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Re:고구려의 개마무사 - 일본벽화 <<<ㅡ 고구려 고분벽화

2013. 5. 14. 23:58우리 역사 바로알기

 

 

 

 

 


                                   ■日本 奈良 百濟古墳, 顚末 어둡다.

                     兩 石室 剝離壁畵, 復歸 사실상 絶望的


    韓半島 유래 大壁 遺構 화제


   아스카의 히노쿠마(檜前)에 있는 히노쿠마 유적 집단 자리에서 한반도로부터 유래한 대벽(大壁) 유구가 발견돼 화제다.

   옛 한국에서 건너간 호족 야마토노아야(東漢氏)의 사설 암자(氏寺)였던 隈寺터 이웃에 히노쿠마 지역과 東漢氏를 좀더 가깝게 관련 지웠다. 아스카 역사공원의 기토라 고분 주변 지구와 근린공원을 정비하다가  발견했다.

   아스카 무라 교위(敎委)가 약 120㎡를 발굴 조사된 대벽 유구는 코너가 있는 남북 10m동서 7m의 L자 형으로 검출됐다. 도랑(溝)에 기둥 구멍이 늘어서 있음이 특징이었고, 기둥 열을 메우듯 흙을 쌓아올려 발라 두꺼운 벽을 만들었다.

   도랑은 너비 40-70cm, 깊이 40cm의 대형이다. 지름 약 20cm의 기둥 구멍이 25-60cm간격으로 줄서 있다. 코너 안쪽 공간에는 토막 난 도랑도 보여 건물을 이룬 가능성도 높았다.

   대벽의 기둥을 뽑나낸 흔적에서 7 세게 중반께의 수혜기 그릇이 발견됐다. 대벽이  같은 시기에 무너진 것을 생각된다.  더욱이 7세기 후반에 세운 건물 터가 새롭게 모두  8채나 확인됐다.

   중심적인 건물은 동서 8m 남북 8m 이상으로 주위에 챙이 있었다. 전년도 발굴 조사에서도 같은 언덕에서  기둥 건물이 5채 확인된 상태여서 7세기 후반 건물 집단 주위는 추정해 동서 40m, 남북 60m에 넓혀있다.


   기토라古墳 벽화 高松塚에 影響ㅡ?


   7세기 후반은 檜隈寺 가람 조영이 본격화되던 시기로 교위측은 동한T가 거주한 건물 집단으로 보았다. 발굴 담당 문화재과 위촉직원 하세가와(長谷川 透)씨는 이렇게 말했다.

   “도래계 특징으로 보는 대벽 유구가 히노쿠마 중심부에서 처음 발견된      의의가 크다”

   이에 현지 견학회는 지난 3일 (11월)이 유구를 둘러보았다. 현장은 아스카 역에서 도보 20분. 檜隈寺 터 남쪽 200m, 기토라 고분 북서 450m 지점이었다.

   한편 아베산(阿部山)에 있는 키토라 고분 (百濟 昌平왕릉·특별사적, 7세기 말-8세기 초) 석실에서 걷어낸 사신도 ‘주작(朱雀)’ 등극채색 병화에 대해 문화청 고분벽화보존 활용 검토회는 지난 4일 석실에 되돌리게 될 경우 곰팡이 발생이 피하기 어렵다고, 외부시설에 보존해 공개할 방침을 결정했다.

   기간은 당분간이라고 하지만  현재의 기술로 곰팡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문화청은 기본 원칙으로 했던 현지보존을 사실상 단념하게 됐다.

    이와 똑같이 곰팡이 문제의 열화로 석실을 해체했다가 복원하게 된 高松塚 고분(아스카 平田)의 국보 벽화의 장래적 보존 방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지 않을 우려된다.


    ■가을의 나라(奈良)ㅡ.       


