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파 / 蘇軾의 생애

2013. 8. 27. 13:52글씨쓰기

 

 

 

소동파 [Ssu Tungp'o, 蘇東坡]

중국 송 [宋] 시인·산문작가·예술가  

태어난 때 1036. 12. 19
죽은 때 1101. 7. 28.
소속 국가 중국
소속 국가 부속정보 송(宋)
직업 시인·산문작가·예술가
( 1036. 12. 19~ 1101. 7. 28 ).

중국 북송시대의 시인·산문작가·예술가·정치가.

 

본명은 소식(蘇軾), 자는 자첨(子瞻).

동파는 그의 호로 동파거사(東坡居士)에서 따온 별칭이다.

아버지 소순 (蘇洵), 동생 소철 (蘇轍)과 함께 '3소'(三蘇)라고 일컬어지며,

이들은 모두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한다.

 

소동파는 북송 인종(仁宗) 때 메이산[眉山:지금의 쓰촨 성(四川省)에 있음]

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메이산의 도인(道人)이라 불리던 장역간(張易簡)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 도가(道家), 특히 장자(莊子)의

제물철학(齊物哲學)을 접하게 되었다.

1056년 그의 아버지 소순은 두 형제를 데리고 상경하여 이들의 시를

구양수(歐陽修)에게 보여주고 격찬을 받았다.

이들 형제는 그해 가을 진사(進士)가 되었고 이듬해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시험에 나란히 급제했지만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1060년 복상(服喪)을 마치고 수도인 카이펑[開封]으로 돌아온 소동파는

관리임용 특별시험인 제과(制科)에 동생과 함께 급제했다.

이어 봉상부(鳳翔府:지금의 산시 성[陝西省]에 있음)의 첨서판관(簽書判官)이

되어 수도에 남게 된 동생과 헤어져 임지로 떠났다.

 

봉상부는 서주(西周) 이래의 여러 문화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는 孔子墓의 석고(石鼓:고대문자를 새긴 10개의 북 모양의 돌)

카이위안 사[開元寺] 동탑(東塔)에 남아 있는 당대 왕유(王維)·오도현(吳道玄)의 불화(佛畵)

등을 접한 감회를 〈봉상팔관 鳳翔八觀〉에서 읊었다.

봉상부鳳翔府에서의 임기가 끝나 상경한 1065년에 부인 왕씨(王氏)와 사별하고

그녀의 생전 모습을 〈망처왕씨묘지명 亡妻王氏墓地銘〉에 담았다.

이듬해 아버지 소순마저 죽자 아버지의 관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喪을 치렀다. 탈상(脫喪)하고 상경한 1068년은 신종(神宗)이 즉위한 해로,

참지정사(參知政事:부재상) 왕안석(王安石)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가

중앙정부의 물자조달을 합리화하기 위한 균륜법(均輪法),

농촌에 저리자금을 융통하여 빈농을 보호하려는 청묘법(靑苗法) 등

이른바 신법新法을 시행하던 시기였다.

신법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소동파는 감관고원(監官告院)이라는 지극히

사무적인 업무를 담당하다가 지방 근무를 청하여 저장 성[浙江省]

항저우[杭州]에서 근무했고, 이어 밀주(密州: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음)·

쉬저우[徐州]·후저우[湖州] 등지의 지방관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新法으로 인해 고생하는 농민들의 생활상을 시로써 묘사하고는 했다.

후저우 지사(知事)로 있던 1079년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어사대(御史臺)에 체포되어 수도로 호송되었다.

이때 어사들의 심문과 소동파의 변명을 담은 기록이 〈오대시안 烏臺詩案〉에

남겨져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다행히 사형을 면한 그는 100일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황주(黃州:지금의 후베이 성[湖北省]

황강 현[黃岡縣]) 단련부사(團練副使)로 좌천되었다.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황주에 거주할 의무가 지워진 일종의

유형(流刑)이었다.

황주에서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부인은 양잠을 했고, 그는 본래 병영이었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이 땅을 동파(동쪽 언덕)라 이름짓고 스스로를 동파居士라고 칭했는데,

그의 호는 여기서 유래한다.

그 유명한 〈적벽부 赤壁賦〉가 지어진 것도 이곳에서였다.

 

1085년 신종이 죽고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신종의 어머니이며 철종의

할머니인 선인태황후(宣仁太皇后)가 섭정을 시작했다.

그녀는 뤄양[洛陽]에 운둔해 있던 사마광(司馬光)을 불러들여 왕안석

일파가 만든 신법들을 폐지했다.

이때 소동파도 다시 발탁되어 예부랑중(禮部郞中)을 시작으로 중서사인

(中書舍人)·한림학사지제고(翰林學士知制誥) 등의 요직에 올랐다.

