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와 밀접한 학문과 예술 -비학과 첩학(碑學과 帖學)

2019. 11. 26. 01:42글씨쓰기



p329-335 서예와 밀접한 학문과 예술 -비학과 첩학(碑學과 帖學)|서예통론

하전 | 조회 90 |추천 0 |2016.01.04. 19:29 http://cafe.daum.net/bbhy0003/S1GN/60 

 


p329-335

비학과 첩학

서예의 연구. 완상(玩賞). 학서(學書)에는

늘 비와 첩을 논하게 된다.

그 이유는 비. 첩을 임모(臨摹)하지 않고서는

결코 서예의 길에

올바로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예에 있어서 비첩연구의 비중은

실로 막대하다고 아니 할 수 없다.

비의 형태는 후한에 와서 생겼다.

그 이전에 석고(石鼓)라든지

진시황 삼석(三石)이 있기는 했지만

비라고 칭하지 않았다.

비의 작용과 형식을 섭창치(葉昌熾)는

사단(四端)으로

분류하여 설명하였다.

첫째는 술덕(述德). 숭성(崇聖). 가현(嘉賢). 정효(旌孝)이고

둘째는 명공(銘功),

셋째는 기사(記事),

넷째는 찬언(纂言)이다.

총괄적으로 말하면 공적과 공훈

또는 이에 유관한 사실적인 언사(言詞)를

견고한 석재에 새김으로써

후세에 오래도록 남기려는 것이었다.

이렇듯이 오래도록 남기고자 했던 비문은

글씨를 또한 근엄(謹嚴). 근칙(謹飭)하게

쓰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아름다움을 배가(倍加) 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비각(碑刻)은 서법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몫을 한 중요한 고물(古物)인 셈이다.

첩은 대체로 남조 때 유행한 필치들이나

백서(帛書) 같은 것 등을 임모한 글씨를

돌에 새겨 놓은 것을 칭한다.

따라서 진적이 아닌 모각이나 번각(飜刻)의 산물이다.

그러나 묵적(墨蹟)도 법첩(法帖)이라고

표현하는 관점에서 보면

첩은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첩이 비록 모각이나 번각이었지만,

그래도 돌에 새겨 놓았던 이유는

비단이나 종이가 불에 타거나 물에 젖는 등

그 유실이 쉽다고 판단한 까닭에서였다.

그 취지는 오직 내용의 전달이 아닌

서법의 존귀함을 전하려고 했을 뿐이다.

사실상 진한의 비갈(碑碣)은 물론이고 위진 남북조,

그리고 수당(隋唐)에 이르기까지 명적(名蹟)이

석각에 의해서 보존되었기 때문에 그나마도

그 면모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고 진적만을 얻어 보는 형국이 되었다면

그 숫자나 범위는 매우 희소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비와 첩의 새김이 그 목적은 매우 다르지만

서법을 보존. 계승한 공로는 같다.

그런데 청대 중기 이후의 학자들은 대부분 비판(碑版)을

중시하고 법첩을 폄하하게 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인

완원(阮元)은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과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을

통하여 남북의 서풍이 같지 않음과

남북서파의 계보를 밝혔다.

여기에서 북비와 북파(北派)는

전서와 예서의 유의(遺意)가 있지만

남첩. 남파(南派)는 연미(姸美) 일변도였을 뿐이라고 했다.

당 태종이후 남조의 글씨를 특히 귀히 여겼고

특히 왕희지를 너무 선호하였던 그 여세로

북방의 비판(碑版)이 소홀히 취급되고

첩(帖)을 중히 여김으로써

마침내 서첩이 모륵(摹勒)과 번각이 만연함에 따라

실진(失眞)하였음을 꼬집었다.

결론은 존비사상(尊碑思想)의 강력한 주장이었다.

그 이후 포세신도 북비를 제창하여

그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다.

특히 강유위 같은 사람은

존비(尊碑). 억첩(抑帖) 뿐만 아니라

당비(唐碑)까지도 배우지 말 것이며,

학서는 반드시 북비로 착수해야 된다고

주장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서체나 서풍은

유파(流派)가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고금으로 변위(變爲)하는 것이므로

상호간 장단이 있는 것이다.

단지 천편일률을 귀히 여기지 않을 뿐이다.

따라서 지금은 그 서풍과 서파가 다르다고 한

완원의 주장을 다소 수긍하는 추세지만

남북을 획분(劃分)하고 우열을 가린 것은

오류라 보고 있다.




완상(玩賞) ; 즐겨 구경함

학서(學書) ; 붓글씨를 배움

임모(臨摹) ; 모사하다. 본뜨다

석고(石鼓) ; 북경에 있는 진(秦)의 문물.

                  북처럼 생긴 열 개의 돌판 위에

                  사언시(四言詩)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음

진시황 삼석(三石) ; 세 개의 돌에 새긴 명문이 있긴 하나

                             비석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닌 듯?


