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서경 < 영.정조시대 부안 현감 이운해의 <<부풍향차보>>연구 3
5. 다구茶具, 6종의 차도구와 기능
▲ <사진 10> 茶具 |
炉可安罐 罐入二缶 缶入二鍾 鍾入二盞 盞入ㅡ合 盤容置缶鍾盞. 찻잔은 한 홉 들이이고, 다동(찻종)은 두 잔 들이이며, 다관은 다동(찻종) 두 개 들이이고, 탕관은 다관 두 개 들이다. 화덕에 탕관을 편하게 앉히고, 다반에는 다관과 찻잔 찻종을 놓(고 차를 마신다.)는다.
위에서 제다법과 음다법을 말한 이운해는 차를 마시는 자리를 실증을 바탕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각각의 찻그릇들의 이름과 용량, 형태를 그림으로 표현해 상세히 표기하였다. 이는 차를 마실 때 어느 정도의 기준과 표준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함이었다. 동의보감에서도 우리의 체질에 맞도록 용량을 조정한 처방의 예가 보인다. 그림 위에서부터 첫 번째는 화덕의 모양을 그대로 그려 넣었다. 그리고 아래로는 다구茶具인데 炉․ 罐․ 缶․ 鍾․盞 ․ 盤(탕관, 다관, 찻종(다동의 역할), 찻잔, 다반)의 순서이다.
이것은 가장 간소화한 차구의 기본 차림setting이다. 혼자 마실 때나 여럿이 모여 차를 마실 때도 최소한 필요한 찻그릇들을 정리하였다. 노炉는 화로라기보다 화덕의 형태이다. 화구火口와 배기구排氣口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화덕은 나무를 넣어 불을 땔 수 있는 구조와 기능을 가지고 있다. 화로는 화구가 따로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배기구도 없다. 그저 숯을 담아 쓰임에 따라 불씨를 보존(열원)하거나 보온을 위한 것으로 사용되었다. 찻자리를 위한 화로로는 물을 끓이거나 끓인 물을 보온하는 기능, 즉 온도를 유지하기 위한 차도구이다. 화로는 차를 달이는 것, 난방을 위한 것, 여행 때 가마 안에서 쓰던 수로手爐 따위로 나눌 수 있으나 몇 가지 구실을 함께 하는 것이 보통이다.
▲ <사진 11> 화로의 일반적인 형태와 기능 |
《부풍향차보》에 그림으로 남긴 화덕의 배기구를 손잡이로 보는 논문도 있으나 화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배기구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배기구가 손잡이였다면 돌출된 부분만 그리면 된다. 굳이 동그라미로 그려 넣은 것은 구멍이라는 상징적 표현이다. 배기구를 손잡이로 본다면 화구가 없어야 하고 맞은편에 손잡이가 하나 더 있어야 한다. 이 그림상으로는 손잡이가 없다. (배기구가 손잡이라면)손잡이가 있어야 할 자리가 화구이기 때문이다. 있다고 한다면 화구와 배기구 사이 양쪽에 손잡이가 있어야 맞다.(<그림 12> 화구와 배기구를 갖춘 화덕, 우 윤제홍의 석매도) 현재까지 일반적인 화덕의 형태가 그렇다. 손잡이가 한 쪽만 있는 화덕, 또 정민의 해석처럼 뒤쪽에 손잡이가 있는 것은 화덕의 제작 역사상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화로는 대체로 손잡이가 없는 것이 많다. 물론 문 돌쩌귀 같은 것이 양쪽에 달려 있는 청동화로나 놋쇠 화로 등이 있지만 화로 주둥이가 넓은 면面이 손잡이 역할을 대신 하기 때문이다.
▲ <그림 12> 화구와 배기구를 갖춘 화덕 (좌 부풍향차보, 우 윤제홍의 석매도) |
정민은‘다로 위에 난 구멍은 불기운이 밖으로 새지 않도록 다관과 꼭 맞는 크기여야 한다’고 분석하였다. 배기구를 손잡이로 보고 이렇게 분석한 것이다. 불의 성질만 이해해도 이 문제는 간단히 풀린다. 화구와 탕관을 얹는 위쪽만 터진 상태인데, 뒷쪽 구멍이 배기구가 아니고 손잡이로 해석하면 불기운은 어디로 갈까? 더욱이 ‘불기운이 밖으로 새지 않도록 다관과 꼭 맞는 크기여야 한다’면 화구 앞에서 불을 때는 사람의 앞머리는 모두 꼬실라지고 말 것이다. 화구와 배기구를 전후로 하고 좌우에 손잡이를 하고 있는 형태는 매우 일반적인 형태로 남아 있다. 조선 영조 때의 화가 학산 윤제홍(鶴山 尹濟弘, 1764(영조40)~?)의 석매도에는 그 형태가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기물 도록이나 박물관 도록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다.
