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체의 흐름과 변화 ( 章草(장초)

2019. 11. 26. 00:38글씨쓰기



서체의 흐름과 변화 ( 章草(장초) |서예통론
하전|조회 51|추천 1|2015.01.15. 15:05http://cafe.daum.net/bbhy0003/S1GN/17 

 

 

 

 

p183

 

장초(章草)

 

장초는 필획이 예(隸)이고 결체는 초서에 근접한 것으로서

 

초서의 남상(濫觴)으로 볼 수 있다.

 

BC 1세기에 유행되었으며

 

예서를 빠르게 쓰기 위해서 쓰여 졌다.

 

章자는 사유(史游)가 지은 급취편(急就篇)의 서체에서

 

이름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특징은 대체로 필세가 약동하며 연관(連貫)되어 있고

 

의취(意趣)를 내함한 수일(秀逸)한 풍격이다.

 

장초는 그 이후의 초서.행서의 발달에 직.간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친 서체이며

 

서예 발전을 한 차원 높여준 계기가 되었다.

 

 

 

남상(濫觴) ; 술잔이 넘칠 정도의 작은 물(사물이나 일의 시초)

 

연관(連貫) ; 활을 쏠 때에 잇달아 과녁을 맞힘

 

의취(意趣) ; (=志趣) 의지(意志)와 취향(趣向)

 

수일(秀逸) ; 젊잖아 무게가 있고 우수함

 



 

p184

 

 

한 대(漢代)의 서가(書家)

 

 

 

 

사유(史游)

 

 

생졸은 미상이며 서한 원제(元帝 B.C 48-33) 때 사람이다.

 

당시 통용 문자에 운(韻)을 붙인 자서(字書)인

 

급취편(急就篇)을 지었다.

 

 

 

 

 

왕차중 (王次中)

 

생졸은 미상 상곡인(上谷人)이다.

 

양흔(羊欣)의 <<채고래능서인명(采古來能書人名)>>,

 

장회관의 <<서단>>에 팔분을

 

왕차중이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지(張芝. ?-193)

 

백영(伯英)이며 원래 돈황인(敦煌人)인데

 

후에 홍농(弘農)으로 이사 하였다.

 

초서를 잘 써 초서의 독보(獨步)로 불리운다.

 

지금의 초서를 개창(開創)한 인물로 여긴다.

 

 

 

 

채옹(蔡邕 132-192)

 

자는 백개(伯喈)이고 건녕(建寧) 때

 

중랑(中郞)에 배(拜)하여 ‘중랑’이라 부른다.

 

홍도문(鴻都門)에서 공인(工人)이 백토(白土)를

 

벽을 바르는 것을 보고 착안하여 

 

 <비백서(飛白書)>를 창시하였다고 전한다.

 

 

배(拜) ; 벼슬을 받다

비백서(飛白書) ; 붓 자국에 흰 잔 줄이 나타나게 하는 것으로,

                         채옹이 미장이가 회칠 솔로 글자를 쓰는 것을 보고

                         깨우침을 얻어서, 응용하여 비백서를 창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참고 도판



복(福)




수(壽)




 

p184

 

 

서법예술 인식의 맹아(萌芽)

 

글씨의 예술성과 실용성을 논함에 있어서

 

한 대 이전의 글씨는, 기사(記事)를 위한

 

실용성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때까지 서예에 대한 기술(記述)이 거의 없는 것과

 

서적에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 큰 이유이다.

 

기록상에 보면 한 대에 와서

 

서법예술의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사례들이 나타난다.

 

<<한서(漢書)>>에 원제(元帝, BC 48-33)가

 

사서(史書)를 능히 하였고 비파 타고 퉁소 불고

 

 작곡하고 노래하는 것들을 기술하고 있다.

 

사서는 곧 예서로써 이에 능했다는 것은

 

정황으로 보아 자오(自娛)하였다는 것을 가히 엿볼 수 있다.

 

 또 원제와 성제(成帝) 때에 곡영(谷永)이란 사람이

 

능서(能書)하여 그에게 편지를 받으면

 

누구나 귀중하게 보존하였다는 기록도 접할 수 있다.

 

후한에 더욱 진보하여 영제(靈帝 168-189) 때에

 

사의관(師宜官)은 대.소자를 다 잘 썼는데

 

주막의 벽에 글씨를 써 붙이면

 

관상자(觀賞者)들이 와서 술과 바꾸었다 하며

 

그의 제자인 양곡(梁鵠)의

 

글씨는 이후 조조(曹操)가

 

늘 장중(帳中)에 걸어놓고 감상하였다고 한다.

 

이렇듯이 한 대에는 서법을 예술로 여기는 인식이 싹텄고

 

위진을 거쳐 특히 남조에 와서는

 

예도(藝道)나 품격으로 보는 유풍(流風)이 보편화되었다.

 

 

참고문헌 ; <<서예통론>> 선주선저 원광대학교출판국, 인터넷 사전, 도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