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정토불교의 세계 / 제10 장 한국의 정토사상 - 2. 신라의 정토교학의 전개

2013. 9. 24. 21:56경전 이야기

 

2. 신라의 정토교학의 전개

 

 

                                                                             장휘옥 著/불교시대사

 

  6,7세기경 중국정토교학은 담란·도작·선도에 의해 크게 선양되었으며, 신라에서는 원효(元曉)·법위(法位)·현일(玄一)·경흥(憬興)·의적(義寂)·원측(圓測) 등이 배출되어 신라 정토교학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당시 일본은 나라(奈良)·헤이안(平安)시대로, 지광(智光)·지경(智憬)·선주(善珠)·공야(空也)·양원(良源)·원신(源信)등이 정토교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중국 정토사상과 신라 정토사상을 비교할 때, 중국의 정토사상은 <관무량수경> 중심인 것에 반해, 신라의 정토사상은 <무량수경>중심이라는 의견이 있다. 이러한 견해는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마 여러 가지 장소목록(章疎目錄)에 따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신라의 경우 <관무량수경>의 주석이 적다고 해서 경시되어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장소목록에 의하면 ('미타정토 관계 저술'참조)신라의 <관무량수경>에 관한 주석서는 다섯 종으로서, <무량수경>의 주석서 13종, <아미타경>의 주석서 10종에 비해 양적으로는 분명히 적다. 그러나 이미 본 것처럼 신앙면에서는 <관무량수경>의 16관법을 중시하고 실제로 행하였다는 점에서 보면, <관무량수경>에 대한 연구가 다른 경에 비해 경시되었다고 하기는 힘들다.

   참고로 일본의 경우를 보면, 나라시대의 정창원(正倉院) 문서에서 정토관계 서적 사경(寫經) 건수에 따르면 먼저 경론의 사경 202건 가운데 <아미타경>이 69건, 그 이역(異譯)인 <칭찬정토경>이 21건으로서 두 경의 사경이 압도적으로 많다. 주석서의 경우 사경된 주석서는 14가지인데, 그중 9가지가 <무량수경>이다.

   즉 원효의 <무량수경종요>, 의적의 <양권무량수경소> <양권무량수경강목>(저자 불명), 현일의 <양권무량수경기>와 <양권무량수경소>와 <무량수경술기>, 법위의 <무량수경의소>, 당나라 정매(靖邁)의 <쌍관경소> <양권경자석>(저자불명)이며, 사경 건수는 87건 가운데 43건이다.

   이것에 비해 <아미타경>의 주석서는 <아미타경소>와 <주아미타경> 두 종으로 사경은 4권, <칭찬정토경>(唐 靖邁)의 주석서는 <칭찬정토경소>한 종으로 사경은 19건, <관무량수경>의 주석서는 당나라 선도의 <관무량수경>뿐으로 사경 8건, 그리고 원효의 <반주삼매경략기>의 사경 13건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무량수경>에 관한 주석서와 사경 건수가 가장 많고, 또한 신라 학자들의 저술이 매우 많다는 점에서 일본 정토교학의 배경에는 신라 학자들의 지대한 영향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영향은 나라시대 후반에 들어 더욱 현저하게 나타났다.

   신라 정토사상의 계통에는 크게 정영사 혜원 계통과 현장·자은의 유식 계통 두 개의 흐름이 있는데, 전자에는 자장·원효·의상·의적·법위·현일 등이 속하고, 후자에는 원측·경흥·태현(太賢)·도륜(道倫) 등이 속하며, 중국의 도작·선도류의 <관무량수경>중심의 정토사상은 의적 외에도 도입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신라의 정토사상이 이처럼 분류되는 주된 이유는, 위의 여러 사상가들이 화엄 혹은 법상(法相)을 주로 연구하였으며, 반드시 정토교에만 전념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정토사상도 각자가 전공하는 교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6,7세기에 중국에서 성행하던 여러 종파의 교학이 신라에 전해짐으로써 당시 여러 사상가들은 대부분 선진국의 문물을 섭취하려는 의도에서 정토경전을 주석했다고 추정한다.

 

미타정토 관계의 저술

 

신라시대 정토 관계 저술은 여러 종류의 경전목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자장 <아미타경소> 1권, <아미타경의기> 1권.

원측 <아미타경소> 1권, <무량수경소> 3권.

원효 <아미타경소> 1권, <아미타경통찬소> 2권, <아미타경소> 1권, <무량수경종요> 1권, <무량수경사기>1권, <무량수경과간>, <유심안락도> 1권,

의상 <아미타경의기> 1권,

경흥 <아미타경략기> 1권, <무량수경연의술문찬> 3권, <무량수경소> 3권, <관무량수경소> 2권. 의적 <무량수경소> 3권, <무량수경술의기> 3권, <관무량수경강요>1권, <관무량수경소> 1권.

도증(調證) <서방극락요찬> 1권.

