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황기로 서예

2023. 3. 12. 18:12글씨쓰기

하촌의 江,山,海

고산 황기로 서예
 
하촌 21.07.06 04:33

 

강원도 오죽헌에 소장되어 있고 보물로 지정된 조선 전기 서예가 황기로(黃耆老)의
초서글씨입니다.
이군옥(李羣玉)은 9세기 중국 당나라에서 활동한 저명한 시인으로써 고산이 초서로 쓴
시는 「登蒲澗寺後二巖 ; 등포 골짜기 사찰 뒤쪽 두 바위」라는 오언율시입니다.

강원도 오죽헌에 소장되어 있고 보물로 지정된 조선 전기 서예가 황기로(黃耆老)의
초서글씨입니다.
이군옥(李羣玉)은 9세기 중국 당나라에서 활동한 저명한 시인으로써 고산이 초서로 쓴
시는 「登蒲澗寺後二巖 ; 등포 골짜기 사찰 뒤쪽 두 바위」라는 오언율시입니다.





아래쪽에 있는 글씨는 현대의 작가가 고산의 글씨를 보고 새로 적은 글씨입니다.



황기로(黃耆老, 1521~?)


1521(중종 16)∼?. 조선시대의 서예가.
본관은 덕산(德山). 자는 태수(鮐叟), 호는 고산(孤山)·매학정(梅鶴亭).


1521년(중종 16)에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대망리에서 태어났다.
1534년(중종 29) 진사시에 합격하고 여러 번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과
서도에만 정진하여 서예의 대가가 되었으며 특히 초서에 능했다.
모재 김안국과 같이 명나라에 갔을 때 명나라 선비들이 그의 필재(筆才)를 알고
‘해동장옹(海東張翁)’이라 불렀다 하는데, 이는 조선의 장욱(張旭)이란 뜻으로 장욱은 당나라
때 유일한 초성(草聖)으로 칭호를 받은 사람이다.
또한 황기로를 ‘왕희지 다음으로 첫째(王羲之後一人者也)’라 했으며, 글 한 폭씩 얻기를
원하였다 한다.
만년에 낙동강의 서쪽 보천산(寶泉山) 위에 정자를 짓고 고산정(孤山亭) 또는 매학정이라
이름을 지어 그곳에서 필묵(筆墨)과 독서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초서를 잘 써서 ‘초성(草聖)’으로 불렸다.
『근묵(槿墨)』 등에 진적이 전하며,『동국명필(東國名筆)』·『대동서법(大東書法)』 등에
필적이 모각되어 있다.
이밖에 1549년 이백(이백)의 「초서가행」을 쓴 초서필적이 석각(석각)되어 전하는데, 당나라
회소(懷素)의 『자서첩(自敍帖)』중 광초(狂草)를 방불한다.
금석으로 충주의 이번신도비(李蕃神道碑, 1555)가 있다.
조선시대 서예사에서 초서로는 김구(金絿)·양사언(楊士彦)과 함께 제1인자라는 평을
받아왔으며, 후대에 크게 영향을 미쳐 비슷한 풍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아우인 영로(榮老)도 초서를 잘 썼다고 한다.


이군옥(李群玉, 9세기 활동)


당나라 예주(澧州, 지금의 湖南) 사람. 자는 문산(文山)이다.
성격이 광달(曠達)했고,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이미 시명(詩名)이 자자했고, 음악과 서예에도 뛰어나 문학과 풍류로 일세를
풍미했다.
진사시에 응시했지만 낙방하자 바로 낙향하여 안빈자적(安貧自適)한 생활을 하면서 이런
생활을 시로 노래했다.


배휴(裴休)가 호남관찰사(湖南觀察使)로 파견되었을 때 그의 이름을 듣고 불러들여 후한 예로
대접하고 격려하면서 “처사께서는 거친 옷을 입었지만 옥을 품었고, 부귀를 뜬 구름같이
여기시며, 명망이 높으면서도 스스로 명성에 얽매이지 않으니 어찌 하늘이 오랫동안 황폐한
곳에 내버려 두겠소. 곧 길이 열릴 것입니다.”고 말했다.


