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일 연기군이 세종특별자치시(世宗特別自治市)로 승격되면서 관내 읍·면·동의 명칭이 바뀌고, 일부는 공주시에서, 일부는 청원군에서 편입했다. 오랫동안 전의현(全義縣), 연기현(燕岐縣)과 금강 남쪽인 금남면(錦南面)이 각각 별개의 행정구역으로 지내오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연기군(燕岐郡)으로 통합되었다가 100년 만에 다시 세종시로 승격하게 된 것이지만, 실질적 평등의 전제가 무너지고 특례 혹은 특별이라는 접두사를 붙이는 것은 그다지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연기군의 지명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통일신라시대 이래 같은 지명으로 불리게 된 것은 충북 내륙에서 흘러내리는 미호천(美湖川)과 무주 덕유산에서 발원하여 금산·영동을 거쳐 흐르는 금강(錦江)이 제비 꼬리 모양으로 갈라졌다가 연동면 합강리에서 합쳐지는 지형이 마치 날개를 활짝 편 제비(燕) 모습과 같다는데서 유래했다는 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삼국시대 이래 이 지역에 백제 8대 귀족(解氏·眞氏= 이상 왕비 족, 沙氏·解氏·國氏·劦氏·木氏·燕氏)의 하나인 연씨(燕氏)가 토착세력으로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생각건대, 전설을 따른다 해도 그 지명이 오랫동안 유지된 것에 대해서는 약간 의문이 생기고, 후설에 의한다면 475년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으로 개로왕이 전사하고 국가적 위기를 맞은 때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할지라도 한성을 버리고 천도라는 국가 중대사를 임금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문주왕의 웅진 천도는 이 부근을 기반으로 하는 토착세력의 지지와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또, 웅진 천도이후 빈번한 국왕의 시해와 왕권다툼 등에서 급격하게 등장하는 연씨를 생각하면 연씨 세력에 연유한 지명이라고 하는 주장도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고, 현재에는 연씨 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의문에 대해서는 혹시라도 백제가 멸망한 뒤 신라 조정에서는 백제시대의 지배세력에게 일정한 관직을 부여하면서 회유하였으나 투항하지 않자 강원도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다는 기록도 참고할 만하다.

   
 
세종시 연서면은 오랫동안 연기군의 중심이던 연기면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인데, 연서면 고복리와 용암리 사이의 골짜기를 막은 인공저수지 고복저수지가 있다. 주변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서 1983년에 만든 고복저수지는 경부선 조치원역에서 세종시 시민체육관을 경유하여 604번 지방도로를 따라서 공주 방향으로 약7km쯤 떨어져 있는데, 길이 2.2km, 폭 0.7km, 총면적 1949㎢에 이른다.
고복저수지를 만든 이후 농민들은 농업용수 걱정이 사라졌는데, 더불어 가물치·붕어·잉어·메기 등이 많다고 소문이 나 전국에서 수많은 낚시꾼이 찾아오는 유명한 낚시터가 되었다.
탁 트인 저수지 순환도로를 따라서 주변 환경과 어울리게 만든 벚꽃 길은 해마다 이른 봄이면 가족 또는 연인들의 나들이 코스로 인기인데, 1990년 충청남도에서 유일하게 군립공원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세종시에서는 100년 전통의 조치원 복숭아를 전국에 알리고 마라톤 인구의 저변확대를 위하여 매년 복숭아꽃이 피는 4월이면 복사꽃 아가씨선발대회를 비롯해서 '복사꽃' 축제를 벌이고 있으며, 시민체육관 광장을 출발해서 고복저수지를 반환점으로 하는 마라톤 대회를 개최한다.

