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14. 23:55ㆍ여행 이야기
박제상설화(朴堤上說話)
【해설】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 박제상(〈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나와 있음)이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왕의 동생들을 구하고 자신은 죽음을 당한 설화.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죽어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는 아내의 이야기도 포함된다.
신라 때의 전설. 390년(내물왕35)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어 앞으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왕자를 한 사람 볼모로 요구하자 셋째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보냈으나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 후 412년(실성왕11) 고구려가 화친의 뜻으로 왕자를 볼모로 요구하매 미사흔의 형 복호(卜好)를 보냈으나 역시 돌려보내지 않았다.
다음 대의 눌지왕(訥祗王)은 두 아우를 잃고 근심하다가 충신 박제상(朴堤上)에게 그들을 구해 오도록 명하였다. 박제상은 고구려로 가서 복호를 데려오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계략을 써서 미사혼을 신라로 탈출시켰으나 자신은 붙잡혀 혹형을 받고 살해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통곡하며 박제상에게 대아찬(大阿粥) 벼슬을 추증하고 미사흔을 제상의 딸과 혼인시켰다. 제상의 부인은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 <삼국유사>에는 김제상(金堤上)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밖에 <삼국사기> <동국통감(東國通鑑)>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
【줄거리】
『박제상은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간 왕제 보해(寶海: 삼국사기에는 卜好)를 구하러 변복을 하고 가서, 왕의 추격을 무릅쓰고 같이 탈출하여 무사히 귀국하였다.
다음에는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 있는 왕제 미해(美海: 삼국사기에는 未斯欣)를 구하러 가서 신라를 도망해 왔다고 하며 왕의 신임을 얻은 뒤에 미해를 탈출시키고 자기는 붙잡혀서 문초를 받았다.
일본 왕의 문초와 설득에도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으며, 차라리 계림의 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벼슬이나 녹을 먹지 않겠다.”라는 말로 계림 사람임을 주장한 뒤에, 발바닥의 껍질을 벗기운 채 불타 죽었다.』
『신라 초기 내물왕 즉위 36년 경인(庚寅.390)에 일본이 사신을 보내어 앞으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표시로 왕자 한 사람을 보내라 하므로, 셋째 미해왕자를 보냈으나,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 후 눌지왕 때 고구려가 화친을 명목으로 왕제(王弟) 보해를 보내달라고 하므로, 하는 수 없이 또 보내자 그 역시 돌려보내지 않았다. 눌지왕은 아우 둘을 잃고 근심하던 중 충신 박제상으로 하여금 그들을 구해오도록 명하였다.
이에 박제상은 고구려로 가서 보해를 구하고, 다시 일본으로 가서 온갖 고초 끝에 미해를 귀국시켰으나, 자신은 모진 고문으로 순국한다.
나라에서는 이 소식에 감격하여 그에게 대아찬이란 벼슬을 주었으나, 제상의 부인은 슬픔에 잠겨 울다가 치술령 고개에서 죽어 치술신모(神母)가 되었다.』
『박제상은 볼모로 잡혀간 동생들을 그리워하는 왕을 위해 고구려에 몰래 들어가 보해(寶海:〈삼국사기〉에는 卜好)를 구해 온다. 보해를 만난 왕은 매우 기뻐하면서도 일본에 있는 미해(美海:〈삼국사기〉에는 未斯欣)를 생각하며 눈물짓곤 했다.
이에 박제상은 미해를 구해오기 위해 곧장 배를 타러 갔다. 그 아내가 소식을 듣고 달려왔으나 남편은 이미 바다 한가운데에 나가 있었다. 일본에 간 박제상은 신라에서 도망왔다며 거짓말을 하고 일본에 살면서 물고기와 새를 잡아다 왕에게 바쳐 신임을 얻었다.