섭창치(葉昌熾); (1849-1917) 금석 학자 문헌학자 수장가

                         절강 소흥 사람


사단(四端) ; 첫째는 술덕(述德). 숭성(崇聖). 가현(嘉賢). 정효(旌孝)

                   둘째는 명공(銘功),

                   셋째는 기사(記事),

                   넷째는 찬언(纂言)

술덕(述德) ; 덕을 베풀다 ?

숭성(崇聖) ; 성현을 숭상하다 ?

가현(嘉賢) ; 현명함을 칭찬함 ?

정효(旌孝) ; 효성을 세상에 널리 알려 칭찬함?

명공(銘功) ; 공적을 새기다

기사(記事) ;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다

찬언(纂言) ; 계승할 만한 말

언사(言詞) ; 말이나 문장

근엄(謹嚴) ; 점잖고 엄격하다

근칙(謹飭) ; 신중하고 주도면밀하다

배가(倍加) ; 더더욱

비각(碑刻) ; 비석에 새겨진 글자나 그림

번각(飜刻) ; 한 번 새긴 책판을 본보기로 삼아 그 내용을 다시 새김

비판(碑版) ; 비석의 면


완원(阮元) ; 중국 청나라의 학자. 정치가 서예가 문학자.

                   조정의 요직을 역임


북비(北碑) ; 남북조시기에 문자를 돌에 새긴 것을 이르는 말

                  위비(魏碑)라고도 함 ?

유의(遺意) ; 그러한 풍. 전서와 예서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는 뜻 ?

모륵(摹勒) ; 돌에 새긴 것을 모방함

실진(失眞) ; 변조. 일그러짐

존비사상(尊碑思想) ; 비를 귀하게 여기는 사상

억첩(抑帖) ; 책으로 된 것을 귀히 여기지 않음 ?

당비(唐碑) ; 당나라 때의 비 ?






p332-333

비학(碑學)

비학은 비라고 하는 석각문자와

비의 형식과 차이가 있는 이른 바 갈(碣)이라고

하는 석고(石鼓). 각석(刻石). 마애(磨崖) 등의

연대. 체제. 형식. 원류. 문자의 체변(體變),

탁본의 진위 등을 고증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비학(碑學)은 금석학. 문자학. 서론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비학은 앞의 서체의 흐름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청나라 중기에 발흥되었다.

비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완원. 포세신. 강유위이다.

이러한 조류가 형성된 이유는

외재요소(外在要素)와 내재요소(內在要素)로 나눌 수 있다.

외재요소는 크게 정치 사회적인 이유와

학술 문화적인 이유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우선 전자는 청의 초기 제왕들의 숭첩(崇帖)에 대한

반작용, 관각체(館閣體)에 대한 염증,

문자옥(文字獄)의 회피 등을 들 수 있다.

후자는 강희. 옹정. 건륭의 삼조(三朝)에 활약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소위 ‘건가학파(乾嘉學派)’

[박학(樸學)이라고 칭하며 청대 한학으로도 일컬어짐]의 대두,

금석고거(金石考據)의 성행, 법첩실진(法帖失眞)에

대한 각성 등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완원은 ‘남북서파론’과 ‘북비남첩론’을 기치로 하였고,

포세신은 『예주상즙』으로,

강유위는 『광예주쌍즙』으로

그 사상을 구체화하였다.

결과적으로 서가들은 첩학이나 속학(俗學)을 멀리하고

미려(靡麗)함을 버리고

중건(重健)과 웅강(雄强)의 풍격을 추구했으며

광범위한 자료로부터 고고(高古)의 필치를 구사하였다.

그 유풍은 지금까지 미치고 있다.

이렇듯이 비학은 전국시대를 위시하여 진. 한에서

수(隋). 당(唐)에 이르는 비갈(碑碣)에

보여 지는 제반 서법이론과 풍격을 사학(史學)이나

미학(美學)의 또는 금석학과 문자학 등의 차원에서

발전에서 연구하는 것이며,

또 논서가(論書家)의 비갈(碑碣)에 관한

저록(著錄)을 분석하는 학문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체변(體變) ; 글자 자형의 변화 ?

숭첩(崇帖) ; 법첩을 귀하게 여김 ?

관각체(館閣體) ; 한림풍(翰林風;문인의 기질)의

                         아름다운 문체나 서체

문자옥(文字獄) ; 글로 인한 재난. 필화(筆禍)

법첩실진(法帖失眞) ; 법첩의 변조

속학(俗學) ; 속하고 정도가 낮은 학문

미려(靡麗) ; 사치스럽고 화려하다

중건(重健) ;  무겁고 튼튼함 ?

웅강(雄强) ; 씩씩하고 굳셈






p333-335

첩학(帖學)

비학은 금석학 측면에서 하나의 학문으로 취급되어 왔다.

