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계첩고의 진위

2013. 9. 21. 19:38글씨쓰기

 

 

 

 

1. 유홍준의 <완당평전2>의 내용

 

      554쪽 <계첩고>와 <조화첩>에 대한 글에서 추사가 권돈인과 함께 옥적산방에서

 쓴 것으로, 왕희지의 난정서에 대한 진위 고찰로서 12면 걸친 서첩으로, 서첩의 말미에

 기유년(1849년 - 64세) 초동에 옥적산방에서 적다라는 관기(款記)가 있다.

 

     추사는 이 계첩고에서 난정서는 임모에 임모를 거듭하여 당초의 왕희지 필체와

 동일한 것이라고 볼 수 없고, 그래도 추사는 구양순의 임모본이 가장 왕희지체에

 가까운 것이라고 보고 있으나, 단 한자도 틀림없는 왕희지체라고는 할 수 없고

 구양순이 쓴 것이므로 구양순체라고 말할 수 있다라는 내용이다.

 

     계첩고의 글씨는 북청유배시에 쓴 글씨들과 비교하면, 점과 획의 운영에서 예서체에서

  나타나는 삐침과 파임의 구성라든가 쇳조각 파편 같은 금석기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2. 전규호의 <추사행서첩>의 내용

 

    당태종이 진왕으로 있을 때, 왕희지의 진적을 얻은 것은 증거가 뚜렷하나,

 구양순,저수량이 임모한 것으로 말하자면 구본은 정무본으로 구양순체의 글씨이고,

 저본은 신룡본으로 저수량체의 글씨이다.

 

   미남궁(미불)이 저수량의 진영을 얻음에 이에 미쳐서, 이를 평생의 진완이라고 한 것은

 중점을 둔 것이 저본에 있음을 의미하며, 그 뜻이 정무본에 있지 아니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구본이 왕희지의 진적과 일호도 틀리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며, 구양순의

 임모본은 그대로 구양순체일 뿐이다.

 

 

3. 이영재, 이용수의 <추사정혼>의 내용(마지막 사진)

 

        우봉 조희룡의 글씨체를 많이 연습한 사람이 쓴 위작임.

    

     추사가 64세에 쓴 글쓴라면 완당이라고 관서하지 않고 노완이라고 관서해야 함.

   기유년에 제작된 위작들이 다수 있으니, 같은 위작자가 만든 위작이라고 본다.

 

 

 

 

추사정혼에서 지적한 계첩고의 첫장과 마지막장

                <사진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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