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부흥군 최후의 항전 제2절 주류성 전투
周留城은 豆率城('豆率’의 한글 음 ‘두율’의 반절은 ‘둘’로써, 이는 ‘周留’의 古音인‘두루’와 같음을 알수 있다)·州柔城이라고도 칭하고 있으며, 주류성을 공격하게 된 연유에 대하여『일본서기』에는 ‘신라는 백제왕이 훌륭한 장수를 죽이자 곧장 백제로 들어가 먼저 州柔를 빼앗으려고 도모하였다.’고 하고 있다. 즉, 부흥군 지도층의 내분이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부흥군 측에서도 신라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이는 풍왕이 왜의 원군을 맞이하러 백촌으로 나가면서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원컨대 여러 장군들을 이에 응하여 미리 도모하라.”고 하고 있어 확실하다고 하겠다. 이때 나당군과 백제부흥군 사이에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한 첩보전이 상당히 치열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부흥군 측에서는 웅진에서 출발하는 나당군의 육로와 수로를 감시하고 차단한다거나 또는 배후를 공격하여 적을 교란시키고 둔화시키는 전투가 있을 법도 한데 문헌에는 이에 대한 전투기록이 전혀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복신이 살해된 후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고 위축되어 싸우기를 꺼려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쩌면 계속된 백제부흥군 지도층의 내분으로 인하여 부흥군에 참여한 백제유민 개개인이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싸우는가 하는 회의에 빠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다. 그러나 나당군 측에서는 주류성을 치기 위한 공격로 상에 입지하고 있는 가림성이라는 난공불락의 요해처에 대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었음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적을 물리치려는 의지와 승리를 담보하는 전략·전술면에서 나당군 측이 우위에 있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가) 조칙으로 우위위장군 손인사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그들을 구원케 하였다. 인사가 인궤 등과 더불어 서로 합하니 군병들의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가림성은 수륙의 요충이니 이 곳을 먼저 치기를 요청한다.”고 하자, 인궤가 말하기를 “가림성은 험하고 단단하여 급히 공격하면 군사들이 상하여 결손이 있을 것이고, 굳게 지키면 시일을 많이 허비하게 될 것이니, 먼저 주류성을 공격함만 같지 못하다. 주류는 적의 소굴로 흉포한 무리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 악의 근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그 근원을 뽑아야 된다. 만약 주류를 평정한다면 나머지 모든 성들은 스스로 항복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인사·인원 및 신라왕 김법민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인궤는 곧 별장 두상, 부여융과 수군 및 군량선을 거느리고 웅진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만나 같이 주류성으로 전진하였다.(구당서 열전 유인궤조) (나) 마침 조칙으로 우위위장군 손인사를 보내어 군병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도착하니 사기가 진작하였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나아갈 바를 논의하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가림성은 수륙의 요충이니 힘을 합하여 그 곳을 먼저 공격하자.”고 하니, 인궤가 말하기를 “병법에 실한 곳은 피하고 허한 곳을 공격하라고 했다. 加林(城)은 견고하니 공격한즉 군사들이 상하고, 수비한 즉 허송세월만 할 것이다. 주류성은 적의 소굴로 흉악한 무리들이 모여 있으니 만약 그 곳을 이기면 모든 성들이 스스로 항복할 것이다.” 이에 인사·인원 및 법민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인궤는 두상·부여융과 함께 웅진에서 백강으로 가서 그들과 회합하였다.(신당서 열전 유인궤조) 웅진부성에 손인사군의 원병이 합세하자 나당군의 장수들이 작전회의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누구인지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가림성이 수륙의 요충이니 먼저 공격하자고 제의하고 있다. 