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사비도읍기1 (성왕과 사비천도)

2013. 9. 21. 07:14우리 역사 바로알기

 

 

 

 

 

      

백제의 사비도읍기1 (성왕과 사비천도)

 

 

제1장 사비천도와 체제정비

                                                                                          출처: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개설서 - 백제의 역사와 문화' 

1. 사비천도 단행과 왕실 권위의 고양
1) 사비천도의 단행
    고대사회에서 왕도는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왕도를 옮기는 것은 내부적으로 큰 변화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웅진천도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왕이 피살된 긴급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비천도는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확립하려고 한 성왕의 의도에 의해 단행되었기 때문에 여기에는 정치적 목적이 일정하게 작용하였다.

 

    그 배경은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웅진이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방어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지만 지역이 협소하여 도성으로서의 기능과 왕도의 경제적 기반을 충족시키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금강유역권을 기반으로 한 재지세력이 점차 왕권을 제약하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에 이를 견제하거나 제어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이다.


    사비천도가 실현된 것은 성왕대이지만 천도에 대한 계획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 백제가 사비지역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동성왕대부터였다. 동성왕은 재임기간 중 모두 7번에 걸쳐 전렵을 실시하였으며, 그 가운데 3번이 사비 일원에서 이루어졌다. 전렵을 통해 동성왕은 사비지역이 가지는 지리적 호조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성왕이 이렇게 부여에 관심을 보인 것은 이곳으로 천도할 계획과 무관하지 않다. 동성왕은 웅진천도 이후 정치적 혼란과 귀족세력간의 알력 등으로부터 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백씨를 비롯하여 웅진 지역을 기반으로 한 세력들의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러한 천도 구상을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동성왕은 천도를 반대하는 세력들을 억제할 정도의 왕권을 확립하지못하였고, 또 신도시를 조영하는데 필요한 경제력도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천도 구상은 구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동성왕 사후 백가의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회복한 무령왕은 대내적으로는 제방을 축조하고 유식자들을 귀농시켜 경제적 기반의 확충과 경제력 회복에 전념하였다. 또 무령왕은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선진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송산리 6호분의 폐쇄용 벽돌에서 수습된 ‘梁官瓦爲師矣’(양나라 관청에서 만든 별돌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명문 전돌과 무령왕릉에 사용된 벽돌의 하나에 새겨진‘…士壬辰年作’(무령왕릉의 축조시기를 512년으로 추측할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자료)이라는 명문은 무령왕이 양나라의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백제의 기술문화 수준을 높인 것을 잘 보여준다. 성왕의 사비천도는 무령왕 일대를 통해 이루어진 정치적 안정과 경제력의 회복 및 높은 수준의 토목·건축 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가능하였다.


    성왕이 사비지역을 천도의 대상지로 삼은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사비지역이 갖고 있는 지리적인 장점이다. 백마강과 부소산성으로 둘러싸인 사비지역은 방어에 유리하며, 강을 타고 바다로 나가는 것도 편리하였다. 다른 하나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부여지역은 남쪽과 동쪽으로 벌판이 펼쳐져 있어서 농업생산력을 높일 수 있었다. 또 부여 지역은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에서 출토되고 있는 紋樣塼과 銘文塼같은 종류의 것이 부여 정동리 A지구 가마에서 출토되고 있고, 대통사지에서 출토된 대통명 기와가 부여 부소산성에서도 출토되고 있는 것에서 보듯이 웅진도읍기에 이들 물품을 생산하여 조달하는 왕도의 배후지역으로서의 역할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성왕은 사비지역을 새 수도 후보지로 정하였던 것이다.

 

   성왕이 사비천도를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성왕의 뛰어난 지식과 일을 처리하는 결단력이었다. 성왕의 결단력은 천도 결정에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천도는 국왕의 결단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도는 지배세력들의 역학관계에 변화를 가져오므로 반대하는 세력이 있게 마련이다. 때문에 천도를 반대하는 세력을 억제할 수 있는 천도지지 세력이 있어야 한다. 이 시기 성왕의 사비천도를 지지한 대표적인 세력이 사씨(沙氏)세력이다. 사씨세력은 사비지역을 기반으로 하였다. 사씨세력은 자신들의 기반이 있는 곳으로 천도하는 것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판단하여 천도를 적극 지지하였던 것이다. 성왕은 사씨세력의 도움을 받아 반대하는 귀족세력들을 제압하였던 것이다.

