒者인 샤만을 통해서 超人間的인 靈力을 몸에 익힌다든지
혹은 샤만을 통해서 山神의 啓示를 받는 등 여러 가지 신비
스러운 체험을 하고 있음이 주목된다.이같은 체험은 崔南善
이 적절히 지적했듯이, "사람의 생명이나 국가의 運祚가 오
로지 山神의 의사 여부에 달렸다고 하여 마치 그리이스의
올림푸스에 있어서와 같이 信託과 예언이 이 山神에 의하여
啓示되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花郞의 人格轉換 내지 自己革新에 샤마니즘의 요소
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Ⅲ. 花郞의 思想
前述한 바와 같이 花郞의 起源과 成立을 三韓社會의 청년
조직이 6세기 新羅가 中央執權的 體制整備로 인한 인재양성
의 결과로 파악했다.
그러면 花郞이 집단으로 유지되려면 그 나름대로의 사상을
내포하였을 것인데 과연 어떤 사상적 연원에서 출발하여 그
중심사상은 무엇이었을까?
崔致遠의 <난랑비서>에서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
다. 곧 風流이니 이 敎를 설치한 까닭이 仙史에 자세히 밝혀
져 있다. 風流道는 三敎를 포함하고 群生을 교화하는 것이
었다."라고 하여 花郞을 風流라고 부르면서 그 안에 유·불·
도의 삼교가 포함되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이어서 삼교의 내용에 대해서는 "집안에 들어서면 孝하고
나라에서는 忠하니 魯司(공자)의 가르침이며 또한 모든 일
을 거침없이 처리하고 묵묵히 일을 실행하는 것은 周柱史
(老子)의 가르침이었다. 또 어떤 악행도 저지르지 않으며 오
로지 착한 일만 봉행하는 것은 乾太子(釋迦)의 교화 였
다."라고 하면서 삼교를 받아들여 삼자를 포용 소화한 "玄妙
之道, 日風流"를 新羅에서 일으킴을 진흥왕은 나라를 흥하
게 하는 길이라고 일찍이 주장했다.
新羅는 삼국 중 가장 후진한 나라로 인접 國家인 高句麗나
百濟가 中國文化를 받아들이면서 겪은 경험을 거울 삼을 수
있었고, 外來文化 자체도 일반 다른 國家를 거처서 제3국에
들어갈 때에는 그 劣勢가 鈍弱되기 때문에 능동성을 잃고
피동적으로 작용하고 影響하게 된다. 그러므로 新羅의 固有
文化가 外來文化에 의해 매몰되지 않고 오히려 좋은 영양으
로 섭취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新羅의 후진성과 위
치상의 불리한 여러 조건들이 新羅的 文化를 창조할 수 있
었다는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이 시대의 新羅가 섭취한 중국의 儒敎는 先秦시대의 실천
도의를 중시하는 原始儒家思想이었으며, 道敎는 종교적인
것보다는 자연주의의 老子와 지혜주의 蔣子를 통합한 精神
自由의 도가사상이었다. 그리고 儒敎는 이미 중국화된 天
太,華嚴과 순수종교적인 涅槃,彌勒思想이 성행하던 때였으
므로 받아 들인 삼교가 모두 理想國家를 실현하는데 각기의
중요한 측면을 담당하는데 아주 적합했다고 볼 수 있다. 儒
敎의 도의 규범은 인간의 의의와 가치소재를 자각케 했고
도교의 精神자유는 생활의 낭만과 슬기를 확대시켰고, 佛敎
의 佛國淨土는 이상을 현실화 구체화시켰다고 봄으로써 이
시대의 花郞道는 삼교의 조화된 사상이 우리 고유의 사상
속에 소화 흡수되었다. 그러므로 소화된 삼교사상은 그것이
중국에서 왔다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우리적인 사상이다.
따라서 花郞精神은 전통사상과 외래사상의 단순한 習俗에
서 成立된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전통사상이 외래사상을 融
和 조하시켜 새로운 民族精神을 창조한 것이다. 이러한 과
정에서도 우리의 사상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을 가진 花郞은 眞平王代에 와서 점차 기틀이
잡히고 그 全盛期를 맞게 됨에 따라 國家的 방침과 권위 아
래 청년교육과 훈련지침으로 구체적 戒를 갖게 되니 이것이
世俗五戒이다.
세속오계는 佛僧 圓光이 신자가 지켜야 할 도리를 귀산과
추항에게 가르쳐 준 것으로 실제로 花郞의 계가 되었다. ≪
三國史記≫ 貴山傳에 보면 귀산과 추항이 當代의 고승인 圓
光法師를 찾아가 종신의 계를 일러 달라고 청하니, 원광법
사가 말하길 남의 신자가 되었으니 능히 이를 감당하지 못
할까 염려된다. 그래서 세속에 알맞은 오계가 있는데 첫째,
임금을 섬기되 충으로써 하고 둘째, 어버이를 섬기되 효로
써 하며 셋째, 벗을 사귀되 신으로써 할 것이오 네째, 싸움에
임하여서는 물러남이 없울 것이요 다섯째는 산 것을 죽임에
있어 반드시 가려서 할 것이니 너히들은 이를 행하되 경솔
치 말라고 하였다.
世俗五戒는 儒, 佛 兩敎의 원리가 신라의 고유신앙과 융합
하여 새로운 실천논리로 발전한 대표적인 예이다.
花郞은 儒,佛,仙 三敎中 佛敎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
었던 것으로 花郞에는 상당히 많은 불승들이 소속되어 있었
으며, 일반적으로 花郞團體와 佛敎界와도 교류가 빈번하였
으니 花郞의 信條인 世俗五戒가 불승 원광에게서 비롯되었
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花郞이 佛敎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결코 佛
敎의 사상을 그대로 답습한 것은 아니니 원광이 귀산에게
世俗五戒를 지켜야 한다는 國家思想과 護國思想을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
世俗五戒 이외에 花郞의 信條에는 三異가 있으니 이것은
일종의 社會論理로서 新羅社會의 질서를 이루고 있던 道德
이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겸손으로 양심과 의리로서 세상을 살
아 나가는데 있어서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이며,
둘째, 검소이니 국민 모두의 검약한 생활을 통하여 國家의
부를 축적함으로써 국가발전의 기틀을 잡자는 것이며,
셋째, 奉事精神으로 國家의 공직에 있는 자들은 국민에게
겸허한 자세로 봉사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상의 내용은 國仙 膺廉이 전국을 優遊한 후 자기가 보고
들은 新羅社會의 미덕을 憲德王代에게 보고한 내용으로 三
美라고도 한다.
이상의 세 가지 미덕은 五戒와 함께 花郞의 信條로 지켜짐
으로서 당시 新羅의 國民道로 발전할 수 있었다.
1. 花郞道와 山神思想
삼국 중에서도 신라는 山岳信仰이 많이 행해지던 국가였
다. 花郞道와 관련된 산신숭배는 그 자체가 종교적, 주술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부락이나 국가의 수호신이 대개 山岳을
본거지로 삼고 있는 데서 생긴 것이다.
花郞道는 五岳(吐含山, 鷄龍山, 智異山, 太白山, 八公山)을
中心으로 심신과 무술을 연마했으며 특히 吐含山은 斯盧國
초창기의 支配者 중 하나인 탈해가 死後에 吐含山神으로 추
앙되고 있는 것이다.
新羅에서는 이 밖에도 여러 山들이 國家的 祭祀의 대상이
되었고 山에 대한 親祭도 행해졌다.
