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음(口音) -김소희님

2019. 10. 30. 09:36율려 이야기



[스크랩] 구음(口音) -김소희님| 오디오 자료실
마루|조회 39|추천 0|2010.03.28. 20:12
 
 
 

 

 

 

 

 

 

 

 

김소희 [, 1917.1.14~1995.4.17]   

“소리만 잘 하려고 허지 마.

우선 사람이, 인간이 돼야지 올바른 국악인이여.”


예술에서나 일상에서나 조금도 흐트러짐없이 단아하고 향기있는 삶과 예술로 귀감이 됐던 만정 김소희.
한평생 소리꾼으로서의 외길을 걸어 무소불통 빛나는 예술혼을 불태웠던 만정 김소희선생이 우리곁을 떠난지 올해로 4년째가 됐다.

   판소리의 대가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 5호인 만정은 지병인 간암으로 서울 소격동 자택에서 다소 쓸쓸하게 보내다가 95년 78세의 나이로 이 세상과 하직했다. ‘달밤의 기러기 울음소리’를 남겨두고. 쪽진 머리에 옥비녀와 옥색치마로 화사하게 단장하고 쥘부채 하나로 관객을 울리고 웃긴 고인의 판소리는 구성진 가락과 풍부한 방울목으로 유명했다.
‘고려청자의 쑥물 든 하늘빛과 조선조 백자의 희다겨운 옥빛이 어려있고 가을밤 기러기 소리며 청전의 학울음 소리와 낙목한천의 찬바람 소리를 느끼게 했던 목소리. 평평한 목소리로 나가다 한량없이 높은 소리로 냅다 휘잡아 올려가지고 거기에서 애절비절하게 쥐어짜다가 톱질로 비벼 차근차근 말아들이는 애원성으로 듣는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던 명창’(중앙일보 95년4월19일 분수대)이라는 평을 듣는 그는 애기명창으로 어릴 때부터 일찌기 이름을 날렸다.
하늘이 내 목을 타고 났다. ‘천구성’인 것이다.

   만정선생은 처신이 당당하고 매사에 맺고 끊음이 분명했다.
김소희 명창의 소리를 들으면 여러 명창의 소리가 들어있다 한다.춘향가에는 송만갑 명창의 소리가 있고, 정정렬명창김소희 명창 자신의 소리가 들어있다. 만정은 동·서편의 소리를 두루 섭렵하고 자기 소리로 승화시켜 김소희제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들어보아도 가성이나 꾀목을 쓰지 않고 담담하게 소리를 냈다. 군산대 최동현교수는 19세기말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던 채선 이래 우리의 여창 판소리가 이룩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만정을 꼽으면서, 윤곽은 크고 바르게 그리면서도 세부는 아기자기하고 부드럽게 엮어가는 것이 그의 소리였다고 평한다.
이매방에게 배운 살풀이며, 정남희에게 배운 가야금이며, 김월하에게 배운 가곡이며 여러 부문에 걸쳐 두루 일가를 이룬 그는 거문고 양금 서화에도 한자락 경지에 올랐다.


