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와 밀접한 학문과 예술 전각(篆刻)

2019. 11. 26. 01:44글씨쓰기



p342-347 서예와 밀접한 학문과 예술 전각(篆刻)|서예통론

하전 | 조회 160 |추천 0 |2016.02.15. 18:48 http://cafe.daum.net/bbhy0003/S1GN/62 





p342-347

전각(篆刻)


전각도 글씨와 마찬가지로 매우 격조 높은 예술이다.

앞에서 시. 서. 화 삼절(三絶)에 전각까지 더해

사절(四絶)이 되면 지극(至極)이라고 할 수 있다.

전각이란 말은 서한의 양웅(揚雄)이

『법언(法言)』에서 처음 표기했다고 한다.

한 이전엔 도장을

도상문자(圖象文字). 주전(籒篆). 소전(小篆)

등의 글자로 새겼다.

특히 진(秦)의 모인(摹印)과 신망(新莽)의 무전(繆篆)이

전각에 사용된 이래 전각이란 단어는 매우

전통적인 표현이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에 와서 비록

예. 해. 행. 한글. 인물. 조수(鳥獸)를 새긴다 할지라도

통틀어 전각이라고 하고 있다.

전각은 도장(圖章). 인장(印章)의 학술적 표현으로

문자 그대로 인면(印面)에 전서(篆書)를 새기는 것이다.

그러나 흔한 도장포에서 새기는 실용의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각이란 말 보다는 낙관(落款)이란

표현이 더 많이 통용되고 있다.

낙관이란 말은 낙인(落印)과 관지(款識)의

앞 글자를 딴 준말이다.

시년(時年). 시제(詩題). 아호. 성명 등을 쓰는 것을

관지(款識)라 하고,

거기다 도장을 찍는 것을

낙인(落印)이라고 하는 뜻을 비추어보면

전각을 낙관이라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에서도 통용되고 있다.

신조어(新造語)로서 무언가 다르게

표현하려는 뜻이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올바르게 쓰여 지는 단어는 아니다.



양웅(揚雄, BC53-AD18) 자는 자운(子雲).

              중국 전한의 학자. 문인.

              성제(成帝) 때에 궁정 문인이 되어

              성제의 사치를 풍자한 문장을 남겼다.

              후에 왕망(王莽) 정권을 찬미하는 글을 써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도상문자(圖象文字) ; 그림문자

주전(籒篆) ; 대전(大篆)

소전(小篆) ;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BC221년) 후에

                  이사에게 대전을 기반으로 하여

                  간략하게 만들게 한 전서체


진(秦, BC221-BC206) ;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


모인(摹印) ; 본떠서 그린 도장?


신망(新莽, AD8-AD23) ; 王莽(왕망)이 세운 새 왕조


무전(繆篆) ; 한(漢)나라의 인감도장에 사용하던 전서.

                  육체서(六體書)의 하나. 팔체(八體)의 모인(摹印)과

                  같이도장(圖章)의 크고 작음과 글자의 많고 적음을 맞추어

                  새기는 글자체

시년(時年) ; 당시의 시간과 연도 ?

시제(詩題) ; 시의 제목 ?






p343-347

전각의 역사


최조(最早)의 전각은 은대의 것이다.

삼과(三顆)의 동인(銅印)으로서

각기 문양(文樣)이 다르며

판독도 불가하고 용도 또한 불확실하다.

단지 무언가를 증명하거나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이후 주와 전국시대에도 아직은 정립되지 않았지만

인장제도가 있었으며, 당시의 도장을 고새라고 한다.

주대말기의 청동인과 옥인(玉印)이

낙양(洛陽)에서 출토되었다.

그 인면(印面)의 문자는 새긴 것도 있고

모주(模鑄)한 것도 있다.

도장의 명칭과 재료 등이 제도화 된 것은 진시황부터이다.

즉 천자나 황제의 인(印)을 새(璽)라 하였고,

옥을 사용하였으며, 관직에서 쓰는 것을 관인(官人),

태수(太守)나 장군(將軍)의 것은 장(章)

개인 것은 사인(私印)이라고 하였다.

그 당시 전각에 쓰인 서체는 모인(摹印)이었다.

한에 이르러 더욱 전형화 되었고,

자체(字體)는 무전(繆篆)이라고 하는 인전(印篆)을

개발하여 사용하였다.

당시까지는 전각이 거의 소위

백문(白文)이라고 하는 음각(陰刻)이었으나 전각의 변화는

봉니(封泥)라고 하는 특수한 형태로부터

전각의 쓰임새나 주문(朱文)인

양각(陽刻)으로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봉니(封泥)는 보관하거나 남에게 보내는 공문이나

편지를 끈으로 묶고 그 매듭을 봉한

특수한 점토로 만든 진흙 덩어리를 말한다.

여기에 도장을 찍음으로써 비밀의 보장을 증명하였다.

예를 들면, 봉니(封泥)가 훼손되었다거나

엉뚱한 도장이 찍히면 이를 비밀이 누설되었거나

거짓 문서로 여긴 것이다.