후대의 화랑들이 소위 遊娛의 對象地에도 이들 山이 포함
되었을 것이다. 花郞이 山岳을 찾아 巡行했던 것은 金庾信
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山中의 동글에서 靈媒者인 超人
間的인 靈力을 몸에 익히거나 혹응 샤만을 통해 山神의 의
사를 전해 듣기도 하였다. 즉 샤만을 통해 人格轉換과 自己
變革을 꾀한 것으로서 이러한 점은 花郞의 人格形成에 巫觀
的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花郞道의 宗敎的인 背景은 샤마니즘에 根據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古代의 샤마니즘은 사람들이 神觀에 따
라 생활양상의 특성과 思考方式의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花郞들의 수련방법의 한가지인 遊娛의 對象地로
五岳을 포함한 여러 山들이 택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丹齊 申采浩가 花郞을 정의하기를 <蘇塗祭壇의 무사>라 한
것도 花郞과 무속신앙이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통일신라를 전후하여 花郞들이 주로 巡行한 대표적인
장소는 金剛山이었다. 金剛山이 花郞에 의해 국가적인 순례
가 행해진 이유를 六堂 崔南善은 그의 [不咸文化論]에서 사
람의 생명이나 국가의 運도 오로지 金剛山神의 의사 여하에
달렸다고 하여 마치 희랍 올림푸스에 있어서와 같이 神話와
예언이 이 산에 의하여 계시되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 한 예로 後漢 章帝元和 二年(AD 85)에 建立된 것으로 알
려져 있는 유명한 점단현의 碑石도 山神을 祭祀하는 소위
神詞碑로써 百姓壽考 五穀豊盛 盜賊不起를 祈願하고 있고
오늘날 洞祭 祈雨祭의 기본이 되는 것도 이 山神崇拜로 생
각하고 있거니와 李基東은 花郞以前 段階의 靑年組織에서
그 求心力을 이루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巫術的인 山神崇拜
思想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檢討하여 볼때 花郞道는 분명히 샤마니즘에 사
상적 연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非生産的인
呪術信仰에 그친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文化形成의 論理的
인 추진력이 있었다.다시 말해서 花郞道는 샤마니즘의 기반
위에서 他宗敎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된 문화적 소산물이
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사실로 보아 花郞道의 본 바탕에는 분명히 우리 민
족의 원시고유 신앙이며 전통사상인 山神思想이 흐르고 있
었다고 할 수 있다.
유교가 한국에 언제 전래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우리나
라에 처움 들어온 유교는 孔子 이후 漢初까지의 유교를 말
하는 것이므로 先秦儒敎라 하겠다. 고구려는 小獸林王 2년
(372)에 太學을 세운 것으로 되어있고, 백제는 近肖古王 및
近仇首王 때(375-384)에 이直岐와 王仁이 논어와 천자문을
日本에 傳하였다. 신라는 중국문화를 늦게 수입한 나라여서
유교의 수용도 고구려, 백제보다 늦은 神文王 2년(682)에 비
로소 國學이 설립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
국으로부터 전래된 유교는 종교라 하기보다는 학문과 사상
으로서 화랑도의 理念形成과 論理性을 체계화하는데 한 몫
을 했다.
화랑도가 신라에서 창설된 특유한 조직체이지마는<孝悌忠
信을 가르친다>하였으니 이는 우리의 固有道德과 유교를
잘 조화시켜서 표현한 예라 하겠다.

2.花郞道와 儒敎思想
유교적 영향은 花郞의 맹세를 나타냈다는<壬申誓記石>에
서 찾아볼 수 있다.
국가 유사시에 충성을 다할 것과 더 나아가 花郞들이 시경·
상서·예기·춘추 등 유교경전의 습득을 맹세한 내용에는 儒
敎가 花郞道 교육에 이용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신라 화랑도는 평소 무술을 연마하여 전쟁 때에는
신라군의 선두에 나서서 勇戰하였고, 또한 유교의 경전을
공부하여 지배계급으로서 교양을 닦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
았다. 더 나아가 화랑들이 毛時·尙書·禮記·春秋 등을 학습한
것은 단순한 지식의 습득뿐만 아니라 時를 통한 感情의 醇
化, 禮樂을 통한 화합과 존경에 바탕을 둔 論理의 확립, 그리
고 歷史를 통해 大義를 배우고 실천하려 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유교경전이 단순한 윤리적 차원을 넘어 문화·예술·역
사의식 등의 實踐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여건
을 토대로 하여 자연스럽게 화랑도와 그 사상적 연관성을
갖게 하였던 것이다. 世俗五戒는 이러한 목표의 실천덕목으
로 볼 수 있다.
또 귀산과 당항이라는 두 청년에게 내려준 圓光의 世俗五
戒를 보면 佛家의 戒目보다는 오히려 儒家의 五倫에 더 가
깝다. 이는 圓光이 비록 불승이긴 하나 오랜동안 中國에 유
학함으로써 유학에 정통하고 있었으며 당시의 지도자 이념
으로 儒敎的 德目이 필요하다는 것을 理解했기 때문으로 생
각된다.
世俗五戒가 유교의 五常이나 불교의 五戒 등의 사상을 우
리의 고유사상에 조화시켜 재창조된 것으로 볼 때 극단적으
로 純儒敎·純佛敎라고 단정을 내리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결국 화랑도의 애국적 정신은 불교의 호국사상과
유교의 군주에 대한 충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유학이 학문적 입장에서 우리에게 소
개되어 상류층을 중심으로 영향을 끼쳤다. 花郞道가 국가적
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한 진흥왕대에는 유교도덕이 신라의
상류사회에 전래되어 있었으므로 공식적 編制가 이루어진
그때에는 우리의 전통적 風流道에 유교사상이 混入되어 지
도이념을 이용되었다. 그리하여 유교는 발달된 중국의 정치
제도와 함께 왕권의 권위를 强하게 만들었고, 화랑도가 새
새대의 엘리트로서 신라 발전에 전력을 기울이게 하였다.
결국 유교는 신라의 지도이념의 倫理思想으로 발전했고,
花郞道에 있어서 중요한 사상적 배경으로 작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三國時代에는 유학이 學問的 立場에서 우리에게 소개되어
上流層을 中心으로 영향을 끼쳤다. 花郞道가 國家的으로 制
度化되던 眞興王代에는 유교도덕이 신라 상류사회에 전파
되어 있었으므로 우리의 傳統的 花郞道에 유교사상이 혼합
되어 중요한 思想的背景 -특히 倫理思想 -이 되었다.
3.花郞道와 佛敎思想
佛敎는 三國時代에 중요한 사상이었으며 특히 新羅는 佛敎
가 가장 늦게 전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法興王의 公認 이후
釋迦佛과 彌勒菩薩을 中心으로 불교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
룩하였다. 이러한 발전은 花郞道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
며 이것을 미륵신앙과 불교신앙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彌勒信仰

미륵(Maitreya)이란 석가에 앞서 입적하여 도솔천의 內院에
上生한 바 미륵정토가 여기에 나타났으며 미래에 석거불을
이어 다시 人間世界에 下生華林園의 龍華樹 아래에서 正覺
을 이룩하고 三回의 설법으로서 一切의 人天을 보도한다는
菩薩이다.
미륵과 花郞과의 관계는 김유신의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
다. 김유신이 花郞이 되었을 때 그 徒를 龍華香徒라 하였는
데, 용화향도의 용화란 말은 바로 彌勒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륵보살이 용화수 아래에서 成道한다고 하였으니 龍華란
미륵성불의 法會를 표현한 동시에 미륵을 자칭한 것이다.
또 香徒란 禮佛梵香之徒 곧 信佛의 단체를 의미 한다. 그러
므로 김유신의 龍華香徒란 미륵신앙의 도입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6·7세기경 新羅에서 석가여래상과 미륵보살상이 특히
많이 조각된 사실에 注目하여 新羅人의 이에 대한 信仰을
상상하면 당시 新羅人들이 釋迦를 國王에 미륵을 貴族, 특
히 花郞에 비유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추측할 수 있다. 왜냐
하면 미륵보살상이 대개 젊은 나이를 한 불상으로 조각되어
있는 데서 화랑의 이미지와 잘 부합된다는 것이며 한편 花
郞은 귀족자제로서 귀족세력의 상징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花郞과 결부되어 나타난 신라 中古時代의 미륵 신
앙은 왕실 및 귀족계급의 이상국가 건설에 대한 극히 現實
的인 열망의 표현으로 花郞이 당시 귀족계급의 대표적 존재
였기 때문에 미륵신앙의 영향을 받게된 것이다.