   1917년 고창에서 본명을 순옥으로 하고 농부의 둘째딸로 태어난 그는 가세가 기울면서 9살 때 부모의 곁을 떠나 광주 언니집 신세를 졌다. 광주여고보 시절인 13세때 당대의 명창 이화중선의 공연을 보고 소리꾼이 되기로 결심했다.
“울리고 웃기는 가락이며 가사, 부채를 꼬나쥔채 관객을 온통 탄성의 도가니로 몰고가는 발림, 오금을 못쓰고 빨려들게 하는 아니리 등에 완전히 도취되고 말았다”고 만정은 전북일보 김현기 기자와의 인터뷰(1972년8월20일자, ‘나의 편력’기사 중에서)에서 그 때의 감회를 밝혔다. 앉으나 서나 누우나 자나 무대 생각뿐이어서 열병에 걸린 것처럼 공연이 계속되는 10여일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가설극장의 포장문을 들추고 맨 앞자리에 앉았던 그녀가 소리공부를 위해 처음 찾은 이는 동편제의 대가 송만갑. 그는 첫 대면에서 들어본 그녀의 소리 흉내에 “어쩔 수 없구나. 네가 타고 났다.”며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녀의 소리 한평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정정렬에게서 춘향가, 전남 화순의 박동실에게서 수궁가 적벽가 등을 배웠다.
17살까지 오직 배우기만 열중해온 그는 당시 북과 고전무용의 권위자로 명성을 떨치던 한성준선생의 사설무용연구소에서 창을 배웠다. 라디오가 보급되기 시작하던 무렵, 한성준씨를 전속반주자(북과 장고)로 라디오 생방송을 하면서 만정의 진가는 더욱 발했다.
콜럼비아레코드 회사와 전속계약을 맺고 춘향가를 취입한 것도 이 때.
21세에 결혼한 그는 10년만에 부군을 여의고 3남매(2남1녀를 두었으나 장남 사망)를 혼자 키운다. 제자들에게는 엄하면서도 다정다감했고 후배 소리꾼들에게는 예술가는 품위가 있어야지, 천박하게 놀아서는 안된다며 몸소 예인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던 이 시대의 명창 만정은 안향련 김동애씨(작고)를 비롯해 성창순 신영희 남해성 박량덕 이명희씨 등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만정의 소리법통을 이어받은 명창 안숙선씨는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95년4월24일) “만정선생은 늘 우리 곁에서 거대한 산처럼 우리를 보호하고 감싸주셨는데, 이젠 잘못을 저질러도 따끔하게 꼬집어 주실 분이 없어요. 그분 소리는 격렬하면서도 처지지 않는, 절제된 소리의 정수였다. 기쁨도 슬픔도 드러나지 않는 그야말로 과장이 없는 소리 그 자체였다. 스승은 비록 가시고 안계시지만 그분의 소리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려 한다.”고 밝혔다.
친딸 박윤초씨(55세, 국악인, 김소희선생기념사업회 대표)는 96년 1주기를 맞아 열린 추모공연에서 고인의 장기였던 판소리 춘향가 중 춘향이가 이도령을 그리며 부르는 「갈까부다」를 열창, 고인의 예술혼이 아직도 살아숨쉬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95년 범국악인장으로 치러진 만정 영결식장에서 만정과 각별한 사이인 소고당 고단(78)이 76년 만정의 육순을 맞아 지은 시에 고인이 직접 곡을 붙인 ‘만정가’가 뱃노래 가락에 실려 불리어져 구슬픈 마음을 더했는데 고단은 그 뒤 만정의 방일영문화재단 국악대상 수상 축하의 마음을 다음과 같은 가사로 답했다.
“자그마한 체구에 이지적인 용모에/ 차돌같은 가슴속에 영롱한 별빛이/ 애수를 호소하듯 비취비녀 다홍댕기/ 옥색갑사 치마저고리 자주고름 늘어뜨려/ 합죽선 손에들고 「범피중류」 「옥중가」를/ 열창할때 기막힌 그감동 그여운은/ 몽환인듯 생시인듯 깨닫지 못할지다”라고.
만정은 72년 미국 카네기홀에서 판소리공연으로 기립박수를 받는 등 이름을 세계에 떨쳤다. 90년부터 시작된 병마를 무릅쓰고 국악부흥과 후진양성에 힘썼던 그는 병색이 완연했던 93년 76세의 고령에도 대한민국국악제를 진두 지휘했고 영화 ‘서편제’에 구음으로 출연, 94년을 국악의 해로 제정하는데 기여했다. 88년 서울올림픽 폐막식에서 심청가의 한 대목에 구음을 붙여 개작한 소리 ‘떠나가는 배’는 세계인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73년 국민훈장 동백장, 82년 제 1회 한국국악대상, 84년 대한민국 문화예술대상, 91년 동리대상, 94년 제 1회 방일영 국악상 수상, 95년 작고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으며 음반으로는 심청가와 춘향가 완창 앨범 등이 있다.
만정은 본인이 생전에 터를 잡아놓은 고창군 고창읍 화산리 묘역에 잠들어 있다.
살 수만 있다면 팔순 기념무대에서 사그라지면 사그라진대로 나의 목을 숨김없이 펼쳐보이고 싶다던 그녀, 말년에 낙향해서 조그만 예술전수관을 지어놓고 제자들이나 키우고 싶다던 그녀가 팔순을 한해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 1999년 전북일보 [20C 전북50인]에서



