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도 맨발로 모래밭 뛰노는 '놀자판' 유치원

2019. 11. 27. 16:26잡주머니



한겨레

한겨울에도 맨발로 모래밭 뛰노는 '놀자판' 유치원

조연현 입력 2019.11.27. 09:46 수정 2019.11.27. 10:36 


창립 30돌 코끼리유치원의 교육법
마음껏 놀게 하니..어느새 마음근육이 '쑥쑥'
아이들의 마음근육을 길러 커서 어려움이 닥쳐도 이겨낼 회복탄력성을 갖추도록 놀자판을 만든 ‘코끼리가는길’의 유혜숙·이동훈 모자.

저출산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은 어느 때보다 귀하디귀한 공주님 왕자님이니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부모로선 노심초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전북 전주시 덕진구 금암2동에 있는 코끼리유치원 마당에 들어서니 온실 속 화초 같은 아이들은 없다. 아이들이 원숭이처럼 층층오름대 꼭대기까지 뛰어 올라가 반대편으로 건너간다. 타잔처럼 줄을 발목에 꼬아 줄그네에 거꾸로 매달려 묘기를 부리기도 한다. 보통의 유치원 같았으면 학부모들이 하나같이 경을 칠 장면들뿐이다. 그러나 이곳은 처음부터 ‘남의 집 귀한 자식들, 함부로 키워준다’고 공언한 곳이다. 더구나 아이 때부터 영어까지 가르치는 선행학습이 유행인 시대에 한글도 가르치지 않는 곳이다. 문맹률 최고(?) 유치원은 그저 놀자판이다.

■ 놀자판 아이들 아이들을 통제하지 않고 마음껏 놀게 하는 뒷배가 이곳에서 ‘엄지’로 불리는 유혜숙(63) 원장이다. 유 원장의 교육관은 간단하다.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라는 것이다.

“아이들한테 ‘안에서 놀래, 밖에서 놀래?’ 하고 물으면 십중팔구 ‘밖’이라고 해요. 또 ‘여기서 놀래, 저기 숲에 가서 놀래?’라고 물으면 ‘숲’이라고 해요.”

엄지는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원없이 행복하게 뛰어놀아야 어른이 되어 힘든 일이 생겨도 그 힘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말했다. 온실의 화초는 회복탄력성이 생길 수 없다는 것이다. ‘코끼리’ 아이들은 워낙 뛰어노는 것을 좋아해서 한겨울에도 맨발로 모래밭을 뒹굴기 편하게 엄마가 머리를 땋아줘도 다 풀어달라고 하고, 줄그네에 발을 끼우기 쉽게 아예 양말도 신지 않고 온다.

이곳 아이들 90여명은 일주일에 한 번은 완주 두억마을에서 텃밭을 가꾼다. 무려 500평이다. 이곳에서 고구마, 감자, 배추, 양파, 당근 등 온갖 채소를 직접 심어 가꾼다. 아이들은 무를 캐서 즉석에서 전을 지져 먹기도 한다. 또 직접 가꾼 고구마와 감자를 배낭에 가득 담아 낑낑대며 메고 가 집에 부려놓으며 ‘엄마 내가 이거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라고 고생담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엄마가 찐 감자를 내오면 바로 ‘이거 내 감자야?’라고 묻는다. 아이들은 애써 자기가 가꾼 작물에 대한 애착으로 채소를 남김없이 먹는다. 편식하는 아이란 ‘코끼리’ 사전엔 없다.

이 아이들은 한겨울에 무주로 3박4일 캠프 가는 것을 비롯해 걸핏하면 캠프를 가는데, 그런 연수원에서 교사나 학부모들의 도움 없이 조막만한 아이들이 캠핑 도구와 짐들을 스스로 옮긴다. ‘코끼리’ 학부모들 직업군 가운데 압도적 1위가 초등학교 교사다. 초등학교 교사 학부모들은 ‘받아쓰기는 꼴등인데 인기는 짱인 ‘코끼리’ 출신 아이들을 눈여겨보게 된다’고 했다. 이 아이들은 뒤늦게 뭔가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면 남다른 지구력을 발휘한다고 입을 모은다.


