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호는 자하(紫霞) 또는 경수당(警修堂), 자는 한수(漢叟), 할아버지는 신유(申嚅)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신대승(申大升)이다. 어머니는 이영록(李永祿)의 딸로 1769(영조 45)∼1845(헌종 11)의 기간에 활동했던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화가이고 서예가이다.
자하(紫霞) 신위(申緯)는 시와 서예 그리고 그림의 대가로 특히 시에 있어서는 조선 제일의 대가라고 불리울만큼 유명했다.
신위는 1799년(정조 23) 춘당대문과에 을과로 급제, 초계문신(抄啓文臣 : 당하관 중에서 제술과 강독에 의해 특별히 뽑힌 문신)에 발탁되었다.
1812년(순조 12) 진주 겸 주청사(陳奏兼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갔는데, 이 때 중국의 학문과 문학을 실지로 확인하면서 자신의 안목을 넓히는 기회로 삼아 중국의 학자·문인과 교류를 돈독히 했다.
그리고 1814년에 병조참지를 거쳐, 이듬해 곡산부사로 나갔다. 이 때 그는 피폐한 농촌의 현실을 확인하고 농민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조정에 세금을 탕감해달라는 탄원을 하기도 하였다.
1816년 승지를 거쳐, 1818년에 다시 춘천부사로 나갔으며 춘천부사 재직시 그 지방의 토호들의 횡포를 막기 위하여 맞서다 파직까지 당하기도 한다. 1822년 병조참판에 올랐으나 당쟁의 여파로 다시 파직된 뒤, 곧 복관되어 1828년에는 강화유수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윤상도(尹尙度)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나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1832년 다시 도승지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생활이 순탄치는 않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대산의 평신진 첨사로 오게 된다. 평신진은 우리고장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 반곡마을에 소재하는 진지로 충청도 북서부 해안 방어를 주 임무로 하던 곳이다. 종 3품의 첨사(僉使)가 있었고 주변의 목장을 함께 관리했던 해안의 군사진지로 왜구에 대한 방어와 세곡미를 운반하던 선박의 보호 및 안전항해를 위한 인도를 주로 했다.
신위와 우리고장과의 인연을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순조실록 32년(1832) 11월 1일조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도승지 신위(申緯)가 연전의 정세(情勢)로써 스스로 인책(引責)하니, 여러 차례 칙교(飭敎)를 내렸으나 끝내 나와서 숙사(肅謝)하지 아니하자, 하교하기를,
“당초에 논척(論斥)을 당한 두 사람이 이제는 모두 밝게 분변되어 구애가 없이 되었고, 말한 자는 저절로 무망(誣罔)이 되어 날조(捏造)였음이 입증되었다. 그렇다면 그 정세는 신원(伸冤)을 기필하지 않아도 저절로 신원이 된 것인데, 이제 때도 지나고 일도 끝나버린 뒤에 또다시 그 일을 끌어내어 억지로 인의(引義)하려 하니, 그것이 은총을 얻으려는 데 돌아감은 유독 생각지 못하는가? 연일 서로 버티고 응명할 뜻이 없으니, 매우 온당치 못한 일이다. 정세는 정세고 분의(分義)는 분의인만큼 사체가 있는 바에 줄곧 용서할 수는 없으니, 도승지 신위를 평신 첨사(平薪僉使)에 제수하라.” 』
왕명으로 평신진 첨사로 부임한 신위는 그의 발자취로 대산에 있는 해월사에 편액시와 대산지방을 주제로 하는 한시 7편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에 있는 유명한 연못 자하연도 그의 호 자하(紫霞)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위는 관료로서 보다는 시와 서예, 그림 부문에서 더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사라져가는 악부(樂府)를 보존하려 했는데, 한역한 <소악부 小樂府>와 시사평(詩史評)을 한 <동인논시 東人論詩> 35수 그리고 우리 나라의 관우희(觀優戱)를 읊은 <관극시 觀劇詩>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그의 시를 가리켜 김택영(金澤榮)은 시사적(詩史的)인 위치로 볼 때 500년 이래의 대가라고 칭송하였다. 또한, 그림은 산수화와 함께 묵죽에 능하였다. 이정(李霆)·유덕장(柳德章)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손꼽힌다. 대표적 작품으로 <방대도 訪戴圖>와 <묵죽도>가 전한다. 또한, 서예 부문에서는 동기창체(董其昌體)를 따랐으며, 조선시대에 이 서체가 유행하는 데 계도적 구실을 하였다.
저서로 ≪경수당전고≫와 김택영이 600여 수를 정선한 ≪자하시집 紫霞詩集≫이 간행되어 전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