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문주왕 / 엔싸이클로피디아 브리태니카 자료 外

2013. 9. 21. 05:55우리 역사 바로알기

 

 

 

 

 

      

 

문주왕

文周王

?~477(문주왕 3).

백제 제22대 왕(475~477 재위).

문주(文洲)·문주(文州)라고도 한다. 제21대 개로왕의 아들이고, 제23대 삼근왕의 아버지이다. 왕자로 있을 때 상좌평(上佐平)을 지내면서 부왕을 보좌했다. 475년(개로왕 21)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수도 한성(漢城)이 포위되자, 동맹국인 신라에 가서 1만여 명의 구원병과 함께 돌아왔으나 이미 도성은 함락되고 개로왕은 살해된 뒤였다. 그는 곧 즉위하여 지금의 공주지방인 웅진을 새 도성으로 정하고,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수리하는 등 국방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한강 유역을 잃은 백제는 문주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큰 혼란에 휩싸였다. 부여씨(扶餘氏)·해씨(解氏)·진씨(眞氏) 등 부여족 계통의 지배세력은 남부에 토착하고 있던 사택씨(沙宅氏)·연씨(燕氏) 등 마한계(馬韓系) 세력의 도전을 받았다. 또한 부여족 계통의 구귀족들 내부의 갈등이 이러한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귀족들의 통제에 실패한 문주왕은 477년 당시 정권을 장악한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의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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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왕 (백제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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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주왕"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http://timeline.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32247>
    [2013. 9. 21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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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문주왕의 성씨(姓氏)

     

        그 동안 의문으로 남았던 백제의 모씨(牟氏)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는 듯합니다.

    옛날에 이 성씨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왕들에게는 죽어서 자손들이 제사지내 주어 죽어서도 영원히 산다는 믿음이 있었죠. 그래서 순장도 하고, 고구려에서는 연호를 지정하여 왕들이나 귀족의 무덤을 지키며 제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암튼 백제와 관련하여 구이신왕을 기준으로 한성백제의 씨가 마르고 구태백제에서 왕위를 이어가는데, 비유왕 다음이 개로왕이고, 개로왕은 장수왕에 의해 시해당합니다. 그 이후 왕이 문주왕인데, 그동안 저도 깜박 속아 개로왕의 아우라고 생각했는데, 신라사를 연구하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문주왕과 삼근왕 동성왕이 모씨입니다.

     

       이 문주왕이 온조세력에 의해 시해되자 그 아들 삼근왕이 왕위를 이어가지만 또 2년만에 온조세력인 해씨에 의해 시해되고..

    동성왕는 개로왕의 아들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문주왕의 둘째아들 또는 조카뻘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이 모씨입니다. 동성왕 또한 시해당합니다.

     

    이후 무령왕은 우씨인 곤지의 아들로 구태백제를 이어가게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쭈~욱 의자왕까지 구태백제가 백제를 다스린 것으로 보입니다.

     

     

     

    19 구이신왕(久爾辛王) 구이신(久爾辛) 420년 ~ 427년 전지왕의 아들.
    20 비유왕(毗有王) 비유(毗有), 비(毗) 427년 ~ 455년 구이신왕의 아들. 또는 서자
    21 개로왕(蓋鹵王) 근개루왕 경사(慶司), 경(慶) 455년 ~ 475년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22 문주왕(文周王) 문주(文周), 모도(牟都), 도(都) 475년 ~ 477년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23 삼근왕(三斤王) 삼근(三斤) 477년 ~ 479년 문주왕의 아들.
    24 동성왕(東城王) 동성왕[3]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대(大) 479년 ~ 501년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25 무령왕(武寧王) 무령왕 사마(斯麻), 융(隆) 501년 ~ 523년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26 성왕(聖王) 성왕 명농(明襛), 명(明) 523년 ~ 554년 무령왕의 아들.

     

                                                                                                     다음 카페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북극의눈물 님의 글 중에서

     

     

     

     

    백제 제22대 문주왕

     

     

    백제 제22대 문주왕(文周王, ? ~477년, 재위: 475년~477년)은 백제의 제22대 왕이다. 문주(汶洲)라고도 하며 개로왕의 아들이다. 일본서기 유랴쿠기(雄略紀)에는 개로왕의 모제(母弟, 동생)로 기록되어 있다. 이름은 남제서(南齊書) 백제전와, 양서(梁書)에서는 모도(牟都)로 기록되어있고, 송서(宋書) 백제전에는 여도(餘都)로 기록되었다. 즉위 전에, 부왕(父王) 개로왕을 도와 상좌평(上佐平)을 지냈다.