    명소의 아름다운 단풍 절경에서 역사의 땅을 찾는 계절감각을 충만하게 한다. 이제 十一月맞아 奈良의 풍물은 모든 것에서 옛 百濟의 향수를 짙게 물들이게 해 더욱 사무치는 감개를 누르기 어렵다.

    곰팡이 얼룩 처리를 잘 못해 벽화 보전이 어렵다는 이유로 석실 전체를 해체했던 아스카(飛鳥)의 특별사적 고송총(高松塚) 고분이 복원됐다. 지난 24일부터 일반 견학이 진행됐다.

    그 직경이 하단 32m ,상단 18m, 높이 7m의 봉분 외형이 복원됐다. 7세기 초부터 팔세기 초에 조성된 종말기 百濟 禪廣왕릉으로 추정되는 이 고분 석실에서 1972년 극채색벽화 미인도와 사신도 등이 발견됐다.

    이에 봉분 안 보존시설을 갖추었으나 곰팡이 등이 번져 벽화가 크게 오염돼 2006-7년 열화된 석실을 해체하고 벽화를 걷어내 임시 수리시설에 옮겼다. 十一月에 이 벽화의 일반 공개가 예정돼 있다

    지난달 말(2009.10.31)부터 十一月 八日까지(14일 제외) 8일간 국영 아스카역사공원에 있는 임시 수리시설에서 국보 高松塚 古墳壁画를 일반에 공개했다. 지난해부터 연 두 번 공개해왔다. 이번에 4회째였다.

    견학은 수리작업실 안에 전시돼 있는 벽화를 견학 통로에서 유리창 너머로 들여다 보았다. 담당자의 사전 가이던스가 있었으며 소요시간은 약 30분으로 이 안에 견학시간 10분이 포함돼 있었다. 견학은 하루 400명씩 호황을 이루었다.


   ■아스카(飛鳥)時代ㅡ.


   고송총이 해체될 때만 해도 이 마을(明日村·아스카무라) 사람들은 완강히 반대하며 거부했다. 그러난 이제는 누그러진 인상이다.

   ㅡ“아스카 마을을 지금 의 모습을 남기고 싶다.”는 문화청이 크게 반영하고 있어서다. 이 옛 도시 보존법이 1966년에 적용됐다. 그후 1970년 十二月 각의에서 결정됐다.

   보존운동의 기운이 한창 활발해지면서 1972년 高松塚 古墳의 극채색 벽화가 길고 긴 수면에서 일깨워졌다. 그때 찬란한 모습을 드러내 벽면에 그려진 사신도(四神圖)가 개발의 물결을 되돌린 수호신으로 「아스카(飛鳥)」를 지켜왔다.

   많은 사람이 아직 아스카 마을에 그 옛 百濟시대(飛鳥時代)의 입김을 감촉하는 것은 쉼 없이 지속되는 발굴 조사의 성과 밖에 없었다. 高松塚 古墳은 그 같은 유적을 비추는 빛의 근원 구실을 했다.

   고분 발굴로 자태를 나타낸 아스카(한국어로 ‘安宿’·오랜 방황에서 편안히 쉼) 땅은 흙이나 돌에 상징된 색깔 아쉬운 세계였다. 21세기에 사는 오늘의 그들은 高松塚 古墳의 壁画로 거기 선연한 색깔과 광택으로 겹쳐 있다.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그 빛과 색채가 하루라도 더 오래 반짝이기를 이 곳 사람들은 빌고 있다. 이 고분의 벼과 수복은 1976년 시작됐다. 발견된 30년 만에 「美人圖」에 검은 곰팡이가 피면서 문제를 심각하게 했다.


   ■日本文化의 發祥地ㅡ.


   百濟의 義慈王 아들 여풍(余豊) 세자가 인질로 일본에 건너간 것은 혼자 아닌 두 세자였다. 아우 余禪廣 (善光) 세자가 함께 갔다. 형은 백제에 돌아갔으나 선광은 고국의 멸망후 비운에 숨졌다.

