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기(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시인 소개

2019. 10. 8. 20:57




고운기 시인 소개| ♣ ―--유명시 문 학


데미 | 조회 114 |
추천 0 | 2011.10.14. 08:46



고운기 시인 소개






책과 나

비빔밥

꿈에 귓밥을 파다

끼니

소가 아니라도 웃을 일 

오줌

담배 10년 

익숙해진다는 것

혼자 살다보니

가을 햇볕

산다는 건 눈치

채점

三田

문명

자전거 타고 노래 부르기

수화手話를 하지 않는 수화시간手話時間

새 터

나무는 바람을 만들고

가을 햇볕

할머니, 그것은 거짓말이었어요

빈방

약간의 오버

제비

강철의 발걸음

호수

예수가 우리 마을을 떠나던 날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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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기 시인 소개

 

대학 교수, 시인
1961년 12월 15일 (만49세) 소띠, 사수자리
전남 보성군 출생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한양대학교 문화컨텐츠 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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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나

 

 

예쁜 여자 훔쳐오듯 데려와 살았다

 

어느새 방 하나를 요구한다

저의 방 하나 마련하려 살아가는 나날이다

 

한때는 요행히 방을 준 적도 있었다

정중히 헤어질 것을 요구한 적도 있었다

 

남의 집에 저를 맡겨두고

먼 데로 떠돌거나 가끔씩 들러 눈을 맞춰보기도 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정 깊어진 여자

 

하기야 깊이 사랑하고 자식을 낳기도 하였다

드디어 늙어서는 먼지만 쌓인 네 몸뚱어리를

끝내 버리지 못하고 챙긴다

 

다시 욕구가 생길 때는

새 여자보다 헌 네 몸을 탐하게 될까

 

자식을 얻겠다는 생각은 웬만큼 사라지는 나이.

 

 

ㅡ 자전거 타고 노래 부르기 / 랜덤하우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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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빔밥

 

 

혼자일 때 먹을거리치고 비빔밥만한 게 없다

여러 동무들 이다지 다정히도 모였을가

함께 섞여 고추장에 적절히 버물려져

기꺼이 한 사람의 양식이 되러 간다

허기 아닌 외로움을 달래는 비빔밥 한 그릇

적막한 시간의 식사

나 또한 어느 큰 대접 속 비빔밥 재료인 줄 안다

나를 잡수실 세월이여, 그대도 혼자인가

그대도 내가 반가운가.

 

 

 ㅡ 자전거 타고 노래 부르기 / 랜덤하우스(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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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귓밥을 파다

  

한 움큼 귓밥을 파냈다 했더니

꿈 잘 푸는 마누라, 구설수口舌數에서 풀려날 조짐이라나

 

세상에 나와 세상에 이름을 알린 죄만으로도 입방아감이지

나는, 두 눈 뜨고도 차를 잘못 갈아타고

햇살 같은 계집아이들 종아리에 계단을 헛디디고

 

먼지야,

귓구멍 속에 슬그머니 자리를 잡고

나를 간질여 어디로 데려가려고

 

먼지야,

밥이 되지 않는 먼지야

 

더러 헛디뎌 넘어져도

더러 의아疑訝한 정류장에 내려서서도

나를 찾아갈 어디가 있는 듯 두리번거릴란다

나는 돌아갈 어디를 아는 듯 태연할란다

 

 

자전거 타고 오래 부르기 / 랜덤하우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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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니

  

멀쩡한 제집 두고

때 되어도 밖에서 끼니를 때우는 일은

茶飯事다반사

도대체 집은 뭐하러 있는 거야?