2) 佛敎思想

花郞道와 불교와의 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위에서 살펴 본
彌勒信仰과의 관계 외에 僧侶郞徒의 문제와 圓光의 世俗五
戒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花郞道의 한 구성원으로 僧侶郞徒가 있었는데, 이것은 일
시적 또는 특례적인 존재가 아닌 엄연한 佛敎의 僧侶로서
少年들의 團體인 花郞道 속에 반드시 한 사람씩 있었다. 그
리고 僧侶郞徒는 一般郞徒와 같은 청소년이 아니라 성인으
로 國仙을 보좌하였으며 단체를 운영하였던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徒衆 가운데서 가장 우두머리라고 표현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後代의 기록이지만 ≪高麗史≫列傳에 어린이가 僧侶를 따
라 글을 배웠는데 面貌와 首髮이 아름다운 남자를 받들어
仙郞이라 하여 그 아래 모이는 무리가 千百에 이르렀는데
그 풍속은 新羅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 世俗五戒를 제정한 圓光法師의 다음과 같은 말에도 花
郞道와 佛敎의 관계가 들어난다.
法師曰 佛戒有菩薩戒其別有十 若等爲人臣子 恐不能諶 令
有世俗五戒

아울러 新羅에 傳來된 불교가 大乘的 護國佛敎와 성장하였
음을 생각한다면 佛敎와 花郞道의 관계는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花郞道와 道敎思想
최치원의 난랑비서에 풍류도가 유·불·선을 포함한 玄妙之
道라 한 것으로 보아 화랑도에는 도교사상이 나타나 있다.
老子와 莊子 및 列子를 주축으로 하는 道家思想 즉, 노자늬
<道德經> 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대체로 당대 초기의
일이다. 고구려 榮留王 7년(624)에는 당의 高祖가 보낸 도사
가 <老子>를 강론했고, 寶藏王 2년(643)에는 당 태종이 老
子의 ≪道德經≫을 왕에게 보내었다.
新羅 태종 무열왕의 二子 金仁間이 <儒家의 冊을 많이 읽
고 莊子와 浮展의 說을 겸해서 설립했다>고 한 것을 보면
당시의 貴族 子弟의 교육에 있어서 儒家書와 함께 道家書도
읽혀졌음을 알 수 있다.따라서 귀족계급인 花郞에게도 도가
적인 영향이 미쳤음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神仙說은 B.C 3세기경 중국에서 생겨났다고 하나 道家思想
의 기원을 규명하기는 어렵다. 중국의 上帝와 연결시킨 신
앙 체험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上古에서 帝 또는 上帝라 하
여 우리의 "하느님"의 뜻과 유사한 "至上의 神"에 제사하여
강림한 神의 뜻을 알아 문제를 결단하였다는 데서 그 기원
을 찿을 수 있다.한국에서는 古來로 道家를 받아들이기에
알맞는 토착적인 문화현상으로 앞에서 살펴 본 산신신앙·神
仙說, 그리고 그것과 연관되는 각종의 方術이 전해진다.≪
三國遺事≫등에 나오는 단군신화에도 우리 上古의 산악신
앙과 신선사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桓因은 天下世界의 통치자로 마치 도교의 최고 神인 `元始
天尊`과 같은 지위에 있다. 桓雄이 강림한 곳은 太白山에 神
檀樹下로 이는 上古의 산신신앙과 직결된다. 단군왕검은 하
늘의 통치자와의 가까운 연결이 있어서 仙氣가 많이 남아
1908세를 장수할 정도이며,一說에는 단군왕검은 죽지 않았
다고 한다.≪靑鶴集≫ 같이 한국 仙家說을 보면 桓因을 東
方仙波의 祖宗으로 내세우고, 그 道脈이 桓雄·檀君·文朴氏·
永郞 등으로 계승 되어진 것으로 말하고 있다.이러한 것들
은 附會之說이기는 하나 韓國仙脈들이 당시 사회의 정신세
계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며, 이는 단군의 道가 끝까지
계속적으로 겨레 속에 내려오 있다는 것의 강조로 여겨진
다.
그중 신라에는 신설설화가 많이 전해자고 있어서 당시 仙
風이 성행하고 仙家의 人物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花
郞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金庾信이 <제계고천 소향고천>
으로 設壇하여 받은 神術이 도교적인 雜術일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 또한 김유신의 등에는 七星文이 있다고 하였는
데 이 또한 도교적인 면을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永郞이 術郞·南郞·安詳과 함께 신라의 四仙으로 꼽히고 있
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四仙中 永郞은 우리나라 仙脈의
祖宗인 桓因의 道를 文朴氏를 통해 계승 전파한 것으로 전
해지고 있다. 김유신이 홀로 중악 石窟에 들어가 기도할 때
노인에게 方術을 傳受받고 또한 神劒에의 가령을 받은것 역
시 도교의 雜術을 연상케 한다. 김유신의 후손인 김암은 方
術을 배우기 좋아했는데, 그가 배운 陰陽家法은 도교에 吸
收되었다. 그리고 그의 遁甲立成法은 바로 도교의 雜術이었
다.
최치원의 낙랑비서에 보면 "우리나라에는 玄妙항 道가 있
어 이를 風流라 하는데 이 敎를 설치한 근원은 ≪先史≫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이를 三敎를 포함한 것이라" 하였
다. 여기에서 우리는 화랑도를 한편으로 國仙道·風流道 혹
은 風月, 仙郞徒라고 불리웠음을 알 수 있는데 명문대로 본
다면 풍류도가 儒·佛·仙 三敎를 모두 포함한 玄妙之道라 하
였으니 이는 三敎보다 더 크고 넓다는 의미를 포함한 것이
다.
또 화랑도를 國仙道라고 하는 데 그 國仙道의 의미는 國家
宗敎(나라종교)라는 뜻이다. 이 때의 國은 古朝鮮 民族國家
를 의미하며 仙은 古朝鮮時代의 단군숭배의 형태를 가진 唯
神的 信仰에서 출발한 原始宗敎를 의미한다. 仙은 神과 음
이나 뜻이 비슷하여 地上神人을 뜻하며 神人인 단군을 仙人
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國仙道라고도 표현된 花郞道에서 도
교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다.

5. 花郞道와 風流思想
   風流道의 본질은 엄격히 말해서 화랑도의 본질과 일치할
수는 없다.風流道니 風月道니 하는 것은 삼국통일 이전에도
있었던 고대로부터의 한국고유 사상이요 종교이기 때문이
다. 즉 風流道란 우리 민족이 그 자연 그 풍토속에서 同化되
면서 살아오며 無爲而化로 형성된 사상이다. 그러므로 風流
道는 우리 민족의 뿌리 사상인 것이다.
이와 같은 우리 민족의 뿌리 사상을 先人들은 風流道 또는
風月道라고 일컬어 왔다. 우리 조상들이 오랜 옛날부터 한
반도에 살면서 중국인 일본인과의 생활양식은 분명히 다른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다. 이와 같이 우리 조상들은 한국인
의 생활양식에 의해서 살아 오는 가운데 그들 나름대로의
사유방식이 있었고 그로 인해서 고유한 문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니 이를 韓文化라 할 것이다.
한 민족이 이 한반도에서 언어와 풍속을 달리하며 護持해
나온 이상 이와 같은 한국인의 생활 양식과 교유한 사유 방
식으로 이루어진 사상이나 종교가 있으니 그 속에 흐르고
있는 精神性向이 다름아닌 풍류도인 것이다.
우리 仙人들은 이 풍월도의 바탕위에 점차 儒, 佛, 道敎 등
발달된 外來文化를 받아들였다. 풍월도라는 고유사상에 바
탕하여 국난을 극복하려는 정책이 성공하였다. 이를 토대로
인재를 육성한 것이 화랑도였다고도 볼 수 있다.
신라는 화랑도의 형성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삼국의 통일을
성취했던 것이다. 따라서 통일 신라 시대의 화랑도는 훨씬
오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풍류도를 잡아세운 것이라고 보
아도 좋을 것이다. 이를 통해서 신라에서는 새로운 인재를
얻고 이 이념과 사상을 바탕으로 강력한 국가 형성을 도모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풍류도를 잡아 세워 그 시대의
정치나 사회적 상황에 부응하도록 저작한 것이 호랑도라 말
할 수 있다.