선종(宣宗) 대중(大中) 8년(854) 포의로 장안(長安)을 방문하여 표를 올리고 300여 수의 시를
올리자 배휴가 재상으로 있으면서 홍문관교서랑(弘文館校書郞)에 천거했다.
얼마 뒤 사직하고 돌아와 몇 해 뒤에 죽었다.
원래 시집 3권과 후집 5권이 있었지만 없어지고, 지금은 후세 사람이 엮은 『이군옥집
(李群玉集)』이 있다.
『전당시(全唐詩)』에 시가 3권으로 편집되어 있다.


[글씨의 원문과 내용]

 



登蒲澗寺後二巖             등포 골짜기 사찰 뒤쪽 두 바위
李群玉                        이군옥


五仙騎五羊(오선기오양)   다섯 신선이 다섯 마리의 양을 타고
何代降玆鄕(하대강자향)   어느 시대에 이 마을에 내려왔던가?
澗有堯時韭(간유요시구)   산골짝에는 요임금 시대 부추가 있고
山餘禹日糧(산여우일량)   산에는 우임금 때 양식이 남아있네.


樓臺籠海色(누대롱해색)   누대는 바다 빛으로 싸였는데
草樹發天香(초수발천향)   풀과 나무는 자연의 향기를 뿜네.
浩笑烟波裏(호소연파리)   크게 웃노니 안개와 물결 속에서
浮溟興甚長(부명흥심장)   바다에 떠있는 융기가 얼마나 오래가겠나?


* 五仙(오선) : 《환우기(寰宇記)》에서 ‘고고(高固)는 전국 시대 때 월(越) 나라 사람으로(초나라에서 벼슬함) 
                   초(楚) 나라 상신(相臣)으로 있을 때, 다섯 신선이 다섯 색깔의 양을 타고 와서 한 줄기에
                   여섯 이삭이 달린 수수를 고을 사람들에게 주었는데, 이후 그 고을을 오양성(五羊城)이라
                   했다.’고 한다.
* 天香(천향) : 1.방향. 꽃다운 향기. 2.모란꽃의 향기. 3.미녀.
* 烟波(연파) : ① 연파 ② 안개 따위가 자욱한 수면




[느낀점]


글씨는 조선의 초성(草聖)이라 일컫는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의 작품입니다.
보관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일부 글자가 탈락되어 있어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당대에
중국에까지 이름이 알려졌던 명성답게 시대를 뛰어넘는 조선 최고의 초서글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대작입니다.


글씨는 중국 성당(盛唐) 시기인 9세기 벼슬을 물리치고 문학과 풍류로 일생을 보낸
이군옥(李群玉)의 오언율시로써 자연에서 생활하면서 권세를 누리는 벼슬살이를 조소하고
있는 시입니다.


고산(孤山)은 중종 16년인 1521년에 태어나 인종과 명종을 거쳐 선조 초기까지 살았던
인물인데, 이 분도 진사시에 합격하고 여러 번 벼슬에 천거 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서도에만 정진하였던 분입니다.


당시 시대상황을 보면 중종반정 이후 조정에 진출한 사람파가 기존의 권력세력인 훈구파와
대립하면서 종종 때 기묘사화와 신사사화가 일어났고, 인종을 거쳐 명종 시기에 을사사화,
정미사화, 을유사화로 이어지고 을묘왜변을 겪으면서 재야의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으며,
이후 선조 시기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붕당에 따른 당쟁이 발생하였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고산(孤山)은 이러한 정국의 상황에서 관직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의
수양에 힘을 쓴 것인데,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달래려는 하나의 동기부여로 이 글씨를
썼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