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14. 19:55ㆍ차 이야기
고려 뇌원차에 깃든 천태의 향기2
- 기자명 글 허흥식
- 입력 2023.03.02 14:16
음료의 발전 그리고 관법과 대승의 교학
호흡과 음료와 식생활은 우리의 생존에 긴급한 3대 요소이다. 호흡을 위해서는 공기가 필요하고 습기가 보존되는 나무 밑이나 굴(窟)이 필요하다. 왕자였던 석가모니는 국가의 갈등을 벗어난 인간의 궁극적 구제를 과제로 삼았다. 먼저 각자 개인의 수양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세속의 영화를 멀리하고 출가하였다. 보리수 밑에서 자신을 관찰하고 음식을 극히 소량으로 줄였고 모든 고행을 그대로 경험하였다.
수행 장소는 공기가 신선하고 수분이 보존되어야 적합하다. 나무 아래는 수도에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이다. 공기와 물은 식품과 달리 대체 가치를 지불하지 않고 어디서나 쉽게 이용한다. 이 경우는 인구밀도가 적은 지역의 이야기이고 도시가 발달할수록 공기와 물을 얻기 위해서 높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사람은 10분만 숨을 멈춰도 위독한 상태에 이른다. 더구나 여러 사람이 좁은 공간에 몰려들고 이를 일정한 방향으로 이동시키지 못하면 서로 밀고 쓰러져 밀폐된 실내가 아닌 골목에서도 외상없이 100여 명이 질식사한 사례가 나타났다.
또한 밀폐된 공간에서 일어난 재난에서 사람은 공기가 탁하여 더욱 빨리 숨을 거둔다.
인도처럼 무더운 지역일수록 물이 없으면 오래 지탱하기 어렵다. 물은 이틀만 섭취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한다. 50일간 단식한 마하트마 간디도 물을 마시고 버텼다. 신체가 건강하다면 물에 포함된 미량의 영양소만으로도 생명의 유지에는 큰 지장이 없다는 사례이다. 단식은 때로 체지방을 줄이고 성인병을 줄이기 위해서 행하는 중요한 수련의 하나라는 견해가 있을 정도이다.
음료는 수분의 섭취와 관련이 있지만 의약을 흡수하는 수단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다. 교목인 차(茶)의 잎을 소수민족이 의약으로 사용한 기원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되었고 이를 음료로 널리 사용한 기록을 남긴 시기는 의외로 늦었다. 난대가 아닌 온대나 추운 지방에서 기후를 극복할 굴이란 공간과 음료는 생존에 필요한 가장 긴요한 대상이었다. 한국의 개천신화에도 보온이 필요한 굴과 쑥과 마늘이 등장하였다.
음료의 기원에 대한 차의 문자
인류는 곡식을 비롯한 작은 열매를 볶은 후 끓여 마시거나 식물의 잎이나 뿌리와 줄기의 껍질을 찧은 건더기를 물에 걸러서 끓여 마셨다. 음료와 식품이 분화되지 못한 시기는 길었다. 음료로 젊어지는 샘물의 설화가 전한다. 피부가 쭈그러진 늙은 나무꾼이 젊어지는 샘물을 마시고 할머니와 함께 다시 찾아와 며칠 사이에 고운 속살이 드러낸 뽀송한 청년과 자연 미인으로 바뀌었다. 이야기를 듣고 이웃의 독신 노인이 찾아가 과도하게 마시고 입었던 바지 속에서 아기가 되어 울고 있었다. 이웃 노인 부부가 발견하여 손자로 삼았다는 전설이다.
이는 문학이나 신화이지 역사가 아니다. 그러나 신화는 상상력과 민족의 기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오래된 문자도 시작은 백성을 사랑한 현인이나 국왕이 만들었다는 주장과 상통한다. 차는 음료의 기원에서 보면 극히 일부에 속하지만 역사시대에 1,300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가진 음료였다. 문자의 시작을 찾아보면 긴 역사의 민족이 만들어 오랜 기간 유지한 상형문자에서 음성을 적는 간단한 기호로 변한 사례가 많다.