따라서 화랑도는 풍류도의 인간화, 사회화, 정치화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면 화랑도와 풍류도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풍류도는 인간이 천지와 자연에 의지하려고 할 때 거기에서
생명의 근원을 체감하는 것이라면 이에 대하여 화랑도는 자
연에서 얻어진 풍류성,즉 생명의 근원을 인간 집단에 매개
하려는 행위이다.
따라서 풍류도는 인간의 생명의 근원이 그 타고난 자연속
에 있음을 체감함으로써 영원한 새영, 절대의 생명에 감응
된다고 믿고 스스로 그 생명의 근원에 자기 생명을 結合시
키려는 행위이다. 이에 대하여 화랑도는 風流的 생명을 자
각한 인간들이 모인 집단이라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화
랑도는 풍류도를 체 받아서 인간들 간에 또는 국가나 사회
에 그 大生令力을 활용하려는 道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화랑도는 자연의 인격화 원리로서 이를 더 한층 격화시킬
때 개인적 생명은 집단적 생명으로까지 승화된다. 개인적
생명이 풍류도의 수련을 통해서 집단 생명으로 人爲化한 것
이 이 통일 신라기의 화랑도였다.
결국 한국 역사상 통일 신라기에 일어난 화랑도는 자연의
대생명력을 인간화하려는 운동으로서 한국적 인도주의 사
상이 처음으로 확립된 것이다. 자연속에 인간사를 자각시킨
역사 의식의 최초적 운동이었다. 따라서 통일 신라시대의
이 郞徒들은 자연에서 인간, 인간에서 국가라는 주체사상을
자각시킨 최초적 움직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풍류사상을 세운 화랑도는 한국철학의 始
原을 이룬 것이다. 화랑도는 재래의 풍류적 공동 사회의 이
념 위에 儒, 佛 ,道를 가미하여 그 시대가 요구하는 청년의
윤리를 개발시킨 것이다. 이는 혈연적 농경사회였던 원시
사회에서 한 걸음 더 발전시킨 이념이요 윤리가 된 것이다.
화랑도는 이익사회에로의 변화에 영향을 입히면서 공동체
의식을 강하게 하는 社會的 倫理의 일면을 보여준 것이다.
풍류정신이 신라에서 조직화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
지 말하기 어려우나 정치적 상황을 토대로 추측해 본다면
화랑도 창설의 전후라고 볼 수 있다. 신라 사회의 경제가 발
전하면서 계급 분화가 진행됨으로써 이제까지의 공동체는
종전과 같은 상태로 존속할 수 없게 되었고 또한 공동체의
유대만을 토대로한 지배 기구로서는 국가의 통치가 불가능
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나타난 것이 신흥 군사귀족이
었으며 이들은 구 귀족 사회의 잔재, 곧 씨족공동체에 의한
집단적 지배 체제의 잔재를 지양하면서 일련의 정치적 개혁
을 기도하였다. 이와 같은 경제적인 구조의 변혁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정치 권력의 배경에서도 개혁의 필요성이 요구
되었다.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화랑도 사상을 단군신화, 무속
신앙,천군 등 으로 이어져 내려온 우리 固有의 山紳思想, 風
流思想이 外來의 儒·佛·仙 三敎의 사상을 주체적으로 포용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Ⅳ. 花郞道의 性格과 變遷
1. 統一以前 花郞道의 性格
花郞道의 性格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花郞道의 活動이 가장
왕성했던 中古시대 즉, 統一以前의 花郞과 統一以後의 花郞
의 성격을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 적절한 方法일 것이다.
그 이유는 花郞의 활동과 그 정치·사회적 機能이 시대의 변
화에 따라서 변천 해 갔을 것이며 특히 신라 하대로 내려 오
면서 花郞道는 眞骨貴族들의 私兵的·門客的 性格을 띠는 조
직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中古시대의 일반적 時代相을 개관해 보면, 對外的인
面에서 이 시대는 新羅가 급격한 영토확장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百濟·高句麗 兩國으로부터 양면공격을 받게 되는 시
기이다.
다시 말해서 眞興王代의 야심적인 영토행창은 눈부신 성공
을 거둬 서기 560년대에는 그때까지 新羅歷史上 최대의 版
圖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中古시대가 끝날 때
까지 약 1세기 동안 신라는 失地回復을 꿈꾸는 儷·濟 兩國으
로부터 끊임없는 침인을 받게 되어 일종의 국가적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善德女王(632-647) 말 경에는 신라의 국가적 存立마
저 위태로운 형편이 되었다. 고구려의 大莫離支 淵蓋蘇文과
백제의 義慈王은 서로 연합하여 신라의 국경지대까지 쳐들
어 왔던 것이다. 고구려 군대의 끈질긴 공격을 받아 漢江 상
류의 신라군 요새는 함락직전에 놓여 있었으며, 백제 군대
는 험난하기 짝이 없는 智異山을 넘어 狹川에 있던 신라의
서부 방면군 사령부인 大耶城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新羅의 서부 국경선은 王京인 慶州에서 가장 가까
운 낙동강 동쪽의 慶山 방면까지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었
다. 이러한 신라가 오랜 기간에 걸친 國亂期를 타개하기 위
하여 거꾸로 일대 反擊을 가하기 시작했는데 이때가 太宗武
烈王代였다.
바야흐로 守勢에서 攻勢로 전환한 것이다. 이에 따라 그때
까지의 조국 수호 전쟁은 三國統一 전쟁으로 大轉換을 맞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화랑도의 軍事的 和同이 최고로 요구
되는 時期이기도 했다.
한편 對內的인 面에서 볼 때 이 시대는 국가체제의 확립기
라고 할 수 있다. 官職上의 法制化 뿐만 아니라 이에 相應하
여 전국민을 신분적으로 等級區分하는 法制化가 강행되었
다. 즉 이 새대는 骨品制가 확립되어 신라사회가 점차 카스
트(Caste)制的인 성격을 띠는 골품제적 사회로 확대, 강화
되어 가던 移行期에 해당한다.
골품제가 강화됨에 따라 각 신분계층이 固着되고 이에 따
라 신분 계흥간의 사회적 流動이 정지되자 사회계층 간에
軋轢, 葛藤은 深化되어 갔을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최
고귀족인 眞骨層과 王室 사이에도 끊임없이 緊張이 감돌았
다. 李基東 博士는 이것을 奈勿王系氏族의 집단주의 이념과
智證王系(中古末期에는 眞平王系) 直系의 王者支配意識 葛
藤에서 緣由된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中古時代는 정치적, 사회적인 의미에서 도장의 요
인을 내포하고 있던 시대였거니와 바로 이러한 때에 花郞이
국가적으로 制定되어 그 全盛期를 맞게 되었다.
中古時代의 신라가 처한 對外·對內的인 政治·社會的 特性
은 花郞道의 成立과 發展을 가능케 하였는데 그러면 이 시
대에 있어서 花郞道가 지니는 특성은 어떠한 것일까. 먼저
화랑의 성격으로 注目되는 것은, 花郞道가 政治·社會的으로
갈등을 환화하는 완충장치의 성격을 가졌다는 점이다.
花郞道의 완충적 성격은 두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
데 첫째는, 眞骨에서 平民에 이르기까지의 靑少年으로 하여
금 일체감을 가지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지배계층 내에서의
조화와 타협의 기능이다.