 

한국의 판소리 명창(동편제). 여성국악동호회 조직, 한국민속예술학원 창설, 국악예고 재단이사,

국악협회 이사장 역임하는 등 국악발전을 위하여 힘썼다.

만정()
본명순옥()
활동분야예술
출생지전북 고창()

 

호 만정(). 본명 순옥(). 전라북도 고창()에서 출생하였다. 13세 때 당대 여류명창 이화중선()의 소리를 듣고 소리꾼이 되기로 결심, 동편제의 대가 송만갑() 문하에 들어가 《심청가》《흥보가》 등을 전수받고, 다시 정정렬()에게 《춘향가》《수궁가》를 배웠다. 이후 22세 때에는 박동실()에게 《수궁가》와 《적벽가》를 배우고 그 밖의 명창·연주자들에게 가곡·거문고·가야금 등을 차례로 익혔다.

미모와 맑은 음색으로 인기가 높았으며, 빅타레코드사에서 정정렬·임방울·이화중선 등과 전편 취입한 《춘향전》에서는 춘향역을 맡아 대성공을 거두었다. 1937년 창극좌에 입단하였고, 1945년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여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창설하였다. 1970~1993년 국악예고 재단이사, 1993년 국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국악발전을 위하여 힘썼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경   력

 

▲송만갑 정정렬 박동실 등에게 소리 배움
▲1934년 콜럼비아레코드사와 전속계약 맺고 ‘춘향가’ 취입
▲1935년 이동백 송만갑 김창룡 정정렬 한성준 김연수 정남희 등과 함께 조선 성악연구회 설립
▲1954년 민속악의 본산 국악예고 전신인 민속예술학원 초대원장·이사장, 국립 구극단 부단장 역임
▲1959년 5선보에 의한 독창회 원각사에서 개최, 김동진 작곡 춘향가를 여공주의 피아노반주에 맞춰 공연
▲196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5호 지정
▲1971년 창악전수소 설립, 후학 양성
▲1972년 미국 카네기홀에서 판소리 독창회 개최
▲1993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취임

 

 

 

 

구음(口音)

 

[정의]
전라남도 진도군에서 입소리로 살풀이가락을 음영하는 가창양식.

[개설]
구음의 사전적 의미는 “거문고, 가야금, 피리, 대금 따위의 악기에서 울려나오는 특징적인 음들을 계명창처럼 입으로 흉내내어 읽는 소리”이다. 그러나 진도지역의 구음은 구음시나위라고 불리며, 그 음악성이 뛰어나 악기소리와의 변별성을 확보하고 있다.

[가사]
본래 구음 및 구음시나위는 가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진도민요집』제1집(1985)에는 진양조 및 중모리, 자진모리 등의 구음을 채록하여 소개해놓고 있다. 이것은 즉흥적인 구음시나위를 어느 정도 율격에 맞게 고정화시킨 곡이라고 판단된다. 예를 들어 강송대(남도잡가 예능보유자)의 경우, 즉흥적이면서도 일정한 선율의 규칙과 룰을 따르고 있는 점을 볼 때도 구음시나위가 무작위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진양조

