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견항(犬項)의 한강물을 막은 스님들

2023. 4. 14. 01:23우리 역사 바로알기

29. 견항(犬項)의 한강물을 막은 스님들

기자명 민순의
 
 

도첩제 폐지 이후 부역 참여해 신분증 받아

홍수 피해 잦았던 중랑천 하구 ‘견항’ 물길 막는 공사에
나라 지원 부족하자 직접 나서 맨손으로 바위 깬 스님들
‘스님 개인 호패 지급’ 보고에 도첩제 폐지 시사점 제공

겸재 정선의 ‘송파진도’. 송파진은 삼전도에서 동쪽 즉 한강의 상류 방향으로 인접해 있던 나루다. 그림 속 송파진의 위치로 보아 정선은 이 그림을 잠실도에서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언제나 중랑천 하구 일대가 골칫거리였다. 평평하게 넓고 낮은 땅에 합쳐지는 물길이 많아 큰비만 내렸다 하면 범람하는 그곳. 인명 피해를 막고자 다리를 세우려 해도 번번이 실패하던 끝에 성종 때 어느 스님이 자처하여 무리를 이끌고 만들어낸 것이 ‘살곶이 다리’라는 이야기를 지난번 글에서 소개했었다.(‘8. 스님의 교량 제작’ 참조) 

그런데 이 지역 지세의 어려움은 여기에 다리 하나 세우는 것으로만 해결될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중종 23(1528)년 다음과 같은 사복시(司僕寺)의 건의가 있었다.

“전관(箭串: 살곶이)의 견항(犬項)은 본디 예전부터 물이 지는 곳으로서, 비가 많이 오면 반드시 물이 불어 넘칩니다. 경진년(1520, 중종 15년)에 홍수가 난 뒤로 점차 저절로 물에 잠기고 부서져, 비가 또 많이 오면[其水始大]… 마장(馬場)의 한가운데를 갈라놓습니다. 일찍이 수축(修築)할 것을 청하고 싶었으나 노역(勞役)의 일이 크고 흉년이었던지라 아뢰지 못했었습니다. … 예전 임금님들 때에도 돌을 쌓아 막았었는데[亦以石築塞] 그 돌들이 흐르는 물에 빠져나갔고, 그 근방 삼전도에서 집 짓는 사람들이 빼다 쓰기도 하기 때문에 물에 더욱 허물어져 특히 깊어졌다는 것입니다.…” (‘중종실록’ 62권, 23년 7월 8일.)

사복시는 임금이 타는 수레와 말·마구·목축 등 목장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던 부서였으므로 마장(馬場)이 있던 살곶이 일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 인용에서는 생략했지만, 사실 위 기사에는 견항에 대하여 “삼전도(三田渡) 상류(의 물이) 전관을 가르고 횡류하는 곳에 있다[三田渡上流, 分割箭串, 而橫流有也]”는 설명이 붙어 있다.

삼전도는 오늘날 잠실 석촌호수 자리에 위치한 나루터로서, 중랑천과 한강의 합류지점보다는 동쪽으로 상류에 위치한다. (석촌호수에 나루터가 있다는 말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1960년대 잠실 개발 이전에는 지금의 석촌호수에서 한강까지 펼쳐진 땅이 본디 한강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잠실도와 부리도라는 섬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삼전도 상류의 물이 중랑천 하구 쪽으로 흘러내려가다가 견항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새로 물길을 내며 한강 북안(北岸)의 땅을 가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복시의 건의는 바로 이 물길에 돌을 쌓아 그 물길 자체를 막아버리자는 것으로 이해된다.

건의는 받아들여져 그해 가을 공사가 착수되었다. 인력 동원의 어려움에 관한 많은 논의가 오갔으나, 병조의 관할 하에 군인들이 공사에 투입된 것으로 확인된다. 다만 이들은 직업군인이 아니라 일반인으로서 군역의 의무에 따라 병무 수행 중인 인원이었다.(‘중종실록’ 62권, 23년 7월12일; ‘중종실록’ 62권, 23년 7월19일; ‘중종실록’ 64권, 23년 윤10월11일; ‘중종실록’ 64권, 23년 윤10월19일; 65권, 24년 2월19일; ‘중종실록’ 68권, 25년 7월5일.) 