첫번째 성격에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花郞道가 眞骨
貴族을 비롯하여 王京內의 下級貴族, 平民에 이르기까지 거
의 전 사회계층을 망라하여 조직된 청년단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여러 사회계층을 연결하는 通社會集團
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동일한 목표를 위해
3년간 함께 수련하고 유사시 戰陣에 臨하여 생사고락을 같
이하게 됨으로서 결국 귀족계급과 평민 사이에는 정신적인
일체감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비록 신라의 花郞道가 처음부터 국가권력을 옹호하는 데서
출발하고있어 이를 일종의 정치적 압력단체로 파악할 수 없
다는 난점은 있으나 어떻든 이것이 신분의 장벽을 넘어 자
발적인 의사에 의해 형성되어 공동 목표를 위해 공동생활을
하는 단체라는 사실만은 크게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곧 화랑도가 신라에 있어 하급귀족의 자제라고 해도
花郞道의 郞徒가 됨으로서 당시 사회의 유동성을 저지하고
있던 엄격한 身分制度로 부터의 탈피를 어느 정도 가능케
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支配層 內에서의 갈등의 조정이라고 하는 성격은 法
興王 이후 王者中心의 지배를 지향하는 왕권세력과 귀족의
집단지배체제를 유지하려는 귀족세력과의 갈등관계를 고려
하면 충분히 성립할 수 있으리라 본다. 즉 新羅는 貴族의 子
弟를 花郞으로 삼고 이를 中心으로 청년집단을 조직하여 정
복전쟁의 수행에 대응하는 戰士團으로서의 성격을 수행하
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귀족을 하나로 통합
하고 나아가 귀족의 자제인 화랑을 우대함으로서 王權과 진
골귀족세력과의 造和내지 타협을 이루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측면은 中古時代의 정치체계에서 花郞이 차지하는
현실적인 위치와도 잘 부합되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시기는 眞骨勢力과 王骨의 對立이 첨예화되었던 때로 화
랑은 서로 대립되는 두 세력 사이에서 일종의 緩衝制的인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진골귀족 출신이면서도 국
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을 강조하며 현실의 왕권을 지지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이상 몇가지 사실로 보면 花郞道가 王京안의 거의 모든 사
회 계층으로 연결·망라한 포괄적인 집단이었으므로 골품제
도와 같은 엄격한 身分制社會에서 발생하기 마련인 신분간
의 갈등·알력을 조절하는 성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統一以前 화랑의 성격에 있어서 특히 注目되는 것은 軍事
的 性格이다. 이 시기는 화랑도의 군사적 활동을 최고로 요
구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6세기라는
시대는 신라에 었어서 中央執權化 시대인 동시에 法制化·組
織化의 시대였다. 따라서 이때 中央軍 조직도 편성되기 시
작하여 眞興王 5年(544)에는 6停의 基幹이 된 大幢이 만들
어졌는데, 이로써 중앙군의 보조역할을 담당하는 군부대의
편성이 긴요하게 되었다. 이점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화랑도가 제정된 진흥왕 대에 異斯夫가 가야를 정벌할 때
斯多含이 從軍을 청하여 마침내 貴幢裨將이 되어 출정하게
되자 그의 郞道 중에서 그를 따라 나선 자가 많았다고 한 사
실이다.
이것은 청년조직으로서의 화랑집단이 국가 유사시에 전쟁
에 투입될 수 있는 예비군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화랑도는 바로 이같은 時代的 背景 속에서 국가
에 의해 公的인 기구로 성립을 보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三國統一때까지의 약 1세기 동안 신라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國亂期를 맞이하여 조국수호전쟁이라는 어려
운 고비를 겪는 동안에 화랑도로서 일차적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된 것은 군사적 과업이었다는 사실은 당연한 것이었
다.
따라서 忠·孝·信·勇·仁을 표방하는 世俗五戒가 시대정신과
國策에 순응하기 위하여 만들어졌고 또 그대로 실천된 臨戰
無退의 정신에서 알 수 있듯이 花郞의 군사적 성격을 충분
히 짐작할 수 있다.
≪三國史記≫ 列傳에 실려 있는 화랑과 郞徒들의 무용담은
국난기에 즈음하여 화랑도의 구성원들이 어떻게 신라의 시
대정신을 구현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자료인 것이다.
먼저 斯多含은 根本이 좋은 귀족의 자제로 풍모가 뛰어나
게 깨끗하고 준수하여 志氣가 방정하였으므로 이 때에 사람
들이 花郞으로 받들기를 청하여 마지 못하여 화랑이 되었는
데 그 랑도가 무려 일천명에 이르고 모두에게 환심을 얻게
되었다.
眞興王 二十三年 加耶國 정벌에 斯多含은 나이 15-16세로
임금에게 여러번 종군할 것을 간청하였다. 임금은 그 의지
를 가상히 여겨 許諾하기에 이르고, 사다함은 貴幢裨將 직
책으로 랑도들을 이끌고 싸움에 나아가 큰 공을 세우고 승
전하여 돌아와 임금으로부터 큰 공을 받았다.
다음으로 官昌은 신라의 장군 品日의 아들로 어려서 花郞
에 추대되었다. 儀表가 都雅하고 사람과 사귀기를 잘했으며
騎馬와 활쏘기에 능하여 16세에 관직에 천거되었다.
서기 660년 新羅가 唐과 연합하여 百濟에 대한 최후의 공격
을 벌였을때 官昌은 副將으로 출전하여 麗山(論山)전투에
참가하였다. 官昌은 말에 올라 창을 비껴들고 적진으로 뛰
어들어 적병 몇을 죽였으나 곧 포위를 당해 사로잡힌 몸으
로 百濟 元師인 階伯 앞에 끌려나오게 되었다. 階伯이 官昌
의 투구를 벗겨 보고는 그가 소년이고 또한 그 용맹스러운
것을 사랑하여 관창을 죽이지 않고 돌려 보냈다.돌아온 官
昌은 적장의 목을 베고 깃발을 빼앗아 오지 못한 것을 원통
하게 여기며 다시 적진으로 뛰어 들었으나 階伯은 또 그를
사로 잡아 목을 잘라 말안장에 달아 매어 돌려 보냈다.
品日이 죽은 아들의 머리르 잡고 소매로 피를 씻어 주며 "내
아들의 면목은 산 것과 같다. 능히 國事를 위하여 죽었으니
후회할 것은 없다."고 하였다. 이를 본 新羅軍은 크게 분개하
여 모두 결사의 뜻을 세우고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진
격하여 百濟軍을 大敗시켰다.
또한 원광법사로서부터 世俗五戒의 가르침을 받은 귀산과
추항은 수년후에 百濟가 군사를 일으켜 阿莫城을 포위할 때
함께 출전하였는데, 이때 귀산이 말하기를 "내 어찌 법사에
게 용사는 싸움마당에서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을 들었거는
어찌 감히 도망하여 달아나겠는가."하고 하며 臨戰無退의
정신을 준수하다가 전사하였다.
진골출신 낭도 였던 金歆運은 어렸을 때 "누구가 전사하여
지금까지 이름을 남겼다."하는 이야기를 듣고 감개하여 눈
물을 흘리면서 생각을 가다듬고 스스로 격려하며 몸가짐을
바르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때 同門에 있던 僧 轉密이 "이
사람이 만약 적진으로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
다."고 하였다. 그런데 과연 655년(태종 2년)에 百濟가 高句
麗와 함께 변경에 침입했을 때 이의 토벌을 위해 戰場에 나
갔던 金歆運은 "大丈夫가 이미 몸을 나라에 맡겼거늘 사람
들이 이를 알지 못하던 이는 한가지인데 어찌 감히 名譽만
구하리요."라 하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다음은 三國統一에 공을 가장 많이 세운 花郞으로 金庾信
을 들 수 있다. ≪三國史記≫ 列傳에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기
고 있는 데 이를 통해 볼 때 金庾信은 통일기의 花郞의 대표
격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金庾信은 진평왕 12년(595)에 태어나 5세에 花郞이 되었고
18세에 이르기까지 수련을 하였다. 그후 35세 되던 해인 진
평왕 46년(629)에 高句麗의 娘擘城 공격에 첫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후에 庾信은 狎粱州(慶山)君主가 되었다가 善
德王 13년(644)에 蘇判이 되었고 그해 9월에는 上狀軍이 되
어 군사를 거느리고 百濟의 加兮城, 省熱城,同火城 등 7城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밖에도 金庾信은 高句麗와 百濟를 멸망시키고 唐軍의 세
력을 몰아내는 등 역사에 남을 많은 업적을 남기며 三國統
一의 大業을 이룩하였다.
이같이 화랑들이 戰功을 세운 것을 볼 때 날이 갈수록 화랑
이 盛況을 이루어서 ≪三國史記≫ 眞興王條의 기록을 보면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에서 뽑혀 나오고 훌
륭한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부터 길러진다."라고 했다.
또한 ≪三國史記≫ 列傳 金歆運條에 三代의 화랑이 무려 二
百餘人이라고 함을 미루어 볼 때 화랑에서 배출된 인재들이
국가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또한 史記에 기록되지 않는
화랑의 숨겨진 업적이 수 없이 많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화랑들은 국가유사시에 靑年戰士로서 선두에 서서
싸웠으며 그 같은 武士道는 화랑집단의 성원 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층에까지 광범하게 파급되어 하나의 時代精神으
로 형성되고 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原動力이 되었다고 본
다.