교육은 아이들 행복하게 해주는 것 아이들 놀고 싶은 곳은 안보다 밖 자연에서 놀아야 회복탄력성 생겨 한겨울에도 맨발로 모래밭 뛰놀고 1주일에 한번은 텃밭 가꾸기 노동 자신이 가꾼 작물이니 편식도 없어 캠핑 갈 땐 짐도 스스로 싸고 옮겨 친환경 아이들 행동에 부모도 변화

전북 초등교육에도 혁신 바람 솔솔 성인 된 아이들 돌아와 다시 뭉쳐 새로운 ‘마을공동체’ 만들 궁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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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아찌와 모래판을 뒹구는 아이들.

■ 학부모가 달라진다 유치원에서 일회용품 안 쓰기 등 환경적 삶이 몸에 밴 아이들은 집에서 이를 지키지 않는 부모를 가르치기 일쑤다. 또한 농사지은 배추로 김장해 저소득층 노인들에게 나눠주고, 고사리손을 호호 불며 연탄까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아이들이니 부모인들 달라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자기만 살고, 제 자식만 살리려다 보니, 세상이 이 지경’이라는 엄지는 ‘코끼리’의 학부모라면 적어도 2~3개의 엔지오를 후원할 것을 권유한다. 그리고 제 욕심으로 자식의 앞날을 망치지 말고 스스로 길을 찾도록 도우라고 한다.

김승수 전주시장도 세 자녀를 모두 ‘코끼리’에 보냈다. 김 시장은 “큰아이가 고교 1학년 때 그만 다니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는데, 몇년 뒤 제 길을 찾았다며 국립농어민대학교에 진학해서 열심히 하고 있다”고 대견해했다.

지난해엔 유치원들이 도맷금으로 비판을 받자 엄지가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며 유치원을 접으려 들었다. 그러자 현코(재학생 코끼리)와 졸코(졸업한 코끼리) 학부모들까지 총출동해 ‘붕어빵 교육이 아닌 코끼리만의 특성 교육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며 십시일반으로 1억원가량을 갹출해서 위기의 ‘코끼리’를 살려냈다. 이런 성원에 엄지는 관 허가를 반납하고 ‘코끼리가는길’이란 이름으로 정부 지원 없는 공동육아로 ‘코끼리교육’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달 28일엔 코끼리유치원 창립 30돌 행사가 전주박물관에서 열렸다. 600여명이 참석해 대성황을 이뤘다. 졸코들은 목걸이 선물을 들고 와 어려서부터 마음근육을 키워준 엄지에게 감사를 표했다. 20년 넘게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동고동락해온 스쿨버스 기사 두 ‘아찌’에게도 감사의 선물을 안겨줬다. 그 많은 인원이 야외파티를 여는데도 도시락을 먹으며 아무도 일회용품을 쓰지 않아 ‘역시 코끼리들’이란 소리를 들었다.

■ 전주를 변화시키는 마중물 ‘코끼리’ 교육이 유치원에서 끝나기를 원치 않은 졸코 부모들이 집단으로 움직여 완주 고산초교와 진안 장승초교를 혁신학교의 대명사로 키워냈다. 또 전주시를 사람 사는 생태도시로 키우기 위해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야호 아이숲, 야호 생태숲, 야호 유아숲 등의 사업은 모두 ‘코끼리교육’이 준 영감에서 비롯됐다고 김 시장이 공공연하게 밝힐 정도다. 2023년 8월 새만금에 전세계 청소년 5만여명의 스카우트가 모여 펼칠 세계잼버리대회를 유치한 주역인 이동훈·김유빛나라 등의 스카우트들도 ‘코끼리’ 출신이다.

이동훈(34)씨는 엄지의 아들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다니던 그는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며 4년 전 금암동에 내려와 사무실과 게스트하우스를 겸한 ‘코끼리가는길’이라는 커뮤니티센터를 열었다. 그곳에서 ‘코끼리’의 교육을 더 잇고 싶어하는 아이들 8명을 모아 ‘8살 인생학교’를 열어 요일별로 판소리와 농사, 사진 등을 함께한다. 젊은 그가 등장하면서 오래된 골목길에 생기가 돈다. 그의 선배 김효빈씨가 지난해 ‘해달별’이라는 카페를 열어 벌써 젊은이들이 적지 않게 몰려들고 있다. 공방도 생겼다. ‘코끼리’ 출신 부부인 오영빈(전북대병원 의사)·소문정(기업은행 행원)씨 등 여러 젊은이가 자주 ‘코끼리가는길’에서 금암동 일대에 모여 살 작당을 시작했다. 전주에 또 하나의 명소 ‘코끼리들의 마을공동체’가 탄생할 날이 머지않았다.

전주/글·사진 조현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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