아침은 얻어먹고 사냐는 질문도

굳이 마누라 타박할 問法은 아니지

차라리 못살았다는 옛날 생각이 나는 거야

새벽밥 해 먹고 들일 나가

날라오는 새참이며 점심 바구니

끼니마다 집에서 만든 밥 먹던 생각

그것이 힘의 원천

저녁이면 큰 상 작은 상

각기 제몫의 상에 앉아

제 밥그릇 찾아먹은 것이 좋았다는 생각

무슨 벼슬한다고

이 식당 저 식당 돌아다니며

제 그릇 하나 찾아먹지 못하고 사노

먹는 게 아니라 때우면서

만주벌판 독립운동이라도 하나

멀쩡한 제집 두고

밖으로만 나다니면서

 

 

 ㅡ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 창작과비평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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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아니라도 웃을 일 


시를 쓰되 위조지폐 그리듯 할 일 
책으로 잘 위장해 서점에 내놓고 완벽하게 돈세탁할 일 

술값도 갚고 쌀도 사고, 호주머니에서 좀 남기도 하고 
위조범으로 잡히는 것 쯤 두려워하지 않을 일 

- 걸레는 빨아도 걸레 
시는 빨아도 시 

  ㅡ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 창작과 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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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줌

 

 

어려서 우리 옆집 할아버지는

내 오줌을 받아먹었다, 무슨 병이었는지

어린아이의 깨끗한 오줌이 약효가 있다 했다

동네 아이들 중에서 내가 선택된 이유를 몰랐지만

지금이라도 드러낼 만한 자랑은 아니지만

세상에, 내 오줌으로 사람을 살린다니

 

술을 많이 먹고 난 아침

당뇨 낀 내 오줌은 아무에게도 쓸모없겠다

어느덧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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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10년 


자동차 고치러 갔다가 
왼쪽 가슴 주머니의 담배 
슬그머니 바지 주머니에 숨긴다 
정비소 주인은 내가 다니는 교회의 집사 
속이자는 것이 아니라 
왠지 그에게 모욕을 주는 일 같았다 
돌아오며 생각하니 
담배 피운 지 10년 
남들 끊을 나이에 시작한 늦담배가 
쓴 내 인생의 이력서이다 
때로 눈치보며 
연기처럼 흘려보낸.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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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해진다는 것

 

오래된 내 바지는 내 엉덩이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칫솔은 내 입안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구두는 내 발가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빗은 내 머리카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귀갓길은 내 발자국 소리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아내는 내 숨소리를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오래된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바지도 칫솔도 구두도 빗도 익숙해지다 바꾼다

발자국 소리도 숨소리도 익숙해지다 멈춘다

 

그렇게 바꾸고 멈추는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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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다보니

 

 

마침 일요일 아침에 날씨가 화창하면

오늘 빨래하기 좋은 날이군, 한다

 

-날씨가 좋아서 빨래를 갔더니만

  모진 놈 만나서 돌베개 뱄다네

 덩기 둥당에 둥당덩*

 

옛날에 부르던 그런 노래도 흥얼거려보며

 

반짝 햇빛이 주어졌을 때

재빨리 내 몫만큼 챙겨야 마른 옷을 입지, 한다

 

-날씨가 좋아서 나무하러  갔더니만

  모진 년 만나서 무르팍 까졌네

  덩기 둥당에 둥당덩*

 

모진 놈 못 만나 빨래만 하고

모진 년 못 만나 나무나 하면서.

 

 

* 전남 해안 지방에서 널리 불리는 민요

  '둥당에 타령'의 일 절. 가사를 변개해 가며 선후창先後唱으로 흥겹게 부른다.

 

 

자전거 타고 노래 부르기 / 랜덤하우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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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햇볕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오래 흘러온 강물을 깊게 만든다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여고 2학년 저 종종걸음치는 발걸음을 
붉게 만든다, 불그스레 달아오른 얼굴은 
생살같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다 
그리하여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멀어지려 해도 멀어질 수 없는 우리들의 손을 붙잡게 하고 
끝내 사랑한다 한 마디로 
옹송그린 세월의 어느 밑바닥을 걷게 하다. 


좋은 시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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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눈치


이 나이 되도록 그렇게 살아왔나 
눈치 보며 새치 나며 

밥 먹으며 눈치 
술 마시며 눈치 
고민하면서도 눈치 
사랑하며 눈치 

죽음마저 눈치? 

