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체의 흐름과 변화 (은.주.진의 전서) 옥석문자, 죽간과 목간, 회서와 백서, 인장과 봉니, 진의 서가

2019. 11. 26. 00:36글씨쓰기



서체의 흐름과 변화 (은.주.진의 전서) 옥석문자, 죽간과 목간, 회서와 백서, 인장과 봉니, 진의 서가|서예통론
하전|조회 92|추천 0|2015.01.02. 21:57http://cafe.daum.net/bbhy0003/S1GN/15 

 

 

 

 

 

P169-174

 

 

玉石文字(옥석문자)

 

 

옥이나 石片(석편)에 실린 문자이다.

 

문자의 내용이 盟誓詞(맹서사)가 대부분이었으므로

 

<侯馬盟書(후마맹서)>라고 칭한다.

 

필세가 勁爽(경상). 流暢(유창)하고 변화가 다양하다.

 


 

勁爽(경상); 강하고 곧으며 시원스럽다.


流暢(유창); 거침없이 미끈함



 

 

竹簡(죽간)과 木簡(목간)

 

 

중국의 전통문화상에 있어서

 

그 簡牘(간독) 제도는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산물이다.

 

중국문자의 直行書寫(직행서사)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淵源(연원)이다.

 

종이와 인쇄술 발명 이후의 서적의 단위나 術語(술어)

 

또는 版面上(판면상)의 소위 ‘行格(행격)’의 형식도

 

모두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최초로 서사 재료로 쓰인 것은 죽간이며

 

木牘(목독)은 그 후에 죽간의 대용품으로

 

漢(한) .晉(진)에 많이 사용되었다.

 

자체는 전국시대 초의 銅器(동기)의 자체와 비슷하며

 

落筆(낙필)이 圓重(원중)하고 尾梢(미초)는

 

輕細(경세)한 소위 <蝌蚪文(과두문)>이다.

 

 

 

木簡(목간) ; 종이가 없던 때에 문서(文書)나 편지(便紙)로 쓰인, 글을 적은 나뭇조각

 

淵源(연원) ; 사물의 근원

 

術語(술어) ; 學術上(학술상)에 전용하는 말. 學術語(학술어).

 

落筆(낙필) ; 붓을 들어 쓰기 시작함

 

圓重(원중) ; 둥글고 무겁다

 

尾梢(미초) ; 글씨 획의 끝부분

 

輕細(경세) ; 가볍고도 가늘다

 

蝌蚪文(과두문) ; 글자의 획이 올챙이 같으므로 이름

 

 

 

 

p171

 

繪書(회서)와 帛書(백서)

 

 

 

東周楚繪書(동주초회서)

 

 

長沙(장사) 출토의 先秦(선진) 문물 중

 

현존하는 縑帛書畵(겸백서화)는 모두 3건이다.

 

하나에는 문자가 실려 있고,

 

나머지 두 개에는 精美(정미)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겸백(縑帛) 위에 모필로 寫繪(사회)한 것 가운데 최고의 것이다.

 

1934년 장사의 楚墓(초묘)에서 발견된

 

한 개의 帛書(백서)는 통칭<楚繪書(초회서)>라 하는 것이다.

 

黑墨(흑묵)을 사용하여 문자를 기록하였다.

 

자체는 납작하며 주의 금문과 같은 형태이며

 

전국의 簡書(간서)와 비슷하다.

 

4각 둘레에 畸形(기형)의 圖象(도상)을 彩繪(채회)하였다.

 

 

 

畸形(기형) ; 보통과 다른 모양

 

겸백(縑帛) ; 비단

 

 

 


 

백서 老子甲本(노자갑본)과 戰國策(전국책)

 

 

 

노자갑본은 1973년에 장사 馬王堆(마왕퇴)의

 

3호 묘에서 출토되었다.

 

침수로 비단이 파손되어 글자가 殘缺(잔결)되었다.

 

전문은 463행으로 13000여자나 된다.

 

서체는 小篆(소전)이며 竪筆(수필)에는 가벼우며

 

뾰족한 것이 특색이다.

 

자못 隸書(예서)에 가깝고 자체가 길며 혹 짧은 것도 있고

 

大小(대소)도 같지 않다.

 

장법은 直行(직행)으로 하고 橫列(횡렬)은 맞히지 않았다.

 

 

 

殘缺(잔결) ;穩全(온전)한 모양이 아니고 깎이거나 덜림

 

穩全(온전) ; 본바탕대로 고스란히 있음

 

竪筆(수필) ; 곧은 획

 

 



 老子甲本(노자갑본)





老子乙本(노자을본)




 

 

p172


印章(인장)과 封泥(봉니)

 

 

인장의 재료는 金屬(금속), 玉(옥),

 

象牙(상아), 獸角(수각), 陶泥(도니)등 종류가 많다.

 

印朱(인주)의 사용은 5. 6세기부터 시작되었다.

 

早期(조기)의 印文(인문)은 모두 먹색이다.

 

敦煌(돈황)에서 발견된 1세기경의 絹帛(견백)에

 

墨色(묵색)의 인문이 있는데

 

그 문자가 선명하지는 않다.

 

인문은 겸백이나 종이 위에 찍은 것 외에도

 

공문이나 私函(사함)의 封泥(봉니)에 사용하였다.

 

簡牘(간독)과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은 空白簡(공백간)을

 

主文(주문)의 앞뒤로 덮고 끈으로 묶은 다음

 

그 묶은 매듭에 진흙을 붙이고 도장을 찍는 것이다.

 

이것은 비밀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信(신, 믿음)의 뜻이었다.

 

작품에 책임과 믿음의 상징으로 도장을 찍는 것은

 

이에서 비롯되었다.

 

인문은 漢代(한대)의 것이 제일 많고

 

봉니의 사용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私函(사함) ; 우편물의 집배 사무를 보는 우체국에

 

                 국장의 승인을 받고 비치하는 가입자 전용의 우편함

 

 封泥(봉니) ; 옛날 중국에서 간책으로 된 문서 따위를

                  끈으로 묶고 봉할 때 쓰던 아교질의 진흙 덩어리

 

 

 

 

 

秦(진)의 書家(서가)

 

 

 

李斯(이사 ?-208)의

 

자는 通古(통고)이며 楚人(초인)으로 荀子(순자)의 제자이며

 

始皇(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승상으로 삼았다.

 

趙高(조고). 胡母敬(호모경) 등과 같이

 

당시의 통용되는 秦文(진문)을 정리하여

 

創詰篇七章(창힐편칠장)을 지었다.

 

또 대전을 簡化(간화)하여 소전을 만들었다.

 

진의 석각은 斯(사)의 글씨라고 전한다.

 

程邈(정막)의 자는 元岑(원잠)이고

 

下杜人(하두인)이며 생졸은 미상이며 예서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 <<서예통론>> 선주선저 원광대학교출판국, 인터넷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