그 제의에 자신감이 충만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유인궤가 “실한 곳은 피하고 허한 곳을 공격하라”는 병법의 내용을 상기시키며 가림성 공격의 부당함을 거론하고, 주류성은 적의 소굴로 그 곳을 평정하면 모든 성들이 스스로 항복할 것이라고 설득하여 직접 주류성으로 공격목표를 정하고 있다. 이는 660년 속전속결로 도성인 사비성을 함락시켜 의자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작전 그대로이다. 그리하여 나당군은 육군과 수군으로 나뉘어 웅진을 출발하여 백강에서 만나 수륙군이 같이 주류성으로 진격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함께 진격한 나당군 중 육군은 663년 8월 13일에 주류성에 도달하여(용삭 3년 계해에 백제의 여러 성들이 비밀리에 군사를 일으켜 국토 회복을 꾀하여 그들의 우두머리가 두율성에 웅거하고 왜국에 군사를 구걸하여 원조를 받았다. 대왕이 친히 유신·인문·천존·죽지 등 장군들을 거느리고 7월 17일에 정벌하기 위하여 웅진주에 이르러 진영을 지키던 유인원과 군사를 합하여 8월 13일에 두율성에 이르렀다. 백제사람들이 왜인들과 함께 출전함에 우리 군사들이 힘껏 싸워 그들을 크게 깨뜨리니 백제와 더불어 왜인이 모두 항복하였다. / 삼국사기 권42 열전 2 김유신) 8월 17일에는 주류성을 에워싸게 되었다.(무술(17일)에 적의 장수가 주유에 이르러 그 왕성을 포위하였다. 당군의 장수가 전선170척을 이끌고 白村江에서 진을 펼쳤다/ 일본서기 권27 천지천황 2년 8월)
이때 백제부흥군이 왜군과 함께 출전하므로 신라군사들이 힘껏 싸워 크게 깨뜨리고,(삼국사기 권42 열전 김유신) 9월 7일에는 주류성을 함락(기유에 일본의 여러 장수들이 백제왕과 함께 기상을 관측하지 않고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이 선봉에 서기를 다툰다면 그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라고 하고, 일본의 어지러운 대오를 고치고 중군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견고하게 진을 치고 있던 당군을 쳤다. 당군이 곧 좌우로 배를 협공하고 포위하여 싸우니 잠간 사이에 일본군이 계속 패하여 물에 빠져 익사한 자들이 많았고 배들은 고물과 이물을 돌릴 수 가 없었다. 朴市田來津이 하늘을 바라보며 맹서하고 분하여 이를 갈며 성을 내고 수십 명을 살해하고 전사하였다. 이때, 백제왕 풍장이 여러 사람들과 같이 배를 타고 도망하여 고구려로 갔다. 9월 정사(7일)에 백제 주유성이 비로소 당에 항복하였다 / 일본서기 권27 천지천황 2년 8월)시키고 있다. 주류성이 포위되어 공격을 당하자 왕자 충승·충지 등이 士女및 왜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탐라국의 사자와 함께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이에 인사·인원 및 신라왕 김법민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인궤는 곧 별장 두상, 부여융과 수군 및 군량선을 이끌고 웅진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만나 같이 주류성으로 전진하였다. 인궤가 왜병들을 백강 어귀에서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군선 4백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하고 바닷물을 모두 붉게 물들이니 적의 무리들이 크게 무너졌다. 부여풍이 몸만 빠져나와 달아나니 그의 보검을 획득하였으며, 거짓 왕자 충승·충지 등이 士女및 왜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탐라국의 사자와 함께 일시에 모두 항복하니 백제의 모든 성들이 함께 귀순하였다. 적의 우두머리 지수신은 임존성에 웅거하며 항복하지 않았다 /구당서 열전 유인궤조)고 한 것으로 보아 주류성 내에는 주력부대인 부흥군을 비롯하여 왜군 및 응원차 파견된 탐라의 사자도 도착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을 지휘한 것은 왕자 충승과 충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왕자 충승은 풍왕의 숙부로 왜에 머물러 있다가 풍왕이 귀국할 때 같이 귀국하였을 것으로 부흥군과 왜군을 아울러 지휘하는 데는 무난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전술적으로 나당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으로 주류성이 위기에 봉착하자 이들을 모두 이끌고 항복하고 말았다. 웅진에서 출발한 나당군의 육군과 수군이 백강에서 회동한 것은 육군의 渡江을 돕기 위해서이다. 