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21. 07:29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 문주왕 열도출병(서기 475년)
문주왕은 열도에서 출병
사기 백제본기 개로기 21년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문주는 곧 목협만치·조미걸취와 함께 남쪽으로 떠났다. 이때 고구려의 제우와 재증걸루, 고이만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성을 쳐서 7일만에 함락시키고 군사를 이동하여 남쪽성을 치니 성 안은 위태로움과 두려움에 싸여 왕은 성을 나가 도망했다.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왕을 발견하자 말에서 내려 절을 하더니 왕의 얼굴에 침을 세 번 뱉고 죄를 헤아리며 아차성 아래로 묶어보내 죽이고 말았다』
사기 백제본기 문주전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개로왕의 아들이다. 처음에 비유왕이 죽고 개로가 위를 잇자 문주가 그를 보필해 상좌평에 이르렀다. 개로왕 재위 21년에 고구려가 쳐들어와 한성을 포위하자 개로는 성을 둘러 스스로 단단히 하면서 문주를 시켜 신라에 구원을 청하게 했다. 문주가 군사 만 명을 얻어오니 고구려병들은 물러났지만 한성은 함락되고 왕은 죽었으므로 마침내 그가 왕위에 올랐다(서기 475년)』
문주기 원년 10월조에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다』
동 3년 『(4월) 왕의 아우 곤지를 내신좌평으로 임명하고 장자 삼근을 태자로 삼았다. (5월) 흑룡이 웅진에 나타났다. (7월) 내신좌평 곤지가 죽었다』
사기 신라본기 자비기 17년(서기 474년) 7월조 『고구려왕 거련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쳤다. 백제왕 경이 아들 문주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니 왕이 군사를 내어 백제를 구하게 했으나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백제는 이미 함락되었고 경 역시 피해를 입었다』
신라 원병 장수가 없다
사기에 구원군이 만 명이라고 나오는데 신라본기나 백제본기 어느 쪽에도 신라구원군의 장수이름조차 없어 사리에 어긋난다. 불과 수백 명이라도 원군을 내줄 땐 반드시 그에 합당한 장수를 딸려 보낸다. 군사만 덜렁 지원해 준다고 그 군사가 타국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우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경우 본국의 장수 없으면 전적으로 통솔 불가능이기 때문이다.
신라 원병은 허구
게다가 신라는 고구려 광개토대왕 이래로 장수왕대까지도 고구려의 힘에 눌려 신속했다는 것이 통설인데 백제가 구원병을 청한다고 고구려를 상대로 무려 만 명이라는 구원병을 장수도 딸리지 않고 선뜻 내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백제 동성대왕을 모델로 한 서동설화에서도 신라의 백관들이 처음에는 서동과의 불미스런 소문을 듣고 선화공주를 귀양보내는 구절에도 나타나 있다시피 문주왕 즉위 이후 5년 뒤의 일이고 동성왕의 명성을 들었음에도 신라 조정의 분위기는 백제와 동맹을 처음에는 반대했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문주와 같이 있던 사람을 보면 목협만치와 조미걸취인데 조미씨는 眞氏를 훈독하여 이두식으로 달리 표기한 성이고 가야계로 보인다.
조미씨는 '(ㅊ+아래아+ㅁ)[眞]'에서 아래아를 '오'로 발음하여 받침 없이 열도식으로 읽으면 '초미(조미)'가 되는데 이것을 이두표기한 성씨인 것이다.