그래서 머리 하나에 
새치는 이렇게 많이 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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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점


  내 생일은 십이월 하고도 중순
  언제부터인가 나에게는 그날 받는 선물의 질과 양으
로 한해를 채점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분명코 한해 동
안 내가 베풀었던 것만큼 돌아오리라는, 사실 터무니없
는 계산법이지만, 그렇게 삶의 한 매듭매듭을 결산해보
는 것이지요.
  부끄럽게도 후한 점수를 받고 넘어간 해가 몇번 없습
니다. 치사하고 쫀쫀하게, 가난하다는 핑계로 내 밥그릇
먼저 챙겼고, 몸이 약하다는 핑계로 내 옷 한벌 먼저 챙
겼고, 사랑한다 하면서도 내 모두 바치지 못했습니다.
서른의 막바지에서 평균점수 간당간당, 다음 나이 진급
이나 될랑가 싶습니다.
  내 생일은 십이월 하고도 중순
  아니, 내 삶의 십이월 중순쯤
  이다지 부끄럽게 또 핑계나 대야 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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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田


나는 평면, 지도에서 익힌 거리였다 
높이를 알려주지 않는 정보원을 둔 게 잘못이었다 

저장한 가따까나 몇마리가 머릿속 어디서 길을 잃고 
느린 속도로 번역되어 다가오는 
어긋나게 내 옆을 지나가는 풍경이 있었다 

새로 거기 나를 그려 넣어야 했나, 넣었나? 
나는 아직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난바다 가까운 마을에는 바람이 제집처럼 드나들고 

땅거미가 찾아올 때쯤 밭고랑 같은 골목길에 
돌아가라 돌아가라 
어김없는 하오의 사이렌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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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귀족들 마차가 거리를 메우자
파리와 런던의 시가지를 온통 말똥이 점령했었다지
마차에서 쏟아지는 말똥이 공해가 되어
가솔린 쓰는 자동차를 만들었다지
말똥보다 가득하고
말똥보다 무서운
배기가스 매연이 나타날 줄 몰랐었겠지
그리운 말똥


먼 훗날에도 시인은 여전하겠지
그리운 매연
이라고 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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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타고 노래 부르기

 


흙 묻은 자갈이 낮잠 자는 옛길 
새로 만든 도시의 사람 드문 골목길 
강둑 기슭에는 꽃을 내려놓고 푸르게 움돋는 개나리 잎 
뺏길 뻔하다 겨우 살아남은 언덕길


나는 자랑같이 자전거를 타고 
머리카락 좀 흩날리면서


돌아오지 않을 강물과 인사도 나누다가


거슬러 거슬러 
입에서 터지는 대로 
거슬러 거슬러 가슴에 담은 정이 
묵은 대나무처럼 솟구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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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바람을 만들고 


떡갈나무 가지가 흔들리네요, 세상의 가지들이 흔들려 
지상에 바람 먼저 일으켰다는군요 

나무는 바람을 만들고 
바람은 나무와 나무가 전하는 안부 

바람 속에는 가지 찢기운 소식도 있더군요 
내 두 손으로 받아 읽다가 접어두면 
가슴속 어디선가 맴돌며 구르는 잎의 소리 

떡갈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날 
더이상 흔들리는 것 아닌 흔드는 것.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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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햇볕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오래 흘러온 강물을 깊게 만들다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여고 2학년 저 종종걸음 치는 발걸음을

붉게 만들다, 묽그스레 달아오른 얼굴은

생살 같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다

그리하여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멀어지려 해도 멀어질 수 없는 우리들의 손을 붙잡게 하고

끝내 사랑한다 한마디로

옹송그린 세월의 어느 밑바닥을 걷게 하다.