웅진에서 출발한 육군이 백강 남안을 따라 전진하다 사비성부근에서 강을 건넜기 때문에 가림성 공격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주류성은 가림성이 위치하고 있는 백강 북안을 따라 전진하여 백강구 북쪽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황을 분석해 볼 때 주류성은 가림성과 함께 금강 북쪽에 위치하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판단된다. 만약 주류성이 금강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면 금강을 건너 가림성 부근을 지나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6 문무왕 3년 기사에는 "두량윤성과 주류성 등 여러 성을 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고 하여 축약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삼국사기』김유신(중)전에는 주류성을 함락시킨 후 군사를 나누어 여러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음을 밝히고 있어, 『문무왕보서』에 “ 남방이 이미 평정되자 군대를 돌려 북방을 정벌하는데 任存 한 성이 고집하고 명민하지 못하여 항복하지 않았다.”고 한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는 주류성을 함락시킨 후 두량윤성 등 여러 성들을 함락시켰겠으나 두량윤성이 백제부흥군의 주요 거점이므로 특별히 기록으로 남기게 된 것이라 하겠다. 백강의 위치비정에 혼동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류성의 위치비정에 있어서도 많은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주류성 위치해명에 있어서 문제점으로 드러난 것은 주류성과 두량(능)윤성과의 혼동과 백강 및 웅진강의 호칭문제에서 연유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주류성의 위치를 해명할 수 있는 몇 가지 주요 사안이 있기 때문 에 이를 중심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662년 12월에 풍왕은 복신 등과 논의하여 부흥군의 왕성을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옮겼으나 663년 2월에 신라 장수 흠순과 천존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백제 남쪽 지방의 여러 성인 거열성·거물성·사평성·덕안성 등을 함락시키자(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6 문무왕 3년 2월조 ; 일본서기 권27 천지천황 2년 2월 병술조) 위기를 느끼고 이 달에 다시 주류성으로 옮기고 말았다. 이는 피성으로의 천도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朴市田來津이 “피성은 적이 있는 곳에서 하루 밤에 갈 수 있는 거리라 너무 가깝다.”고 우려한 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라 하겠다. 피성은 대체로 김제로 비정되고 있으며, 거열성은 거창, 거물성은 임실, 사평성은 순천, 덕안성은 은진에 비정되고 있다. 남방의 여러 성이 함락되자 왕성을 피성에서 다시 주류성으로 옮기고 있다는 것은 당시 지정학적으로 볼 때 주류성은 피성의 위치보다 더 북쪽인 안전한 곳이라고 판단되는 지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주류성에 대한 위치는 백강구 부근에 있다고 파악되기 때문에 백강의 위치비정에 있어서 고려되어야 할 사항으로, 이 때 백제부흥군의 주요거점으로 아직 건재하고 있던 성곽이 가림성·두량윤성·임존성이므로 이들 성곽들과 쉽게 연결되는 곳이어야 할 것이다.이와 같은 관점에서 검토하여 볼 때, 주류성의 부안설에 따른다면 서쪽으로는 조금 치우친다 하더라도 오히려 피성으로 비정되고 있는 김제보다 남쪽으로 내려와 적진에 더 가깝게 접근하게 되는 모순을 가지고 있어서 성립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유인궤를 중심으로 한 나당군의 수군은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만나 같이 주류성으로 전진하였다.’고 하여, 수군과 육군이 백강에서 회합하여 같이 주류성으로 진격하고 있는데, 만약에 백강을 안성천의 백석포에 비정하게 된다면 육군이 안성천의 백석포까지 가서 수군과 회합한 후에 다시 내려와 연기지방의 주류성을 공격하는 모순에 빠지게 되며, 마찬가지로 백강을 아산만으로 비정할 경우 육군이 아산만까지 가서 수군과 합세하여 홍성지방의 주류성으로 진격하여야 한다는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신라군이 663년 지수신이 항거하는 임존성을 공격하다 실패하고 舌利亭으로 후퇴하고 있는 다음 기사가 주목된다. ⓐ 홀로 지수신 만이 임존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겨울 10월 22일부터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11월 4일에 군사를 돌이켜 舌利亭에 이르렀다. 공적을 논의하여 상을 내리되 차이가 있었다. 죄인들을 크게 사면하고, 의복을 만들어 진영에 머물러 있었던 당군에게 지급하였다.(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
