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정토불교의 세계 / 제10 장 한국의 정토사상 - 1. 미타신앙의 전래와 전개

2013. 9. 24. 21:56경전 이야기

 

1. 미타신앙의 전래와 전개

 

 

                                                                    장휘옥 著/불교시대사 

 

    한국의 미타신앙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신라시대 진평왕(재위 597~631) 때 혜숙(慧宿)이 미타사를 창건하고, 선덕여왕 5년(636)에 당나라로 유학갔다가 선덕여왕 12년(643)에 귀국한 자장(慈藏)은 <아미타경소>와 <아미타경의기>를 찬술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미타정토 신앙이 본격적으로 신라인의 생활이나 사상에 영향을 미친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즉 문무왕대(재위 742~765년)이후라고 한다. 신라의 미타정토 신앙을 고찰할 수 있는 주요 자료는 <삼국유사>다. 여기에는 열 개의 미타정토 관계 설화가 있는데, 이 열 개의 설화 가운데 대표적인 것 한 가지만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백월산의 미타성불 설화 백월산 선천촌에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라는 두 청년이 살았다. 부득의 아버지 이름은 월장, 어머니는 승미였으며, 박박의 아버지 이름은 수범, 어머니는 범마라 하였다. 두 사람은 풍골이 비범하고 세간을 초월하려는 기백이 있어 좋은 친구가 되었다. 20살이 되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부득은 회진암에 거주하고, 박박은 유리광사에 살았다. 두 사람은 다같이 처자와 함께 살면서 생계를 이어갔지만 수행하기 위해 속세를 떠나려는 생각을 잠시도 버리지 않았다. 드디어 두 사람은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세속을 버리고 백월산의 무등곡에 은거하였다. 각각 다른 암자에 거주하면서 부득은 부지런히 미륵을 찾고 박박은 미타를 염불했다.

 

    3년이 채 되지 않는 성덕왕 8년(709) 어느 날, 해질 무렵에 20살 정도 된 묘령의 낭자가 갑자기 박박을 찾아와서 하룻밤 재워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박박은 사찰은 청정함을 지키는 것을 의무로 삼는 곳이라 대답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낭자는 이번에는 부득을 찾아가 부탁했다. 그러나 부득은 이곳은 낭자가 더럽힐 곳이 아니지만 중생의 뜻을 따르는 것도 보살행의 하나라고 하면서 그녀를 암자로 맞아들였다.

 

   밤이 되자 부득은 등불을 희미하게 한 수 끊임없이 염불을 계속했다. 밤이 깊어졌을 때, 낭자는 부득을 불러 산기가 있으니 목욕물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 부득은 낭자를 가엾이 여겨 조용히 불을 밝히니 마침내 해산하였다. 또한 목욕시켜 주기를 원하므로 부득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솟아올랐으나 그것보다는 가엾다는 생각이 먼저 떠올라 욕탕을 준비하여 낭자를 그 속에 앉히고 더운물로 목욕시켰다. 그러자 욕조의 더운물에서 향기가 나며 더운물은 금색으로 변하였다. 부득이 놀라자 낭자는 '저의 스승님도 여기에 목욕하시지요.' 하므로 부득은 할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갑자기 정신이 맑아지고 피부가 금색으로 변했으며, 그 곁을 보니 홀연히 연대(蓮臺) 하나가 있었다. 낭자는 거기에 앉을 것을 권하면서 '저는 관세음보살입니다. 대사님을 도와서 대보리(大菩提)를 성취시키기 위해 온 것입니다.' 하고는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한편 박박은 부득이 어젯밤 틀림없이 파계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찾아와 보니, 부득은 연대에 앉아 미륵상이 되어 광명을 발하면서 몸은 금색으로 빛났다. 박박은 엉겁결에 무릎을 끊고 예배하면서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었더니 그 이유를 상세히 말해 주었다. 박박은 한숨을 쉬면서 '나는 마음에 장애가 있어 대성(大聖)을 만날 행운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냉대해 버렸다. 대덕(大德)은 참으로 자비심이 많아 나보다 먼저 도(道)를 이루었으니 옛날의 언약을 잊지 말고 나를 도와주게.' 하였다. 부득은 욕조에 물이 아직 남아 있으니 거기에 목욕하라고 일러주었다. 박박이 목욕을 하자 무량수불이 되어 두 부처님은 의연히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서로 앞을 다투어 달려와 예배하고 감탄하면서 '희귀한 일이다. 희귀한 일이다.' 하였다.

 

    두 부처님은 법요(法要)를 설하고는 구름을 타고 가 버렸다. 경덕왕 14년(755), 이 사건을 들은 왕은 16년(757)에 사람을 보내어 대가람을 창건하고 백월산 남사라 불렀다. 23년(764)에 절을 완성하고 미륵존상을 조성하여 금당에 안치하여 액호(額號)를 '현신성도미륵지전(現身成道彌勒之殿)'이라 했으며, 또한 미타상을 조성하여 강당에 안치하고 그 액호를 '현신성도무량수전(現身成道無量壽殿)'이라 하였다. (<삼국유사> 권3, 남백월이성)

 

       이 아야기는 성덕왕 8년(709)의 사건이다. 구도자의 위선적인 수행태도를 풍자하면서 특히 보살행을 강조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즉 부득이 낭자를 도와줄 때 '중생의 뜻에 따르는 것도 보살행의 하나'라 한 것과, 박박이 '나는 마음에 장애가 있어 대성을 만날 행운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냉대해 버렸다. 대덕은 참으로 자비심이 많아 나보다 먼저 도를 이루었다'고 한 것을 통해, 부득이 박박보다 먼저 도를 얻은 이유를 보살의 대비행(大悲行)으로 돌리고 있다.