     
수문산책로 일부(왼쪽)과 수문산책로 전경.
수문에서 오른쪽 첫 커브길 옆 갈대밭에는 이화여자대학교 미대 강 모 교수가 꾸민 야외조각공원의 조각품들이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저수지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으며, 야외조각공원에서 약500m쯤 올라가면 왼편에 민락정(民樂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민락정은 1992년 초 청와대 실세가 출마한다고 내무부장관과 도지사가 관권선거 부정을 폭로한 이른바 ‘연기군수 사건’의 주인공 한모 군수가 조선시대의 향약을 자기 시대에 부흥했다는 취지에서 만든 것인데, 정자 앞에는 건립 유래비까지 세웠다. 정자에 올라서면 저수지와 주변 경치를 한눈에 구경할 수 있었지만 근래에는 관리하는 손길이 미치지 않아서 무성하게 자란 나뭇가지에 가려서 저수지의 풍광을 감상할 수 없다.
2008년 세종시는 관광객과 낚시꾼이 찾는 낚시, 수영, 휴식 등의 친수공간 고복저수지를 생태공원으로 만들기 위하여 2015년 완공을 목표로 대대적인 개발에 나섰는데, 1단계는 하늘 관찰대, 갈대 습지원, 수변관찰로, 소나무 길 등을 만들고, 2단계로 생태 관찰장, 수질정화 분수, 인공식물섬, 산림관찰원, 연꽃 식물원, 방문자센터, 수변 관찰로, 하수처리시설 등이 올해까지 들어서게 되며, 마지막 3단계는 야생초 화원, 습지 생태원, 식생 정화습지, 수중순환기를 설치할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계획의 하나로 고복저수지 수문 옆에 인공 데크 산책로를 만들고, 저수지를 한 바퀴 일주할 수 있는 일주도로도 완성했지만, 너무 조잡하기만 하다. 또, 저수지 상류에 다목적 수영장 및 어린이 수영장, 미끄럼대를 각각 2대씩 만들어서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제공하고 있으나, 상태는 마찬가지다.

   
연기대첩비.
한편, 저수지 상류인 수영장 옆에는 연기대첩 공원이 있는데, 1997년 이곳에 높이 10m의 연기대첩비를 세우고, 매년 10월 국난을 극복한 대표적인 지역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연기대첩은 고려 충렬왕 14년(1286) 4월 몽골에서 왕위계승문제로 내분을 일으켰던 원 태조의 손자인 철목이(鐵木耳)가 원 세조의 친정으로 패한 뒤 그 잔당인 아딴(哈丹)의 무리를 물리친 전투인데, 아딴이 지휘하는 10만 명의 반군이 몽고군에 쫓겨서 고려와 국경이던 등주, 화주로 밀려오더니 충렬왕 17년(1291)에는 고려의 영토인 철령, 원주까지 깊숙하게 들어와서 고려는 수년 동안 때 아닌 전쟁에 휘말리게 되자 강화도로 몽진하는 등 혼란을 겪었다.
금강 부근까지 남하한 반군은 1291년 한희유(韓希愈), 김흔(金忻) 장군을 주축으로 한 여몽연합군이 한밤중에 기습공격으로 연서면 정좌산(正左山)에서 물리쳤는데, 그 사실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여지승람 등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연기대첩은 고구려의 살수대첩(을지문덕), 안시성대첩(양만춘), 고려의 귀주대첩(강감찬), 조선의 한산대첩(이순신), 행주대첩(권율), 진주대첩(김시민)과 함께 우리 역사상 7대 대첩으로 꼽히기도 하는데, 세종시 정좌산과 원수산에는 장수가 올라서서 전투를 지휘했다는 장군바위와 적군이 항복했다는 항서바위를 비롯해서 연서면 쌍전리에 '큰창고개', '작은창고개', '전당골', '승적골', '군량골' 등 연기대첩과 관련된 지명도 많다.
그러나 종래의 농경지 관개의 기능 이외에 시민의 종합위락시설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체계적인 시설관리와 각종 편의시설이 크게 부족할 뿐만 아니라, 저수지 주변에 난립한 음식점들의 위생시설과 생활하수에 대한 정화시설 노력이 부족해서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