어느 날 새벽 안개가 짙게 낀 틈을 타서 박제상은 미해를 탈출시키고 자신은 남아 붙잡히게 되었다. 박제상은 일본 왕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계림의 개ㆍ돼지가 될지라도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으며, 계림에서 벌을 받을지라도 왜국의 벼슬이나 녹은 먹지 않겠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일본 왕은 박제상의 발바닥을 벗겨 갈대와 뜨거운 철판 위를 걷게 하는 등 고문을 하다가,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불에 태워 죽였다. 눌지왕은 박제상의 공을 기려 그의 아내를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그의 딸은 미해의 부인으로 삼았다.』
【감상】
이 설화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박제상이 고구려 왕을 설득했더니 보해를 풀어주었다고 해 말의 힘을 중요하게 다루나, <삼국유사>에서는 밤에 탈출했다고 해 지혜와 용기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박제상이 일본으로 갈 때 집에도 들르지 않고 곧장 떠나는 부분은 두 책에 모두 실려 있다. 개인의 일보다 나라의 일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문헌설화 특유의 관점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구전설화에서는 박제상의 충성심보다는 그 부인이나 딸의 인간적인 괴로움에 관심을 두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당시 민간에서는 박제상의 부인을 이야기 대상으로 삼은 흔적이 남아 있다. 박제상이 떠난다는 것을 듣고 부인이 뒤쫓아가다가 채 이르지 못하고 망덕사(望德寺) 남쪽 모래 위에 누워 부르짖었다는 곳의 모래를 '장사'(長沙)라고 했으며, 집으로 데려가려 하자 부인이 다리를 뻗고 앉아 일어나지 않았다는 땅은 '벌지지'(伐知旨)라 했다고 한다.
그 뒤 부인은 세 딸과 함께 치술령(述嶺)에 올라가 일본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어서 치술신모가 되었는데 사당(祠堂)도 남아 있다고 한다. 다른 구전설화에는 부인은 죽어 '치'라는 새가 되고 세 딸은 '술'이라는 새가 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대조해 보면 등장인물의 이름에 차이가 있고, 왕제의 부하 이름이 <삼국유사>에는 보이지만 <삼국사기>에는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사실상 부사(副使)가 따라간 것을 밝힌 것도 되고, 박제상이 귀환 활동을 할 때 협조를 얻어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이 귀국할 수 있게 설정한 것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왕을 설득하였더니 순순히 왕제를 풀어 주었다고 하여 박제상의 언변을 중시하였고, <삼국유사>는 야간 탈출을 하였다고 해서 담력과 지혜를 중시하였다.
두 기록 다 박제상이 집에 들르지 않고 즉시 일본으로 떠났다고 한다. 이것은 부부나 가정의 정보다 국사가 더 중요하다는 박제상의 충성심을 드러내면서도 인간적인 고뇌를 함께 드러낸 대목이다.
그러나 이들 문헌은 박제상의 사실(史實)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이므로 민간설화 측면에서는 박제상 부인 편을 드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남편이 집을 떠나자 몸부림쳐 울었고(그래서 望德寺 앞 모래톱을 長沙라고 함.), 만류를 뿌리치고 다리를 뻗고 울었고(그래서 그곳을 伐知旨라 함), 일본에 간 남편을 치술령에 올라가 그리워하다가 죽어서 치술령 신모(神母)가 되었으며, 그 사당이 지금까지 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삼국사기>보다 설화적인 증거를 많이 제시하고 있다.
박제상의 아내는 일본에 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지쳐 죽어서 망부석이 되었는데, 그곳의 주민은 아직도 부인의 정렬을 칭송하고 있다 한다. 다른 구전으로는 박제상의 아내는 죽어서 ‘치’라는 새가 되고 같이 기다리던 세 딸은 ‘술’이라는 새가 되었다고 한다.
또 이들이 떨어져 죽은 치술령고개 밑에는 은을암(隱乙庵)이 있는데, 이 암자는 절벽에 떨어져 죽을 때 새(乙)가 되어 숨어서〔隱〕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부인과 딸이 죽어서 새가 된 것은 새에게는 멀리 날아가서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날개가 달려 공간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몸이 새라면 바다를 건너가서 남편과 아버지를 만나볼 수 있으련만……하고 간절히 바라던 것이 사후에 새로 변신하여 성취되었다.