 

    사비도성은 나성과 그 내부의 여러 시설로 이루어졌다. 사비도성 건설이 일단계로 완료된 시기는 사비도성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 시설인 부소산성과 나성의 축조시기와 연관된다. 왕성 배후산성으로서의 기능을 했던 부소산성 성벽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大通’이 새겨진 기와는 527~528년의 것으로 성왕 5~6년에 해당된다. 또 성벽 주변에서 확인된 주거지·우물 등의 유구와 각종 유물들은 사비나성이 능산리 왕릉군의 묘역을 조성하기 이전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을 높게 한다. 따라서 성왕이 사비도성을 조영하기 시작한 시기는 늦어도 성왕 즉위 5~6년으로 볼 수 있으며, 16년(538)에 주요 시설이 일단 완공되자 마침내 천도를 하였던 것이다.

 

    이 사비도성은 방리제의 구조를 가졌다. 성왕이 방리제의 시가 구조를 가진 사비도성을 건설할 때 그 모델로서 주목된 것이 양나라 수도 건강성이다. 이 시기 백제는 남조 양나라와 빈번한 교류를 가졌기 때문에 양나라 수도의 모습에 대해 충분히 인지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건강성을 모델로 하여 시가지를 만들고 왕궁과 관청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을 배치하였던 것이다. 왕궁 남쪽 시가의 중심부에 위치한 정림사가 양나라의 정림사를 모방한 것이라고 하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2) 왕실권위의 고양과 지배세력의 재편
    성왕의 사비천도의 목적은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왕권이란 국가사회 내부의 이해관계와 분쟁을 조정하고 외부와의 교섭을 독점하는 최고의 정치권력으로서 국가라는 강력한 제도적 기구를 기반으로 하여 행사되는 권력을 말한다. 따라서 왕의 권력은 국가사회의 제도·조직과 밀접하게 연관하여 행사된다. 천도 이후 성왕은 국왕의 권력 강화를 위해 모든 장치를 동원해서 왕권 중심의 통치체제를 확립하는 데 박차를 가하였다.


    강력한 왕권확립을 위해 성왕은 백제가 부여족의 정통성을 잇고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왕실의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 국호를 일시적으로‘남부여’라 개칭한 것이다. 한성도읍기에 백제는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보듯이 왕실이 부여족에서 출자하였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시조묘에 부여족 전체의 시조인 동명을 모셨다. 그러나 수도 한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김으로써 부여족의 정통성을 이었다는 의식은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왕실의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성왕으로서는 백제 왕실이 부여족에서 나왔다는 것을 재천명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필요성에서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였던 것이다. 남부여로 국호를 개칭함으로써 성왕은 왕실의 유래와 그 정체성을 남래귀족에게는 물론 금강유역을 기반으로 한 신진귀족세력에게도 확고하게 심어주게 되었다.


    천도를 계기로 성왕은 사전(社典)체계를 정비하였다. 종래의 사전체계는 한성과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짜여졌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한성지역이 고구려의 영역이 되고 수도가 금강유역권으로 옮겨진 이상 사전체계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전체계의 정비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이 오제신앙의 수용이다. 오제신은 하늘에 있으면서 중앙과 동서남북의 사방을 주재한다는 신이다. 5라는 숫자를 신성히 여기는 관념은 부여족의 전통이지만 성왕은 이러한 전통적 관념에 중국에서의 오제 신앙을 접목하였던 것이다. 오제신에 대한 제의를 통해 백제왕은 자신을 중앙의 황제로서 사방을 통할하고 군림하는 구심적인 존재임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사비천도는 정치세력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웅진도읍기에 동성왕은 정국의 안정을 이루기 위해 금강유역권을 기반으로 한 신진세력을 등용하여 한성에서 남래해온 귀족들과의 조화를 도모하였다. 이 과정에서 沙氏·燕氏·苩氏등 신진세력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금강유역권에 기반을 둔 신진세력들의 힘이 비대해져 점차 왕권을 견제하게 되자 무령왕은 왕족을 중용하여 이에 대응하였다.