이상에서 이 시대에 활약한 화랑과 낭도들의 武勇談을 통
해 알 수 있듯이 삼국통일 이전의 화랑은 統一戰爭이라는
대과업을 목표로 어려운 고비를 겪는 동안에 일차적으로 중
요한 의미를 뛰게 된 것이 軍事的인 課業이었음은 말할 나
위도 없다. 따라서 통일 이전의 화랑은 시대적인 상황에 의
해 軍事的인 性格이 강했다고 볼 수가있다.
그러므로 통일이전 화랑도의 성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
다. 政治的·社會的으로 갈등의 요인을 내포하고 있던 骨品
制下의 新羅中古期에 전사회계층을 망라하여 조직된 화랑
도는 사회의 유동성을 원활히 해주는 역활을 했다고 볼 수
있다. 眞骨勢力과 王權의 對立이 첨예화되어 있던 이 시기
에 화랑은 대립되는 두세력 사이에서 일종의 緩衝劑的인 구
실을 하였다. 또한 三國統一期의 조국수호 전쟁이라는 군사
적 과업이 화랑도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업이었으며
이 때의 화랑들은 수련기간 중이라도 국사유사 시에는 出戰
軍에 편성되었고 成業 後에는 대체로 국가의 정규부대인 幢
·停에 편입되어 정식군인으로 활동하였다.

2. 統一以後의 花郞道의 性格
먼저 통일 이후 新羅의 對外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高句麗, 百濟, 新羅의 세 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은 그것이
치열할 뿐만이 아니라, 여기에 中國을 비롯한 주위 여러 나
라와의 관계가 얽혀서 복잡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다. 이
러한 대립 항쟁은 드디어 7세기 중엽에 이르러 高句麗와 百
濟가 망하고, 新羅는 韓半島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新
羅를 도와 百濟와 高句麗를 함께멸망시킨 唐이 新羅를 무시
하고 東方 전체를 자기의 영토로 삼으려는 의도를 노골적으
로 나타내기 시작 하였다. 이에 新羅는 결국 唐의 침략을 물
리치고 그 정치적 독립을 유지 하는데 성공하였다. 新羅는
물론 高句麗의 옛 땅에서 唐軍을 완전히 축출하지는 못하였
다. 이 과업은 高句麗의 流民들에 의하여 이루어져서 渤海
가 서게 되었다. 이리하여 高句麗, 百濟, 新羅의 세 나라가
정립하여 항쟁하던 형세는 統一新羅와 渤海가 南北에서 대
립하는 형세로 바뀌게 되었다.
三國時代에 있어서의 對中關係는 주로 항쟁의 역사였다.
론 외교적인 同盟이나 문화의 輸入과 같은 접촉도 있기는
하였으나, 크보면 武力的인 抗爭이 주가 되어 왔었다. 그러
나 統一 뒤 唐이 군사적 침략을 포기함으로 해서 新羅와 渤
海는 모두 唐과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
러한 對唐關係의 변화는 新羅와 渤海의 관계에도 새로운 양
상을 나타내게 하였다. 즉 新羅와 渤海는 모두 唐의 문화를
흡수하기에 노력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兩國은 모두 唐으로
부터 문화적 선진국으로서의 국제적 지위를 승인받기를 원
하게 된 것이다.이러한 결과 다음과 같은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즉 그 하나는 唐에 있어서의 新羅와 渤海의 爭長事
件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 賓貢科에서의 登第序列에 관한
문제였다. 이 두 사건은 新羅와 渤海 사이의 대립의 양상이
唐을 매개로 한 文化的인 優劣의 경쟁으로 기울고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와같이 統一新羅는 唐, 渤海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
게 되면서 대외적으로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이것은 新羅
사람들이 통일 전 1백년 간의 가혹한 生存戰爭을 치루던 동
안에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안전과 평화였다.
한편, 신라가 半島를 통일하여 막대한 영토와 人口를 支配
하게 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안으로도 새로운 政治·社會
的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新羅人 자신은 이러한 발전을
上代가 끝나고 中代가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三國統一을 달성함으로 말미암아 한층 高揚된 中代 왕실은
국민들에게 화평세계의 실현을 선전하고 약속했다. 다만 그
것은 신라를 위한 永續的인 질서를 보장할 수는 없었다. 사
실 聖德王 때까지는 王權의 專制化로 眞骨 貴族들을 억누르
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여 표면상 平和의 세계를 謳歌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王室과 眞骨 貴族 사이의 현
존하는 緊張을 억제하는 데 불과했을 뿐이며, 緊張 자체를
해소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따라서 平和世界의 虛像이 노출되고, 또한 이를 선전했던
국가권력이 쇠퇴의 도탈을 보이기만 하면 그 긴장은 거세게
폭발적으로 분출될 위험성를 안고 있었다. 景德王 때(742-
765)의 말년에 노출되기 시작했던 이같은 불길한 徵候는 그
의 어린 아들 惠恭王 때(765-780)에 폭발되어 汎眞骨貴族 연
합세력의 大動亂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 속에
서 마침내 太宗武烈王 계통의 中代 왕실은 타도되고 말았
다.
이처럼 中代의 안정과 평화는 약 1백년 간에 그치고 말았거
니와, 王室과 貴族들은 이 시대의 번영을 최대로 향유하면
서 홀로 太平을 노래하였다. 하긴 三國統一을 達成할 때까
지는 貴族들도 일반 민중과 다름없이 긴장과 고난의 생활을
영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貴族들은 이
기간 동안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統一 成就하자 그들을 많은 戰利品과 토지,목장을 얻
게 되었으며, 더욱이 그 뒤 장기간 平和가 계속되자 전쟁터
에서 발산되었던 그들의 에너지가 이제는 奢侈와 享樂을 추
구하는 일상생활로 바뀌어지게 되었다. 바야흐로 살벌한 軍
國主義 시대로부터 一轉하여 安逸한 시대적 분위기로 변모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속에서 통일 이후의 화랑은 어떻게 변
모했을까 ≪三國史記≫에 位傳된 호랑에 대한 기록이나 鄕
歌와 관련된 기사가 주목된다.
삼국통일 후 신라의 화랑들 역시 中古시대부터의 활동을
계속하였을 것이라 믿어진다. 하지만 통일 후 전쟁이 없었
고 왕권이 강화되어 중앙집권적인 통치가 어느 정도 강화되
었고 엄격한 골품제가 시행되었기에 그와 같은 정치, 사회
적인 상황 속에서 화랑의 활동이 가지는 사회화의 의미는
더욱 커진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다음과 같은 사료를 통하여 통일 후 화랑의 활동변화를 알
아 볼 수 있다.
"天授 3年(AD 692년) 임진 9월 7일에 孝昭王이 大玄薩滄의
아들 夫禮郞을 국선으로 삼았다. 주리를 신은 화랑이 있다.
무리가 천여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安常이란 사람을 더 친
히하였다. 天授 4年(AD 693년) 계사 3월에 그가 무리를 이끌
고, 金蘭에 出遊하였다. 北漠 방면까지 이르었다가, 적에게
잡혀 갔다. 그의 무리들이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돌아 왔
지만, 安常만은 혼자서 쫓아 갔으니,때는 3월 11일이었다.…
"경문대왕의 위는 膺廉이니, 나이 열 열덟에 國仙이 되었다.
스물이 되었을 때에, 憲安大王이 郞을 불러 궁중에서 잔치
를 베풀고 물었다. '郞이 國仙이 되어 사방으로 돌아 다니다
가 무슨 이상한 일을 본것이 있느냐?'
"신이 아름다운 일을 행하는 사람 셋을 보았습니다.…"
"효종랑이 나와 놀다가 이 광경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서 부
모에게 청하여 집에 있는 곡식 백섬과 의복을 모내주고 또
지은을 산 주인에게 그 몸값을 갚아 주고 양민이 되게 하니
효종랑의 무리 기천명도 각기 곡식 1섬씩을 내어 지은에게
주었다."