죽음을 초월하면서 사랑은 면면히 이어지는 것이며, 살아서 바다 건너로 떠날 수 없는 한을 죽어서 새가 되어 풀고 만난 점에서 한국인의 애정관이 절절히 표출된 것이다. 딸이 아버지를 만나려고 새가 된 것도 죽음을 건너 이어지는 부녀간의 사랑이다.
이때 은을암은 박제상 처자를 모시고 기념하던 당으로서 망부석과 같은 기념물이라 할 수 있다. 치술령의 산신이나 신모가 된 것은 주민이 박제상 부인을 존경하는 마음과 신앙심이 강조된 현상이며, 산신이 되었으므로 당연히 당이 지어진 것이다.
이 설화에는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충성심에 박제상 자신과 그의 아내와 딸의 인간적인 고뇌를 근거로 한 애정․정렬․효도 등의 복합적인 윤리관이 들어 있다. 구전설화 쪽이 더 인간적이며 가정적인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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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을암은 국수봉에 있는 바위이며 신라 충신 박제상과 그의 부인 치술신모에 관한 설화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박제상이 눌지왕의 명을 받아 고구려에 가서 왕제 복호를 구출하고,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왕제 미사흔(삼국유사는 미해)을 왜국으로부터 도망쳐 돌아오게 한 후 그는 끝내 신라의 신하됨을 주장하다가 죽었다. 이 일이 있은 오랜 뒤에 제상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정을 못이겨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어서 마침내 치술신모가 되었다.
울산지방의 속설에 김씨부인은 죽어 몸은 화석이 되어 망부석이 되고 넋은 새가 되었다. 새가 된 넋은 한 마을에 와서 앉았다가 날았다 하여 그 곳을 비조라 하며 또 새는 한 바위 구멍으로 들어가 숨었으므로 그 바위를 이름하여 은을암이라 하였다. 비조는 두동면 만화리에 있으며 은을암은 국수봉에 있다.
속된 설화의 뒤에도 숨은 암시가 있기 마련이다. 설화에 숨어있는 시사에는 신모의 신시가 들어있다. 신모의 뜻에 따라 비조에 신모사와 치산원을, 은을암 앞에는 은을암을 세워 그를 사제하였다는 것이다. 국수봉은 국사봉의 음전함이니 여기에서 신모를 위한 국가의 제전이 있었음을 산이름이 말하여 주는 것인데 은을암과 은을암은 먼 옛날에는 바로 그를 위한 국사당 그것이었을 것이다.
[박제상의 말무덤]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이 볼모로 잡혀간 왕자를 구하기 위해 왜국으로 떠날 때, 편지를 써서 말의 발목에 매어 집으로 보냈다. 말은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가 지쳐 이곳에 이르러 죽었다.
그래서 마을이름도 ‘말무덤’, ‘마릉(馬陵)‘이라고 불렀다. 또 큰말아래가 되므로 ’아릿말‘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사람들은 말이 쓰러진 곳에 큰 무덤을 만들어 묻어주었는데 지금도 그 무덤이 전해오고 있다.
마을사람들이 이 무덤의 흙(황토)을 파다가 부엌이나 벽을 바르기도 했는데 그러면 반드시 그 집에 탈이 생기곤 했다.
그래서 다시 흙을 북돋워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이 말무덤은 마을 동편 끝자락의 밭에 있다.
박제상의 집은 이 마을에서 남쪽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제내리 토상지에 있었다고 전한다
신라 천년의 으뜸충신 박제상과 망부석
신라 천년을 통틀어 최고의 충신을 꼽으라면 눌지왕 때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잡혀있던 왕자들을 구출하고 왜국에서 장렬하게 죽은 박제상을 들 수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종합하여 박제상 이야기를 추론하면 개요는 이렇다.