 

    성왕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비천도를 통해 신구귀족세력들의 압력을 배제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치세력도 재편제되었다. 정치세력의 재편제는 사비천도를 적극 지지한 사씨세력과 목씨세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천도 이후인 541년에 열린 회의 때 사택기루가 상좌평의 지위에, 목윤귀가 중좌평의 지위에 있었다고 하는 것이 이를 보여준다. 이 토대 위에서 성왕은 점차 국왕중심의 정치를 지향해나갔다. 왕실 업무를 관장하는 내관의 수가 일반 서정을 담당하는 외관의 수보다 많았다는 것과 나솔의 관등에 있던 馬武가 왕의 핵심 심복이 되어 왕을 보좌한 것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2. 체제정비
1) 중앙통치조직의 정비
    성왕은 사비천도를 계기로 통치조직을 재정비하였다. 이 시기에 정비된 중앙통치조직의 핵심은 16관등제·6좌평·22부사제·수도 5부·5항제이다. 16관등제는 1품의 좌평 관등, 2품 달솔에서 6품 나솔에 이르기까지의 5개의 솔계 관등, 7품 장덕에서 11품 대덕에 이르기까지의 5개의 덕계 관등, 12품 문독과 13품 무독의 문무계 관등, 14품 좌군에서 16품 극우에 이르기까지 무계 관등 등 모두 16관품으로 이루어졌다. 좌평의 정원은 5인이고 달솔은 30인이며, 3품 은솔 이하는 정원이 없었다.

 

    좌평은 처음에는 관등과 관직적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6관등제가 정비되면서 관직적 요소는 분리되어 6좌평으로 성립되어 가고 관등적 성격은 제1관품으로 계속 남았다. 이 6좌평은 최고귀족회의체를 구성하였다. 16관등제는 의관제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이 의관제에는 복색 및 帶色·冠飾등이 포함된다. 복색의 경우 3색공복제로 운영되었는데 1품~6품은 자색의 옷을, 7품~11품은 비색의 옷을, 12품~16품까지는 청색의 옷을 입었다. 대색의 경우 좌평에서 장덕까지는 자주색, 시덕은 검은 색, 고덕은 붉은 색, 계덕은 푸른 색, 대덕·문독은 모두 누른색, 무독부터 극우까지는 모두 흰 색이었다. 관식의 경우 왕은 금화로 된 관식을 사용하였고, 좌평에서 5품 나솔까지는 은화로 된 관식을 착용하였다.

 

    이 시기에 정비된 행정관서의 핵심이 22부였다. 22부는 왕실 업무를 관장하는 內官12부와 일반 서정을 맡는 外官10부로 이루어졌다. 각 부의 장관은 3년마다 한번 교대하였다. 이중 핵심적인 관청으로는 내관의 경우 왕
명 출납을 담당한 전내부를 들 수 있고, 외관의 경우 군사업무를 관장한 사군부, 교육·의례 업무를 관장한 사도부, 토목업무를 관장한 사구부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22부의 장관은 재관장·장리 또는 장사라고도 하였다.부 아래에는 사가 있었다. 사의 사례로는 공덕부 아래에 두어진 공덕사를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관직과 관등과의 관계는 1관직 1관등제가 아니라 하나의 관직을 여럿의 관등이 맡을 수 있는 1관직 복수관등제가 행해졌다.

 