사기의 목협(木협)은 서기에 나오는 목리(木리)라는 성씨를 모양이 비슷한 글자로 변조한 것이고 목리는 침류왕의 후손 성씨의 하나다. 이것도 사기가 서기를 보고서 바꾼 것이다. 침류왕의 이칭인 목라근자의 '木羅'와 침류의 '枕', '木리'는 열도어 음도 같고 뜻도 같다. 마꾸라[枕], 모꾸라[木羅]=모꾸라[木리]로 침류왕 또는 그 후손성씨이고 뜻은 전부 '나무토막'이다. [(ㅁ+아래아)꾸라>마꾸라, 모꾸라]가 된 것이다. 목협은 음도 다르고 뜻도 다르다. 뜻을 굳이 풀자면 나뭇단이 돼버린다. 거의 반대어가 되는 것이다. (협=力 세 자, 리=刀 세 자)
문주왕은 구이신왕의 후손
문주왕은 비유왕에게 쫓겨 열도로 망명한 구이신왕의 후손으로 추정되고 열도에서 출병했던 것으로 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구이신왕 망명 서기 427년 문주왕 즉위 서기 475년이므로 연대차이가 48년 정도 나는데 구이신왕의 손자 정도 된다.
곤지는 가야왕족
내신좌평 곤지는 문주왕의 아우가 아니고 동성대왕의 부왕이다. 가야왕족으로서 성씨가 김씨인데 부여씨로 바꾸어 놓았다.
飛鳥戶造; 出自百濟國比有王也(우경제번)
飛鳥戶造; 出自百濟國主比有王男 琨伎王也(하내국제번)
飛鳥戶造; 百濟國末多王之後也(하내국제번)
비유왕은 동성대왕의 조부인데 아라사등(=사기 근초고기 2년조의 眞淨)의 장남 예진별명의 아들이고, 예진의 아들이 곤기왕으로 나오는데 사기 문주기의 곤지다. 고대에 '지'와 '기'가 교체되어 쓰인 사례가 사기에도 나온다. 말다왕이 동성대왕이라는 것은 서기 웅략기 23년 4월조와 무열기 4년 시세조에 나온다. 아라사등>예진별명>비유왕>곤기왕>동성대왕인 것이다.
동성대왕 후손의 성씨를 "아스까의 문턱시대", "아스까의 문을 만든"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 조어한 것은 동성대왕이 열도의 가야의 대화왕조 출신으로서 백제왕이 됨으로써 실질적으로 백제·왜통합을 이루어 대제국의 문을 열고 결과적으로 백제왕족 무령왕에게 그것을 물려주었기 때문에 그 공을 인정한 것이다.
사기의 연도 착오
백제본기 개로왕 몰년은 서기 475년이고 신라본기 자비기의 구원병파견은 서기 474년이다. 원병기사의 연도가 1년 틀린다는 것도 위사흔적을 의도적으로 남겨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기저술팀 11명이 산수를 못해서 햇수를 잘못 맞췄다고 보기 어렵다. 연표를 만들어 앞에 놓고 사기를 저술했을 텐데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서기의 문주왕 출병기록
서기 웅략기 18년 8월조에 문주왕이 열도에서 출병한 사실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물부토대숙니와 (*1) 물부목련을 보내 이세의 조일랑을 치게 했다. 조일랑은 관군이 왔다는 말을 듣고 이하의 청묘에서 대항하여 싸웠다. 활을 잘 쏘는 것을 자랑하며 "누가 조일랑의 솜씨에 맞고 싶으냐"라고 했다. 그가 쏘는 화살은 이중의 갑옷을 뚫었다. 관군이 두려워하고 토대숙니는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서로 대치한 지 二日一夜가 지났다. 