불을 때면 재가 남기 때문에 손잡이를 양쪽에 만들어야 한다. 물론 기존의 화덕의 구조를 살펴보면 바닥 자체면이 없는 것도 있다. 화덕만 들어내면 재가 그대로 땅(바닥) 표면에 남게 되는 구조를 말하는데 이런 경우에도 손잡이는 좌․우 양쪽에 있었다. 화덕이 ①화구가 있어 뜨겁다는 점, 그리고 ②재가 남는다는 점, 또 ③화덕의 표면이 열전도율이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손잡이는 양쪽에 있어야 하고 뒷쪽에 있는 것은 배기구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화로는 주로 실내에서 사용되었고, 화덕은 대부분 실외에서 사용되었다는 논점도 숨어 있다. 구조와 기능면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다화茶畵를 예例로 들고 있지만 모두 화로의 형태가 아니라 실외에서 사용하는 화덕의 모양과 기능을 갖추고 있다.
김홍도(金弘道, 1745~?)의 <煎茶閒話圖>, <醉後看花圖> <蕉園試茗圖>와 이재관(李在寬, 1783~1837)의 山靜日長(병풍)에 나오는 <煎茶>나 <午睡(오수초족도)>에 나오는 화덕 역시 모두 같은 모양이다. <高士閑日圖>에 나오는 것도 화덕의 모양을 그대로 갖추었다. 더구나 실외에서 사용하고 있다. 사진으로 첨부하지 않았지만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松下飮茶圖> 등 차를 끓이고 있는 그림 모두가 마찬가지다. 이재관 筆 芭蕉題詩圖까지도 동일하다. 이들 김홍도, 심사정은 영조 때 사람이고 이재관은 정조 때 화가이다. 당대의 화덕의 형태를 자세히 알 수 있다. 그 형태가 바로《부풍향차보》의 화덕과 모두 흡사하다는 점이 더 흥미롭다.
▲ <사진 13> 조선시대 화덕의 예, 김홍도<煎茶閒話, 醉後看花, 蕉園試茗> 이재관<煎茶, 午睡, 高士閑日圖> |
정민은《부풍향차보》에 제시된 각종 다구의 표준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진행사항을 점검해 보았다. 2016년 12월 21일 부안 청자박물관에서 ‘부안청자협회’가 진행한 사업으로‘천년 전통 도자다기 복원사업 결과 보고회’가 있었다. 복원은《부풍향차보》에 나오는 차도구를 3D로 시뮬레이션하여 복원하였다고 한다.(사진 14) 화덕의 모양새가《부풍향차보》의 화덕의 형태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 보인다. 솥을 거는 위쪽 주둥이가 터져 있다.
▲ <사진 14> 부안청자박물관에서 재현한 《부풍향차보》의 다구 |
재현이나 복원이라는 용어가 매우 무색하다. 이런 작업은 거의 같은 형태로 만들어서 실증을 목적으로 하고 그 실용성을 검증하기 위함인데, 탕관을 얹어야 하는 화덕의 주둥이 앞쪽을 터(언청이화덕) 탕관의 앉음새가 매우 불안정해 보인다. 물을 끓이다가 자칫 잘못하면 앞으로 쏟아질 우려가 있다. 이운해가 말한 ‘차를 우릴 때는 화덕에 탕관을 편하게 앉히고(爐可安罐)’이 부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다구의 표준화는《부풍향차보》 연구에서 지향할 바가 아니다. 차문화의 실용적 발전을 저해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시대에 따라 용기와 재질은 그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변용되는 것이다. 실제로 부안 청자박물관에서 재현한 찻그릇을 보면 화덕의 경우《부풍향차보》의 다구와 흡사하지 않다.
관罐은 항아리 형태의 주전자를 말한다. 귀때는 없다. 다만 물을 뜨는 기구(표주박, 조롱박, 표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주둥이가 크고 뚜껑을 장착하고 있다. 찻자리에서는 탕관을 이르는 명칭이다. 그런데《부풍향차보》에서는 <朝鮮陶磁名考>에서 말하는 관罐의 형태와 주전자의 중간 형태를 띤다. 물을 떠서 사용하기 위한 주둥이가 크고 항아리 형태의 주전자를 연상하게 한다. 주둥이가 있고 뚜껑이 있는 상층부는 오늘날 사용하는 탕관의 형태이고, 하층부는 허리가 잘록하고 엉덩이가 펑퍼짐하지 않은 주전자의 형태를 닮아 있다. 손잡이는 가로형이 아니고 세로형이어서 탕관 손잡이보다 주전자의 손잡이에 가깝지만《부풍향차보》에서는 화덕 위에 올려놓고 물을 끓인 탕관의 역할과 용도로 사용되었다.