 

 

자전거 타고 노래 부르기 / 랜덤하우스.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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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그것은 거짓말이었어요 


참괴에 가름할 고백 하나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내 행동의 저편에는 착하 
게 보이게 한 거짓말이 있었다 

일흔 넘어 할머니 가는눈이 멀어 
대충 짐작으로 일해야 했는데 
국민학교 삼학년 처음 도시락 가지고 다닐 때 
언제나 열어보면 새카만 보리밥뿐이었다 

-- 할머니, 날 이뻐하는 것 알지만 
그러니까 내 도시락에 쌀밥만 퍼놓지 
오늘부턴 내가 쌀 거야 

눈 어둔 우리 할머니 
동네 아줌마들한테 말하곤 했다 

-- 얘는 쌀밥 내 먹으라고 지 도시락엔 보리밥만 담는 
다오.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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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방

 

 

문을 열었을 때 함께 들어온 바람이 방 안을 먼저 살핀다.

어둠 속의 냉기冷氣 -

어쩐지 낯익은 듯 둘은 문득 몸을 섞는다.

 

 

자전거 타고 노래 부르기 / 랜덤하우스.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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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오버


예부터 우리는 과유불급(過猶不及)에 너무 훈련받아 왔다 
지나친 것은 나쁘다는 교시가 분명 너무 강했다 
과공비례(過恭非禮)라 하면서 점잖게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명색 한가락 한다는 사람들을 보라, 사실 지나치면서도 
언제나 과묵한 척 모자란 척 숨기고 있었다, 문제는 숨기는 것이다 

'내 마음의 풍금'을 만든 이영재 감독은 석사과정 때 
동급생이었는데, 극예술연구회 배우였던 그는 말이나 
몸짓이 늘 오버 액션이었다, 연극에서 배운 습관이었으 
리라, 입을 크게 벌리다 못해 입술마저 일그러지는, 그러 
면서 손짓에 발짓까지 섞어 말하는 그 앞에 있노라면 연 
기를 보는 듯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였다 

숨기는 것이 없었다 

오버 액션을 하는 사람은 정직하다 
그 몸짓이 대개 그의 전부이다 
마광수 교수도 지나쳤다, 그런데 그것이 그의 전부이다 
전부를 보여주는 사람 앞에서 나는 편안하다 
술을 조금 지나치게 먹는 사람이나, 지나치게 먹고 조금 
지나치게 말이 많아지거나 
지나치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나, 흥에 겨워 옆 사람을 붙들고 
춤을 추는 사람은 그렇게 약간 오버하는 사람이 
나는 좋다, 그런 오버에 대체로 거짓은 한자리하지 못하므로 

투명하다, 투명하다 못해 
뒤통수를 맞거나 살근거리며 사람을 홀리는 데 넘어가거나 
그런데도 어느 곱디고운 손이 있어 뽀얗게 감싸준다는 
옛 이야기같은 삶을 나는 오래도록 믿어왔다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 창작과 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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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

 

 

2004년 6월 27일이었다


전북 고창군 미소사 요사채의 처마에

새끼 네 마리를 낳은 제비 부부와 만났다


밤이었다

일본의 옛 노래를 공부한 선생이

나지막이 불렀다

서기 6세기 귀족의 노래


-그대가 떠난 궁정에

  그대의 옷자락 휘날리던 바람만 남았네*


제비 부부는

새끼들에게 둥지를 내준 채 처마 밑 전깃줄에 앉아 자는데

머리는 둥지를 향하고 있었다

궁정을 떠나듯

둥지를 버리리라


전깃줄만 남을 것이다

 

자전거 타고 노래 부르기 /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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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手話를 하지 않는 수화시간手話時間 


이를테면 나는 늘 그런 식이다 
밥을 먹으면서도 밥은 먹지 않고 밥 먹었다 하고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은 하지 않고 사랑했다 하고 
시를 쓰면서도 시는 쓰지 않고 시 썼다 한다 