이에 물부목련이 스스로 대도를 들고 쯔꾸시 기꾸[聞]에 있는 물부 대부수에게 방패를 들려 적군 속으로 소리치며 일제히 나아가게 했다. 조일랑이 멀리서 보고 활을 쏘아 대부수의 방패와 이중갑옷을 뚫었는데 몸에 한 치[一寸]나 박혔다. 대부수가 방패로 물부목련을 가려주자 목련이 곧 조일랑을 잡아 참하였다. 이 때문에 토대숙니는 이기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여 7일이나 복명하지 않았다. 천황이 시신에게 "토대숙니는 왜 복명하지 않는가"라고 묻자 찬기전충별이라는 사람이 나아가 "토대숙니는 겁을 내서 二日一夜 동안 조일랑을 잡을 수 없었는데 마침 물부목련이 쯔꾸시 기꾸[聞]의 대부수를 이끌고 조일랑을 잡아 참했습니다"라고 했다. 천황이 듣고 노하여 즉시 토대숙니 소유의 저사부를 빼앗아 물부목련에게 내렸다』
등장인물
조일랑
이세의 조일랑이라는 인물은 풍토기일문 이세국조에 나오는 이세진언 즉 응신의 이복동생 진언을 말한다. 원래이름 珍彦은 이세진언의 津彦과 반도음이 같고 열도음도 우즈히꼬[珍彦], 쯔히꼬[津彦]로 비슷하다. 이 일들이 일어날 때는 열도의 대화왕조는 국신계 진왕가였으므로 진왕가를 대표하여 내세운 것이다. 구이신을 몰아낸 무내계 비유왕과 진언은 거의 같은 시기에 왕이 되었고 개로왕이 몰한 것도 열도에서 진언계 무왕이 밀려난 시기와 수년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물부토대숙니
물부씨는 초고대왕을 조로 하는 백제왕성이고 물부토대숙니는 원래는 무내를 가리키는 이름이지만 실사상 그 후손인 개로왕을 가리킨다. '토( )'자가 고사기 신대기 대국주신조의 백토설화에 가야계를 은유하여 나오는 암호로서 물부씨 중에서 가야에 협력한 인물들은 무내계밖에 없다. 우시로[토代]는 무내 후손의 성씨인 야시로[矢代]와 음도 비슷하다.
물부목련은 침류계
물부목련의 目은 침류인 목리경태자, 목라근자의 木과 반도음이 같아 침류왕이지만 여기서는 그 후손인 문주왕을 가리킨다. 물부목련을 성씨록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錦部首; 神饒速日命十二世孫 物部目大連之後也(산성국천신)
錦部連; 三善宿니同祖 百濟國速古大王之後也(하내국제번)
금부씨는 요속일(=초고대왕)의 후손으로 물부씨에서 갈라진 성씨다.
(*1) 「'구사기' 천손본기에 이고후쯔[伊 弗]의 아들로 되어있고 '속기' 양로 원년 삼월계묘조에는 좌대신 石上麻呂를 '泊瀨朝倉朝廷 大連物部目之後'라고 한다...<일본서기/암파문고/2000년/권3/352p/보주14-5>」 > '이고후쯔'는 귀수대왕이고 물부목련은 침류왕이며 좌대신 석상마려는 아신이다. 이름도 한자를 앞뒤로 바꿔가며 사용하여 혼란스럽지만 동일인물이다. 박뢰조창조정이란 응신세를 가리키고 대련물부목도 침류왕이다.
'이고후쯔'가 성씨록에는 '이고후쯔[伊己布都]'로 나오고 '히꼬후쯔[彦太]', '후쯔[經津]'와 같아 경진주신을 가리키는데 귀수대왕이다. 무내숙니가 서기 효원기에는 히꼬후쯔오시.노.마꼬또.노.미꼬또[彦太忍信命]의 손자로 나오는데 고사기 효원기에는 히꼬후쯔오시.노.마꼬또.노.미꼬또[比古布都押之信命]의 아들로 나온다. 고사기가 실사와 부합한다. 같은 이름을 각각 한자를 바꿔가며 연결고리를 이리저리 흩어놓고 결정적인 연결고리는 '구사기' 천손본기에 침류왕인 물부목련과 연결시켜 놓은 이고후쯔[伊거弗]인 것이다.