이러한 봉니의 쓰임은 그 이후 공문(公文)이나

작품에 책임과 신뢰의 뜻으로

도장을 찍게 된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인주의 사용은 5-6세기에서 사용되었다.

그 이전의 것은 모두 흑색이다.

전각은 수대(隋代)에 와서

사인(私印)과 봉니가 폐지되었다.

당대(唐代)에 와서 새(璽)는 보(寶)로 고쳐졌다.

송대에 와서는 소위 ‘구첩전(九疊篆)’을 사용하여

가로획은 몇 번이고 구부려 인면(印面)을

꽉 채우는 전통이 생겼다.

특히 북송의 휘종(徽宗)은 진한의 고인(古印)을 수집하여

『선화인보(宣和印譜)』를 만들었다.

이로써 전각이 실용성에서 심미의 대상으로

발돋음 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원대에 와서 화석(花乳石)에 각하게 되어

전각예술의 새 여명(黎明)을 밝히는 계기가 되었다.

전각이 기능공에 의해서 새기던 기술에서

일문(一門)의 예술로 발돋움 하게 된 것은

명대의 문팽(文彭, 1498-1573)을 기점으로 하여

문인묵객(文人墨客)들이 직접 새기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문팽 이후에 하진(何震, /-1626)과

청의 정경(정경, 1695-1765). 장인(蔣仁, 1743-1795).

황이. 등석여. 진홍수. 조지침. 전송.

오희재. 조지겸. 오창석. 제백석. 등

많은 명가 들이 맥 이루며 독특한 풍격을 전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중국은 전각가가 수천을 헤아린다.

다소 작풍(作風)이 획일적인 양상을 띠고 있는

감이 있지만 도미(渡美)나 획의 맛에서

한 수준을 이루고 있다.

일본도 이백에 가까운 전각가가 활동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추사(秋史)를 필두로 해서

근세의 오세창(吳世昌), 현대의 이기우(李基雨).

김응현(金應顯)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얼마 전부터 전각은 공모전이나 백일장 등에서

서예의 한 분야로 사군자와 더불어 다루어지고 있으며,

전각학회(篆刻學會)도 활동하고 있다.

원광대학교 등의 서예과에 설강(設講). 연구되고 있다.

현 우리나라의 전각가는 근 100인에 달한다.

약 20년 전만 해도 전각이란 단어를 아는 이가

매우 드물 정도였다. 당시 전문인이라고 해봐야

10여인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지금의 발전 상황을 견주어 볼 때에

앞으로 매우 전망 있는 분야로 여겨진다.



최조(最早) ; 가장 일찍 ?

삼과(三顆) ; 3개. 顆는 작고 둥근 물건을 세는 단위 또는 양사 ?

동인(銅印) ; 구리로 만든 도장

문양(文樣) ; 무늬

옥인(玉印) ; 옥으로 만든 도장 ?


낙양(洛陽) ; 중국 허난성의 직할시로, 한. 위 및 수. 당시대의

                 국도(國都)였던 낙양성 유적이 있다.

                 선사시대부터 문화가 발달되어 앙소문화(仰韶文化),

                 용산(龍山)문화. 은(상)시대의 유적이 있다.


인면(印面) ; 인장(印章)의 글자를 새긴 면(面)

모주(模鑄) ; 주물 틀을 이용하여 만듬 ?

모인(摹印) ; 본떠서 그린 도장 ?

무전(繆篆) ; 육체서(六體書)의 하나. 팔체(八體)의 모인(摹印)과

                   같이, 도장(圖章)의 크고 작음과 글자의 많고 적음을 맞추어

                   새기는 글자체

백문(白文) ; 음각(陰刻)으로 도장을 파서 찍으면 글자의 색이

                   흰색으로 나오는 것 ?

봉니(封泥) ; 보관하거나 남에게 보내는 공문이나

                   편지를 끈으로 묶고 그 매듭을 봉한

                   특수한 점토로 만든 진흙 덩어리

주문(朱文) ; 백문과 반대로 양각(陽刻)으로 글자를 새겨

                   인주를 묻혀 찍으면 글자의 색이 붉게 나오는 것 ?

여명(黎明) ; 희미하게 날이 밝아 오는 빛. 또는 그런 무렵.

                   희망의 빛

도미(渡美) ; 아름다움을 가함

설강(設講) ; 강좌를 설치함







p347-349

전각과 서예


전각은 전서를 새기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전법(篆法)을 익혀야 된다.

아무리 전각 도를 쓰는 기능이 뛰어났다고 해도

서예의 깊은 맛을 더하지 못하면 하잘 것 없는 도장이 된다.

전각의 인면(印面)은 매우 작은 공간이다.

그렇지만 매우 풍격 있는 포백(布白)의

미를 창출해 낼 수 있다.

따라서 치인(治印)을 많이 해보면

서예작품의 포치(布置)에 큰 도움을 준다.

전각의 용구와 재료에는

인재(印材)와 인도(印刀). 주묵(朱墨).