나는 늘 밥이나 사랑이나 시를 
밥이나 사랑이나 시로 내 몸에 들이지 못한다 

말도 모르는 남의 나라에 와서 벙어리요 귀머거리로 지낼 때였다 
교육방송에서 하는 手話時間이 내게 말 배우기 선생이었다 
천천히 바르게 발음해 주고 자막까지 곁들여 
읽기 듣기를 한꺼번에 가르치는 훌륭한 선생이었다 
천만 명이 산다는 도시에서도 만날 사람은 손꼽지 못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말 한마디 듣지도 하지도 못하고 돌아오는 날들이 많았다 
적막한 숙소에서 텔레비전을 켜니 手話時間을 하고 있었다 
나는 벙어리요 귀머거리로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아주 더듬더듬 말을 알아듣기 시작했다 
아마도 말 배우기가 아니라 세상을 만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은 手話를 가르치는 시간이었다, 나는 手話는 배우지 않고 
수화를 가르치는 말만 배웠다 
더러 화면 한쪽 달걀처럼 생긴 타원형의 공간을 조금 차지하고 
手話로 세상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달걀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이를테면 그런 식이다 

헤어지고도 헤어지지 않고 헤어졌다 한다 
잊고도 잊지 않고 잊었다 한다. 


문학사상 200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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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터

 

 

더러 강물은 바람에 일렁여 
거슬러 오르는 것 같아 보여 
강물의 어디쯤엔가 
우리들 곤한 심신을 누일 수 있다면 
봄비에 촉촉히 적셔 보고 
수평선 멀리 입다물고 일어나 퍼지는 
저 강안개에 묻혀도 보리 
강가에 나가 보아 
그 강물 깊은 곳에 
땅 위에 바람도 아랑곳없이 
국토의 속살을 만지고 가는 
도도한 흐름을 만나야 하리 
목청 좋은 친구여 
노래를 다시 부르자 강물처럼 
바람을 맞아 떨리는 소리로도 
가슴 깊이 흐르는 우리들 역사와 
우리들 사랑을 위해. 


섬강 그늘 / 고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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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졸아라 


점심 때 구내식당에 내려가면 
밥을 받는 동안 아는 얼굴이 자꾸만 눈짓을 한다 
식판을 들고 어정쩡하게 끼여드는데 
마침 반쯤 넘게 먹고 난 다음이면 
대체로 선배인 그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나는 신병훈련소 식사 때보다 더 빨리 수저를 움직여 
야 한다 
제기랄, 속으로 짜증이 난다 
혼자 먹게 내버려둘 수 없나 
똥쌀 때 혼자인 것처럼 

그러나 이율배반이다 
나는 무리의 자식일 뿐이다 
학교라는 조직에 들어 넥타이 매고 출근하고, 
학회에 가입하고 문단에 나가고, 동인을 만들고 
게다가 없던 모임마저 새로 만드는 데 동참하고, 
나는 거기서 먹이를 얻고 정체성을 확인한다 
그러면서도 귀찮다니, 혼자인 게 좋다니, 
떠드는 건 아무래도 얄팍한 뒤집기다 

밥을 먹고 식당을 나오며 곰곰 생각한다 
혼자라는 희망은 나에게 분명코 허위였다 
큰 먹이는 여럿이 모아 얻어내고 
그 가운데 조금 내 몫 챙겨 돌아서며 안도했었다 

계단을 오르며 
이미 구수하지 않은 밥 냄새를 뒤로 하며 
나는 반성한다 
졸 때 혼자인 것처럼 
죽을 때 혼자인 것처럼 
혼자서 
혼자서.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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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발걸음



고통의 세월이 지난 다음 알게 되었네 
산등성을 타고 몇 봉우리를 지난 다음 
가을 낙엽 떨어져 산길마저 마른 잎으로 덮이고 
구르고 미끄러지고 헤맨 다음 
사람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기차로도 배로도 갈 수 없는 
비행기를 탱크를 타고도 갈 수 없는 
사람의 발걸음만 허락하는 좁은 산길에서 
우리는 알게 되었네, 사람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서운지 

단숨에 치달을 수 없지만 
쓰러진 나뭇가지를 걷어내고 
바위를 타고 넘어가야 겨우 한등성이 뒤로 했지만 
오랜 시간을 참고 견딘 다음 
아, 우리는 큰산을 넘었네 