상형문자에서 기원한 문자에는 이집트 문자나 한자 그리고 마야문자를 비롯하여 간단한 기호로 소리를 나타내는 수많은 민족의 문자가 있었다. 한자는 수많은 민족이 지배층으로 바뀌어 등장하면서 증가시킨 문자였다. 여기에 음료를 나타낸 문자가 등장한 시기는 의외로 늦다. 현대에는 사용하기 어렵지만 모양으로 접근하면 글자에 발음과 그림이 포함된 도구이다. ‘茶(차)’란 글자는 씀바귀를 의미하는 ‘荼(도)’에서 기원하였다는 견해가 타당하다. 〈차경(茶經)〉에는 차의 잎을 따는 시기에 따라 명칭이 달랐다고 하였지만 그보다 차에 대한 지방의 사투리도 포함되었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차는 ‘풀(艸·草)’ 아래에 ‘사람(人)’과 ‘나무(木)’가 세로로 조합된 글자이다. 인간이 나무의 어린 싹을 이용하는 모습을 조합하여 하나의 음료로 나타냈다.
차나무는 기후의 변화에 약한 상록수이고 인류의 기원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앞선 식물이다. 인간이 이를 사용하면서 기능과 가치가 여러 민족으로 확산되었다. 인간은 호흡과 수분섭취로 생명을 유지하고 식품을 통하여 영양분을 흡수하여 건강을 증진시켰다. 차는 수분을 섭취하는 음료의 하나이고 미량의 영양분이 있다. 이보다 앞서 온대와 한대에서는 씀바귀나 인삼을 음료로 사용하였고 차가 동아시아에서 널리 음료로 확산되어 사용된 시기는 8세기 중반부터이다.
茶
香葉 嫩芽
慕詩客 愛僧家
碾雕白玉 羅織紅紗
銚煎黃蕊色 碗轉麴塵花
夜後邀陪明月 晨前命對朝霞
- 唐 元稹의 보탑시
차는 불교가 기원한 인도 기후와 상통하는 난대의 식물이고 출가자가 음료로 마시면서 자신을 돌아보았다는 기록은 당의 전반기까지 찾기 어렵다. 차는 오랜 기간 동아시아의 서남부와 남아시아의 서북부에서 약재로 이용되었지만 동아시아에서 이를 음료로 재배하여 확산된 시기는 8세기 중반이다. 이 시기 불교와 차는 양자강 상류에서 이곳에 몽진한 당 현종의 궁전에 연결되기 시작하였다. 오랜 기간 소수민족의 약재로 쓰이다가 음료로 확산된 시기와 신라와 일본으로 확산된 시기는 100년을 넘지 않았다. 다시 100년이 지나 고려 초기 고유한 이름의 뇌원차를 궁중차로 사용할 정도로 확산되었다.
천태사상은 당(唐, 618∼907)보다 앞서 남북조시대(420∼589) 때 남조에서 기원하였고 수(隋, 581∼618)의 지의(智顗, 538∼597)에 이르러 천태종이 성행한 황하 유역으로 확산되었다. 고려에 천태사상이 알려진 시기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천태사상이 제대로 알려진 시기는 법안종 이후다. 법안종은 남종선의 5종파 중 하나로 오월(吳越, 907∼978)의 말기 전성기에 이르렀다. 당시 선종은 천태학이나 교학을 흡수하여 종합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특히 법안종의 천태사상은 천태덕소에 의하여 확립되었고 영명연수가 지은 〈종경록〉 100권에는 화엄·염불까지 포함한 종합적인 사상이 담겼다.
남조의 천태사상은 황하 유역에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수의 천태 지의가 차를 수행으로 사용하기 이전이었다. 초기 천태종에서 사용한 음료가 차였다고 설명하려면 차의 역사를 소급하여 체계를 새롭게 써야 한다. 명대(明, 1368∼1644)에 완성된 〈삼국지연의〉는 원대(元, 1271∼1368)의 〈촉지(蜀志, 유비의 촉한을 중심으로 쓴 소설)〉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에 차가 등장하지만 그야말로 후대에 만들어낸 소설이다. 차가 천태종과 결합된 시기는 당의 말기나 오대에 이르러 가능하다. 오월의 법안종에 나타나는 차의 기록이 가장 중요하다. 고려의 뇌원차와 같은 시기이므로 오월의 영향을 받았다면 이에 대한 철저한 증명이 필요하다.