     

     

    생애

    475년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한성을 공격하자 문주는 개로왕의 명을 받아 신라에 가서 원병을 요청하였다. 군사 1만명과 함께 돌아와 고구려가 물러갔으나 성은 파괴되었다. 왕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475년 음력 10월,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겼다.

    부여족 계통의 지배세력들은 남쪽의 마한 세력에게 도전을 받고 귀족 통제에 실패한 문주왕은 결국 477년 당시 정권을 장악했던 병권좌평 해구가 보낸 자객에게 죽임을 당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품이 부드러워 결단력이 부족하였으나 백성을 사랑하였고 백성 또한 그를 사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

    가계

    주석

    1. 性柔不斷 而亦愛民 百姓愛之, 《삼국사기》권26.

    참고

    전 대
    개로왕
    제22대 백제 국왕
    475년 - 477년
    후 대
    삼근왕

     

     

     

     

    제22대 문주왕<文周王  475~477  재위기간 2년>

    문주왕['文周'를 '汶州'로도 쓴다.]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처음에 비유왕이 죽고 개로가 왕위를 이었을 때 문주가 그를 보좌하여 직위가 상좌평에 이르렀다. 개로 재위 21년에 고구려가 침입하여 한성을 포위하였다. 개로가 성을 막고 굳게 수비하면서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토록 하였다. 그는 구원병 1만 명을 얻어 돌아왔다.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으나 성이 파괴되고 왕이 붕어하여서 문주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격은 우유부단하였으나, 또한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들도 그를 사랑하였다.
    겨울 10월,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2년 봄 2월, 대두산성을 수축하고 이곳으로 한강 이북의 민가를 옮겼다.
    3월,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려 하였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았으므로 되돌아왔다.
    여름 4월,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쳐오자 왕이 기뻐하여 그 사신을 은솔로 임명하였다.
    가을 8월, 해구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3년 봄 2월, 궁실을 중수하였다.
    여름 4월, 왕의 아우 곤지를 내신 좌평으로 임명하고, 맏아들 삼근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5월, 검은 용이 웅진에 나타났다.
    가을 7월, 내신 좌평 곤지가 사망하였다.

    4년 가을 8월, 병관 좌평 해구가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여, 법 질서를 문란하게 하며, 임금을 경시하였으나 왕이 이를 제어하지 못하였다.
    9월, 왕이 사냥하기 위하여 나갔다가 외부에서 묵었는데, 해구가 도적으로 하여금 그를 해치게 하여, 왕이 마침내 붕어하였다.

     

     

                                                                                                                 다음 카페 <주목(목향)>  천리향 님의 글 중에서

     

     

     

    백제 문주왕과 모도왕

     

     

     

    게 시 자 : 수심자 (구자일)               게시번호 : 265
    게 시 일 : 1997/11/11 21:05:47           수 정 일 : 1997/11/11 21:07:18
    본문크기 : 3.6K                          조회횟수 : 30

     

    개로왕비 문주왕과 모도왕(蓋鹵王妃 文周王 & 牟都王)

     

      백제 모도왕(牟都王)은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 의혹스런 존재로 기록되어 있다. 이 모도왕은 475년, 개로왕 사후에 489년까지 백제왕으로 중국에 기록되었다.

      중국 기록에는 개로왕(蓋鹵王)이 475년에 죽고 이어서 개로왕의 아들인 모도(牟都)가 백제왕으로 즉위하였다고 전하며, 480년에도 모도왕이 백제왕으로서 중국과 문서를 주고받았다. 이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475년 문주왕(文周王), 478년 삼근왕(三斤王), 480년 동성왕(東城王)의 백제왕 즉위 기록과 배치된다.

      김부식이 백제왕은 문주왕과 삼근왕, 동성왕으로 기록한 시기에 대외적인 백제왕이 모도왕이었고, 게다가 동성왕 모대의 조부(祖父)라고 하였는데 김부식도 도대체 모도왕이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종합하면 백제 모도(牟都)왕은 동성왕 모대(牟大)의 조부이며 백제 문주왕의 상좌평(上佐平)이었던 곤지왕(昆支王)의 부왕(父王)이 된다. 따라서 모도는 비유왕의 동생으로 보아야 하며 곤지는 개로왕의 동생이 아니라 사촌 동생이 된다.