첫째는 孝昭王代의 國仙이었던 夫禮郞이 말갈적에게 잡혀
간 사건이 일어났을 때 安常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낭도들이
그대로 돌아왔다는 기록이며, 두번째는 膺廉은 國仙으로 4
방을 여행하며 지방의 여러 상황을 살핀 기록이며, 세번째
는 孝宗郞과 그 남도들은 가난한 孝女 知恩을 도와준 기록
이다. 위의 기록들은 모두 통일 후 화랑의 단면을 모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新羅下代에는 전반적으로 반발의 경향이 현저해진 시
기였다. 무엇보다도 국가권력이 쇠퇴하여 이기적인 眞骨貴
族을 통제할 힘을 喪失하였는데, 이로써 귀족들의 謀叛, 叛
亂이 연달아 일어났다. 하긴 이같은 혼란한 情況 속에서 통
일 전과 마찬가지로 군사적인 과업이 다시금 중요성을 띠게
되었으며, 이 점 화랑운동이 활발해 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
되기도 했다. 실제로 822년 金櫶昌 반란을 진압할 때 2명의
화랑이 출전하고 있음이 ≪三國史記≫ 券 10 憲德王本紀 14
년 3월 條의 記事에 特書되어 있다.
"14년(822)… 3월 웅천주 도독 金憲昌은 그 아버지 周元이
王이 되지 못한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 …明基와 安樂의
두 郞은 각기 종군할 것을 청하여 明基는 무리들과 함께 황
산으로 나아가고 安樂은 施彌知진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 시기의 화랑의 성격은 통일 전과는 크게 달랐다.
중고시대의 화랑은 국왕과 진골귀족간의 일정한 세력 균형
을 전제로 하여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 이념상 국
왕에 대한 충성과 전제로 애국을 강조하는, 무엇보다도 현
실의 국가기구와 왕권을 지지하는 조직이었는 데 반하여, 9
세기의 화랑은 진골귀족들의 `聯立`이라고 하는 그 시대상
을 그대로 반영하여 진골귀족들의 私兵的, 門客的 성격을
띠는 조직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金憲昌의 叛亂을 討伐
할 때 동원된 군사력이 국가의 군대라기보다는 오히려 귀족
의 私兵이 주축을 이룬 것 같고, 또한 국가의 군대일 것으로
짐작되는 일부 군사력도 其實 국왕 개인의 군대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은 듯하다.
요컨대 화랑이 국가권력에 대한 진골귀족층의 壓力團體 性
格을 띠는 조직으로 변질되었음을 看破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통일 후의 화랑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향가와 관련된
기사들이 많음을 볼 수 있다. 향가는 신라의 노래이며, 그 작
가는 주로 승려와 화랑들이 많았다. 특히 통일 후의 화랑중
에서는 유명한 향가 작가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三國遺
事≫의 기록을 통해서 그러한 화랑들을 살펴 보겠다.
"第5 居烈郞, 第6 實處郞, 第7 寶同郞 등 세 花郞의 무리가
楓岳에 놀려고 갔다. 그때 彗星이 心大星을 침범하였다. 郞
徒들이 의심스렵게 여기고 꺼리어서, 여행을 그만두려고 하
였다. 이때에 融天師가 향가를 지어 부르니, 彗星이 곧 없어
지고 왜적까지도 물러가서, 도리어 경사스럽게 되었다. 대
왕이 기뻐하면서, 郞徒들을 楓岳으로 놀러 보냈다.
景德王 19年(AD 760년) 경자 4월 1일에 해가 둘씩이나 나
타나 열흘동안 없어지지 않았다. 이에 朝元殿에다 제단을
차리고, 靑陽樓에 왕이 나아가 인연이 있는 중을 기다렸다.
이때 月明師가 지나가므로 그를 불러 기도문을 지으라고 하
니 明月이 말하길 "저는 국선의 무리에 속하여 다만 향가를
알 뿐이고, 梵聲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王이 향가라도 지으라 하여 明月이 도솔가를 지어 바쳤는데
잠시 뒤에 해의 괴변이 사라졌다."
景德王이 나라를 다스린지 24년에 玉嶽 三山의 神들이 가끔
現身하여 殿庭에 모시었다. 3월 3일에 王이 歸正門 누상에
臨御하여 좌우에게 묻기를 누가 능히 길에서 한 榮服僧을
데려올 수 있겠느냐하였다. 이 때 마침 한 중이 있어 王께 데
리고 가니 王이 기뻐하며 를 영접하고 그의 이름을 물으니
忠談이라고 대답하였다. 王이 가로되 "내가 들으니, 耆婆郞
을 찬미한 忠談師의 詞腦歌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니, 과
연 그러한가?" 忠談이 그러하다고 대답하니 王이 자신을 위
하여 安民歌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이에 忠談이 명을 받들
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통일 후의 화랑에 대한 기록 가운데 鄕歌에 대한 내용이 많
음을 볼 때에 통일 전 화랑과는 다르게 <相悅以歌樂>하였
음을 알 수가 있다. 즉 道義 연마보다는, 노래를 부르고 서로
즐기기를 좋아 하였다.
이상에서 통일 후 화랑은 놀이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볼 수
가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놀이란 네덜란드의 文化史家 호
이징하가 [遊戱하는 人間]에서 만들어 낸 바로 그 개념이
다. 호이징하는 놀이를 문화의 근원이라고 까지 보는 입장
인데, 그에 의하면 놀이는 본디 眞蘗함과 兩立되는 것으로
서, 이 兩者는 각기 허구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대표한다
고 한다. 그리고 이 양자가 일정한 거리를 둔 긴장관계에서
만 참된 문화가 유지될 수 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전성기
의 화랑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이 시기의
화랑의 놀이적 성격은 조국수호, 나아가 삼국통일이라는 현
실의 목표, 곧 군사적 관업에 의해서 어느 정도 억제되었다
고 생각한다.
그러나 삼국통일 후 화랑은 매우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周
知하는 바와 같이 신라는 中古時代 초대의 과업이었던 삼국
통일을 달성하게 되자, 화랑의 군사적 성격은 시들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우기 통일 후 일찍이 체험한 적이 없는 장
기간의 평화를 謳歌하게 되었는데, 이같은 安逸한 시대적
분위기가 군사적 기능을 喪失한 화랑의 놀이적 기능을 한충
助長했을 것은 확실하다.

3. 花郞의 變遷

신라의 화랑도는 眞興王 이후 武烈, 文武王에 이르는 동안
가장 旺盛하였다가 삼국통일 후 신라사회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점차 쇠퇴하게 되넜다. 그 주된 원인으로 먼저, 唐의 문
화가 수입됨으로써 신라는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면에 걸
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그리고 外來의 종교로서 佛敎
가 득세하였고 다시 儒敎까지 수입 전파되어 국가정치와 민
간사상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어 國風인 화랑도는 자연
히 그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화랑도의 성립기반
인 骨品制度도 통일신라의 말기에는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골품제도의 동요역시 화랑제도의 유지를 위협하였
다.
이러한 신라사회의 근본적 변화는 화랑도의 존재를 더 아
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고, 신라사회에서 시멸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花郞의 精神은 신라의 멸망과 더불어 소멸되지 않
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었다. 그것은 화랑이라는 말
이 다만 고려,조선 시대에는 그 정신만이 계승되었던 것이
지 그때까지도 화랑도가 계속하였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이렇게 보면 화랑도도 어디까지나 고대국가로서의 신라에
존재했던 고유한 것임을 알고서 신라라는 時點 위에서 이해
되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 高麗 太祖 왕건은 건국초부터 新羅文化의 장점을 채
택하여 부흥 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왕건은 佛敎와 아
울러 國風인 화랑도를 부흥 시켰으니 이에관한 고려사의 기
록을 보면,
"…‥八關은 天靈과 五岳,名山大川,龍神을 섬기는 바라 후
세의 간신이 加滅을 健白하더라도 마땅히 금지 할 것이다.
내 당초부터 마음에 맹세하여 會日과 國忌를 범치 않았으니
군신이 동락하여 이에 敬依하고 이를 시행하라." 하였다.