불교 전파의 두 갈래, 북전과 남전
해로는 육로에 비해 조난이란 큰 위험이 도사리지만 배가 바람만 잘 맞으면 고속도로와 같다. 불교는 크게 육로로 전파된 북전불교와 바다로 전파된 남전불교로 나뉜다. 북전불교는 인도의 서북 지역 사막을 돌아 동쪽 황하유역에 전해지기까지 여러 지역을 거치며 여러 언어로 거듭 번역된 경전이 남전불교보다 많다. 남전불교는 인도에서 해로인 스리랑카·태국·인도네시아 등지로 전파되고 동아시아에도 강하게 남아있는 요소가 적지 않다.
불교는 거시적으로 보면 기후와 풍토 그리고 민족별 언어와 관계가 깊다. 심지어 음식이나 의약과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 본래 석가모니의 교화를 먼저 받은 인도만 하더라도 민족의 구성이 복잡하고 지역이 넓으므로 하나의 대륙이라 말할 정도로 다원적인 요소가 많았다. 이러한 풍토에서 여러 지역으로 전파된 불교사상은 지역별로 경전의 주석·실천의 방향·언어 등에 적지 않은 차이가 생겼다. 불교는 이를 수용한 지역이 방대해질수록 해석이나 전체 사상에 차이가 생겼다. 하지만 지역별 기존 사상·자연환경과 인문 환경의 영향으로 나타난 현상이고 크게 보면 공통점이 있다.
인도의 원시철학 중에는 불교보다 먼저 상층신분인 브라만 계층에 의하여 종교화한 사상이 있었다. 불교는 브라만 다음의 계층인 크샤트리아에 의하여 인본주의로 해석된 새로운 사상이었다. 불교는 현실과 과학사상으로 의학과 통치에도 작용하였지만 차츰 전파된 지역의 주도적 사상이 될수록 지배층을 옹호하는 사상으로 변화하였다. 최치원(崔致遠, 857∼?)을 유교를 강조한 문인으로 파악한 글이 많지만 당에서 귀국한 다음에는 우리의 문화전통을 다양하게 이해하여 저술하고 불교에 대해서도 중요한 사실을 후세에 전하였다.
최치원은 당나라가 기울기 시작한 시기에 어린 나이로 유학하고 급제한 다음 양자강 유역에서 민란인 황소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서 노력하던 고변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신라로 돌아와서 지은 봉암사 지증대사비 비문에서 신라의 불교사를 이원적으로 파악하여 거시적으로 서술하였다. 그는 불교사를 비파사(毘婆舍·विपश्यना·觀·Vipaśyanā)가 먼저 전래하고 마하연(摩訶衍·Mahā-yāna)이 뒤따라 풍미(風靡)하였다고 대비시켰다. 비파사는 남전불교의 수행방법이고 마하연은 교학을 중심으로 북방으로 전해진다. 결국 불교의 전파는 남전불교에서 시작되고 북전불교가 뒤에 신라에 도착하였다는 해석이다.
최치원이 사용한 언어는 의외로 기존의 용어를 한자로 번역한 사례가 많지만 큰 범주의 단어일수록 해로로 직접 전달된 범어나 팔리어의 음사가 많다. ‘남전불교에서 사용하는 지관(止觀)의 비파사 표현을 신라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 불교사에 확대하여 사용하였는가?’ 의문으로 삼을 만한 중요한 용어로 표현하였다.
최치원이 당에서 지은 글은 제대로 전하지만 이 글에 불교에 대한 시문은 의외로 적다. 844년에 있었던 무종의 폐불로 제대로 복구되지 못한 영향이 당에서 지은 최치원의 시문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가 귀국하여 남긴 글은 오히려 다원적인 신라의 사상이 풍부하지만 많은 부분이 없어졌다.
최치원이 귀국하여 남긴 글은 불교에 대한 금석문보다 절에서 지은 시문이 오히려 많다. 이로 보면 신라의 불교는 꾸준하게 교학을 중심으로 지속되었다. 당의 불교 탄압은 교종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던 화엄종과 유가종 사원에 심하였고 새롭게 등장하던 선종에는 타격이 덜하였다. 신라에서 교학 불교에 입문하고 유학한 다음에 선승(禪僧)으로 바뀐 현상도 당의 변화와 상통하였다.