ⓑ 군사를 나누어 여러 성을 공격하여 그 성들을 항복시켰으나 오직 임존성은 지형이 험하고 성이 견고하며 또한 군량이 많기 때문에 이 성을 공격한지 30일이 되었는데 능히 항복시키지 못하자 군사들이 피로하여 싸우기를 싫어하였다. 대왕이 말하기를 “지금 비록 한 성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으나 나머지 모든 성들은 모두 항복하였으니 가히 공이 없다고 할 수 없다.”하여 이내 군사를 정돈하여 돌아왔다. 겨울 11월 20일에 서울에 이르러 유신에게 밭 500결을 하사하고 그 나머지 장졸들에게는 상을 내리되 차등이 있었다.(삼국사기 권42 열전 2 김유신) 이 내용은 부흥군의 왕성인 주류성이 함락된 이후에도 임존성에서 끝까지 버티고 있는 지수신군을 신라군이 663년 10월 22일부터 2주일동안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11월 4일에 군사를 돌이켜 ‘舌利停’에 도착하고 있다. 이때, 신라군이 임존성을 공격하다 군사를 돌이키게 된 이유를 ‘군사들이 피곤하여 싸우기를 싫어하였다.’고 하고 있어, 신라군이 ‘설리정’으로 군사를 돌이킨 가장 큰 이유가 신라군에 대한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군사를 돌이켜 논공행상을 하면서 설리정 진영에 머물러 있었던 당군에게도 의복을 지어 나누어주고 있는 것이다. 설리정에서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킨 문무왕은 11월 20일에는 신라의 왕경 경주에 도착하여 김유신에게 밭 5백결을 하사하는 등 대대적으로 포상하고 있다. 신라군이 군사를 돌이킨‘설리정’은 바로 현재의 서천군 관내에 해당하고 있으니,『 대동지지』권5 충청도 서천 연혁조에 의하면, 본래 백제의 舌林으로 신라가 舌利停을 두고 경덕왕 16년에 西林郡으로 고쳐 웅주에 예속시켰다.…중략…본조 태종 13년에 서천군으로 고쳤다.고 하여, 서천은 본래 백제의 설림으로 신라가 설리정이라 지명을 고치고 군영을 설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왜 임존성 공격에 실패한 신라군이 임존성에서 가까운 웅진부성으로 가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 ‘설리정’으로 군사를 돌이켜 오게 되었을까? 그리고 당군은 왜 신라군이 임존성을 공격하고 있는 동안 이 설리정에서 머무르고 있었을까? 이것은 바로 서천군 관내에 있는 백제부흥군의 왕성인 주류성을 함락시키고 이 곳에 설리정을 설치하고 있는 것으로, 이는 나당군이 660년 백제의 도읍인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이 곳에 당군과 신라군을 주둔시키고 있었던 사실과 문무왕 11년 신라의 대당전쟁 시 사비성일대를 확보한 신라가 그 곳에 소부리주를 설치하고 있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임존성 공격에 실패한 신라군이 설리정 즉 이미 함락시킨 바 있는 백제부흥군의 왕성인 주류성으로 군사를 돌이켜 논공행상함으로써 저하된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우고 있으며, 주류성 함락이후 계속 이곳 군영에 머무르고 있었던 당군에게도 의복을 지어 나누어 준 것이라 하겠다. 이로 볼 때, 주류성은 현 서천군 관내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주류성이 금강 이북 충남 서천군 관내에 입지하고 있어야지만 나당군 장수들의 가림성 공격 논의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제3절 임존성·사비산성 전투
1. 임존성 전투
663년 6월에 있었던 백제부흥군 지도층의 내분은 나당군의 총 공세를 야기하였으며, 백강 전투에서 구원군으로 참여한 왜 수군을 격침시킨 여세를 몰아 부흥군의 왕성인 주류성과 주요 거점인 두량윤성을 함락시키고, 지수신이 끝까지 버티고 있는 임존성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된 문헌 기록과 함께 임존성의 함락기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O-① 왕이 김유신 등 28(30명이라고도 한다)장군을 거느리고 이들과 더불어 합세하여 두릉(양)윤성과 주류성 등 여러 성들을 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부여풍은 몸을 빼어 달아났고 왕자 충승과 충지 등은 그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홀로 지수신만이 임존성에 웅거하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겨울 10월 21일부터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11월 4일에 군사를 돌이켜 舌利亭에 이르렀다. 