 

        또한 이 설화는 서민적인 미타신앙을 볼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먼저 사문의 출신 신분을 보면, 백월산 선천촌 사람으로서 그들 부모의 이름까지 전하므로, 지방의 그렇게 신분이 낮지 않은 가난한 집안의 청년들, 즉 서민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한편 두 사람이 승려가 되어 정토를 찾은 동기가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 하고 있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이 세상을 예토라고까지는 간주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인생을 무상한 것이라 보고, 무상한 인생을 버리고 영원한 정토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되어 있다. 수행법으로는 '부득은 부지런히 미륵을 찾고 박박은 미타를 예념했다.'는 것과, '밤이 되자 부득은 …… 끊임없이 염불을 계속했다' 고 하는 것에서 두 사람은 왕생의 수단으로 구칭(口稱) 염불에 전념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왕생의 모습을 두 사람은 현신(現身)으로 성불했으며, 법요를 설하고 구름을 타고 갔다고 되어 있으므로 현신왕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관음보살의 등장으로 두 사람이 차례로 각각 미륵과 미타로 성불했다는 것은, 당시 적어도 일부에서는 미륵·미타·관음신앙이 밀착된 형태로 신앙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경덕왕이 이 사실을 듣고 대가람을 창건함과 동시에 미륵·미타존상을 조성하여 각각 금당과 강당에 안치하고, 또한 그곳에 각각 '현신성도미륵지전' '현신성도무량수전'이라는 사액을 내렸다는 것은 경덕왕대에는 정토신앙이 절정에 달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의 설화는 대체로 신라 미타신앙의 일반적 특징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특히 서민들 사이에는 신앙하던 미륵신앙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삼국유사>에 있는 열 개의 미타정토 관계 설화에 의하면, 신라의 미타신앙은 시대가 후대로 내려가고 신앙이 점차로 퍼짐에 따라 수행면에서는 적극적이면서도 쉬운 방법인 염불을 택함이 확실히 나타내며, 정식적인 면에서는 점차로 염세적으로 흘러 '예토를 싫어하고 정토를 간절히 원하는' 정토교 본래의 특색을 농후하게 띠어 간다.

 

        다시 말하면 초기의 문무왕대에서 전성기의 경덕왕대를 거쳐 애장왕(혹은 헌덕왕)대에 이르면 수행자의 신분은 귀족에서 평민·천민으로, 수행의 방법은 어려운 관법(觀法)에서 쉬운 구칭염불로, 또한 개인수행에서 집단수행으로, 왕생의 실례는 사후왕생에서 현신(現身)왕생으로 바뀌어 가며, 또한 인생의 무상을 자각하는 등의 염세적인 경향을 띤다. 이와 같은 신라 미타신앙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내용들은 거의 대부분이 중국 정토교의 전개·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일반적 추세와 그 궤를 같이하지만, 그중에서 특히 신라 특유의 특징은 여인과 최하층 계급의 왕생을 인정하는 것과 현신으로 왕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 내의 일천제성불 사상이나 삼계교(三階敎)의 천인왕생 사상, 밀교의 즉신(卽身)성불 사상 등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또한 신라를 불국토라고 하는 다음과 같은 사상의 영향도 생각할 수 있다. 신라의 불국토설에 관한 기사는 <삼국유사>의 여기저기에 보이는데, 예를 들면 아도기라조(阿道基羅)에는 신라 일곱 곳의 절터는 모두 석가모니불 이전의 과거불이 계시던 절터로서 법수(法水 ; 불교)가 장류(長流 ; 유행)하던 곳이라 하고, 일곱 곳의 절 이름을 기재하고 있다. 또 황룡사장육조에는 자장이 당나라에 들어가 오대산에 이르자 문수보살이 몸을 나투어 비밀스러운 법을 주면서 "너의 나라 황룡사는 석가불과 가섭불이 강연한 적이 있던 곳으로서 연좌석이 아직 남아있다. 그러므로 천축의 무우왕이 황철광 약 천 근을 모아서 바다에 띄우니 천 삼백여 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너의 나라에 도착하여 그 절을 완성시켰다. 생각건대 이것은 위대한 인연이 그렇게 한 것이다."고 했다.

 

      이러한 것들은 현실중시의 이상국가, 즉 정토를 이 땅에 건립하려는 신라인의 정열적인 발상에서 생겨난 것이겠지만, 이러한 국가관 아래서 현신 그대로 왕생한다는 설화가 만들어진 것은 자연적인 귀결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고려시대 미타정토 사상은 선종을 위시하여 화엄·법상·천태·밀교 등의 각 종파에 폭넓게 받아들여졌으나, 하나의 독립된 종파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출처 : 미주현대불교
글쓴이 : 파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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