최치원은 해인사 ‘선안주원벽기(善安住院壁記)’처럼 화엄종의 중심사원에 관한 글도 적지 않게 썼다. 그가 말년인 906년 대구 남쪽 수성현에 팔각등루가 세워진 후 쓴 ‘호국성팔각루기’에도 불교 여러 종파의 요소가 변화하면서 지방의 토호들과 결합한 사상의 변화를 남겼다. 그는 한결같이 불교의 굵직한 용어를 음사로 표현하였다. 동아시아에서 커다란 변화는 안사의 난으로 당 현종이 촉으로 몽진한 시기에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최치원은 90년이 지난 무종의 폐불 이후 당에서 활동하였으므로 그보다 앞선 교학불교에 대한 사항은 최치원이 귀국한 다음 잘 보존된 신라의 지식으로 서술하였을 가능성을 보였다.
안사의 난은 동아시아의 북전불교 교류를 중단시켰다. 그리고 해로를 통한 남전불교의 교류를 촉진시켰다. 그리고 인도의 남부와 남전불교가 전파된 지역에서 쓰였던 불교의 중요한 용어가 음사(音寫)된 한자로 표현되었다. 고려 태조시대 해로로 마후라가 찾아왔고 정중한 예우를 받다가 입적하였다. 뒤이어 보드가야의 시리바일라가 외교적 사명을 가지고 다녀가고 고려 고승의 비문에도 이름을 남겼다. 이로 보면 이들이 해로로 왔고 번역되지 않고 음사된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향을 확대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참선을 의미하는 ‘사마티’나 관법을 중요시한 ‘비파사’는 수행의 방법에 해당한다. 불교사상은 수레바퀴와 같이 여러 지역으로 유행하였고 다양하게 특성을 발휘하면서 경쟁하였다. 불교사상은 수행을 바탕으로 지식을 얻고 실천에 이러르면 적어도 이에 대한 체계는 3대 종파나 4대 종파가 필요로 하였다.
고려 전기의 불교사상은 종파라는 추진력을 가진 집단에 의하여 유지되었고 경쟁하였다. 불교계가 다수의 종파로 경쟁할수록 통합의 요소가 나타나 새로운 종파의 출발은 어려웠다. 3대 종파가 주도한 고려 초기에 군소종파가 없지 않았으나 출가와 수계, 승과와 승계의 관리를 위한 승정, 진전사원과 국사의 배출과 국가의 중요한 제전의 분담은 모두 3대 종파에서 주도할 정도로 강화되었다. 군소종파는 수효는 많으나 이들 종파의 역할은 몰락하였고 새로운 종파의 등장은 어려웠다.
신라 말기와 고려 전기 불교계의 차이
신라의 불교에서 수도인 경주에 세워진 황룡사나 불국사에 대한 기록은 적지 않다. 다만 지방의 사원에는 〈화엄경〉을 읽다가 유학하여 선종으로 방향을 바꾼 선승의 기록이 850년 이후 아주 많다. 그보다 앞서 당에서 활동하고 귀국하지 않은 유가학의 원측(圓測)이나 오진(悟眞) 등의 고승에 대한 기록은 의외로 적고, 당에 남긴 자료를 후대에 옮긴 내용 위주이다. 다만 원표(元表)는 귀국한 화엄종 승려이다. 선종 가지산 보림사 선승의 비문에 이름이 올라 있지만 그가 실제로 신라에서 어느 정도 추앙을 받으면서 활동하였는가에 대한 내용은 당에서 보다 알려진 내용이 오히려 적다.
신라말 화엄종 계열 해인사의 희랑(希朗)이나 관혜(觀惠)는 중요한 인물이지만 이들의 전기나 저술은 의외로 남아있지 않다. 고려초 화엄종 승려가 남긴 저술은 균여(均如)가 돋보인다. 그의 전기와 저술은 전하지만 의상의 저술을 확대하였을 정도이고 선종이나 유가종에 대한 비교나 비판은 적다. 후에 대각국사 의천은 신라 말 고려 초 화엄종에 대해서 사상의 포괄성이 적고 신비사상을 강조하였다고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균여는 범어나 팔리어를 중역(重譯)하여 사용하지 않고 음사한 범어나 팔리어를 자주 사용하였고 의천은 이를 피한 북전불교의 중역을 따랐다. 의천은 중역된 한자어를 사용한 송의 화엄종 승려 정원이나 신라의 원효(元曉)·경흥(憬興)의 저술은 매우 충실하였다. 이에 비하여 그가 지은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도 당 말기부터 고려 초기에 이르는 화엄종이나 유가종 고승의 저술에 대한 목록은 극히 소략하거나 제외하였다.
