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선(茗禪)

2014. 3. 23. 09:47글씨쓰기

 

 

 

 

 

   부산에 사는 젊은 다우(茶友)님이 손수 만든 지리산 야생 작설차와

가야국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후가 인도 또는 중국 사천성에서 가지고 온 차씨를

 

심었다는 전설이 깃든 김해 장군차(將軍茶)를 손으로 비벼서 덖거나 찌지 않고

그냥 그늘에서 말린 황차(黃茶)를 서울 남산다회를 할 때에 가져다 주었다.

 

  그 답례로 장지(裝紙)에 갑골문체로 쓴 명선(茗禪)이라는 글씨를 쓰서 부쳐줄려고 하니

두꺼운 장지를 접을 수 없어 어찌 보내 주어야 할지 고민 중이다.

 

 

   글씨쓰는 친구들은 글씨에 너무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조언을 해주지만.....

초서(草書)나 행서(行書)로 글씨를 쓸 때에는 마치 말이 달려 나아가 듯 속필(速筆)로

 

쓰내려 가야하고, 해서(楷書)체로 쓸 때에는 한획한획 또박또박 시종(始宗)에 약간 힘을 주어

쓰야한다. 반면에 전서(篆書)는  힘을 주어 시종과 획을 쓰야하지만,갑골문체(甲骨文體)를

 

쓸 때에는 갑골문이 소뼈나 거북등껍질(龜甲)에 뾰죽한 돌이나 쇠붙이로 새겼듯이  종이가

뚫어져라 아주 힘을 많이 주어 쓰내려 가야 한다. 따라서 얇은 닥지에 쓰면 종이가 뚫어져서

 

글씨 자체가 엉망이 되며, 힘을 많이 줄 때에 붓을 잡는 파지법(把指法)은 악필(握筆)이

마땅하다.

 

   이 명선이라는 글귀는 추사 김정희 선생님이 차를 보내준 해남 대둔사(대흥사)의

초의선사에게 답례로 쓰준 것인 데, 따라 적어 보았다.

 

 

 

 

 

갑골문체 명선(茗禪)

 

   좌측의 잔글씨인 관기(款記)는 영어 TO의 합성자, to 安茶, 甲午 茶宗

두인(頭印)은 茶宗이라는 직사각형의 음각한 백문주인(白文朱印)

아래의 도장은 步虛라는 양각된 방형(方形) 주문백인(朱文白印)이다.

 


 

 

 

 

   좌측의 잔글씨인 관기(款記)는 위의 사진과 같고, 우측의 두기(頭記)는 길림성 집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好太王碑)에 있는 비류곡홀본(沸流谷忽本)이라는 글자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님에 따르면 비류(沸流)는 우리 한민족의 기원적 신앙인 태양신을

의미하는 밝다,  밝음 또는 불을 이두문자식으로 표현한 말이며, 이를 달리 표현하여

朴達 , 檀(박달나무 단), 倍達 , 扶餘(불) 등으로 한자의 음이나 훈(訓)을 차용하기도 한다.

 

   홀본(忽本)은 초본아타의 이두식 표현이며, 초본아타는 현재 중앙아시아의 키르키스스탄國

이식쿨 호수 북쪽의 인구 1만명 정도의 작은 도시의 이름으로, 현지어로는 샛별(金星)을 뜻하는 말이다.

 

   파미르 고원(蔥嶺 총령)에 있는 이식쿨 호수에서 발원한 맥(貊 : 북방종족 맥)족은

파미르 고원 일때가 기후변동으로 사막화되고, 인구가 증가로 유목민의 식량인 가축의 마릿수가

늘어나서 초원이 황폐화되자 동서남북 네갈래 방향으로 이주하는 대장정(기원전 100세기 경)에 들어간다.

 

 

천산산맥에 둘러 쌓여 있는 이식쿨 호수 / 위키백과 자료

넓이 : 제주도 면적의 약 3.5배 정도 크기임. 

 

 

 

    이중에 동쪽으로 이동하던 맥족의 일족은 유목민 특유의 생활관습으로 밤하늘의 샛별(金星)을 길잡이 삼아 이주하며 산동반도에서 살고 있던 농경과 어업을 하던 예(濊)족을 만나 현 요하 근처에서 서로 동화되어 예맥족(濊貊族)을 형성하여 유목과 농경을 겸하게 되고 적봉시 근처에서 홍산문화(紅山文化)를 이룩한다.

 

    홍산문화(기원전 60~70세기)는 중국의 고대문화 보다도 훨씬 앞서 있는 문화로 현재 중국에서는 이 홍산문화를 자기네 한족(漢族) 선조들이 만든 문화라고 일부 사학자들이 주장하고 있으나, 대다수의 중국역사학자들도 이 홍산문화는 우리 한민족의 선조인 예맥족이 만든 문화라고 인정하고 있다.