依羅連; 神饒速日命十世孫 伊己布都大連之後也(우경천신)
巫部連; 神饒速日命十世孫 伊己布都乃連公之後也(산성국천신)
초고대왕의 10세손으로 되어 있으나 요속일은 기원전 7세기의 1세 신무기에 나오고 이고후쯔[伊己布都]는 8세 효원기에 나오므로 대수를 늘여놓은 것일 뿐이다. 의라연은 귀수대왕의 후손이다. 의라연은 뜻으로 보면 무내숙니이거나 그 후손이다. 가라에 의존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若櫻部造; 神饒速日命七世孫 止智尼大連之後也 履中御世 埰櫻花獻之 仍改物部連 賜姓若櫻部造(화천국천신)
도지네[止智尼]=도지네[十千根]와 같고 도지[十千]는 만(萬)이므로 침류왕의 이칭인 포조부만의 이름 '萬'을 따서 지은 이칭인 것이다. 이 萬이란 이름은 서기 숭준전기 7월조에 진사왕을 달리 꾸민 하내국사에게 자살을 강요당하고 죽은 후 팔단 당하는 침류왕이다. 그 시신 가까이에 있던 흰 개가 베개[枕] 옆에서 굶어죽었다고 침류왕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성씨록에도 보면 대수를 늘려가며 꾸미기 위해 이름 바꾸는 방법으로 본기 속에서 여러 가지 일화를 지어 쓰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도 이중천황대에 앵화를 꺾어 바쳤기 때문에 사성했다고 나온다.
찬기전충별
찬기전충별은 귀수대왕을 분식한 인물이다. 성씨록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讚岐公; 大足彦忍代別天皇皇子 五十香彦命(亦名神櫛別命)之後也(우경황별)
'찬기공'조의 대족언인대별천황은 경행천황이고 귀수대왕을 등재한 인물이다. '찬기공'조의 괄호 안의 신즐별명에서 '즐'이 키워드다. 구시[櫛/串/久志/久西], 구스[貴須/久素/樟/楠]는 귀수대왕을 가리키고 찬기공은 그 후손 중의 일파다. 경행천황의 황자 오십향언명도 귀수대왕인 것이다.
출병지
쯔꾸시 기꾸[聞]는 풍전국 기구군(豊前國 企救郡)으로 지금의 후꾸오까현 북구주시 소창·문사구(小倉·文司區)라 한다.
二日一夜
이일일야란 두 왕을 가리키고 2대왕을 거치는 동안에 조일랑(=진왕가)을 타도하지 못했다는 것은 열도를 병합하지 못했다는 핑계를 댄 것이다. '밤 夜'는 왕과 왕 사이의 승계되는 마디를 의미할 때가 종종 있다. 예컨대 서기 경행기 40년 10월조에서 일본무존의 전사 직전에 나오는 구야십일은 구대십왕을 의미하는 것이다.
복명 못한 7일
물부토대숙니가 7일 동안 복명을 못했다는 것은 귀수대왕 이후에 침류, 진사, 아신, 전지, 구이신, 비유, 개로왕까지 해서 정확히 7왕인데 이 동안에 무내계가 진왕가가 다스리고 있던 열도를 평정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우회표현한 것이다. 백제왕실 기준이다.
저사부
지금 이 이야기는 대화왕조의 진왕가에다 핑계를 대기는 했지만 백제왕통이 바뀐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사부(猪使部)를 빼앗아 주었다고 하는 저사부는 여기서 '猪名部造'라는 무내 후손의 성씨와도 연결되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키워드다. 서기 민달기 3년 10월조에 나오는 백저둔창(白猪屯倉)이나 백저사담진(白猪史膽津/왕진이의 조카)의 '저(猪)'와 같은 뜻으로서 '백제왕권'을 은유한 말이다. 왕진이는 진사왕이고 백저사담진은 아신왕이다.