    22부제의 특징을 보면 먼저 내관의 수가 외관보다 많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왕권이 그만큼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내관의 곡부·내경부·외경부와 외관의 점구부·조부 등 재정을 담당한 부서는 그 수가 많고 또 직능상의 분화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는 국가의 재정 규모가 확대되고 발전함에 따라 재정의 수입과 지출업무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22부의 책임자는 3년 임기제의 적용을 받았다는 점이다. 장관의 3년 교대제로 왕은 22부의 장의 임명에 제도적으로 관여할 수 있게 되었고, 국왕의 전제적인 권력은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넷째로 22부의 완비는 중요 국정을 논의·결정하는 최고의 귀족회의체인 좌평회의체의 위상을 약화시켰다. 따라서 22부의 설치는 성왕의 왕권강화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출처: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도민을 위한 백제사'
2) 지방에 대한 통제력 강화
  (1) 지방통치조직의 정비
    사비천도를 계기로 성왕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실시된 것이 기존의 담로제를 재편제한 방·군·성제이다. 방은 전국을 동방·서방·남방·북방·중방의 5방으로 나눈 것으로서 최고의 지방통치 조직이다. 각 방의 치소를 보면 中方은 고사성(古沙城)이고, 東方은 득안성(得安城)이고, 南方은 구지하성(久知下城)이고, 西方은 도선성(刀先城)이고, 北方은 웅진성(熊津城)이었다. 득안성은충남 논산지역이고, 웅진성은 충남 공주시 지역이고, 고사성은 전북 고부지역이며, 도선성은 예산 대흥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지하성의 경우 금구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고 남원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방에는 방령이 두어졌으며, 달솔의 관등을 가진 자가 맡았고‘方佐’가 그를 보좌하였다. 방성에는 700명에서 1,200명의 상비군이 주둔하였다. 각 방은 6, 7~10개의 군을 관할했으므로 방령은 일종의 군관구사령관의 기능을 하였다. 방 아래에 37군이 두어졌는데 장관은 군장=군령이었다. 이 방과 군 아래에 성(현)이 두어졌다. 현의 수는 200~250여개 정도였다. 성(현)의 장관은 도사 또는 성주였다.


    5방·37군·성(현)제의 특징은 郡의 편제와 그것을 통할하는 상위단위로서의 5方의 배치를 들 수 있다. 즉 왕도 이외에 전국의 동·서·남·북·중의 중요한 거점에 방을 설치하여 전국에 대한 균형적인 통제와 주변의 郡과 城을 통할할 수 있는 군사적·행정적 거점으로 삼았다. 이렇게 전국에 걸쳐 城중심의 지역 행정단위들을 묶어 관할함으로써 지역별 통제와 중앙과의 연계를 보다 원활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특징은 성(현)의 수가 200 내지 250개가 될 정도로 많아졌다는 점이다. 성(현)의 수의 증가는 촌락사회의 변화와 연관된다. 백제는 무령왕대 이후 유식자들을 귀농시키고 타국으로 도망한 자들까지 추쇄하는 등 농업 노동력 확보에 노력하였으며, 또 수리시설을 정비하여 농업생산력의 증대에도 노력하였다. 이리하여 금강유역권과 영산강 유역권이 크게 개발되었다. 이러한 속에서 자연촌의 성장이 일어난 것이다. 자연촌의 성장으로 종래 지역단위로서 기능하던 성들은 이제 지방행정조직으로 재편제될 수 있었다.


   셋째로 방·군·성(현)을 만들 때의 기준은‘田丁戶口’의 많고 적음이었다. 이는 군현제를 만드는 기준이 보다 객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백제가 호구와 토지를 파악할 때 기본단위는 신라의 村落文書에서 미루어 볼 때 촌락을 단위로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가‘田丁戶口’라는 객관적인 기준 위에서 지방통치조직을 재편제한 것은 각 지역의 토지와 호구에 대한 파악이 이루어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호구파악의 업무를 관장한 기관이 점구부였다.

 


  (2) 고고자료를 통해 본 지방지배    <발췌>
    사비도읍기 지방지배의 모습은 고분자료와 위세품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사비기 고분의 특징은 횡혈식 석실분으로 통일되어 갔다는 점이다. 횡혈식 석실분은 점차 지방 곳곳에 확산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종전에
지방에서 사용되었던 다양한 묘제는 대부분 사라졌다. 익산은 왕궁리·미륵사·쌍릉의 존재에서 볼 수 있듯이 사비기 백제의 副都로서의 위상을 갖는다. 정읍지역은 五方중의 하나인 中方 古沙城이 위치한 곳으로서 古阜고읍성이 그 치소로 추정된다.

 

    사비기에 오면 고분의 부장품이 적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신구이자 착장형 위세품의 일종인 은화관식이 자주 발견된다. 이러한 관식이 출토되는 유구는 모두 횡혈식 석실분이다. 은화관식은 6품인 奈率이상의 관인이 관모에 착용한 장식이다. 따라서 은화관식이 출토된 고분의 주인공은 관인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관인들 중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자들도 있지만 재지 수장층으로서 관위를 수여받은 자들도 있었다. 재지수장으로서 관위를 받은 이들은 백제의 관인으로 활동하였음은 물론이다.