 

  이 샛별을 뜻하는 초본아타라는 말은 이주경로 곳곳에 졸본(卒本) 또는 홀본(忽本)이라는 말로 이두문자화되어 지명(地名)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이 지명을 역으로 추적하면 예맥족중 맥족의 이주경로를 파악할 수 있다.

 

 

  이식쿨 호수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던 맥족의 갈래는 추위 때문에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중고위도 지방을 따라 바이칼 호수 근처에서 터를 잡고 있다가 기후변화로 날씨가 추워지자 차츰 남하하여 만주 동북방 일대에서 고조선족(古朝鮮族)으로 분화된다.

 

  요하와 만주 동북방에서 한 갈래에 나온 예맥족과 고조선족의 세력다툼은 어떤 때에는 예맥족이 우세하다가 어떤 때에는 고조선족이 우위를 점하며 나라를 만들고는 하다가 나중에 서로 흡수동화되면서  북부여, 읍루, 숙신, 고조선, 동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등의 나라 이름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단군신화에서 나오는 곰과 호랑이의 중 곰은 곰토템을 가진 고조선족을 뜻하고, 호랑이는 맥(貊)토템을 가진 예맥족을 뜻하는 말이나 .....우리 한민족의 조상들이 곰토템을 가진 고조선족의 후예라고만 알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를 축소하는 것이 되며 위에서 설명드린 바와 같이 호랑이 토템을 가진 예맥족과 곰토템을 가진 고조선족이 서로 동화합류되어 우리 한민족의 조상이 된 것이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면 비류, 부여 등의 지명은 예맥족이 숭상하던 태양신 "밝음","불"에서 온 말이며, 곰나루(熊津) 등의 지명은 곰토템의 고조선족의 원시신앙에서 나온 말이다.

 

   흔히 무가((巫家)에서 사용하는 산신도(山神圖)나 우리의 원시민속신앙을 수용한 불교의 산신각, 칠성각 등에서 곰과 함께 있는 산신도(山神圖)를 찾아볼 수 없고, 호랑이와 함께 있는 산신도를 볼 수 있는 것은 호랑이 토템의 예맥족의 후손 중에서 나라를 세우거나

 

정권을 잡은 기간이 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곰토템의 산신도들은 만주 동북방의 산간지대와 시베리아 동남부의 농경을 겸하고 있는 수렵족들에게서 요지음도 볼 수 있는 데, 이는 고조선족의 일부가 남하하지 않고 그곳에 잔류하고 있음을 뜻하며, 고대에는 교통과 정보통신의 발달이 미약하여 국가의 권력이 이 지방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음으로 유추하여 볼 수 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명선 : 간송미술관 소장품

예서체(隸書體) 중 고예(古隸)    115.2 * 57.8 cm

 

 

 

 

 

 

명선(茗禪)은 추사 김정희가 준 초의선사님의 호

 

 

    세한도(세한도)와 함께 추사(추사) 김정희(김정희. 1786-1856)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명선'(명선)이라는 서예 작품의 제목 '명선'은 다산(다산) 정약용(정약용. 1762-1836)과 교류가 남달랐던 조선후기 승려요 다성(다성)이라 일컫는 초의선사(초의선사. 1786-1866)에게 추사가 지어 선물한 호(호)인 것으로 밝혀졌다.


   지금까지 미술사ㆍ서예사 연구자들이 '명선'이라는 말을 '차를 마시며 선정에 들다'는 문장 그대로의 뜻으로 풀면서 차(茶=茗)와 선(禪)의 일치 정신을 높이 사서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이런 글씨를 써서 주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한국 한문학 전공인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정민 교수는 다산이 전라도 강진 유배시절에 키운 제자 중 한 명인 황상(黃裳. 1788-1863?)이라는 사람의 글을 모은 문집 '치원유고'(梔園遺稿)에 수록된 시로 이런 사실을 증명했다.

   정 교수는 최근 발간된 한국학 전문계간지 '문헌과 해석' 2007년 봄호에 기고한 '차를 청하는 글 : 다산의 걸명(乞茗) 시문'이라는 논문에서 다산이 차를 즐긴 인물임을 다각도로 조명하면서 황상이 초의 스님에게 보낸 '걸명시'(乞茗詩. 차를 요구하는 시)를 주목했다.

   이 시에서 황상은 "명선(茗禪)이란 좋은 이름 학사(추사)께서 주시었고"라고 읊으면서, 이 구절을 스스로 부연하기를 "추사가 명선이란 호를 (초의선사에게) 주었다"고 명기를 했다.