개로왕에게서 문주왕에게로 왕권이 넘어간 것을 물부토대숙니에게서 저사부를 빼앗아 물부목련에게 주었다고 돌려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말하면 개로왕과 문주왕의 계보가 다르다는 말이다. 저명부씨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猪名部造; 伊香我色男命之後也(좌경천신)
眞神田曾니連; 神饒速日命六世孫 伊香我色乎命男 氣津別命之後也(좌경천신)
石上朝臣; 神饒速日命之後也(좌경천신)
저명부씨는 요속일의 후손으로서 물부씨와 일족이다. 이가가시고오[伊香我色男]와 이가가시고오[伊香我色乎]는 같고 무내숙니의 이칭이다. 석상씨는 초고대왕을 주제신으로 모신 석상신궁에서 따서 창씨한 성씨다. 「저명부는 석상조신 즉 물부련과 동조다<일본서기/암파문고/2000년/권3/83p/주1>」
무내의 후손이 저명부라는 성씨를 갖게 된 것은 서기 신공기 원년 2월조에 붉은 산돼지[赤猪]가 미판왕(미坂王/香坂王)을 물어 죽인 사건에서 파생시킨 성씨다. 미판왕은 초고대왕이고 적저는 가야에 협력했던 무내숙니를 은유한 것이다. 무내가 가야와 연합하여 초고대왕을 도가노에서 화공으로 전사시킨 사건을 달리 꾸민 스토리인 것이다.
위례성 함락과 개로왕 전사
위의 18년 8월조 기사에 이어서 웅략기 20년조에 아래와 같은 기사가 있다.
『(겨울) 고려왕이 군병을 크게 일으켜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때 조금 남은 잔병들이 창하에 모여있었다. 군량은 다하여 걱정하고 울기만 했다. 고려의 여러 장수가 왕에게 "백제인의 심정은 이상합니다. 신이 볼 때마다 스스로도 모를 정도입니다. 다시 뻗는 것이 두려우니 청컨대 쫓아 없앱시다"라고 했다. 왕이 "불가하다. 과인이 듣기에 백제국은 일본국의 관가로서 유래가 오래 되었다. 또 그 왕이 천황을 섬기고 있다. 사방의 이웃나라가 다 아는 바다"라고 말했다. 드디어 그만 두었다[백제기에 말했다. 개로왕 겨울 박( )의 대군이 와서 대성을 친지 칠일칠야에 왕성이 함락되어 드디어 위례를 잃었다. 국왕 및 대후, 왕자 등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
이어 21년 3월조에 『천황은 백제가 고려에 의해 파멸되었다고 듣고 구마나리를 汶洲王에게 주어 그 나라를 구해 일으켰다. 그때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백제국은 일족이 이미 다 망하여 창하에 모여 걱정한다 하지만 실은 천황의 덕으로 다시 그 나라를 일으켰다"라고 말했다[문주왕은 개로왕의 모제다. 일본구기에 구마나리를 말다왕에게 주었다고 하는데 아마 이것은 잘못일 것이다. 구마나리는 임나국의 하치호리현의 별읍이다]』
위사이기는 하지만 구마나리를 문주에게 주어 나라를 다시 일으켰다고 하여 문주왕이 열도에서 출병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웅진으로 간 것을 말하고 있다. 위례성 함락과 문주왕 출병시기가 3개월의 시차가 있다. 이 시차가 사실이라면 개로왕과 왕비, 왕자들이 다 죽었다고 했으니 온통 혼란에 빠져있을 때 열도에서 출병한 문주가 왕권을 잡았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한성이 7일만에 함락되었는데 열도에서 출병할 경우, 고구려의 침공소식을 듣고 상황판단하여 군사소집하고 열도에서 건너오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게 되어 있다.
구마나리를 말다왕에게 주었다는 것은 동성대왕 말기에 익산의 웅포에 도읍을 건설한 것을 말한다. 그것도 '주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왕자가 다 죽었다고 했고 개로왕의 모제라는 것이 개로왕의 외삼촌이라는 말인데 위사이기는 하지만 역시 왕통이 달라졌다는 것을 돌려서 표현하고 있다. 만약에 모제를 동모제(同母弟)라고 해석해도 개로왕의 아우가 되어 역시 아들이라고 한 사기는 틀린다.