디~다라~다디~다다다~다다다~이~

아~아하~헤에~이 더어~어~로구나

나아아~히이~이~히이~이 히이~야

떠어~허어~어허~어~헤 헤이~

이~로고나 다르르르

에헤~허어~어~어이~이~이이

어허 어허~인~가 어~어~어이~요

이~저어~어으~으어

에헤 에헤헤에~에헤헤~인가

쿵 덕

-중모리

나나지~지르디~찌르지르지

이~나나나 나나나 지~지르징

찌찌지 찌찌지 찌찌르 지르지~

허어 허어 허이 허이~이 지르지

이~나나나 나나나 지~지르징 지르징

찌찌지 찌찌지 찌찌르 지르지르지~

지 지르지르 지르지르지

하아~하아 아하하 에~에헤~에헤

에퀴헤~이~이~이~이~이~이이~이

나니 나니랑 나나 나나~나나

당 지르지르 지지지 지지지 지지지 딩아

나나나 지르징 땅 땅

어~어~어으~어~으~허으으로구나

허~으으~로나

헤에~헤이~헤헤헤헤 에헤에 따지징

따지징 찌르찌르징 찌찌르징

찌지찌지 징징 찌ㅉ르징 찌찌지징징

하~아~하~ 허~허~허

헐씨구 좋다

-자진모리

자장 자라자장장

지징 지징 지리지징징

지징 지징 지리지 장장

나나나~지지징 째째르징 째째르징

떵 떵 떵 떠 덩 덩 덩

나나나 지지지징 징징 징 째재쟁 째재쟁

떵 떵 떵 떠 떵~떵

띠리딩딩 띠리딩딩 띠디딩 띠디딩

동다지 당다지 당다지 동다지

떵떵 떵떵 덩덩 나이다덩덩 나이나덩덩

나이나 나나나 나나나 지지징

떵떵 도르덩당 도르덩당 다로도동

떵떵 당당 동당당 동 당당 다리동당 디리딩

떵~떵 디르디~디르디~이~이~

다리다리 당당 띠리딩띵 띠리딩띵

딩다지다지 딩 다라라라

[내용]
진도지역의 구음은 구음시나위라고 불릴 만큼 독특한 정서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 음악성이 매우 뛰어나 오히려 악기를 리드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일반적인 의미의 구음은 현악기 소리를 ‘덩둥등당동딩’으로, 관악기는 ‘러루르라로리’로 흉내내어 읽는다. 그러나 진도지역의 구음시나위는 ‘아-어-흐-우’ 등의 구음을 사용함으로써 악기와의 변별성을 보여준다.

특히 진도씻김굿과 살풀이춤의 반주음악으로서 구음시나위는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경향들이 북춤의 반주로도 이어지면서 타 지역에서 북춤을 출 때 풍물반주에 태평소를 사용하는 것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진도지역에서 구음시나위는 주로 씻김굿의 여흥판이나 북춤, 또는 매구굿이 벌어지는 난장에서 매우 자유롭게 연행되는 음악양식이다. 전형적인 육자배기토리를 사용하며, 한 사람이 하기도 하고, 다수의 대중이 시나위조로 가창하기도 한다.

[현황]
근래의 진도지역 구음가창자로는 단연 진도읍한순자를 거론하는 이가 많다. 그만큼 구음에 천재적인 소질을 지녔다고 알려져 있었다.

한순자가 작고한 이후로는 주로 강송대의 구음을 제일로 친다. 남도잡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강송대는, 본래 단골가에서 태어났지만 무업을 잇지 않고 민요 쪽으로 성공한 경우이다. 강송대는 민요뿐 아니라 특히 구음시나위에 천재적인 재질을 가지고 태어나 전국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할 정도다.