 

 

3) 군사조직의 정비와 운용
   사비 천도 후 백제는 군사조직을 재편제하고 국왕 중심으로 군사조직을 운용하였다. 군지휘관은 좌장을 비롯한 복수의 장군들로 구성되었다. 이 장군은 달솔이나 좌평의 관등을 가진 자가 맡았다. 출전할 때 부대의 병력규모는 1천명 내지 2천 명 정도의 부대들과 이들 부대들을 아우른 군단규모의 사령부였다. 군단 규모의 사령부의 병력 규모는 7천명에서 1만명 정도였다. 전투에 동원되는 군사력은 驍勇과 疑兵, 銳兵과 少弱, 强健精兵과 老弱등으로 나누어진다.


   군부대는 크게 국왕시위군·중앙군·지방군으로 편성하였다. 국왕 시위군은 국왕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놓인 친위 군사력이었으며, 국왕이 거주하는 궁성을 숙위하고 국왕이나 왕실세력의 행차 시에 호종기능을 수행하는 한편 국왕과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는 상징적 기능까지 행사하였다. 이 책임을 맡은 자가 ‘宿衛兵事’를 관장한 衛士佐平이었다. 이 시위군의 군사력은 왕도 5부에 각각 두어진 500명의 군사였다. 이 군대는 달솔의 관등을 지닌 자가 지휘하였으며, 왕도의 수비와 치안 확보를 그 임무로 하였다.


   중앙군은 병력 규모가 1만 명 정도를 상한으로 하고 있다. 이 군대는 중앙의 상비병이었다. 중앙군은 국왕이나 태자가 최고 지휘관으로 거느리기도 하고 왕명을 받은 좌장이나 달솔 또는 좌평 등이 거느리고 출정하였다.
이 가운데 좌장은 국왕으로부터 군령권을 위임받은 최고 군령권자, 즉 총사령관으로서의 위상을 가졌다. 이 병력은 흔히 ‘精兵’으로 표기되는 정예군이었다. 평상시 중앙군은 청마산성·청산성 등 사비도성 주위의 산성에 배치되어 왕도의 외곽수비를 맡았으며, 전시에는 핵심적인 군사력으로 출동하였다. 방령은 때로는 장군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지방군의 핵심은 전국을 5개의 광역으로 구분한 5방의 방성에 주둔한 군대였다. 이 군대가 많을 경우 1천명~1천 2백, 적을 경우 7백~8백명 정도였으며, 달솔인 방령이 지휘하였다. 五方아래에는 각각 10개 내지 6~7개의 郡이 속해 있었다. 따라서 방은 군관구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방성에 주둔하는 병력은 평상시 상비군으로서 방령의 지휘를 받으며, 치안의 확보와 국지적인 방어 임무를 수행했다. 이 상비군은 방령의 직할 통치지역인 方城이 포함된 행정단위에서 징발되어 현역으로 복무하는 자들이었다. 郡에도 부대가 배속되어 있었는데 군의 장관인 郡將이 지휘하였다. 성에는 성병이 배치되어 도사나 성주가 지휘하였다. 군과 성에 배치된 군대는 병농일치적인 둔전병이었다.

 


