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15. 12:17ㆍ율려 이야기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우륵
于勒
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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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미상 |
대가야국 사람으로 가실왕의 뜻으로 12현금을 만들고 가야금 곡 12곡을 지었다.
551년(진흥왕 12) 신라에 투항하고, 552년 대내마 계고와 법지, 대사 만덕 등 세 사람에게 각각 가야금, 노래, 춤을 가르쳤다.
진흥왕에 의해 가야금 곡이 궁중음악이 되었다.
고대 음악의 마에스트로
우륵은 신라의 음악가이다.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많지 않아 정확한 생존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가야국 가실왕과 신라 진흥왕 때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가실왕의 뜻에 따라 12현금(絃琴, 가야금)을 만들고, 가야금 연주곡 12곡을 지었다.
우륵은 가야국 성열현(省熱縣)에서 살았다고 한다. 성열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의 경남 의령군 부림면 근처라는 설과 신반해국(散半奚國)이라는 설이 엇갈린다. 결국 그가 어떤 가야에서 태어났는지, 그에게 12현금을 만들도록 한 가실왕이 몇 대 임금인지도 분명치 않다. 다만 가실왕이 우륵에게 “모든 나라의 방언도 각각 서로 다른데, 성음(聲音)이 어찌 하나일 수 있겠는가.”라며 12곡의 악곡을 지으라고 했다는 이야기만 전한다. 이는 가실왕이 음악을 통해 가야의 여러 나라를 하나로 통일하려 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다 가야국의 정세가 복잡해지자 우륵은 제자 이문(尼文 혹은 泥文)과 함께 낭성에 숨어 살며 노래와 춤을 닦았다. 그러다 그 이름이 신라 진흥왕에게 알려져 우륵과 이문은 궁에서 새 노래를 지어 연주했고, 이에 감동한 진흥왕의 배려로 국원(國原, 지금의 충주)에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륵은 552년 진흥왕이 보낸 대내마(大奈麻) 계고(階古)와 법지(法知), 대사(大舍) 만덕(萬德) 세 사람에게 각각 음악적 재능을 전수하였다. 이때 우륵은 세 사람의 제자를 받아 각각의 재주를 따져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 세 제자는 우륵이 만든 12곡을 가리켜 “번거롭기만 하고 바르지 못하다.”라며 5곡으로 줄여 버렸다. 이를 전해들은 우륵은 처음에는 매우 화를 냈지만 곧이어 제자들이 줄인 5곡을 모두 듣고 난 뒤 눈물을 흘리며 “즐거우면서 음란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가히 바르다 하겠다.”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른 뒤 진흥왕이 가야금 곡을 궁중음악으로 선포하고 〈하림조(河臨調)〉, 〈눈죽조(嫩竹調)〉의 2조가 생겨 가야금 곡 185곡이 남게 되었다.
우륵이 집대성한 가야 음악은 신라의 대악(아악, 궁정음악)으로 발전했다. 신라에는 전통 음악인 향악이 있었지만 가야의 음악이 훨씬 더 선진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한편으로는 진흥왕이 멸망한 나라의 음악이라며 귀족들이 반대하는 가야의 음악을 대악으로 수용한 것은 왕권 강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삼국 통일을 완수할 때까지 민심을 하나로 모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통일 후 신라가 안정된 다음부터는 더 이상 가야 음악과 신라 음악을 구분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 옛날 우륵이 전한 가야의 음악이 이미 신라의 음악 안에 완전히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 토기에 보이는 가야금 연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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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이 가야에서 지었던 12곡은 〈상가라도(上加羅都)〉, 〈하가라도(下加羅都)〉, 〈보기(寶伎)〉, 〈달기(達己)〉, 〈사물(思勿)〉, 〈물혜(勿慧)〉, 〈상기물(上奇物)〉, 〈하기물(下奇物)〉, 〈사자기(師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사(爾赦)〉이다. 이 가운데 〈보기〉, 〈사자기〉, 〈이사〉의 3곡을 제외한 나머지 9곡은 당시 군현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충주의 금휴포와 탄금대의 이름은 모두 우륵이 지은 12곡 가운데에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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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출처
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펼쳐보기
우륵 영정
실제 모습이 아니며
추정해서 그린 것 뿐입니다.