박제상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후예로 신라 제 5 대 파사왕(婆娑王, 80 - 112)의 5세손이며 조부는 갈문왕(葛文王) 아도(阿道)이고 부친은 파진찬(波珍湌) 물품(勿品)인데, 벼슬이 삽량주(歃良州, 지금의 양산)의 간(干, 태수격)이었다.
일찍이 내물왕이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던 일이 있는데(실성은 392년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가 10년 후인 401년 귀국한다), 내물왕이 서거하자 내물왕의 아들이 아직 어려서 국인들이 실성을 왕으로 옹립한다. 실성은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갔던 그 원한으로 왕이 되자 내물왕의 아들인 미사흔(未斯欣)을 402년 왜(倭)의 인질로 보냈고, 이어 고구려에서도 인질을 청하자 다시 내물왕의 다른 아들인 복호(卜好)를 412년 고구려의 인질로 보냈다.
그 후 417년 내물왕의 아들인 눌지가 정변(쿠데타)를 일으켜 실성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제19대 눌지왕인데, 왕은 항상 동생들을 그리워하여 그들을 귀국시킬 방책을 구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사신의 임무를 수행할 적임자로 박제상을 추천하자, 그는 먼저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장수왕을 설득하여 마침내 418년 정월에 복호를 구출하여 함께 귀국한다. 이에 왕이 기뻐하면서, ‘내가 두 아우를 좌우의 팔과 같이 생각하는데, 지금 다만 한 팔을 얻었으니 이를 어찌하리오?’라고 한탄하니 제상은 죽기를 맹세하고 처자도 찾아보지 않은 채 율포(栗浦)에서 배를 타고 다시 왜로 향한다.
제상의 부인이 이 말을 듣고 급히 달려 와 포구에 있는 배를 바라보면서 대성통곡하니, 제상이 돌아보며, ‘내 큰 사명을 띠고 적국으로 들어가니 어찌 그대와 다시 만나보기를 기약할 수 있으리오.’라고 말하고 드디어 왜국으로 들어가, 거짓으로 신라를 배반하여 도망친 것처럼 행동하여 왜왕의 의심을 푼다.
후에 왜는 신라를 습격하려고 군사를 일으켜 미사흔과 박제상을 장군으로 삼아 길을 인도하게 하여 해중산도(海中山島)에 이르렀다. 이 때 제상이 미사흔을 가만히 청하여 본국으로 도망갈 것을 권하니, 미사흔이 말하기를, ‘나는 공을 아버지와 같이 받드는 터인데 어찌 나 혼자만 돌아가리오?’하므로, 제상이 말하기를, ‘만약 두 사람이 함께 떠날 것 같으면 우리가 도모하는 일을 이루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입니다.’하므로, 미사흔은 제상의 목을 끌어안고 울면서 이별을 고하고 신라로 도망친다.
제상은 그날 밤에 홀로 미사흔의 방안에 누워 자고는 아침에 늦게 일어났는데, 이는 미사흔을 멀리 달아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제상이 일어난 후에 마침내 왜인들이 미사흔의 도망을 알게 되어 그 뒤를 추격하였으나, 운무가 끼어 더 이상 추격하지 못하고, 제상을 포박하여 왜왕에게 보내니 왜왕은 그를 목도木島(대마도)에 귀양 보냈다가 얼마 후에 나무에 불을 질러 온 몸을 태운 후에 참수하였다.
눌지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그에게 대아찬의 벼슬을 추증하고, 미사흔에게 박제상의 둘째 딸을 아내로 맞게 함으로써 그 은혜를 갚게 하였다.
박제상의 순국 소식을 들은 부인 김씨는 슬픔과 원한을 이기지 못하여 딸 셋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서 왜국를 보면서 통곡하며 남편을 따라 정절로써 죽으려 하자, 딸 셋 또한 따라 죽으려 함에, 둘째 딸 아영(阿榮)에게 이르기를 ‘너는 살아남아서 네 동생 문량(文良)을 양육하여 아버지의 후사를 잇게 하라.’하고 부인 자신과 두 명의 딸, 즉 큰 딸 아기(阿奇), 막내 딸 아경(阿慶)은 함께 정절사 하였는데, 죽은 세 모녀의 시신은 곧 돌이 되어 망부석이 되었고, 그 넋은 새가 되어 망부석 남쪽 십 여리에 떨어져 있는 국수봉 바위틈으로 날아가 숨었다.