공적을 논의하여 상을 내리되 차이가 있었다. 죄인들을 크게 사면하고 의복을 만들어 진영에 머무르고 있던 당군에게 지급하였다.(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6 문무왕 3년조) ② 군대를 나누어 여러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오직 임존성이 지세가 험하고 성이 견고하였으며, 또한 양곡이 많았으므로 이곳을 공격한지 30일이 되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군사들이 피로하여 싸우기를 싫어했다. 대왕이 말하기를 “지금 비록 1개 성이 함락되지 않았으나 모든 나머지 성들이 모두 항복하였으니 공이 없다고 할 수 없다.”고 하고는 군사들을 정돈하여 돌아 왔다. 겨울 11월 20일에 서울에 이르렀다. 유신에게는 밭 500결을 내렸고, 그 나머지 장졸들에게는 상을 내리되 차등이 있었다.(삼국사기 권42 열전 2 김유신)
③ 신라의 날랜 기병들이 당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진을 깨뜨리니 주류성이 담력을 상실하여 드디어 곧 항복하였다. 남방이 이미 평정되자 군대를 돌려 북방을 정벌하는데 任存한 성이 고집하고 명민하지 못하여 항복하지 않으므로 양군이 힘을 합하여 함께 한 성을 쳤으나 굳게 지키고 저항하므로 공격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신라가 군사를 돌이켜 돌아가고자 한즉, 杜大夫가 이르기를 “칙령에 의한다면 (백제를) 평정한 후에는 서로 회맹하라고 하였으니 임존 한 성이 비록 항복하지 않았으나 함께 서로 맹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신라로서는 칙령대로 한다면 이미 평정한 후에야 함께 서로 회맹하라고 했는데 임존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으니 이미 평정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7 문무왕 11년조『문무왕보서』) ④ 부여풍이 몸을 빼어 달아났다. 그 보검을 획득하였다. 가짜 왕자 부여 충승과 충지 등이 士女 및 왜 무리들과 탐라국사를 함께 이끌고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백제의 모든 성들이 모두 다시 귀순하였는데, 적의 장수 遲受信만이 임존성에 웅거하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백제 수령 사타상여와 흑치상지는 소정방군이 회군한 후부터 모였다가 달아나 흩어져 각각 험한 곳에 웅거하여 복신에 호응하였다. 이에 이르러 그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니 인궤가 은혜와 신의로써 설득하고, 스스로 자제들을 거느리고 임존성을 공격하여 함락하도록 명령하였다. 또 군대를 나누어 그들을 돕고자 하였는데, 손인사가 말하기를 “상여 등은 짐승의 마음이라 믿기 어렵습니다. 만약 갑옷과 병기를 준다면 이는 도둑에게 무기를 지급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인궤가 말하기를 “내가 상여와 상지를 보건대 모두 충용하고 지모가 있으며,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나를 따른 즉 성공할 것이며, 나를 배반하면 반드시 멸망할 것이니, 이로 인하여 증험할 기회가 이 날에 있으니 모름지기 의심하지 말아라.”하고 이에 그들에게 양곡과 무기를 지급하고 군대를 나누어 그들을 따르게 하여 드디어 임존성을 쳐서 빼앗았다. 지수신은 그 처자를 버리고 달아나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이에 백제의 나머지 무리들이 모두 평정되었으므로 손인사가 유인원과 함께 군대를 정돈하여 돌아왔다.(구당서 열전 유인궤조) ⑤ 오직 추장 지수신이 임존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비로소 정방이 백제를 공파하니 추장 사타상여와 흑치상지가 달아나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모아 거느리고 험한 곳에 웅거하여 복신에 호응하였으나 이에 이르러 모두 항복하였다. 인궤가 그들에게 진심을 보여줌으로써 더하여 임존을 취하여 스스로 증험케 하였다. 곧 젊은이들에게 갑옷과 무기와 양곡을 지급하였다. 인사가 “오랑캐(夷狄)의 야심은 믿기 어려운데 만약 갑옷과 곡식을 준다면 도둑에게 편의를 주는 거와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인궤가 말하기를 “내가 상여와 상지를 보건대 충성스럽고 지모가 있어 기회를 얻어 공을 세울 것인데 오히려 무엇을 의심하는가”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마침내 그 성을 쳐서 빼앗자 지수신이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백제의 나머지 무리들이 모두 평정되었 다. 인사 등이 군대를 정돈하여 돌아왔다.