      반면에 문주왕(文周王)은 [紀]에서 개로왕의 모제(母弟)라고 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문주왕이 곤지왕의 형왕(兄王)으로 기록되었다.

      모도왕은 480년에 백제왕으로서 남제국(南濟國)에 사자를 보냈으며, 남제국은 490년에가서야 조부 모도왕의 뒤를 이어 모대왕(동성왕)의 백제왕 즉위를 인정하였으므로 그의 서거연도는 489년으로 추정되는 반면에 문주왕은 478년에 이미 서거하였다.

      결론적으로 문주왕과 모도왕은 동일인이 아니다.

     

      문주왕은 [삼국사기]에서 개로왕의 태자라고 하였지만, 개로왕의 왕비와 왕자들은 평산 한성, 즉 위례성이자 훗날의 도살성에서 고구려군에게 몰살당했다.

     

      [紀]에서 문주(汶洲)왕이 개로왕의 모제(母弟)라고 하였고, 곤지왕은 개로왕의 동생이었다고 하였는데, [삼국사기]에서 곤지는 문주왕의 동생이라고 하였다.

      즉 개로, 문주, 곤지는 다같이 형제벌로 보인다. [紀]에서 곤지가 개로의 동생이라고 한 기록이 틀리거나, [삼국사기]에서 문주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틀린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보다 [紀]가 믿을 만한 편인데 기록이 더 자세하다.

     

      모제(母弟)는 이모(姨母)도 가능하고, 한배 동생(同母弟)인지 배다른 동생(異母弟)인지 구별할 수 없어서 모제라고 할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모제(母弟)는 당사자의 성별(性別)을 명확히 구별할 수 없는 말이다. 개로왕의 이복 여동생도 가능하고 또한 동시에 개로왕의 부인도 가능한 것이다. 당시는 삼국의 왕실이 모두 마찬가지로  혈통보전을 위한 근친결혼이 상례여서, 개로왕이 사촌과 결혼한 적이 있었다면, 백제 문주왕은 461년에 왜국으로 건너갔던 개로왕비이며, 왜국 하노여왕이 된다.

     

      왜무왕의 즉위 원년은 475년인데, 바로 이해에 개로왕비였던 하노여왕이 개로왕의 사후 쓰러져가는 백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왜국 여왕을 그만두고 황급히 백제 땅으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다. 기왕에 왜국 여왕도 지냈으니, 개로왕비가 백제 여왕이 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또한 문주왕이 개로왕 시대에 상좌평을 지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타당할 수 있다. 당시 실정에서 여자가 백제 내부의 상좌평이었을 가능성은 없지만, 당시 관례로 왜국왕, 또는 그의 섭정은 백제로부터 상좌평의 관작을 받아왔을 수도 있다.

     

      왜여왕으로서 인현여황의 하야와 왜무왕의 즉위년이 475년이라는 사실은 <계체왕기> 2년 기사로 알 수 있다. 계체왕 2년은 본래 508년인데, 계체 2년 기사는 백제국에 탐라국(耽羅國;濟州道)이 조공하였다는 기사로서 [삼국사기]의 476년 기사이기 때문에, 계체 2년은 바로 왜무왕이었던 안한천황 2년 기사가 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백제의 위례성과 횡악한성이 무너져서 백제 왕족이 도륙되자, 외국의 군사를 얻어보겠다고 문주왕이 남쪽으로 떠났다. 김부식은 신라에게 구원군을 청하였다고 기록했지만, 당시 백제와 신라의 관계로 보아서 실제 가능성은 거의 없는 일이다.

      반면에 왜국 땅에서 문주왕이 왜국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는 것은 가능한데 [紀]의 기록이 그렇다. 

      웅략 20년, 개로왕이 서거하였고 웅략 21년에는 문주왕이 왜왕의 도움으로 공주에서 백제를 일으켰다고 하였다. 당시 왜왕은 안한천황인 무령왕이다. 웅략은 이미 죽은지 오래다.

     

     

                                                                                                            다음 카페 <역사동호회>  수심자 님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