이에 후세 사람들이 새가 날아간 마을이름을 비조飛鳥(즉, 새가 날아감)라 하였고, 새가 숨은 바위를 은을암(隱乙巖, 새가 숨은 바위)이라 하였다. 현재 두동면 만화리에는 비조(飛鳥)라는 마을이 있으며, 국수봉의 척과리 쪽 방향에 은을암이 있다.
박제상과 망부석의 전설을 찾아 떠나는 겨울길은 찬바람이 휑하니 불어 박제상 부인의 한맺힌 설움을 대변해 주는 듯 하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에 있는 박제상 유적지이다.
박제상 유적지를 찾아가는 도중에 국도변에서 만난 선바위. 울산시 범서읍 입암리에 있으며 울산 12경의 하나이다. 태화강 상류에 있는 이 바위와 백룡담에는 스님과 마을처녀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오고 있다.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에 있는 박제상 유적지 치산서원의 홍살문
죽어서 새가 되었다는 박제상 부인 김씨와 두 딸의 기념상
치술령 정상 조금 아래 있는 망부석, 울산시에서 주장하는 망부석이다.
향토 역사학자가 주장하는 또 다른 망부석, 치술령 정상 바로 아래 있다.
치술령 정상에 세워진 김씨 부인의 신모사지, 김씨 부인이 죽자 국대부인으로 추대하고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던 곳. 신모사는 없어지고 터만 남았다.
해발 765m의 치술령 정상
경주시에 주장하는 또다른 망부석의 정상이다. 멀리 바다까지 보이는게 아마도 여기가 진짜 망부석인가 싶다. 아래는 경주시 외동읍의 전경이다. 이로써 치술령 정상에는 모두 3개의 망부석이 있다. 울산시와 경주시에서 각기 망부석은 자기네 동네의 유적이라 우기고 있어 벌어진 현상이다. 치술령은 경주시와 울산시의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경주시에서 주장하는 망부석의 모습이다. 전설에 의하면 박제상의 부인은 남편을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다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고 실상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두 딸과 함께 바위 아래로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앞의 두 망부석은 크기로 보아 사람이 떨어져 죽을 정도의 높이는 아니다. 그러나 이 바위는 떨어지면 치명상을 입을 정도로 벼랑이 높다.
국수봉 아래 은을암 오르는 계단이다. 박제상의 부인 김씨는 죽어서 새가 되었는데 곧바로 왜국으로 날아가 남편의 영혼과 함께 돌아와서는 눌지왕 앞에 나타나 부리로 글을 쪼아 아뢰기를 내가 박제상의 부인이며 남편의 영혼을 데려왔다고 하였다. 이에 눌지왕이 기이하게 여겨 새가 날아 숨어든 바위위에 신모사라는 절을 짓게 하고 제사를 모시게 하였다. 지금은 은을암이라는 암자가 하나 있다.
새가 숨어들었다는 은을암 바위 아래 동굴입구에는 제단이 차려져 있다.
조선전기의 성리학자인 점필재 김종직은 박제상 부인의 망부석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조를 지어 읊었다.
鵄述嶺頭望日本 치술령 꼭대기에서 일본을 바라보니
粘天黥海無涯岸 하늘에 닿은 물결 가이 없어라
良人去時但搖手 낭군님 떠나실 때 손만 흔들어 주시더니
生歟死歟音耗斷 살았는가 죽었는가 소식조차 끊어졌네
音耗斷長別離 길고 긴 이별이여
死生寧有相見時 죽은들 산들 서로 만날 날이 있으리
呼天硬化武昌石 하늘을 보며 울부짖다 망부석으로 굳어지니
烈氣千載干空壁 열녀의 기상이 푸른 하늘까지 닿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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