▲ <사진 15> 영조의 태항아리 |
관缶는 액체를 담는 그릇이라는 뜻이다. 배가 불룩하고 목 좁은 아가리가 있는 질그릇이다. 그래서 찻그릇으로써는 다관을 말한다.《부풍향차보》에서도 다관의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용량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4斛, 16斗들이이다.《부풍향차보》에서의 缶의 형태는 오늘날 차 주전자로 쓰는 다관의 형태와는 매우 거리감이 있다. 그 형태가 마치 태항아리를 닮았다. 부안 청자박물관에서 복원한 缶 <사진 14>도 조선시대 태항아리와 흡사하다. <사진 15>는 당시에 왕가에서 사용한 영조의 태항아리이다. 이운해나 황윤석이 활동했던 시기도 영․정조 시기이기 때문에 기능은 다르지만 형태면에서 상호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단지 태항아리와의 다른 점은 손잡이처럼 보이는 고리(뚜껑과 같이 묶어 고정하기 위한 장치)가 2개와 4개라는 차이이고, 그 고리의 크기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도자 전문가들의 면밀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종鍾은 잔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곡식을 되는 양의 한 단위이기도 하지만 흔히 찻잔보다 큰 형태를 말한다. 차종茶鍾은 소위 탕탄湯呑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종자鍾字가 붙은 그릇은 종상鍾狀 소형小形의 완으로써 종자를 쓰는 수도 있다. 이상의 그릇에 뚜껑이 있는 것은 그 이름 위에 합자盒字를 붙여 부른다. 여기서의 종鍾은 잔盞을 따로 두고 있기 때문에 茶童(공도배)의 역할이 필요했을 것이다. 다동은 물식힘사발이 없는 우리 찻자리에서 罐․缶와 盞 사이에서 차를 나르는 역할을 담당했다. 차를 나르는 역할은 사찰에서 다동(다각)이 담당하였기 때문에 그 역할의 그릇을 아이 동(童)字를 써 다동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쪽에 손잡이가 있고, 뜨겁게 마시는 차의 온도와 향을 유지하기 위한 뚜껑을 장착하고 있는 것이다.
▲ <사진 16> 탁잔과 찻잔의 비교(朝鮮陶磁名考) |
盞은 차를 따라 마시는 도구인데,《부풍향차보》의 盞은 일반적인 잔의 형태보다 독특하다. 해석이 분분하지만 탁잔으로 사용되는 잔의 형태를 띠고 있다. <사진 16>와 같이 탁잔의 형태와 매우 흡사한데, 뚜껑 위에 엄지와 검지로 잡는 뚜껑꼭지(손잡이)가 없는 형태이다. <朝鮮陶磁名考>에서도 종鍾과 잔盞의 높이와 깊이의 차이가 확연하게 다르다. 종鍾은 손잡이는 없지만 주둥이 쪽과 밑구덩 쪽이 거의 차이가 없이 반지름의 길이가 동일해 보인다.
▲ <사진 17>《부풍향차보》의 다반 |
盤(다반)은 개다리를 한 원형 소반(狗足盤)이다. 일상에서 쓰는 소반을 잔상으로 사용한 용례이다.《부풍향차보》의 소반은 상판에 다리만 붙인 형태이다. 여염집에서 일반적으로 쓰인 소반의 모습 그대로다. <사진 18>과 매우 흡사하다. 장식이 적고 단조로우며 다리에 중대가 없는 개다리 형태를 하고 있다. 호족반은 소반 다리가 호랑이 다리같이 날렵하게 생겼다하여 호족반이라 불린다. 다리의 높이가 일반적이면서 반이 넓은 것은 식사용이지만 반이 넓으면서 다리가 훤칠하게 높은 것은 식사용보다는 집안의 혼례나 고사 등 각종 예식에 사용되었다. 떡이 담긴 시루를 올려놓고 고사를 지낸다하여 시루반이라고도 부른다.
▲ <사진 18>, <사진 17>과 닮은 소반 |
개다리소반(구족반)은 상다리 모양이 개의 뒷다리처럼 구부러진 막치 소반을 일컫는다. 옛 기물은 명칭이나 용도를 정확하게 서술해야 한다. <朝鮮陶磁名考>를 쓴 아사가와 다쿠미(淺川 巧, 1891~1931)는 일찍이 이것을 걱정하였다. 이운해는 찻그릇의 바른 이름을 찾아주고 용도와 기능에도 맞는 찻그릇 규명究明에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 <사진 19> 해주반, 통영반(竹節盤), 호족반, 나주반 |
추기
右 李弼善運海知扶安縣 與其季前正言重海及從叔 曾游寒泉門下者 商確譜製者也 余亦爲其有用 錄來今二十年 尙在巾衍 而弼善兄弟 俱作古人 哀哉 姑志下方 以示兒輩 丙申五月十四日 頤翁 其從叔之子一海進士 與趙裕叔同硯云. 이 茶譜는 필선 이운해가 부안현을 다스릴 때 막내아우 전 正言 이중해 및 한천 문하에서 유학한 종숙과 함께 의논하여 보를 만들었다. 나도 유용할 것 같아 기록하여 가져온 지 2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보따리를 풀지 못했다. 그러나 이운해 형제는 모두 고인이 되었으니 슬프다. 우선 아래 방법을 기록하여 자손들에게 보인다. 병신년(1771) 5월 14일 이옹. 종숙의 아들 진사 일해와 조유숙과는 동문이라고 한다.
목포대학교 인문학부 연구전임교수 정서경 teac2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