산하를 두고 우리는 말하네 
내 작은 발로 너를 찾아가 
내 땀으로 너를 만졌노라 
캐터필러로 깔아뭉갤 수 없는 
너의 깊은 숲을 조용히 보여준 산하여 

더 오랜 고통의 세월이 지난 다음 
우리가 꿈결처럼 발길을 준 너를 기억하리라 
그제야 알게도 되리, 우리의 발걸음이 
땀과 인내로 이어져 새 세상을 찾아내리니 
아름다운 강철의 발걸음이여.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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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호수 앞에 앉으면 안경을 벗는다 
그리고 크게 숨쉬기 열 번 
네 눈을 마주보고 이야기하고 싶다 
미간을 찌푸리듯 
물 속 깊숙한 데서 일어난 
네가 지닌 고민과 갈등을 전해 주는 파문 
강아지풀 형제가 가만히 흔들리는데 
바람이 분다고만 물결이 일지 않음을 
호수는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섬강 그늘 / 고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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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우리 마을을 떠나던 날 
( 부제목 : 都城 밖 대장장이의 노래 ) 


진달래 꽃 피면 돌아오겠네 
벚꽃 만발하면 만나보겠네 
그리운 이름들 어디 가도 
불러서 모이면 쑥 캐러 가자 
봄비라도 내리면 알맞게 맞고서 
사랑하던 사람 등에 업고도 가리 
허기사 봄도 오면 무엇하리 
그대 떠날 때 우리에게 남겨준 것이 
서울로 가던 밤 피흘리며 
기도해 준 일 
가슴마다 허전함으로 슬픔 그득하여 
개나리꽃 터졌어도 눈물만 뿌릴 뿐 

그대의 아비도 나만큼이나 천한 사람 
일생을 목수질하며 살아왔을 땐 
아들이 장차 자라 로마의 군인이나 제사장이나 
세리가 되어 돈을 벌고 
좋은 집에 살며 세상 일은 잊으라고 
그렇게 바란 것은 아니었을 테지 

허기사 봄도 오면 무엇하리 
나귀 새끼 한마리에 몸을 싣고 
그대는 가서 서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그리운 고향 봄이 피어 오른 산천 뒤로 두고 
진달래꽃 같은 붉은 피 흘린다니 

나는 아직 도성 밖 대장간에 앉아 
불에 담근 쇠를 꺼내 망치질 하면서도 
이 못이 장차 그대의 손을 뚫고 발을 뚫고 
이 만드는 창으로 그대의 가슴를 찌르게 될지 
알 수 없다네 
알 수 없다네. 


한국인의 애송시 III -80년대 시인들 / 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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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먼 바다 쪽에서 기러기가 날아오고 
열 몇 마리씩 떼를 지어 산마을로 들어가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사립문 밖에 나와 산과 구름이 겹한 
새 날아가는 쪽 하늘 바라보다 
밀물 드는 모랫벌 우리가 열심히 쌓아두었던 
담과 집과 알 수 없는 나라 모양의 
탑쪼가리 같은 것들을 바라보면 
낮의 햇볕 아래 대역사를 벌이던 조무래기들 
다 즈이 집들 찾아들어가 매운 솔가지 불을 피우고 
밥 짓고 국 나르고 밤이 오면 잠들어야 하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분주히 하루를 정리하고들 있었다 
그러면 물은 먼 바다에서 출발하여 
이 마을의 집 앞까지 밀려와 모래담과 
집과 알 수 없는 나라 모양의 
탑쪼가리 같은 것부터 잠재웠다 
열심히 쌓던 모든 것을 놓아두고 
각자의 집으로 찾아들어간 조무래기들의 무심함만큼이나 
물은 사납거나 거세지 않게 
천천히 고스란히 잠재우고 있었다 
먼 바다 쪽에서 기러기가 날아와 
산마을 어디로 사라지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이 도시에 밀물처럼 몰려오는 어둠 

 

  ㅡ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고운기 시인 소개 2011.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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