차는 천태학의 지관에서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던 음료이다. 음료야말로 공기와 식품과 함께 3대 요소를 이루는 수행의 도구였다. 고려에서 천태학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계기는 고려 광종시대이고 오월에 유학을 떠났거나 초청을 받았던 선승들로부터 비롯되었다. 고려의 천태학과 종파로 출발할 추진력을 찾으려면 적어도 세 단계로 설정해야 이해가 가능하다. 하나는 신라에서 수용한 천태학의 수준이다. 다음은 고려 광종 때에 오월의 법안종에 유학한 선승들의 활동과 기여 그리고 고려 광종시대에 나타난 뇌원차에 대한 지식이다. 고려 중기는 물론 후기까지 조계종과 천태종의 전개와 전환에 대하여 체계를 세워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라의 원효와 경흥은 불교경전을 폭넓게 섭렵하였고 당시 상황에서 능력을 발휘한 고승이다. 다음은 남조의 천태학으로 신라보다 앞선 천태종 조사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지만 이에 대한 신라의 저술은 적다. 다음은 오월 선종의 일파로서 오가의 하나인 법안종에서 이룩한 천태학과 이를 발전시킨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와 이를 수용한 고려 지종(智宗)을 비롯한 고승이 귀국 후에 펼친 선종산문의 활동이다. 이 활동은 금석문에 적지 않게 보존되었고 이에 대한 연구도 새롭게 나타났다. 이들의 후예가 5산문을 이끌고 천태종의 확립에 기여하였다는 연구는 있지만 법안종과 차와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아직 정리가 부족하다.
차와 천태학이나 천태종과의 관계는 한국의 차와 불교사에서도 중요한 주제의 하나이다. 특히 고려의 천태종은 수와 당이나 일본보다 오히려 늦다. 천태학은 이미 법안종을 수용한 고승들에 의하여 고려 초기인 광종시대부터 알려졌지만 천태종으로 출발한 시기는 아무리 올려 잡아도 대각국사 의천을 앞서지 못한다. 고려에서 종파는 어느 시기보다 선명하였고 3대 종파에서 천태종을 합쳐 4대 종파로 확립된 시기는 고려 중기였다. 천태종의 출발은 고려불교사 체계에서 파악해야 할 중대한 전환기였다.
고려시대 법안종의 고승과 뇌원차의 관계는 시기적으로 상통하지만 사료가 부족하여 관계를 입증할만한 자료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대각국사 의천의 문집이 남아있고 거란과 송의 자료가 있어서 새롭게 접근할 과제가 많다. 다만 진정국사 천책의 〈호산록(湖山錄)〉에 고려 후기 만덕산 백련결사-조계종 수선결사의 관계와 송의 천태종 연경사와 일본의 초암국사가 교류한 사료가 남아있어서 귀중한 국제적 상황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이후 깊이 있게 논의될 중요한 과제이다.
허흥식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경북대학교 교수와 이탈리아 나폴리 동양학대학교와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LA캠퍼스에서 강의하였다. 북경대학에서 연구교수로 활동하였다. 두계학술상·출판문화저작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고려불교사연구〉·〈한국중세불교사연구〉·〈고려로 옮긴 인도의 등불-지공선현〉·〈한국의 중세문명과 사회사상〉 등 다수의 저서와 30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차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차의 역사와 세계 차문화] 제10화 愛新覺羅의 비밀과 普洱茶 (0) | 2023.03.16 |
---|---|
세계 여러 수행법들의 소개 및 비교분석 (0) | 2023.03.16 |
고려 뇌원차에 깃든 천태의 향기1 (0) | 2023.03.14 |
18-19세기 서양인들이 마셨던 차에 대한 기록들을 읽는데 (0) | 2023.03.05 |
[신정현의 '인물로 보는 차 이야기'] (16) '고텐부르크'號 실렸던 차는 '송라차' '무이차' (0) | 2023.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