태현 <아미타경고적기> 1권, <무량수경고적기> 1권, <관무량수경고적기>1권, <칭찬정토경고적기>1권, <정토총료간> 1권.

법위 <무량수경의소> 2권. 현일 <아미타경소> 1권, <무량수경기(소)> 2권, <관무량수경기> 1권, <수원왕생경기> 1권.

도륜 <아미타경소> 1권. 영인(靈因) <무량수경소> 1권.

 

그러나 이들 저술은 현재 거이 산일되었으며, 완본으로 현존하는 것은 불과 원효의 <무량수경종요> <아미타경소>, 원효의 저술로 기록되어 있는 <유심안락도>, 경흥의 <무량수경연의술문찬>, 현일의 <무량수경기>(단 상권뿐임) 5부다. 이외에 법위의 <무량수경의소>와 의적의 <무량수경술의기>가 복원되어 있다.

   이 중에서 <유심안락도>는 종래에는 원효의 찬술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이 많았지만 지금은 원효의 저술이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현재 미타관계 저술이 남아 있는 원효·법위·현일·경흥·의적의 전기를 간략히 살펴보자. 원효(617~686)는 동문인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결심했지만 도중에 단념하고 귀국하여 주로 경주의 분황사에 머물면서 저술활동에 힘썼다. 그는 파계하여 설총을 낳은 후, 속복으로 갈아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불렀다. 원효는 연극배우들이 연기할 때 쓰는 표주박 같은 것을 만들어 그것을 <화엄경>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日切無碍人 一道出生死 ; 일체의 무애인은 같은 길을 통해 생사를 초월한다)라는 구절에 따라 '무애'라 명명하고, 무애가를 지어 세간에 퍼뜨렸다. 그리고 '무애'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며 민중을 교화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은 그의 교화에 힘입어 불타의 이름을 알고, 나무(南無)를 외웠다고 한다. 신라불교의 대중화는 이때에 그 절정에 달했다.

   원효는 86권에 달하는 많은 책을 저술했다고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위의 미타관계 저술 외어 <화엄경소> 10권 중의 1권, <법화종요> 1권, <열반경종요> 1권 등 모두 23권이다. 이들 저술을 보면 원효는 대승불교 사상 전반에 걸쳐 폭넓게 연구한 석학이 었음을 알 수 있다. 원효사상의 근저에는 최종적으로 불교의 모든 교설을 긍정하고 융화화는 화쟁사상이 깔려 있으며, 그는 이러한 입장에서 모든 경론을 주석하고 있다.

   법위(法位)의 생애는 거의 알 수 없다. 그러나 경흥의 <무량수경연의술문찬>에서 가끔 그의 설을 논파한 것과, 현일의 <무량수경소>가 거의 법위의 설에 의존한 것에서, 그는 경흥이나 현일보다 선배였으며, 원효와 같은 시대인 7세기경에 활약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저술 <무량수경의소>(복원본)에 의하면, 법위는 정영사 혜원의 사상을 근거로 정토사상을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일의 저술은 정창원(正創院) 문서에 의하면, 천평 12년 (748)에 사경되었으므로, 그는 적어도 그 이전 사람이었음을 확실하다. 현일에게는 위의 아미타관계 저술 외에 <법화경소> 8권, <대열반경료간> 1권 등 많은 저술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무량수경기> 2권 가운데 상권만 남아 있다. 그의 <무량수경기>는 법위의 <무량수경의소>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그의 정토사상도 법위와 마찬가지로 정영사 혜원의 사상을 근거로 한다.

   경흥의 전기는 상세히 알 수 없지만 <삼국유사> 권5 경흥우성(憬興遇聖)조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의 유명(遺命)으로 신문왕 원년(681)에 국사(國師)가 되어 삼랑사(三郞寺)에 머물며 저술에 전념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위의 미타관계 저술 외에 <법화경소> 16권, <열반경소> 14권 등 많은 저술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무량수경연의술문찬> 3권과 <삼미륵경소> 1권만이 전한다.

   경흥은 유가·유식학자인데, <무량수경연의술문찬>에서 정영사 혜원이나 법위·의적의 설을 파척하였으므로, 그의 정토사상은 혜원계통의 정토학자에 대항해서 유식 계통의 정토사상을 선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의적의 생애도 거의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유사> 권4 의상전교(義湘傳敎)조에 의하면, 그는 해동화엄의 시조라 불리는 의상(620~702)의 십대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위의 미타관계 저술 외에 <대반야경강요> 1권, <열반경소> 16권 등 많은 책을 저술했지만, 현재 <법화경론술기> 3권 가운데 상권과 <범망경보살계본소> 3권만이 전하며, <무량수경술의기>는 복원되었다. 이 복원본에 의하면, 의적의 정토사상은 정영사 혜원 계통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한편으로는 중국의 선도와 회감 등의 사상도 도입하고 있다.

 

 

 

 

 

 

출처 : 미주현대불교
글쓴이 : 파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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