(신당서 열전 유인궤조) ⑥ 백제왕 부여풍은 몸을 빼어 고(구)려로 달아났고 왕자 충승과 충지 등은 그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오직 별장 지수신만이 임존성에 웅거하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처음에 백제 서부인 흑치상지가 신장은 7척이 넘었고 굳세고 결단력이 있으며 지략이 있었다.… 정방이 능히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상지와 더불어 별부장 사타상여가 각기 험한 곳에 웅거하여 복신에게 호응하였으나 백제가 이미 패함에 모든 장수들이 그 무리와 항복하였다. 유인궤가 상지와 상여로 하여금 스스로 그 무리를 이끌고 임존성을 함락시키고자 거듭 양곡과 무기로써 그들을 도왔다. 손인사가 말하기를 “이들은 짐승의 마음에 속하거늘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인궤가 말하기를 “내가 두 사람을 보건데 모두 충용하고 지모가 있으며 신의가 두텁고 무게가 있다. 다만 지난번에는 기탁할 바의 그 사람을 아직 얻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바르게 갖추어짐에 감격하여 공을 세울 때인데 의심하여 쓰지 않을 것인가.”하고, 드디어 양곡과 무기를 지급하고 군사를 나누어 그들을 따르게 하여 임존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지수신이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다.(자치통감 당기 고종 용삭 3년조) 위 사료에 보면, 주류성과 두량윤성 등 백제부흥군의 주요 거점이 함락된 이후에도 지수신이 임존성을 거점으로 항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때 신라는 10월 21일부터 임존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11월 4일에 군사를 돌이켜 설리정으로 철수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기록으로『삼국사기』김유신(중)전에 의하면, 신라군이 임존성을 공격한 기일은 30일로 나타나고 있다. 663년 9월 7일에 주류성을 함락시킨 신라군은 북상하면서 두량윤성 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후에 마지막까지 항거하고 있는 임존성을 공격하고 있는 있음을 감안할 때 이 30일은 임존성으로의 행군기일도 포함된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신라군이 임존성을 공격하다 군사를 돌이키게 된 이유를 “군사들이 피곤하여 싸우기를 싫어하였다.”고 하고 있어, 신라군이 ‘설리정’으로 군사를 돌이킨 가장 큰 이유가 신라군에 대한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함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문무왕보서』에 의하면 “임존 한 성이 고집하고 명민하지 못하여 항복하지 않으므로 양군이 힘을 합하여 함께 한 성을 쳤으나 굳게 지키고 저항하므로 공격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고 하여, 임존성에 대한 공격은 나당군이 연합하여 공격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결국 임존성이 함락된 것은 안타깝게도 임존성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흑치상지와 사타상여에 의해서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당의 以夷制夷 政策에 철저하게 말려든 것이다. 흑치상지가 당에 항복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임존성을 근거로 하여 활약하였던 흑치상지가 부여융이 귀국한 이후 당에 항복하여 부여융과 행동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백제부흥운동이 종식된 후 흑치상지는 부여융과 함께 손인사군을 따라 당으로 들어가고 있으며, 664년 유인궤의 추천에 의하여 부여융이 웅진도독으로 귀환할 시에도 절충도위라는 직책으로 흑치상지가 동행하고 있다. 시기적으로도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나당군이 두량윤성을 함락시킨 후 임존성으로 몰래 사자를 보내어 흑치상지의 투항을 설득시킨 것이 아닐까 한다. 이때 흑치상지는 항상 행동을 같이 해온 사타상여와 긴급하게 상의를 하고 동의를 얻자 심복들을 데리고 임존성을 빠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흑치상지가 항복한 것은 당군에게 항복했다기 보다도 부여융의 설득에 의해서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와 같은 흑치상지의 행동은 풍왕보다는 부여융을 택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흑치상지의 이러한 갈등은 풍왕이 왜에 머물다가 귀국하였다는 거리감도 있었겠지만 복신을 살해한 데에 대한 반발이 더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임존성을 통할하게 된 지수신은 부흥운동 과정에서 계속 드러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부상된 장수이다. 