사포. 세필 등이 꼭 필요하다.

인재는 화류석. 상아. 나무 등이 흔히 쓰인다.

이밖에도 도니(陶泥)나 옥(玉) 같은 것도 활용된다.

전각은 인면에 주묵(朱墨)을 칠하여

말린 후에 인문(印文)을 뒤집어 써놓고 주문이나

백문으로 새긴다.

대체로 500방 정도를 새겨보면

전각의 맛을 조금 느껴 볼 수 있다.

통상적으로 인면은 3cmx3cm 이내가 보통이며,

필요에 따라 그 이상의 크기도 있기는 하지만

아무리 커도 10cmx10cm를 넘지는 않는다.

전각의 종류에는 성명인(姓名印). 아호인(雅號印).

한장(閑章). 수장인(收藏印). 장서인(藏書印)

그밖에 관인(官印) 등이 있다.

전각도 마치 서예에서 임서를 통하여

창작의 경지에 이르는 것처럼 모각을 많이 해야 된다.

일반적으로 모각의 범본은 한인(漢印)으로 삼고

있으며, 명. 청대의 명품들도 모(摹)한다.

전각은 예술부문 중에서 작품의 크기나 면적이

가장 작은 것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전각가들은 그 작은 면적을

‘소천지(小天地)’라고 여긴다.

그 소천지에 생생한 도미(刀味)와 격 있는 포자(布字)

그리고 신운(神韻)까지 살아 숨쉰다.

작가의 개성이 표로 되어 작가 저마다의

서로 다른 독특한 풍격을 이룬다.

아무리 작은 면적이지만

그 인면에 품격을 담는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며, 아무리 채우려 해도

스스로 부족함이 있다는 것은

구안자는 알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소천지’라고 하는 것이다.

인면뿐만이 아니라 인재(印材)의 측면에 관지(款識)를

새기는 것도 일격(一格)이 있다.

이것을 측관(側款) 또는 변관(邊款)이라고 하며,

보통은 언제 누가 새겼다는 것을 밝힌다.

뿐만 아니라 인면을 다루듯이

네 측면에 각체를 음, 양각으로 새기기도 하며

그림까지 새겨 놓는다.

측관(側款)도 장법(章法). 도미(刀味). 풍운(風韻)을 표현한다.

글씨는 전각을 찍음으로서 완전한 작품이 된다.

인장(印章)을 찍는 일은

자기가 쓴 글씨라는 것을 증명하는 개념 이외에

남의 완상물(玩賞物)이 된다는 부담을 안고 행해진다.

또는 그 작품에 대한 작가로서의

책임을 확정짓는 순간이다.

전각을 찍는 것은

글씨 작품이나 전각작품을 완성하는 것에 비하여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낙인(落印)을 적당한 자리에 할 수 있는 경지는

꽤 심도 있는 수련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아무리 잘된 작품이라도

도장을 찍을 최선의 자리를 찾지 못했다든지,

전각의 크기가 어울리지 않는다든지,

또는 인니(印泥)의 품질이 걸맞지 않는다든지

하면 아무 소용없다.

글씨의 흑백과 붉은 인니의 대비는 매우 강열하여

인상적이라 할 수 있으며,

전각을 누르는 일은 화룡점정(畵龍點睛)에 비유한다.

전각도 조그만 학문이며 매우 현묘(玄妙)한 예술로서

서학. 금석학. 문자학 등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질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일찍이 조지겸은

“고인(古印)에는 필치와 묵미(墨味)가 있었는데

지금 사람의 전각에는 오직 칼과 인재(印材)만 있다...”

라고 설파하였다.

전각은 포국(布局). 도미(刀味)도 중요하지만

적각의 획 속에 붓맛과 묵취가 깃들어야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선비의 정신마저 배어들어야

고차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역대의 뛰어난 전각가들은

글씨는 물론 그림 시문에도 매우 뛰어났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학문적. 예술적 뒷받침이 없는 전각은

아무리 아름답게 장식했다고 해도 한갓 장인의 공예품과 같아서

그 격조(格調)는 실로 운니지차(雲泥之差)인 것이다.


인면(印面) ; 인장(印章)의 글자를 새긴 면(面)

포백(布白) ; 글자의 전체적인 배치를 가리키며

                  글자 간의 관계 행간 관계 등의 처리를 포함하는데

                  장법이라고도 하며 포치와도 비슷한 뜻이다

치인(治印) ; 인장을 조각하다. 도장을 파다

포치(布置) ; 배치하다

인재(印材) ; 도장을 만드는 재료

인도(印刀) ; 도장을 파는 칼

주묵(朱墨) ; 붉은 색의 먹

도니(陶泥) ; 도자기 원료 중 하나로

                   여러 가지 다양한 흙 화학 물질을 함유하고

                   풍부한 물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인문(印文) ; 도장에 새겨진 글자 ?



참고문헌 ; <<서예통론>> 선주선저, 원광대학교 출판국. 바이뚜. 인터넷 사전 등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