구음의 남자 명인으로는 흔히 진도읍박진섭을 꼽는다. 박진섭은 북춤의 중시조로 알려진 김행원의 손자이자, 고법 예능보유자 및 조선창극단에서 큰 역할을 했던 김득수의 조카이다. 박진섭은 본래 판소리를 배웠지만 지속하지 못하고, 주로 진도 내의 씻김굿판에서 타고난 천구성으로 구음을 해, 많은 사람들에게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의의와 평가]
진도지역의 구음은 구음시나위로 불릴 만큼 독자성을 확보하고 있다. 구음만으로 시나위가 가능할 만큼 예술성이 뛰어나서, 이것만으로도 진도지역이 가지고 있는 민속음악에 대한 지평과 깊이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진도지역의 구음, 즉 구음시나위는 진도사람들의 예술적 기량과 끼를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예술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진도민요집』제1집(진도문화원, 1985)
• 『진도군지』(진도군·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 2007)
 

 구음(口音)

거문고·가야금·피리·대금·해금 등 악기에서 울려나오는 특징적인 음을 악기소리에 가깝도록 흉내낸 소리, 즉 의음(擬音)을 계명창(階名唱)과 같이 입으로 소리내어 읽는 법.
 
구음법이라고도 하며, 이 음을 본받아 악보화한 것을 육보(肉譜)라고 한다. 육보는 음명(音名)도 계명(階名)도 아니며, 다만 각 악기에서 나는 소리에 가까운 의음에 의해 지법(指法)과 취법(吹法) 등에 이르기까지 기보(記譜)하기 위한 하나의 약속이다. 따라서 육보는 시대에 따라 약속이 서로 조금씩 달라진다.
육보는 세종대왕의 〈정간보〉 사용 이전에 쓰였던 것으로 고려 때부터 전통음악에 사용했다. 육보가 사용된 고악보는 〈악학궤범〉을 비롯하여 〈시용향악보〉·〈금합자보〉·〈양금신보〉·〈유예지〉·〈삼죽금보〉 등이다. 〈세종실록〉 악보나 〈세조실록〉 악보에는 육보를 쓰지 않고 있다. 육보를 가장 많이 사용하던 시기는 조선 후기이며, 지금까지도 많이 쓰이고 있다.
 
거문고의 구음법은 대현(大絃) 주법과 유현(遊絃) 주법으로 나뉜다. 대현 주법은 대현을 장지(長指)로 누르고 내는 소리(괘가 바뀌어 음높이가 달라져도 구음은 변하지 않음)인 '덩'과 대현을 식지(食指)로 누르고 내는 소리인 '둥' 그리고 대현을 모지(母指)로 누르고 내는 소리인 '등'이 있다. 유현 주법으로는 유현을 무명지(無名指)로 누르고 내는 소리(괘가 바뀌어 음높이가 달라져도 구음은 변하지 않음)인 '당'과 유현을 식지로 누르고 내는 소리인 '동'이 있고, 유현을 모지로 누르고 내는 소리인 '징'이 있다. 이와 같이 거문고의 구음은 지법에 의해 술대를 쓸 때는 '덩·둥·등·당·딩'의 구음법을 쓰고, 술대를 쓰지 않고 자출성(自出聲)일 때는 구음법이 '러·루·르·라·로·리(링)'로 변한다. 이밖에도 문현을 거쳐 유현의 두음을 낼 때는 '쌀갱' 또는 '싸랭' 등으로 구음하고, 문현을 거쳐 대현의 음을 낼 때는 '슬기덩'·'슬기둥'·'슬기등'·'슬기딩' 등과 같은 구음법의 약속이 있다.
가야금의 구음법은 양금과 마찬가지로 지법(指法)과는 관계없고, 줄마다 일정한 구음이 약속되어 있어 비교적 간편하다.
한편 관악기인 젓대나 피리는 원래 '러·루·르·라·로·리'로 구음하고 기보해왔으나 지금은 '러·루·느·노·나'로 바뀌었다. 1930년 이후 국립국악원에서는 이것을 다시 '나[黃]·누[太]·루[姑]·너[仲]·노[林]·느[南]·르[應]·나[潢]'로 마치 계명창과 같이 정해 교육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도표
장구의 구음법

도표
거문고의 구음법

도표
양금의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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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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