여기서 天靈과 五岳, 名山大川, 龍神 등을 섬기는 것은 화랑
도의 중요한 행사였으며 유풍이었다.
한편 李仁老의 ≪破閑集≫에서는
"계림의 구석에 풍자가 아름다운 자를 택하여 보배로 장식
하고 일컫되 花郞이라 하니 國人이 모두 떠받들게 되고 그
무리 三千餘人에 이르렀다.
中略…我 태조 龍興케되매 고국의 유풍을 함부로 고칠 수
없다하여 冬月에 八關盛會를 베풀고 良家의 자제 네 사람을
선택하여 예의를 입고 뜰에서 춤추게 하였다." 고하여 태조
초에 부흥한 팔관성회가 화랑도의 유풍임을 확실하게 하였
다.
申采浩는 "高麗一代에 花郞의 思想을 실행하려던 君·臣·兩
人이 있었는데 예종과 윤관이다."라고 했다. 예종 12년 4일
서경에서 조서를 내리되 "四仙의 유적은 마땅히 염을 더할
것이니 依行 시행하되 실수함이 없을 것이오 국선의 일은
此來로 仕路多聞하여 구하는 자 적으니 마땅히 대관의 자손
으로 이를 행케 할 것이다. 국풍은 그 검박함을 찾는 것이니,
조정 士庶의 의복이니 華侈함을 삼가하다." 이어서 윤관의
인물됨을 소개하여서 "신라 화랑 김유신을 숭배하여 위국기
도의 충성과 六月氷河의 勢信을 가진 인물" 이라고 하였다.
예종은 윤관을 시켜 여진 북변을 개척하고 9성을 건설하였
다.
칭제북벌론의 영수는 윤언이니 곧 윤관의 아들로 유일한
郞家의 계통이나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西景戰役 이후 윤
언이를 비롯한 郞家는 말살 당한다. 그 이후 김부식의 儒家
는 더욱 득세하게 되고 이 유교의 事大主義가 이조 창업의
근본이 된다. 조선시대는 유교적 관료국가로 화랑제도와 그
사상이 철저히 배격되고 事大思想과 黨爭으로 나라는 허약
해졌으며 화랑도의 崇高한 독립정신과 씩씩한 자주기백을
巫女雜輩의 행위라 하여 누명으로 몰아 부치고 탄압하였다.
이로 인해 화랑정신은 일시적으로 쇠퇴의 양상을 보였지만
꾸준히 우리 진족의 정신적 지주로서 계승 발전되어 忠武公
의 偉勳으로 그리고 東學改革으로 이어져왔으며 최근에는
三一精神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Ⅴ. 結 語
이상에서 花郞의 歷史에 대해 특히 三國統一을 前後로 한
花郞의 性格比較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았다. 이제 그러한
내용을 요약함으로 결론을 대신하기로 한다.
신라 화랑의 기원은 上古時代부터 우리 민족 내에서 형성
되어 전래해온 우리 固有思想에 터한 靑少年 團體였다. 이
러한 청소년 단체의 공동체적인 遺制를 신라사회에 맞게 再
組織한 것이 바로 花郞制度이다. 화랑이 국가적인 제도로서
제정된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신라 中古時代初로
보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화랑제도는 인재의 양성과 선
발 그리고 등용에 목적을 두었다고 믿어진다. 그것은 신라
중고시대 국가통치체제의 확대발전과 관련되어 많은 인재
를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다.
花郞의 組織에 있어서의 每 화랑집단마다 최고 귀족인 眞骨
출신의 花郞 한명과 교사로서 그를 고문, 지도하는 僧侶郞
徒 약간명, 그리고 진골 이하 평민에 이르는 천명 가까운 郞
道들이 있다. 이처럼 그 조직이 귀족에서 일반 평민에 이르
기 까지 王京 내의 거의 모든 사회계층을 연결, 망라한 通社
會的 집단일 뿐 아니라, 그 조직 자체가 구성원 자신들의 자
발적 참여 아래 일종 誓約의 형식을 통해서 맺어진 점이 주
목되고 있다.
화랑은 신라의 고유사상을 바탕으로 儒敎, 佛敎, 道敎의 三
敎를 흡수 융합한 사상이다. 그리고 화랑의 지도이념이 된
원광의 世俗五戒는 화랑의 이념형성과 윤리적 체계화에 기
여하였다. 그리하여 세속오계의 정신으로 훈련된 화랑은 사
회를 위한 훌륭하고 유능한 인재를 배출시켰고, 나아가서는
삼국통일이란 대과업을 이룩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세
속오계 이외에 화랑의 信條에는 三異가 있는데, 이것은 일
조의 사회윤리로서 신라사회의 질서를 이루고 있던 道德이
다.
新羅中古時代 초에 編成되었다고 본 화랑은 신라말까지 4세
기가 넘는 기간동안 아무 變動없이 존속되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즉 화랑의 활동과 그 政治社會的 機能이 時代의 變
化에 발맞추어 變遷해 갔을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 밝혀진 화랑의 성격은 인재등용과 군사적
성격,청소년 수양단체로서의 성격, 종교적 성격 등이다. 그
런데 위의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화랑의 기원을 민족고유
의 것으로 파악할 때,본래 화랑은 上古代의 민족종교와 관
련된 성격이 강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新羅中古期의 신라는 眞興王의 야심적인 영토팽창으로 인
하여 高句麗, 百濟 兩國이 失地回復戰爭을 일으키게 하였
다. 특히 善德女王 때에는 신라의 국가적 尊位마저 위태로
운 형편이 되었다. 이처럼 신라가 祖國守護戰爭이라는 어려
운 고비를 겪는 동안에 一次的으로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된
것이 軍事的 課業이었다. 따라서 이 때의 화랑은 종교적 성
격보다는 인재등용, 군사적 성격이 더욱 강했다고 볼 수 있
다.≪三國史記≫의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에
서 뽑혀 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간한 군사가 이로부터 길
러진다."라는 화랑 관련기사가 이를 뒷받침해준다.또한 ≪
三國史記≫ 列傳에 실려 있는 화랑과 낭도들의 武勇談은 이
國亂期에 즈음하여 화랑집단의 성원들이 어떻게 신라의 시
대정신을 이끌어 갔는가를 보여주는 자료인 것이다.
하지만 삼국통일 후 신라의 時代相은 크게 변화하였다. 즉
통일 후 신라는 국내적인 안정과 장기간에 걸친 국제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이같은 시대상의 변화는 화랑집단에도 일정
한 영향을 끼쳤다. 통일을 달성함으로 해서 그때까지 그들
을 짓누루고 있던 긴장과 현실의 軍事的 課業에서 일단 해
방된 화랑집단은 이제 더이상 武士道의 權化일 수가 없었
다. 결국 화랑집단의 군사적 기능은 시들해 질 수 밖에 없었
으며, 그 반면 화랑집단 고유의 놀이적 기능이 한층 더 作動
助長되어 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화랑연구를 최초로 시작한 일련의 日人學者들은 통일 전과
후의 화랑의 성격 변화에 대하여 거의 전부 타락 變質되었
다고 주장하여 왔다. 즉 증거의 제시없이 통일후의 화랑은
文弱에 빠지고 遊娛, 社交目的으로 되었다는가 유희집단으
로 변했다는 주장을 해왔다. 가령 통일 이후를 기하여 화랑
의 氣質이 변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신라인의 氣質의 변화
이지 화랑의 氣質만의 변화는 아니다. 단지 시대상의 변화
에 따라서 화랑의 활동 역시 통일 전에는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고,통일 후에는 놀이적인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신라의 화랑도는 眞興王 이후 武烈, 文武王에 이르는 동안
가장 旺盛하였다가 삼국통일 후 신라사회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점차 쇠퇴하게 되었고, 신라의 멸망과 함께 소멸되고
말았다.
하지만 花郞의 精神은 신라의 멸망과 더불어 소멸되지 않
고 고려 초의 팔관회와 조선말의 동학으로 이어져 왔으며
최근에는 三一精神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

參 考 文 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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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淳昶,<新羅 花郞道의 硏究>,新羅伽揶文化 3卷,1971.
 



                                        花郞의 硏究 -成立과 思想을 中心으로- (李 夏 田)

2013.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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