   정 교수는 "몇 해 전 위작 시비에 휘말렸던 추사의 '명선'이라는 작품의 이해에도 이 시는 결정적인 증언을 한다"면서 "이 '명선'이 다름 아닌 추사가 초의에게 준 호였음을 이 시가 밝히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명선이 초의의 호임이 지금에서야 밝혀진 이상 이 작품은 가짜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간송미술관 소장품인 이 '명선'은 현존하는 추사 글씨 작품 중 가장 크며(57.8 x 115.2㎝), '명선'이란 타이틀 글씨를 중심으로 그 옆에는 "초의가 자신이 만든 차를 부쳐왔는데 몽정차나 로아차에 못지 않으니 이를 써서 보답한다"는 잔 글씨로 쓴 구절이 발견된다.

   미술사학자인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명선(명선)은 차선(차선)과 같은 말로서 결국은 차와 선의 일치를 칭송한 의미 정도로 보았다"면서 "명선이 추사가 초의에게 준 호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정 교수는 이번 글에서 다산이 즐겼다는 '구증구포(九蒸九曝)의 차'는 떡잎 차가 아니라 차떡잎을 여러 번 찌고 말려 분말을 내어 반죽해 말린 차병(茶餠. 떡차)임을 강진 유배에 풀려난 지 10년이 더 지난 다산이 69세가 되던 1830년에 강진 백운동에 있던 이덕휘(李德輝)에게 보낸 걸명시(乞茗詩)를 통해 밝혀냈다.

   이 편지에서 다산은 삼증삼쇄(三蒸三쇄<日+麗>), 즉,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그것을 절구에 빻아 곱게 가루를 내서 돌샘에서 나는 물로 가루를 반죽해 진흙처럼 갠 다음, 이를 다시 작게 떼어 떡으로 굳혀 줄 것을 부탁했다. 삼증삼쇄는 구증구포의 공정을 줄인 것이므로 구증구포의 차 역시 '떡차'가 된다.

   지금까지 '구증구포'라는 말을 한국 다도계에서는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린 떡잎을 다려낸 차' 정도로 푸는가 하면, 이를 이용한 차 제조법이 통용되기도 한다 .

 

 

 

                                                        - 네이버 블로그 <구암카페>의 구암님의 글 중에서 

 

 

 

   

추사 김정희선생의 명선(茗禪)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 ~ 1856)선생은 ‘추사(秋史)이전에 추사없고, 추사이후에 추사없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서예가이다. 또한 추사선생은 경학자, 금석학자, 서예가 등 다방면에 걸쳐 우리문화의 금자탑을 쌓았다고 볼 수가 있다. 어찌보면 ‘추사(秋史)’라는 그의 아호처럼 우리문화의 가을역사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가신 분이기도 하다. 특히 아암 혜장선사와 다산 정약용선생으로 이어서 초의선사와 함께 한국차문화 부흥기의 중심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최고봉의 인물간의 만남이기도 하지만, 차문화를 품격화한 분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초의선사에게 차를 받고, 그 고마움을 자신이 잘하는 글씨로 답하였다고 전해지는 ‘명선(禪)’이다.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말처럼, 차(茶)와 선(禪)이 둘이 아닌 앞서가는 사람들의 멋과 여유가 느껴진다.


 



추사 김정희선생의 ‘명선(茗禪)’



돌아가신 서정주시인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추녀 위에 새 달 뜨는 저녁이면은

난초(蘭草) 잘 그린 옛 어룬들 그리워.

하룻밤에 한 사람씩 따로 따로 생각하며

추사(秋史)는 곱배기로 약주(藥酒)술을 드셨지.

한 곱배길 먼저 따뤄 고스레로 뿌리고

그 다음엔 물 마시는 달 마냥으로

곱땃스레 곱빼기로 약주(藥酒)술을 드셨지.


세한도의 의기와 부작란도의 꼿꼿한 붓맛이 그리워진다. 우리나라의 대가로서만이 아니라, 추사가 무엇보다 유명한 건, 자기다운 개성을 잘 드러냈기 때문이라고 본다. 수천년간 중국서예와 법첩의 한계에서 벗어나, 추사다운 글과 정신을 잘 표출하였기 때문이다.

 

 

 

 

추사 김정희선생의 '불이선란도' 일명 부작란도(不作蘭圖)

 

   얼마전 서울에 갔다가 봉은사에 들러 추사말년의 대표작중의 하나인 판전(版殿)글씨를 사진찍어왔다. 돌아가시던 해 귀양에서 풀려나 과천에 은거하며 병중에 쓰셨지만, 고졸한 맛과 멋이 잘 어울려져 좋았다.


 



추사 김정희선생의 봉은사 ‘판전(版殿)’

 

 

                             

                                    - 다음 카페 <보이차 법원> Watec 님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