   「속일본서기」는 지토(持統)천황 때 百濟王 칭호를 내렸으며 사후 정광참(正廣參·정 삼위 상당) 벼슬을 내렸다. 그 아들 百濟王 창성(昌成)은 아버지보다 앞서 세상을 떴다. 아들 昌成의 왕릉은 기키토라 고분이다

    기토라 고분의 벽화의 「천문도(天文圖)」고구려의 그것과 밀접하다. 북쪽으로 1.2km 거리를 둔 高松塚 古墳 벽화의 안료는 천문도를 그리다 남은 재료를 쓴 흔적을 보인다.

   千田稔・国際日本文化研究센터 教授(考古学)는、百済王 禅広이 高松塚 古墳 被葬者라고 했다. 千田 교수는 말한다.

   ㅡ“고국을 잃은 百濟王을 위해 출신지의 전통에 걸맞는 능을 조성해 주었을 것이다. 벽화의 훌륭함을 곧 황족에 연결하는 것은 일본인의 나쁜 버릇이다. 천황가의 능에는 벽화가 그려 있지 않다.”

    덴무(天武)천황이 점성대를 만든 때는 昌成 사후, 아스카 지역에서의 천문학에의 관심이 기토라 고분에 반영된 탓도 있다 할 것이다. 일본(倭) 에 대륙의 선진문화를 전수한 나라는 중국 아닌 한반도의 백제였다.

   일본인 최초의 독일 유학생으로, 일본 근대철학의 개척자인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郞 1855-1944) 교수는  대학 강단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다음과 같은 명언을 반복해 강조했다.

   ㅡ“제군, 조선의 扶餘에 다녀오게나. 그곳이 일본문화의 발상지다. 扶餘       를 보지 않고 일본문화를 말하려 한다면 이는 참으로 어불성설이야!”


 ■새 時代의 激動ㅡ.


  나는 새의 아스카(明日香) 땅이 가광을 받은 시대는 6-7세기의 약 200년이다. 야아마토 삼산(大和三山)과 요시노(吉野)의 분수령이 되는 산과 산에 싸인 언필칭 아스카(飛鳥) 땅은 아주 ‘작은 곳(小天地)’이었다.

   동서 약 6km, 남북 약 8km에 이르는 오늘의 아스카무라(明日香村)를 중심으로 사쿠라이(櫻井), 가시하라(木+畺原), 다카도리(高取)의 시(市)와 정(町)을 일부를 포함한 이 소천지를 아스카(飛鳥)라고 불렀다.

    대륙으로부터 새로운 문화와 지식을 가지고 날아든 百濟사람들로서는 그곳이야말로 철새 떼가 마음 놓고 쉬는 큰 숲 나무그늘로 생각됐다. 제26대 계이타이(繼體) 왕조(507―531)가 飛鳥 땅을 중심으로 상고사를 전개했다.

   이 시대는, 불교문화의 전래와 수용이라는 새 시대의 격동과 청신한 기풍이 이 작은 산야에 넘치도록 계곡을 흐르는 아스카 냇물처럼 물장구를 치고, 인간의 정념을 더욱 뜨겁게 일렁이며, 고대사를 범람하게 했다,

   百濟의 古爾王(재위 234-286)이 보낸 王仁박사가 고대 한국 全羅道 방언으로 천자문을 가르치고, 이로써 만요슈(万葉集) 노래가 일본인의 마음의 고향 같은 작품을 고대사 전환기에 남길 수 있었다.

    고대사의 아스카길(飛鳥路), 길섶은 영원한 시간이 존재하는 그 시대의 석조 유적과 만요(万葉)노래비가 고대 한국어로 읽히도록 줄줄이 서 있다. 이 가을단풍철 모처럼의 일본나라(奈良) 역사기행의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사진: 美人圖('銀河의 宮殿' <奈良飛鳥文化>  사이트 참조)


   











출처 : 백담 그 시절...
글쓴이 : 케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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