열도출신으로 구주의 가야군을 이끌고 백제를 장악했던 동성대왕의 기사가 서기 웅략기 23년 4월조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백제의 문근왕이 훙하였다. 천황이 곤지왕의 5인의 아들 중에서 둘째인 말다왕이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칙하여 궁중에 불렀다. 친히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근히 타일러 그 나라의 왕으로 하였다. 무기를 주면서 축자국의 군사 500인을 보내 나라에 호송하였다. 이를 동성왕이라 한다』
기술기법이 꼭 같다. 문주왕도 열도출신이었던 것이다. 구마나리는 임나국의 하치호리현의 별읍이라는 것은 창원의 웅천을 말한다. 구마나리가 하나가 아닌 것이다. 충남 공주 웅진, 전북 익산 웅포, 경남 창원 웅천 등 전부 셋이다. '창하(倉下)'라는 말도 구라[倉]를 왕좌로 보면 비어있는 "어전 아래"라는 뜻이 된다.
문주왕에게 주었다고 한 것은, 동성대왕이 열도에서 출병한 것을 서기 웅략기 23년 4월조에 구주군사 500인으로 호송시켜 백제로 보내 백제왕이 되게 했다고 기술한 것과 같은 경우로서 열도에서 출병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문주왕의 시호
사기의 시호 文周도 서기의 汶洲를 음은 그대로 두고 한자만 바꾼 것이며, 汶洲는 계체기에 등장하는 열도 지명 汶慕羅(섬이름), 己汶 등과 동일한 지명이 아닌가 생각된다. 汶洲란 '汶섬'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계체기의 문모라와 기문은 동일지명으로 보이고 섬이름이며 세또내해의 小豆島로 추정된다.
위의 내용은 <백제에 의한 왜국통치 삼백년사/윤영식/312p>에도 해설되어 있는데 마지막에 주하는 찬기전충별에 대해 아래와 같이 해설하고 있다.
『무내계가 칠일에 이르도록 진왕가를 타도하지 못하고 복명도 하지 않자 대신 나서서 천황(웅략이 아니고 석상신궁의 근초고, 즉 이중천황을 말함)에게 보고한 사람이 있는데 그 분을 찬기전충별이라 하였다. 여기 칠일에 대해 먼저 보자면 백제 십왕의 기준에 따라 일곱 번째의 왕은 바로 개로왕에 해당하여 지금까지의 이야기와도 모순 없이 부합된다. 그리고 무내계가 이랬다는 것을 밉게 생각하여 천황에게 알린 찬기전충이란 분을 보면 경행기에서 찬기국조의 시조를 신즐(神櫛)황자라 하였고, 이 구시[櫛]는 곧 근구수왕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田蟲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국조, 영주 등 전답의 조세에 의존하는 계층을 그런 말로 지어 썼다고도 할 수 있지만 기·기집필자가 하도 많은 이명, 이칭을 짓다 보니 이런 이름도 예사롭게 지었으리라고 생각도 해 보는 것이다』
여기 천황이 겉보기는 웅략천황이지만, 귀수대왕이 초고대왕에게 보고했다고 보고 있다. 고사기 이중기에서 수치별명(=예전별명)이 석상신궁에 있는 이중천황에게 소바까리를 죽이고 보고한 것과 같은 내용이므로 지금 여기서도 보고 받는 천황이 곧 이중천황이라는 논리인데 조일랑이 소바까리와 동일인물이므로 맞는 얘기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문주왕은 장수왕의 침공으로 개로왕이 죽을 때 신라에 원병을 청하러 갔던 것이 아니고 열도의 쯔꾸시 기꾸[聞]에서 출병해서 개로왕이 전사한 후에 도착해서 혼란을 수습하고 왕위에 올랐던 것을 사기에는 신라에서 원병을 얻어왔다고 위사를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다.
다음 카페 <백두산족의 역사> 관리자 님의 글에서 재인용
- 원본출처 : www.coo2.net > 네티즌코너 > 고대사산책
산책 님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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