또 공조의 보고에 따르면 견항의 크기는 길이 1140자, 높이 10자, 바닥 너비 80자로 측정되었는데, 이는 길이 두 자씩에 군인 세 사람을 쓸 경우 1710명이 50일 동안, 길이 한 자에 군인 한 사람을 쓸 경우 1140명이 70일 동안, 길이 석 자에 군인 두 사람을 쓸 경우 760명이 100일 동안 사역해야 하는 규모였다고 한다.(‘중종실록’ 62권, 23년 7월19일.)

중종 31년(1536) 견항이라는 이름이 다시 소환되었다. ‘실록’에 따르면 이 해 2월 초 이미 견항의 물막이공사가 시작되어 진행 중인 상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뜻밖에도 일반 군인이 아닌 승군(僧軍)이 공사에 동원되고 있어 이목을 집중시킨다. “견항을 막는 공사[犬項防塞事]는… 지난번의 수군역사(水軍役使) 사목(事目)에 의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승군은 수군에 비해 근무태도[勤慢]가 같지 않습니다. 승군은 휴대한 식량이 넉넉하지 못한 터라 날짜를 계산하여 공사를 빨리 끝내려 하므로 독려를 가하지 않아도 각자가 힘을 다하는데, 다만 국가에서 준비하여 지급할 물건을 지급해 주지 못할 뿐입니다”라고 시작되는 동지사 권예(權輗)의 보고는 중종 31년 재개된 견항 공사에 스님들이 참여하게 된 경위와 양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중요한 내용을 정리하여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중종실록’ 81권, 31년 2월6일.) 

• 현재 공사에 참여하고 있는 승군은 1800여명인데, 뒤따라 도목(都目)을 대비하여 오는 자가 줄을 잇고 또 스스로들 모여서 부역하러 오는 자도 많으니, 수군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 토석(土石)을 짊어지는 등 힘으로 할 일은 독려를 가하지 않아도 각자가 힘을 다하는데, 큰 바위를 깨뜨리는 일들에 대하여는 승군 중에 석공(石工)도 없고 또 정(錠)이나 쇠망치 같은 기구가 없으므로 바위를 깨뜨리려 하여도 맨손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 승군의 부역(赴役) 기일이 동시(同時)가 아니어서 먼저도 되고 뒤에도 되는 선후의 차별이 있으므로 공사가 끝나는 대로 호패(號牌)를 발급해 주어야 하는데, … 만약 부역 기일이 끝나는 대로 호패를 발급해 주지 않으면 그들은 반드시 식량이 떨어져 끝내 기다릴 수 없으므로 그냥 흩어져 가고 말 것입니다.

다음 세 가지 사안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첫째, 공사에 동원된 1800명의 스님들을 ‘승(僧)’이나 ‘승인(僧人)’, 또는 ‘승도(僧徒)’가 아니라 ‘승군(僧軍)’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 둘째, 바위를 깨뜨리는 등의 힘을 쓰는 일에 몹시 유능하나, 나라에서 장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할 뿐 아니라 스님들 스스로도 정이나 쇠망치 같은 기구를 소지하지 않았다는 점. 이것은 이 공사에 참여한 스님들이 고급 기술을 가진 전문 노동인력이 아님을 의미한다. 

셋째, 동원된 승군에게는 스님 각자의 부역기간이 완료되는 시점에 개인별로 호패를 발급해야 한다는 것. 호패는 조선 초부터 일반인을 대상으로 발급되던 신분증이었다. 참고로 스님들의 국가공인 신분증인 도첩은 이미 20년 전인 중종 11년(1516)에 제도 자체가 폐지되어 있던 상태였다.

이 세 가지 사안은 도첩제도 폐지 이후 변화하고 있는 스님들의 처지와 관련하여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다음 시간부터 사안별로 하나씩 이야기를 풀어보기로 하자.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nirvana1010@hanmail.net

[1675호 / 2023년 4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