복신과 도침이 없는 상태에서 임존성을 지킬 적임자로 새롭게 추천되었던 것 같다. 지수신은 풍왕에 의하여 파견된 풍왕계 장수로 짐작되는데, 임존성이 함락되자 풍왕이 망명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수신도 고구려로 망명하고 있음에서 추론이 가능하다. 이 지수신과 흑치상지가 서로 뜻이 맞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본거지인 임존성에서 지수신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는 것은 참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흑치상지는 부여융 또는 유인궤로부터 풍왕이 이끄는 백제부흥군을 진압시키면 당과의 속국관계일지언정 부여융을 중심으로 한 백제의 실체를 보장받았을 가능성이 예상된다. 이것은『문무왕보서』에 당나라 장수 두상이 “칙령에 의한다면 (백제를) 평정한 후에는 서로 회맹하라고 하였으니 임존 한 성이 비록 항복하지 않았으나 함께 서로 맹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 데에서 엿볼 수 있다. 즉 당은 백제부흥운동을 진압시킨 후에는 부여융을 중심으로 한 괴뢰정부를 수립하여 신라를 견제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이에 따라 흑치상지는 자신의 세력 근거지이며, 이를 중심으로 직접 부흥운동을 일으켜 전개하였던 임존성을 스스로 공격하여 함락시켰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때 흑치상지는 소수의 심복만을 데리고 나왔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거느리는 무리만 가지고서는 임존성을 공격할 수 없기 때문에 당군으로부터 임존성을 공격할 양곡 및 무기와 군대를 지원받아 행동에 옮기고 있다. 당군이 흑치상지와 사타상여 등에게 무기와 군대를 지원하는 데에는 물론 반대가 심하였을 것으로 예상된다. 손인사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손인사는 “상여 등은 짐승의 마음이라 믿기 어렵습니다. 만약 갑옷과 병기를 준다면 이는 도둑에게 무기를 지급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여 반대하고 있다. 그러자 유인궤는 “내가 상여와 상지를 보건대 모두 충용하고 지모가 있으며,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나를 따른 즉 성공할 것이며, 나를 배반하면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이로 인하여 증험할 기회가 이 날에 있으니 모름지기 의심하지 말아라.”하여, 흑치상지와 사타상여의 충성심과 위장으로 투항했는지의 여부를 시험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에게 양곡과 무기를 지급하고 군대를 지원하되 흑지상지와 사타상여에게 각기 군대를 나누어 지원하고 따로 따로 행동하도록 함으로써 둘이 힘을 합하여 반기를 드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이제까지 한 성에서 동거동락하던 흑치상지와 사타상여의 투항함과 동시에 임존성으로의 공격은 임존성 내 부흥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을 것이나, 흑치상지 등이 임존성을 쳐서 빼앗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임존성 내 백제유민들은 이들의 당군에의 투항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배신행위를 응징하려 힘껏 싸우다가 함락된 것으로 보인다. 임존성을 근거지로 하였던 흑치상지야말로 임존성의 허실을 누구보다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을 것으로 이 성의 함락은 다만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임존성에서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지수신은 흑치상지 등의 공격으로 임존성이 함락되자 고구려로 달아나고 말았다. 당군 진영에서도 유인궤만 남아서 후속조치를 행하게 하고 손인사와 유인원 등은 당나라로 귀환하게 되었다. 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및 광시면 동산리와 홍성군 금마면에 걸쳐 봉수산성이 입지하고 있으며, 이 산성에서는 사방 20~30㎞정도의 주변지 역을 조망할 수 있는 요충지에 해당하고 있어 임존성으로 비정된다.임존성은 봉수산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250m 정도 떨어져 있는 표고 470m의 봉우리와 동쪽으로 550m 정도 떨어져 있는 표고 420m의 작은 봉우리를 에워싸고, 남쪽으로 완만한 경사면을 감싸고 있는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성의 둘레는 2,426m이다. 동쪽으로는 ‘무한천’이 흐르고 있는데, 현재 동북쪽으로 예당저수지가 조영되어 있다. 성내에서 수습된 유물은 기와와 토기편이 주류를 이루는데, 기와편 중에는 백제 와편과 함께 ‘任存’·‘存官’·‘任存官’ 등 銘文瓦가 포함되고 있어 백제 부흥운동의 시발지 및 최후의 현장으로 사서에 나타나는 임존성임을 말해 주는 물적 증거로 이해된다. 2. 사비산성 전투