첩학은 그 형식이나 체제에 있어서

비학에 상대되는 명칭일 뿐이다.

첩을 새기는 일은 역대로 대단하였지만

학문으로서는 그다지 활발하지 못하였다.

대체로 비는 작가가 써서 직접 새긴 것도 있으며

남이 새겼더라도 최소한 2차 자료는 될 수 있는 반면,

첩은 쌍구(雙鉤)나 모본(摹本)을 새긴 것이 대부분이며

진적을 새겼다고 하더라도 세월이 흘러가면서

중각(重刻). 번각(飜刻)한 것이 많으므로 실진(失眞)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보편화 되었다.

그러나 첩학은 광의로 보면 첩의 원류와 진위.

또는 탁본의 선후 및 그 내용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적 연구와 법첩의 서파를 주종으로

예술을 추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청 중기의 제가들이 여겼던 것과 같이

실진(失眞)의 첩으로만 볼 이유도 없을 것이다.

첩은 진적으로 된 것도 있을 수 있고

그 영인본으로 만든 것도 있으므로

역설적으로 묵첩(墨帖)이 제일이요

비는 그 다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첩학은 육조시대의 글씨를 위주로 하며

특히 동진(東晋)의 글씨를 주종으로 삼는다.

동진의 서가로는

왕돈(王敦). 왕도(王導). 왕희지(王羲之) 부자 등을 들 수 있다.

이후에 왕희지가 서성(書聖)으로 추존(推尊)되면서

첩에 대한 관심은 매우 고조되었으며,

조대(朝代)로 각첩(刻帖)하는 역사(役事)가 이어졌다.

남당의 이후주(李後主)가

비장(秘藏)하고 있던 것을 새긴 <승원첩(昇元帖)>,

송 태종이 순화각(淳化閣)에 소장하고 있던

모본묵적(摹本墨蹟)을 새긴 순화각첩(淳化閣帖),

명의 동기창(董其昌)에 의해서 새겨진 <희홍당첩(戱鴻堂帖)>,

청 고종(高宗)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새긴

<삼희당법첩(三希堂法帖)> 등이 그것이다.

이 밖에도 <임강첩(臨江帖)>. <대관첩(大觀帖)>.

<순희각첩(淳熙閣帖)>. <건륭본각첩(乾隆本閣帖)>.

<쾌설당총첩(快雪堂叢帖)> 등

그 수가 많으며 그 양도 방대하다.

이러한 양상으로 말미암아

첩하면 으레 돌에 새긴 첩(帖)을 논하는 바가 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같이

비학(碑學)과 첩학(帖學)은

서예의 역사. 원류. 변천. 우열(優劣). 진위(眞僞)

그리고 예술성 등을 규명하는 학문으로서

특히 학부와 대학원에서 그 연구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할 분야이며,

서예가 개개인이 각별히 관심을 두어야 할 부분이다




쌍구(雙鉤) ; 서화나 문자의 윤곽을 가는 선으로 묘사하는 것

모본(摹本) ; (그림. 글씨) 따위의 본보기가 되는 책. 글씨본

중각(重刻) ; 한 번 있던 것을 다시 새긴다는 것을 말함

번각(飜刻) ; 한 번 새긴 책판 따위를 본보기로 삼아 다시 새김

실진(失眞) ; 변조. 일그러짐

묵첩(墨帖) ; 서첩(書帖)


동진(東晋) ; 317-420


왕돈(王敦) ; 동진(東晋) 낭야(琅邪) 임기(臨沂) 사람이며

                   자는 처중(處仲), 왕도(王導)의 종형(從兄)이자

                            진무제의 사위


왕도(王導) ; 동진(東晋) 낭야(琅邪) 임기(臨沂) 사람으로

                  자는 무홍(茂弘)아룡(阿龍)이다.

                  동진 때의 정치가


왕희지(王羲之) 부자 ; 왕희지, 왕헌지 父子


서성(書聖) ;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높이어 일컫는 말

                  서도의 명인(名人)

추존(推尊) ; 높이 받들어 존경함

조대(朝代) ; 왕조의 연대. 시기. 시대. 때

각첩(刻帖) ; 서첩을 새김

역사(役事) ; 토목, 건축 따위의 공사(工事).

                  여기서는 법첩을 새기는 일


이후주(李後主) ; 961-975 재위.

                        오대십국시기 남당(南唐)의 군주

                        이욱(李煜)을 가리킨다


비장(秘藏) ; 비밀히 수집하여 보관하다

모본묵적(摹本墨蹟) ; 원본을 본떠서 베낀 책과, 먹으로 쓴 것

우열(優劣) ; 나음과 못함

진위(眞僞) ; 진짜와 가짜



참고문헌 ; <<서예통론>> 선주선저, 원광대학교출판국 , 바이뚜, 중국어 사전 인터넷, 국어사전 한자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