요약 신라 진흥왕 때의 악사.
가야금의 명인으로 6세기 중엽에 활동했다. 가야국(加耶國)의 가실왕(嘉實王)이 당나라 악기를 보고 가야금(加耶琴)을 만든 후,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기 다르니 성음을 어찌 일정하게 할 것인가 하며 성열현(省熱縣) 사람인 그에게 12곡을 짓게 했다고 한다. 그후 가야국이 어지러워져 우륵이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 진흥왕에게 투항하니, 왕이 받아들여 국원(國原 : 지금의 충주)에 편히 거처하게 하고 대나마 법지(法知)·계고(階古)와 대사 만덕(萬德)을 보내 전수하게 했다.
세 사람이 11곡을 전해받고 서로 말하길 "이것은 번다(繁多)하고 음란하여, 우아하고 바른 것이라고 할 수 없다"며 그것을 요약하여 5곡을 만들었다. 우륵이 처음에는 화를 내다가, 그 5곡의 음조를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기를 "즐겁고도 방탕하지 않으며, 애절하면서도 슬프지 않으니 바르다고 할 만하다. 왕의 앞에서 연주하라"고 했다.
우륵이 지은 12곡은 〈하가라도 下加羅都〉·〈상가라도 上加羅都〉·〈보기 寶伎〉·〈달기 達己〉·〈사물 思勿〉·〈물혜 勿慧〉·〈하기물 下奇物〉·〈사자기 師子伎〉·〈거열 居烈〉·〈사팔혜 沙八兮〉·〈이사 爾赦〉·〈상기물 上奇物〉 등이었는데, 대부분의 곡명이 그때의 군현명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그 지방 민요의 성격을 가진 듯하다.
요약 삼국시대 신라의 제24대 진흥왕 때 「하가라도」, 「상가라도」, 「보기」 등을 지은 가야금명인.
내용
생몰연대 미상. 가야국 성열현(省熱縣)에서 살았다고 한다. 우륵이 태어난 가야국이 어느 가야인지, 또한 가실왕은 가야국 중 어느 나라 몇 대 임금인지 확실하지 않다.
한때 가실왕이 우륵에게 이르기를, “모든 나라의 방언도 각각 서로 다른데, 성음(聲音)이 어찌 하나일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가얏고를 위해 악곡을 지으라고 하여 12곡을 지었다고 한다.
그 뒤 가야국이 어지러워지자 가얏고를 들고 제자 이문(泥文)과 함께 신라 진흥왕에게 투항하였는데, 왕은 그를 맞아 국원(國原 : 지금의 충주)에 안치시키고 계고(階古)·만덕(萬德)·법지(法知) 등을 보내어 그의 업(業)을 전습하게 하였다.
우륵은 이 세 사람의 재주를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얏고, 법지에게는 노래, 만덕에게는 춤을 각각 가르쳤다. 그 후 이들은 우륵이 만든 12곡을 듣고는 “이 곡들은 번잡하고 음란하여 우아하고 바르지 못하다.” 고 하며 5곡으로 줄여 버렸다. 우륵이 이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매우 노하였으나 새로 줄인 5곡을 모두 듣고 난 뒤에는 눈물을 흘리며, “즐거우면서 음란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가히 아정하다(아담하고 곧바르다) 하겠다.”라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우륵이 지은 12곡명은 「하가라도(下加羅都)」·「상가라도(上加羅都)」·「보기(寶伎)」·「달기(達己)」·「사물(思勿)」·「물혜(勿慧)」·「하기물(下奇物)」·「사자기(獅子伎)」·「거열(居烈)」·「사팔혜(沙八兮)」·「이사(爾赦)」·「상기물(上奇物)」이다. 이 중에서 「보기」·「사자기」·「이사」를 제외한 나머지 9곡은 당시의 군현명과 같아서 해당 지방 민요의 성격을 띤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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