그러나 사마광의 신법 폐지가 모역법(募役法)의 폐지에 이르는 등 과격해지자,

소동파는 중서사인이 되어 수도로 올라온 동생과 함께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사마광이 죽고난 후 당쟁이 시작되었고, 선인황태후마저 사망하자 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철종은 신법들을 다시 부활시켰으며, 소동파는 다시 좌천되어 혜주사마

(惠州司馬)로 임명되었다.

그에 대한 탄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를 질시하는 정치인들로 인해 하이난 섬[海南島]으로 유배되어

그곳에 주로 거주하던 리족[黎族]과 함께 비참한 생활을 했다.

철종의 죽음으로 휘종(徽宗)이 즉위하면서 제거옥국관(提擧玉局觀)이라는

명예직에 봉해져 上京하던 도중, 큰 병을 얻어 창저우[常州]에서

66세의 생을 마감했다.

 

소동파는 구양수·매요신(梅堯臣) 등에 의해서 기틀이 마련된 송시(宋詩)를

더욱 발전시켰다.

구양수·매요신 이전의 시가 대개 비애(悲哀)를 주제로 해왔던 데 비해서

이 두 사람은 평안하고 고요한 심정을 주로 읊었고, 소동파는 이에서 벗어나

훨씬 적극적·자각적인 관점을 취했다.

즉 인생체험에 대한 시각의 전환을 생활의 지혜로 삼아 인간 불행의

內面에서 자신만이 인식할 수 있는 행복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가 이처럼 비애의 지양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장자의 제물철학,

불교의 묘리(妙理) 등의 사상적 배경 때문이었으며 〈적벽부〉에는

이같은 그의 사상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의 시는 자유분방한 심정과 재능의 표현을 통해 경쾌한 리듬 속에

절묘한 비유와 유머를 담고 있다.

제재에 있어서도 특별히 구애받지 않아 이전까지 다른 사람들이 취하지

않았던 것, 간과되어왔던 것들도 시로 썼다.

그의 시는 모든 사람에 대한 폭넓은 애정을 기저에 깔고 있으며,

인간의 욕망을 긍정했고 인간의 선의(善意)를 신봉했다.

그는 사(詞)에서도 기존의 완약(婉約) 대신에 호방한 사풍을 창시했다.

'적벽회고'(赤壁懷古)라는 부제가 붙은 〈염노교 念奴嬌〉·〈수룡음 水龍吟〉

등은 영물시(詠物詩)의 극치라 일컬어진다.

 

한편 산문에서는 당송8대가 중 소씨 부자, 즉 3소가 포함되었다.

동파의 산문은 송대의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이색적이다.

그의 작품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분방함이다.

동파는 작가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와야만 훌륭한 문장이 된다는

청년기의 생각을 평생토록 일관했다.

〈조주한문공묘비 潮州韓文公廟碑〉 등의 비문, 〈유후론 留侯論〉·

〈범증론 范增論〉 등의 사론(史論)을 비롯해 많은 산문을 남겨

지금까지도 널리 읽혀지고 있다.

 

소동파는 서예에도 뛰어났다.

그의 글씨는 동진(東晋)의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의 정통적인

書法과 당대 안진경(顔眞卿) 일파의 혁신적 서법을 겸비하고 있는데,

그 자신은 글씨 자체보다도 살아 있는 정신과 기백의 표현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그는 〈제발 題跋〉이라는 평론에서 해서(楷書)가 모든 서체의 기본이며

서예는 사람 됨됨이의 표현이라는 생각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의 글씨로는 유배지 황주에서 쓴 〈한식시권 寒食詩卷〉, 예부상서 시절에

쓴 〈이태백선시권 李太白選詩卷〉 등이 원본으로 남아 있다.

항저우에서 쓴 〈진규각비 宸奎閣碑〉와 같이 탁본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으나, 모두 신품(神品)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필적을 모은 〈서루첩 西樓帖〉도 전해진다.

한편 그의 죽화(竹畵)는 문동(文同)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동파는 그림을 그리는 데 기교를 쓰지 않았으며, 친구들은 그러한 그의 그림에

한 점의 세속성도 보이지 않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왕유의 그림에 대해 "시 속에 그림 있고 그림 속에 시 있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이후 중국 화론사에 면면이 이어지고 있다.

이같은 예술 사상과 기교에 대한 무관심은 문인화(文人畵)를 크게 부흥시키는

힘이 되었다.

다른 문인들과는 달리 동파의 시문집은 생전에 이미 간행되어 재판의

물증으로 제출될 정도였다.

〈동파집 東坡集〉 40권과 〈동파후집 東坡後集〉 20권은 南宋代 의 판본이

여러 종류 남아 있다.

이 두 책에 〈주의 奏議〉·〈내제집 內制集〉·〈외제집 外制集〉·

〈응소집 應詔集〉·〈속집 續集〉을 합친 〈동파칠집 東坡七集〉은

100권이 넘으며, 〈동파전집 東坡全集〉이라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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