3. 유교적 지배이념의 확립과 불교교단의 정비
    사비천도를 계기로 성왕은 왕권의 안정을 위해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지배이념의 확립에도 노력하였다. 유교정치사상은 충효를 근간으로 하는 것이므로 성왕은 이의 강조를 통해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 양 무제는 대규모의 禮典편찬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목적은 魏晉시대의 예속을 무시하던 현학적 풍조에서 벗어나 귀족의 생활과 행동양식을 정형화하는데 있었다. 성왕은 양 무제의 이러한 조치를 하나의 전범으로 삼아 유교정치 이념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성왕은 사비천도 직후인 19년(541)에 중국 양나라로부터 모시박사와 강례박사를 초빙하였다. 이 때 백제에 온 강례박사는 어려서 崔靈恩에게서『三禮義宗』을 배운 예학 전문가 육후(陸詡)였다. 육후를 초빙한 성왕은 주례적인 이념에 입각하여 중앙관제와 제사체계를 정비하여 나갔다. 오제신앙의 수용, 시조 구태묘의 설치, 종묘와 사직의 설치, 산천제의체계의 정비 등이 그것이다. 오제신앙을 통해 왕이 백제의 중심임을 확인하였고, 구태를 모신 시조묘의 설치를 통해 백제 시조의 위대성을 강조하였고, 종묘와 사직의 설치를 통해 왕실의 제의체계를 확립하였고, 산천제의 체계의 정비를 통해 사비도성 중심의 제사체계를 확립하였다. 이와 더불어 성왕은 유교적 예제에 입각한 시호제도 실시하였다. 시호제의 실시는 부계직자상속에 의한 왕위계승원칙 위에서 무령왕계를 중심으로 한 왕실계보를 정리하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한편 성왕은 사비천도를 계기로 불교 교단의 정비도 이룩하였다. 불교교단의 정비는 통치체제의 정비와 궤도를 같이 하는 것이다. 교단의 정비는 두 가지 형태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계율의 강조를 통해 교단을 장악하는 것이다. 율은 승려의 몸을 단속할 뿐만 아니라 승단의 운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로서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 등 사부대중과 외도를 교화하는 데 그 효용이 있었다. 계율의 강조는 겸익의 활동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무령왕 말년 중인도로 유학 간 겸익은 상가나 대율사에서 5년 동안 범어와 율을 공부하고 戒體를 장엄하고 범승 배달다삼장과 같이 범본아담장과 5부율문을 가지고 성왕 4년(526)에 귀국하였다. 성왕은 겸익을 우보와 고취로 성대히 맞이하여 흥륜사에 머물게 하고 전국의 명승 28인과 더불어 범본 율을 번역하게 하였다. 그리고 친히 이 번역서에 서문을 썼다. 이로써 백제계율이 성립되었다.

 

    또 성왕은 사비천도 3년 후인 541년에 양나라로부터『열반경』등의 주석서를 청하여 받았다. 이때 양나라에서 유학하고 있던 법화행자 발정도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겸익과 발정은 율과 법화·열반의 불교신앙을 널리 보급하였다. 다른 하나는 승관제도를 정비하는 것이다. 백제에서 사찰과 교단의 업무를 관장하는 기구로는 공덕부가 있다. 이 공덕부는 22부의 하나로서 내관으로 설치되었다. 이 공덕부는 왕실과 관련한 사찰은 물론 전국의 사찰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기구로 볼 수 있다. 이 공덕부 아래에 속사로서 공덕사가 설치되어 공덕부의 업무를 보좌하였다.

 

 


4. 대외관계의 전개 양상
    웅진천도 이후 백제의 대외정책 기조는 신라 및 가야와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백제는 492년에 고구려가 신라의 미질부성을 공격하자 가야와 함께 원군을 파견하여 이를 물리쳤다. 이러한 대외정책은 사비천도 후 성왕 대에도 그대로 유지하였다. 성왕은 때로는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기도 하고, 고구려의 공격에 대해서는 신라의 도움을 받아 물리치기도 하였다. 523년에 고구려병이 공격해 오자 步騎1만으로 이를 격퇴한 것, 538년에는 고구려 공격을 단행한 것, 546년에 고구려가 濊와 모의하여 공격해 오자 신라에 원군을 요청하여 격퇴한 것 등이 그 사례가 된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와의 관계는 늘 우호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는 긴장 관계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즉 고구려의 압박이 강할 때 양국의 협력관계는 돈독하였지만 신라의 성장은 백제로 하여금 긴장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동성왕이 7년(485)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 빙문을 하고, 15년(493)에는 신라의 이찬 비지의 딸과 혼인관계를 맺은 것은 화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23년(501)에 炭峴에 木柵을 설치하여 新羅에 대비하고 있는 것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어 성장해 가고 있는 신라에 대해 백제가 일정한 대비책을 마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제의 신라에 대한 긴장 관계는 무령왕대를 거쳐 성왕대에 오면 점차 해소되어졌다. 그 결과 140여 년간 중국 왕조와 교섭이 없었던 신라의 법흥왕이 521년에 梁에 사신을 보낼 때 백제 사신이 통역의 역할을 해주어 신라와 남조와의 본격적인 교섭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또 성왕은 3년(525)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를 다지고 共守동맹 관계를 재확인하였다. 그리하여 548년에 고구려가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해 왔을 때 신라는 군대를 파견하여 고구려의 공격을 물리치는데 협력하였다.