임존성이 함락되자 백제 유민들의 항거가 평정된 것으로 판단하고 손인사는 유인원과 함께 당으로 돌아가고 유인궤가 웅진부성에 남아 군사들을 통솔하여 진영을 지키게 되었다. 그러나 664년 3월에 사비산성에서 백제유민들이 당군에 항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가)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사비산성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키므로 웅주도독이 군사를 일으켜 이를 공격하여 깨뜨렸다.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6 문무왕 4년조). (나) 인덕원년 갑자 3월에 백제의 나머지 무리들이 또 사비성에 모여 반란을 일으키므로 웅주도독이 관할 군사들을 일으켜 그들을 공격하였으나 여러 날 동안 안개가 끼어서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기 때문에 능히 싸울 수가 없었다. 사자 伯山이 와서 그러한 사정을 보고하므로 유신이 은밀히 계략을 일러주어 그들을 이기게 하였다. (삼국사기 권42 열전 2 김유신조) 백제유민들이 사비산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현재의 부소산성을 근거로 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사비산성 전투 당시 웅주도독은 유인궤로 파악되나 당시 백제유민들을 규합하여 이끈 지도자는 누락되어 있어 파악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비산성을 지키는 백제유민들은 웅주도독군을 맞이하여 훌륭하게 전투를 수행하고 있다. 웅주도독군이 사비산성에 웅거한 백제유민들을 쉽게 진압시키지 못한 이유로 짙은 안개를 들고 있으나 유인궤가 伯山이라는 사자를 김유신에게 보내어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기상관계만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김유신의 도움으로 백제유민들을 물리치고 있지만 사자 백산이 사비에서 출발하여 경주의 김유신에게 다녀오는 거리를 감안할 때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진압시키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게 된 요인으로서는 무엇보다도 복신과 도침·풍왕과 복신과의 권력투쟁으로 인한 지도층의 내분을 으뜸으로 치지 않을 수 없으며, 두번째는 당의 이이제이 정책에 의하여 풍왕에 대립시켜 부여융을 손인사군에 편승시켜 귀국케 하여 분열을 획책한 결과 흑치상지가 이에 말려들어 당에 항복하여 부흥군의 마지막 거점인 임존성을 함락시킨 사건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는, 백제부흥군이 웅진도를 차단하여 신라군과 당군이 합세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면 백제부흥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대전 관내에 위치하고 있는 옹산성과 우술성을 비롯한 여러 산성들이 웅진에 주둔하고 있었던 당군을 고립시킬 수 있는 웅진도를 차단하는데 실패하여, 결국은 신라군이 웅진에서 당군과 합군하여 백제부흥군의 왕성인 주류성을 함락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백제부흥군의 4년간에 걸친 이와 같은 항쟁은 당군의 활동 범위를 사비 및 웅진으로 제한시킴으로써 당이 웅진도독부 등 5도독부를 설치하여 백제고지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좌절케 하였으며, 남북으로 협공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려는 당의 의도를 수년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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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마지막 항전 - 주류성전투
2013. 10. 1. 18:27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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