    신라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성왕은 남조 양과의 우호관계도 돈독히 하였다. 그래서 12년(534)에 양에 사신을 보냈고, 19년(541)에는 양으로부터 모시박사와『열반경』등의 經義와 工匠과 畵師를 요청하여 받았다. 양과의 이러한 돈독한 관계는 27년(549)에 양에 파견된 사신이 양이 망한 것을 보고 端門밖에서 號泣하던 중  반란을 일으킨 후경에게 붙잡혀 투옥되었다가 후경의 난이 평정된 후에야 귀국하는 일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렇게 양과 긴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백제는 양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여 자신의 문화수준을 높였다.

 

    한편 성왕은 사비로 천도한 이후 왜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왜는 479년 이후 중국 남조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였기 때문에 왜가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은 백제였다. 이리하여 백제에서 많은 학자들과 기술자들이 왜로 건너가 선진문물을 전수해 주었다. 이 시기에 왜에 전해진 선진문물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이 불교의 전파이다. 성왕은 왜에 불교를 전파하면서 경전과 번개 등을 전해주었다. 이리하여 왜에 불교가 전해졌다. 왜는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백제의 요청이 있을 때 군대를 파견하여 도와주었다. 관산성 전투에 왜군이 파견된 것이 그 사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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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나성     <사적 제58호>          출처: 부여군 문화관광 홈피

 

  

 

   부여군 부여읍 일원에 있는 백제시대의 왕성 주변의 시가지를 에워싼 토축의 외성이다. 백제의 수도인 사비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성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평양의 나성과 함께 가장 오래된 나성의 하나이다.

    성에는 사방에 문지가 있다. 이 나성은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한 외곽 방어 시설이며 축성연대는 성왕대(523~554)를 전후한 시기로 보고 있다.

   성벽은 부소산성의 동문터 부근을 기점으로 하여 동쪽으로 약 500m 지점에 있는 청산성(靑山城)을 거쳐 남쪽으로 석목리 필서봉(筆書峰) 상봉을 지나, 염창리 뒷산의 봉우리를 거쳐 금강변까지 토축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나, 현재는 청산성 동쪽으로 약 200m와 석목리에서 동문다리까지, 그리고 필서봉부터 염창리까지 약간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곳에는 동쪽으로 논산과 왕래하는 동문지와 공주로 통하는 동북 문지가 있다.

    동문지 부근의 나성 단면을 조사한 결과 저변 13m, 상변 4m, 높이 5.2m이며 황토질흙으로 토축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서쪽 약 300m지점에 1978년 상수도 사업으로 나성의 단면이 드러났는데 저변 13m, 상변 2m, 높이 5.2m의 토축이었으며 진흙으로 다져서 만든 판축(版築)의 흔적이 있었다. 표고 121m의 가장 높은 필서봉에는 횃불을 올리던 봉수터와 건물터가 남아있다. 나성의 끝부분은 적심석(積心石)을 놓고 축조한 부분이 노출되어 있다.

    서쪽 나성은 부소산성 서문 바깥 지점을 기점으로 하여 현재 유스호스텔을 거쳐 관북리,구교리,유수지(遊水池),동남리,군수리,성말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동쪽 나성문지는 구아리로 통하는 서북문지와 장성백이 남쪽에서 규암으로 통하는 서문지가 있다. 남쪽 나성은 동리,중리,당리의 뒷산에 연결하여 축조하였으며, 주초석과 문초석이 남아 있다.

    나성 안에는 백제시대 왕궁을 비롯, 관아,민가,사찰,상가 및 수도 수비를 위한 방위 시설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상부,중부,전부,하부,후부의 오부제도(五部制度)를 두고 다스렸다.

    전체적인 구조상 남쪽과 서쪽은 금강이 흐르고 있고 또 수로도 파 놓아서 이 나성은 자연적인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주서(周書)에 의하면 도성 안에는 민가가 있었으며 방(方)마다 500인씩 총 2,500인의 군대로 방위에 임하였다 한다. 나성이 완성되고 오부제가 완성된 시기는 7세기 초인 무왕 때로 추정되고 있다.

이 나성은 청수산,청마산성과 함께 왕도의 보호를 위한 외곽 방어 시설로 중요한 성(城)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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